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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2001년9월11일 禍曜日
작가 : 최 순조.
문성준은 뉴욕이 대규모 도시답지 않게 공기가 신선하여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 속내는 아들 때문이다.
문성준이 가족들과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35살 되던 해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둘째는 타고날 때부터 선천성 난청으로 늘 보청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렇긴 해도 꾸준히 병원치료를 받고 있으니 괜찮아질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둘째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학급친구들에게 이상한 아이로 취급 받아 마음이 상했다.
그러다 3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농아학교로 보내는 게 좋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문성준은 학교의 처사에 분개했고, 사회를 원망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이민이었다.
문성준은 아내를 설득시켰다.
“뼈 빠지게 일해서 뭣 하러 내 아들을 병신 취급하는 이런 나라에 세금을 내?”
“하지만 낮 설은 땅에서 어떻게 해요?”
현순영은 남편이 꺼내는 이민이라는 말에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녀는 수놓던 자수(刺繡)를 물리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문성준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뉴욕에 있는 선배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그 곳이 우리 성민이가 학교 다니기에는 더없이 괜찮은 곳이래. 우린…. 성민이를 위해서라도 가야해.”
현순영은 남편의 설득을 뿌리치지 못했다.
문성준은 이민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정상적인 아이들과 같이 학교수업을 받았다. 뿐 아니라 학교가 둘째를 위하여 별도로 난청극복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었다. 문성준의 가슴을 찡하도록 고마웠다.
둘째가 중학생이 되었으니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문성준은 세탁기계 설비회사를 꾸려왔고, 기계지식을 쌓는 일과 부족한 영어공부를 하느라 힘들었지만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런데 밤길 걷다 둔기로 머리 맞는 일이 생겼다.
Church Avenue
그 날의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문성준은 습관처럼 읽는 아침신문 칼럼에 실린 ‘운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습관처럼 아침신문을 읽는다고는 하나 칼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었던 그였다. 하지만 그 날 신문 칼럼에 있는 ‘운명’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미국으로 오게 된 게 선택의 결과였는지, 운명 때문이었는지 때때로 궁금해 왔던 그에게 맞아 떨어지는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생을 다하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태어나는 시기, 태어날 곳, 평생 가지고 가야할 자신의 모습, 누구를 부모로 삼고 누구와 형제를 맺어야할 것이며, 누구를 자식으로 맞이할 것인가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 같은 사회, 같은 조직, 같은 가족의 구성원으로 만나는 것도 인연이나 운명의 줄에 묶여서 이루어진다. 인간들이 사주, 궁합, 운명 따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중략.
현대사회구조는 대형 사고를 자주 일으킨다. 산업사회의 비만이 안겨주는 대형 사고는 많은 인명사고를 불러들인다. 전혀 만난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 순간의 사고로 같이 목숨을 버린다면 이것을 우연이라 하겠는가? 아니면 인연이라고 설명하려 하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성준은 금요일의 그 일도 운명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날 아침부터 줄 곳 Brooklyn 현장에 있었다. Church Avenue와 Northtrand Avenue가 만나는 그곳은 대부분 흑인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Brooklyn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늘 끊이지 않는 우범지역에 속했다.
문성준은 값비싼 공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작업현장을 단속하는 한편, 동네불량배들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하지만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낡은 건물에다 장소마저 협소하여 3천 파운드가 넘는 세탁장비와 지하실의 보일러 교체작업 여건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마무리가 잘 될 것으로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근처 Deli에서 햄버거 4개와 콜라 3캔, 우유 1팩 그리고 사과 몇 개와 바나나 한 묶음을 사왔다. 흑인 둘과 맥시칸은 콜라와 햄버거를, 샤오는 우유와 햄버거를 집었다. 그들은 힘들게 일한만큼 허기져 있었다.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작업 현장에도 아랑곳 않고 맛나게 먹었다.
다시 일하기 위해 일어서려 할 때 샤오가 쓰러졌다. 동료들은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샤오의 배가 부풀어 올랐고 음식물이 버물린 하얀 거품을 토해냈다. 급히 앰뷸런스에 실려 갔으나 병원도착 전에 숨졌다.
문성준은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 중 샤오의 신분이 문제되었다. 그는 정식직원이 아닌 일용직으로 밀입국한 자였다.
현지인 고용은 늘 인건비가 부담되었다. 현순영에게 회계 일을 맡긴 것과 베트남계, 스페니쉬, 흑인을 고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중국계 밀입국자들이 급증했다. 그들은 아침인력시장에 마구 쏟아져 나왔다. 문성준은 그때그때 부족한 인력을 아침인력시장에서 구하곤 했었다. 말하자면 샤오도 그날 아침 인력시장에서 데려온 자였다. 그런 그에게 보험과 노동법에 준하는 서류 한 장이 있을 까닭이 만무했다.
