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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제 18장
=====18:1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 17:6에 이어 본서 기자는 여기서 또다시 왕정 제
도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간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앞서
17:6에서는 개개인의 종교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했었
다. 반면 본절에서는 자기 기업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밀려나는 약한 지파를 왕정
제도에 의해 강대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온전케 보존 할 필요성이 있음
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6 주석을 참조하라.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 생존 시에 기업
을 분배 받았었다(수 19:40-46). 그러나 가나안 정착 초기에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난 타 지파의 땅에 분산 거주하거나 새로운 정
착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1:34). 한편 1:34에서 본서 기자는 단이 분배받
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요셉 족속이나 유다 지파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
기 때문임을 암시했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그 이유를 왕이 없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
다. 따라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본서 기자의 주석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견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 삼손의 고향이자(13:2-5, 24) 단 지파의 기
업이던 소라와 에스다올(수 19:41)은 유다 지파와 단 지파의 경계 지역이다. 이중 소
라는 예루살렘 동쪽 약 6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며 에스다올은 소라의 동북쪽 약
2.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본래 이 소라와 에스다올은 유다 지파의 기업이
었는데(수 15:33) 훗날 기업을 재조정하면서 단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단 지파
는 이곳에 안주(安住)치 못하고 많은 수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하였는데(11절)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아모리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1:34 주석 참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 단 지파는 그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땅을 찾
기 위해 그들의 씨족 가운데서 용맹한 다섯 사람을 미리 정탐꾼으로 파견하는 등 나름
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아마도 단 지파는 이러한 준비를 하면서 마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재현하는 듯한 꿈에 젖었는지도 모른다(수 2:1). 하지만 약속의 유업조
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자들이 신개척지를 얻는다 하여 거기서 신실한 언약 백성의
모습을 존속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으로 남겨질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의구심 그대로 그들의 불순하고 패역한 자태는 본장에 확연히 기록되고 있다(5, 30절
등). 한편 단 지파의 북쪽 이주에 대한 기사를 요약하고 있는 수 19:47에서는 이 사건
으로 인하여 단 지파의 지경이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3
레위 소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 정탐꾼들은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북쪽으로 가던 도
중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신당(17:1, 5)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레위 소년
의 음성을 듣고 발을 멈추게 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레위 소년의 음성을 금방 알아들
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다음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 이 레위 소년이
베들레헴을 떠날 때(17:8) 소라와 에스다올 지역을 지나쳐 왔기 때문에 정탐꾼들과 친
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Wycliffe, Matthew Henry). (2) 에브라임의 방언은 특색이
있는데(12:6) 이 소년은 에브라임 방언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졌을
가능성도 있다(A.C. Hervey). 한편 이 밖에도 혹자는 단 사람들이 밤에 미가의 집에서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종소리(출 28:35)를 듣고 레위
인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으로 추측한다(Cassel). 그러나 본절은 분명히 단
사람들이 미가 집을 발견하고선 그곳에 유숙하러 가다가 레위 소년을 만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그 같은 추측은 개연성(蓋然性)이 없다.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 이 구절로 볼 때 단 사람들은
레위 소년이 생계 수단을 구하기 위해 떠돌아 다녔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는 정탐꾼들이 레위 소년을 금방 알아본 이유가 이전에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을 한층 짙게 해준다.
=====18:4
나를 고빙하여 - 여기서 '고빙하다'에 해당되는 '사카르'(* )는 임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본절에서 레위 소년은 자신이 삯을 받고서 제사장으로 고
용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종교인들이 얼마나 부패했던
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즉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세우심을
받는 성직(聖職)인데도 불구하고 레위 소년은 이에 대하여 천박한 직업 의식을 드러내
었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 또한 왕 같은 제사장
들로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성스러운 일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마 28:19;벧전 2:9).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상업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서는 아니되며, 다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피차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이
요청된다(고후 8:14). 왜냐하면 성도들이 누리는 복음은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9:18). 특히 교회의 교직자(敎職者)들은 자칫 천박한 직업 의식에 빠져
거룩한 복음 사역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삯꾼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 봉
사하기를 힘써야 한다(요 10:11, 12). 그리고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은 교직자로
하여금 복음 사역에 전무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행 6:4).
=====18:5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 1:1에서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 )께 신탁을 구했는데 본절에서는 단 사람들이 '엘로힘'(* )께 신탁
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이 레위 소년이 에봇과 드라빔(17:5)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Cassel). 한편 단 사람들이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 레위인이 섬기는 신이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가나
안의 어떤 신인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Goslinga). '여호와'와 '엘로힘'이란 신
명(神名)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창 1:1 주석을 참조하라.
=====18:6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 단 사람들과 달리 이 레위 소년은 '여
호와'(* )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간접적이나마 단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호와께 신탁을 구할 자격이 있는 합법적인 제사장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그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그 길을 주장하
고 계시니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는 뜻이다(Matthew Henry). 공동 번역은 이를 '그
들이 가는 길이 환히 트이도록 야훼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라'로 번역하고 있다.
