유성구 성북동에 가면 은진송씨열녀정려가 있다. 성북동 마을에서 성북산성으로 넘어가는 길가 산모퉁이에 있는 이 정려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에 이곳 마을에 여철영이라는 사람이 살고있었다. 그는 넉넉한 살림이 아니기도 했지만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어서 쉴 틈 없이 일을 했다. 그렇게 하여도 풍족한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다. 여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낮에는 하루 종일 밭에 나가 곡식을 가꾸고 밤이되면 사랑방에서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든지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마치 일을 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이 보였다. 이처럼 부지런한데다가 용모도 준수하고 나무랄데가 없는 청년이었다. 거기다가 부모에게 효성도 지극한 사람이어서 마을에서 평판이 좋았다.
그런데 이 청년은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어디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웬일인지 중매가 들어오면 혼사가 다 이루어졌다가도 한쪽에서 반대하여 깨지고 하였다. 이쪽이 좋다고하면 저쪽에서 싫다고하고, 이쪽이 싫다하면 저쪽이 좋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인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어느 해였다. 이웃 마을에 사는 송씨 집안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그처럼 이루어지지 않던 혼사가 단번에 이루어졌다. 은진송씨 집안의 아름답게 자란 처녀였다. 양쪽 집에서는 서둘러서 혼인식을 올렸다. 마을 사람들은 너무 잘 어울리는 신랑신부라고 하면서 연분은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여씨와 송씨는 정말로 다정한 한쌍의 원앙새 같았다. 남편되는 여씨는 부인 송씨에게서 눈 한번 떼는 일이 없었다. 아내가 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면 여씨는 달려가 아내를 도와주었고, 남편이 힘든 일을 할때면 아내 송씨가 달려가 남편이 하는 일을 거들었다. 그들은 집안에서 일을 할 때나 들에서 일을 할 때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함께 일을 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너무나 정답게 살아가니까 동네 사람들 가운데는 더러 시샘을 하는 이들도 있고 비아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둘은 정답게 살아가는 한쌍의 부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논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고 돌아온 여씨가 한축을 하며 자리에 누웠다. 이마가 불덩어리 같았다. 송씨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허둥대다가 의원을 불러왔다. 그러나 의원이 맥을 짚어보고 처방을 했는데도 별로 차도가 없었다. 송씨는 남편을 위하여 좋다는 것은 다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송씨는 안타까웠다. 자기가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남편 대신 자기가 앓아 눕고 싶었다. 송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편 곁에서 시중을 들며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다. 남편 여씨는 그 뒤 며칠되지 않아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송씨는 해가 까맣게 보이고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는 모두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송씨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넋이 빠져 나간 사람 같았다.
그런 송씨는 끝내 남편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목을 메어 자살을 하고 말았다. 송씨가 죽은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죽은지 닷새가 되는 여씨가 부시시 눈을 뜬 것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며 왜 우느냐고 물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 하자 여씨는 통곡을 하고 말았다. 여씨에 의하면,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내 송씨가 쫓아오더니, "여보! 당신이 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하고 떠미는 바람에 여씨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송씨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살아서 남편을 지극하게 사랑하던 송씨는 죽어서도 남편을 구하고 남편이 가야할 길을 자신이 대신 걸어간 것이었다.
여씨는 아내의 무덤을 양지쪽에 마련하고, 틈만 나면 무덤을 돌보면서 살았다. 그는 아내가 살았을 때나 마찬가지로 아내를 잊지 않고 사랑하였다. 이런 사실을 본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 입에서 저 사람 입으로 번져나가 마침내는 온나라에 퍼져 나갔다. 나라에서는 1804년 10월에 여철영의 부인 은진송씨에게 정려를 내렸다.
유성문화원-대전의 역사-구전설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