조사를 받을수록 샤오의 사인이 쟁점화 되었다. 사인이 음식물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진다면 책임은 Deli 가게와 우유 제조회사로 옮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 샤오의 신분이 밝혀져야 가능했다. 경찰은 사인과 상관없이 노동고용법위반, 노동안전법위반, 불법체류자고용, 탈세 등으로 문성준을 기소할 방침이었다.
N.Y 경찰
문성준은 이틀 동안 조사받느라 정신없이 없었다. 변호사를 부를까하다 먼저 담당경찰의 의견을 들어볼 요량이었다.
“변호사보다는…. 중국 커뮤니티 쪽에 알아보면 어떻겠소? 그리고 변호사가 필요하게 될 경우 아무래도 중국계 변호사가 이번 사건에는 적임자가 될 것도 같고….”
문성준은 흑인경찰의 두꺼운 입술에서 반가운소리라도 나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물었다.
“아는 변호사라도 있습니까?”
“가까운 곳에 있소. 여기서 두 블록 거리….”
문성준은 경찰이 말하는 동안 문득 사고가 나던 아침에 읽었던 칼럼내용이 떠올랐다. 혹여 지금의 일을 예견한 것인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것이야말로 예고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수록 마지막 부분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현대사회구조는 대형 사고를 자주 일으킨다. 산업사회의 비만이 안겨주는 대형 사고는 많은 인명사고를 불러들인다. 전혀 만난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 순간 사고로 같이 목숨을 버린다면 이것을 우연이라 하겠는가? 아니면 인연이라고 설명하려 하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성준은 불안해 지는 느낌을 지우려 머리를 가로저었다.
“싫소?”
경찰이 못마땅하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문성준은 머릿속의 생각을 털어내고 퍼뜩 말했다.
“Mr Chang이라 부르는 변호사인데…, 사무실은 W.T.C 빌딩에 있소. 음…, 여기로 연락 해 보시오.”
경찰은 넌지시 곁눈질하다 말했다.
경찰이 적어준 핸드폰번호로 전화를 한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는 교회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일단, 그 사람의 Full name과 그 사람을 데려 왔었던 인력시장 전화번호를 주십시오. 네, 네. 됐습니다. 아, 네…. 조금 있으면 예배가 시작되기 때문에…. 네, 그러죠. 월요일 오후가 좋겠습니다.”
문성준은 끝까지 설명을 경청해주는 그가 미더웠다.
다음날 오후 문성준이 W.T.C(World Trade Center) 빌딩을 찾았다. 미국 온지 7년이 넘었다. 그동안 수없이 지나쳤지만 발을 들여 보지 못해본 빌딩이다.
오후 2시까지는 아직 1시간 더 남았다. 로비 구석진 곳에 앉아 시간을 기다릴까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7층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비서가 맞이했다. 비서는 상담실로 안내하고 나갔다 잠시 후 들어와 말했다.
“변호사님께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십니다.”
문성준은 창가로 가 아래를 내려 보았다. 멀리 Brooklyn과 Staten Island를 이어주는 Verrazano Bridge가 우아한 신부의 자태를 하고 있다. 아스크림을 들고 서 있는 듯이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이 인형처럼 앙증맞다. Hudson강 위로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경비행기와 헬리콥터들을 따라 시선이 갔다. Brooklyn Bridge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고운 레이스를 걸친 듯하다. 아름다운 모습에 눈길 주는 것도 잠시였다.
눈길이 Brooklyn Bridge 따라 남쪽으로 갔다. 나흘 전 샤오가 쓰러졌던 Church Avenue가 보인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문성준은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때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들어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문성준은 손을 내미는 사내가 전화통화를 했었던 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문성준은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다시 말했다.
“너무 고마운 일이라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해야죠. 제 이름은 마이클 챙이고….”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같이 들어온 여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미국이름으로는 낸시라고 부르는데, 우리 중국이름으로는 쉬 라이(徐來)라고 합니다. 사무실에서는 함께 일하지만 퇴근하면 저와 같은 집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하….”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낸시 챙입니다.”
문성준은 여자의 손을 가볍게 잡고 말했다.
“성준 문입니다.”
“반갑습니다. Mr Moon!”
미소 짓는 그녀의 빨간 입술이 장미꽃잎 같았다. 챙은 동료 변호사이자 아내인 그녀와 더불어 국제무역 분쟁을 다루는 변호사일 외 중국 커뮤니티의 법률자문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Newjersey Bayonne에서 바라본 hudson 강 전경
“샤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사실을 오늘 오전에 알아냈습니다.”