=====18:7
라이스에 이르러 - 라이스(Laish) 또는 레센(Leshen, 수 19:47)이라고도 하는 이곳
은 오늘날의 '텔 엘 카디'(Tell el Qadi)에 해당된다. 팔레스틴 최북단에 위치한 이곳
은 헬몬 산에 가려 아람과 단절되어 있고, 레바논 지역에 의해서 페니키아와도 단절되
어 있어서 외침(外侵)을 받을 염려가 거의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그리고 요단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하여 용수(用水) 또한 충분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단 지파의 정착
지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더욱이 원주민들은 이러한 천연적인 조건에 타성이 젖어 외
침에 대해 무방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빈약했으므로 단 지파가 정복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 여기서 '한가하다'에 해당하는 '쉐케트'(* )는 '풍
족한 가운데 여유를 즐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공동 번역은 이를 '아쉬운 것 없이'로
번역하고 있다. 실제로 시돈인들은 동서 교역의 중개지로서 또한 상아 제품 제조 산업
따위로 많은 부(富)를 벌어 들여 풍족한 경제 생활을 구가하였다. 따라서 라이스 거민
들이 이러한 시돈 사람 같은 경제 생활을 누렸다함은 그들이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음을 의미한다(Goslinga, Pulpit Commentary).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 여기서 라이스 사람이 한가하고 평안했던 이유 중의 하나
로 권세 잡은 자가 없음을 들고 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왕들은 대체로 세습에
의한 독재자들이었고 이들은 외침을 막고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이유로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사람들을 징용에 끌어 넣었다. 그러나 라이스는 천연적인 요새(要塞)에 가까
웠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이다.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 당시 라이스는 시돈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시돈은
레바논 산맥의 장애로 인해 라이스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정치
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세를 누렸으므로 굳이 라이스에까지 간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라이스는 천연 방벽을 의지하여 사실상 독립된 생활을 누리고는 있
었으나 자체 내의 방어 체제를 구비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뒤에가서 단 자손의 침입
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28절).
=====18:8,9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매우 좋더라 - 본절에서는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 동기는 여호수아와 갈렙
이 제시한 가나안 정벌의 신앙적 동기(민 14:6-9)와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대조적인 것
이었다. 그들은 일단 외형적으로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 땅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이와 같이 신앙이 없는 자들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18:10
평안한 백성 - 이에 해당하는 '암보테하'(* )는 '방심한 백성'이란 뜻이
다. 이는 라이스 거민들이 물질적 풍요와 천연적 방어벽을 과신하여 안이한 심경에 젖
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 일반적인 성전(聖戰)의 구호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1:2;2:13;수 2:24;6:2;10:8;삼상 7:8)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서 단 사람들은 '엘로힘'(*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레
위 소년에게 신탁을 구한 것과 관계 있을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에 기록
된 성전 구호는 단순히 형식만 따랐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의 성전 구호와 비
길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 지파의 전쟁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
들의 정욕을 쫓아 행하는 전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당을
저버리고(11절)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0, 31절) 마치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수행하고 있는 양 행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오직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라는 표어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야 마
땅하다(고전 10:31). 그러나 현실의 복잡 다양한 제반 상황들에 적응하다 보면 그러한
표어가 한갖 공허한 추상적 원리로 머물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와 전혀 상반되는 일
을 하면서도 그 표어대로 살고 있는 양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러한 표어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 근
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함께 하사 모
든 대적들을 성도의 손에 붙이게 될 것이다(고후 10:4).
=====18:11
단 지파 가족 중 - 여기서 '지파'와 '가족'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 지파에는 오직 한 가족, 즉 '수함 가족'(민 26:42)만 있었기 때문이다. 13:2 주석
참조.
육백 명이 병기를 띠고 여기서 600명은 병기를 가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장정들
을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로서 이들 앞에 가도록 되어 있었다
(21절). 따라서 현재 라이스 정복 길에 나선 단 지파의 총 인원은 어림잡아 이, 삼천
명 정도였던 것 같다(Hervey). 이와 같이 단 지파의 인구 수가 과거 장정만 6만 여 명
가량(민 1:39;26:43)에서 이토록 현저히 줄어든 것은 아마 그동안 아모리 족속과 블레
셋 족속들의 압박에 의해 인원이 크게 축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는 아직
소라나 에스다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수는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
다. 그러나 아무리 인구 수가 급격히 즐어들었다고 해도 그 차이가 심한 것으로 보아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더 타당성 있는 견해라 하겠다(Matthew Henry).
=====18:12
유다 기럇여아림에 진치니 - 단 지파가 라이스를 향하여 북쪽으로 길을 떠난 뒤 처
음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머문 곳은 예루살렘에서 몇 시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이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도로상에서
약 14.4km 떨어진 지점이다. 일찍이 이곳 기럇여아림은 교활한 간계로 여호수아와 동
맹을 맺어 멸망을 피했던 기브온족의 네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수 9:17). 이 지역
은 단 지파에 의해 '마하네단'(Mahaneh-dan), 즉 '단의 장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
는데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유다 지경 내에 위치한 이곳은 삼손이 처음 여호와의 신께
감동되었던 곳이기도 하다(13:25). 한편 혹자는 본절과 관련 단 지파가 이곳에서 상당
기간 정착했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본절 이후의 사건은 본절과 분리된 것이 아
니라 연속된 사건인 점에 비추어 볼 때 단 지파는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내
라이스 정복길에 나선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13
거기서 떠나서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니라 - 기럇여아림에서 미가의 집이
있는 에브라임까지는 약 20km 정도의 거리이다. 이는 곧 걸어서 5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18:14
이 집에 - 이에 해당하는 '바바팀'(* )은 복수형이다. 그래서 KJV, NIV,
RSV 등은 이를 '이 집들에'(in these house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미가의 집이
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집이었음을 시사해 준다(Goslinga).
