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바야시 우네오(小林采男)
황해도 “옹진광산” 소유주인 일본인 사장의 이름은 “고바야시 우네오(小林采男)”이나
보통 “고바야시(小林)”로 부르는데 그분은 일인(日人)이지만 인품이 온유하여 한인(韓人) 종업원에게도 일인(日人)과 거의 동등한 근로조건을 제공하였고, 특히 일본인 사업가들이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한국내 장학사업(경성 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광산과 신설 및 성남중학교, 춘천농업학교 설립)에 거액을 투자했으며, 국내 도처에 광산을 소유한 광산재벌로 황해도 “옹진광산”과 강원도 “상동광산” 대구 인근의 “달성광산”도 그분의 소유였다.
해방이 되자 그분 소유의 모든 광산은 미군정(美軍政)이 관리하게 되었고 미군정이 끝나자 대한민국 국영기업체가 되었는데 그 중에 으뜸은 ”상동광업소였다. 피난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된 옹진광산 출신들이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었던 것은 고바야시 사장이 소유했던 많은 광산 중에 전략 광물인 텅스텐을 생산하는 “상동광업소”가 6. 25동란 에도 가동 중이었고, “옹진광업소” 와 “상동광업소” 소장으로 근무를 했던 분이 상동광업소 본사에서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의 이름과 공덕은 상동광업소 정문 앞에 있는 비석에 음각(陰刻)되어 있다.
◼ 송덕비(頌德碑) 그리고 상봉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듯이 상동광업소 입구에 비석이 하나 있다. 그 비석은 “이상구(李相裘)선생 송덕비”이다. 그분은 일제 강점,수탈기에는 황해도 “옹진광산”소장, 해방 이후 6.25 전에는 상동광업소 소장, 그 이후에는 본사에서 상무이사(부사장)을 하다가 퇴직하신 국내에서 몇 명 안 되는 광산기술자이다.
그분이 상동광업소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당시 6.25 전황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서울을 수복한 후, 본격적인 북진을 시작할 때, 각급 전투 중에 전사 또는 부상을 입은 병력을 대체할 병력이 긴급하게 필요하게 되자, 정부는 텅스텐 생산을 위하여 징병에서 잠정기간 제외했던 상동광업소의 젊은 종업원들을 징병하여 전선으로 보냈고, 이러한 이유로 상동광업소는 조업인력 부족으로 정상적인 가동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6.25 이전에 상동광업소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모두 1,300여명 이었으나 6. 25로 인하여 300여명의 직원이 징병되어 전선에 투입되고, 400명은 피난을 가는 등 소재 확인이 불가능 하였다고 함)
이러한 난관을 해결할 묘책을 본사에서 근무하는‘이상구’상무께서 찾아냈다.
그분은 본인이 황해도 “옹진광산” 소장 재임 시 함께 근무했던 종업원 들을 찾아내서 상동광업소에 투입하면 옹진광산과 상동광업소의 생산 Process가 거의 같으므로 간단히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부의 협조를 얻어서 옹진광업소 직원들이 군산과 목포 피난민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들을 데리고 올 상동광업소 보유 트럭 여러 대를 수용소에 급거 내려 보냈다고 한다. 선친 말씀에 의하면, 수용소에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황해도 옹진광산 출신 피난민 들은 사무실 앞에 집결하라”는 방송이 오전 내내 나오기에 함께 피난 온 동료들과 사무실 앞에 갔더니, “상동광업소”라고 쓴 트럭이 여러 대 대기 하고 있었고 상동광업소에서 내려 온 인솔자가 “상동광업소에 조업 인력이 부족하여 그 곳으로 옹진광산 출신 종업원을 긴급 투입하기 위하여 정부의 협조를 받아서 여러분들을 데리러 왔다”고 하면서 전후좌우의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면서 이는 정부의 동원 명령이니 거부하지 말고 전원 응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수용소 사무실 앞에 옹진광산 출신들이 모두 모이자 상동광업소에서 온 인솔자가 인적사항 등을 확인하고 부인 등 가족은 나중에 꼭 데리러 올 것이라고 말하고, 옹진광산 출신들만 탑승케 하여 한 번도 가보지 못 했지만 귀가 닳도록 좋은 회사라고 들어오던 강원도 영월의 상동광업소로 출발 하였다고 한다. 출발하기 전에 모두들 수용소에서 지급 받은 담요 등을 챙겨 갈려고 했으나 인솔자가 “상동에 가면 입을 것, 먹을 것은 차고 넘치고, 숙소도 준비가 잘 되어 있으니 수용소에서 지급 받은 낡고 냄새나는 물건은 모두 두고 가라”고 하기에 모두들 남아 있는 가족에게 남기고 왔다고 하셨다. 그 당시 수용소에서의 식생활은 허기만 면할 정도로 매우 열악했다고 한다)
그때 상동광업소로 가신 분들은 상동광산이 옹진광산과 광물의 종류는 다르지만 조업 과정은 옹진광산과 비슷해서 일을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으나 인력이 많이 부족해서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셨고 전쟁 중이라도 회사에서 제공하는 식사와 의류 그리고 급여 등 처우는 무척 좋았다고 하셨다. 그때가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51년도 다.