낸시가 샤오의 고향사람인 밍을 찾았다는 말을 했다. 밍은 샤오와 함께 밀항한 자였다. 그는 얼마동안 샤오와 함께 아침인력시장에 나와 일하다가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곳의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일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고 했다.
“샤오의 신분을 알아야 중국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찾아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문성준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했다.
“아내가 그를 만나기 위해 내일 오전 비행기로 샌프란시스코로 갑니다.”
챙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 일이라면 응당 제가 다녀와야 할 일입니다.”
문성준이 재빠르게 대꾸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밍은 밀입국 때문에 체포된 것이 아니라 중국갱단과 휩쓸려 마약을 한 협의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챙은 전화만으로도 될 일을 일부러 시간 내어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했다. 문성준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비행기표는 제가 준비 하도록 하겠습니다.”
챙이 손을 저었다.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 아침 Newark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이미 예매해 두었습니다.”
챙은 그러면서 옆자리에 앉은 낸시를 향해 물었다.
“비행기가…?”
“오전 8시1분 출발하는 UA93편이예요.”
낸시가 대답했다. 문성준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는지 물었다.
챙이 웃었다.
“이미 많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문성준은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경찰서에서 소개받을 때만 해도 중국 이민자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소리만 들었다. 하지만 이처럼 헌신적일 줄은 몰랐다. 문득 며칠 전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중국인이 Flushing에 있는 15층짜리 건물을 매입한 기사였다. 건물을 매입하기 위하여 500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돈을 거출했다. 어떤 자는 10만 불이 넘었고, 어떤 자는 천불도 못되었다. 그들은 각자 추렴한 액수만큼의 지분을 나누었다.
뉴욕타임즈는 ‘한국전쟁 때 북한을 구해냈던 중국인의 인해전술이 뉴욕 부동산시장에 침투하다.’라는 표현을 썼다. 문성준이 중얼거렸다.
‘아! 500여 명이 공동 건물주가 되었다는 기사가 괜한 것은 아니었구나.’
문성준은 아내에게 두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지저분하고 의심 많은 뗏놈’만으로 알고 있었던 중국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현순영은 저녁상을 준비해주고 나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바로 준비 된다구요? 네, 네…. 고맙습니다.”
현순영은 까닭을 묻는 문성준에게 웃기만 하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녀가 잘 포장 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도대체 이게 뭐야?”
“인삼이에요.”
“인삼? 이걸 뭐하게?”
“당신은 참.”
그 때 전화소리가 울렸다. 챙이었다.
“늦은 시간 아닙니까?”
“아~, 아닙니다.”
“병원으로부터 사인이 밝혀졌다는 연락을 지금 받아서….”
문성준은 전화기를 고쳐 잡고 귀를 기울였다.
“내일 11시까지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알 수 없습니까?”
“서류를 경찰서로 넘겼답니다.”
“네~에, 그렇다면 앰뷸런스 서류는 어떻게 합니까?”
“아, 그 것은 내가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Mr 챙.”
“아닙니다. 우리 중국 사람의 일을 이토록 책임감 있게 신경 써 주시는 Mr 문에게 오히려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날 밤 문성준은 샤오의 사인이 궁금하여 안절부절 못했고, 현순영은 늦도록 자수를 놓았다.
챙은 여느 때처럼 상쾌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굿모닝!”
직원들과 아침인사도 밝게 나누었다.
Newark 공항을 이룩하는 UNITED 93편 항공기
자기 방으로 들어와 커피 잔을 들고 창가로 갔다. 구름 한 점 조차 허락하지 않는 청자 빛을 한껏 뽐내는 아침하늘이었다. 허드슨 강물은 진주구슬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하얀 물줄기를 긋는 요트들이 쟁반 위 구슬처럼 매끄럽게 흘렀다.
매일 아침풍경을 탐닉한 뒤 일하는 것을 버릇처럼 해 오는 챙이었다. 눈부신 하늘을 향해 심호흡을 가다듬고 자유의 여신상 뒤로 넓게 퍼져 있는 Bayonne시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로 실루엣처럼 나타나는 Newark공항에서 분주하게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이 깨알처럼 보였다.
챙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쯤 비행기에 탑승했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저에요. 지금 탑승하는 중이예요.”
낸시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08시01분 뉴왁발 샌프란시스코행 뉴나이티드 UA93편 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오니 속히 탑승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비행기 탑승을 재촉하는 공항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잘 다녀와요. 하니.”
챙은 사랑한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저도 사랑해요.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낸시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탑승구로 향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을 넘기지 않고 이륙했다. 창 아래로 키 자랑하는 맨하탄의 무수한 빌딩들이 보였다. 허드슨 강물과 이스턴 강물이 조우하는 Battery park 옆에 우뚝 솟은 W.T.C 빌딩이 청명한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낸시는 비행기가 움직이는 각도만큼 고개를 돌려가며 W.T.C 빌딩을 바라보았다. 남쪽 타워 빌딩의 사무실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을 챙을 떠올렸다.
