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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혁명교회 예순세 번째 예배
때: 2012. 3. 11.
곳: 마포구 서교동 빅터하우스 사무실 예배당
모인 사람: 어른11명, 아기 1명
- 오전에 새터교회 예배에서 하신 설교 요약 -
지난주에 변화에 관한 이야기와 더하기가 아닌 곱하기의 관계로 예수를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다. 실제 존재하지만 아무 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숫자 ‘0’(영)이 바로 예수님이라면 내가 어떤 모습을 가진 어떤 숫자이냐에 관계없이 그분과 곱해져서 ‘0’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을 비우는 것, 내가 죽는 것, 가장 아래로 내려가는 것, 이런 것이 ‘0’의 모습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다른 모든 것을 있게 하는 것, 나는 죽고 다른 모든 이를 살리는 것, 그럼으로써 그들 안에서 내가 영원히 사는 것, 그게 바로 ‘0’이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주 예수를 본받자는 말을 하고 산다.
본말(本末)이란 한자를 살펴보자면, 나무(木)의 아랫부분을 가리키는 본(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나무의 중심이 되는 뿌리를 말하는 것이며, 나무의 윗부분을 가리키는 말(末)은 나무의 가지처럼 이후에 생겨나는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본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위나 모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행위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따라하는 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본(本)’이 아니라 ‘말(末)’을 받는다고 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똑같이 살 수는 없다.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고, 결혼도 하지 않았어야 했고, 서른셋에 죽었어야 했다. 과연 누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본을 받는 것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그분의 본을 받아 살게 된다면 우리에게 나오는 어떤 행위든 또는 어떤 모습이든 ‘그분이 하시듯’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관옥)
- 곧 이어 새터교회 교인들과의 문답시간이 이어졌다. -
(문) 다른 가족들은 모두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데 유독 아버지만 완고하셔서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평안과 구원을 위해 하루빨리 전도하고 싶은데 무슨 대책이 없을까?
(답) 아버지를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바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전도’는 질문자가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일 뿐이지 ‘사랑’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예수로부터 배운 것은 ‘전도’가 아니라 ‘사랑’이다. 예수님도, 성모마리아도, 크리스찬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예수를 본받기 위해 기독교라는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고, 본받겠다는 사람들을 일컬어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독교를 세우라거나 크리스찬이 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아버지를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과연 예수의 생각인지, 아니면 자식인 나의 욕심인지 깊이 묵상해보면 좋겠다. 아버지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마음만 정직하게 품고 있어도 전도보다 더 큰 선물을 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햇빛이 숨는 사람 쫓아가며 비추지 않듯이, 언젠가 때가 되면(필요하다면) 아버지도 양지로 나오셔서 그 햇빛을 쬐일 것이다. 그러니 형제에겐 아버지를 반드시 전도해야 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대책이다.
(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의 신분으로서,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요즘 학교폭력과 왕따와 자살 등 심각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교사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고민이 많다. 가정에 돌아오면 주부가 되어 내 아이들도 챙겨야하는데 학교 아이들에게는 얼마만큼 관여하고 품어주어야 할 지, 그 넓이와 깊이를 조절하기 어렵다. 내가 어디까지 해야 하나?
(답) 우선 아이들을 이만큼 사랑하고 아끼는 선생님이 그 학교에 계시다는 게 정말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아이들을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이 말속에서 드러난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분량이 얼마인지 나는 모른다. 선생님도 머리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은 안다. 머리로 하는 생각은 가끔 주제를 모르고 오버하지만 몸은 정직하다. 그 몸이 허락하는 만큼이 선생님이 하실 분량이 아닌가 싶다. 몸이 고장이 나는 것은 몸이 보내는 경고신호를 머리가 애써 부정하며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분수를 잘 알고 분수만큼 정직하게 사는 것이 좋다.
(문)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까하여 다니는 직장에서 ‘신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커리큘럼 중에 길거리에 나가 행인들을 상대로 하는 ‘노방전도’과정이 있는데 거부감도 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직을 버리기엔 기도와 교제활동을 못하게 되는 아쉬움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중에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를 묵상하게 되었다. 그 사람들의 갈라짐이 과연 옳은 일인가, 잘못된 일인가?
(답) 우리 모두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연히 같은 길을 가고 있어서 도반이 되었다가 다시 가는 길을 달리해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일본에 가는 사람들이라도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싶은 사람과 목포에서 배를 타고 싶은 사람이 대전까지는 함께 갈 수 있지만 거기서부터는 갈라져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가릴 수는 없지만, ‘나’는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목포에서 배를 탈 계획을 접고 부산으로 함께 가든가, 헤어져 예정대로 목포에서 배를 타고 가든가 하는 것은 스스로가 정할 일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지는 쪽을 택한 것이고, 그분들의 선택을 답습하든, 타산지석으로 삼든, 그것이 내게 허락된 자유의지인 것이다.
