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대표 문화재 중 하나인 촉석루에는 지역 명가 선조들의 필적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하륜이 촉석루 기를 지었으며, 하수일이 촉석루 중수기를 지었다.
이외에도 정을보, 박융, 정이오, 하연, 강렴, 정문부, 한몽삼, 강대수, 하진 등의 각 성씨의 선조들이 남긴 필적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촉석루는 경남도문화재자료 제8호. 정면 5칸, 측면 4칸. 고려 말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이다.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했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했다고 전해지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했다고 돼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하륜(1347~1416)
촉석루기
누정을 짓고 운영해가는 것은 다스리는 자의 여가 활용일 따름이다. 그러나 한 누각의 세움과 황폐한 것으로 한 고을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 인심으로 말미암아 한 시대의 세도를 알 수 있다. 그런즉 어찌 하찮은 일이라 하여 함부로 여길 것인가. 내가 이러한 말을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 고을 촉석루에서 더욱 믿게 되었다. 누각은 용두사 남쪽 돌벼랑 위에 있는데 내가 소년 때에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누의 규모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바깥쪽에 벌려져 있다. 마을의 뽕나무와 대나무가 그 사이에 은은하게 비치고 푸른 석벽에 긴 모래톱이 그 곁에 서로 잇닿아 있다. …(이하 생략)
정을보(1285~1355)
황학이라 이름난 누 저 한 때의 일인데 최공의 수다 덕에 시에 남게 되었지. 올라 보니 경치는 변합이 없건마는 제영의 풍류는 성쇠가 보이누나. 고기 낚고 소 매던 곳 가을 풀은 시들고 백로 수리 놀던 물가 석양은 더디 지네. 사방의 푸른 산은 갓 그려낸 그림이요. 세 줄로 선 기생들 옛 노래를 부르네. 옥 술잔 높이 드니 산에 달은 올라오고 주렴을 반 걷으니 재엔 구름 드리웠네. 난간 잡고 둘러보매 천지도 작아 뵈니 우리 고을 특출 난 줄 이제 믿게 되누나.
박융(1347~1424)
진산의 형승이 남쪽에서 으뜸인데 하물며 강가에 이 누각이 있음에랴. 펼쳐진 산 층암절벽 그대로 그림이요. 무성한 숲 긴 대나무 맑은 물 곁에 있네. 푸르른 산 기운은 병풍 사이 이는 듯 희 새는 어렴풋이 거울 속에 떠 있는 듯 땅이 염험스러워 준걸 난 줄 알겠노니 성조에 착한 신하 끊이질 않고 나오네.
강렴(1544~1606)
여러 고을 함락된다 봉화 날로 오르더니 칼 이야기 등불 아래 흰 머리를 마주하네. 바다 요기 없앨 계책 어찌 기다릴꺼나 그대 노래 나의 술로 다시 누에 오르리.
정문부(1565~1624)
임진년 전화가 팔도를 흽쓸 적에 무고한 재앙 이 성루에 가장 처참하였어라. 굴릴 수도 없는 돌 이내 촉석 이루었고 강은 또한 무슨 맘에 절로 절로 흐르는가. 폐허를 일으킴에 신과 사람 힘 모으고 허공을 능지르니 천지가 함께 떳네. 모름지기 알라리 막부의 경영 솜씨 한 고을만 장려하게 진압할 뿐 아님을.
강대수(1591~1658)
전장에서 별 탈 없기 오직 이 곳 명구런가 무너지고 다시 세운 백 척의 다락이라. 천지에 흽싸 안겨 먼 산은 솟아 있고 고금에 넘실넘실 큰 강은 흐르네. 나루터 가장자리 배는 가로 놓여 있고 연파에 흡족한 듯 갈매기 떠다니네. 경물은 괜찮은데 좋은 일은 적으니 진양이라 강주는 시정도 쓸쓸해라.
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