남편이 입양하자고 했을 때 선뜻 응할 수 없었다. 남편의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10년이 걸렸다. 괜찮다며 위로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런데 비행기 방향이 서쪽으로 기울수록 입양하기로 한 아이를 못 보게 될 것이라는 안 좋은 생각이 불쑥거렸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남편도 못 보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까지 꼬리를 물고 따랐다.
낸시는 W.T.C 빌딩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했으나 비행기 방향은 서쪽으로 돌아섰다. W.T.C 빌딩도, 수많은 빌딩을 세워놓고 뽐내던 Manhattan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성준은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다.
“여보. 그 사람들이 우리 일처럼 도와주는데 그냥 있을 순 없잖아요. 이거라도 갖고 가세요.”
현순영이 빨간 보따리를 내밀었다. 문성준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말았다.
“이거 혹시, 어제 그 인삼?”
현순영이 웃었다.
“중국 사람들은 인삼을 좋아해요. 복을 가져준다고 빨간색을 좋아한다 해서 빨간 보자기로 쌌어요.”
“어허, 당신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그럼 이게 홍삼인가?”
현순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몇 년 산인데?”
“특별히 준비한 거라고 했잖아요. 그냥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그래? 이것 때문에 자동차를 가져가야겠네. 그나저나 길이 막힐지 모르니 실수 하지 않으려면 일찍 지금 나서는 게 좋겠어.”
벽걸이 시계가 8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요. 그 사람들에게 시간 실수하는 것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현순영은 그렇게 말하다 생각난 듯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안방으로 들어가 빨간 봉투를 들고 나와 인삼상자를 싼 보따리 속으로 넣었다.
“이것도 함께 주세요. 그나저나 당신, 오늘 정장하실 걸 그랬나 봐요?”
“정장은 무슨? 양복은 한국을 떠날 때 버렸어.”
문성준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생소한 풍경 같은 양복이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집에서 나와 B.Q.E(brooklyn queens express)쪽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Brooklyn으로 접어들 때 맨하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Brooklyn Bridge
문성준이 전화기를 들었다.
“9시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챙이 앉은 채 의자를 창가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경찰서는 바로 옆인데…. 그렇게 일찍?”
문성준은 백미러에 비치는 뒷좌석의 상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뭐 좀 드릴 것도 있고 해서….”
문성준은 아내가 준비한 물건이라고 은근한 자랑을 했다.
“그래요? 그렇게까지….”
챙은 문성준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을 창가로 옮겼다.
챙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제 3년 되었지만 힘없는 동포이민자를 위해 시작한일을 두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성준처럼 마음으로 고마워하는 이를 만났을 때는 더욱 그랬다. 어렸을 때 부모 따라 이민 와서 숱한 고생하였지만 지금은 행복했다.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할 때만해도 소수민족으로서 변호사 활동이 녹녹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되면서 중국과 무역거래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자 바빠지기 시작했다.
맨하탄 2nd Avenue의 작은 빌딩에 있던 사무실을 지금의 W.T.C 빌딩으로 옮겨 온 것도, 교회를 통해서 중국커뮤니티의 일을 보게 된 것도 모두 그 무렵이었다.
영어를 할 줄 몰라 불이익을 당하고 살아야만 했었던 부모의 아픈 지난날들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였다. 대학교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아내도 챙의 뜻을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주어 늘 고마웠다. 하지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 한지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다. 때문에 여자아이를 입양할 계획을 아내와 상의해 둔 상태였다. 내년 봄이면 아이와 상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따사로운 봄볕 같은 생각들로 웃음을 머금고 있을 때 옆방 사무실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났다. 챙이 그 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가질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아,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길이 갑작스럽게 많이 막힙니다. 좀 늦겠습니다.”
문성준의 목소리였다. 챙은 시계를 보았다. 8시50분이다.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챙은 전화를 끊고 생각의 끈을 다시 이었다. 입양신청을 할 때만해도 쉬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토마스 입양재단이 입양허가를 한 것은 2년 만이었다. 그는 요즘 들어 어떤 아이를 만나게 될까 부쩍 궁금했다.
귀여운 여자 아이를 상상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술렁거림이 아까보다 컸다. 그는 생각을 털어내고 인터폰을 눌렀다.
“그쪽에 무슨 일 있어요?”
“북쪽 타워 빌딩에 불이 났다나 봐요.”
비서의 목소리가 차분하지 못했다.
“불?”
챙은 눈살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물었다.