에봇과...부어 만든 신상 - 미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던 각종 우상들이다. 이에 대
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3, 5 주석을 참조하라.
=====18:15
소년 레위 사람의 집...이르러 - 미가의 집 중에서도 레위 소년이 머물고 있던 집
은 따로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은 아마 미가의 신당일 것이다(17:5). 본절을
통해서 보더라도 미가의 집은 많은 건물들로 상당히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안하고 -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들은 이전에 레위 소년을 만났었기 때문에(3-6
절) 그의 건강을 묻는 등 우호적인 표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루어 들이닥
친 자신들 때문에(16, 17절) 레위 소년이 놀라지 않도록 안심시켰을 것이다.
=====18:16
문 입구에 서니라 - 본절에서 18절까지는 도적떼의 모습을 생생하게 연상시켜 준
다. 문 입구에 선 무장한 600명의 단 사람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들의 동료들
이 일을 마치고 미가의 집을 나올 때까지 파수하고 있었다. 한편 이로 볼 때 미가는
어느 정도 군사력이 있는 소부족의 부족장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22절에서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단 지파의 뒤를 좇았던 것도 어느 정도 이를 뒷받
침해 준다.
=====18:17
그리로 들어가서 - 다섯 사람의 정탐꾼들은 레위 소년을 잘 설득하여 동료들이 있
는 문 밖으로 내보내어 함께 있게 하고 신당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1절). 한편 여기
서 '들어가서'에 해당되는 원어는 '알라'(* )로서 '올라가다'라는 뜻이다. 왕하
23:12이나 렘 19:13을 보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제단이 있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미가의 신당도 다락방이나 2층 건물에 있었음이 분명하다(Keil, Hervey).
문 입구에 섰더니 - 여기서 '섰더니'에 해당하는 원어 '나차브'(* )는 '배치하
다'라는 뜻도 지닌다. 이로 보아 단 자손들은 미가의 우상을 강탈하기 위해 600명의
군사로 삼엄한 경계를 폈음이 분명하다.
=====18:18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 단 사람이 신당으로 들어갈 때까
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레위 소년이 자기 주인의 우상들을 다 집어내는 것을 보고서
야 이제 놀라서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아마 이전까지는 단 사람들이 미가
의 신을 경배하려고 신당에 들어간 줄로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이에
대해 이 레위 소년은 돈으로 고용된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미가의 신상에 함부로 손 댄
것을 불경하게 여기지 않고 단지 도의적으로 주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탓했을 뿐이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Cassel).
=====18:19
네 손을 입에 대라 - '잠잠하다'는 말의 반복으로 '아무말도 하지 말라'(Don't say
a word, NIV)는 뜻이다.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 본서 기자는 단 사람들의 이러한 제안을 적기 이전
에 벌써 17절과 18절에서 레위 소년을 '제사장'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단 사람들이
레위 소년을 문안할 때부터(15절) 이미 그를 '제사장'으로 깍듯이 예우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아비'에 대해서는 17:10 주석을 참조하라. 이는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어이다.
=====18: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 여기서 레위 제사장의 타락한 본성을 또다시 보게 된
다. 처음에 그는 생계를 잇기조차 궁색한 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던 미가의
제안에 감격하여 한 개인의 제사장으로도 크게 만족했었다. 그리고 이 레위 소년은 미
가에게서 아들과 같은 사랑도 받았었다(17:10, 11). 그러나, 단 사람들의 새로운 제안
은 단순히 경제적인 충족 뿐만 아니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명예까지 부여하겠다
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번 물질에
혹했던 사람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자기 욕구를 채워 줄 대상이 나
타나면 언제든지 이전의 은인까지도 배반하는 법이다.
에봇과 드라빔과 생긴 우상을 취하고 - 이처럼 보다 나은 조건에 미혹된 제사장은
본래 주인과의 의리와 계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기가 앞장서서 우상과 종교 기물들
을 훔쳐 낸다. 그리고 단 지파와 동행한다. 이렇게 하여 미가의 가정을 타락시켰던 이
제사장은 이제 한 지파 전체를 잘못된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30,
31절).
=====18:21
그들이 돌이켜서...진행하더니 - 단 지파는 다시 라이스 땅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
들은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미가와 그의
이웃들이 뒤에서 따라와 공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한 조치였을 것이다(22절).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 - 여기서 '어린아이들'에 해당되는 '하타프'(* )는
실족할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자와 노
인들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다음으로 '물품'에
해당되는 '케부다'(* )는 시 45:13에서와 같이 '값진 것' 또는 '영화로운 것'
을 의미한다. 그런데 KJV에서는 이것을 '탈 것'(carriage)으로 번역하고 있고, RSV에
서는 한글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물품'(goods)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혹자는
'케부다'라는 단어가 '무거운', '힘든'이라는 뜻의 '카베드'(* )에서 파생된 것이
기 때문에 귀중한 물건을 가리키기 보다는 무거운 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
다(Cassel). 어쨌든, 이 물품들은 수레 같은 운반 수단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을 것이
다.
