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진화의 나무에서 맨 꼭대기에 달린 열매입니다. 각 개인이 존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자기 인생의 진실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고통이나 불만족의 끝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기 위해 여러분은 우선 여러분 자신의 체험과 통찰력을 통해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여러분은 그것의 진실한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침은 주어질 수 있지만, 깨달음을 일어나게 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들은 여러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데에 몇 가지 전제조건들이 있습니다. 첫째, 여러분은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종교적 수행 실천을 채용하여 여러분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간직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만났을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반가운 비처럼, 여러분이 찾고 있는 해답이 오게 될 것입니다.
※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인간은 달에 상륙하고 우주의 불가사의한 일들을 발견해 낼 정도로 영리하지만, 아직까지도 자기 마음의 내적 작용에 대해서는 더 많은 탐구를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어떻게 최대한 계발해서 인생의 진실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지를 아직도 배워야 합니다. 인간은 아직도 어리석음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진실로 누구인지 아니면 자기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만사를 잘못 해석하고 자기 상상력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우리의 전체 문명이 이런 잘못된 해석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 있음직하지 않습니까? 존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실패함으로서 우리들은 교만하고, 자기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를 자기 정체로 그릇되게 간주하고, 실제 우리가 아닌 것이나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자기 모습인 척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증득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리석음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들도 모두 어머님 자궁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위대함에 이르는 자기들의 길을 닦았습니다. 증득과 깨달음은 탱크에 물을 붓듯이 인간 마음속으로 쏟아 부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부처님도 인생의 침된 본성을 깨닫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닦아야 했습니다. 자기의 어리석음에 의해 만들어진 '꿈'에서 깨어나 온전하게 눈을 뜨기만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자기의 모습이 무한 숫자의 생각들과 행동이 되풀이된 것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성품이 아니며, 늘 변화하면서 계속해서 형성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의 미래가 자리하는 것은 바로 이 변화하는 성격에 있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 행동, 말과 생각의 제어를 통해 자기 성격과 운명의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실상 그들은 자기들이 행하려고 선택하는 생각과 행동이 됩니다. 그들은 진화의 나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열린 열매입니다. 만물의 존재 안에서 자기 위치를 깨닫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 삶의 본성을 이해하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진면목과 마주치는 것을 싫어하고, 꿈을 꾸거나 상상을 해서 자신이 안전하다는 그릇된 느낌으로 스스로를 편안하게 누그러뜨리기를 선호합니다. 그들은 본질은 제쳐두고 그 그림자만을 취합니다 그들은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일시적 존재에게 일시적 종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죽음과 맞닥뜨려 그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조차도 싫어합니다.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죽음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있습니다. 올바른 마음 자세를 갖고 죽음을 생각하면 사람에게 존재의 본성에 대한 통찰에 더하여 용기와 안정을 줍니다. 죽음을 이해할 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 생명에 대하여도 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와 난관에 매우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이런 문제와 난관들의 본질을 깊이 살펴 들어가면 우리 삶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재산, 사치와 존경받는 위치 등등이 가져다 준 세속적인 행복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망상에 불과합니다. 현대의 물질적 진보에 비례해서 수면제와 신경 안정제 판매와 정신병원 입원 및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쾌락 너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이것이 불교가 재산의 축적을 비난하는 부정적 종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부처님은 "재산은 사람에게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고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분은 재산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분명히 고취해 왔습니다. 그분이 하지 말라고 말린 것은, 재산에 대한 집착과 재산만이 궁극의 행복을 가져가 줄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 종교에 대한 요구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자 악행을 삼가게 하고 선행을 권장하며 마음을 청정하게 해주는 한 가지 윤리 - 도덕적 시스템을 선택해 따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시스템을 간단하게 '종교'라고 부르겠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기울이는 노력의 표상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힘의 원천이며, 그들을 자각으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부정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을 긍정적 품성을 갖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열한 사람을 고상하게, 이기적인 사람을 이타적으로, 오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잔인한 사람을 친절하게, 주관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을 객관적으로 만듭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모든 종교는 존재의 더 높은 수준 위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인류 역사 초기부터 종교는 인간의 예술적 및 문화적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역사가 흐르는 과정 속에 비록 많은 형태의 종교가 나타났다가 사라져 잊혀졌다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각기 인간 진보의 총량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를 했었습니다. 기독교는 서양을 문명화하였는데, 그 영향력의 약화는 서양 정신의 퇴락 추세를 특정지어 왔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동양의 대부분 지역을 문명화했던 불교는 아직도 생명력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과학 지식의 시대에도 그 영향력을 확대 •강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 있어서도 그것은 현대 지식과 상충되지 않고, 다른 어느 사상 체계도 예전에 했던가, 혹은 앞으로 영원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방식으로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초월하고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물질적 목적을 위해 우주를 정복하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불교와 동양 철학은 자연과 조화를 성취하고 영적인 만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종교는 사람에게 감각기능들을 평정하고 가슴과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감각 기능을 평정하게 하는 비밀은 우리 혼란의 뿌리인 욕망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족감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재산에 더 집착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재산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 숱하게 많은 부자들이 오늘날 수많은 육체적 •심적 문제들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돈을 다 써도, 자기네 문제의 해결책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족감을 갖는 방법을 배워도 사람은 설사 아주 가난할지라도, 최고 부자들이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자기 삶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다음 게송 구절이 전해주듯이.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가졌는데도 탐욕을 계속하는데, 나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도 더 이상 구하지 않네. 그들이 훨씬 더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가난하기만 하지만, 나는 쌓아놓은 게 별로 없지만 부유하네. 그들은 가난하고 나는 부유하네. 그들은 구걸을 하지만 나는 베풀어주네. 그들은 부족하지만 나는 가졌네. 그들은 초췌하지만 나는 힘차게 살아가네."
※ 삶의 목적을 추구하기
삶의 목표는 개인들 사이에 다양합니다. 화가는 자기가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남을 걸작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새 현상을 발견하고 새 이론을 정형화하거나 새 기계를 발명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는 수상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기원할 수 있습니다. 젊은 경영인은 다국적기업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화가, 과학자, 정치가와 젊은 경영인에게 왜 그렇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느냐고 묻는다면, 이러한 성취가 그들에게 살아가는 목적을 가져다주고 자기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취들이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행복을 목표로 삼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삶의 가치는 살아가는 날들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으면서 오래오래 살 수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거의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 깨달음
우리가 한 번만 탐욕의 본질과 그것들을 만족시키는 수단과 더불어 불만족, 변화와 무아로 특정지어지는 삶의 본질을 깨달으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이 손안에 달빛을 붙잡는 것처럼 왜 그렇게 잡기 어려운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축적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그들이 재산축적, 높은 지위와 권력과 명예획득, 그리고 감각을 충족시켜 쾌락을 이끌어내는 데에서 성공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하는 데에 성공한 다른 사람들을 시샘하면서 그것들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들이 이런 것들을 얻는 데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자기들이 성취한 것을 잃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거나 아니면 이제 그들의 욕망이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권력과 더 큰 쾌락을 바라며 커져왔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들의 욕망은 절대 신물이 날 정도로 완전하게 충족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하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삶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종교가 만족을 권장하고 사람에게 자신의 육체적 욕구와 자아를 넘어선 곳까지 바라보게 자극하므로,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해지는 곳이 이곳입니다.