“비행기가 부딪혔다는 소리도 있고….”
챙은 비서의 입에 흘러나오는 비행기라는 말에 그만 웃고 말았다.
“아니, 무슨 비행기가 넓은 하늘을 두고 빌딩을 박아? 조종사가 술을 마시지 않고서야.”
챙은 그렇게 대꾸하면서 관광용 경비행기를 상상했다.
“뭐가 폭발했다는 소리도 있어요.”
이어지는 비서의 말이 진지했다.
“오늘 그쪽 빌딩이 좀 어수선하겠군.”
챙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끊었던 생각을 다시 이었다.
아메리카 에어라인 AA11항공기에 부딪힌 W.T.C 북쪽 타워.
자동차가 B.Q.E를 벗어나 brooklyn bridge를 지나려할 때 검은 연기가 보였다. 연기는 정면으로 보이는W.T.C 빌딩에서 나고 있었다.
“아침부터 웬 불이야?”
문성준은 고개를 빼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F.D.R(Franklin Delano Roosevelt) 남쪽방향으로 막 진입하려 할 때 도로가 정체되었다. 연기는 점점 심하게 뿜어져 나왔다. Battery Tunnel을 앞에 두고 자동차가 꼼짝 못했다. 사이렌소리를 쏟아내는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들만 W.T.C 빌딩을 향하여 무섭게 모여들고 있었다. 맨하탄이 마취주사를 맞은 듯이 마비되고 있었다. 운전자들이 자동차에서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이내 도로가 자동차와 운전자들로 가득 찼다.
문성준도 자동차에서 내려 W.T.C 빌딩을 바라보았다. 주사바늘 같은 안테나가 꽂혀있는 북쪽타워 빌딩 상층부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바람에 날려 남쪽타워를 서서히 감쌌다. 문성준은 은근히 불안했다. 챙이 있는 곳이 남쪽타워인지 북쪽타워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전화기 통화 버턴을 눌렀다. 챙이 받는다.
“Mr 챙…? 문성준입니다. 건물이 불타고 있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반가운 마음에 성급하게 물었다. 생각에 몰두해 있던 챙이 퍼뜩 정신이 났다.
“아~, 북쪽타워에서 사고가 났나 봐요. 여기는 별일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바람에 밀려온 검은 연기가 사무실 창이 있는 남쪽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 챙은 비로소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성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난 또…, 다행입니다. 여긴 온통 차들로 길이 막혀 사무실로 접근하는 것이 어렵겠는데 죄송하지만 미리 내려오시는 게 어떨까요?”
문성준은 약속된 시간에 경찰서에 도착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챙은 전화기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꾸했다. 왠지 그리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러시다면 경찰서에서 뵙도록 하시죠.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챙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몸을 가볍게 떨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아주 기분 안 좋은 느낌이었다. 그는 서둘러 인터폰을 눌렀다.
“샤오의 서류가 들어 있는 파일 좀 챙겨줘요.”
비서가 노란 파일을 들고 챙의 방으로 들어설 때 전화가 울었다.
“저예요.”
챙은 뜻밖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아니? 당신은 지금 비행기에 있어야….”
“비행기에 이상이 생겼어요.”
아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순간 챙은 놀라 뒤로 넘어질 뻔 했다.
“뭐라고?”
“크게 말 할 수 없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 했다.
“비행기 안에서 난동이 생겼는데…, 있다 다시 전화할….”
아내의 목소리가 사라진다.
“여보! 여보!!”
“삐~이.”
소리쳤으나 기계음만 계속난다. 챙은 직감적으로 비행기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아내 전화번호를 반복하여 눌렀다. 통화가 되지 않는다. 한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 던졌다. 그는 휘감아오는 불안한 생각 때문에 방안을 서성거렸다. 창 쪽으로 검은 연기가 굽이쳐가는 게 보인다. 연기는 더욱 짙고 검었다. 챙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급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출발하셨나 해서요.”
문성준이었다.
“아뇨 아직.”
“네, 저도 지금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어서….”
그때 챙의 전화기에 통화신호가 들어온다.
“그래요? 아! 지금 전화가 들어오거든요. 나중에 다시….”
문성준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북쪽타워 빌딩이 커다란 굴뚝같았다. 점점 많아지는 연기가 심상치 않았다. 도로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자동차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반짝거리는 물체가 눈가를 훑는다. Verrazano Bridge 위 상공에 뜬 비행기다. 문성준은 등골이 오싹했다. 비행기 고도와 방향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저것이, 저기 왜? 왜, 나타났지?”
W.T.C 남쪽 건물로 돌진하는 United Air Line 175 항공기
한편 문성준의 전화를 받다 낸시의 전화를 받은 챙은 가슴이 답답했다. 낸시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무서워요.”