=====18:22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 미가는 제사장과 자기 신상이 없어진 것을 한참
후에 알고는 곧장 추격대를 조직하여 단 자손을 따라갔다. 배경은 다르지만 이 장면은
마치 라반이 야곱을 추적하는 장면(창 31장)과 유사하다. 특히 둘 다 가정의 수호신을
훔쳐갔다는 점(창 31:19)어서 그러하다. 아무튼 미가는 추적길에 나선 지 얼마 안 되
어 단 사람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 사람들이 어린아이들과 짐승들과 물품
들로 인해(21절) 빨리 진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23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지고 왔느냐 - 여기서 '모아가지고'에 해당하는 원어
는 '도움을 호소하다'라는 뜻의 동사 '자아크'(* )의 수동태로서 '함께 부름을 받
다' 또는 '함께 모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
지고 왔느냐'라는 단 사람들의 질문의 뜻은 '우리가 너희를 부르지도 않았고 너희 도
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모여왔느냐'라는 뜻이다(Pulpit Commentary). 이것은 미가
가 자신들의 뒤를 추격해 온 이유를 잘 알면서도 단 사람들이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
고 있음을 보여 준다.
=====18:24
나의 지은 신들 - 이처럼 미가는 은으로 만든 신상과 에봇, 가정의 수호인이 드라
빔(17:4, 5)들을 가리켜 스스럼없이 '나의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참된 신이
신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치 못한 영적 무지의 발로(發露)로 볼 수 있다. 7:2,
3 주석 참조.
=====18:25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 여기서 '노한 자들'이란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금방이
라도 공격해 올 것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삼하 17:8). 단 지파 사람들은 힘의 우위
를 내세워 자신들이 미가의 소유물 뿐만 아니라 미가와 추격대 전원의 생명까지도 빼
앗을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18:26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 본래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이 단지
자기 손으로 만든 신상을 소유하는 것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던 미가(17:13)였기
때문에 이처럼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와 대적하면서까지 신상을 되찾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현세적인 복에 몰두했던 미가로서는 자신의 목숨에 대해 남다른 애착
심을 가졌을 것이다.
=====18:27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 본서 기자는 라이스 거주민들에 대해서 거듭 이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7절 주석 참조. 아마도 이것은 본서 기자가 그러한 라이
스 거민들을 습격한 단 지파의 잔인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인 듯해 보인다
(Hervey). 한편 '...을 만나'에 해당되는 '보 알'(* )은 어떤 사람을 갑자
기 덮치는 것을 가리킨다(창 34:25).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수행하던 성전(聖戰)의 전형적인 표현이다(수 6:4;8:19;11:11). 단 지파는 처음 라
이스를 향하여 출발할 때부터 이 전쟁을 '성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바(10절)
라이스를 정복할 때도 철저히 그러한 의식으로 수행한 듯하다. 한편 이에 대하여 수
19:47에서는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서 기자는 여
기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적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라이스 당은 본래 단 지
파의 영토가 아니므로 그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정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본래 기업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약한 민족을
공격하는 침략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 단 지파의 타락상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18:28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다시 라이스의 지형적 여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라이스에 대한 단의 뜻 아니한 침략이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 '베드 르홉'(Beth-rehob)이란 지명의 뜻은 '르
홉의 집'이다. 민 13:21과 삼하 10:6에 따르면 이 지명은 소바 왕 하닷에셀의 아비 르
홉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아셀 지파의 지경(地境)인 훌레
(Huleh) 평지 윗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골짜기를 통하여 흐르는 물은 요단 강에 이르
게 된다.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 여기서 '상종하다'에 해당하는 '다바르'는 '친밀
히 교제하다'는 뜻 외에도 '사업상 교류하다'는 뜻이 있다. 이로 보아 라이스 거민들
은 지형상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국가간의 외교적 친선 도모나 경제적 교류 따위를 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18:29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 이곳 라이스는 가나안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7절
주석 참조. 그래서 이곳을 단이라고 칭한 이후 부터는 이스라엘의 전영토의 경계를 말
할 때에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란 말을 쓰게 되었다(20:1). 여기서 '브엘세
바'는 팔레스틴 최남단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기업이다(수 15:28). 한편 이때부터 실
제로 단 지파는 단 지역의 사람과 소라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로 분리되게 된 듯하다.
11절 주석 참조. 아무튼 이후로 성경에선 이들 지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든데
역대기에도 단 지파에 속한 인물에 대해서는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Cassel). 그
리고 요한계시록에도 열 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7장).
결국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이분(二分)되었던 단 지
파는 영적인 이스라엘의 족보에서조차 사라진 셈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단
지파의 거족적인 우상 숭배 탓으로 이해하고들 있다.