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기 업의 상속자이고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더 큰 행복을 얻기 위해 그들은 단기적 쾌락에 앞서 갈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만약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믿지 않는다면, 그럴 경우에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행위를 하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즐기면서 이 땅에서 착하고 고귀한 삶을 영위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땅에서 그와 같이 긍정적이고 건전한 삶을 영위하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복을 만들어내는 일은 자기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기적 삶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기대에 따라 살아가길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죽음 뒤의 삶을 믿는다면, 그 때에는 업의 법칙에 따라서 윤회가 그들이 한 행위의 질에 따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선행을 많이 해온 사람들은 선계에 태어나서 부와 성공, 아름다움과 좋은 건강을 즐기고 훌륭한 영적 도반과 스승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악행은 고통 받는 곳으로 환생하게 하는 반면에, 선행은 천상이나 다른 좋은 곳으로 환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업의 법칙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악행을 하는 것을 삼가고 선행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서 그들은 이번 생에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오게 될 다른 많은 삶에서도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인생의 본성을 이해하고 나면 몇 가지 중요한 깨달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바위나 돌과 달리 인간은 지혜와 자비심을 증장시키는 타고난 잠재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 특히 불법을 귀 기울여 들을 기회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삶이 덧없다는 것을 온전하게 알게 되고, 따라서 자기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동안에 불법 수행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불법 수행이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인해 자기들 마음 안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들의 진짜 잠재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평생교육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속적 쾌락을 경험하려면 외부 대상이 꼭 있어야 하지만, 심적으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외부 대상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이해에 바탕을 두고 그들은 이제 자기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유익하다면, 그들은 그것들이 자비심에서 이루어졌으며, 자기 자신과 더불어 남들을 위해서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불교도들에게는 팔정도로 알려진, 완벽한 자기 발전으로 인도하는 길을 걸어가는 진짜 가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행위를 삼가고 개인적 • 심적 및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 성품을 가꾸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힘을 계발하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그것은 자기 생각을 청정하게 하고 마음의 가능성을 확장하며 건전한 개성을 위해 완벽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적용할 수 있는 많은 기술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심적 문화의 실천은 마음을 더 넓고 깊게 해서 일체 현상과 삶과 우주의 본성 그리고 특성에 대해 더 잘 이해하도록 해 줄 수 있습니다. 짧게 말해서 이것은 지혜를 닦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지혜가 성장하면서 사랑, 동정심, 기쁨과 친절도 커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생명 형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의 생각, 느낌과 동기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변혁과 발전 과정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신으로 태어나는 것을 자기 인생의 궁극 목표로 열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들은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여, 인간 완성의 최고 정점에 도달하고 우리가 깨달음 또는 열반이라고 부르는 형언할 수 없는 경지를 성취한 부처님을 자기들의 모델로 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삼보에 대해 깊은 신심을 계발하고 부처님을 우리의 영적 이상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곳입니다. 우리들은 탐욕의 뿌리를 뽑고, 지혜와 자비심을 계발하며 윤회의 속박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 세속 사회 안에 사는 인간을 위한 불교
종교는 사회 안에서든 속세를 떠나서든 어느 곳에서고 실천 • 수행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너무 고상하고 탁월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 평범한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실천하기 어렵다' 고 믿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그들은 '진짜 불교도가 되고자 한다면, 수도원이나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은둔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불교적 생활 방식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슬픈 오해입니다.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무엇인가를 무심코 읽거나 듣고 난 뒤에 성급하게 그런 결론을 내립니다. 몇몇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부분적이거나 한쪽으로 기운 견해를 주기만 할 뿐인 기사나 책을 읽고 난 뒤에 자기들의 불교에 대한 관점을 형성합니다. 그러한 기사와 책의 필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제한적인 이해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수도원 안에 있는 스님들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은 자기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팔정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불교적 생활 방식입니다. 이 생활 방식은 어떤 차별도 없이 전 인류에게 제공되는 것입니다. 삶의 네 가지 측면, 즉 가정생활, 업무관련 생활, 사회생활과 영적인 생활이 만족스럽게 조화를 이룰때, 영속적인 행복이 성취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스님이 되거나 아니면 동굴이나 숲속으로 은둔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가 아무리 고성하고 순수하다고 할지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따라갈 수가 없다면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불교의 정신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보통 사람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확실하게 따르고 수행할 수 있습니다. 외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면서, 다른 말로 해서 사회 내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서 불교를 수행하는 것이 더 쉽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은둔은 자기들의 육체적 • 심적인 모든 것을 무디게 하고 억제하며 따라서 자기들의 영적이고 지적인 생활의 계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출가는 이 세상에서 물리적으로 달아나 버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풋타는 " 어떤 사람은 스스로 고행 수행에 헌신하면서 숲 속에서 살지만 순수하지 못한 생각과 '번뇌'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아무런 고행 훈련을 하지 않으면서 마을이나 읍내에 살지만 그의 마음이 청정하고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고 말하고, " 이 둘 중에서 마을이나 읍내에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숲 속에서 사는 사람보다 확실히 훨씬 더 훌륭하고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중아함경》)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가정 생활을 떠나 은둔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믿음은 오해입니다 그 믿음은 불교를 수행 실천하는 데에 참으로 부지불식간에 방해가 됩니다. 불교 문헌에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가정 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이 가르친 것을 성공적으로 실천해 열반을 성취한 남녀에 대한 숱한 언급이 있습니다. 한 번은 유행자 바차고타가 부처님에게 직접 가정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라 높은 영적 경지를 성취한 재가 남자(우바새)와 여자(우바이)가 있었는지 여쭈었던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가정 생활을 여위하면서 내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라 높은 영적 경지를 성취한 재가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끄럽고 혼란스런 곳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은둔 생활을 사는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료 존재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그들을 돕고 그들에게 봉사하면서 불교를 수행 • 실천하는 것이 확실히 더 칭찬받을 만하고 용기 있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훗날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서 다른 삶들을 돕기에 충분할 만큼 강해지기 위한 도덕적 • 영적 • 지적인 훈련에 대한 예비 과정으로서 마음과 성격을 개선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은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마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동료를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개인의 행복과 해탈만 생각하면서 일생 동안을 고립해 살아간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 바탕을 둔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제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불교를 따를 수가 있다면, 부처님은 승단인 승가를 왜 확립했습니까?" 승단은 자기 자신의 영적 •지적 계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들의 삶을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가족이 있는 평범한 재가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자기 일생을 헌신하라고 기대할 수 없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이나 다릉 어떤 세속적 속박이 없는 비구나 비구니 스님들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일생을 헌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이 재가자에게 물리적 안락을 줄 수는 없지만, 세속의 문제와 가정 문제 감정의 문제 등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지도를 해 줄수 있습니다.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은 부처님이 가르쳐 준대로 불법의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 자기들의 온 삶을 바칩니다. 그들은 교육을 받지 않은 재가자들에게 그 가르침을 단순한 형태로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재가자가 교육을 잘 받았다면, 그와 더불어 가르침의 더 깊은 측면을 논의해서 스님과 재가자 양쪽이 다 그 토론에서 지적으로 소득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 불교국가들에서 승가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많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헌신한 결과로 불교국가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문자 해독능력을 갖추고 영적인 가치들에 매우 정통하게 되었습니다. 승가는 또한 전체 인류가 어떻게 다 비슷한 곤란에 처해 있는가를 설명해줌으로서 박탈당하고 마음이 심란한 사람들을 위로해 줍니다. 역으로 재가자는 스스로 음식물, 주거 공간, 의약품과 옷가지 등을 조달할 수입을 벌지 않는 승가의 물질적 복리를 돌보아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일반적인 불교적 관습에서는 재가자가 승가의 복리에 기여하는 것을 갸륵한 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 승가가 계속해서 사람들의 영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고 그들의 심적 청정을 계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 재가 불교도의 가정생활
부처님은 경제적 복리가 인간의 행복에 필수조건이라고 여겼으나,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덕적 • 영적 계발 또한 꼭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한 번은 디가자누라고 하는 사람이 부처님을 방문해 말했습니다. "존자시여! 저희들은 아내와 자식이 딸린 가정생활을 하는 평범한 재가자입니다. 복 받으신 분께서 저희들에게 현세와 내세에서 우리 행복에 도움이 되 ㄹ몇 가지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부처님은 그에게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 네 가지가 이 세상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1.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기술이 있어야 하고, 능률적이며, 성실하고 열정적이어야 하며, 또한 그일을 아주 잘 알아야 합니다. 2.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번 수입을 지켜야 합니다. 3. 정직하고 지혜가 있으며 덕을 갖추고 관대하며 지적이어서 악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로 가도록 자신을 도와줄 좋은 친구를 가져야 합니다. 4. 자기 수입에 비례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지 않게 합리적으로 소비해야 합니다 즉, 탐욕스럽게 재산을 쌓아두어도 안 되고 헤프게 써서도 안 되는데, 다른 말로 해서 자기 수단 범위내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부처님은 내세에 재가자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네 가지 덕성에 대해 자세히 설하였습니다. 1. 신심 : 도덕적 •영적 •지성적 가치에 대해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2. 계행 : 생명을 죽이고 해치는 것, 도둑질과 속임수, 간음, 거짓말과 취하게 하는 음료수를 마시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3. 인자 : 자기 재산에 대해 집착하고 탐욕하지 않으며, 자선과 관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4. 지혜 : 고통을 완전히 깨부수어 열반의 증득으로 인도하는 지혜를 계발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은 가끔 돈을 저축하고 쓰는 데에 대하여 아주 상세한 것까지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이 시갈라에게 "그대 수입의 1/4은 일상생활 경ㅂ로 쓰고, 1/2은 사업과 다른 활동에 투자하고, 1/4은 어떤 비상사태에 대비해 저축해 두라"고 말했습니다. 언제인가 한 번, 부처님은 아주 헌신적인 재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억만장자이며 그분을 위해 사바티에 읾 높은 제타바나사원을 세워드렸는데아나타핀디카에게 "평범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재가자는 네 종류의 행복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행복은 정당한 수단으로 취득한 경제적 안정이나 충분한 재산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재산을 자기 자신,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자선 행위에 자유롭게 쓰는 행복입니다. 세 번째는 빚을 지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행복입니다. 네 번째는 행복은 생각, 말이나 행동에 있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결점없는 청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앞의 세 가지는 결점 없고 착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영적인 행복만큼 고귀하지 않은,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앞서 제시된 몇 가지 실례를 통해서 부처님은 경제적 복리가 인간의 행복에 필요하다고 간주했지만, 그것이 영적 •도덕적 기초가 없는 물질적인 것일 뿐이라면 그분은 그 진보를 진실하고 참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질적 진보를 격려 • 고취하면서도 불교는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만족스런 사회를 위해 항상 도덕적 •영적 특성의 계발을 크게 강조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불교도가 되려면 물질주의적 삶과 관련해서는 절대로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우리가 물질적 안락을 향유할 수 있는 한편으로, 또한 우리 삶의 영적인 측면을 진지하게 계발하여아 합니다. 재가자로서 감각적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반면에 절대로 그것들이 우리의 영적 진보를 방해할 정도로까지 그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사람들이 중도를 따라야 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소멸이 아니라 어리석음과 이기적 갈망의 소멸 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8. 불교의 도덕규범과 실천