(문) 그런 자유의지가 부부사이에서도 발휘될 수 있나? (웃음)
(답)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억지로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 것보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선 당연히 가능하다고 본다. 일부일처제라는 제도 안에 살면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함부로 발휘해서는 안되겠지만, ‘제도’때문에 개인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가치관’이 무시당해야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다만 모든 인연이 그렇지만 특히 부부의 연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 중에서도 가장 크고 귀한 인연이므로 그 맺어주신 뜻을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에는 그저 고통을 참아내어 정금같이 단련시키는 것 이상의 큰 열매가 있는데 바로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더 큰 축복을- 알아내는 것이다.
- 예수혁명교회 예배요약 -
관옥목인님의 책을 한권도 빠짐없이 다 읽었다는,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목회와 오페라가수 활동을 하고 있는 목사님이 한국방문길에 들러 예배를 함께 드렸다.
잠깐 그분의 간증을 들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음악을 공부하러 미국에 유학갔다가 목회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페라 가수를 하기 위해 수십 번 오디션을 보았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낙심하여 가까운 한인교회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는데 ‘네 목소리가 너의 우상이었다.’는 생생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달란트라 생각하고 인생의 전부를 걸었는데 우상이었다니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목소리를 드리겠다고 기도했더니 갑자기 제어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입에서 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방언이었다. 그 후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면 목회를 하겠다고 조건부 서원을 했는데 어느 날 환상 중에 운전석과 아내가 탄 조수석 가운데 앉아계신 하나님을 보았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 늦은 나이라 졸업하자마자 뉴저지에서 개척교회를 열고 뉴저지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 목회를 시작했는데 6개월 동안 등록하는 교인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어느 한인교회 목사님께서 12월까지도 교인이 하나도 없으면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 믿고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부목사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정말 그 후로도 교인이 한 명도 없었고 약속대로 그 교회에 가서 부목사가 되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나를 살리시려고 개척교회를 죽이신 것 같다. 그때 만일 내 뜻대로 잘됐으면 뉴저지는 변화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마 망해있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미국인들 대상의 목회를 하고 있으며 캄보디아와 베트남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지난주 심부름을 맡은 김현정님이 아직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옥께서 말씀하셨다.
(관옥) 심부름에 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이 강원도에 땅이 있어서 옥수수 농사를 짓다가 좋은 값을 쳐 주겠다는 사람에게 속아 그만 시세에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에 넘기고 말았다. 그만 홧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어느 날 기도 중에 이웃집 아무개에게 돈 천원을 갖다 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란다. 천원이면 라면도 한 개 겨우 살까말까한 적은 돈인데 그걸 갖다 줘서 뭘 어쩌란 말인지 의아해서 미적거리고 있는데 그러자니 너무 분명한 음성이어서 용기를 내어 기도 중에 들은 말씀대로 이웃집 아무개에게 천원을 갖다 줬더니 바로 이런 깨달음을 주시더라는 것이다. ‘심부름하는 놈이 심부름하는 물건이 천원짜리든 천만원짜리든 따질 일이 무엇이냐? 심부름의 내용은 주인이 정할 일이지 심부름꾼이 정할 일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자 문득 밭을 속아 판 일이 생각났고, 그 사건이 하나님의 심부름에 불과한 일이었다는 깨달음에 마음이 편해져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 ‘하나님을 알고 싶은데 알고 싶어 하면 알아지지가 않는다니 마음이 답답하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속이고 관심 없는 척 할 수는 없지 않은가?’하고 심각하게 하소연하는 자매가 있었다.
(관옥) 그 울리는 소리를 천 번 들으면 진리를 얻게 된다는 종이 바다 깊이 가라앉아 있다는 전설을 지닌 바닷가에서 한 젊은이가 진리를 얻기 위해 매일 나와 귀를 기울였다. 1년, 2년을 배회하며 기다려도 종은 울리지 않았다. 그러다 듣기를 포기하고 되돌아가려는데 그 마을 사람 하나가 와서 지난번에도 누군가 종소리를 듣고 갔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주저앉아 1년을 기다렸지만 역시 들을 수가 없었다. 이젠 습관이 되어 자신이 왜 바닷가에 나와 있는지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데 바로 그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없이는 당연히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속에 꽉 차있으면 또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통로가 막히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마음이 없어도 안 되고, 있어도 안 된다’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살다 죽으면 어떠랴? 마더 테레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안에 사랑이 있느냐, 그 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십자가 위에서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죽어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순간순간을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에게는 매 순간 목적을 이루고 사는 것이니 언제 어느 때 죽어도 ‘다 이룬 셈’이 되는 것이다.
