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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 3. 11. 16:55
■한국 반란사(지은이 : 박한실>>> 출판사 : 큰바위)
제1부 신라,통일신라 시대
1. 대공의 난(768년)
대공의 난은 768년(혜공왕 4년)에 대공이 대렴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흉년에도 나 몰라라 방탕한 왕 타도하자!
경덕왕의 맏아들인 혜공왕(신라 36대왕)은 8세때인 756년에 즉위하여 한때 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흉년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런 와중에 여러 모반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왕은 사치와 방탕에 빠진 채 선정을 베풀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다. 자연히 정치는 문란해졌고 나라의 기강도 흐트러지게 되었다. 이때, 일길찬이라는 벼슬직에 있던 문신 대공이 768년 (해공왕 4년)에 그의 동생인 아찬 대렴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왕궁을 겹겹이 포위하고서 왕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왕군의 만만치 않은 반격을 받았다. 봉기군과 왕군은 계속 대치하며 신경전을 펼쳤다. 봉기 군은 왕궁은 이를 잘 막아냈다. 그러다가 결국 봉기 군은 왕군은 이를 잘 막아냈다. 그러다가 결국 봉기 군을 황군에게 패하여 구족과 함께 대공은 주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그 후 일어나는 일련의 난들, 즉 김은거, 염상, 정문 등의 모반에 기폭제 역할을 해 주었다. 가령, 775년에 이찬 김은거가 모반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사형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 이찬 염상과 시중정문이 모반하다 역시 체포되어 사형된 바 있다.
(참고로 신라의 17관 등은 이벌찬을 첫 번째 위계로 해 이찬, 잡찬, 파진찬, 대아찬, 아찬, 일길찬, 사찬, 급벌찬, 대나마, 나마, 대사, 사기, 길사, 대오, 소오, 조의 등이다)
2. 김지정의 난(780년)
김지정의 난은 780년(혜공왕 16년)에 김지정이 일으킨 난이다. 혜공왕은 처형했으나 집권에는 실패 780년(혜공왕 16년)에 왕족으로서 이찬 벼슬 자리에 있던 김지정이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 군들로 하여금 궁궐을 철통같이 에워싸게 한 후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봉기 군은 마침내 혜공왕(신라 36대왕)과 왕비를 사로잡아 처형을 시키는 등 한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등(귀족 대표로서 수상의 직책)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 등의 반격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김양상은 내물왕의 후손이요 효방의 아들로서 764년에 아찬을 거쳐, 774년에 상대등이 되었는데, 780년에 그는 왕과 왕비가 살해되자,
아찬 김경신과 함께 김지정을 비롯한 모반의 무리를 소탕하였다. 그리고 혜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신라37대왕)이다.
신라의 역대를 3분하여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28대 진덕왕까지의 성골 계통인 28왕을 상대, 제29대 무열왕으로부터 36대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인 8왕을 중대, 그리고 37대 선덕왕으로부터 56대 경순왕까지의 방계 왕족인 20왕을 하대라 한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난을 진압하는데 함께 공을 세운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자기 아버지를 개성대왕에, 자기 어머니를 정의태후에 각각 추존하였으며, 재위5년 동안(780-785년)동안 선정을 베풀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그 유골을 동해에 뿌려달라." 당시에 화장은 불법이었지만, 그의 유언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3. 김언승의 난(809년)
김언승의 난은 809년(애장왕 10년)7월에 김언승이 김제옹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애장왕을 살해하고 외삼촌이 즉위. 통일신라 때 김경신(원성왕, 신라 38대왕)이 왕위에 올라 재위 4년째인 788년(원성왕 4년)에 독서삼품과(과거제의 효시)를 두어 과거법을 제정하였으며, 이외에도 790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고 전읍서에 향2인을 두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위 중 791년에는 이찬 제공(791년에 붙잡혀 사형됨)이 모반을 일으키는 등 몇몇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게다가 왕은 태자를 두 번이나 세웠으나 이들(김인겸, 김의영)이 모두 일찍 세상을 뜨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셋째 아들 김예영이 있었으나, 왕은 장손 김준옹(소성왕)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러나 소성왕(신라 39대왕)은 재위 1년도 채 되지 못하여 승하해 버렸다. 그러자 태자인 애장왕이 13세로 신라 40대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왕의 외삼촌 되는 김언승이 병부령이라는 벼슬 자리에 올라 정사를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언승과 그의 동생 김제옹은 조카인 애장왕이 장성하여 친정을 하게 될 경우 자기들이 거세될까 봐 두려워 내심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런 염려와 불안은 그들로 하여금 왕에게 칼을 들이밀게 했다. 마침내 김언승(당시 병부령).김제옹(당시 이찬) 형제는 애장왕 10년(809년)7월에 난을 일으켰다.
그 해에는 한발이 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고 민심이 흉흉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하여 김언승.김제옹 형제는 궁중으로 쳐들어갔던 것이다. 삽시간에 궁중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애장왕은 동생 김체명과 더불어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숙부인 김언승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언승은 왕을 살해한 후, 궁중 안에다 크게 잔치를 벌여 신하들에게 춤까지 추게 하는 등 호탕하고 현란한 유흥을 벌인 다음 헌덕왕(신라41대왕)에 즉위하였다.
4. 김헌창의 난(822년)
김헌창의 난은 김헌창이 자기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옛 백제 땅인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822년 3월에 일으킨 난이다. 폭우 때문에 즉위 못한 부친의 한 풀어보자! 선덕왕(신라37대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지정의 난을 함께 수습한 공신 김경신을 중용하여 상대등으로 삼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왕은 왕족인 김주원을 등용하였다.
그러자 김경신이 꿈을 꾸었다. 사모를 벗고 갓을 쓴 채 12줄 거문고를 끌어안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어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심히 걱정했다. 그런데 여삼이라는 자가 찾아와 이렇게 해몽을 해주었다.
"사모를 벗은 것은 더 이상 높은 자가 없다는 것이고,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줄 거문고를 않은 것은 12대 손까지 대를 이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징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김경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한 등급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일세." 그런데 이 꿈을 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났다(785년). 왕의 아들이 없었으므로,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주원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이 북천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위(원성왕, 신라 38대왕)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김주원은 세력 다틈에서 밀려나 명주(강릉)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헌창은 계속 중앙 관직에 남아 활동하였으며, 807년에 이찬으로서 시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실세요, 실력자인 김언승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급성장 하였다. 그런데 김언승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헌덕왕(신라 41대왕)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이찬 김헌창은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813년 1월에 무진주의 도독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817년 가을에는 흉년으로 굶어죽은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래저래 살아가기 힘든 백성들이 819년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821년에도 봄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 중에는 자손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틈을 타서 평소 자기 부친 김주원이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자신이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헌창(당시 옹청주 도독;821년에 발령을 받음)이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옛 백제 땅인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822년 3월에 난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경운이라 건원하고서,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사벌주(상주), 청주(진주)의 4주 도독과 국원(충주),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이때 청주 도독 향영은 불복하고 추화군으로 도망쳐 버렸다. 게다가 한산(경주), 우두(춘천), 삽량(양산), 패강, 북원등에 있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항하는 중앙 귀족들의 연합세력에 의해 반란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헌덕왕은 우선 8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왕도 팔방을 수비하게 한 다음, 일길찬 장웅을 먼저 출동시키고, 이어 잡찬 위공과 파진한 제릉을 보냈으며, 그 다음에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 및 대아찬 우징 등에게 군사를 주어 적을 막아 치게 하였다.
또한 각간 충공과 잡찬 융응에게는 문화 관문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 김헌창도 반란군을 정비한 다음 요소요소에 장수들을 파견해 왕군에 대비 시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잘 훈련된 중앙 군대의 정규군을 이길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해 주지 아니 했기 때문에, 왕군과의 싸움에서 계속 밀리게 되었다.
왕군은 먼저 장웅이 도동현에서 반란군과 접전하여 격파시킨 것을 필두로, 위공과 제릉이 장웅과 합세해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해 역시 승리를 장식한 다음, 속리산으로 군사를 돌려 그곳의 적도 격멸시켜 버렸다. 왕군의 균정 등도 성산에서 싸워 반란군을 격멸시킨 다음, 3군을 웅진으로 모아 반란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반란군의 주력 부대는 격파되었다.
이때 김헌창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여 성으로 도망쳐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마지막 저항을 했다. 왕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헌창은 사태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며 자기는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감지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성을 함락한 왕군은 김헌창의 시신을 찾아내어 주형을 가했으며, 그 친족과 남은 무리 2백39명을 모두 처형했다. 이때가 822년이었다. 그러나 김헌창의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헌창이 죽은지 3년이 지난 825년(헌덕왕 17년) 1월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적(여주), 수신 등에서 모은 농민군 1백여명과 함께 난을 일으켜, 평양(양주) 도읍을 세우기 위해 우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한산주 도독 총명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김범문 부자 2대에 걸쳐 일어난 모반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5. 김명의 난(838-839)
김명의 난은 838년(희강왕 3년) 1월에 김명이 이홍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왕을 자결케 하고 임금 되어 1년 천하 헌덕왕의 뒤를 이은 흥덕왕(신라 42대왕)이 재위11년만에 승하하자, 한동안 잠잠하던 왕의 쟁탈전이 다시 벌어졌다. 흥덕왕이 아들이 없어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왕의 아우인 균정과 조카 제륭이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시중 김명과 아찬 이홍과 배훤백 등은 제륭을, 균정의 아들 아찬 김우징과 조카 김예징과 무주도독 김양 등은 균정을 각각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균정의 무리가 기선을 잡아 궁궐을 호위하였으나, 이어 제륭의 무리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공격을 가했다.
이때 김양이 소리쳤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역적질을 하느냐?"
그러면서 활을 쏘아 제륭의 군사10여명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제륭의 부하인 배훤백이 활을 쏘아 김양의 다리를 맞혔다. 이어 벌어진 싸움에서 균정 쪽이 불리하게 되었다. 이때 균정은 김양과 김우징에게 일단 피신해 훗날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김양과 김우징은 간신히 뭄을 피해 달아났으나, 균정은 이때 목숨을 잃었다. 균정의 무리를 제압한 제륭은 836년에 신라 43대 왕위(희강왕)에 올랐다. 그러나 희강왕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인 838년 1월에 생애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가 신임했던 상대등 김명과 시중 이홍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명은 반란군으로 하여금 왕의 측근을 모두 죽이고 왕을 위협해 스스로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김명은 838년에 당당히 신라 44대 왕위(민애왕)에 올랐다. 한편 김우징과 김양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배려로 군사 5천명을 얻어 무주를 습격했다. 민애왕(김명)은 왕군을 급파하여 대항케 했으나, 왕군은 격파되고 말았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출정해 있었던 터라 피로에 찌든 김우징의 군사들이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838년 12월에 김우징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왕군을 공격해 왔다. 김우징이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고, 엽장, 장변, 정연,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 6명의 장수를 포진하고서 맹공격을 가해 오자, 김명은 왕군을 증파하여 이에 맞섰다.
그러나 김양순이 무주군을 이끌고 김우징 군에 투항해 버리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김양의 군대가 무주 혈야현 북주에 이르자 대감 김민주는 왕군을 이끌고 가서 이에 대적했다. 김양군은 장군, 낙금, 이순행이 기병 3천명으로 김민주가 이끄는 왕군을 대파하였으며, 그리고 계속 진군해 839년1월 19일에는 달구벌에 이르렀다. 이에 김명은 이찬대흔, 대아찬 윤린, 의훈 등을 보내 김양의 군을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839년 윤1월) 김명은 서교의 나무 아래 있다가 자기를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홀로 월유택에 숨어 있다가 김양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시해당하고 말았다. 김양의 군대는 궁궐까지 수복한 다음 839년 4월 김우징을 맞아들여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신라 45대왕 신무왕이다.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한 지 불과 석달 만인 839년 7월 2일에 등창으로 인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6. 장보고의 난(846년)
장보고의 난은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년)봄에 청해진을 거점으로 일으킨 난이다. 천민신분 때문에 내 딸을 왕비로 못 받아들인다고? "활을 잘 쏜다"고 하여 별명이 궁복, 궁파였던 장보고(?~846)는 일찍이 친우 정연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건너가 무령군에 입대한 후 무술장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황해에는 중국인 해적이 횡행하여 신라의 해안과 상선을 습격하여 재물은 물론 사람들까지 약탈해 와서 이들을 중원지방의 노비로 팔아 넘기는 등 갖은 횡포를 일삼았다. 이에 장보고는 의분에 못 이겨828년(흥덕왕 3년)당의 관직을 과감히 내던져 버리고 돌연 귀국하였다.
그리고 그는 해적들의 인신 매매 행각을 근절시키고, 해상권을 통괄하여 신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남해와 동지나 해상의 교통요충지인 완도에 해군기지, 즉 진을 건설하여 서해 무역로를 감시해 야 한다고 흥덕왕에게 강력히 충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왕의 윤허를 얻어내어 군사를 이끌고 해로의 요충지인 청해진(바다를 깨끗이 한다는 뜻)에 진을 설치하고 완도 가리포에 성채를 쌓고 항만 시설을 보수하여, 해군의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장보고는 왕에 의해 청해진 대사에 임명된 후 수하의 수병을 훈련시키고 인근 지방민들을 모았다.
그리고 제 스스로 찾아오는 빈민들과 유민들을 모아 민병 대를 조직하여 얼마 안 가 1만 여명의 병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이 군대를 훈련시켜 본격적인 해적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 그는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여 해적을 완전 소탕하여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장보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군사적 세력을 키우면서 선박을 많이 만들어서 그것으로 청해진을 중심으로 일종의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중국, 일본양국 사이에 개입해 동방 무역과 해상권을 주도해 나가고자 했다. 이때 무역상들의 수출품들은 주로 구리거울 등과 같은 금속제품류, 모직물류, 도자기류, 피혁제류, 문방구류, 그리고 향료, 염료, 안료, 풀솜, 비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 및 서아시아의 지역 특산품이었다. 837년(희강왕2년)에 왕위 계승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이를 맞아들여 보호해 주었다.
이때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던 김우징은 온갖 감언이설로 장보고를 설득하여 군사 지원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중앙 정치에 관여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장보고는 침묵을 지킬 뿐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희강왕의 시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김양으로부터 희강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김우징이 다시 한 번 간곡히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보고는 숙고 끝에 이에 동조했다. "옛 사람의 말에 의를 보고 실행하지 않으면 용맹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내 비록 용렬하지만, 오직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리하여 김우징은 장보고가 내어준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838년 3월에 김양, 정양과 함께 무주와 남원을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들이 오랜 출정으로 피로해 하였으므로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이 해 12월에 군사를 일으켜 대흔, 윤린, 의훈 등이 이끄는 왕군을 격파하고 김명(민애왕)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리고 김우징은 839년에 신라 45대왕(신무왕)에 올랐다. 그가 등극하게 된 것은 장보고의 공이 컸던만큼, 왕은 곧 장보고에게 감의군사라는 작호와 식읍 2천호를 상급으로 내렸다. 그 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도 장보고의 공을 기려 그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그리하여 장보고는 공식적으로 해군력을 장악하여 중앙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당나라, 일본과의 국제 교역도 더욱 넓혀 나갔다. 840년(문성왕2년)에는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서신과 공물을 보내어 교섭을 시도해 보는 등 사무역을 통한 정치적 외교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845년(문성왕7년)3월에 문성왕은 군사력이 탄탄한 장보고의 세력을 감안하여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왕족과 귀족들이 일시에 들고일어나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장보고의 출신이 천한 해도인 이라는 이유를 들어 극구 반대했다.
물론 장보고의 출신이 벌족이나 골품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강성해진 장보고의 세력이 중앙에까지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와 불안이 그들의 더 큰 반대 이유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보고는 분개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은 신라인의 기상을 해외에 떨쳤고, 더욱이 중국 적산촌에 법화원이라는 대사찰을 건립하여 '신라정신'을 국내외에 발양하여 국위를 선양시켰으며, 김우징의 피난 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때 자기 딸의 차비영입을 김우징이 굳게 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 하나 때문에 자기 딸이 문성왕의 차비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해진의 사병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서 846년 봄에 청해진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때 부패한 왕실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은 대부분 민족적인 지도자 장보고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당장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대책 마련에 부심할 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때 무주 사람 염장이 선뜻 나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조정에서 만일 저의 말을 들어준다면, 저는 단 한 사람의 군사도 번거롭지 않게, 맨 주먹으로 궁복의 목을 잘라 바치겠습니다." 이에 왕은 자객 염장으로 하여금 거짓 투항하게 하여 청해진으로 투입시켰다.
장보고는 원래 염장을 아끼던 터라, 아무 의심 없이 그를 상객으로 앉히고 함께 술을 마시며 시국에 대해 의논했다. 장보고가 술이 거나하게 취할 무렵, 염장은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는 반란군의 무리를 설득시켜 그들도 굴복시켰다.
그 후, 장보고 휘하에 있던 부장 이창진 등이 난을 일으켜 왕군에 대항했으나, 이들 역시 무주의 별장 염문이 이끄는 부대와 귀족들의 사병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다.
7. 애노의 난(889년)
애노의 난은 889년(진성여왕 3년)에 애노가 원종과 함께 사벌주(상주)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이다. 풍기문란한 여왕이 흉년 세금 독촉 웬 말이냐! 신라 51대왕 진성여왕은 887년에 재위에 올랐다. 그녀는 경문왕의 딸이자 정강왕의 누이동생이었는데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유조로 즉위하였다.
재위초기에 그녀는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명하여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케 하는 등 문화 사업에 힘쓰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왕은 원래 소행이 좋지 못하였다. 그녀는 즉위하기 이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각간 위홍을 떳떳하게 궁내로 불러들여 사통했으며, 위홍이 죽은 후에는 궁중에 미모의 소년들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행을 일삼았다.
또한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김으로써 신하들의 불만을 샀으며, 뇌물을 받아 챙기는 등 왕실의 풍기를 문란케 하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궁궐에서는 뇌물 주고받기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상벌과 관리 임명이 공정하지 못하여 기강이 헤이 해질 대로 해이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부패는 곧 지방으로까지 급속도로 파급되어 갔다. 여기에 흉년까지 겹쳐 주, 군에서 공부를 바치지 않아 부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바닥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에 관리들은 세금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지방의 민심은 심히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애노는 889년(진성여왕 3년)에 원종과 함께 사벌주(상주)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초기에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난은 점점 크게 확대되고 말았다. 반란군은 내마 영기의 군대를 물리쳤으며 성주우운을 전사케 하는 등 한때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우련이 이끄는 왕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891년에 지방에서는 조세가 걷히지 않고 병세가 퇴폐하여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게 되었다. 즉, 북원(원주)의 양길과 궁예,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의 견훤 등이 봉기하였는데, 왕군이 이를 토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라 왕조는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듯, 신라 왕권에 대한 도전은 신무왕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진성여왕이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그 양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진성여왕이 즉위 이전까지는 모반이 주로 귀족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데 비해, 진성여왕 즉위 이후부터는 일반 백성들에 의해 모반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무왕 이후의 모반사건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841년(문성왕3년) 일길찬 홍필이 모반하려 했다가 발각되자 해도로 도망쳐 버렸으며, 846년(문성왕8년)에는 장보고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847년 5월에 양순, 흥종등이 모반하다 복주되었으며, 849년(문성왕11년) 9월에는 이찬 김식일, 대흔 등이 모반하다가 발각되어 복주되었고, 대아찬 흔린이 이에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다.
866년(경문왕6년) 10월에는 이찬 윤흥이 그의 아우인 숙흥, 계흥과 함께 모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대산군으로 도망쳤으나 곧 붙잡혀 처형되었다. 868년(경문왕 8년)1월에는 이찬 김예, 김현 등이 모반하다가 역시 사형되었다.