※ 불교와 도뎍
도덕규범, 관습과 예절은 인간이 만들어내지만 불교 윤리는 보관적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혼란 상태에 빠져 있으며, 소중한 윤리 규범들은 온통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적인 회의주의의 힘이 인간적 품성으로 여겨지는 전통적인 개념들에 그 해부의 칼날을 들이대 왔습니다. 그러나 문화와 문명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가 되었든 틀림없이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이슈들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윤리는 인간의 행위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해지기 위해선 자기 수련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윤리의 필요성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생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 윤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임의의 규범이 아닙니다. 무연무고한 데에서 제멋대로 부과되지도 않았습니다. 일반 사회의 법과 관습이 불교 윤리의 기초를 형성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한 기후, 시대나 문명에 적당한 의상 스타일이 다른 데에서는 꼴사납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사회 관습의 문제이지 어떤 식으로든 윤리적 고려를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당하고 변하지 않는 윤리적 원칙과 사회적 관례, 혹은 협약의 인위적인 성격이 계속 혼동되고 있습니다. 불교 윤리는 변화하는 사회관습이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자연법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불교 윤리의 가치는 본래 자연의 일부이고 변화하지 않는 인과법칙입니다. 불교 윤리가 자연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 때문에 그 원칙들이 현대 세계에도 유용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불교 윤리의 항목들이 2,5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의 초시간적 성격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도덕은 사람들을 궁극적인 행복이라는 최종 목표로 이끌어주는 실질적 목적으로 기여합니다. 해탈로 가는 불교적 도정에서는 각 개인이 자기의 행운과 불행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각 개인이 이해와 정진을 통해 구원을 성취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불교적 해탈은 자기 자신의 도덕적 계발의 결과이며 외부의 어떤 중개자가 부여해주거나 허가해 준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임무는 중생들에게 존재의 본성을 깨닫게 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조언해 준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불교 윤리는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계명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매우 건전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장기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조건에 관한 조언을 주었던 것입니다. '부끄럽다', '사악하다', '비열하다'. '가치가 없다' 그리고 '불경스럽다' 와 같은 말들로 죄인을 훈계하기보다 그분은 간단하게 " 이것이 여러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슬픔(괴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여러분은 어리석습니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불교 윤리의 이론은 다양한 계율에 실질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계율이나 규율들은 궁극의 해탈로 길을 잡아가는 방향을 보여주는 대략적인 안내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 계율들 중 상당수가 부정적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불교적 도덕이 선을 행하는 데에 칭찬은 없고 악을 삼가라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계율에서 발견되는 도덕은 세 가지 단순한 원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마라. 착한 일을 하라.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이 주신 조언입니다. (《법구경》 제183게송) 불교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이 아주 단순합니다. 이기심에서 솟아 나와 탐욕과 증오와 미망에 뿌리를 두고 있는 행동은 모두 자아에 대해 해로운 망상을 키우게 됩니다. 이런 행동들은 칭찬받을 만하지 않거나 서툴거나 나쁜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불선업이라고 부릅니다. 관용과 사랑과 지혜라는 덕성에 뿌리를 두는 행동들은 모두 칭찬받을 만한 것, 선업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은 그 행동들이 그 사람의 생각, 말 또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불교적 도덕은 의도 혹은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업은 의지이다" 라고 말합니다. 행동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의도와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불교 윤리는, 어떤 사람이 최선의 의도를 갖고 그렇게 했다고 해서, 흔히 '죄'로 간주되는 행동을 해도 좋다는 입장을 견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입장이었다면 불교는 스스로 심리학의 질문들에만 한정했을 것이며, 윤리규범의 덕목을 정하고 행위 준칙을 만드는 재미없는 과업은 덜 해방된 가르침에 내버려두었을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 정신적 행위와 물질적 행위 사이의 연결은 생각의 확장입니다. 다른 생명을 취하는 것은 단순히 화, 증오심이나 탐욕에 지배되는 마음 상태가 외부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에, 착한 마음을 갖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증기가 응축된 것이 비로 내리는 것과 똑같이, 행위는 생각의 결정체입니다. 행위는 오직 고요하고 비밀스런 마음의 방들에서 이미 저질러온 것을 행동의 지붕 꼭대기에서 내어 보일 뿐입니다.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건전하지 못한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지 못했음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또한 청정하고 훌륭한 마음을 갖고 있으며 온갖 오염된 생각과 느낌이 텅 빈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불교 윤리는 도덕적 가치의 객관성도 인정합니다. 다른 말로, 행동에 대한 업의 결과는 , 그 행동에 대한 개인의 태도나 사회적 태도와 관계없이, 자연스런 업의 법칙에 맞추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술에 취하는 것은 업의 결과를 가집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불행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불행도 조장하므로, 그것은 부정적인 행동입니다. 술주정뱅이나 사회가 술을 마시는 습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상관없이, 술에 취하는 것의 업보는 존재합니다.유행하고 있는 의견이나 태도라고 해도 최소한 술에 취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객관성을 떨어뜨리지는 않습니다. 그 행동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심적 태도와 상관없이 , 심리상 •사회상 및 업력상 과보가 그 행동들이 도덕적인가 혹은 비도덕적인가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와 같이 윤리적 상대성은 인정되는 반면에 , 그것이 가치의 객관성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 무엇이 율입니까?
율은 부처님이 제정하여 비구 •비구니 스님들에게 지키라고 한 자기 수행의 규율 덕목입니다. 율은 청정한 종교적 생활 방식을 보장해 주는 지렛대 역활을 합니다.
부처님은 단 한번에 계율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필요가 발생할 때마다 특정 규칙을 제정하였습니다. 율장과 그에 대한 주석들에는 부처님이 어떻게 그리고 왜 특정 규칙들을 정했는지에 대하여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가장 좋은 형태의 율은 통찰력과 이해를 통해 마음과 말 그리고 행동을 갈고 닦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초기 제자들은 영적으로 고도로 계발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규칙을 정해 부과할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승단이 수적으로 방대해지면서, 많은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되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영적으로 그다지 계발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재가자의 활동에 참여하고 감각적 쾌락의 유혹에 끌리는 등, 그들의 행위 및 생활 방식과 관련한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부처님은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스님과 재가자의 생활 사이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지침을 정해야 했습니다. 비구 •비구니 승단은 그 당시 존재하고 있던 다른 수행 공동체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훨씬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전 생활 영역에서 거룩한 승단을 유지해 나가는 데에 필요한 지침을 모두 정해 놓았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승단은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계율을 지키며 살아갔습니다.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은 넓게 보아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것들이 광계인데, 이 중 대부분은 전체 승단 구성원들과 종교적 삶을 영위하는 스님들과 똑같이 생활하는 재가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 나라에 현존하는 문화 및 사회적 규제에 맞추기 위해 제정될 수 있는 일부 다른 계율 덕목이나 규정들은 분별계라고 부릅니다. 비도덕적이고 해로운 온갖 악행을 제한하고 있는 광계는 첫 번째 부류에 들어갑니다. 두 번째 부류는 매너 •전통 •의무 •관습 및 에티켓의 준수에 있어 비구 •비구니들에게 거의 직접적으로 적용됩니다. 광계에 속하는 도덕률을 어기면 명예가 실추되는 반면에, 사회적 조건에 바탕을 두는 규율 항목들을 어기는 것은 꼭 악업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거룩한 승단의 청정성과 위엄을 더럽히는 위반 행위로서 비판을 받기 쉽습니다. 이런 규정들은 주로 2,500여 년 전 인디아에서 보편적이던 사회문화적 상황에 기초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그것들이 비도덕적이거나 해로운 행위를 고취하지만 않는다면,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사소한' 규정들을 변경하거나 수정할 수도 있다" 고 선언하였습니다. 실제로 부처님이 살아 계시던 동안에 그분의 허락을 받아 스님들이 일부 사소한 규정들을 수정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몸이 아픈 비구 •비구니들은 일부 계율 규정의 적용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3개월 뒤에 소집된 제1차 결집회의에서 제자들이 일단 그 규정들을 집대성하게되자, 어떤 규정을 변경시켜야 할지에 대해 아무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수정없이 전체 규정을 보전하여야 한다고 결정되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부처님이 제정해 놓은 계목들을 모두 지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초기 제자들이 어느 한 계목도 변경시키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부처님이 돌아가고 나서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나 근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세속적 삶을 포기하고 출가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성실하게 그리고 확신을 갖고 그렇게 했었던 것이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불교가 인디아의 다른 지역과 다른 나라들로 전파되면서 일부 규정들은 다양해지는 생활방식과 경제 환경에 맞추어 적용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제1차 결집회의에서 어떤 계목도변경하지 않기로 제자들이 했던 결정은 아주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규정들은 화석화되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으며, 일부 보수적인 제자들은 정신으로서보다는 문자자체를 엄격하게 따라야 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당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종류의 단순 규정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세심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분은 " 불법에 대한 바른 이해와 불법을 스승으로 삼아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에 충분할 것이다"고 말해왔었습니다