“무슨 일이야?”
“비행기가 납치 되었어요.”
“뭣이라고?”
챙은 금세 얼굴빛이 파래졌다. 그때 옆 사무실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챙이 반사적으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앞으로 비행기가 달려들고 있었다. 챙은 머리카락이 주삣거렸고, 오줌이 찔금 나왔다. 공포가 휘감기는 찰나에 죽음이 떠올랐다. 떨리는 소리로 다급히 말했다.
“Honey, 비행기가 내게로 와!”
낸시는 대답이 없다. 유리창에는 청자 빛 아침하늘도, 진주구슬 같은 허드슨 강물도, 자유의 여신상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거대한 비행기로 가득 찼다.
챙은 아내를 떠 올렸다.
“Honey!”
그는 무의식적으로 아내에게 작별을 고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동물적 반응이었다.
“Honey! I love you!!”
한없이 간절한 챙의 목소리가 무선을 타고 낸시에게 향하는 그 순간에 비행기가 달려들었다. 비행기는 개펄 속으로 사라지는 게처럼 W.T.C 남쪽타워 빌딩 속으로 박혔다. 검붉은 용암이 튀고 반대쪽으로 파편들과 화염을 뿜어 나왔다.
“Oh, my god!!!!!!”
문성준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행기가 부딪히는 순간 자각존재가 상실되었다. 시간은 죽었고 덩달아 온 신경도 마비되었다. 모든 것이 죽거나 정지된 순간에 눈물샘이 꿈틀거렸다.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문성준은 정신을 수습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번호를 수 없이 누르고 귀에 대었다 떼기를 반복하였으나 챙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길거리는 온통 사람들의 아우성소리,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 소리로 버무려졌다. 문성준은 넋을 잃고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연기는 불쪽타워 빌딩이 심했고, 검붉은 불꽃은 남쪽타워 빌딩이 심했다. 불꽃은 어림잡아 80층 이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챙의 사무실이 있는 87층은 이미 화염에 휩싸인 것 같았다. 불꽃을 볼수록 불안감이 더했지만 챙은 무사할 것이라는 믿고 싶었다.
문성준은 챙이 자신의 전화를 받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챙이 몇 층쯤 내려오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바삐 W.T.C 빌딩 쪽을 향하여 뛰었다. 뛰면서 전화기를 계속 눌렀다. 연결되지 않는다. 자꾸 불길한 생각만 덤벼든다. 그럴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Wall street 서쪽 방향으로 들어설 무렵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자지러졌다. 문성준은 뛰기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구멍이 따갑다. 겨우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들어 빌딩을 쳐다보았다.
“OH! NO! NO!!!"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고함소리였다. 남쪽타워 빌딩이 움찔한 것이다. 순간 문성준은 슈퍼맨을 생각했다. ‘이럴 때 슈퍼맨은 뭐한단 말인가?’ 그 생각도 잠시였다. 빌딩이 다시 한 번 움찔한다 싶었는데 상층부분이 꺾이고 하얀 먼지가 일어났다.
“아! 안 돼!”
문성준의 외침소리 따라 빌딩이 힘없이 무너졌다. 마치 텀블링체조의 마지막 모습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문성준은 아연질색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설령 챙이 현관으로 나섰다하더라도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 같았다. 호흡이 가파르고 복근이 거칠게 움직였다. 눈물이 마구 솟구친다.
빌딩의 흔적을 지워낸 자리에 연기에 희석된 유리가루, 콘크리트가루, 쇳가루, 종잇조각들이 어우러져 허리케인처럼 어지럽게 몰아쳤다. 거리는 온통 분진으로 덥혀갔다.
콘크리트분진이 도시를 하얗게 만들어갔다. 문성준도 눈썹까지 하얗게 되도록 분진을 뒤집어썼다. 털어내려 할수록 유리가루가 살갗을 파고들어 몸이 가시덤불에 갇힌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목구멍은 따갑고 호흡이 어려웠다.
무너져 내리는 W.T.C 빌딩
하늘을 뒤덮은 분진가루에 태양이 가려 사방이 어두웠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사물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울부짖음만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눈이 침침하다.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동공이 따가워 함부로 닦을 수도 없다. 이대로 주저않았다가는 분진가루 때문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피할 곳은 자동차 밖에 없었다.
문성준은 자동차 세워둔 곳으로 되돌아갔다. 안개 같기도 한 회색가루 속에 사람, 소방차, 경찰차, 구급차가 실루엣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각자 고유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문성준은 낡은 영사기의 화면 보듯 헛보고 뛰었다.
