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레 지겨워져 아주 염증이 나는 것들이 종종 있다.
어느날부턴가 갑자기 유명세를 치르며 모든 매스컴에 총동원돼, 채널을 돌릴 때마다
시선에 꽃히는 연예인들을 보기란 곤혹스럽다.
대형마트의 계산대 입구에까지 마지막 구매의 손길을 기다리며 쌓여 있는
자일리톨은 어떠한가. 그 맹목성이 싫어 동네 수퍼에서 다른 껌을 고를라치면
뽀얀 먼지가 켜를 이루고 있는 지경이다.
그러나 대개 그 염증은, 내가 그 본질을 미처 알아채기 전에 내 뇌리에 주입되어
하나의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치환한 듯 한 낡은 교육의 유산들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종왕, 이순신, 신사임당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유년시절부터 내 뇌리 속에 역사 속 인물이기보다 하나의 아이콘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시대가 바뀌어도 절대 변치 않을 불문율처럼 그들의 위상은
변함없어 보인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통해 유년시절 위인전을 통해 만났던 이순신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김훈은 그 특유의 미려한 문체와 자유로운 일탈의 행보로 문단에서 독자적인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자건거 여행을 하며 써낸 에세이집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책은 한 땀 한 땀 수놓은 듯한 치밀한 문체로 인해 쉬이 읽히진 않으며 , 개인적
으로는 기자출신이면서도 그가 보여준 탈정치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입장이다. 또한 작년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화장'은 문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반페미니즘적인 뉘앙스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그것도 국민적 영웅의 자리에 있는 위인을 소설로 다시 그려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훈은 이 책의 앞머리에서 <칼의 노래>가 그냥 소설로 읽혀지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기존의 이순신이 지닌 아우라가 독자들을 일방적인 상상의 세계로 무작정 몰고가기란
애당초 무리였음을 , 작가 자신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 기대한 것은 '이순신 다시보기' 였으며, 지겨워 염증이 날 것
처럼 덧칠해져있는 그 영웅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것이었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이 화자로서 소설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의 문체는 돋보이며 미려한 가운데 간결하기까지 하다.
독백체의 이 문체가 서사성으로 흐르기 쉬운 전쟁담을 시적인 서정성으로 풀어나감
으로써 이순신은 기존의 이미지에서 많이 탈피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작가의 문체로 인해 이 소설은 미학적인 전쟁소설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영웅적인 장군의 모습에서 벗어나 식은 땀을 흘리며 꿈을 꾸고, 혹은 늦은 밤을 홀로
울며 , 전쟁과 백성의 살이에 대해,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적에 대해 고뇌하고 통찰하는
실존적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__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2권에서)
책 전반에 걸쳐 위와 같은 독백체의 고뇌가 많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선조를 위시한 당시 조정의 무능함이나 명의 오만과 위선. 왜의 야마적
찬탈, 백성들의 무참한 삶이 군데 군데 아프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읽고 나서 개운치 않았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영웅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이 이 소설을 낳게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이순신의
실존적 모습까지 엿보게 되었지만 결국 이것은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지닌 아우라의
확장이 아니던가. 이순신은 무장으로서의 용맹과 위엄에다 섬세하고 치열한
내면까지 그의 몫으로 가져간 것이다.
이것은 탈영웅의 시도인가, 고도로 기획된 영웅의 이미지 구축인가.
요즘 우리 문화판이 심상찮다.
<무인시대>, < 영웅시대> 가 아니면 신데렐라 드라마들이다.게다가 곧 방영된다는
< 불멸의 영웅 이순신에 이어 < 바다의 왕 장보고>까지 .
영화도 <바람의 파이터>에 이어 <역도산>이 상영될 것이고 서세원이 재기를 꿈꾸며
<도마 안중근>의 메가폰을 잡았다고 한다.
한 시대의 영상문화가 이렇게까지 치우쳐도 되는 것인가.
이런 남성성이 판을 치는 문화는 심히 거북하다. 분명 비정상적이고 심각한 상황인데도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늘, 전경린에 의해 다시 태어난 <황진이>를 종일 기다리고 있다. 얼른 그녀를 만나
김탁환의 소설에서 못다한 회포나 실컷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엔 그 때 못다한 얘기를 다 나눌 수 있을까? 둘 다 온전히 열릴 수 있을까?
난 마음의 준비가 다 됐는데 택배 아저씨 왜 이리도 안 오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