그리고 874년에는 이찬 근종이 모반을 일으켜 궁궐까지 쳐들어갔으나 금군에게 격파되자 잔당을 이끌고 밤에 성을 빠져 달아나다가 붙잡혀 거열형(죄인의 다리를 두 수레에 각각 묶어 반대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879년(헌강왕 5년)에는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복주되었으며, 887년(정강왕 2년)에는 한주에는 이찬 김요가 모반하다가 평정된 바 있다.
8. 견훤의 난(892년)
견훤의 난은 견훤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년)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이다. 후백제 세우고 양위 문제로 맏아들에 쫓겨나 상주 가은현(문경) 농민의 아들(아자개의 아들)이라고 하여 진훤이라고도 부르는 견훤(867~936년)은 20세에 군인이 되었다.
그는 수도 경주로 가서 신라 서남해 방위에 용맹을 떨쳤다. 그 공이 인정되어 비장이 된 그는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년)에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정변, 살해극, 가렴주구, 시기, 모함, 질병, 흉년, 기근 등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정치사회현실을 이용하여 반란군 5천명을 이끌고 여러 성을 공격한 다음 무진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896년에는 서남 지방에 적고적(붉은 바지를 입고, 스스로 남달리 행동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이라는 도적이 일어나, 국도의 서부 모량리까지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재물을 약탈해 갔으며, 각지에 할거하는 호족세력들이 발호하여 기승을 부렸다.
그러자 진성여왕은 스스로 국정을 바로잡기가 힘듦을 통감하고서, 897년(진성여왕 11년) 6월에 태자인 김요(정강왕의 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이가 바로 신라 52대왕 효공왕이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왕군과 반란군의 싸움이 아니라, 군웅끼리 싸움과 접전이 벌어지는 양상을 띠었다.
견훤은 900년(효공왕 4년)에는 양길을 회유하여 그에게 비장이라는 관직을 주고 서북지방을 공략케 하여 점령하였다. 그는 완산주(전주)에 입성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후백제(후백제라고 하는 것은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부르는 호칭일 뿐이었다.) 왕이라고 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의 오월국과도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 및 왕건과도 자주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그러자 905년에 효공왕은 반란군들과 싸우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모든 성주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나가서 마주 싸우는 것을 삼가고 굳게 성을 지키라."
이리하여 결국 한반도는 신라왕조와 궁예의 태봉국, 견훤의 백제국으로 3분되었다.
궁예는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여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 경기, 황해, 평안, 충청 일부 등지를 영유하였고,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꾀하여 전주를 중심으로 금강 유역의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전체를 차지했으며, 신라 왕조는 경상도 일대를 통치했다.
927년(경순왕 1년)에 견훤은 신라의 국도를 기습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유흥을 즐기고 있던 경애왕을 사로잡아 자살하게 만들었고, 경애왕의 친족 중 아우뻘 되는 김부를 왕위(경순왕: 신라 56대왕)에 앉혔다.
(그러나 경순왕은 전왕인 경애왕처럼 고려와의 화친을 도모 했으며, 935년 11월에는 고려 태조에게 귀부함으로써 신라 1천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견훤은 후삼국 중에서 한때 가장 강대한 국가로서 그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929년 고창에서, 930년 안동 전투에서 왕건에게 참패한 후부터 형세가 기울어졌다. 게다가 유능한 신하들이 왕건에게 투항했으며, 934년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순하고 말아 그의 위기의식은 한층 고조되었다. 고희를 앞둔 견훤은 나약해져 935년에 10여 명의 아들 가운데서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맏아들 신검이 935년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아버지 견훤을 김제 금산사 미륵전에 가둬 버리고, 동생 금강을 살해해 버렸다.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갇힌 지 3개월만인 935년 6월에 측근을 대동하고 몰래 탈출하여 나주로 갔다가 수로로 도망하여 고려에 귀순하였다.
이때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통곡하였다.
"내가 자식들을 잘못 둔 죄로 대낮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도다!"
9. 궁예의 난(894년)
궁예의 난은 894년(진성여왕 8년)에 명주(강릉)와 철원을 함락시킨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대된 궁예가 895년에 양길과 정식으로 결별선언을 한후 새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후고구려 세운 미륵불 폭군 궁예(성은 김씨:?~918년)는 신라 헌안왕(신라 47대왕)과 궁녀 사이에서 서자(일설에는 신라 48대왕인 경문왕 김응렴의 후궁 소생)로 어느 따스한 단오날에 태어났다.
갓난 아이는 날 때부터 이가 나고 얼굴에 이상한 빛까지 발해 장차 국가에 해를 끼칠 인물이라고 여긴 신하들이 이를 왕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이 갓난 아이를 당장에 죽여 버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사자는 강보에 싸인 아이를 다락 밑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있다가 아이를 받았는데, 유머의 손가락이 아이의 눈을 찔러 이후부터 아이는 애꾸가 되고 말았다. 요행히 궁예는 왕가에서 도망하여 한동안 외가에 숨어살다가, 10여 세 때 세달사(후에 흥교사:강원도 영월군 대화산 소재)로들어가 중(법명:선종)이 되었다.
당시의 신라 형편은 국정이 문란하여 각지에서는 도적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왕명이 잘 지켜지지 않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가다가 왕자가 새겨진 부적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이를 보고 소년 궁예는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얼마 후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891년(진성여왕 5년)에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의 사람됨이 거칠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냉대하자 궁예는 그의 휘하를 떠나 양길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때 양길은 궁예가 왕자의 신분인데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남을 알고는 그를 매우 신임하여 그에게 자기 군대의 일부까지 내어주는 등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는 양길의 군사 3천5백여 명을 이끌고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처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등의 여러 현과 성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빼앗은 물건들을 자기 추종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그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이후 궁예 휘하의 군졸 수가 점점 늘어났고, 싸우기만 하면 어김없이 승전고를 울렸다. 그러던 중, 894년(진성여왕 8년)에 명주(강릉)를 함락한 후 군사들을 14대로 나누어 자기 세력기반을 삼았다. 그리고 이어 철원을 함락하였다. 이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장군이 된 그는 895년에는 저족(인제), 생천(계구)의 2군을 함락시키고서, 양길과 정식으로 결별 선언을 한 후 한주 관내의 부약(춘천), 철원 등 10여 군.현을 석권하여 강원도 일대를 자기 세력권 아래 두어 제법 나라의 규모를 갖추었다. 896년에 그는 임진강 연암을 공략하여 송악(개성)에 있던 왕건 부자의 투항을 받았다.
이때 그는 왕건을 태수로 임명하였다. 이후 승령(토산), 임강(장단), 풍덕 등의 여러 현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897년에는 공암(양평), 금포(김포), 형구(강화) 등도 점령하였다. 898년에는 평안도와 한산주의 30여 성을 공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충주)등 30여개 성을 점령한 북원의 양길이 옛날의 자기 부하가 크게 성공한 것을 시기하여 궁예의 땅을 먼저 침범했다. 궁예는 899년(효공왕 3년)에 왕건을 보내어 양길 군대의 공격에 반격을 가하여 격파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그 이듬해에는 양길의 주요 점령지인 국원(충주), 청주(온양), 당성(남양), 괴양(괴선)등을 함락했다.
이리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전역을 지배하게 된 궁예는 901년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옛 고구려를 회복할 목적으로 국호를 후고구려라 칭했다. 이는 당시 파탄에 빠져 있던 민중들과 중앙에서 밀려나 반정부 대열에 서 있던 지방 호족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고구려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부각시키면서, 틈만 나면 공공연하게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해야 한다고 반복하여 강조하곤 하였다. 901년 어느날 그가 부석사에 들렀을 때 그곳 한쪽 벽에 걸린 신라왕 초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평소 신라에 대한 강한반감을 지니고 있던 그는 칼을 빼어 들더니 그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904년(효공왕 8년)에는 "동방을 전부 무마하여 편안히 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마진으로 개정하고, 연호를 무태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정식으로 광평성을 두어 정사를 토의 하였으며, 각 지방에 관청을 두어 나라의 기초를 탄탄히 다져 나갔다.
904년 7월에 그는 1천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수도로 정한 후 견훤의 군대와 여러 번 싸워 이겨 상주 등 30여 현을 차지하였다. 천우 2년인 905년에는 철원에 궁궐과 각종 누대등을 호화롭게 꾸미고, 궁궐 신축을 기념하는 뜻에서 연호를 성책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동강까지 쳐들어가 평양을 함락하여 신라의 북부 영토를 모두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신라마저 아예 전몰시켜 병합해 버리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 신라를 멸도라 부르케 하였으며, 신라에서 도망해 온 장군들이나 문인들이 자기 마음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기만 하면 모두 죽여 버리는 등 포악하고 잔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했다.
이 해에 그는 왕건으로 하여금 해로를 타고 내려가 나주를 공략하여 견훤의 해외 교통을 차단시키는 데 성공했다.(일설에는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고 성급한 궁예가 충신인 왕건까지도 의심하기에 이르자 왕건 일파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여 금성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이쯤 되자, 후삼국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다고 자만한 그는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치고, 자칭 미륵불이라고 하여 머리에 금관을 쓰고 방포를 걸치고 다녔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고 칭하였다. 성밖으로 행차할 때에는 그가 마치 부처님이나 교주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비단으로 말머리와 말꼬리를 장식한 백마를 항상 타고 다녔다.
어린 소년소녀들로 하여금 깃발과 꽃을 들고 앞장서 걷게 하였고, 비구승 2백여 명으로 하여금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면서 그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다. 너희들의 악한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노라."
애꾸눈인데 따른 자기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참다운 불제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친히 불경 20권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를 석총 스님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석총 스님이 이를 사설괴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하자, 화가난 궁예는 단칼에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성질이 더욱 포악해진 궁예는 왕후마저 의심하여 손에 쥔 쇠몽둥이로 내리쳤다. 이때 왕후가 몸을 빼내서 도망치자, 그녀를 붙잡아 몸을 지지고 국소까지 파열하는 등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왕자들(맏왕자, 막내왕자)이 말리자, "네 놈들도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모두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후 궁예는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져 갔다. 혹독한 폭정으로 부하와 민중을 다스렸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민중을 수탈하여 왕궁을 호사스럽게 장식하였다.
그리하여, 부하와 백성의 신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918년(정개 5년)에 장군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의 군신들이 모의하여 덕망 높은 왕건을 추대하였다. 이를 마지못해 수락한 왕건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사태가 매우 불리한 것을 깨달은 궁예는 변장을 하고서 몰래 성에서 빠져 달아났다, 하지만 그는 부양(평강)에 이르렀을 때 그를 발견한 민중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제2부 고려시대
1. 왕규의 난(945년)
왕규의 난은 고려 초기인 945년 9월에 왕실의 외척 왕규가 일으킨 난이다. 외손자 왕위계승 위해왕자들 이간질 고려 태조는 왕규의 두 딸을 맞아 제15비와 제16비로 삼았다.
이 중 제16비와의 사이에서 광주원군이 태어났다. 943년에 태조가 승하하자, 대광 왕규는 다시 자기의 딸들 중 하나를 고려 2대왕으로 등극한 혜종(태조의 맏아들, 이름은 식,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 비는 임희의 딸 의화왕후)에게 바치는 한편, 광주원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기 위해 혜종과 왕위 동생들 간의 중상 모략을 일삼았다.
즉, 왕의 동생인 요(정종)와 소(광종)를 무고하여 왕의 형제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해댔으며, 그들을 여러 차례 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혜종까지도 해치려고 했다. 혜종은 이러한 왕규의 끔찍한 음모를 알고도 그 권세에 눌려 그를 제거하지 못하고 지내야 했다.
그래서 왕은 항상갑사를 곁에 배치하여 신변보호에 애쓰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혜종은 재위한지 불과 2년 만인 945년 9월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혜종의 뒤를 이를 정종이 945년에 왕위에 오르자, 왕규는 충신 박술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대승 박득의의 아들인 박술희는 18세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었으며, 후에 태조를 섬기면서 전공을 세워 대광이 되었다. 그는 혜종을 태자로 봉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936년(태조19년)에 후백제를 칠 때에도 보병과 기병1만을 이끌고 큰공을 세우는 등 고려 창업에 큰 업적을 세웠다. 943년(태조 26년)에 태조가 죽을 때 내전에서 그는 태조로부터 군국대사를 부탁 받았으며 동시에"훈요십조"를 전수 받았다.
그러나 혜종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게 되자 왕규가 자꾸 역모를 도모했기 때문에 왕규에게 위협을 느낀 그는 왕과 자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1백여 명의 호위병을 늘 거느리고 다녔다. 이 때문에 그는 왕규의 눈엣가시였으며, 이복형 혜종의 뒤를 이어 새로 즉위한 정종(태조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증태사내사령 유등달의 딸 신명왕후, 비는 문공왕후 박씨)으로부터도 이지를 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945년 9월에 난을 일으킨 왕규는 제일 먼저 박술희를 갑곶(강화)으로 유배 보낸 뒤, 어명이라 사칭하여 그를 살해해 버렸다. 그러나 일찍부터 왕규의 동태를 주의깊게 살피고 있던 정종은 서경의 수비대장인 왕식렴으로 하여금 왕을 호위케 한다음, 왕규를 체포하여 일단 그를 귀양을 보낸 뒤 유배지에서 처단해 버렸다.
2. 이자겸의 난(1126년)
이자겸의 난은 1126년(인종 5년)5월에 이자겸이 인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일으킨 난이다. 막강 권세 누리며 왕위 찬탈하려다 측근에 당해 고려 인종때의 척신인 이자겸의 본관은 인주(인천)이다. 그는 중서령 이자연의 손자이며, 경원백 이호의 아들이다.
그는 음보로 합문지후에 이르렀으나, 그의 누이동생인 순종 비가 왕이 승하한 뒤 궁노와 간통한 사실이 드러나, 이 사건으로 그도 연루되어 면직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108년(예종 3년) 그의 둘째 딸이 16대 예종의 비(문경황후)로 책봉되자, 일약 익성공신이 되었으며, 소성군 개국백에 봉해졌다.
1122년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서서하자, 왕위를 탐내고 있던 그는 왕의 동생들과 다른 왕자들을 모두 물리치고,111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던 15살의 외손자인 해를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이 외손자가 바로 고려 17대왕인 인종이다. 이렇게 하여 권세를 한손에 넣게 된 이자겸은 양절익명공신이 되었으며, 동시에 중서령.소성후 등 주요관직을 겸하고 정권을 한손에 쥐고 흔들었다.
1122년 12월 인종의 작은아버지인 대방공이 신진 관료들, 즉 한안인. 문공인. 이영. 정극영. 임존 등 10여 명과 함께 왕위 찬탈하고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고자 모의를 하였다. 그런데 이 거서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대방공을 비롯한 주모자들 외에도 이에 연루된 수백 명의 인재들이 이자겸 일파에 의해 체포, 살해, 유배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명실공히 권력의 핵심인물이 된 이자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인종에게 강요하여 자기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비로 삼게 함으로써 권세와 총애를 혼자서 독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권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으며, 자기는 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그는 개경 인근 지방과 개성 주위의 대토지를 몽땅 소유하고서 농민들을 착위하였으며, 심지어 노복들을 풀어 닥치는 대로 남의 수레와 말을 빼앗기도 하는 등 권력 남용 및 횡포를 일삼았다. 또한 그는 자기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이 날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한편 자기 족속과 심복들을 내외 요직에 두루 포진시키고, 대권을 잡아 드높은 권세를 누리면서, 매관 매직을 하여 전국에서 바치는 뇌물로 거부가 되었다. 이때 이자겸의 집에는 늘 썩은 고기가 수만 근이나 될 정도였다.
또한 그는 당시 군사력을 쥐고있던 판병부사 척준경(이자겸의 아들 이지원의 장인 : 원래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무뢰배들과 교우하였던 척준경은 동여진 정벌에 나가 공을 세운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과의 유대를 한층 강화하고 그의 아들 이지미를 판추말원사직에 심어 놓아 군사력까지도 장악해 버렸다.
이자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126년(인종 4년)에 송나라에 자기의 권세를 확인시키려고 표를 올리고, 특산물을 보내면서, 자기가 왕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뜻하는 "지군국사"라는 칭호를 임의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칭호 사용은 인종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하였으며 분노까지 사게 했다.
이에 왕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신하들, 즉 내시지후 김찬, 내시녹사 안보린,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등은 1126년 2월 25일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겠다는 뜻을 왕에게 은밀히 바쳤다. 이에 왕은 거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김찬으로 하여금 평장사 이수(이자겸의 제종형)와 전평장사 김인존과 더불어 세부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수와 김인존 역시 신중론을 주장했다. 다시 김찬은 왕을 찾아가 즉시 거사를 실천에 옮길 것을 간청하였다. 한참 망설이던 인종은 마침내 김찬이 말에 동조해 주었다. 이에 왕의 뜻을 받든(지녹연에게 포섭된) 상장군 최탁과 오탁, 대장군 권수등은 군사를 이끌고 이자겸, 척준경을 제거하기 위해 1126년 2월에 거사하였다.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이자겸의 일파인 병부상서 척준신(척준경의 아우) 및 내시 척순(척준경의 아들)등을 잡아 죽인 다음 그 시체를 궁성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이자겸과 척준경은 격분하였다. 그는 자기세력에 속한 관료들과 무신들을 집으로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사태가 시급하다고 안달하며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혼자서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향해 쳐들어가 왕의 친위 세력과 대치하였다. 척준경은 척준신의 시체를 확인하고서는 더욱 격분하여 이지보(이자겸의 아들)와 함께 군기고에 들어가 갑옷과 병기로 재무장한 다음 승평문을 포위하였다.
이때 궁궐 안에 있던 왕의 친위세력은 척준경 군대의 위세에 눌려 궁궐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활을 쏘는 소심한 경계 및 전투 태세를 취한 채 관망했다. 왕은 성밖으로 이중과 호종단을 보내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회유하였다. 척준경은 오히려 왕이 보낸 신하들을 쫓아 보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왕을 겨냥하여 화살까지 퍼부어 대며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이자겸도 최학란과 소억을 궁 안으로 들여 보내 "반란 주모자"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이런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척준경은 동화문 행랑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사태가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자, 인종은 근신 임경청 등을 비롯한 10여 명과 함께 산호정으로 일단 피신하였다.
그러다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을 간파한 왕은 이자겸에게 사람을 보내어 왕위를 내놓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은 대신들의 거센 반발을 우려하여 이를 수락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때 이수가 재빠르게 중재에 나서서 인종이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기선을 제압산 이자겸 일파는 오탁, 최탁, 권수, 고석, 안보린 및 대장군 윤성, 장군 박영 등을 체포하여 무참히 살해해 버렸다. 이 외에도 지녹연, 김찬을 비롯한 왕의 친위파들이 모두 유배를 당했다. 이 중 지녹연은 유배 도중 살해되었다. 이런 와중에 산호정, 상춘정, 상화정, 내제석원을 제외한 모든 궁들이 불타 버렸다.
그래서 1126년 3월 이자겸은 인종을 아예자기 소유인 중흥택 서원으로 연금하다시피 해놓고 자기 심복들을 그 주위에 옮아 살게 하여 사실상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이자겸은 아예 국사를 한손에 쥐고 왕이나 다름 없는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이때 최사전이 왕권을 범하고 권세를 함부로 부리는 이자겸을 제거하지 않으면 왕위가 위태롭다고 왕에게 간곡히 충언하였다. 그러자 인종은 그와 협의하여 이자겸과 척준경을 갈라 놓은 뒤 척준경을 왕실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구사하기로 하였다.왕의 밀지를 받은 최사전은 이자겸과 척준경 두사람 사이를 갈라 놓는 이간 공작에 돌입하였다.