- 오늘은 요한복음 8장 31~32절에 있는 “너희(네)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내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각자 떨어져 홀로 30분 정도 묵상하고 다시 모여 그 묵상한 것을 나누었다.
반복하며 묵상하는 과정 중에 차츰 평안해졌다는 사람과,
스스로에게나 주위사람들에게 어떤 틀을 설정해놓고 벗어나려하면 힘들어했다는 사람과,
‘내 말에 거하고’,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는’ 모든 과정이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람과,
한결 하나님과 가까워진 느낌,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사람과,
여러 사람 앞에서 속 얘기를 하자니 긴장감은 있었지만 실컷 울고 났을 때의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람과,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새삼 항상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일러주시는 것 같았다는 사람과,
늦게 와서 묵상을 할 수 없었지만 이 자리에 와 있는 지금 이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다는 사람이 있었다.
(관옥) 사도 바울이 권면하기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네 마음으로 삼으라.’고 하셨는데, 그 말뜻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잠깐 기도하며 ‘예수님이시라면 어찌하셨을까?’를 묻고 처신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방향을 일러주고 우리로 하여금 길을 선택하게 하신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당신이라면 선택하셨을 길’을 일러주신다. 제자란 그렇게 길을 선택하며 나아가는 사람이다. 일러주신 길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예수께서 선택하신 그 길 위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 최소한 하다 못하겠으면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됩니다.” 라고 꽁무니 뺄망정 어쨌든 한번 해보는 것, 그것이 제자도가 아닐까? 제자가 뭐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정신도 차리고 그러는 거지 안 그러면 자기가 스승이게?^^
독립선언문에 기록된 33인 중 가장 뒤늦게 합류한 분 중에 신석구라는 목사님이 계신데, 끝까지 늦장을 부린 이유가 바로 ‘예수님께 길을 묻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 후 33인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신사참배를 하거나 변절을 했지만 끝까지 신념을 지키신 분도 이 분인데 그럴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예수님께 여쭈며’ 택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교육과정이나 사회활동이 모두 머리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느낌’이 홀대를 받지만, 실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느낌’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어떤 말투’로 하느냐가 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주님은 언어가 아닌 느낌으로 메시지를 전할 때가 많다. 느낌의 말을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종로에 있는 사람이 서울에 갈 수 없듯이,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가갈 순 없다.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는, 일부교회와 세상의 습관이 심어 준 착각이 깨지는 것이 신앙의 바른 모습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생각이나 고정관념이 있는 한, 바로 앞에 서 있는 하나님조차 볼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이정표 같은 존재다. 그 이정표를 보고 길을 찾아 가는 것은 우리 몫이다.
당신이 가르쳐준 길로 가게 하려고 목줄을 매어 잡아끄시는 분이 아니다.
이정표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길을 확신하는 사람은 이정표를 무시하고 다른 길로 갈 테지만, 잘못 간 그곳에도 역시 그 자리에서부터 본향을 찾아 갈 수 있는, 오롯이 한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다.
이번 주 헌금 86,000원의 심부름을, 지난 주 헌금심부름을 맡아 흘려보낼 곳을 기다리고 있는 김현정님께서 함께 맡게 되었고, 한마디씩 감사의 기도를 마치고 헤어지려는데 명옥님의 간청으로 미국에서 오신 오페라 가수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관옥목인께서 ‘생명의 양식’을 신청하셨고 가수는 마침 30여년전 대학입시 준비곡이었다며 흔쾌히 라틴어로 불러주었는데...훌쩍,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전해졌다.
흥이 살아나자 명옥님의 노래부터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한 차례씩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누군가 음치도 노력하면 노래를 잘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가수의 대답은 이랬다.
“노래를 오래 공부하다보면 어떤 음치의 노래일지라도 아름답지 않은 노래가 없더군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은 어느 것 하나 실수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런저런 틀을 정해놓고 잘하느니 못하느니 우열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
(정리 成一)
첫댓글 정성스럽게 정리하셨네요. 삼종세트 퉁 쳐드려야겠다^^* 감사!!
준비한 건 어쩌라고?
감사드립니다. 잘 정리해주셔서요... 샬롬~~~
며칠있으면 직장따라 유성으로 갈 아들을 위해 아이와 함께
우리부부를 통해 준비하시는 그분의 빈틈없으신 손길을 뵈었는데,
오늘은 아들과 함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들이 말씀을 듣고는
아빠, 엄마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어 자신에게 잘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하네요.
성일님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우리에게
늘 수고해 주셔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으며 살겠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