승가 공동체의 발전
시간이 경과하면서 승가 공동체는 몇개 부파로 발전하여 갔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부처님이 제정한 몇몇 주요 계율들을 고수하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일부 사소한 규정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상좌부는 더 보수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대승과 일부 다른 부파들은 자기들의 관점과 종교 규율에 있어 좀 더 개방적이었습니다. 상좌부는 변화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율을 바로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계목에 대한 작은 변화는 때때로 일어났는데, 다만 상좌부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상좌부는 매일 규정된 시간 이후에 음식을 들지 않는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합니다. 상좌부는 특별한 상황 아래서는 일부 변경이 허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부파의 구성원들은 적절한 색깔과 모양세를 낸 가사를 입는 일에 적응하는 반면에 상좌부는 변화된 사회 및 기후 조건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제정된 본래의 등황색 가사를 착용하는 것에 계속 집착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전통적인 불교문화 배경에서 태어난 사람들만이 스님들의 생활 방식을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물론 이것은 불교가 서양의 나라들과 같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될 때에 많은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그런 행동들이 그들 주위의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정신으로서보다는 율의 조목에 있는 문자 그대로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스님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서양나라들에서 점점 더 많은 스님들을 초청하고 있는데, 그곳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화와 기후 조건이 아시아의 그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스님들이 자기 고국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기를 고집한다면, 그들의 행위는 이상스러운 웃음거리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존경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비웃음과 의혹을 사기 십상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그 스님은 자기의 상식을 응용해서 자기 자신과 다른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눈에 자기가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준수해야 할 규정은, 비도덕적이고 잔인하며 해롭고 음탕한 행동을 단 하나라도 하지 않아야 하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민감한 사항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스님들이 인간적 품위와 규율을 유지해서 정직하고 친절하며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인간을 이해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러한 품성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각기 태어난 국가의 이른바 전통과 관습을 견지하는 것은 부처남이 가르친 불법의 진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밖에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경전의 율 규정들을 읽고 난 많은 사람들, 특히 불교적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온 서양 사람들은 스님들이 세계의 어느 곳에 있던지 그 내용을 수정하지 않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모든 규정들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2,500여 년 전에 인디아에서 시행되었던 이 규정들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 심지어 아시아에서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살았던 지역인 인디아에 살았던 승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을 위해서 그 규정들을 제정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분명히 간직해야 합니다. 그 스님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나라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단 한차례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자기들이 살았던 사회를 분열케 하거나 곤혹스럽게 하는 일을 최소한으로 한 채, 자신의 영을 계발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들을 존경하거나 이해해 줄 수 없는 나라에서 스님들이 모든 규정들을 엄격하게 준수한다면 다른 많은 새로운 문제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재가 신도들을 위한 계목은 세속적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덕스럽고 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준 조언은 《길상경》, 《타락경》, 《장슬경》, 《선생경》 과 그밖에 많은 다른 경전들과 같은 법문들에 실려 있습니다. 많은 율 규정들은 세속의 삶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재가자도 그것들이 영적 역량을 더욱 크게 계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일부 규정을 따를 수 있습니다.
변화하는 사회
사회가 변화할 때 스님들도, 설사 그들이 세속 생활을 포기해 왔다고 할지라도, 그 변화에 적응하지 않은 채 전통주의자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변화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없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가끔 사회 개혁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의 필요성에 적응하는 스님들을 비판합니다. 물론 이것은 스님들이 자기 자신의 일시적 기분과 기호에 맞추기 위해 규정들을 변경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스님들이 일부 사소한 계율들을 수정하고자 할 경우에도, 그들은 공인된 승가의 회의를 통해 인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개별 스님은 여하한 율 규정도 제멋대로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승가 회의의 구성원들은 율 조목을 심각하게 위반한 스님들과 승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를 한 스님들에 대해 징계를 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스님들의 악행을 막고 세속 생활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돕기 위해 그 회의를 제도화했습니다. 그 규정들은 어떤 신적인 권력의 수중에 장악돼 내려온 불가침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생활 지침이었습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스님들이 대단한 존경을 받습니다. 재가자들은 그들을 불법의 스승으로서, 그리고 성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세속 생활을 희생해 온 종교인으로서 존경합니다. 스님들은 불법의 연마와 수행에 온 몸을 바치고 생활비를 벌지 않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므로 재가자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욕구를 스님들에게서 구하는 대신에 그들의 복지를 돌보아 드립니다. 그처럼 스님들은 스스로 대중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스님이 평판이 좋지 않은 곳에 모습을 보였다면, 그가 설사 어떤 부도덕적인 행위에 관련되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절치 못한 환경을 없애서 거룩한 승단의 위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스님들의 의무입니다. 만약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재가자들이 그들을 돌보아 드리고자 하는 신뢰를 잃게 됩니다. 심지어 부처님 당시에도 재가 신자들이 거만하고 싸움을 좋아하거나 무책임한 스님들에게 공양을 거부했던 실례가 불교 경전들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가자들만이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세속 활동을 저지르는 스님들은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불법과 율
부처님이 상세히 설명해 놓은 진리인 불법은 어떤 상황 아래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 율 규정 또한 같은 범주에 포함되어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 다른 율 규정들은 불필요한 불편을 일으키지 않도록 변경할 수 있습니다. 불법과 율은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스님들은, 그들의 수행 실천에서 어떠한 종교적 의미나 함의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마치 중요한 종교 원칙이라도 되는 듯이 특정 전통을 엄격하게 지킵니다. 그와 동시에 이기적이고 교활한 사람들은 심지어 겉으로 청정한 듯한 모습을 애써서 드러낸, 순진한 신자들이 그들을 덕행이 청정한 스님들로 여기도록 오도합니다. 아시아 국가들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따르고 있는 이른바 불교적 관례라고 하는 것들의 상당수는 종교적으로 필수적인 계율이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지지했던 전통 관습입니다. 또 다른 한편, 스님들이 준수해야 하는 규율로 도입된 일부 관습들은 거룩한 승단의 존엄과 평온을 유지하는 데에 진짜 도움이 됩니다. 종교 전통과 관습이 영적 계발에 적당한 분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일부 율 규정들은 사회의 조건 변화에 맞추어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반 대중의 눈에는 조롱거리이기 때문에, 스님들이 현대 사회에서 일반 대중과 어울리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들의 생활 방식에서 숱한 문제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님들이 돈을 취급하는 데 대해 일부 재가자들은 비판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돈을 만지지 않고 불법을 포교하고 활동적으로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스님이 해야 하는 것은 돈이나 재산을 개인 소유물로 여기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의도했던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자기의 물질적 이득에 꿰어 맞추기 위해 일부러 규정들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 계발을 성취하는 데 있어 난관에 직면하는 결과를 감수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명상을 하기에 좋은 고립지역으로 자신을 한정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세속사에서 벗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 의무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무엇보다 먼저 먹을 것, 잠자리와 의약품과 같은 그네들이 기본 필수품을 돌보아 주기에 충분한 지원자들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세속 사회에서 완전히 은둔하고자 하는 스님들이 있을 수 있는 반면에, 세속 사회에서 일반 대중들의 숱한 종교적 수요를 돌보아주기에 충분한 스님들도 꼭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교가 자기들의 일상생활과 복리에 별로 기여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스님의 품성
스님의 두드러진 품성 중에는 순정, 자발적 가난, 겸허, 소박, 무사, 자율 • 자제, 인내심, 자비심과 인애 등이 있습니다. 스님은 네 종류의 중계를 지킬 것으로 기대되는데, 그것은
• 기본적 도덕 계율 : 부도덕하고, 잔인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며 이기적인 활동들과 관련된 주요한 위반 사항 • 욕망을 제약하는 계율 • 생활을 청정하게 하는 계율 • 생활 필수품 사용과 관련된 계율
이 네 종류의 계를 통틀어서 청정계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승단에 들어가 계를 받으면 사미라고 부릅니다. 그는 한 단계 위의 계인 비구계를 받아서 비구가 될 때까지 사중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기율 항목들로 이루어진 사미십계를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신참 여승은 사미니라고 부르고 정식 스님이 되면 비구니라고 부릅니다. 비구는 몇 가지 사소한 조목들과 별도로 227계목으로 이루어지는 위에 언급한 네 종류의 중계를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독신 생활 그리고 도둑질, 살생과 '높은 정신력을 얻었다'고 속이는 거짓말을 삼가라는 네 가지 중요한 것들은 엄격히 지켜야 합니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그 스님은 승가 공동체에서 '실패자'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승가 공동체에 의해 일부 종교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타 다른 규정들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그 위반 내용의 경중에 따라 적절한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스님이 되는 것은 어떤 강제 법률이나 서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성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진해서 스님이 됩니다. 따라서 규정을 지키고자 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그만이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예전에 했던 맹서에 잡혀 있다고 느끼며 위선적이 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불편하다고 느끼게 되면 아무 때이고 자기 마음대로 승단을 떠나 재가 불교도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가 희망하는 경우 어느 때라도 다시 수행 생활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비구니들에게도 똑같은 일반 규정들이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 십선과 십악
운이 좋은 인생인가 불운한 인생인가의 여부는 각 개인의 덕행과 악행에 달려 있습니다.