=====18:30
본절에서는 단이 라이스에 정착한 이후 독자적으로 행한 우상 숭배에 대해 기록하
고 있다.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 - 여기서 '요나단'은 본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
었으나 후에 단 지파의 제의를 받고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레위 소년'(14-20절)이
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없다(Wycliffe, Keil & Delitzsch). 그런데 그 외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본문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므낫세'로 읽도
록 모세(* )라는 히브리어 문자 사이에 작은 문자 '눈'(* )을 삽입하여 므나쉐
(* )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본절을 '므낫세의 손자'(the
son of Manasseh)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탈무드나 70인역(LXX), 수리아역 등을 볼
때 이것은 분명히 '모세의 아들'(the son of Moses)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
다(Keil). 한편 히브리어 성경 필경사들이 이와 같이 '모세'를 '므낫세'로 읽도록
'눈'(* )을 첨가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1) 모세의 이름을
신성시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란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명기함으로써 불경죄에 빠지
지 않기 위해서이다(Wycliffe). (2) 단 지파를 우상 숭배죄로 몰고 간 요나단을 모세
와 같은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 본절의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간에는 상
당한 이견(異見)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유수나 디글랏 빌레
셀에 의한 앗수르 포로 유수로 생각한다(왕하 15:29;17:6;25:8). 그러나 유대인 학자
데이빗 킴치(David Kimchi)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엘리 시대 때 블레셋이 법
궤를 탈취해 갈 때(삼상 4:17)로 생각한다(Keil, Hervey, Lange). 그러한 주장은 다음
과 같은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일리가 있다. (1) 31절에 '하나님의 집이 실로
에 있을 동안에'라는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로의 회막은 여호수아 때에 세워진
것으로(수 18:1) 사무엘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삼상 1, 3장;4:3) 사울 때에는 놉에(삼
상 21장), 그리고 다윗 때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상 16:39;21:29). (2) 미가의 새긴
우상이 앗수르의 침략 때까지 계속 해서 그곳에 있었다면 분열 왕국 시대에 여로보암
이 그곳에 다시 금송아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이 단에 금송아
지를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미가의 전통을 따라 행한 것이다(Keil). 17:3 주석 참조.
(3) 이스라엘의 기강이 바로 잡힌 사무엘, 다윗, 솔로몬 시대에까지 한 지파 전체가
그러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도록 용납되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자손
이 '사로잡힌 날'이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해 법궤가 빼앗기고 이스라엘이 내외적으
로 연약해졌을 때를 가리킴에 분명하다.
=====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 이러한 본절의 기록은 본서가 사무엘 시대 이
후에 기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Goslinga). 왜냐하면 회막이 엘리 시대까지는 실로에
있었으나 블레셋에 의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이후부터(삼상 4:21, 22) 실로에 없
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사무엘에 의해 실로의 회막이 라마로 옮겨졌을 것이라 보고 있
으나(삼상 7:17) 확실치는 않다(Hervey).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는 성막이 보관
되어 있던 실로였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정한 절기 때에나 기타 개인적으
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있을 때에 실로에 모였다(삼상 3:21). 이러한 관습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으로서,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동일한 언약 공동
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실로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심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단
에 신상을 세우고 섬긴 것은 언약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수
22:16).
사사기 제 19장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 17:6 및 18:1과 유사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여기
서 '그 때에'라고 한 것은 본장의 배경이 17, 18장과 동일한 시대임을 암시해 준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이미 왕정 제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점으로 보아 본장의 사건을
기록하던 시기는 사사기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이 지난 때임을 알 수 있다(Goslinga).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 전장(前章)에 이어 본장에 등
장하는 주인공도 레위인이란 점은 당시 극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여실히 증
거해 준다. 한편 여기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
(Shiloh)의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Keil). 그런데 레위인이 그곳에 '우거'
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레위인도 전장(前章)에 나오는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18:30)
처럼 에브라임 산지를 떠도는 나그네였음이 틀림없다(Pulpit Commentary).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 17:7에 나오는 레위 소년도 유다 베들레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곳에는 레위인들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이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는데, 고대 사회에서 첩을 취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첩 때문에 기드온의 가정이 파멸된 것처럼(8:31) 본장에서
도 이 레위인이 첩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창
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을 참조하라.
=====19: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 여기서 '행음하다'에 해당되는 원어 '자나'(
* )는 주로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란 행위나 또는 그와 같은 성향의 행음(行淫)
을 가리킨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자나'뒤에 '그에게 대항하여'라는 뚱의 전치사
'알라이우'(* )가있어서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그같은 행음을 하였음
을 보여 준다. 아마 이 레위인이 먼저 동일한 행음을 범하므로서 자기 첩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음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Moore).다음으로 여기서 '남편을 떠나'라
는말은 그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양자 간에 불화(不和)하여 서로 헤어진 것을 가리킨다
(Cassel). 한편 레 21:7에 따르면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
부정한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하케 규정되어 있다.그런데도 이 레위인이 이같이
행한 것은 당시의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19:3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맡하고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
면 `그녀의 마음에 말하고'이다. 이것은 레위인이 진정으로 그녀와 다시 화해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Wycliffe). 한편 율법상으로 살인죄(민 35:31), 간음죄(레 20:10) 부
모를 치는 죄(출 21:15) 등은 어떠한 제믈로도 속(贖)할 수 없다.그런데도 본문의 레
위인은 자기 첩이 넉 달 동안(2절)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오히려 그녀를 연모하므
로 다시 그녀를 데려오고자 했던것이다. 이로 볼 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거의
무시되고 있어 사회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음이 분명하다(Matthew Henry).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 나귀 두 필 중에 한필은 그의 첩을 태워 데리
고 오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그 여자가 다시금 남편을 따라 나서게 된 것도
그 같은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동해서였을 것이다(Hervey).
=====19:4
그 첩 장인 곧 여자가 아비의 그를 머물리매 - 여기서 '머물리다'에 해당하는 '하
자크'(* )는 붙잡다', 제지하다'는 뜻으로 강권(强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금방 그를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강권하여 몇 일 처가댁에 머물도록
종용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집에 머물도록 권하는 것은 대단한 예우이며 친절의 표시
이다(창 18:5). 이로 볼 때 레위인은 처와 화해하는 일 뿐만 아니라 장인의 사랑을 얻
는 데도 성공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삼일 동안 그녀와 함께 목고 마시며 편
히 쉴 수 있었다.