그는 은밀히 척준경에게 접근하여 이자겸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도록 부추겼다. "이자겸은 언젠가 당신을 버릴 것입니다. 그는 전혀 믿을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이라도 왕에게 충성한다면 당신은 부귀 권세를 오래도록 누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이자겸에게 제거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무렵,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한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에게 비난의 말을 퍼부은 사건이 터졌다. 척준경이 왕궁에 활을 쏘고 궁을 태운 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척준경은 매우 격분했다. 이때 이자겸은 아들을 보내어 사죄하고 화해를 요청했으나, 척준경은 이미 마음이 흔들린 뒤여서 좀처럼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종은 지추밀원사 김부일과 최사전을 차례로 보내 "이자겸이 공격하기 전에 선수를 치라"고 거사하기를 재촉했다. 1126년 5월 1일에 인종이 이자겸의 감시망을 벗어나 연경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자, 초조하고 불안해진 이자겸은 마침내 왕위 찬탈 결심을 굳혔다.
그는 연경궁 남쪽으로 가서 담을 뚫은 다음 그 안에 있는 군기고에서 갑옷과 무기를 훔쳐 집안에 미리 감추어 두었다. 그리고 그는 떡에 독약을 넣어 왕비(이자겸의 넷째 딸)를 시켜 수차 인종을 독살하려 했지만, 왕비가 매번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자겸은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기로 작정하고 1126년 5월 20일에 거시하여 숭덕부군(이자겸이 세운 군대)으로 하여금 연경궁 북쪽의 침문을 통해 침범하게 했다. 이때 인종이 손수 쓴 밀지를 받은 척준경은, 서리 출신으로서 학식은 없었으나 청렴하고 통솔력이 뛰어났던 병부상서 김향과 함께 장교7명에 심복 20여 명을 거느리고 급히 연경궁으로 향했다.
순검도령 정유황도 1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갔다. 척준경은 천복전 문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왕을 호위하고서 우선 군기감으로 왕을 급히 피신시켰다. 그런 다음, 승선 강후현을 시켜 기습 작전을 펼치게 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생포하여 팔관보에 가뒀다. 또한 이자겸의 심복인 장군 강호와 고진수와 싸워 그들을 살해하였으며, 그밖의 무리들도 모두 체포하였다.
그후 이자겸과 그의 처, 이지윤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은 영광으로 유배당했으며, 그 외 이자겸의 측근들도 모두 유배 조치를 받게 되었다.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이자겸의 셋째 딸 폐비 이씨, 넷째 딸 폐비 이씨)도 폐위되고 말았다.
이후 인종은 중서령 임원후의 딸(공예왕후)과 병부 상서 김예의 딸(선평왕후)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 이자겸은 1126년 12월에 유배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이후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를 물리친 일등공신이라는 배경을 맏고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1127년 3월에 암타도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1128년에는 다시 그의 고향인 곡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인종은 그의 지난날 공로를 참작하여 1144년(인종22년)에 다시 그를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에 등용하려 했으나, 그해 등창으로 인하여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3. 묘청의 난(1135년)
묘청의 난은 서경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이 1135년(인종14년) 정월에 마침내 서경을 기반으로 하여, 서경의 분사시랑 조광과 동병부상서 유담등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음양도참서을 바탕으로 서경(평양)인 중흥정치 펴자! 민족 자주정신 입각해서 지은 "칭제건원론" 및 "금국정벌론"의 저자이기도 한 승려 묘청(?~1135년)은 서경(평양) 출신이다.
묘청은 백수한을 통해 근신들과 접촉한 후 풍수지리설에 의거한 도참설로 중앙 정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127년(인종 5년)에는 왕실의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는 왕의 서경행차를 주청하여, 당시 내외 정세의 혼란을 이용하고, 또 개경출신 구신들의 세력(개경파)을 꺾기 위해 서경천도를 획책했다.
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국외로는 요(거란족)를 멸명시킨 후 새로 일어난 금(여진족)나라가 고려를 호시탐탐 넘보기 시작했으며, 국내로는 이자겸의 난 등으로 궁궐이 불타 버리고 정치 기강마저 무너져 개경의 분위기와 민심이 흉흉해지고 불안해졌다.
그러자 음양도참설이 기승을 부렸다. 이런 기류를 이용하여, 묘청 일파(서경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인심을 지배해 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개경파의 유교주의와 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했던 것이다.
음양대가이자 술승이었던 묘청은 서경 출신의 재상 정지상과 자기 제자인 백수한을 통하여 "개경은 이미 지덕이 쇄하여으며, 고 왕의 측근들과 대신들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이에 대신들은 묘청을 성현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에 대해 조언하는 최고 고문 자리에 앉힐 것을 왕에게 건의 하였다.
이때 김부식 등을 비롯한 개경파 4~5명의 대신들만이 이에 반대했으나, 대신들의 중론에 못 이겨 왕도 그 제안을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데 성공한 묘청은 1127년에 인종에게 서경 행차를 주청하여 실현시킨 후 그 해 3월에 15조항의 유신지교를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어 1128년(인종6년)에는 서경 임원역(평남 대동군 부산면 산궁동)에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가 있다고 하여, 그곳에 신궁을 창건할 것을 왕에게 강력히 건의 하였다. "임원역에 신궁을 세우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으며, 금나라도 저절로 와서 항복할 것이고, 그밖의 다수 국가들도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옵니다."
왕은 묘청의 조언에 따라 1129년에 궁을 완공하여 이를 대화궁이라 명명하였다. 사실상 당시 이자겸, 척준경의 난과 여러 반란의 와중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궁궐들이 서의 소실되어 버린터라, 왕도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묘청 일파는 여러 기발한 문제 등을 들고 나와 왕에게 주청을 드리기도 하여 당시 여러 사람들로부터 조소를 받기도 하였다. 한 번은 묘청이 왕에게 칭제건원과 금나라 공격을 요청하였다(1129년). 그러나 이는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자들(유교 세력)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하루는 묘청 일파가 남몰래 큰 떡을 만들어 그 속에 기름을 넣은 후 그것을 대동강에 가라앉게 했다. 이들은 거기서 기름이 수면으로 떠올라 그 빛이 오색영롱하게 보이도록 한 다음, 이는 신룡이 그 속에 있어 침을 뱉는 것이라고 거짓 선전하여 서경 천도를 재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얕은 속임수는 곧 탄로나고 말았다. 게다가, 1132년에 서경 행차 도중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많은 인마의 사상자들을 낸 일 등 여러 불길한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묘청의 위신은 형편없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1132년에는 임원애가 상서하여 묘청 등을 죽일 것을 요청하였고, 1133년 12월에는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 일파를 멀리 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1134년에는 임완 등이 묘청을 죽일 것을 상소하였다. 그런데도 묘청은 건재를 과시하듯 1134년에 삼중대통 지누각원사에 올랐으며, 그 뒤에도 계속하여 왕에게 서경 천도를 주청하였다.
그러나 1134년 9월에 유신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인종은 서경 천도를 단념하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내비쳤다. 이렇게 되자, 서경파와 개경파와의 관계는 파탄이 나고 말았다.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은 1135년 정월에 마침내 서경을 기반으로 하여, 서경의 분사시랑 조광과 동병부상서 유담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개경의 타성적이며 부패한 귀족사회의 상태를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명분과 음양도참설에 바탕을 두고 서경인 중심의 중흥정치를 베풀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러자 서북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봉기하였다. 그는 반란군을 이끌고 부유수 이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비롯하여 개경인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잡아가두고, 자비령 이북의 길을 차단하였으며, 서북면 안에 있는 여러 고을의 군대를 전부 서경으로 집결시켰다. 그런 다음, 국호를 대위라 하였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으며, 자기가 이끄는 부대를 천견충의군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청의 관리들을 서북인으로 채운 다음,개경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개경에서는 김부식이 평서원수로 임명되어, 출정에 앞서 먼저 서경파인 백수한, 정지상, 김안 등을 처형한 다음, 좌,우,중 3군을 직접 지휘하여 평산역, 관산역(신계), 사암역(수안)을 거쳐 성천으로 진격하였다.
성천에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김부식은 서경 주위의 여러 성에 '반역자를 처단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보내어 설득하여 그의 휘하에 병사들을 끌어들였다. 그런 다음, 연주를 거쳐 안주로 나아갔다. 김부식은 반란군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 가면서도 계속하여 7~8회에 걸쳐 사람을 보내어 반란군들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반란의 주모자 중 장수 조광이 형세가 불리해져 감을 깨닫고서 묘청, 유담, 유담의 아들 유호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 윤첨 일행으로 하여금 개경으로 가지고 가서 죄를 사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조정에서는 오히려 사면 대신에 윤첨일행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광은 자기도 결코 화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고는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관군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인종이 보낸 김부, 내시 황문상을 죽여 버렸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 이덕경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정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선요문에서 다경루까지 강을 따라 6문이 있는 1천7백30칸의 성을 쌓고서 앞으로 닥쳐올 전투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그러나 좌,중,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진 관군들에 의해 성이 겹겹이 포위된 데다가 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 버려 극도로 사기가 저하된 반란군은 항전을 벌인 지 1년만인 1136년 2월에 관군의 총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묘청의 시신은 개경으로 보내져 효시(시체를 관중에게 구경시킴)를 당하였으며, 1136년 4월에 서경의 관료들이 모두 처형당했다. 이로써 묘청의 난은 발발한 지 1년 만에 진압되었으며, 이후 개경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서경의 분사제도는 폐지되었으며, 서경의 권력 구조상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고 상대적으로 개경의 문신귀족 세력이 팽창, 독주하게 되어, 고려 권력 구조의 양대 균형이 깨져 버렸다. 이때부터 무인을 경멸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는 훗날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4. 정중부의 난(1170년)
정중부의 난은 왕의 방탕, 왕권의 실추, 문벌귀족들의 타락과 횡포, 무신들의 지위 격하와 이에 따른 불평불만, 그리고 정치적 모순과 지배층의 모순 등이 원인이 되어 1170년에 일어난 무신의 난이다. 문관들은 배터지게 먹고 놀 때 무관들은 끼니 굶고 보초서?
천민 출신인 정중부(1106~1179년)는 처음에 주의 군적에 올랐다가,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스러워서 인종 때 견룡대정으로 발탁되었다. 어느 날 그가 왕 앞에서 무예시범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이 어린 내시 김돈중(김부식의 아들)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버렸다.
느닷없이 이런 수모를 당한 정중부는 분을 참지 못하여 김돈중의 멱살을 잡아 때려눕혀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김부식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의종(고려 18대왕)이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김부식은 고집을 꺽지 않고 정중부를 매로 엄히 다스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에 왕은 이 사실을 정중부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가 화를 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종의 뒤를 이어 1146년에 19세의 나이로 고려 18대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문벌귀족들의 견제와 위협, 횡포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원래 나약하고 섬세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의종은 그들에게서 신변의 위협마져 느꼈으며, 이 때문에 신경쇠약까지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궁궐 밖으로 나가 세상 바람을 쐬기를 좋아했다. 그는 1154년에 서경에 중흥사를 창건하였으며, 1158년에는 백주에다 별궁을 지어 놓았다. 1164년(의종 18년)에 왕이 인지재에서 문신들과 유흥을 즐길 때에도 정중부는 하루 종일 끼니를 굶고 경비를 서야 했다. 이때 그는 김돈중에게 품었던 원한까지 곁들여 반역을 꾀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170년 왕이 화평재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도, 무신들에게는 끼니조차 제공하지 않자, 견룡행수 산원(정8품) 이의방과 이고등이 소변을 보러 나간 견룡대의 인솔 책임자인 정중부를 뒤따라 와서는 이와 같은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다.
하급장교의 위치에 있었던 이들은 이전에도 대장군 우학유를 찾아가 반란을 꾀하자고 권유했으나, 현실에 안주하고자 했던 우학유는 이를 거절한 바 있었다. "문관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고 취하여 즐기는데, 우리 무관들은 굶주려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이대로 참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이리하여, 정중부는 서로 뜻이 맞은 이의방, 이고와 함께 반란을 도모하고자 모의하게 되었다.
"아직은 시기가 좋지 않아.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하세. 왕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현원으로 옮겨 계속 연회를 베풀거든 우리 함께 거사하기로 하세." 다행히 그들이 바라던 대로 왕은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이튿날인 8월 30일에 보현원으로 향했다.
왕은 보현원으로 향하던 중 오문에 이르렀을 때 술잔치를 베풀더니, 취기가 오르자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일종의 무술 시범)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선정을 베풀려고 애를 썼다.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민은 나라의 근본이니라!" 이를 통해 은근히 문벌귀족들의 착취행각을 비난하며, 왕권의 회복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의 소망은 개경 출신 문벌귀족들의 견제와 훼방 때문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왕은 시간 나는 대로 사찰을 돌아다니거나 유흥을 즐기는 일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의종은 말년에 이르러 거의 방탕과 사치 향락에 젖어 지냈다. 의종 초에 정중부는 교위가 되었으며,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상장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 숭문억무정책으로 왕이 주연을 베풀 때마다 문신들은 연회석에 참석하여 같이 즐겼지만, 무신들은 연회석에서 소외되고 그 주변 경비만을 맡아야 했다. 또 때로는 보초를 서느라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무신들 사이에 불평불만이 팽배하였다.
그러자 무신들을 비롯한 군졸들이 서로 권법을 자랑하며 무술 시범을 보였다. 그런데 무술 시범을 보이고 있던 도중 환갑에 가까운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군졸과 겨루다가 힘이 부쳐 잠시 뒤로 물러나 쉬게 되었다. 이때 문신 한뢰가 다가와 이소응의 뺨을 보기 좋게 한 대 후려갈기며 조소했다.
"이 늙은 놈아! 그래 대장군으로서 어찌 군졸 놈한테 밀린단 말이냐. 네 놈은 할 일 없이 녹만 받아먹는 도적놈이로구나!"
이에 호응하여 이복기, 임종식 등의 문신들이 나서서 이소응을 조롱했다.
"태평성대가 계속되니, 무신놈들은 놀고 먹어 비계살만 쪄 힘도 못 쓰는구나!"
그러면서 그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어댔다. 이때 정중부, 김광미, 양숙, 진준 등 무신들의 낯빛이 일시에 변하였다. 정중부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문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이소응 장군이 비록 시세 없는 무관이지만, 품계로 보아 3품대장인데, 어찌 이럴 수 있는 거요?"
무신들의 낯빛이 심상치 않자, 의종이 나서서 정중부의 손을 잡으며 제지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한 고비를 넘겼다. 해질 무렵 왕의 일행은 보현원에 이르러 각자 침실에 들었다. 정중부가 무신들 중 이의방, 이고, 김광미, 양숙, 진준 등을 불러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편과 문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오른쪽 소매를 빼고 복두를 벗도록 하자. 그렇지 않은 자는 모조리 죽여라."
이어 이의방과 이고가 왕명이라면서 왕의 호위군대(순검 군사)를 조용히 한 곳에 불러모았다.
그런 다음, 낮에 그들에게 모욕을 주었던 임종식과 이복기를 제일 먼저 붙잡아 살해해 버렸다. 이를 목격한 한뢰가 왕의 침실로 잽싸게 뛰어 들어가 왕의 옷자락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걸했지만 그도 이고의 칼에 맞아 숨을 거뒀다. 그날 밤, 무신들은 왕을 수행했던 문신들 대부분을 죽여 버렸다. 왕이 환관을 불러 살상행위를 즉시 중지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왕명을 따르는 자는 없었다.
정중부와 이의방의 지휘를 받은 무신들은 문신들을 모두 죽인 후 시체들을 확인해 보았다. 그때서야 그들은 문신 김돈중이 달아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 놈이 궁성으로 들어가 태자를 옹립하고 우리를 역적으로 몰면 형세가 어찌될지 모른다. 즉시 김돈중을 찾아 없애지 않으면 우리가 당하고 만다.
쳐들어가자, 궁궐로!
"반란군들은 그날 밤 왕을 데리고 개경의 궁궐로 돌아가서 조정에 남아 있던 문신들, 즉 최보칭, 허홍재, 서순, 최온 등을 비롯한 50여 명을 모두 살해해 버렸다. 정중부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핏발 선 눈빛으로 외쳐댔다. "
문관을 쓴 자는 서리라 할지라도 씨도 남기지 마라." 일반 군졸들도 가세한 반란군들은 개경 거리를 활보하며 문관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눈에 띄는 대로 문관들을 잡아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문관들 1백여 명이 정중부의 난으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중앙 문관의 정원은 총 5백32명이었고, 그이속의 정원은 총 1천1백65명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왕은 정중부에게 살인행위를 그만 중단하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정중부 혼자만의 힘으로 진정시키기에는 확대되어 버린 뒤였다. 그러나 정중부는 이 정도쯤 해서 사태를 수습하고 싶었다.
그는 문신 몇 사람에 대해서만 불만이 있었을 뿐 그 외 다른 문신들과 왕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반란군들을 진정시키고자 애를 썼다. 대장군 진준도 반란군을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미워하는것은 문신 4~5명뿐인데, 지금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것은옳지 않다." 그런데 하필 이때 환관 왕광취가 반격을 가해왔다.
그러자 정중부는 어쩔 수 없이 반란군을 이끌고 왕을 수행하고 있던 내시등 20여 명의 목을 잘라 버렸다. 왕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반란군의 핵심 인물들을 주요 요직에 두루 임명하고 무신들을 모두 한 계급씩 승진시켰다. 그러나 왕이 궁궐에 머물러 있는 한 계속적인 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반란군들을 자극시켜, 결국에는 왕을 유배시키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의종은 처음에는 군기감에 갇혀 있다가 다음에는 영은관으로, 이어 다시 거제도로 유배당하게 되었다. 이때 태자는 진도로 유배당했다. 반란군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난 뒤, 의종의 동생인 익양공 호(명종,고려 19대왕)를 즉위시켰다.
이때부터 무신정치가 시작되어 향후 약 1백여 년 동안 고려에 있어서 정치적, 문화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중부는 광정동택, 관북택, 천동택 등 전왕의 사저와 거기에 축적해 놓은 재물을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의 반란군 핵심들과 함께 나눠 가진 후, 자기 스스로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벽상공신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서해도의 군과 현들을 그의 출신지인 해주에 예속시켰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 서북면 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 판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리고 반란군의 주모자인 이고와 이의방은 대장군의 서열에 올라, 집주의 직책을 겸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반란에 참여했던 하급 장교들, 즉 조원정, 석린, 이영진 등은 정6품에 해당하는 낭장(2백여 명의 군졸을 통솔하는 하급장교)에 임명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사태가 수습된 후인 1171년 1월이었다. 이고는 이의방이 자기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의방을 제거하고 자기 혼자서 정권을 독점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우선 자기 심복을 많이 만들어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개경 내의 불량소년들을 끌어모으는 한편, 법운사의 승려 수혜와 개국사의 승려 현소등을 자기편으로 가담시킨 후 함께 모역을 도모했다. 그들은 태자의 관례식때 거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고의 심복인 김대용의 아들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러자 김대용은 자기 친구인 내시 채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채원은 이를 직접 이의방에게 알렸다. 이것도 모르고 이고는 여정궁에서 태자의 관례식을 마치고 천천히 문을 나서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의방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같은 해 4월에는 채원등이 조신을 죽이려다 오히려 이의방 일파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이후 세력이 커진 이의방에게 두려움을 느낀 정중부는 한때 집안에만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그러자 이의방은 그의 형 이준의와 함께 손에 술을 들고 찾아와서 정중부에게 뜻밖의 제의를 했다. "우리가 부자의 인연을 맺도록 합시다."
사실은 이의방도 정중부가 혹시나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내심 초조해 왔던 터였다. 정중부는 이 제의를 혼쾌히 받아들였다. 1173년 8월에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무신들이 공모하여 왕을 몰아냈다고 분개하여 장순석, 유인준 등을 비롯한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반기의 깃발을 들었다.