열 가지 선행
선행을 하게 되면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품성인 선한 공덕을 발생시킵니다.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그것은 악한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번뇌에 빠지게 합니다. 공덕은 우리 마음을 청정하게 해 탐욕과 증오와 미망이라는 악한 세력의 영향을 씻어내 줍니다. 탐심 때문에 사람은 끝없는 욕망을 일으키고 재산을 축적하고 매점을 합니다. 증오심 때문에 누군가를 싫어하고 그 사람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어리석은 마음이 한 사람을 탐욕과 증오에 얽매이게 하고, 결국 이 악한 뿌리들이 올바르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악행은 더 많은 고통을 일으키게 되며 한 사람이 불법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감소시키게 됩니다. 공덕은 우리가 삶의 여정을 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좋고 이익이 되는 것들과 관계되어 있으며, 품성을 개선할 수 있게 합니다. 한 사람이 끌어 모으는 물질적 재산은 절도, 홍수, 화재, 몰수 등등으로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덕의 이익은, 설사 더 많은 공덕을 짓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지 않으면 소진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가게 되고 소실되지 않습니다. 공덕을 짓는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이 바로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덕은 거대한 촉진자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든 기회의 문을 열어줍니다. 공덕이 있는 사람은 노력을 기울이는 어떤 일이든지 성공할 것입니다. 사업을 하고자 하면, 좋은 기회와 올바른 동료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학자가 되고 싶으면, 학문적 업적을 쌓아 명성을 얻고 학문이 깊은 스승의 뒷받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명상 수행의 진전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의 영적 계발 과정을 지도해 줄 훌륭한 명상 지도자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보물과도 같은 공덕에 힘입어 온갖 꿈이 다 실현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천상에 환생하게 하고 그 사람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고 지원해주는 것이 공덕입니다. 선행을 한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발생시키는 광대하고 비옥한 공덕전(행위를 받게 되는 그릇)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토양에서는 더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과 똑같이 (돌이 많은 토양에 비해 검고 비옥한 토양을 말함/옮긴이) 일부 어떤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행한 선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했을 때보다 더 많은 공덕을 낳을 수 있습니다. 비옥한 공덕전에는 승가나 수행자, 어머니, 아버지와 극빈자들이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행한 선행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명백해지고 불가사의한 결과들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성취하고 이에 더하여 지식과 이해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열 가지 공덕행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열 가지 공덕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보시 2.지계 3. 정신 문화 4. 성현을 존중함 5. 다른 사람들을 돕는 봉사 6. 다른 사람들에게 공덕을 돌림 7. 다른 사람들의 공덕을 기뻐해 줌 8. 불법을 설하고 가르침 9. 불법을 귀 기울여 들음 10. 자신의 정확하지 않은 견해를 바르게 함
이와 같은 열 가지 공덕행을 행하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하여 행위를 받는 사람들도 이롭게 할 것입니다. 지계는 행위자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존재들을 이롭게 합니다. 정신문화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가져다 주고 그들이 불법을 실천하도록 북돋아줍니다. 성현을 존중하면서 사회를 조화롭게 하고, 봉사행을 하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켜 줍니다. 다른 사람들과 공덕을 나누면 그 사람이 다른 이들의 복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한편 다른 사람들의 공덕을 기뻐해 주면 그 사람들이 더 많은 공덕을 짓도록 격려하게 됩니다. 불법을 가르치고 귀 기울여 듣는 일은, 설법자와 청법자 양자의 행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양자 모두 불법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격려해 줍니다. 자신의 정확하지 않은 견해를 바르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불법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법구경》 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가치 있는 행위를 했다면 거듭 되풀이 할 것이요, 그 가운데서 희열을 구해야 하네. 가치 있는 일이 쌓이면 더 없이 행복하리니. 제118게송
'결과가 나한테 오지는 않을 거야'라고 하며 선에 대해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하리.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져 물독을 채우나니, 그처럼 현명한 이는 작은 선을 하나하나 쌓아서 자신을 선으로 가득 채우게 되네. 제122게송
열 가지 악행
사람들이 '멀리 하라' 고 충고를 듣게 되는 열 가지 악행이 있습니다. 이 행위들은 탐욕과 증오와 미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특히 행위자 자신에게는 이번 생과 다음 생에도 고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업의 법칙을 이해하고 악행은 악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올바른 이해를 실천하게 되고 이런 행동들을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불건전한 업이 되는 세 가지 몸으로 짓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1.살아 있는 존재를 죽이는 일, 2.도둑질과 3.비정상적인 성관계입니다. 몸으로 짓는 이런 행위들은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오계중 앞의 세 조항에 해당됩니다. 살생을 저지른 사람이 받는 결과는 수명 단축, 병약,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겪는 지속적인 슬픔, 그리고 계속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한 나쁜 결과는 빈궁, 비참함, 실망 그리고 남에게 의존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적 비행을 저지른 데 따르는 나쁜 결과는 적을 많이 갖게 되고, 늘 증오를 받게 되며 원하지 않는 아내나 남편과 만나는 것입니다. 불건전한 업이 되는 네 가지 말로 짓는 행동은 1.거짓말, 2.비방과 고자질, 3.거친 말과 4.실없고 의미없는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을 제외하고 말로서 짓는 다른 불건전한 행위들은 네 번째 계의 확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에게 생기는 나쁜 과보는 독설, 악담, 신뢰 상실과 육체적 불쾌감입니다. 비방을 한 나쁜 과보는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친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거친 말을 한 결과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목소리가 거칠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없는 말을 하여 불가피하게 받게 되는 후과는 신체 기관에 결함이 생기고 그가 하는 말에 아무도 주의를 기울여 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다른 세 가지 악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특히 다른 사람에 속한 것들에 대한 갈망, 2.악의와 3.잘못된 견해들입니다. 이 세 가지 행위는 탐욕, 증오와 미망의 세 가지 나쁜 뿌리에 해당됩니다. 취하게 하는 것들을 삼가라는 다섯 번째 계를 지키지 않으면 이 세 가지 마음으로 짓는 악행을 저지르게 할 뿐 아니라 몸과 말로 행하는 다른 악행들도 저지르게 할 수 있습니다. 갈망의 바람직하지 못한 과보는 자기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악의의 과보는 추해지고,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리며, 밉살스러운 성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견해를 가졌던 사람이 받는 과보는 엄청난 욕망, 지혜의 결핍, 이해력이 우둔해짐, 만성 질환을 앓고 비난받을 만한 사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이 항상 선행을 행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악행을 저질렀다면, 잘못된 곳이 어디인가를 깨달아 그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것이 후회의 참뜻이며, 이런 식으로 해야만 한 개인이 해탈로 가는 성스러운 길을 따라 진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난 뒤에 그 악행을 거듭 되풀이한다면, 속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 말고 그 누가 '한 사람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기막히게 훌륭한 세정제인 깨달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맨 먼저 자기가 한 행위의 본질과 그렇게 해서 초래한 해가 어느 정도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 행위가 건전하지 못함을 깨닫고 그것에서 배워 다시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해를 입혔던 당사자와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악행이 만들어낸 과보를 선행으로 극복합니다. 불교에 따르면, 속죄나 회복될 수 없는 악행자는 없는데, 특히 깨달음 및 올바른 노력과 관련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다른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위를 '씻어버릴 수' 있다고 하는 믿음으로 꼬드기는 것은 단순한 미신일 뿐만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특히 그 사람의 영적 계발에 아무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계속 어리석은 채 남아 도덕적으로 자기만족에 빠지는 원인이 되기만 할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걱정하는 잘못된 행위의 과보보다도 이런 그릇된 믿음이 한 사람을 더욱 해롭게 할 수 있습니다.
※ 지계
계율을 준수함으로서 여러분의 도덕적 역량을 배양할 뿐 아니라 여러분의 동료인 중생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최상의 봉사를 수행하게 됩니다.