(옹진광업소 출신들이 애경사가 있거나 친목회 등이 있으면 떼를 지어 몰려다니니까 상동 사람들은 옹진광산에서 온 사람들을 “옹진패”라고 불렀다. 1952년 3월에는 “한미중석협정”이 채결되었고 1952년 12월부터 미군이 상동광업소 경비와 출하를 지원하기 위하여 대대 병력(3개 중대)을 파견하여
2개 중대는 치랭이골 입구(본부 위치), 모교 운동장, 황지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는 세송에 분산 배치하고 중석 출하품을 집하하여 출하를 대기 하는 대기역(待期驛)인 “송학역”에 1개 중대를 배치했다)
고향에서 살 때 정문 앞의 “이상구선생 송덕비”를 보면 그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선친으로 부터 “옹진광산” “피난민 수용소” “상동 정착” 등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에 어려서 부터 그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많은 세월이 흐른 2010년 캐나다 소재 ‘Wolfe Mining’ 에서 상동광업소 재개발을 할 때 개발회사의 요청으로 2년간의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고향에 들어가니 상동광업소 정문 앞에 도로 옆에 우뚝 서 있던 그 분의 송덕비가 보이지 않았다. 그 비석의 행방을 수소문해보니 상동광업소 폐광 이후 비석이 방치된 상태로 있었는데 상동읍사무에서 상동에 “광산 박물관” 건립을 계획 중인데 박물관이 완성되면 박물관에 전시하고자 읍사무소 창고 벽에 세워 놓았다고 하기에 읍장님과 담당 공무원을 설득하여 그곳에 보관 중인 대한중석 “대한중석 안봉익사장 송덕비” “상동광업소장 이상구 선생 송덕비” “노두 발견 기념비” 알류미늄 주물로 제작된 “上東坑” 문패를 찾아와서 회사 안에 설치했다. 그러고 나니 어찌나 마음이 편하던지…….
◼ 부모님의 상봉
인력 부족으로 조업에 지장을 받던 상동광업소가 옹진광산 출신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부족 인력을 충원하여 현장에 투입함으로서 정상적인 조업이 예상보다 조기에 이루어지자 옹진광업소 출신 종업원들은 회사가 약속한 데로 흩어진 가족과 상봉하게 해 달라고 회사와 노동조합에 요청했고 노동조합에서는 본사를 찾아가서 종업원의 소망을 수용하여 줄 것을 적극 건의 하였다. 회사에서는 종업원의 소망이 담긴 노동조합의 건의를 수용하여 조업 정상화에 기여한 종업원에 대한 격려와 보상 차원에서 가족들이 거주할 숙소 지원과 군산과 목포 피난민 수용소로 상동광업소 트럭을 내려 보내서 헤어졌던 가족을 모두 상동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그때 어머님께서도 회사의 트럭을 타고 오심으로 아버님과 상봉이 이루어졌다.
◼ 이름(姓名)
나는 성(姓)은 박(朴) 이며 이름은 상동(上東)이다.
성(姓)은 선택의 여지없이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이름의 끝 자인 동(東)자는 우리 박씨(沔川)의 대수관계(代數關係)에 따라 얻어진 돌림자 이므로 이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선택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 자(字) 상(上)자 뿐이다. 선친께서 선택하신 그 상(上) 자(字)가 성(姓)과 돌림자 동(東)자와 조합하여 내 이름이 완성되었다. 보통 아기를 출산하면 100일 전에 이름을 짓는데 나의 경우는 선친께서 다른 사람에 비하여 이름을 매우 늦게 지으셨다. 그 이유는 부모님께서는 어린 자식들을 모두 잃은 가슴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란 자식이 아프면 아픈 자식보다 자신이 더 아픈 심정일 텐데 부모님께서는 황해도에서 해방을 전후하여 모두 5명의 자식을 보셨는데 자식들 모두가 젖을 떼기 전에 전염병과 폐렴 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첫돌 또는 두 돌을 넘기지 못하고 잃었다고 한다. 그러니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자식 잃은 충격과 아픔이 마음속에 항상 내재된 상태에서 살아오셨다.
나는 부모님이 피난을 오셔서 남한에서 처음 낳으신 자식이다. 내 위에 형님이 없으므로 나는 태어나자 아버님을 기준으로 집안의 장손(長孫)과 종손(宗孫)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한 나를 부모님은 지난날 많은 자식을 잃은 아픈 경험이 있으므로 내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강박관념으로 나의 이름을 첫돌이 훨씬 지나도록 짓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두 돌이 가깝게 되도록 내가 죽지 않고 건강히 자라자 부모님께서는 “내가 부모님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라서 부모님과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아갈 것 같은 예감”이 갑자기 들어서 그 즉시 이름을 지으셨는데, 이름을 즉흥적으로 지으셔서 작명하실 때 걸린 시간은 몇 초가 안 된다. “너는 上東에서 낳았으니 이름은 上東이다”라고 작명 하시고 출생 신고를 하셨다고 하신다. (沔川(충남 당진)을 본관으로 하는 나의 세대의 이름은 동녘 동(東) 字를 끝 자에 쓰는데, 선친께서 상(上)자를 선택하여 “피난 나와서 정착하신 지명과 같은 “上東”으로 내 이름을 지으셨으니 선친의 기지가 뛰어나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머님이 나를 임신하고 계실 때 선친께서는 아들을 낳으면 “上東”이라고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에 이미 생각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포함하여 4남1녀를 상동에서 낳으셨다. 지금은 모두들 회갑을 지난 나이다.) 나는 명리학, 성명학, 관상, 수상 등등은 전혀 믿지 않지만 ”이름“에 따라 길, 흉, 화, 복 과 생사(生死)등이 결정된다는 성명학(姓名學)에 내 이름을 대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잠시 생각해 보니, 나의 이름이 “명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자식들에 의하여 구성된 20명 가까운 우리 가족 모두가 우애 있게 지내고 있고, 건강하고,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잘 담당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집안의 장손이며 종손인 나의 복이고, 그 복에 더하여 나의 주변에는 나를 항상 좋은 마음으로 대하여 주는 훌륭한 친구와 선, 후배가 많다. 이렇게 귀한 복이 내 이름 “上東”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