=====19:5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마음을 쾌활케
한 후에'가 된다(창18:5). 여기서 `쾌활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세아드'(* )는
`(마음을) 신선케 하다'라는 뜻의 동사 `사아드'(* )의 명령형으로서, 여기에는
강한 권고의 뜻이 담겨 있다. 한편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부를 데려올 때 일
정 기간 동안 처가댁에서 머문 후에 데려오는 풍습이 있었다(창24:55). 따라서 레위인
의 장인이 어떻게든 레위인을 그의 집에서 하루라도 더 유숙케 하려한 것은 아마 이같
은 풍습에서였을 것이다.
=====19: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 이처럼 레위인의 장인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연일 잔치를 베푸는 이면(裏面)에는 사위에게 자기 딸을 부탁하는 당부의 마음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과년한 딸이 아비의 집에 계속 머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근심거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은 행음하고서 남편과
헤어진 상태였으니(2절) 그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 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의 장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위가 자기 딸을 버리지 아니하고 잘 살아주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19:7
그 사람이...다시 유숙하더니 - 레위인 장인의 과민한 노파심과 레위인의 우유 부
단한 성격을 보여 주고있는 구절이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아직도 자신이 사위의 환심
을 살 정도로충분히 대접치 못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계속사위를 집에 머물게 하려
했을 것이다. 반면 레위인은 장인의 호의틀 떨쳐 버릴 정도로 심지(心志)가 굳지 못하
였기 때문예 계속 장인에게 이끌림 당했을 것이다.
=====19:8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해가 기울도톡 머물라 - 여기서 `해가 기울도록'이
란말은 `한낮이 지나도록'이라는 뜻이다(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Vol.2,
p.443). 대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고 아침 일찍이 떠나는 법이
다. 그런데도 레위인의 장인은 낮 동안 층분히 휴식한 후 오후에 길을 떠나라고 말한
다. 추측컨대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베들레헴에서 래위인이 거주하는 에브라임 산
지 까지는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늦게 출발해도 괜찮았기 때
문일 것이다.
=====19:9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 오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레위인
은 그의 장인과 먹고 마시는 동안 그만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밤이 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라 - 문자적 뜻은 `장막으로 돌아가라'이다. 한편 `장막`(Tent)는 당
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이다(20:8;왕상 12:16).
=====19: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아니하여 일어나 떠나서 - 이처럼 레위인이 밤중에
라도 집으로 돌아가려 한 것은 아마 그 다음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이었
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였으므로 안식일에는 성소에서
봉사하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 여기서`여부스 맞은편'은 예루살렘의 서쪽을 가리킨
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까지는걸어서 약 1시간 반 거리이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세겜 쪽의 에브라임 산지로 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서쪽에 있는 도로틀 반드시지나
야 한다. 한편 여부스(Jebus)라는 이름은 여부스 족이 다욋 시대까지 예루살렘을 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삼하5: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
11:4-9 강해, `예루살렘'을 참조하라.
=====19:11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 레위인 일행이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미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그러자 레위인의 종은 이처럼 레위인에게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들어가 밤을 지내자고 간청한다. 왜냐하면 밤 에는 들짐승이나 도적때의 공격
을 받기가 쉬우므로 더이상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인
은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부터 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종의 청을 거부했다.
=====19:12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 -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가나안을
정복 하였지만 아직 미 정복지가 남아 있었둣이(1:19-21,27-36) 예루살렘 역시 다윗
시대까지 가나안 후기 원주민인 여부스족(Jebusites)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일
컫는 말이다. 1:21 주석참조.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 기브아(Gibeah)는 예루살렴 북쪽 약6.4km 지점에 위치해 있
는 베냐민 지파의 지경이다(수 18:28).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고향
이기도 하다(삼상 10:26).
=====19:13
라마 -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수 18:25). 현재의 엘람
(er-Ram)으로서, 과거 여사사 드보라의 고향이자(4:5)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이기도
했다(삼상 7:17).
=====19:14
해가 진지라 - 레위인 일행이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완전히 져버려 더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라마 까지 가지 못하고 베냐민 땅 기브아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19:15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 레위인 일행이 앉아 있던 거리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공회(公會)를 열거나 재판을 행하기도
하며 장사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창 19:1 주석 참조.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 레위인 일행이 사람들이 많이 왕
래하는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들을 환대하는 기본적인 예절을 보이
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기브아 사람들의 성품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준다
(창18:3-8;19:2,3; 마25:43;벧전4:9).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 이었는데도(신10:19) 그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레위인과 그의 첩과 하인은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에서 머물기를 마다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성읍까지 오면서 가졌던 기대를 한꺼번에 잊어버리고 낙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Wycliffe).