국가나 사회는 모두 각기 스스로의 사회적 맥락 안에서 도덕적으로 간주되는 자기 규범을 가집니다. 이러한 규범들은 종종 그 사회의 이해관계 및 법률 시스템과 밀접한 연관을 맺습니다. 어떤 행동이 법률에 저촉되지 않고 대중이나 개인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올바른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사회 규범들은 탄력적이며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기 위해 때때로 수정됩니다. 사회에는 그것들이 중요하지만, 이러한 기준들이 시공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인 도덕성의 원칙으로 가는 신뢰할 만한 지침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불교적 도덕률은 인간의 마음으로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결국 오늘날 통상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인간 중심의 코드로 대체된 부족 윤리에 바탕을 두지 않습니다. 불교적 도덕은 원인과 결과의 보편 법칙(업)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떤가에 따라 '좋은' 행동 혹은 '나쁜' 행동으로 여깁니다. 어떤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할지라도, 다른 중생에게 육체적 및 심적 고통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선행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불교적 도덕은 매우 일반적이지만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어떤 행동이 좋은지 나쁜지 우리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불교에 따르면,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어떤 행동의 질은 그것이 기원하게 된 의도나 동기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이 탐욕, 증오와 미망 때문에 어떤 행동을 저지른다면, 그의 행동은 건전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반면에 그가 사랑, 자비심과 지혜를 담아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의 행동은 건전한 것입니다. 탐욕, 증오와 미망은 '삼독심'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편 사랑, 자비심과 지혜는 '세 가지 이로운 뿌리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뿌리'라는 낱말은 어떤 행동이 기원하는 의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의 본질을 감추려고 무슨 노력을 하든지 상관없이, 마음이 모든 말과 행동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 행동을 일으키는 생각들을 점검하면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교도가 된 사람의 첫 번째 의무는 탐욕, 증오와 미망의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두렵거나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기 때문이라면, 아직도 지혜가 부족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것 때문에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바르게 행동하는 어린아이처럼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게 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불교도들은 이해력과 지혜의 힘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들은 선행을 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영적 성장의 기초를 제공해 주고 해탈로 인도해 줄 힘을 계발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 덧붙여 그들은 자기들의 행복과 고통이 업의 법칙의 작용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기 사는 동안 행복하길 원하고 있으며, 각 개인이 행복에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므로,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 해야 하 갖가지 이유가 다 있습니다. 더욱이 온갖 반사회적 행동의 근원인 마음의 때를 뿌리 뽑으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사회 내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돕는 중 저절로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오계
재가 불교도가 지켜야 할 계는 오계 안에 구체화되어 있는데, 이것은 두 단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사람들이 문명화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믿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둘째, 그것은 해탈로 가는 영적인 여정의 출발점입니다. 신성 법칙이 인간에게 꼭 지키라고 부과한 계명과 달리, 이 계목들은 사람들이, 특히 몸과 말과 마음을 갈고 닦기 위한 수행 규정으로 채용할 경우의 쓰임새를 깨닫게 될 때에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이해가 이 계목들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훌륭한 불교도라면 매일 오계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다짐해야 합니다. 그 계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일 2.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일 3. 성적 비행 4. 거짓말 5. 취하게 하는 약물과 술을 먹는 일
단순히 금지 규정으로서 오계를 이해하는 것에 더하여 불교도들은, 지계를 통해 다섯 가지 숭고한 덕행도 실천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일깨워야 합니다. 오계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하고 있는 데 반해, 다섯 가지 숭고한 덕행은 어떤 품성을 닦아야 하는지, 다시 말하면 자비, 자제, 만족, 성실과 마음 챙김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죽이지 말라는 첫 번째 계를 지킬 때, 그들은 증오심을 억제하고 자비심을 가꾸게 됩니다. 두 번째 계에서 그들은 탐욕을 억제하고 자제심 혹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꾸게 됩니다. 그들은 세 번째 계에서 감각적인 색욕을 억제하고 만족을 가꾸게 됩니다. 네 번째 계에서는 거짓말을 삼가고 성실한 자세를 가꾸게 되며, 다섯 번째 계를 통해서 좋지 않은 마음의 흥분을 삼가고 마음 챙김을 배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숭고한 덕행들을 이해하게 되면, 그들은 오계를 지키는 것이 자기들을 움츠러들게 하고 자기 비판에 빠지게 하며 부정적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보살피는 마음으로 충만한 긍정적 성격과 더불어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다른 품성들도 갖추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계는 불교 수행의 기초입니다. 지계의 목적은 생각, 말과 행위를 통해 표출되는 절제되지 않은 거친 열정들을 없애는 데에 있습니다. 지계는 자기 마음을 닦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기본 조건이기도 합니다. 기본적 도덕률이 없이는, 종종 명상의 힘이 일부 잘못되고 이기적인 목적에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팔계
많은 불교 국가들에서는 신자들이 음력 초하루와 보름과 같은 특정 날짜에 팔계를 지키는 것이 관습입니다. 이 신자들은 아침 일찍 절에 가서 계를 지키면서 그곳에서 24시간을 보냅니다. 팔계를 지킴으로서 그들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수요에 최적인 일상 가정생활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킵니다. 팔계를 지키는 목적은 기분을 전환하고 평정심을 계발하며, 마음을 닦고 스스로 영적인 진전을 이룩하는 데 있습니다. 팔계를 지키는 기간 동안 신자들은 경전을 읽고 부처님 가르침을 귀기울여 들으며 명상을 하고 절의 여러 가지 일을 도우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팔계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지키기로 되어 있는 오계로 복귀하고 집으로 돌아가 정상 생활을 다시 시작합니다. 팔계는 1. 살생 2. 도둑질 3. 성 행위 4. 거짓말 5. 음주 6. 정오 이후의 식사 7. 춤, 노래, 음악, 보기 흉한 쇼, 그리고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려고 꽃다발과 향수 등을 사용하는 것 8. 높고 화려한 자리를 사용한는 것 을 삼가는 것입니다.(계목 1-5는 일상으로 지키는 것이고, 6-8은 특별하게 지켜야 하는 것으로 추가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 계목들 중 일부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들은 불교도들이 춤, 노래, 음악, 영화, 향수, 장식물과 화려한 것들에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재가 불교도들이 이런 것들을 삼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오락과 기분 좋은 일들을 삼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수행의 한 방편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에만 그 계목들을 지키는 이유는 독실한 불교도들입니다. 이런 오락물과 장식물들을 멀리 하는 이유는 단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감관을 평정하게 하고 마음을 닦아서 감각적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계를 지키면 이러한 꾸미기가 영원한 나 또는 에고가 있다는 자기 믿음만 증대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도와줍니다. 그것들은 마음의 열정을 증대시키고 영적인 계발을 방해하는 감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때때로 그것들을 삼가함으로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약점을 극복하는 데에서 진전을 이루고 자제력을 훨씬 더 잘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블교도들은 이런 것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런 계목들을 지키는 것이 죄책감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겸손해지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그것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지하고 기꺼이 하는 마음을 갖고 계를 오계와 팔계 둘 다 지키면 그것은 공덕행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은 이번 생과 다음 생에, 사물의 실상을 제대로 보는 지혜를 계발하는 데 있어 특별히 큰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계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능한 자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자비심
자비심이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그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해 퍼뜨릴 수 있는 매우 강력한 힘이 됩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충분한 물질적 부와 지적인 발전이 있습니다. 그것이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학문이 깊은 지성인, 뛰어난 작가, 재주가 많은 웅변가, 철학자, 심리학자, 과학자, 종교적 조언자, 훌륭한 시인과 강력한 세계 지도자들이 적당하게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인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에 진짜 평화와 안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족한 것은 정신성과 사람들 사이의 자비심 혹은 선의입니다. 물질적 이득은 본래 영구적인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큰 범위로 다른 사람들과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의 마음 안에 평화가 구축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성취하는 진짜 길은 부처님이 주신 충고를 따르는 것입니다.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우선 비폭력이라는 고귀한 원칙을 실천해야 하며 늘 이기심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줄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악행은 우리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기 때문에 육체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 투쟁을 삼으면 안 됩니다. 악에 대항해 싸우는 데에는 보복보다 비폭력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사악함을 조장하는 것이 바로 보복의 본성입니다.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또한 이기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인데, 이것은 개별 자아에 대한 사랑이거나 개별 자아에 대한 이익 추구를 의미할 뿐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도 그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그 신을 사랑해서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다른 종류의 사랑을 가르칩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진정한 평화를 유지하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해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애타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살이 육체의 활동을 끝나게 하는 것과 똑같이, 이기심은 영적인 진보를 할 수 없게 합니다. 불교에 있어서 자비심은 정서적이거나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증오, 질투, 잔인함, 적대감과 원한을 모두 뿌리 뽑아 버리고 난 뒤에 청정해진 마음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자비심입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자비심은 마음의 청정을 유지하고 심적으로 오염된 환경을 청정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보살이 실천하는 사랑이 이런 종류입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사랑은 사랑 받는 대상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순수합니다. '사랑'이라는 낱말은 인간들이 체험하는 매우 광범위한 감정을 커버하는 데 사용됩니다. 불교도들은 이기적 사랑인 '프레마(Prema)'와 순수한 애타적 사랑인 '자비 또는 메타(Metta)'를 구별합니다. 한 성이 다른 성에 대하여 혹은 같은 성을 가진 존재들 사이에서 원초적인 동물적 욕정에 치중하는 것은 또 다른 존재에 대한 우호 감정의 개념을 매우 나쁘게 해 왔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여러 형태의 감정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일반적 표현 아래에 들어갑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기적 사랑과 애타적 사랑이 있습니다. 파트너의 필요나 느낌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끌어내어질 만족에만 관심이 있을 때 이기적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질투는 통상 이기적 사랑의 한 징후입니다. 