그들은 전왕 의종을 경주로 모셔온 후 남북에서 서로 호응하여 궁궐을 치기로 하였다. 그러자 정중부는 관군을 이끌고 이를 토벌한 후 김보당을 사로잡았으며, 김보당의 잔당 장순석과 유인준을 따라 경주로 간 의종을 사로잡기 위해 이의민을 급파하였다. 이의민은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내려가 전왕인 의종을 사로잡았다.
그는 전왕을 곤원사로 끌고가 연못 앞에 앉힌 다음 술을 한 잔 따라올렸다. 이때 이의민의 부하 박존위가 큰 이불로 왕을 감싸 버렸다. 이의민은 큰 가마솥 두 개를 가져오게 하여 왕을 한 솥 안에 집어넣고 두 솥을 합한 다음 묶어 그대로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의종을 죽인 후 그 등뼈를 추려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한편, 생포된 김보당은 문초를 당할 때 엉뚱하게도 물귀신 작전을 썼다. "문신들 가운데 나와 공모하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이 거짓 진술을 그대로 믿어 버린 정중부는 문신들을 모조리 처형하려 했다. 그러자 이준의와 진준이 적극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1173년 10월에는 3경 4도호 8목 이하 군,현,관,역에 이르기까지 문신들을 축출해 버리고 무신들을 기용하였다.
1174년에 또다시 서경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이에 대한 토벌 책임을 맡은 이의방의 군대가 의외로 패하고 말았다.
같은 해에 증흥사의 승려 2천여 명이 횡포를 일삼는 이의방을 죽이려고 거사하였으나 이들 또한 곧 진압되고 말았다.
이 무렵 이의방은 정권욕에 사로잡혀 자기 딸을 새 태자비로 삼으려고 하였다.
명종의 태자(후일 강종)에게는 이미 태자비가 있었으나, 이의방은 자기 권력을 남용하여 태자비를 내쫓고 자기 딸을 새 태자비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다른 무신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방은 고집스럽게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이 무렵 북쪽에서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의방은 조위총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집결한 토벌군을 선의문 앞에 집결시켜 놓고 사열하였다. 그의 뒤에는 정균과 종참이 뒤따랐다. 사열 도중 정균이 이의방에게 말을 걸었다. "상장군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의방이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무슨 일인데?" 바로 그때였다.
종참이 칼을 빼어 이의방을 한 칼로 베어 버렸다. 정균 일파는 이때 이의방의 형 이준의와 그의 심복 고득원등도 함께 죽여 버렸다. 이어 새 태자비도 궁 밖으로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다. 무신 정권은 윤인첨과 두경승이 이끄는 토벌군을 증파하여 1176년 6월에 거의 22개월이나 끌어오던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고 반란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모두 처형해 버렸다.
1174년 12월에 문하시중이 된 정중부는 일대 개혁을 바라는 일반 무신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지 못해 하급무관들과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의종을 복위시키고자 하는 무리들의 잇따른 반란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1175년에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은 후 치사(나이가 많아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러자 정균(정중부의 아들)과 송유인(정중부의 사위)등이 정중부의 뒤를 이어 권세를 누리며 부귀의 극치를 이루었다. 승선이라는 벼슬에 오른 정균은 본처가 너무 신분이 낮고 미색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내쫓아 버리고, 대신 상서 김이영의 딸을 유혹하여 아내로 삼았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궁궐 내의 궁녀들과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나아가 공주까지도 차지하고 싶어 안달을 하였다.
이 즈음, 경대승(1154-1183년)과 그의 심복 견룡대의 허승과 대정 몇 사람은 정균과 송유인 일파의 발호와 세도에 불만을 품고서 그들을 쓸어 버릴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 경진이 불법으로 모은 재산을 모두 군부에 바쳐 버리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있던 젊은 청년 장군 경대승은 무인 집권 이후 갖은 횡포를 일삼아 온 무인 집권자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왔었다. 그러던 중 그는 결국 허승, 김광립 등과 함께 1179년(명종9년)9월16일에 거사하기로 맘을 먹었다.
궁중에서 열리는 장경회가 끝난 날인 9월16일 저녁에 모두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틈을 타서 경대승은 궁 안으로 침투하였다. 그런 다음 궁녀를 품에 안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정균을 단칼에 처단해 버렸다. 그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경대승의 복병들이 일시에 궁성 담을 뛰어넘어 들어와 숙직대장 이경백과 지유 문공려 등을 죽여 버렸다.
그런 다음 경대승은 왕의 침전 밖에 이르러 아뢰었다.
"신 등이 사직을 보전키 위해 정균을 죽였으며, 곧이어 역적의 무리를 모두 없애 버리겠나이다. 폐하는 아무 염려 마시옵소서."
그러자 왕은 궁문까지 나와 경대승에게 술까지 하사하며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경대승은 그 즉시 어명을 받고 금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송유인과 그의 아들을 살해했다.
이때 정중부는 미리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망하여 어느 민가로 뛰어들었으나, 민간인들의 고발로 붙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경대승은 다음 날, 정중부와 정균의 일가족과 송유인의 머리를 거리에 매달게 하여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다.
왕은 경대승을 불러 치하의 말을 하며 그에게 승선의 직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경대승은 사양했다.
"신은 문자를 모르옵니다. 그러니, 승선의 직을 거두어 주옵소서." 그러자 왕이 이부시랑 오광척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경대승의 의향을 물었다.
그러자 경대승은 오광척이 벌써 승선의 자리를 탐내고 왕에게 미리 아뢴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 그를 잡아 죽여 버렸다. 이외에도 김광영, 석화, 습련, 송득수, 기세정 등 정중부 일파를 모두 잡아 죽여 버렸다.
그러자 무신들의 불평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위협을 느낀 경대승은 자기자신의 호신을 위해 자기 집에 결사대 1백여 명을 배치해 놓고 그 자들이 자는 방을 도방이라 칭하였다. 경대승과 함께 공을 세운 허승은 장군으로 승격되었으며, 김광립은 어견룡의 행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세력을 키우면서, 동궁의 궁녀들과 함께 태자의 방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방자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경대승은 그 둘을 잡아다가 문초한 후 처단해 버렸다. 이리하여, 경대승은 명실공히 정권을 독점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183년 봄에 경대승은 병을 앓아 몸져 눕게 되었다. 그 후 자꾸만 야위어 가던 그는 그 해 7월 땡볕이 쨍쨍 내리쬐던 어느날 낮잠을 자다가 가위 눌리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도방의 결사대는 경대승이 그 동안 축적해 둔 물건들을 제멋대로 집어들고서 모두 달아나 버렸다.
5. 조위총의 난(1174~1176년)
조위총의 난은 1174년9월에 황해도와 평안도 일부지역을 중심으로 조위총 등이 이끄는 봉기군이 정중부 일파의 부패한 무신정권을 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무신정권의 전횡을 눈뜨고 못 보겠다. 조위총(?~1176년)은 병부상서로 서경 유수를 겸직하고 있던 중, 1170년(의종24년)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손에 넣고 전횡을 일삼자, 1174년(명종 4년) 9월에 격문을 돌려 정중부 일당을 치겠다고 선언하였다.
"듣자 하니, 개경의 중방에서 의논하기를, 우리 북경의 여러 성이 사납고 난폭해져서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고 하면서, 대군을 보내 우리를 공격한다고 하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바라겠는가." 이러한 조위총의 거짓 격문을 읽은 재령 이북(서흥에서 봉산일대까지의 지역)40여 성의 수령 대부분이 이에 동조하여 반기의 깃발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몇몇 무신들이 독차지하다시피하여 휘두르는 무신정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 동안 지방 관리들의 수탈에 견디지 못하던 농민들 상당수도 조위총의 봉기군에 가담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문신 출신인 평장사 윤인첨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게 하여 반란군을 진압케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내시예부낭중 최균을 여러 성에 보내어 반란군에 합세하지 못하도록 회유책을 썼다. 진압군은 재령 근처의 절령에 이르러 반란군을 만나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앞을 제대로 내다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진압군은 그곳 지리에 익숙지 못한 터라 함부로 진격할 수조차 없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조위총은 선봉장으로 용감히 돌진하여 진압군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진압군은 혼비백산하며 도주해 버렸다. 이때 윤인첨도 포위당했으나, 도지병마사인 정균(정중부의 아들)의 도움으로 봉기군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였다.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봉기군은 그 여세를 몰아, 동계 방면의 화주영을 점령하고 있던 김박승, 조관 등과 합세하여 개경의 교외 지역까지 진격해 나갔다.
이때 개경에서는 화가 난 이의방이 서경 출신의 장수들, 즉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 등을 모두 잡아 처형해 버렸다. 그런 다음, 이의방은 군대를 끌어 모아 봉기군과 대처했다. 그는 최숙에게 정예기병 수십 명을 보내 봉기군의 취약한 곳을 기습하게 했다. 기병부대에 의해 허를 찔린 봉기군은 놀라서 일시 후퇴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이의방이 이끄는 관군은 봉기군을 대동강 유역까지 몰아붙였다. 그러자 봉기군은 서경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토벌군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토벌군은 추위 때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1175년 1월에 재편성된 토벌군이 서경을 향해 진격하였다.
두경승은 토벌군을 이끌고 함남의 남쪽을 거쳐 서북 지방에 있는 연주(개천)를 먼저 공략하였다. 그러나 연주 전투는 수 개월이나 걸렸다. 조위총은 모든 가능한 지원 병력을 연주로 보내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두경승의 집요한 공격에 밀려 끝내 연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봉기군 수백 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이북 지역의 여러 성들이 하나둘씩 토벌군에게 투항해 왔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것은 조위총이 지키고 있는 서경뿐이었다. 두경승은 서경의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동북쪽에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서 성안을 집중 공격하였다.
사면초가에 빠진 조위총은 김존심과 조규를 금으로 보내 지원부대를 요청했다. "이의방이 왕을 살해하고 모반하였으니, 이를 물리칠 지워 군대를 보내 달라." 그런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에 김존심이 조규를 죽여버리고 토벌군에 투항해 버렸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을 사신으로 보내 금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금은 조위총의 제의를 거절해 버리고, 오히려 사신을 붙잡아 고려 정부에 넘겨줘 버렸다. 금의 군사 지원에 대한 소망이 좌절되자, 조위총의 기세는 현저히 꺽이게 되었지만, 그 후로도 그는 근 1년 여 동안 성을 굳게 지킨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러던 중 1176년 6월 토벌군의 윤인첨이 이끄는 부대는 서경의 통양문을, 두경승이 이끄는 부대는 서경의 대동문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러한 토벌군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서경성은 함락되고 말았으며, 이때 수령 조위총은 붙잡혀 처형당했다. 간신히 성을 빠져 나간 봉기군의 잔당들은 깊숙한 산으로 들어가 투쟁을 계속했지만, 그다지 위협적인 것은 못 되었다.
그런 다음 같은 해 11월에 이의방은 토벌군을 5군으로 재편성한 뒤 윤인첨을 원수로 임명하고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삼아 총공격을 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어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의방이 자기 딸을 무리하게 태자비로 세우고자 하여 무신들의 반감을 샀던 탓에 정균(정중부의 아들)과 종참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정중부 일파는 조정 내의 대신들을 무마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조위총에게 협상 안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조위총은 사신을 보내 `이의방을 처단한 것을 축하한다`는 상표를 조정에 보냈다. 그러나 정중부 일파는 화해는 커녕 그 사신을 옥에 가둬 버리고 말았다. 정중부 일파의 얄팍한 기만책을 간파한 조위총은 다시 봉기하였다.
6. 망이의 난(1176~1177년)
망이의 난은 1176년(명종 6년)1월과 1177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공주를 중심으로 충청, 전라 각지에서 사회질서, 신분질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민란이다. 당시 특수 행정구역이었던 소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난이기 때문에 명학소민의 난이라고도 하며, 조위총의 난과 아울러 고려조의 최대 농민전쟁이다.
사회질서 문란으로 민란 끊이지 않아. 망이, 망소이 등과 같은 농민 출신들이 주동이 되어 1176년 1월에 공주 명학소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망이, 망소이 두 형제는 수탈을 일삼는 무신정권의 권세가들과 지방 관리에 대한 불평불만자들을 끌어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라고 칭하고서 봉기하자고 외쳤다.
그들은 농민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1천여 명을 이끌고 일시에 공주를 기습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정부는 채원부와 박상수를 보내 회유책을 썼으나 그들은 이를 물리치고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남부 지방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예산의 농민반란이 그것이다.(고려 시대의 민란은 1162년부터 향후 40여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1162년 이천, 동주, 선주 등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으며, 1172년 창주, 성주, 철주 등지의 서북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1174년에는 서경에서 조위총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서북방의 40여 성에서 동시에 민란이 일어났었다.
봉기군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공주 일대뿐만 아니라, 덕산, 여주, 진천, 청주, 아산 등지 까지도 차지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장정을 선발하여 정황재와 장박인에게 장사(용병) 3천명을 주어 봉기군을 공격토록 했다. 그러나 토벌군은 한 달도 못 되어 봉기군에게 격퇴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은 다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이곳에 현령과 현위를 보내어 위무케 하는 등 파격적인 행정 조치를 취하여 봉기군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이 지역의 농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명학소민들이 너도나도 봉기군에 대거 동조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봉기군은 예산현을 공격하여 감무(조세 및 민호 징발을 직접 관장하던 책임자)를 생포하여 죽여 버렸으며, 그 여세를 몰아 곡창지대인 충주까지 쳐들어가 점령하여 버렸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조정은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남적처치병마사에 임명한 후 관군을 증파하여 남적(중부이남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남적, 그 이북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북적이라 했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인 결과 1176년 9월에 예산의 농민 봉기군을 평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관군의 집중 공격이 한층 심하여져서 다수의 농민 봉기군 지도자들이 싸울 기력을 잃어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 때문에 상황이 불리해지자, 수령 망이는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1177년 1월에 토벌군과의 화해를 요청했다.
그는 귀향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 식량을 지급해 줄 것 등을 화해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조정은 농민의 지속적인 항쟁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화해 조건을 받아들여, 망이 등과 같은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조정은 망이가 귀향하는 동안에 명학소에 거주하고 있던 망이의 아내와 어머니를 인질로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명학소에 토벌군을 보내 반란의 주모자들을 감시케 했다. 고향에 돌아온 망이는 그때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망이는 1177년 2월에 농민들을 끌어모아 다시 반기의 깃발을 들었다. 망이는 봉기군을 지휘하여 우선 인근에 있는 가야사(덕산)라는 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어 황려현(여주)과 진주(진천)를 함락하였다. 그러자 이에 힘입어 예산에서 손청도 다시 봉기하여 충청남도 북부 지역을 공략했다.
망이가 이끄는 봉기군은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충청북도 진천까지 점령하였으며, 3월에는 홍경원이라는 사찰까지도 점령하여 불을 지르고 당대 권세가들과 결탁하여 특혜를 누리면서 노비를 거느리고 호사스럽게 지내고 있던 승려 10여 명을 처형한 다음 주지승을 협박하여 조정에 편지를 쓰게 하였다.
"이미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하고서 곧 그 길로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토벌하고 나의 모친과 처를 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싸우다가 죽을 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이 분풀이를 하고야 말리라." 이로써 조정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망이는 봉기군을 지휘하여 공주와 아주(아산)를 점령하는 등 청주를 제외한 충청남북도 전 지역과 경기도 일부까지도 파죽지세로 점령해 버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정은 강경책으로 선회하여, 1177년 5월에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한 후, 토벌군을 독려하기 위하여 선지사용별감을 파견하였으며, 토벌군을 3군으로 편성한 다음 주력부대로 하여금 먼저 손청(예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봉기군 수령), 이광(미륵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봉기군 수령)등이 이끄는 봉기군을 공격하게 하여 주모자들을 잡아 죽였다.
갑자기 양 날개를 잃어 버린 망이의 봉기군은 그 기세가 한풀 꺽이게 되었다. 게다가 계속되는 전투로 식량과 병기의 부족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농번기를 당하여 도망가는 농민들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사태가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봉기군은 정세유가 지휘하는 토벌군이 삼면에서 동시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도저히 이를 당해 낼 도리가 없어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망이와 망소이 두 형제는 생포되어 청주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망이, 손청, 이광의 난은 이후 고려 시대에 수없이 일어난 민란의 주요 밑거름이요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1177년 5월에는 서경에서도 다시 민란이 일어나 서경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178년 1월에 이의민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서경의 봉기군은 다시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머지 봉기군도 같은 해 10월에 박제검이 이끄는 진압군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 그러나 1179년 1월에 다시 서경 지방에서 민란이 재발하였다.
이때 이부가 서경 봉기군의 지도자인 견종을 꾀어 살해해 버림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1180년 1월에 다시 경성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1182년 3월에 전주에서 기두, 죽동 등이 주동이 되어 관노들과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하였으나,한 달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관성(옥천)에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1187년 9월에는 서북면 순주에 있는 귀화소에 안치되어 있던 도적 수백 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190년 1월에는 경주 지방에 민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출동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같은 해 12월에 강순의를 남로착적사로 임명하여 남적을 공격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1193년 7월에는 경상도 운문에서 김사미가, 그리고 초전(위산)에서는 효심이 주동이 되어 대규모의 민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곧바로 대장군 전존걸 등이 이끄는 토벌군을 보내 민란을 진압토록 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남로착적병마사인 최인이 이끄는 관군을 더 증파하여 봉기군을 공격토록 했다.
그러자 1194년 2월에 경상도 농민봉기군의 지도자인 김사미가 항복을 청해 왔다. 그러나 진압군은 김사미를 목을 베어 죽여 버렸으며, 그 해 12월에 남로병마사로 하여금 봉기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결국 봉기군은 밀성(밀양)에서 격파당하고 말았으며, 봉기군의 지도자인 효심은 체포당했다.
1198년 5월에는 개경에서 만적 등이 노비 폭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199년 2월에는 명주 및 동경(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주군을 장악하였으며, 1200년 5월에는 진주리 정방의 등이 민란을 일으켰고, 밀성(밀양)에서 관노 50여 명이 집단으로 도망하여 운문적에 들어갔으며,같은 해 8월에는 전주의 잡족인들이 민란을 일으켰으나,
1201년 1월에 진주의 민란은 정방의가 관군에 잡혀 처형됨으로써 평정되고 말았다. 1202년 10월에는 탐라(제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경주 별초군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 해 12월에 탐라 민란은 진압되었지만, 같은 달에 경주, 운문, 울진 등에서 봉기군들이 연합하여 대규모 민란을 일으키고서 주군을 일시에 장악해 버렸다.
그러나 이듬해인 1203년 4월에 경주 민란의 주모자인 도령이 잡혔으며, 7월에는 운문산 봉기군의 효좌도 잡혔고, 8월에는 태백산 봉기군의 주모자인 아지마저 붙잡혀 마침내 민란은 평정되고 말았다. 1203년 9월에는 부석사, 부인사의 승려들이 난을 꾀하다 모두 붙잡혀 섬으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1217년 서경에서 최광수 등이 고구려의 부흥을 내걸고, 그리고 1237년에는 담양에서 이언년 등이 백제 부흥을 각각 표방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평정되고 말았다. 이렇듯, 고려 시대에는 크고 작은 민란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문벌귀족들의 횡포, 그뒤를 이은 무신들의 유혈 정권 투쟁, 중앙집권 통치력의 약화, 지방관들의 탐욕, 중앙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농민 수탈,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는 중앙정부의 무능력, 그리고 그 동안 누적되어온 사회적 모순등이 이러한 민란들을 발발하게 하는 주요 요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7. 김사미의 난(1193~1194년)
김사미의 난은 1193년(명종 23년)에 김사미 등이 경상도 운문산을 중심으로 농민들을 끌어모아 일으킨 난이다. 승천 꿈 꾸고는 신라 부흥 도모. 김사미(?~1194년)는 인접 지역인 초전(위산, 울산)에서 난을 일으킨 효심 등과 손잡고, 당시 지방 관리들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과 군소집단으로 흩어져 있는 반란 세력을 끌어모아 경상도 청도에 있는 운문산을 본거지로 하여 봉기하였다.