=====19:16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레위인 일행에게 친절을 베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 한사람
을 소개하면서, 기브아 성읍에는 타지(他地)에서 온 이 한 사람 외에는 정직한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거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 )는 '나그네(손님)로서 체류(거주)
하다'는 뜻의 '구르'(* )에서 온 말로, 타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19:17,18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 노인이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레위인은 이처럼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중'이라고 대답을 했다. 당시 `여호와의 집
` 즉`회막'은 실로에 있었다(수 18:1;삼상4:3,4). 그런데 실로는 레위인의 집이 있던
에브라임산지(1절)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본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학자간에 서로 견해가 다르다. 먼저 혹자는 본절을`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
향으로'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그의 첩
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화목제를 드리러 실제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고 있었음이 분명
하다고 말한다(Cundall). 반면, 또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단지 `여호와의 집으로 가
는 중'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주장한
다(Cassel).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를 `나의집 으로'로 번역하고 있어서 카일
(Keil)의 주장이옳음을 반증해 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위인이 `여호와의 집이 있
는 방향'으로 간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의도를 가졌
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왜냐하면 실제로 레위인 일행은 그 노인으로부터 크게 환
대를 받았었기 매문이다(19, 20절).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프'(* )
는 `받아들이다'는 뜻으로. 가벼운 선심을 쓰거나 계산에 의거하여 일정한 혜택을 베
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뜨거운 마음으로 열렬히 환영하는것'을 가리키는 `
카라'(* )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로 보아 레위인 일행은 기브아에서 숙박비를
제공하려 해도 유숙할 장소를 얻지못했던 것 같다(15절).
=====19:19
우리에게는...부족함이 없나이다 - 레위인은 노인이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도륵 하
기 위하여 나귀 두 마리와 자신과 자기 첩과 종이 먹을 양식과 짚은 충분하다고 말한
다. 이러한 그의 말 속에는 기브아 사람들에게 단지 하룻밤 묵고 갈 숙소만을 요구했
는데도 그들이 받아주지 일았다는 탄식이 내포되어 있다(Pulpit Commentary).
=====19:20
그대는 안심하라 - 이 노인은 레위인의 염려를 이해하고 안심시켰다. 여기서 `안심
하라'에 해당하는 원어는 `솰롬'(* )으로서, 평안을 기원하는 히브리인의 인사이
다. 이러한 히브리 인사에서 우리는 지난날 애굽의 종살이나 광야의 방황생활 중에서
히브리인이 얼마나 평안을 희구(希求)했는지를 알 수있다.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 옛부터 거리에 앉아 있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가 후히 대접하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창18:1-8;19:1-3). 만일 그렇지
않을때는 공회 앞에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신10:19;욥 31:32). 따라서 그 노인은
전통적 관습대로 나그네가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상관없이 자기 양식으로 그들을
대접하려고 했던 것이다.
=====19:21
이 노인은 레위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귀도 잘
먹였다. 이는 곧 그가 진정한 마음으로 나그네들을 사랑하고 대접하였음을 잘 드러내
준다.
발을 씻고 - 고대 근동에서는 여행자들이 주로 샌달을 신고 흙먼지 길을 다녔다.
그러므로 손님을 영접하는 주인은 반드시 발씻을 물을 내어놓는 것이 예의였다(창18:4
;24:32;43:24;요13:5-14).
=====19:22
레위인과 노인의 만남(16:21절)을 다룬 본장의 이야기는 룻이 소돔 성에서 천사를
만난 이야기(창 19장)와 유사하다. 특히 본문22-24에 기록된 기사는 창19:4-8절의 기
사와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혹자는 본서 기자가 창9장의 기사를 인용하여 본문 속에
삽입한 것(interpolation)이라고도 주장한다.(Wellhausen). 그러나 전후 문맥이 엄연
히 다를 뿐 아니라 또한 시대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으므로 본문의사건을 결코 삽입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Cassel).
그 성읍의 비류들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베네 벨리알'(* )
로서 `벨리알의 자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벨리알'은 `무익한', `무가치한'이라
는 뜻의 형용사로서 주로사람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삼상 1:16에
서는 `악한 여자'로, 삼상25:25에서는 `불량한사람', 삼하 16:7에서는`비루한 자'로
각기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 벨리알을 사단이나 거짓 예언자로 언
급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 여기서 `두들기며'에 해당되는 원어 `미테두페
킴'(* )은 강조행 동사로 `스스로 흥분하여 매우 세게 문을 두드리는'
모습를 묘사한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이렇게도 번역했다. "그 비류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갈 모양으로 문에 달려들어 두들기고 있었다"(G. R. Driver). 이와 같이
기브아 비류들이 온건한 태도로서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레위인을 끌어내리려 했기 때
문에 집주인은 문을 열고 그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이다(23,24절).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듣지않았는데(25절), 이런 일이 후에 기브아와 통치자들에 의해 어떠한
정죄함이나 책벌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브아 성읍 백성들 전체가 암묵적으로 이 일
에 동참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 여기서 `상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 )는
분명 `성 관계를 가지다'는 뜻이다. 즉 기브아 비류들은 레위인을 끌어내어 남색(男
色)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소돔 사건의 재현인 둣한 인상을 준다. 과거 소돔인들의
음란한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을 초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사해(死海)
가 형성되었다(창 19:4-26). 한편 이 사해는 기브아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
였다. 그래서 기브아 사람들은 자주 그곳을 지나다녔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들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소돔보다
더 악하게 행하려 하였던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2, p.239).
=====19:23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하네발라'(
* ) 역시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7)이나 비 정상적인 관
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신 22:21)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성적
범죄를 지칭한다(삼하 13:12).