반면에 애타적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전 존재를 포기할 때 느끼게 되는데,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위해 그런 사랑을 느낍니다. 인간은 통상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이기적 사랑과 애타적 사랑이 뒤섞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하면서도 보상으로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이기심과 이타 양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지만,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은 우리가 '마이트리(Maitri)' 또는 '미트라(Mitra)' 라고 부르는 형제간의 우애 혹은 친구들 사이의 우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사랑은 그 사랑이 특정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분류에는 성애가 있는데, 여기서는 파트너들이 육체적 호감을 통해 서로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그것은 현대 오락에서 아주 잘 써먹는 종류이며, 십대들을 열중케 하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것에서부터 성인들 사이의 가장 복잡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커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것이 보편적 사랑인데, 자비라고도 부릅니다. 부처님이 표출해낸 위대한 덕성이 일체 중생을 모두 끌어안는 이런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당신의 왕국, 가족과 쾌락을 포기하여 인류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길을 애써서 찾았습니다. 당신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그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애 동안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하위 존재는 낙심했을 수 있지만, 부처님이 되기로 수기를 받은 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자비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끝없는 사랑은 인간뿐 아니라 일체 중생들에게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서적이거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경계가 없고 차별도 없는 사랑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랑과 달리 보편적 사랑은,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도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했다고 해서 절대로 끝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큰 행복과 만족을 만들어냅니다. 보편적 사랑을 가꾸는 사람들은 호감이 가는 희열과 평정심도 가꾸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고귀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쓴 《부처님의 옛 길》이라는 책에서 피야다시 스님은 "사랑은 활동적인 역량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동은 모두 결점 하나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후원하고 즐겁게 해주며 다른 사람들이 슬픔을 정복하고 최상의 희열을 성취하는 길을 더욱 쉽고 평탄하며 더 적합하게 만들어 준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가꾸는 방법은 증오하는 나쁜 생각을 멀리하고 미움이 없는 좋은 점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체에 따라 그리고 업에 따라 생각을 하게 되면, 진실로 증오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증오란 점점 더 많은 어두움을 키워내는 어리석은 느낌의 방식이고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증오는 제한하지만 사랑은 풀어줍니다. 증오는 억제하지만 사랑은 해방시켜 줍니다. 증오는 죄책감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평화를 가져옵니다. 증오는 요동치게 하지만 사랑은 조용하고 고요하게 합니다. 증오는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통합시킵니다. 증오는 경직시키지만 사랑은 부드럽게 만듭니다. 증오는 방해하지만 사랑은 도와줍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증오에 따르는 과보와 사랑의 이익을 바르게 연구하고 이해함으로서, 우리 모두 사랑하는 마음을 배양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불교에 있어서 사랑의 본질을 《자비경》에 상세히 설해놓았습니다. "어머니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나뿐인 자식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에 대한 끝없는 마음을 가꾸도록 하라. 그 끝없는 사랑에 대한 생각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어떤 미움도 없이 어떤 적의도 없이 상방하방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하라." 만약 우리의 적들이 우리 잘못과 약점을 지적해주면,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 진정한 보시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줄이기 위해 보상으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자유롭게 줄 수 있다면 진정한 보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보시의 본질은 그 선물에 대해 보상으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 선물에서 어떤 물질적 이득이 생기기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교역 행위를 하는 것일 뿐이지 보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시를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빚을 졌다'고 느끼거나 그들을 통제하는 방법으로서 보시를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고마워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되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말지 꼭 고마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보시행은 좋은 것이고, 매달린 끈도 하나 없으며,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양쪽을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줍니다. 보시의 공덕행은 모든 종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자신을 지탱하기에 충분할 만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극빈자들에게 아끼지 말고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행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네 종교나 정치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개종을 시키려는 감추어진 동기를 갖고 이루어진, 그와 같이 주는 행위는 진정한 보시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 성장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획득하려는 강한 욕망과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잘 챙기지 않으면 탐욕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소유물에 대한 강한 집착을 없애야 합니다. 대신에 그들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 자기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줄 때에는 몸의 행동으로서만이 아니라 자기 가슴과 마음도 함께 담아 보시를 해야 합니다. 주는 행위에는 모두 틀림없이 기쁨이 있습니다. 통상적 자선 행위로 주는 것과 보시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통상적 자선 행위에서는 다른 누구인가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우리는 연민과 친절에서 우러나온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시를 행할 때에는 그 목적이 덕행을 가꾸고 이기심과 탐욕심을 감소시키는 데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보시는 이해력과 더불어 행해지는데, 이는 탐욕과 고통의 원인인 '나'라는 생각을 줄이고 근절시키게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시가 불교도들이라면 각자 실천해야 할 매우 중요한 품성이며 부처님이 깨달음에 앞선 여러 전생에 실천했던 첫 번째 바라밀행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에, 그 사람은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삼보의 위대한 품성과 덕성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보시를 행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들은 많습니다. 물질적인 것들--배고픈 사람에게 음식물을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과 옷을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사업에 우리의 지식, 기술, 시간, 에너지 또는 노력을 제공해 줄 수도 있습니다. 곤란에 처한 친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거나 좋은 상담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존재들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삼갈 수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무력한 존재들에게 생명이라는 선물을 해주게 됩니다. 헌혈, 안구 •콩팥과 심장 등을 기증하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몸의 일부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공덕을 짓고자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위대한 연민(자비심)에 마음이 움직인 일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여러 전생에 걸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 몸의 일부를 주어버렸던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당신 생명을 희생하기도 하였으니, 그분의 너그러움(아량)과 자비심은 그렇게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위대한 자비심을 가장 위대하게 하는 것은 그분이 인류에게 준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 곧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불법입니다. 불교도에게 온갖 것 중에서 최고의 선물은 불법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지녔습니다. 사람들이 청정한 마음으로 불법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진리를 실천하면 변화하는 데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과 마음으로 더 큰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 때 잔인했었다면, 자비롭게 됩니다. 한때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불법을 실천함으로서, 증오심에 불타던 사람은 더 자비롭게 되고, 탐욕스럽던 사람은 더 너그러워지며,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들떠 있던 사람은 침착해집니다. 불법의 참 맛을 보아 왔다면 그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뿐 아니라 내생에도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인간 장기 기증에 대한 불교의 입장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가 죽은 뒤에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릴 목적으로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보시행을 이루게 되는 것이 분명한데, 이 보시행은 영적인 혹은 종교적인 생활 방식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다나(Dana)는 불교에서 자선이나 너그러움을 표현하는 팔리어 용어입니다. 이 공덕을 짓는 전형은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1. 물질적인 것이나 세속적인 소유물을 주거나 나누는 것 2. 자기 자신의 신체 기관을 제공하는 것 3.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생명을 구하는 값진 일에 기여하는 것
이와 같은 보시행을 통해 마음에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를 줄일 수 있고 자비심, 연민과 지혜의 위대한 덕성을 계발하고 가꾸기 시작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고통을 줄이는 목적을 위한 것이며, 온갖 형태의 고통을 완벽하게 소멸시키는 길을 닦기 위한 것입니다. 장기 기증과 같이 고귀한 행동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주로 존재의 실상(진짜 본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자기 몸의 어느 일부나 장기를 떼어내면 그 장기 없이 그 다음 생으로 가야 한다거나 혹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잃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는 합리적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본인의 의식이 무너져 가는 물질적 몸을 떠날 때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각자의 다음 생을 결정짓는 것은 의식을 다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일부 종교가들은 이렇게 다시 연결시켜주는 의식을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정신'이나 '마음의 에너지'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지, 그들 각각의 에너지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은 몸의 물질적 구성분자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땅 요소는 흙으로 돌아가고, 물 요소는 흐름으로 돌아가며, 열과 바람 요소는 대기로 돌아갑니다. 몸을 어떻게 잘 보전하였든 상관없이 그리고 금속관에 들어가든 나무 관에 들어가든 몸이 분해 •부패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계속 새로운 환생으로 가는 것은 의식뿐입니다. 장기가 썩어 없어져 버리게 하는 대신에, 오늘날 기술과 수술 기법이 발달하여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심장과 기타 장기들을 사용하거나 이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기 기능 장애자 숫자가 끝없이 증가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좀 더 많은 이해력이 있는 구성원들이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죽고 난 뒤에 자기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지원자로 나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일류를 편안하게 하는 일을 돕기 위한 이 고귀한 목적에 결합하는 것이 이해력이 있는 사람들 모두의 의무입니다. 얼마 전에는 "여러분! 장기는 남겨두고 떠나세요. 그게 여기서 필요하다는 것을 하늘은 압니다."라고 인쇄된 승용차 스티커도 있었습니다.