그는 신라 부흥을 표방하며, 신라의 유민들을 불러모아 각 지방에서 기세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대장군 전존걸을 책임자로 하고 이지순,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이 이끄는 토벌군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케 했다.
그런데 전존걸의 휘하에 있던 이지순이 반란군과 밀통함으로써, 그를 통해 토벌군의 군사 기밀을 미리 탐지할 수 있게 된 봉기군은 그 해 8월에 벌어진 토벌군과의 전면전과 그 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매번 승리할 수 있었다. 이지순은 당시 집권 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이의민의 아들이었다.
이의민은 경주에서 천민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소금장수였고, 그의 어머니는 절의 노비였다. 성년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키가 8척이나 되고 기운이 장사였다. 그의 형제는 셋이었는데, 그는 형제들과 함께 경주에서 부랑자 생활을 했다. 한번은 김자양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그의 두형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살아남은 그의 기운을 칭찬하며 김자양은 그를 경군으로 보내주었다. 개경에 올라와 경군에 편입된 이의민은 씨름에 출중한 솜씨를 보여주었는데, 우연히 왕의 눈에 띄게 되어 대정의 직책에 오르게 되었고, 이어 별장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다가 보현사에서의 정중부의 난 때 문신들을 제일 많이 죽인 공로가 인정되어 장군으로 승격되었고, 이어 명종 3년에는 경주에서 전왕 의종을 죽인 공로로 대장군에 올랐고, 조위총의 난 때 세운 공로로 상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1179년(명종 9년)에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자, 겁에 질린 그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경대승이 허승과 김광립까지 죽이자 아예 벼슬까지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경대승이 병으로 죽었다. 이때 왕은 이의민을 중용하지 않으면 그가 난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그를 상경케 한 후 수사공 좌복야의 직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판병부사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병권을 장악하게 된 이의민은 이후부터 권세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양쪽 날개 밑에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올라오더니 날개가 돋쳐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는 이 꿈이 자기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을 예시해 준 것이라고 여겨 매우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는 경주 출신인 자기가 나서서 신라의부흥을 꾀하여야 하겠다고 결심하고서 세 아들 중 제일 영악한 이지순과 함께 세심히 거사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되도록 자기 심복을 요소요소에 등용하여 지지 기반과 세력을 차츰차츰 넓혀 나갔다.
그러던 중 자기 연고지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수천 명의 민중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키자, 그는 그들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많은 재물을 보내는 등 측면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에, 그의 아들인 이지순은 겉으로는 신라 부흥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봉기군이 포획한 재물을 얻어 보려는 속셈으로 몰래 적과 내통하였다.
이지순은 도적의 무리가 물건을 바치면 그것으로 자기 세력 확장에 사용했던 것이다. 물론 김사미와 효심도 이러한 이의민과 이지순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두 사람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하고 그들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군사 기밀이 새어나가 봉기군에게 번번이 패하기만 하자, 토벌군의 지휘 책임을 맡고 있던 전존걸은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는 이지순이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이렇게 한탄하였다.
"원칙대로 한다면, 이지순은 명백히 사형감이야. 내가 이 자를 법으로 다스린다면, 그 아비가 나를 해할 것이고, 내 목숨이 두려워 그대로 놔둔다면, 우리는 적에게 계속 패할 것이니,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고?" 이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던 전존걸은 토벌군의 주력부대가 기양현에 이르렀을 때, 독약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지휘자를 잃어버린 토벌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1193년 11월에 다시 상장군 최인을 남로착적병마사로 삼고, 장군 고용지를 도지병마사로 임명한 후 그들에게 보다 한층 보강된 토벌군을 주어 반란군을 본격적으로 토벌케 했다. 최인은 대부대를 이끌고 효과적인 작전을 펼쳐 그 해 연말에 봉기군의 기세를 상당히 꺽어 놓았다.
결국 김사미가 이끄는 봉기군은 1194년 2월에 토벌군에게 포위당한 채 목졸리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자 봉기군들은 모두 토벌군에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김사미도 이때 자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체포된 김사미는 그 즉시 참형을 당하였다.
김사미가 처형당하자, 효심이 이끄는 봉기군의 사기도 크게 꺽이고 말았다. 그러나 효심은 봉기군을 최대한 격려하고 수습하여 토벌군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는 7천여 명에 달하는 봉기군을 이끌고 1194년 4월에 밀양에서 대전투(저전촌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때 그는 상당한 군사력을 잃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대전투를 피하고 토벌군을 피해 다니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그 해 8월 다시 봉기군은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조정에서 반란군의 가족들에게 혹독한 처분을 내리는 등 전세가 점점 불리해져 갔기 때문이었다.
반란군이 다시 전투 태세를 갖추자, 조정은 한편으로는 투항하는 자들에게 상을 내리는 등 회유책을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해 9월에 경주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는 등 강경책을 병행해 나갔다. 이 때문에 봉기군 중에서 하나 둘씩 빠져 나가 토벌군에 투항하는 자들의 수가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1194년 12월에 수령인 효심마져 토벌군의 고용지장군에게 체포당하게 되자, 봉기군은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때는 수만의 봉기군을 거느리고 토벌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며 경주 일대를 누비고 다니면서 신라의 부흥을 꿈꾸던 김사미, 효심의 난은 2년 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앞서 김사미, 효심과 내통했던 이의민은 명종 26년인 1196년 4월 8일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했을 때 병을 핑계삼아 미타산 별장에서 묶고 있다가 최충헌, 최충수 형제와 그의 생질 박진재, 노석승 등의 칼에 맞아 죽었다.
8. 만적의 난(1198년)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1년) 5월에 공사의 노비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만 천민의 모반 사건이다. 언제까지나 노비로 고생만 하란 법 있나? 만적(?-1198년)은 최충헌의 사노비였다. 그는 1198년 5월 초에 다른 사노비들, 즉 맛장.연복.성복.소삼.효삼 등과 함께 개경 북산(송악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공사의 노비들을 모아 놓고 난을 일으킬 것을 제의했다.
그는 이때 이렇게 선동했다. "정중부의 난 이후, 그러니까 경인년 이래 천민이나 노비 출신으로 고관대작이 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외다.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상전의 채찍 밑에서 고생만 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이제 그만 권세가들의 도구 노릇에서 벗어납시다. 우리 모두 똘똘 뭉쳐 궐기합시다." 만적이 이렇게 의분에 가득찬 목소리로 외치자, 그 주위에 모여 있던 노비들이 흥분하여 외치면서 찬동의 뜻을 표했다. 이에 노비들은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으로 반란을 모의하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봉기할 것인가를 숙고한 끝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치밀한 봉기 계획을 세웠다. "우선 개경 내에 있는 노비들을 모두 결집시킵시다. 궁 밖의 노비들뿐만 아니라 궁 내의 환관들, 궁노들과 손을 잡읍시다. 그런 다음 우리들은 흥국사 보랑에서 구정에 이르는 사이에 일시 집결하여 북을 칩시다.
그러면, 궁내의 환관들이 이에 응할 것이고, 이때 궁노들은 숙청할 자를 골라 죽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먼저 최충헌을 죽이고, 이어 각자 자기 주인을 죽인 다음, 노비 문적을 불태워 버립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후 어떤 벼슬도 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거사일은 이 달 5월 17일로 잡기로 합시다." 만적은 미리 준비해 가지고 간 황지 수천 장을 오려 정자 모양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거사 동지라는 표식으로 삼았다. 드디어 거사일이 되었다. 이 날 공사의 노비들이 약속 장소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 모이고 보니, 불과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개경에 있는 노비의 수가 이렇듯 적을리 만무했다.
그래서 만적 등 주모자들은 신중히 거사 대책을 논의했다. 결국 그들은 날짜를 연기하여 보다 많은 인원을 결집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는 다시 거사일을 잡기로 하였다. "오늘 모인 수로는 없을 것 같소. 그러니, 5월 21일 보제사에 우리 다시 모여 거사하기로 합시다. 다음 거사일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단단한 각오를 하고 나와 주기 바라오.
다음에는 절대 연기하는 일이 없을 것이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일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으면, 우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이를 누설치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시오." 그리고는, 각자 흩어져 돌아갔다. 그런데 노비 중 율학 박사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이라는 자가 배신을 하고 말았다.
그는 귀가하면서 불안에 떨었다. 거사일이 연기된 것이 어쩐지 꺼림칙했다. 거사가 도저히 성사될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더욱이 각자 자기 주인을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주인 한충유는 매우 후덕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엇갈려 고민하다가 그날 저녁에 그는 주인의 처소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모든 걸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자 한충유는 그에게 이렇게 일렀다.
"이것 큰일이로구나! 너는 아예 밖으로 나갈 생각을 말고 집에 틀어박혀 있거라." 한충유는 즉각 최충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자기 동생 최충수의 세력까지 제거한 최충헌은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뭐라구? 종놈들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해? 세상 망조로구나! 이놈들을 당장 체포하여 요절을 내놓고야 말리라." 최충헌은 병력을 출동하여 만적을 비롯한 노비 1백여 명을 대거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을 모두 꽁꽁 묶어 임진강 물 속에 빠뜨려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 대신 봉기 계획을 미리 발설시킨 순정에게는 은80냥을 주고 노비 신분에서 양민 신분으로 승격시켜 주었으며, 한충유에게는 합문지후라는 벼슬을 상급으로 내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만적의 난은 봉기도 채 못해 보고 끝나 버렸다. 이 난이 비록 미수 사건으로 끝나 버렸지만, 이는 이후 일어난 천민들의 봉기에 밑거름이 되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1200년 5월에 진주에서 공사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고을 아전들의 집 50여 채를 태우고 관리들을 잡아죽이는 사건, 같은 해에 밀양에서 관노 50여 명이 운문적에 합류한 사건, 1203년에는 개경의 노비들이 나무하러 가는 길에 전투 연습을 하다가 발각되어 50여 명이 한꺼번에 처형되는 사건 등이 그것이다.
9. 정방의 난(1200~1201년)
정방의의 난은 1200년(신종 3년)에 주리의 부패와 학대에 불만을 품은 노비들이 난을 일으키자 이에 충격을 받은 정방의가 무리를 모아 일으킨 난이다. 노비반란을 기화로 손볼 사람 혼내 줘정방의(?~1201년)의 본관은 진주이다.
1200년(신종 3년)에 그는 진주의 창정으로서 평범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해에 공사의 노비들이 평소에 주리들의 부패와 학대에 불평을 품고 있다가, 때마침 각 곳에서 일어나는 민란에 자극을 받아 1200년 4월에 드디어 난을 일으켜, 인근주리의 집 50여 채를 불살라 버렸다. 이때 정방의의 집도 불타 버렸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정방의는 난이 평정된 뒤인 어느 날 사록 전수룡에게 시위하러 등에 활을 메고가다가 붙잡히게 되었다. 태수 이순중은 그를 문초한 후에 반란 혐의자로 몰아 읍아의 감옥에다 가둬 버렸다. 그러자 정방의의 동생 정창대가 몰래 감옥까지 들어가 그를 극적으로 구출해 주었다.
이후, 정방의는 앙심을 품고 동생 정창대와 함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그는 폭도들을 이끌고 각 주리로 휘젓고 다니며, 평소에 원한을 품은 자들을 모조리 잡아 살해했다. 이리하여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자들이 무려 6천4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조정에서 조통과 이당적등을 보내어 안무케 하였으나, 도리어 정방의 가 이끄는 폭도들의 거센 세력에 위압당하여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그대로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관군에 잡히면 처형당할 것이 두려운 정방의는 읍 내의 은병을 많이 거두어 권신들에게 뇌물로 갖다 바치며 훗날 자기 죄를 면하고자 고심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안찰부사 손공례를 보내어 보다 자세히 사태의 진상을 조사해 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안찰부사가 조사할 때 정방의와 그 일당들의 보복과 행패가 두려운 조사 대상자, 조사 결과 자연히 정방의 형제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그대신 태수 이순중만 죄인으로 몰려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렇게되자, 정방의, 정창대 형제의 기세는 더욱 올라갔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에게 갖은 피해를 입게 된 주민들의 사주를 받은 합주의 도적 광명과 계발 등이 진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정방의, 정창대 형제는 무리를 이끌고 도적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전멸시켜 버렸다.
이후, 정방의의 횡포는 더 한층 기승을 부렸다. 살육으로 가득한 한 해가 그렇게 피비린내 속에서 더디게 넘어가고 새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방의 일당들의 극심한 횡포와 살육 행위를 더 이상 묵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진주 주민들이 일제히 의거하여 정방의가 이끄는 폭도들을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모두 패몰시켜 버렸다. 궁지에 몰린 정창대는 성으로 올라가 한동안 반항하다가 주민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어디론지 도망가 버렸다.
10. 삼별초의 난(1270-1273년)
삼별초의 난은 1270년(원종11년)부터 1273년까지 몽고 세력에 반대하여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가 일으킨 항몽투쟁이다. 끝까지 몽고군에 대항해 이 나라를 구하리라. 1206년 칭기스칸(재위1206-1227년)은 몽고제국을 창건한 후 서로는 동유럽을, 동으로는 금을 정복하고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고는 1219년 거란족을 칠 때 협공에 동참해 준 고려와 형제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남송을 정벌하기 위해 남송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고려를 견제할 속셈으로 1221년에 사신 저고여를 보내 고려에게 조공을 요구해 왔다. 이에 최우 정권은 1225년에 공물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연안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고려와 몽고는 적대관계가 되고 말았다. 몽고의 왕 오고타이(재위 1229~1241)는 자기 나라의 정세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1231년(고종 18년)에 살리타이를 원수로 삼고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범케 했다. 이에 맞서 고려군은 구성, 자산, 광주, 충주 등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며 전투를 벌였다.
그러자 몽고군은 침입 4개월 만에 고려와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그 후에도 몽고는 여전히 고려에게 무리한 조공을 계속 요구해 왔다. 사태가 점점 험악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제 2차 침공을 염려하여 1232년 6월에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 백성들을 산성이나 해도로 피난가도록 했다.
이는 사실상의 항몽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개한 몽고는 1232년 12월에 대군을 이끌고 제2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 정권 유지에 급급한 최우 정권은 적극적인 항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했지만, 김윤후가 이끄는 부곡민(천민)들은 살리타이의 주력부대와 맞싸워 살리타이를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이후 여러 차례 지속된 몽고 침입으로 고려의 땅은 초토화되어 버렸다. 백성들은 몽고군에게 의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살육 당했으며, 마을은 거의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희생된 수는 제외하고라도, 몽고로 잡혀간 백성의 숫자만도 20만 여명이 넘었다.
그런데도, 정권 유지에 급급했던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틀어박힌 채 지속적인 대몽 항전 및 강경책을 주장하는 등 대의명분에만 매달려 있었다. 1258년 3월에 별장 김준과 유사성, 유경이 최의를 암살한 후 와에게 정권을 돌려 주었다.
1264년 5월에 몽고 사신이 와서 고려 왕의 친조를 요구하자, 왕은 그 해 10월에 연경으로 가서 몽고의 세조(쿠빌라이:재위 1260
~1294)를 만난 후 12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268년(원종9년)에는 임연이 김준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는 집권한 후 삼별초의 군대와 무신들의 지지를 얻어 원종을 폐위시키고 왕의 동생인 안경공 왕온을 왕으로 내세웠다.
그리고는 갑옷을 입고 삼별초 육번도방을 인솔하고 안경공의 집으로 가서 그를 즉위시켰다. 그러자 몽고는 사신을 보내 원종과 임연 둘 다 함께 입조하라고 명하였다. 임연은 몽고의 강압적인 태도에 그만 굴복하여 할 수 없이 5개월 만에 다시 원종을 복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임연은 분을 참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죽고 말았다. 원종은 1270년(원종 11년)에 다시 몽고의 세조를 만나 사대를 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 귀국하였다. 왕은 귀국하기에 앞서 전령을 강화도로 보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무렵, 교정별감으로 있던 임연의 아들 임유무가 부친의 뒤를 이어 삼별초를 이끌고자 하였으나, 몽고의 조정과 원종의 밀명을 받든 홍문계,송송례 등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1백여년에 걸친 무신정권이 그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삼별초도 그 총 지휘자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삼별초는 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특별히 만든 군대였다. 그들은 도적떼를 잡기 위해 저녁마다 순찰을 돌았다. 그런데 그 수가 점차 늘어나자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그러다가 이를 다시 좌별초와 우별초로 2분하였다. 그후 몽고에 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 중에서 선발한 군대를 신의별초라 명명했다.
이러한 좌별초, 우별초, 신의 별초를 합하여 삼별초라 했다. 그러나 이 삼별초는 점차 무신 집권을 사병이나 다름없이 운용되었다. 그 후 강화도의 고려 조정에서는 개경 환도 문제를 에워싸고 본격적인 대립을 벌였다. 그때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대부분 개경 환도를 희망하였다.
그들은 대국인 몽고와 항전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상조하면서 개경으로 환도하여 몽고와 화친을 맺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무신들은 그것이 몽고에 대한 굴복이라 하여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러자 왕권 복위를 노리는 문신들은 무신들의 강경책을 비난하였다.
"육지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백성들뿐이오. 지금 백성들의 생존자는 열명 가운데 두 세 명 정도에 불과하고, 농토는 갈수록 황폐화되어 가니 강화도 하나만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결국 강화도의 조정은 중신회의를 열고 마침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공고하였다.
이러한 굴욕적인 처사에 삼별초가 흥분하자, 원종은 이들을 무마하려 했지만 실패한 채 1270년(원종 11년) 5월 27일에 환도를 강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경환도에 불응한 삼별초군의 해체를 장군 김지저를 통해 통고했다. 그와 동시에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해 갔다.
이에 삼별초군은 혹시 그 명부를 몽고군에 넘겨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배중손은 야별초의 노영희와 함께 1270년 6월1일에 난을 일으켰다. 배중손은 삼별초를 인솔하고 강화 궁정 안에서 왕실의 친척인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군졸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한편 연안 경비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섬 내의 인심이 흉흉하여 반란군에 호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리들도 섬을 탈출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 때문에 약 3일간 강화도 성내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참살되었다. 그러자 배중손은 개경 정부가 몽고와 결탁한 이상 강화에서 항전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1270년 8월에 선함 1천여 척에 군량과 무기와 섬 주민과 섬 내에 남아 있던 귀족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모두 인질로 잡아 싣고서 상당수의 노비들이 합류한 삼별초를 이끌고 구포를 떠나 진도로 남하하였다.
이때 배중손은 진두지휘하면서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끝까지 몽고군에 대항해서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해낼 것이다. 그리하여 저 침략군의 근성을 뿌리째 뽑아 버리리라."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그곳에 용장산성을 쌓고 궁궐을 짓고 군사시설을 갖춘 다음 그 곳을 근거지로 하여 남해 일대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심지어 내륙의 나주나 전주 등지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각 지방에 격문을 보내 항몽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렇듯 남부의 거의 전지역이 삼벌초에 의해 위협 당하자, 조정에서는 1270년 9월에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하고 그가 이끄는 관군과 몽고 원수 아해가 이끄는 몽고군과 연합 작전을 펼치게하여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케 했다.