=====19:24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있은즉 - 노인은 기브아의 비류들이 워낙 완악하
여 말로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자기 딸과
그 레위인의 첩올 그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말했다.이는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家
父長的) 권위를 잘 반영해 주는 실례이다. 당시에는 남성의 권위로 말미암아 여성이
학대받거나 능욕을 당한다 해도 여성은 말없이 순종하여야 했다(11:39,40). 그러나 노
인이 취한 방책은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 즉 하나의 악을 막기 위해 또다른 악을 범하
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진정하나님의 공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상황논리에 급급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끝까지 비류들을 대항했어야 옳았던것이
다.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 자신의딸을 내어 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은 비류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같은 경내(境內)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는 해를 끼치려 하
지않은 것 같다. 아니면 그들은 남녀간의 성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비정상적인
남색(男色) 행위에만 관심을 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레 18:1-5 강해, `성경에
나타난 성범죄의 이해'를 참조하라.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그사람'은
노인을 가리킨다고 본다(Keil, Goslinga).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여기서 `그
사람'이란 분명히 `그 레위인'을 가리킨다. 그 레위인은 노인의 제안이 거절 되는 것
을 보고 그들이요구하는 것이 자신과 자기의 첩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즉 비록 사랑을 고백하며 설득하여 장인에게 데려온
아내 였지만 (3-10절) 이 레위인은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비류들에게 내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이기주의 성향을 보게된다. 그러
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반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사랑은 없
을 것이라고 교훈 하셨다(요15:13).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 기브아 비류들이 요구 한것은 레위인의 첩이아니라 레위
인 이었다(22절).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의 첩에게만 행음하고 만족하였는지 의문시
된다. 아마 그 비류들은 그의가 첩의 뛰어난 미모에 만족하였을 지도 모른다(Cassel).
욕보이다가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알랄'(* )은 `지나치게 하다' `철저히 실행
하다'는 뜻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교대로 겁탈했다'(taking turns raping her)로
번역 하고 있다.
=====19:26
그 주인의 우거한...문에 이르러 - 밤새도록 비류들에게 욕을당한 그 첩은 거의 초
죽음이 된 자신의 육신을 끌고 가까스로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 문 앞에까지 기어와서
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비록 이 여인이 남편에대한 분노 때문에 행음하였으나(2절
주석 참조),여기서 볼 때 그녀가 그 레위인보다 더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비록 자신을 내어버린 남편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이같이 사력을 다했던 것이다(Hervey)
=====19:27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내어 몰았던 이 비정한 레위
인은 간밤에 당한 공포스런 일을 생각하며 일찌기 그 성읍을 떠나 위험을 피하려고 했
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최소한의 관
심 조차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레위인에게는 그의 첩에 대한 육적인 사랑
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사랑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앞서 그의 장인
이 계속해서 떠나려는 이 레위인 사위로 하여금 자기 집에 하루라도 더 묵도륵 한 것
도 아마 자기 딸에 대한 이 레위인 사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8
절).
그 두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 새벽 미명에 홀로 도주하려고 허겁지겁 하던
레위인은 그의 아내가 엎드러져 그 두 손을 문지방에 올려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여기
서 문지방에 손을 올려 놓는 행위는 당시 고대 근동의 미신적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
즉 당시 가나안 인들은 문지방 밑에 그 집안 사람들을 보호하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었다. 따라서 이런 미신을 잘알고 있던 레위인의 첩은 거의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잡는 심정으로, 두 손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으면
서 자신이 소생(蘇生)하기를 바랬을것이다. 삼상 5:4 주석 참조.
=====19:28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 레위인은 눈으로 보아 그의 아내가 죽은 것을 금방 알아차
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아내와 동일한 미신적 사고 방식에서 혹시나 하는 심정
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깨웠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가 비참한 모습으
로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에 대한 증
오심에 블타 자기 아내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19:29
그 마디를 찍어 열 두 덩이에 나누고 -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즉시 아내의 시신을
각을 뜨듯이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냈다. 이같이 시체를 절
단하여 지파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
이스라엘 앞에 공개하며 응당한 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Keil and delizsch). 사
울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소 한 겨리를 각을 떠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성을 촉구
한 적이 있다(삼상 11:7). 이와같이 이것은 당시 중앙 통제 기구가 없었던 시절에 본
문과 같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즉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고대
그리이스에서 볼 수 있었던 인보 동맹(隣保同盟)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
러나 당시는 지파 간의 결속이 해이해지고 중앙 통제 기구가 결여된 상태였기 때문에
본문의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고소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따라서 그 레위인은 첩의 시
체를 12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류들의 죄상을 강력히
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
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
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
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마7:3-5).
=====19: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 레위인이 전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는 전이스라엘
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이런 엄청난 죄악은 소돔 성에서 일어난 사건(창
19장)과유사 하였기에 더욱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에 보다 신
중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의 총회(總會)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상의한 후에 말하자 - 혹자는 이 구절을 레위인이 이스라엘 각 지파에 사자들을 보
낼 때 그 사자들이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같은 해석은 본문과 잘 부합되지 않
는다. 따라서 본절은 어디까지나 레위인의 사자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이 한 말로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서 '말하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베루'(
* )는 복수 명령형으로서 권고의 뜻이 있다. 그리고 이것의 원형 동사 '다바르'
(* )의 기본 의미는 '말하다'이지만 파생적인 의미로 종종 '파괴하다','인도하다'
라는, '심판'의 뜻도 가진다. 따라서 여기서의 '말하자'는 베냐민 사람에 대한 거국적
차원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기브아 사람들
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회개 운동을 일키지 않으면 안되었다(20장). 훗날 선지자
호세아가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타락의 극치로 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볼때(호
9:9;10:9) 기브아 사람들의 행악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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