※ 동물의 생명에 대한 불교의 입장
만약 동물들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누구인가가 창조했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일부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인육을 먹기도 하므로,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동물들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동물들은 현재만 의식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과거나 미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살아갑니다. 마치 미래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들도 기억하고 상상하는 기능이 발달할 때까지는 현재 안에서만 삽니다. 자의식은 성숙과 더불어 오는 기능입니다. 인간들은 사유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간극은 우리 인간이 사유 기능을 발전시키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정도까지만 넓어집니다. 불교도들은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동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먹을 것, 잠잘 곳, 보호와 감각적 쾌락을 찾기 위해서만 자기 본능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동물들이 인간들보다 뛰어납니다. 개는 매우 예민한 청력과 후각 능력을 갖고 있으며, 곤충들은 더 예민한 후각 능력을 갖고 있고, 매는 속도가 더 빠르며, 독수리들은 훨씬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더 현명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개미나 꿀벌들에게서도 배울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 동물적 속성을 아직도 많이 갖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 또한 갖고 있습니다. 불교는, 누구인가가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동물을 창조했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을 위해 동물들이 창조되었다면, 산 생명의 고기를 먹는 것이 그 본성이기 때문에 인육을 먹는 일부 동물도 있으므로,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동물들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도들에게는 일체중생을 사랑하고 그들의 관심을 인간의 복리에만 한정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자비심을 실천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각기 이 세상에 존재할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우리 인간이 어떤 생명체이든 그 목숨을 앗아갈 권리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그러하듯이, 동물들도 두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상처를 주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은 잘못입니다. 설사 동물들이 가끔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고 느낄지라도, 그들을 파멸시키는 데에 우리 지성과 힘을 잘못 사용하면 안 됩니다. 동물들은 우리의 동정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을 파멸시키는 것이 그들을 쫓아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각기 이 세계를 유지하는 데에 무엇인가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살아가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룬스는 자신의 저서 《이성의 길잡이》에서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대개 살짝 구워서, 하지만 가끔은 날 것으로 체계적으로 개걸스럽게 먹어대는 피조물들과 관련해 도덕을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말 •개 •고양이나 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사슴이나 어린 송아지의 목을 잡아 베어 가르고 즉석에서 피를 마시거나 소시지를 만들어 먹으며 그 고기를 씹어댄다. 그들이 애지중지하며 기르는 말이 마구 먹어대는 사슴보다 더 고귀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실상 고양이, 개와 말은 잡아먹지만 소는 일을 하는 가축으로만, 그리고 개는 자신들과 재산을 지키는 데에만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버린 작은 새나 금붕어를 그리며 통곡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아니면 단지 쾌락을 위해서 낚시 바늘로 고기를 잡거나 재미로 새를 쏘기 위해 멀리까지 여행을 합니다. 일부에서는 게임 삼아 동물을 사냥하려고 깊은 밀림과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애완용으로 똑같은 동물을 돌보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씨를 미리 알아맞히느라 개구리를 기르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다리를 자르고 튀겨 먹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빛 나는 새장에다 정성을 기울여 새를 돌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새들을 아침 식사거리로 삼습니다. 모두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 뿐입니다. 각 종교에서 모두 '우리 동료 인간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일부 종교에서는 '똑같은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더 사랑하라'고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우주 안에 있는 일체 중생에게 동등한 보살핌과 자비심을 보여주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그 점에서 불교는 최고입니다. 어느 중생을 파멸시킨다는 것은 곧 우주 질서의 혼란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에서 어느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해서든 어떤 형태의 잔인한 행동을 하는 데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동물 희생 제의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죄 없는 동물을 왜 죽이려고 하는지 묻자, 그 사람은 "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동물의 생명이 신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값이 나가는 인간의 생명은 신들을 더욱 기쁘게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당신을 희생물로 쓰라고 제안하였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은 부처님의 사실적인 몸짓에 감동받아 동물을 희생물로 바치는 제사를 포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잔혹성은 통제되지 않은 우리 탐욕심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동물을 파멸시키고 그들의 자연스런 권리를 박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런 이기적이고 잔혹한 행동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은 위협받고 있으며, 만약 다른 생명체들이 생존할 수 있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 땅 위에서 우리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특정 생명의 존재가 인류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이 땅, 물과 공중에 사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가장 큰 위협이지만, 반면에 다른 생명은 일부 살아 있는 존재에게만 위협이 되고, 따라서 그들은 단지 자기가 살기 위해서만 다른 생명을 취할 뿐 쾌락이나 통제되지 않은 탐욕을 위해 그렇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기 때문에, 멸종이라는 위협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이 각기 이 행성과 대기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파멸시키는 것은 우리의 문제와 필요를 극복하는 해결첵이 아닙니다.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 오늘날 관용의 필요성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리석게도 나쁜 일을 저지른다면, 내 한 없는 사랑의 보호를 그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그에게서 오는 약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게서 더 많은 선이 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선의 방향만을 내보낼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매우 불안하고 지쳐 있으며, 두려움과 불만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명예, 재산과 권력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취해 있습니다. 그들은 감관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매일 매일을 두려움, 의구심과 불안감 속에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과 위기의 시대에 사람들이 자기 동료 존재들과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기는 어려워져 갑니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 수 있도록 관용과 이해가 크게 필요합니다. 세계는 교조주의와 서로 용인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질병으로 피를 흘리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마치 앞서의 천년 세월 동안 하늘이 다양한 신앙을 가진 순교자들을 태우는 연기로 가득 찼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나라의 흙이 다양한 정치 투쟁의 제단 위에 뿌려진 피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종교가 되었건 정치가 되었건 사람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사명감을 가져 왔으며, 다른 생활 방식에 대해서는 공격적이었습니다. 실상 십자군 정신이 갖고 있었던 불관용성은 종교의 기록을 망쳐왔습니다. '진보'라고 크게 떠들어댄 지난 세기, 기계장치와 발명의 세기를 되돌아봅시다. 전화 •전기 모터 •비행기 •라디오 •텔레비젼 •컴퓨터 •우주선 •인공위성과 전자 기기 등 새로운 기술의 발명 대열은 눈이 부십니다. 그러나 똑같은 세기 동안에, 진보에 있어서 마지막이라고 여겨진 이러한 온갖 발명품들을 개발해온 이 땅의 사람들이 총검이나 총알이나 폭탄으로 다른 사람들 수백만 명을 학살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온갖 위대한 '진보' 안 어디에 관용의 정신이 자리했었습니까?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지구 바깥의 공간을 탐험하는 데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구상에서 평화롭게 그리고 조화를 이루며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인간들이 결국 달과 다른 행성들을 더럽게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은 오늘날 매우 현실적입니다. 물질적 이익을 위하여 현대인들은 자연을 난폭하게 다룹니다. 그들의 정신적 활동들은 자기 쾌락을 충족시키는 데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인생의 목적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는 인간의 삶과 그 궁극의 목표에 대한 착각의 결과입니다. 이 착각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좌절 •공포 •불안감 •불관용과 폭력을 만들어냅니다. 실은 오늘날 불관용은 아직도 종교의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고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을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그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기독교들이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살고, 불교도들이 팔정도를 따르며, 무슬림들이 진정으로 '모두가 형제라는 생각'을 따르고, 힌두교들이 일치해서 자기들의 삶을 정형화한다면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이 이룩될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적 스승들의 매우 귀중한 가르침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관용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관용은 지극히 불명예스럽고 개탄할 일입니다. 부처님의 충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증오에 찬 사람들 가운데서도 증오 없이 살아가니 아! 얼마나 행복한가. 증오에 찬 사람들 속에서도 우리는 증오하지 않고 살아가네.
아무 장애 없으니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네. 탐욕스런 사람들 속에서도 우리는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리." 《법구경》 제 197-200게송
※ 뷸교의 장례 의식
적당한 불교 장례 의식은 간단하고 엄숙하며 위엄을 갖춘 종교 의식입니다.
많은 불교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듯이 불교식 장례는 간단하고 엄숙하며 위엄을 갖춘 의식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장례의식 속에 불필요하고, 불교와 관계도 없는 이질적인 내용들과 미신적인 관습을 많이 포함시켜 왔습니다. 불교와 관계도 없는 이질적인 것들은 사람들이 전통과 풍속 습관에 따라 다양합니다. 이러한 전통적 의식들은 과거에 삶의 본질, 죽음의 본질과 죽음 뒤에 오는 삶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 의해 소개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관념들이 이른바 불교식 관습으로 편입되자, 비판자들은 그런 경비가 많이 들고 의미도 없는 장례 의식을 이유로 불교를 비난하기 일쑤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과 불교 전통을 공부해온 딱맞는 사람에 접근한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방식으로 불교식 장례를 행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불교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의식과 의례에 돈과 시간을 허비하도록 부추긴다고 하는 나쁜 인상이 만들어져 온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입니다. 불교는 이런 저급한 관습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도들은 사체의 매장이나 화장에 관해 특별히 까다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불교 국가들에서 화장을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위생상,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도 화장을 하는 것은 권장할 만합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만약 계속해서 사체가 값비싼 땅을 차지하게 한다면, 어느 날인가 남아있는 땅 중에서 이용 가능한 것은 모두 죽은 사람들 차지가 되고 산 사람들은 살아갈 땅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사체를 화장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일부 있습니다. 그들은 화장이 신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과거에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반대해 왔습니다. 화장이 매장보다 훨씬 더 적절하고 편리하다는 것을 그런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불교도들은 '어느 날 누군가가 와서 묘지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거나 유골 단지에서 꺼낸 재에 생명을 불어넣고 천당에 갈 사람이 누구인지, 지옥에 갈 사람이 누구인지 결정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의식이나 정신적 에너지는 남겨진 육체나 뼈다귀, 재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체는 단지 죽은 사람의 생명이 차지했던 낡아 부서지고 텅 빈집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쓸모없는 나무토막'이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만약 죽은 사람을 잘 묻어주지 않거나 한껏 추켜세운 비석을 무덤에 세워주지 않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온 세상의 사방을 헤매고 다니며 한탄하고, 울부짖고, 때때로 친척들을 혼란스럽게 하기까지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믿음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써서 죽은 사람의 사체나 재를 특정 장소에 매장하거나 모시면, 죽은 사람이 이롭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은 사람을 진정으로 명예롭게 하고 싶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기부를 하고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자선활동이나 종교 활동과 같은 공덕행을 해야 하지, 값비싼 의식과 의례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도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가 지어온 선행과 악행에 따라 어딘가에 윤회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모든 열정을 넘어선 아라한만이 죽은 뒤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그들의 최종 목적인 열반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