그리하여, 연합군과 삼별초는 그해 11월에 여러 차례 격돌하였지만, 3개월에 걸친 겨울의 전투에서 삼별초는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삼별초는 그 여세를 몰아 제주도와 동래, 김해와 거제도까지 점령하여 버렸다. 이 무렵 밀성군(밀양)에서도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등이 이끄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 부사 이이를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관노인 승겸과 공덕도 그 도당을 모아 다로하치와 궁중의 관료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서 삼별초에 투항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남해 일대에서 유존혁이 이끄는 항쟁군이 봉기하는 등 일련의 봉기가 일어났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몽고군은 회유책 일환으로 몇 차례 사신을 지도로 보냈으나, 삼별초는 화친은 커녕 몽고의 사신을 억류시켜 버리는 등 항거를 계속했다. 이에 연합군은 다시 강공책을 펼쳐 재차 진도를 공략하였다.
그리하여 1271년 5월 15일에 김방경이 이끄는 관군과 몽고 사령관 홍다구가 이끄는 몽고군은 1백여 척에 대군을 싣고 기습 작전을 펼쳤다. 이 연합군의 총공세로 인하여 삼별초의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배중손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고,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살해 당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탐라(제주)로 거점을 옮겨 전열을 가다듬은 후 항쟁을 지속했다. 제주의 삼별초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내성과 외성을 쌓고 해변에 방어벽도 구축하였다. 그런 다음 11월 경에 배를 몰고 나가 남해안의 여러 굿을 공격하여 몇몇 요충지에 큰 타격을 가하고 철수하였다. 다시 그 이듬해인 1272년 초에는 추자도, 거제도, 흑산도 등 주요 섬들을 공략하여 그곳에 전진 기지를 세웠다.
또 3월에는 장흥 일대를 공격하였으며, 5월에는 대포, 남진 등으로 진격하였다. 삼별초는 조운선을 탈취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으며, 전함을 집중 공략하여 연합군의 기동력을 마비시켰고, 관리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하는 등 갖은 만행을 일삼았다.
그러자 1272년 8월에 몽고의 세조는 사신을 보내 삼별초의 진압에 주력하라고 촉구하였다. 이 해11월에 삼별초는 안남도 호부(경기도 부천)까지 공격하여 부사와 그의 처를 납치해 가는 전과를 세웠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자 몽고의 세조는 제주초유사를 보내 다시 회유책을 썼으나 허사였다. 1273년 4월에 김방경, 홍다구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연합군은 1백 60여 척의 배로 제주도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때 김통정은 삼별초를 선두지휘하며 끝까지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하여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자, 그는 70여명의 잔여 병사를 이끌고 한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전의를 상실한 그는 비관하여 그만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말았다. 이때 삼별초의 포로는 1천3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치열한 항몽 대전을 치르며 4년간을 끈질기게 끌어왔던 삼별초의 난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1. 조적의 난(1339년)
조적의 난은 1339년(충숙왕 복위 8년)에 조적 등이 무리를 이끌고 충혜왕의 궁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난이다. 원나라로 도망가 왕을 헐뜯다 반란조적(?-1339년)은 본래 의흥군의 역리 출신이었는데, 충렬왕(고려 25대왕)때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세를 떨쳤다.
1313년(충숙왕 5년)에 우상시로서 원나라에 내시를 바치기 위해 사신으로 갔다. 그뒤 그는 밀직사를 거쳐, 1320년에는 선부전서가 되었으며, 1323년에는 만호의 직분으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공물을 바치러 다녀왔다. 그런데 그는 장인인 염승익의 외손 정안군 허경과 재산다툼을 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후 여러 정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원나라로 도망가 버렸다.
원나라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심양왕 왕고에게 아부하면서 갖은 모략 중상으로 충숙왕을 헐뜯었으며, 여기저기 근거 없는 소문을 원나라 조정에 퍼뜨려 충숙왕을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1322년에는 심양왕과 함께 원나라 영종(시디발라 재위 1320~1323년)에게 충숙왕이 황제의 조서를 찢어 버렸다고 무고하였다.
게다가 토번에 유배되어 있던 충선왕을 귀양에서 풀어줄 것을 충숙왕이 탄원했다고 속여 백관들의 서명을 받아 그 진정서로써 심양왕의 즉위를 원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했다. 이는 거절당하고 말았으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1324년에 원나라에 거주하는 고려인 2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 와서 원나라 한림원과 중서성에다 충숙왕을 헐뜯는 글을 바쳤다.
그리하여 1327년(충숙왕 14년)에 원의 황제인 태정제(예셴테무르 재위 1323-1328년)의 승인을 받아 고려왕위를 심양왕에게 선위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나, 곧 이조년의 적극적인 반대로 취소되고 말았다. 그 뒤에도 고려왕의 귀와 눈이 멀어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한다고 무고했다가, 사실을 밝히고 그 증거를 대라는 태정제의 명으로 원나라 사신 매려와 함께 본국에 들어왔으나, 그 모든 게 거짓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다시 원나라로 돌아간 그는 1332년에 선왕 충숙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귀국하여 지밀직사의 직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에 찬성사를 거쳐 1338년에 첨의좌정승에 올랐다. 1339년에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자, 심양왕과 함께 원나라로 돌아가고자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의 일행이 평양에 이르렀을 때, 왕에게 욕을 당한 경화공주(충숙왕의 비)의 폭로로 왕의 음란한 행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크게 격분한 그는 충혜왕을 폐위시킬 것을 공언하고 개경으로 되돌아와 국인을 영안궁에 감춰 놓은 뒤, 무리를 이끌고 충혜왕의 궁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는 관군에게 생포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12. 최유의 난(1364년)
최유의 난은 1364년(공민왕 13년)에 최유가 원나라의 병사 1만을 인솔하고 원나라에 의해 임의로 고려왕에 임명된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넘어와 일으킨 난이다. 원나라 황제 폐하! 고려를 정벌해 주세요. 최유(?-1364년)의 몽고명은 티무르부카이다.
그는 동지밀직 최안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군부판서의 직에 있던 그는 1339년(충숙왕 복위 8년)에 일어난 조적의 난 때 왕을 모시고 따라가는 직분을 잘 수행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1342년에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 후 부지런히 재물을 끌어모아 부호가 되었으며, 권세를 이용하여 온갖 불법을 자행하였다.
1349년에 그는 경창부원군(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나중에 충정왕(고려 30대왕)이 즉위하자 취성군에 봉해졌고, 성근익대협찬보정공신의 호를 받고 귀국, 그 이듬해에 참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왕의 옹립에 크게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땅한 벼슬 자리를 주지 않음에 대해 심한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역시 왕을 원망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진 동생인 판도판서 최원과 함께 원나라로 도망을 쳤다.
얼마 후 그는 고려에 소란을 일으켜 그 복수를 하고자, 1352년(공민왕 1년)에 김원지티무르와 함께 정남의 군사 10만을 고려에서 징집하도록 해달라고 원의 황제인 순제(토곤 테무르 재위 1332-1370년)에게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낙을 얻어낸 그는 고려에 파견되어 징병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때 원나라에 있던 모든 고려인들이 그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징집은 중지되었으며, 그는 원나라에 소환되고 말았다. 1354년에 그는 고우 장사성의 정벌을 위해 중상감승에 봉해져 다시 고려에 파견되었다. 그때 그는 징병을 독려했으며, 이때 본국에서 삼사사에 봉해졌다.
그 후 그는 원나라에 돌아가 승상 태스첸과 환관 박티무르부카에게 아첨하여, 특좌동지추 밀원사 직에 올랐다. 이 무렵 그는, 당시 기씨 일파를 숙청한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서 그에 대해 복수를 꾀하는 기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대신 덕흥군 왕혜를 세울것을 모의했다.
1364년(공민왕 13년)에 승상이 된 그는 그 해 1월에 원나라의 병사 1만여 명을 인솔하고, 원의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임명된 덕흥군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제일 먼저 의주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이어 선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강력한 저지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러다, 결국 반란군은 수주 달천에서 이성계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최유는 반란군의 잔여 병사 17명과 함께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원나라로 도망쳤다.
뒷날 그는 다시 대군으로 고려를 정벌하도록 해달라고 원의 황제에게 청원했다가 거절당했으며 감찰어사 유련 등의 탄핵을 받아, 고려에 압송되어 참형당하고 말았다.
13. 목호의 난(1374년)
목호의 난은 고려말기인 1372년(공민왕 21년)과 1374년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의 목호(몽고)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원나라 말을 어찌 명나라에 보내란 말인가? 탐라의 삼별초 난이 평정된 뒤 원나라에서는 군민총관부를 두고 동서에 아막을 세워 소, 말, 약대, 나귀, 양을 방목하게 하고 다루가치로 하여금 이를 감독케 하였다.
그 뒤 충렬왕(고려 25대왕)때 탐라가 고려에 부속되어 이름을 제주로 고치고, 목사와 판관을 두어 다스렸다. 그러나 공민왕(고려 31대왕)때에 이르러, 목호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중앙정부에서 보낸 관리들을 자주 죽이는 등 횡포를 일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372년에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고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말들을 조공으로 보내기 위해 제주의 말을 징발할 관리들을 보냈다. 이때 목호인 석질리 등이 난을 일으켜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분개하여 외쳤다.
"세조 황제가 방축한 말을 어찌 원나라의 적인 명나라에 보낼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중앙 정부에서 보낸 간선어마사 유경원과 목사 겸 만호인 이용장을 붙잡아 죽여 버렸다.
이 난은 곧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강구하여 간신히 마무리는 되었으나, 그 뒤로도 그 세력은 여전히 상존했다.
1374년(공민왕 23년)에 다시 명나라에서 말 2천필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이번에도 제주로 관리를 보내 다시 말을 징발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목호 석질 리가 필사초고와 함께 다시 난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을 양광, 전라, 경상 도통사에, 그리고 도병마사에는 염흥방을 각각 임명하여 목호의 반란군을 토벌케 했다. 최영과 염흥방은 그 해 8월에 전함 3백14척에 2만5천6백5명의 군사를 싣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석질리, 필사초고 등을 비롯한 난의 주모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제3부 조선시대
1. 이성계의 난(1388년)
이성계의 난은 이성계가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러 군대를 이끌고 가다가 조민수를 비롯하여 심덕부, 이무, 왕안덕 등의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1388년 5월 22일에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과 우왕을 밀어내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다.
요동 정벌은 4가지 이유로 불가...위화도에서 회군. 이성계(1335~1408년)의 호는 송헌, 본관은 전주이다. 그는 이자춘의 아들로 영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내는 밀직부사 한경민의 딸 신의왕후이며, 계비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 신덕왕후이다. 그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한 뒤 주로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며 무술을 연마하였다.
어느 날 무술 연마 도중 피곤하여 길가에서 잠시 쉬다가 꿈을 꾸었다. 꿈에 우연히 어느 쓰러진 집에 들어갔다가, 서까래 셋을 등에 짊어지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안변에 명승(무학대사)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에 찾아가 해몽을 부탁하였다.
그때 무학대사는 이렇게 해몽했다. "세 서까래를 짊어졌으니, 왕 자가 분명하오이다. 후일 왕가와 인연이 있을 꿈이외다. 자중하시오."
이에 크게 기뻐하고 송도로 올라온 이성계는, 1357년 유인우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참여하여 원나라 세력을 추방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동북면 상만호가 되었다. 1361년 9월에 독로강만호 박의가 모반을 일으키자 이성계는 그 해 10월에 그를 잡아 처형하고 봉기군을 토벌했다. 1359년(공민왕 8년)에 홍건적 모거경이 군사 4만을 이끌고 몰래 압록강을 넘어와 의주성을 함락시켰으나, 부원수 안유, 도지휘사 김득배, 서경유수 이춘부, 서북안무사 이인재 등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성 아래에서 적군을 격파한 바 있었다.
그러자 패주한 홍건적은 2년 후인 1361년 10월에 다시 주원수 등이 홍건적 5만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이때 평안도 일대의 각 읍들이 점령당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이성계를 금오상장군 겸 서북방면 병마사로 삼아 적과 대치케 했다.
이성계는 이지란을 선봉으로 삼아 친병 2천명을 거느리고 평안도로 가서 창성과 삭주의 싸움에서 적장 왕원수를 비롯하여 그 수하 장수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적병 1천여 명을 도살하였다. 그러자 적장 주원수는 이성계의 군대와 정면 충돌하지 않고 피하여 몰래 개경으로 진격하였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은 공민왕을 복주로 급히 피난시켰다. 기습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홍건족들은 도성 안으로 쳐들어가 국고의 재물을 마구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농락했다. 이때 황주, 평양, 안주 등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장수 안유, 김득배, 정세운, 이방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올라와 도성 주변 수십 리밖에 진을 쳤다.
이 무렵 평안도 일대에서 적군을 격파한 이성계의 군대는 주야로 군사를 몰아 10여 일 만에 도성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먼저 와 있던 장수들은 금오상장군인 이성계를 정중히 영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적세가 워낙 강대하여 쉽사리 격파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분개하여 이성계가 소리쳤다. "지금 군왕께서 피난하고 계신 이때, 어찌하여 주저하고만 있을 것인가. 무서워 싸우지 않음은 도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그리고는 기습 공격 작전을 면밀히 수립한 후, 적군들이 동문 안에서 잔치하느라 허술한 틈을 타서, 장수들로 하여금 남문과 북문을 나누어 치게 한 다음, 이성계는 전군을 이끌고 물밀 듯이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이후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적장 주원수, 부장 사류 등을 화살로 쏘아 죽였으며, 수만의 적을 도륙하였다. 홍건족이 격퇴된 뒤, 개경으로 돌아온 공민왕은 간신 김용의 거짓 상소를 믿고, 개경 탈환에 공을 세운 정세운, 김득배, 안유, 이방실 등에게 상을 주는 대신 징계한 후 이들을 처형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성계만은 용케도 이 화를 면하고 간신히 살아 남았다. 1362년 2월에 원의 유신인 나하추가 여진족을 거느리고 삼살(북청)과 홀면(홍원)으로 다시 쳐들어오자 동북면도지위사 정휘가 나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의 군대를 막게 했다.
같은 해 7월에 나하추는 선봉부대 1천여 명을 보내 이성계의 군대와 맞서 싸우게 했으나 덕산동 원평 전투에서 이성계의 군대에게 거의 섬멸되고 말았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나하추는 덕산동으로 주력부대를 이동시켰다. 이때 이성계는 야음을 틈타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자 나하추는 할 수 없이 달단동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집요하게 그들 뒤를 추적하여 달단동에서 나하추의 주력부대를 격퇴시켰으며, 도망치는 잔병들을 함흥 벌방지대에서 거의 섬멸시켜 버렸다. 이때 나하추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심양으로 도망하였다.(나하추는 그 후 자기 세력이 약해지자 결국 명나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1364년에는 죄를 짓고 원나라에 도망가 있던 최유가 고려의 간신 김용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동시에 일찍이 중이 되어 원나라에 도망와 있던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추대하고서 군사 1만여 명으로 평안도로 침입했다. 이 때 고려 조정에서는 안우경, 이구수, 이수, 이인임, 정찬 등을 보내어 적과 대치케 했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안우경은 패하고 안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영을 급파하여 전열을 가다듬게 했다. 그와 동시에 이성계에게 정예 군사 1천여 명을 주어 최영을 돕도록 했다. 고려의 연합군과 덕흥군의 군대는 달천에서 맞붙게 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적장 네 명을 연달아 화살로 쏘아 죽이면서 정면돌파를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덕흥군의 부대는 거의 섬멸되고 말았다. 원의 황제는 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최유를 잡아 고려 조정에 보내면서 화해를 청하였다.
그러자 왕은 간신 김용과 함께 최유의 목을 베어 길거리에 내다 걸고 구경시켰다.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에 다시금 침범하자 조정에서는 원수 박인계를 출전시켰으나 패전하자, 고령의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출전하여 홍산전투에서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그리고, 1377년(우왕 3년)에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 일대에 창궐하는 왜구를 토벌하였다. 1378년 그는 지리산에서 왜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에 모두 적의 왼쪽 눈을 쏘았노라."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병사들이 왜구의 시신들을 살펴보니 모두 왼쪽 눈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이에 병사들이 크게 놀랐다. 1380년 양광 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전투에서 아기바투가 거느린 왜구를 섬멸했다. 아기바투는 16세 되는 미소년이었는데도, 철갑옷에 철창을 들고 아주 민첩하게 싸우는 용맹스런 왜장이었다.
고려군의 여러 장수들뿐만 아니라 선봉장 이지란까지도 그의 철창 솜씨를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이성계는 꽹과리를 쳐서 일단 군사를 불러들여 진문을 굳게 닫은다음 다른 작전을 세웠다. 다음날 동이 트자, 아기바투는 또다시 선봉에 서서 고려군을 공격해 왔다.
이때 고려군의 사수 수십 명이 일시에 왜장을 향해 활을 쏘았다. 아기바투가 화살을 창으로 막느라 골몰한 틈을 타서, 이지란이 그의 투구를 화살로 쏘아 맞췄다. 그러자 "딱!" 하는 소리에 놀라 아기바투의 입이 잠시 쩍 벌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성계는 화살을 쏘아 그의 목구멍 속으로 쌩 날려 보냈다. 그리하여 아기바투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1382년에 이성계는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었다. 이때 9년간이나 유랑 생활을 하고 있던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와 시국 전반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이때 토지제도를 비롯한 사회 및 정계의 여러 구조적 모순에 대해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1383년에 이성계는 동북면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호바투의 군대를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 도원수,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듬해 함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하였다. 이 무렵, 신진세력의 중심 인물로서 구세력의 대표인 최영과 맞먹는 군벌을 이루어 확고한 세력 기반을 다진 그는 1388년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런데 이 무렵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보수세력인 친원파, 즉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고 세력 확장을 기하기 위해 친원 정책을 주장하고 나섰다. 특히 문하시중 직에 있던 임견미가 이인임, 지윤, 염흥방 등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염흥방의 가신인 이광이 조반의 땅을 강제로 빼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이고 그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 터졌다.
이를 빌미로하여 우왕은 최영와 협의하여 친원파를 숙청하도록 명하였다. 왕의 밀령을 받은 최영은 앞장서서 이인임을 비롯한 친원파 일파를 생포하여 살해하였다. 이후 최영,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
1388년(우왕 14년) 2월에 명나라가 중원을 어느 정도 정비한 다음 철령 이북, 이동, 이서의 땅은 본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므로 이를 요동의 관할 아래 두겠노라는 뜻을 고려 정부에 전해오자, 당시 국상으로 있던 최영이 대노하며 반발했다.
"명나라의 요구가 이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거병하여 싸움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해 버리자." 그러자 이성계는 다음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 계획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 것이 불가하다.
둘째, 여름철에, 특히 농번기에 군사를 징집하는 것이 불가하다.
셋째, 원정하고 있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범할 것이니 불가하다.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져 무기로 쓸 수 없으며 질병이 잦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니 불
가하다." 이런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출정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그의 주장은 묵살되고 말았다.
왕은 계획대로 각 도에서 6만여 명의 군사를 징집한 다음, 1388년 3월에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그리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한 후 정벌군을 출정시켰다. 이에 이성계는 할 수 없이 조민수와 함께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을 향해 그 해 5월에 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인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장마로 인하여 압록강이 엄청나게 불어나자, 정벌군은 거기서 일단 휴식을 취하며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까지 가서 총지휘를 하며 정벌군을 독려하였다.
이성계는 다시 한 번 우왕에게 네 가지 불가론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이는 또다시 묵살되고 말았다.
오히려 최영은 어명을 받들어 팔도도통사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은 엄한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정벌군의 선봉부대로 하여금 즉시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도록 하라."
사실상 당시 요동 주둔군은 명나라 군대 정벌에 나가 있는 상태에 있었고, 또한 환성 원수 홍인규와 강계 원수 이의가 이미 요동에 먼저 진격하여 일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으며, 요동민들도 고려군 환영 준비까지 마친 상태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는 최영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작전명령이었다.
