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진정 두려운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그 어떤 설교자들보다 지옥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지옥의 실제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심정은 하나 뿐이었을 것입니다.
"제발 지옥에는 가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지옥에 보내실 수 있나요?” 라고 묻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 어리석습니다. 무엇이 정말 두려운 것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해야 할 문제는 가난이나 실패나 환난이 아닙니다. 일들이 잘 되고 사람들이 환호할 때가 더 두려운 순간입니다.
아이들을 유괴하는 유괴범들이 처음에는 아이의 부모보다 더 친절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아이는 유괴범을 따라 갑니다. 스스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마귀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유혹을 받아 잘못된 길로 가는 장면이 나오면 관객들은 긴장합니다. 우리가 유혹에 흔들려 은밀한 죄에 빠질 때, 천국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허다히 많은 증인들의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돈 많으면 행복해 하고 돈 없으면 불행해 합니다. 일이 마음 먹은대로 되면 성공했다고 기뻐하고,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낙심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이 소알 땅으로 갈 때, 그는 넓은 땅과 초지, 번성한 소돔 성과 고모라 성만 보았습니다. 그 땅이 너무나 좋아보였기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인도함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너무 비참했습니다. 모든 재산 다 잃어 버렸고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고 딸들과 관계를 맺어 후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해야 할 때는 돈 세고 앉아 있을 때입니다. TV 앞에서 운동경기를 보거나 연속극을 볼 때입니다. 그 순간이 우리가 영적으로 가장 약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사님은 예배나 성경공부 갈 때는 몸이 천근이지만 여행가고 쇼핑하고 먹고 노는 일에는 몸이 솜털보다 더 가벼워진답니다. 아침까지 드러누워 있다가도 누가 쇼핑하고 점심먹자고 전화만 해 주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납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삶의 무의미함은 시련 속에서 고통스러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쾌락에 지쳤을 때 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현대 문명 사회가 피폐해진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분의 표현대로 ‘쾌락의 바다에서 의미가 익사했기 때문’입니다. 쾌락에 빠지는 것은 육체적 장애보다 더 두려운 일입니다.
가난이 두렵지 않고 부유해짐이 두려워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비천에 처할 줄 알고 풍부에 처할 줄 아는 비결'입니다.
-유기성 목사 칼럼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받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아멘-할렐루야!
빌립보서 4장12절 말씀 하십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