자동차가 세워둔 곳에 도착했을 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땀이 분진가루를 붙잡아 살갗에 더욱 밀착시켰다. 얼굴과 목덜미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따갑다. 희뿌옇게 나타난 자동차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건물파편을 맞아 깨진 유리가 그물처럼 얼기설기했고 그 위로 분진가루가 눈처럼 쌓였다. 자동차로 피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문성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뛰어다녔다. 자세히 보니 뛰어가는 방향이 일정했다. ‘아, 강!’ 문성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강바람이 불어오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성준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아내가 준 상자가 생각났다. 잠시 망설이다 자동차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찌그러진 문짝은 잘 열리지 않는다.
얼마간 문짝과 실랑이를 하고서 겨우 열었다. 뒷좌석에 놓아둔 빨간 상자가 눈에 뛴다. 상자를 집어 올리는 순간 보자기가 풀어졌다. 상자가 떨어지고 뚜껑이 열렸다. 인삼이 후드득 흩어지고 코끝으로 인삼냄새가 확 달려든다. 혼미했던 정신이 맑아진다. 흩어진 인삼 틈에 빨간색 봉투가 보인다. 아내가 잃어버릴 뻔 했다면서 챙겨 넣어준 봉투였다. 문성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봉투만 챙겨 자리를 떴다.
피한 곳이 staten island ferry terminal이었다.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혼란스러웠고, 분진가루가 자욱했다. 터미널 안은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기침소리로 어수선했다. 이따금 hudson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숨통을 열어주었다.
“08시45분 아메리카 에어라인 AA11항공기가 W.T.C 북쪽 건물에 충돌하였고, 09시3분 유나이티어 에어라인 UA175 항공기가 W.T.C 남쪽 건물에 충돌했습니다. 09시50분 W.T.C 남쪽타워가 붕괴되었고, 화염에 휩싸인 북쪽타워 빌딩도 위험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대합실 높은 곳에 걸려 있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촉각을 세웠다. 텔레비전 화면은 화염에 휩싸인 북쪽타워 빌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빌딩은 지칠 줄 모르고 검은 연기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이따금 검은 연기를 뚫고 불꽃이 내비쳤다. 그럴 땐 파편들이 허공으로 흩어져 전단지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북쪽타워 빌딩마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아나운서의 말이 안타깝게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빌딩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비추어졌다. 떨어지는 모습이 머리는 땅으로, 다리는 하늘로 향한 곧은 자세여서 마치 허공에 줄긋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문성준은 얼마나 뜨거워 참지 못하고 스스로 뛰어내렸는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잠시 후 빌딩이 움찔했다. 거친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빌딩이 무너져 내렸다. 남쪽타워 빌딩처럼 10초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또다시 분진가루가 요동쳤다.
“10시29분에 W.T.C 북쪽타워마저 붕괴….”
아나운서는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도시는 사이렌소리와 사람들이 울부짖는 통곡소리로 엉키고 엉키어있었다.
문성준은 낸시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안타까운 소식은 또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침통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09시 40분 아메리카 에어라인 AA77편 항공기가 워싱턴 국방부 건물과 충돌했습니다.”
문성준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나운서 목소리에 신경을 모았다.
“08시1분 승객 45명을 태우고 Newark공항을 이륙한 유나이티드항공 UA93편이 공중납치 되어 납치범들이 승객들과 격투를 벌이다 10시10분 펜실바니아 생크스빌에 추락하였습니다. 양비행기의 탑승자 중 생존자는 없다고 합니다.”
문성준은 현기증이 일어났다. 어제 아침 챙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던 낸시의 모습이 가슴 떨리게 되살아났다.
‘오전 8시1분 출발하는 UA93편이에요.’
문성준은 신음소리를 내며 가슴을 쓰다듬었다. 아침에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모든 것들이 영화의 한 장면이거나, 꿈속의 일만 같았다. 자꾸 눈물이 났다.
아나운서는 뉴욕 전체가 전화불통상태라고 말한다. 문성준은 아내 생각이 문득하여 전화기를 꺼냈다. 수차례 번호를 눌렀으나 아나운서 말대로 불통이다. 맨하탄 남부 곳곳에 경찰라인이 쳐졌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는 경찰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곳도 위험합니다. 모두 이곳을 떠나주세요!”
건물이 붕괴되면서 쏟아진 분진을 뒵어쓴 사람들.
Staten Island Ferry Terminal로 진입한 경찰들이 고함쳤다. 사람들은 겁먹은 얼굴들이었다. 사람들이 울먹거리며 줄지어 맨하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끝이지 않는 사이렌소리, 사람들의 아우성소리가 뒤덮인 맨하탄을 얼마나 걸었을까, 인파에 떠밀려 Brooklyn Bridge를 건너고 있었다. 두 개의 높은 빌딩이 있던 자리는 휑하고 검은 연기만 모락거렸다. 그 곳에서 만났던 챙과 낸시는 다정한 부부였다. 이제 영원히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유리가루가 박히는 것처럼 쓰렸다. 그 생각 끝에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거는 횟수만큼 불통신호가 계속된다.