그러나, 정도전, 조준, 윤소중 등과 같은 신진관료들처럼 국운 회복운동보다는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 및 실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성계에게는 무리한 요동 정벌이 무의미하게만 여겨졌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변혁의 주도권을 쟁취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때마침 도망 가는 군사와 병들어 가는 군사들이 속출하고 있음을 핑계삼아, 그리고 압록강 물이 자꾸 불어나 섬을 온통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서의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던 병사들의 위축되 심리를 역이용하여, 그는 회군하자는 쪽으로 의견 수렴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쪽은 진격하여 요동을 정벌하자고 하였고, 한 쪽은 개죽음을 당하지 말고 회군하자고 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하여 심덕부, 이무, 왕안덕 등의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회군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그는 최영을 비롯한 고려 조정의 오랜 민족적 염원인 요동 정벌의 소망을 저버리고 그 해 5월 22일에 회군을 단행하였다.
왕과 최영은 이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고 즉시 평양을 떠나 서경으로 돌아와 이에 대처하고자 하였으나,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의 회군 속도가 너무 빨라 도저히 수습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당초에 평양을 떠날 때 거느리고 나갔던 수명의 군사들과 수십 명의 신하들마저 이성계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중도에서 거의 모두 뿔뿔이 달아나거나 이성계 군에 투항해 버리는 바람에 난감한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최영은 겨우 50여 명의 휘하 군졸로 왕을 호위하고 개경의 화원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런 다음 개경에 남아 있는 군사를 모두 끌어모았다. 이렇게 하여 급조한 1천여 명의 군사로 그는 반란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는 불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그러다가 결국 화원 팔각정 안에는 왕, 영비(최영의 딸), 첩 쌍비, 최영, 그리고 몇 명의 병사만이 덜렁 남게 되었다. 이때 화원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왕의 총명을 가리고 우리를 죽음의 땅으로 몰아넣으려던 최영은 즉시 나와 칼을 받으라." 이때 최영은 왕 앞에 나아가 마지막 하직인사를 올렸다.
"전하, 신이 나가 죽겠나이다. 부디 종묘사직을 잘 보전하옵소서."
그러나 왕은 최영을 차마 내보내지 못하고 덜덜 떨며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짐만 남겨두고 가버리면. 앞으로 종묘사직은 어떡하란 말씀이오?"
이때였다.
이성계의 심복 곽충보가 이끄는 반란군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와 최영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렇지만 아무도 감히 최영을 체포하지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에 모습을 드러낸 이성계가 이렇게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이번 거사는 내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소이다. 요동 정벌은 대의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소. 또한 백성이 바라는 바도 아니었소. 나로선 부득이 한 일이었소이다." 그러자 최영은 신음하듯 이렇게 내뱉었다.
"쓸 데 없는 소리! 옛날 이인임의 말만 들었어도...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결국, 그 해 여름에 최영은 역적이라는 죄목으로 고봉현에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우왕은 처음에는 강화도로, 나중에는 강릉으로 유배당하였다.
이성계는 이렇게 최영을 밀어내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런 다음 이성계는 우시중으로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인사권과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조민수를 좌시중의 직에 앉혔다.(그러나 조민수는 나중에 이씨 일파인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멀리 전리로 방출되고 말았다)
최영은 처음에는 고봉(고양)에, 그리고 다음에는 합포(수원부)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공료죄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실로 원통하기 그지 없도다. 내가 만일 내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면 모르거니와,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었노라. 오직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
이는 내가 죽은 후에 역력히 알게 될 것이다." 1389년 11월에 이성계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한 후, 수문하시중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390년(공양왕 2년)11월에 영삼사사가 되었다. 그리고 1391년 1월에 그는 삼군도총제사가 되어 조준과 함께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인 기반을 박탈했다.
1392년 7월에 그의 심복인 배극렴 등에 의해 공양왕은 원주로 추방되었으며, 그 해 7월 17일에 그는 새 왕조의 태조로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고, 면모와 분위기를 일신하고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염원하며 1394년에 도읍을 한강 유역의 한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에 의한 1,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크게 낙심하고서, 왕위를 버리고 만년을 처사로 보내다가 1408년(태종 8년) 정월에 병석에 누운 후 일어나지 못한채 그 해 5월 별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2. 이방원의 난(1398년)
이방원의 난은 1398년에 이방원이 태조가 병석에 눕게 된 틈을 타서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세자 자리가 왜 계비의 아들에게 넘어가야 하나! 이방원(1367~1422년)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여섯 아들, 즉 이방우(진안대군), 이방과(영안대군, 정종), 이방의(익안대군), 이방간(희안대군), 이방원(태종), 이방연(덕안대군)은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얻었고, 나머지 두 아들, 즉 이방번(무안대군), 이방석(의안대군)은 계비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얻었다. 이방원의 비는 여흥부원군 민문도의 딸 원경왕후이다.
그는 1382년(우왕 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직사 대연이 되었으며, 이후 아버지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신진 정객들을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388년(우왕 14년)에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92년(공양왕 4년)에 구파 세력의 거두인 정몽주를 살해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신진 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1388년에 조선이 개국되자, 정안군에 봉해졌으나, 태조의 총애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번, 이방석에게 기울자 불안해졌다. 게다가 태조와 계비 신덕왕후의 심복인 개국공신 정도전이 계비의 아들 이방번을 태자로 책봉하는데 편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심란했다.
이성계의 정실인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운명을 달리 했기 때문에, 이후 왕비가 된 신덕왕후 강씨가 궁중 안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씨 소생인 맏왕자 이방우가 한 통의 편지를 남겨놓은 채 어디론지 행방을 감춰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세자 책봉 문제는 궁중 안에서 초미의 관심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때 개국공신 배극렴이 이방원을 편들고 나섰다.
"평시 같으면 장자를 세자로 정해야 하겠지만,지금은 국가창업의 비상시이다. 그러므로 개국에 공이 많은 제 5왕자 방원을 세자로 정함이 마땅하다." 이에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파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신덕왕후의 속뜻은 이러했다. "어차피 장유 적서를 따지지 않을 바에야 내가 낳은 왕자 중에서 세자로 세우리라." 신덕왕후의 은밀한 부탁을 받은 정도전이 앞장서서 태조에게 제 2왕자인 이방과 대신에 제 7왕자인 이방번을 세자로 책봉해야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자 배극렴 등은 절충안을 내놓았다. "반드시 강후 소생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면, 차라리 제 8왕자인 이방석 쪽이 더 낫다." 태조는 결국 대세에 밀려 제 8왕자인 이방석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자 이방원은 매우 불쾌했다. 그는 세자의 자리는 마땅히 자기 형이 아니면 그 동안 개국에 크게 기여한 자기 자신이 차지하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방원의 심기를 읽은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 소개로 이방원을 찾아가 모의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태조에게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각 지방으로 내보내라고 주청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방원은 하륜을 환송하기 위해 찾아가 술자리에서 마주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던 중 하륜이 일부러 이방원의 옷자락에 술을 엎질러 버렸다. 이에 화가 난 이방원이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하륜은 즉시 그 뒤를 따라가 사과하는 자리에서 내밀한 모의를 다시 하게 되었다.
"한시가 급하오. 나는 왕명을 받았으니 즉시 한양을 떠나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해야 하오. 나 대신 안산군수 이숙번을 추천하니, 그와 함께 먼저 거사하시오. 그러면 내가 합세하겠소." 당시 이숙번은 중앙 행사 참석차 지방관군인 이안군과 호위병력을 거느리고 한양에 올라와 있었다.
두 사람의 면밀한 작전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방원은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먼저 거사를 통고한 다음. 이숙번의 병력을 빌려서, 정도전, 남은 등이 한씨 소생의 왕자를 죽이려고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남은의 소실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봉화백 정도전, 의성군 남은, 부성군 심효생 등을 습격하여 모두 목을 베어 죽여버렸다.
이방석은 뒤늦게 이를 알로 자기의 사병을 출동시켜 반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뒤였다. 그러자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경순공주의 남편인 부마 이제와 함께 태조가 앓아 누워 있는 청량전으로 나아가 엎드려 애걸하였다.
"아바마마, 세자 자리도 싫고 왕자 이름도 다 싫습니다. 빈과 아기, 형님과 매부 내외를 그저 살려만 주옵소서. 그리하면 궁궐을 떠나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살겠나이다." 이때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태조는 조정 중신들을 불러 들여 대책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하륜에 의해 하나 둘씩 포섭된 조준, 김사형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이 세자 경질을 빗발치듯 요구하고 나서는 바람에 태조도 어쩔수 없이 밀려 세자 이방원을 태자로 추대하였으나, 이방원은 이를 극구 사양하고 동복형인 영안대군 이방과(정종)를 세자로 책봉하여 즉위케 하였으며, 자신은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이때 만약 자신이 세자로 정해진다면, 자기가 세자가 되기 위해 개국 공신들을 죽였다고 의심받을 게 뻔하였고, 또 권력이 별로 야심이 없는 이방과가 세자가 된다고 해도 어느 시기에 가서 그를 물리치고 자기가 대신 왕위에 오를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자 자리를 사양했던 것이다.
이후, 이방원은 이방석, 이방번을 귀양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토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결국 이방번, 이방석, 이제가 같은 날 귀양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방원의 아내인 민씨의 계책을 받든 이숙번이 부하들을 시켜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밖을 지나는 그들을 모두 노상에서 때려 죽여 버렸다.
3. 이방간의 난(1400년)
이방간의 난은 1400년(정종 2년) 1월에 이방간이 이래를 비롯하여 강인부, 이맹종, 민유공, 이성기 등과 함께 이방원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방원이가 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이방간은 이성계의 넷째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신의왕후이다. 그는 조선 건국후 회안대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가슴에 품고 지냈던 그는 야심만만한 동생 이방원을 늘 질시하였다. 그러던 중,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난)이 일어났고, 그 후 이방원이 정사공신들로 추대된 하륜, 이숙번, 조준, 김사형, 조영무, 이저, 익안대군 등과 함께 정권을 독점하다시피 하자, 그들의 전횡에 큰 불만을 품었다.
이러한 그의 심기를 읽은 지중추부사 박포가 어느날 이방간을 찾아와 이방원을 모략했다. "정안군(이방원)이 당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박포는 이방원의 난 때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자기에 대한 보직이 높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자주 불평을 터뜨려 이방원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죽구(영동)로 유배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 때문에 그는 이방원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이방간과 이방원 모두가 권력에 야심을 품고 있음을 간파하고서 이방간을 찾아와 그렇게 충동질 했던 것이다.
이 거짓 밀고를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이방간은 거사할 결심을 굳게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공신들 중 거의 대부분은 이방원에게 붙어 버린 뒤였고, 자기에게는 박포, 장시길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처질 되는 이래, 처의 양부인 강인부와 의논한 끝에 좀더 세력을 키운 후인 1400년(정종 2년) 1월 30일에 거사하기로 날짜를 잡았다.
그러자 이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평소 이방원 일파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우현보(이래의 스승)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그러자 우현보는 일이 성사되지 못했을 경우 자신의 신변이 위태롭다고 판단하고는 아들 우홍부를 이방원에게 보내어 그 사실을 그만 고자질해 버렸다. 이방원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이방간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방간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그의 아들 이맹종(의령군)과 함께 사병 수백 명을 이끌고 출동하여 맞섰다. 이때 왕(정종)은 이문화를 보내어 이방간에게 병력 출동을 철회하라고 달랬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방간과 이방원 간의 형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싸움은 선죽교 근처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조가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방간은 민유공, 이성기, 이맹종 등과 함께 수백명의 사병들을 직접 진두 지휘하여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방원도 이숙번이 이끄는 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워 싸웠으며, 때로는 선두에서 군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공격해 나갔다.
두 형제는 이렇듯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방간 쪽이 점점 불리하게 되어갔다. 그러다가 백금반가에서 이방간은 그의 주력부대를 거의 대부분 잃어 버렸다. 그런데도, 이방간은 적경원터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최대한 버텼다.
그러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서동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추격대는 그를 끈질기게 뒤쫓아갔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게 되자,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이방간은 말에 내려 갑옷을 벗고 활까지 내던진 후 길바닥에 픽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방원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그를 에워싼 채 창을 겨눴다. 이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하소연했다.
"남의 거짓 밀고를 믿고 이 지경이 되었다. 목숨만 살려준다면, 여생이나마 시골에서 보내고 싶다."
차마 형(다섯째 형)을 죽일 수 없었던 이방원은 그 처분을 왕에게 떠넘겼다. 그러자 왕은 승지 이숙을 보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대낮에 한양거리에서 난을 일으킨 죄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나, 형제지간의 정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목숨만을 살려주어 귀양에 처하노라." 이방간은 그 길로 곧장 토산현으로 유배를 당하였으며, 박포는 붙잡혀 청해로 유배 당했다가 얼마 후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이방간은 유배지에서 병들어서 1421년에 숨을 거뒀다. 이방간의 난 이후, 정종은 참찬 문하부사 하륜의 권유를받아들여 이방원을 세자로 봉하였으며, 대사헌 권근, 문하부 좌산기 김약채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동안 문제점으로제기되어온 사병 제도의 폐지를 단행하였다.
4. 이유의 난(1453년)
이유의 난은 1453년(단종 1년)에 이유(수양대군)가 권남, 한명회 등과 함께, 단종 보필의 중신이었던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인 후, 안평대군까지 제거하고 군국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이유(수양대군:1417~1468년)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며, 그의 형은 문종이고, 그의 비는 윤번의 딸 정희황후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무예에 능하였고, 병서에도 아주 밝았다. 그는 1428년(세종 10년)에 진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445년(세종27년)에 다시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으며, 세종의 명을 받들어 김수온 등과 함께 불서를 번역 감독하였고 향악 악보 정리도 관장하였다.
1452년에는 관습도감이라는 직책을 맡아 수행했고, 같은 해에 단종이 즉위하자 고명사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위해한 위업과 18명의 왕자, 4명의 공주와 옹주를 남기고 1450년(세종32년) 2월에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30년간이나 세자로 있으면서 선왕을 도와 많은 일을 했던 이향이 왕위(조선왕조 5대왕,문종)에 올랐다. 문종은 관료들을 두루 중용하고, 민의를 널리 수렴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군사제도도 대폭 정비한 다으 병력을 증강시켜 국방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던 그가 1452년 5월 재위 2년 3개월 만에 아깝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유일한 어린왕자 이홍위(단종)가 조선왕조 6대 왕위에 올랐다. 선왕인 문종은 죽기 전에 자신이 단명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당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누누이 어린 왕자 이홍위를 잘 보필해 줄 것을 신신당부해 두었다.
그러나 어린 단종 주위에는 7명의 숙부, 즉 수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 임영대군 이구, 광평대군 이여, 금성대군 이유, 평안대군 이임, 영응대군 이염이 떡 버치고 있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제일 부담 되었다.
이들은 저마다 빈객들을 다투어 포섭하였는데, 수양대군측에는 권남, 한명회, 홍달손, 양정 등과 같은 무인들이, 안평대군측에는 황보인 등과 같은 문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안평대군은 수양대군보다 한 살 아래의 동생이었지만, 그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알려질 만큼 서예는 물론 그림과 가야금 등에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이들은 각자 자기 일파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등용시키려고 서로 경쟁하다시피 했다.
수양대군은 자기 주변에 무사들과 모사꾼들을 모아 심복 세력을키워 갔으며, 안평대군으 권신 황보인과 김종서와 제휴하여 조카인 단종의 왕위 보존을 위해 인사 행정기관의 하나인 황표정사를 장악하여, 자기 측근 문신들을 요직에 앉혔다.
그러던 중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여온 뒤 안평대군의 세력권인 황표정사를 폐지해 버린 후, 1453년 10월 10일에 난을 일으켰다. 그는 휘하의 무사들을 이끌고 "심야에 급한 서류가 있어 왔다."고 속여 김종서의 집을 급습했다. 그리하여 김종서와 드의 두 아들까지 철퇴로 내리쳐 살해해 버렸다.
그런 다음 단종에게 다음과 같이 거짓 보고를 올렸다. "김종서 일당이 모반하려 하므로 죽여 없앴습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온지라 미리 못하였나이다." 뒤이어 수양대군은 왕명이라고 속여서 대신들로 하여금 즉시 입궐하라고 한 다음, 대궐 문에 미리 배치해 놓은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의 반대파 중신들을 모두 때려 죽이도록 지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평소 자기 세력과 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거나, 모반죄를 뒤집어 씌워 귀양 보내 버렸다. 김종서의 시체를 거리에 매달아 놓게 하여 구경시켰으며, 그의 자손들까지도 목을 베어 죽여 버렸고, 좌의정 정분,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등은 일단 귀양 보냈가가 죽여 버렸다. 안평대군까지 적대시하여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역시 죽여 버렸다.
그는 심지어 변방에 나가 있는 김종서와 친근한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까지도 파면시켜 버렸다. 그런 다음, 수양대군은 혼자서 영의정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 병마도통사를 모두 독차지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인지, 한확, 이사철, 박종우,이계전, 박중손, 김효성, 권남, 홍달손, 최항, 한명회 등을 비롯한 37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고 정인지를 좌의정에,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는 집현전에 강요하여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지어 단종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하였다.
1455년 6월 2일에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의 압력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옥새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단종은 동부승지 성삼문으로 하여금 상서원에서 옥새를 내와 환관 전균에게 주어 경회루로 가지고 나오라고 명하였다. 어명을 받든 성삼문은 할 수 없이 옥새를 가져와 전균에게 건네 주자, 전균은 그것을 경회루로 가지고 갔다. 이때 단종은 수양대군을 불러, 그에게 옥새를 넘겨 주고자 하였다.
그러자 수양대군으 엎드려 거짓 눈물을 흘리면서 몇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결국 옥새는 수양대군에게 넘겨졌다.
그 후 수양대군은 모든 문무백관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즉위(조선왕조 7대왕)하였다.
그 뒤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하자,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한 후 집현전을 아예 폐지해 버렸다. 그는 재위 14년 동안 국방, 외교, 토지제도, 관제 등의 개혁, 개편 등 수 많은 치적을 올렸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만년에는 왕위 찬탈로 인한 인간적 고뇌에 싸여 괴로워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1468년에 죽었다.
5. 이징옥의 난(1453년)
이징옥의 난은 1453년(단종 1년)에 계유정난에 의한 중앙 정변에 크게 분개한 이징옥이 군사를 이끌고 반기들든 난이다. 김종서의 심복이란 이유로 나를 처형하겠다고? 이징옥(?-1453년)은 지중추원사 이전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양산이며, 그의 형은 판중추부사 이징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청소년 때는 어머니를 위해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오는가 하면 어떤때는 산에서 만난 호랑이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 보았는데 호랑이가 겁을 집어먹고 고개를 떨구자 화살로 쏘아 죽일 정도로 담력이 컸으며 힘이 장사였다.
1416년 8월에 그는 무과 별시에 응하여 장원으로 급제한 뒤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세종 초에 김종서를 따라 북변에 종군하여으며, 1424년(세종 6년)에 황상의 추천으로 경원진 첨절제사가 되어 아산에 침입한 야인(여진족)을 격퇴했으며, 이어 영북진 절제사가 되었다. 1436년에 판회령 도호부사가 되어 오랑캐의 추장을 살해하는등 큰 업적을 쌓았으며, 같은 해 판경홍도호부사로 전직했다.
1438년 모친상을 당해 한때 사직했다가, 다시 3달 후에 북방의 경비를 담당했으며, 이후 2년 동안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김종서를 도와 서북 4군(지성, 무예, 여연, 무창), 동북6진(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령, 부령)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다음 네 명의 조선 장수를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김종서, 이징옥, 전시귀, 하경복!" 북방 개척의 공을 인정받아, 이징옥은 마침내 김종서의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에 올랐다. 1449년에 그는 그 동안 20여년에 걸친 북방 경비를 담당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함경도 절제사로 부임했다.
