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시인 김광섭은 60년대 <성북동 비둘기>에서 노래했다.
인간의 애환과 고통을 느낌으로써 사랑과 평화로 화합하며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소망을 그 시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서울에서도 부촌으로 잘 알려진 성북동,
향나무들이 축축 늘어지고 담장이 하늘을 닿을 듯 하며
번쩍이는 대문들이 수두룩한 길을 따라 오르니
소담한 길상사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성북동 비둘기>가 그토록 소망했던 사랑이
이 길상사에서 다른 모습으로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자야 길상화 김영한의 사랑이야기가 사찰 경내에 진하게 묻어난다.
김영한은 누구인가.
성북동에 이처럼 정밀 단아한 절집을 세우라고 그리하여 세속에 찌들고
피곤한 중생들 마음놓고 쉬어가라고 1996년 시가 1,000억 대의 이 땅과 건물을
법정스님에게 조건없이 선뜻 내놓으신 분이다.
고급요정의 대명사이던 서울 성북동의 대원각(大苑閣), 그 집의 주인이 그였다.
김영한은 그 유명한 서정시인 백석(白石 1912~?)의 애인이다.
그는 타계 2년 전 류시화 시인과의 대담에서
"꿈에 그 사람 늙은 모습은 안 나오고 60년 전 인생이 나와요.
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 거예요."라고 했다.
"50년 만에 담배를 끊었는데 니코틴보다 그리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대단한 순애보다. 징그럽도록 아름다운 집념의 혼불이다.
김영한은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대의 손을 떠나면 곧 망가져버리는 이 가련한 철부지를 호랑나비같이 용기를 내어 찾아와
저를 온통 사랑의 둥지에 가두어놓던 당신! 우리 두 사람은 정다운 원앙새 한 쌍이 되었고,
당신은 저를 사랑으로 길들이고 정열로 다스리셨습니다...
갖가지 원한으로 뭉쳐져 말없이 타오르는 한 자루의 향심만이 저 혼자서 쇠리쇠리 꺼져갑니다."
김영한은 그 님이 몹시도 그리웠다.글을 계속 써내려갔다.
"어느 덧 팔순이 가까운 내가 만상이 고요히 잠든 야삼경에 혼자 등불을 밝혀놓고
당신과의 애틋했던 기억의 사금파리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눈물을 원고지 위로 뚝뚝 떨어뜨리며"
그는 마침내 그 글을 모아 백석시인과 자야여사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책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세상에 내놨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1936년 면회 차 귀국하여 함흥관에 일시 머물렀다. 이때 운명의 남자 백석을 만난 것이다.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 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전 우리사이 이별은 없어요."
이때 운명의 남자 백석을 만난 것이다.
"나도 저도 모르게 정신이 연결 돼 사랑에 빠졌고,
학교의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나의 하숙으로 바람같이 달려왔다.
우리는 새삼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두 손을 담쏙 잡았다.
꽁꽁 언 손을 품 속에 데워서 녹이려 할 양이면
난폭한 정열의 힘찬 포옹, 당신은 좀처럼 풀어줄 줄을 몰라 했다.
밤마다 마주해도 그립고 밤마다 속삭여도 새롭고 재미로운 신화같은......."
그들은 사랑 이야기를 나누며 불꽃으로 타올랐다.
1938년 백석이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의했으나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 조선일보 기자가 되어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황홀한 꿈 속을 노닐던 세월도 잠시,백석이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했다.
이게 영영 이별이 되었다.
김영한은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그는 1930년대 김동환이 운영하던 잡지 [삼천리]에 수필' 눈오는 밤'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던 '명월관 문학 기생'이었다.
"내 탓입니다. 미스터 백은 자식도 낳고 결혼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총각이 기생과 결혼하면 남자 집안이 망하던 세월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당신의 첩이나 될래요,라고 했지요.
거기서 실망한 거지요."
그는 백석과 헤어진 연유를 자신의 탓이라고 했다.
"사랑을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거야? 말 다한 사람이군!"
백석은 이 말만 남긴 채 그의 곁을 떠났다고 했다.
김영한은 남쪽에서 한과 함께 돈을 쌓았다.
백석은 1940년 서울에 왔으나 연인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 비참하게 살았다.
해방 후 귀국하여 조만식 선생을 돕다가 김일성대 교수를 지낸다.
한국전쟁 때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하자 주민들의 추대로 정주 군수가 된다.
60년대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물론 현재까지 그의 생사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길상사가 개원하는 날 법정스님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는 물론
김수환 추기경 까지 참석해 축하의 인사를 건냈다.
한복을 곱게 입은 김영한은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부처님의
영롱한 미소에 눈을 고정시켰다. 찬불 소리가 경내에 흐를 때
로만 칼라의 낯익은 사람이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경내로 들어섰다.
김 수환 추기경이었다.
미리 정좌하고 앉아 있던 송월주 스님과 법정스님은 추기경과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다.
추기경은 두 스님을 향해 “ 축하 드립니다.” 라며 손을 잡았고
법정 스님은 “먼길 찾아오시느라 고생하 셨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길상사를 기증한 김영한도 추기경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 였다.
부처님 앞에선 추기경의 모습은 이채로왔다.
취재진의 열띤 취재 경쟁이 벌어지고
신도들의 박수 소리가 우레와 같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등단한 추기경은 낮지만 부드러 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새들이 노래하고 물소리가 흐르 는 곳에 길상사가 위치해 기쁩니다.”
라고 운을 뗀 추기경은 법당에 모여 있는 신도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세속에 지친 우리 마음을 안정시 키고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쉼터가
절실합니다. 길상사가 정신의 안정 을 주는 우리 마음의 지표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라며 잔잔하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법정스님도 이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자신의 소유물을 조건 없이
기꺼이 내놓은 시주의 마음이나, 무심히 받아들인 마음이나,
묵묵히 따라준 이 터와 집들이 함께 그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매인 데 없다.”는 말로 김영한의 무소유의 마음을 칭송했다.
80 고령이라는 나이에 비해 아직 도 고운 눈매의 김영한은
한마디해달라는 사회자의 말에 한 동안 주저하다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배운 것이 많지 않고 죄가 많아 아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더 더구나 모릅니 다. 하지만 말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이 터에 절이 들어서고 마음속에 부처를 모시게 돼서 한없 이
기쁩니다. 저의 남은 한으로 이 절의 종을 힘껏 치고 싶을 뿐입 니다.”
떨리는 듯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마친 그의 눈에
지나간 시절이 스쳐지나가는 듯 회한이 어렸다.
기자가 김영한에게 물었다.
-시주로 천억을 내 놓았는데 후회되지 않아요?
"무슨 후회?"
-그 사람이 언제 제일 생각나는가요?
"사랑하는 사람 생각 나는 데 어디 때가 있나! "
-그 사람이 어디가 그리 좋으세요?
"천억이 그 사람의 詩 한 줄 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꺼야!"
1999년11월 14일 자야(김명환)는 별세했다.
그는 108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세상을 떠난다.
"나 죽으면 화장해 눈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주세요."
그 해 첫 눈 내리던 그 날
그녀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재를 뿌려주었다.
현재의 길상사는 한 여인의 혼을 기려 맑고 고요한 청정 도량으로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