전화기를 접고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에서 뭔가가 잡혔다. 무심코 꺼낸 것은 빨간 봉투였다. 봉투 속에 붉은 비단이 들었다. 손바닥 감촉이 매끄럽다. 비단을 천천히 펴보았다.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慈烏(자오)라는 바탕글 위에 금색실로 ‘一飯千金(일반천금)’라는 글씨가 수놓아져 있다.
문성준은 글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챙과 낸시에 대한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아내가 정성스럽게 새겨놓은 글씨였다.
문성준은 기어코 소리 내어 울었다. 목구멍이 꺽꺽거렸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울었다. 나오는 울음을 참지 않고 한없이 내버려두었다. 눈물이 뜨겁다. 뜨거운 눈물이 一飯千金 글씨 위로 떨어진다. 비단이 흥건하게 젖는다.
구름 한 점을 허락하지 않은 청자 빛 맨하탄 하늘이 화염에 휩싸여간다. 맨하탄의 2001年 9月11日 火曜日은 ‘禍曜日’이 되고 있었다. - 끝 -
慈烏(자오)
본초강목에 나오는 글귀로 은혜(恩惠)를 갚을 줄 아는 새라는 뜻으로, 까마귀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어미가 늙어 먹이사냥을 못하게 되면 봉양하는 새라는 말에서 비롯된 원래의 뜻은 ‘되돌릴 반(反)’ ‘먹을 포(哺)’의 ‘반포(反哺)’로서 ‘반포조(反哺鳥)’라고도 한다.
一飯千金(일반천금)
[사기(史記))]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실린 글이다. 한신이 자신에게 밥 한 그릇의 은혜를 베푼 노파에게 훗날 천금으로 갚았다는 뜻이 담겨있는 이 말은 조그만 은혜도 잊지 않고 보답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서 一飯恩(일반은)이라고도 한다.
9 11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
뉴욕시
W.T.C 빌딩과 함께 희생된 사람 : 5, 124명 / 아메리칸 항공 AA11편 탑승객 : 92명 / 유나이티드 항공 UA175편 탑승객 : 65명
워싱턴 디시
미국국방부 청사 : 125명 / 아메리칸 항공 AA77편 탑승객 : 64명
펜실베이니아
유나이티드 항공 UA93편 탑승객 : 44명
합계 : 5,514명.
다음은 AT&T[American Telephone & Telegraph Co(미국최대의 유‧무선 통신회사)]에 기록된 9‧11테러 당시 죽음 직전의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통화 했던 대화 내용이다.
(스튜어트T멜처가 부인에게)
여보.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근데 나는 아마 살 수 없을 것 같아. 여보. 사랑해. 애기들 잘 부탁해.
(C.V 오켄이 부인에게)
지금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지금 있는데 이 빌딩이 뭔가에 맞은 것 같아. 내가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여보. 정말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 안녕.
(마크 빙햄이 어머니에게)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어. 연기가 가득 찼어. 엄마! 나 마크야 우리 납치당했어. 저기 세 명이 있는데 폭탄을 가졌데. 엄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브라이언 스위니가 부인에게)
여보! 나 브라이언이야! 내가 탄 비행기가 피랍됐어. 그런데 상황이 아주 안 좋은 것 같아. 여보 나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 당신 다시 볼 수 있게 되면 좋겠어. 만약 그렇게 안 되면 여보. 인생을 즐겁게 살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 나중에 봐! 꼭! 사랑해.
(토마스 버넷이 부인에게)
여보! 우리 비행기가 피랍됐어. 아무래도 여기 탄 사람 모두 죽을 것 같아. 나하고 다른 두 명하고 뭔가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해. 사랑해 여보!
(베로니크 바워가 어머니에게)
엄마! 이 건물이 불에 휩싸였어. 벽으로 막 연기가 들어오고 있어.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엄마 사랑해. 안녕.
(대니얼 로페즈가 부인에게)
리즈! 나야 대니얼. 우리 빌딩이 폭격을 당했나봐. 난 지금 78층까지 내려왔어. 지금 괜찮은데 아무래도 동료들이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될 것 같아. 걱정 말고 나중에 봐! 사랑해!
(제르미 글릭이 부인에게)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우리 딸 에미도 정말 사랑해. 그 애 좀 잘 돌봐줘.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꼭 행복해야 돼.
만약 당신에게 마지막 시간이 주어졌다면 당신은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평소에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 아끼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