김종서는 그와 작별하고 돌아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징옥과 그의 형 이징석은 모두 다 명장이나, 징석은 욕심을 내어 재물을 모으기에 급급한 반면에, 징옥은 청렴으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로다!"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으면서, 그는 함부로 여진족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않고 그 지역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높은 지지와 신망을 받았으며, 조정으로부터는 뛰어난 지략가요 담력 큰 장수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는 가산을 돌보지 않고 오직 변방 경계와 개척에만 모든 정열을 다 바쳤다.
또한 그의 처가 죽은 지 오래되어 그를 돌볼 사람이 없었으나 "청백은 무복인의 별호이니라"는 김종서의 조언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자 애를 썼다. 이를 알게 된 문종은 옷 세벌을 짓도록 하여 그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여진족이 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재물과 여자를 보내 유혹을 해온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추상 같은 호령을 하여 그들을 당장 내쫓아 버렸다. 1453년(단종 1년) 10월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쳐죽이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에 압송한 뒤 정권을 장악하여 국가의 주요 업무를 통괄하여 장악하였다. 그런후, 그는 이어 김종서 일파를 모두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에는 김종서의 천거로 함길도 도절제사에 오른 이징옥도 포함되었다.
수양대군은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박호문을 대신 앉혔다. 수양대군은 자기 일파인 박호문을 은밀히 보내 군사 반란과 외침을 미리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박호문은 근무지로 가서 후임자로서 전임자인 이징옥에게 전입신고를 하면서, 이징옥에게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소환장을 보여주었다.
이에 이징옥은 멋도 모르고 자기 직을 박호문에게 내어준 다음 호위 병력 약간만 거느리고 한양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그는 우연히 계유정난에 관해서 얻어듣게 되었다. 그때서야 그는 중앙에 정변이 일어났으며 김종서가 사살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자기를 파면시킨 이유가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오해 때문이며, 자기를 한양으로 불러들인 것이 자기를 처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모두 눈치채게 되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이징옥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양대군 일파에게 반기를 들기로 작정하고 곧장 발길을 돌려 예전의 근무지로 돌아갔다. 그는 먼저 선수를 쳐서 박호문을 포박하여 당장에 목을 베어 죽여버린 다음, 자기의 부하들을 이끌고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병마를 이끌고 두만강 상류쪽으로 북진하여 종성으로 가서 그곳을 본거지로 삼고 주둔하면서 스스로 대금황제라고 칭하고, 군병력을 정비했다.
그런 다음 근방의 여진족들에게 격문을 보내 후원을 요청하였다. 장차 그는 두만강 건너편의 오국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근처의 여진족 및 한민족을 통합하여 "대금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웅대한 포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징옥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 있었다. 이징옥이 대병력을 이끌고 오국성으로 향해서 북상하는 도중이었다.
어느날 두만강 상류에서 하룻밤을 쉬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불안한 마음에 잠이 들지 못한 채 마루에서 방어태세를 취한 채 앉아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하나가 졸다 말고 눈을 번쩍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이 피투성이가 된 불길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이징옥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안심시켰다. "거사를 앞두고, 무슨 그런 잡념을 하느냐? 염려 말거라." 바로 이때였다.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등이 이끄는 부하들이 이징옥 부자에게 덤벼들었다. 위기에 처한 이징옥은 얼떨결에 마당으로 뛰쳐나온 다음 담을 뛰어넘어 이웃 민가로 도망쳐 숨었지만, 곧 들키고 말았다.
이때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처절한 혈투극을 벌였으나, 그만 외팔을 잘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고 오른팔 하나로 끝까지 싸웠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그의 아들 셋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이로써 이징옥의 난은 의외로 너무 싱겁게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난은 조선인으로서 황제를 자칭한 것과 또 이씨 왕조의 중앙정권에 대해 처음으로 지방적 반란을 일으켜 지방의 민심을 자극하고 이로 인하여 후일 이시애의 난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6. 성삼문의 난(1456년)
성삼문의 난(사육신의 난)은 성삼문이 성승을 비롯하여,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등의 문인들과 무인 유응부를 비롯한 단종의 외숙 권자신 등과 함께 1456년 4월에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상에서 수양대군과 세자를 암살하고자 모의했던 사건이다. 하늘에 태양 하나, 백성에게도 두 임금 없다.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정난공신의 호를 내렸다.그러자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러나 동부승지 성삼문만은 이를 수치로 여겨 혼자 축하연을 열지 않았다. 성삼문이 허탈한 마음으로 경회루를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달려가 그 팔을 붙잡고 보니 박팽년이었다. 성삼문은 그를 달래며 말했다. "아직 상왕이 살아 계시지 않소이까. 일을 도모하다가 그때 죽는다 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 힘을 합쳐 수양대군을 제거하도록 합시다." 이때부터 성삼문은 자기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등의 문인들과 무인 유응부를 비롯한 단종의 외숙 권자신 등과 함께 수양대군 암살 계획을 은밀히 모의하였다.
그들은 1456년 4월에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 석상에서 운검을 들고 서 있게 될 자로 성승과 유응부가 결정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들은 연회가 한참 진행 중일 때 도총관 유응부가 검을 휘둘러 수양대군과 그의 아들을 죽인 다음, 성문을 닫아 걸고 형조정랑 윤영손이 신숙주를 죽이는 것을 필두로 하여 권남, 한명회를 비롯한 수양대군의 측근들을 모두 없애 버린 후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 송별 연회가 시작될 무렵,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찾아와, `창덕궁 광연전은 비좁고 또 더우니, 세자를 입시하게 하지 말고, 또 운검도 들여 보내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수양대군이 동의했다. 이로써 성삼문 일행의 거사 계획은 차질을 빚고 말았다.
화가 난 성승이 아들인 성삼문에게 연회장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한명회를 죽이고 계획대로 거사하자고 제안했다. 유응부도 이에 합세했다. 그러나 성삼문은 세자가 참석하지 않는 자리인지라 한명회를 죽인다고 해도 경복궁에 있는 세자가 군사를 몰고 온다면 승산이 없다고 하면서 거사 일정을 연기하자고 성승과 유응부를 설득했다.
이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문신들도 성삼문 편을 들었다. 이 때문에 한참이나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성승과 유응부는 자기들 뜻을 굽히고 성삼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 일정이 연기되자, 모의에 가담했던 자들은 불안하기 그지 없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질은 안절부절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궁을 빠져 나와 그 길로 곧바로 그의 장인인 정창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모든 거사 기밀을 발설해 버렸다. 그러자 정창손은 사위 김질과 함께 궁으로 곧장 들어가 수양대군을 만나 모든 걸 자세히 꼬아 바쳤다. 이에 수양대군은 명나라 사신이 떠나자마자 그 즉시 성삼문을 체포하여 데려와서 직접 문초하였다.
이때 성삼문은 김질과 대질을 원한다고 요구하였다. 수양대군이 김질을 불러 대질시키자, 그 자리에서 김질의 말을 듣고 난 성삼문은 껄껄걸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꼬아 바친 것이 오히려 말을 돌린 감이 있구나. 우리들의 뜻은 역모를 품고 있는게 아니라 바로 상왕을 다시 복위하는데 있노라." 그러자 수양대군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왜 나를 배반했느냐?"
이때 성삼문은 수양대군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
"우리는 원래의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을 뿐이오.
천하에 임금을 받들지 않는 신하가 어디 있겠소?
내 마음은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소이다.
이를 어째서 배반이라 하는 거요?
나으리는 평소에 주공임을 자처했는데, 주공이 언제 이런 짓을 했소이까?
이번 일을 꾸민 것은,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외다."
"선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찌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하려 한단 말이냐?"
"그때는 단지 때가 아니었을 뿐이었소이다. 애당초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으니 물러나서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우리는 이렇게 뒷날을 도모하게 된 것이오."
"너는 내가 주는 녹을 먹고도 어찌 나를 나으리라 부르느냐?"
"상왕이 계시는 데 내가 어떻게 나으리의 신하란 말이오?
그리고, 난 나으리의 녹을 먹은 적이 없소이다. 만일 의심스럽거든 내 집을 뒤져 보시오. 나으리가 준 녹봉은 여태 건드리지 조차 않았소이다."
이에 격분한 수양대군은 성삼문에게 달군 쇠로 지지는 형벌을 내렸다.
그래도 성삼문은 태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한마디 했다.
"나으리의 형벌이 너무 참혹하오 그려."
그러고 나서, 세조 옆에 서 있는 신숙주를 호되게 꾸짖었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대왕께서 하루는 왕손을 안고 산보하여 하신 말씀이 생각나지 않느냐?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대들은 부디 세자를 보호하라.`
그 말씀이 지금도 내귀에는 쟁쟁하건만, 너 혼자서 잊어 버렸단 말이냐? 네가 이렇게 못된 놈인 줄은 미처 몰랐구나."
성삼문에 이어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도 체포되어 수양대군에 의해 직접 심문당한 뒤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에 처해졌다.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아내와 술 한 잔을 조용히 나눈 뒤 조상의 사당 앞에서 자살해 버렸다. 이어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도 주모자로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졌으며, 성삼문의 세 동생(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네 아들(성맹첨,성맹년,성맹종, 그리고 갓난아기)등도 모두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반역의 혐의를 받은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 명도 모두 살해되었다. 그 이듬해인 1457년에, 수양대군은 상왕(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50여 명의 군사의 감시 아래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내버렸으며, 이미 죽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추폐시켜 서인으로 만들었고, 금성대군(수양대군의 넷째 아우)도 단종을 가까이 한 일이 있다 하여 경상도 순흥으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그 해 금성대군 이유는 유배지 순흥에서 그곳 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노산군을 다시 왕위에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1456년 9월 유배지의 군사와 향리를 결집시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영남의 지방 토호들에게 격문을 띄웠다.
그런데 관노가 그 격문을 세조에게 갖다 바치며 밀고해 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회, 좌찬성 신숙주 등이 나서서 금성대군과 노산군을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로써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곧 체포되어 안동 감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으며, 왕자 한남군과 영풍군도 변방으로 귀양가게 되었고, 노산군(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노산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그렇지만 영월에 내려간 금부도사는 사약을 차마 노산군에게 내밀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다가 장사 한 사람을 방 안으로 들여 보내 노산군을 뒤로부터 끌어안고 목을 졸라 죽여 버리도록 했다.
7. 이시애의 난(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은 판회령부사를 역임한 지방 호족 출신 이시애가 지방적 세력을 배경으로 북도의 수령을 남도 인사로써 삼는 것이 부당하다고 북도인을 선동하여 그의 아우 이시합과 더불어 1467년(세조 12년)5월에 일으킨 난이다. 북도의 수령자리에 부도 사람은 왜 못 앉나?
이시애(미상 ~1467년 세조 13)는 검교 문하부사 이원경의 손자요 함경도 첨절제사 이인화의 아들로 길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경도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당시 그 집안이 함길도의 각 읍에서 모두 잘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 초 조정의 북방인 회유정책에 의해 중용되어 1451년(문종 1년)에 호군이 되었고, 1458년(세조 4년)에 경흥진 병마절제사가 되었으며, 이어 첨지중추부사, 판회령부사의 직을 각각 역임했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후, 차츰 북방민의 등용을 억제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임명하고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적으로 줄여가는 등 중앙접권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러자 북도인들은 이에 심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조정에서는 1458년에 호적을 개정하고, 그 이듬해 2월부터 새로 호패법을 시행하여 지방 실력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인력이 군대로 편입되어 버리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지방 토호들은 중앙의 일련의 행정조치를 매우 못마땅히 여겼다.
또한 중앙에서 임명되어 파견된 수령들은 대부분 무인 출신들이어서 행정적인 차원에서의 통치보다는 무력을 통한 독재적인 방법으로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 대한 착취 수탈을 자행하여 북도인들의 원성을 크게 사게 되었다. 이 무렵(1467년 봄) 이시애는 모친상을 당하여 판회령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시애의 아우 이시합과 매부 이명효 등이 조정의 일련의 행정 조치에 대해 불평불만을 터뜨리면서 이시애의 심기를 자꾸 자극하였다. 자연스레 그들은 마음을 합하여 머리를 맞대고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1467년(세조가 죽기 1년 전) 5월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반란을 일으킴과 동시에 유언비어를 널리 유포시켰다.
그는 자기 족당들을 북방 각 지에 보내 처음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렸다.
"충청, 전라, 경상 하삼도의 군사들이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쳐들어와 북도의 군민들을 죽이려 한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 설한령을 통해 북도로 들어오게 하여 장차 이곳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을 다음과 같이 모함하면서 민중을 선동했다."
함길도의 절도사란 자가 모든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
"이 즈음 강효문은 각 진을 순찰하던 중에 이시애의 고향인 길주에 와 있었다. 이시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밤중에 숙소를 급습하여, 병마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부령부사 김익수, 판관 박순달, 군관 성이건, 김수동 등 중앙 출신 관리들을 붙잡아 모두 칼로 베어 죽여 버렸다.
이 암살 사건은 1467년 5월 10일에 일어났다. 한편 이시애는 조정에는 자기 측근인 이극기를 보내 다음과 같은 거짓 상소를 올리며 자신이 강효문을 죽인 것은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는 뜻을 전달하였다.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중앙의 한명회, 신숙주 일파와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서 모반하려 했사옵니다."
이와 동시에 이시애는 `지금 함길도에서는 각 읍의 백성들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워하며 별별 소문을 다 퍼뜨리고 있으며, 북도의 민심이 대단히 동요되고 있는 중이니, 속히 북도 출신 인사를 함길도 내의 각 읍 수령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이후에도 이시애는 몇 번 더 상소를 올려 중앙 정부가 혼란에 빠지도록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하였다.
이시애는 이런 식으로 교묘히 유언비어를 퍼뜨려, 당시 지방의 각 유향소(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의 불평불만 및 농민들의 관리에 대한 증오심에 호소하여 스스로 반란에 동조 또는 직접 참여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함길도 절도사라 자처하고, 지방 세력가들의 근거지인 각 읍 유향소를 중심으로 총궐기하여 타도 출신 수령들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등 함길도 일대가 삽시에 혼란에 빠뜨리도록 유도하였는데, 이 작전은 예상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 반란에 야인들(여진족)까지 끌어들이는 등 치밀한 전략을 펼쳐나갔다. 이시애의 반란군은 점점 확대되어 한때 북방 곳곳을 휩쓸고 다니며 조정에서 파견한 북도 수령 및 관리를 모두 살해해 버리는 등 그 기세를 크게 떨쳤다.
이시애의 반란군 속에는 각 진영의 정규군도 포함되어 있는 데다 여진족이 보낸 증원군도 합세해 있어, 토벌군이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이시애는, 세조에게 반란군의 동향을 알리면서 먼저 마운령을 점령할 것을 건의한 바 있는 신면(신숙주의 아들)을 살해하고 나서 태연히 세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신면은 역적 신숙주의 아들로서 모반하여 남도의 군사를 이끌고 북도의 백성들을 살육한 후 다시 대군을 이끌고 상경하여 반역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고 또 그에게 동조한 체찰사 윤자운도 잡아 가두었나이다."
한편, 세조는 처음에 멋 모르고 이시애의 말을 성급히 믿어 버리고 신숙주를 잡아들여 투옥시키는 등 일시 실수를 저질렀으나, 곧 사태를 직시하고서, 즉시 남도에서 징병하여 토벌군을 편성한 다음, 조카인 귀성군 이준을 함길, 평안, 강원, 황해 4도 병마도총사로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허종을 함길도 병마절도사로, 그리고 강순, 어유소, 남이를 대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토벌군 3만여 명을 1467년 5월 18일에 출동시켰다.
그 중 조석문이 이끄는 토벌군이 먼저 영흥으로 북상하며 진격하였으나, 그 뒤를 따르던 구성군은 토벌군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도 철원에서 한동안 늑장을 부렸다. 그것은 최윤손 때문이었다. 토벌군이 출동하기 앞서 조정에서는 단천 사람인 최윤손을 이시애에게 보내 회유하도록 했으나, 그가 이시애 쪽에 붙어서 오히려 `조정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다.
이러한 기세로 밀고 들어가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중앙의 한명회, 권남, 신숙주 등도 이시애의 편이다. 라고 거짓 선전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섣불리 반란군을 대적했다가는 어떤 망측한 일을 당할지 몰라 겁을 집어먹고 그처럼 고의로 토벌군 주력부대의 진군을 늦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무렵 이시애는 길주에서 단천, 북청, 흥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 출신 관리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거나 사로잡아 그 기세를 더 한층 올리고 있었다. 전세와 상황이 이처럼 여의치 않자, 세조는 각 도에서 군사를 더 징발하여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으로 임명한 뒤 평안도병 3천명을 주어 평안도 경계 지역에 위치한 영흥으로 진격하게 함과 동시에, 병조참판 박중선을 평로장관으로 삼아 황해도병 5백명을 주어 문천으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장군 어유소에게는 경군 1천명을 주어 도총사 이준을 돕도록 하는 등 반란군에 대한 다각적인 공격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반란군 일당을 체포할 경우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여 토벌군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북방 지역의 각 유향소와 육진에도 밀사들을 보내 반란에 동요하지 말고 반역자를 체포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였다.
병마도총사 이준은 토벌군을 이끌고 함길도 경계지역에 도달해서 주둔하면서, 허종을 선봉장으로 내보내 반란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자 허종은 선봉부대를 이끌고 안변에 도착하여 머물면서 함길도 출신 병사를 보내 포섭 작전을 펼쳤다. 그러자 반란군에 억지로 참여한 차운혁이 포섭되어, 토벌군을 도와 홍원의 파탄동부근에서 이시합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시합은 교묘히 속임수를 써서 미꾸라지처럼 빠져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자 이준이 이끄는 토벌군의 주력부대는 철령을 넘어 안변으로 전진하여 반란군에 대한 포위망을 점점 좁혀 나갔으며, 허종의 선봉부대는 함흥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 무렵 세조는 신숙주를 옥에서 풀어줌과 동시에 반란군을 회유하는 식의 온건책을 철회하고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그러자 이시애는 겁을 집어먹고 반란군을 후퇴시켜 본거지를 함흥에서 북청으로 옮겼다. 그 해 6월 19일에 토벌군의 주력부대는 함흥을 점령한 뒤 홍원까지 진격하였다. 이준은 강순으로 하여금 종개, 산개에, 어유소와 허종과 박중선으로 하여금 북청 근처의 평포에 각각 진을 치게 하고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2만여 명의 반란군은 이미 북청을 빠져 나간 뒤였다. 이시합은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에 진을 치고, 이시애는 북청 어소에 각각 진을 치고서 토벌군과의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드디어 6월 24일에 반란군이 먼저 야음을 틈타 토벌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포위당한 토벌군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란군은 일단 후퇴를 하였다가 다시 새벽에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10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이 치뤄지게 되었다. 이때 남이 장군은 몸에 서너 발의 화살을 맞고서도 용감히 전투에 임하여 토벌군들의 사기를 한껏 올려 주었다. 그날 반란군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후 이명효는 홍원과 북청 사이에, 이시합은 마어령 근교에, 그리고 이시애는 대문령을 넘어 열여문평에 각각 반란군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때 강순은 홍원으로, 이준은 함흥으로 토벌군의 주둔지를 각각 옮겼다. 토벌군의 1진은 강순, 남이, 박중선이, 2진은 허종, 어유소가, 그리고 3진은 이준, 오장경이 각각 이끌고 있었다.
7월 22일에 김말손이 이끄는 반란군 2백여 명이 석장현(북청과 함흥 경계 지역)을 점령한 것을 필두로 다시 토벌군과 반란군은 대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7월 25일 야밤을 이용하여 강순은 토벌군1진을 이끌고 산개령을 넘어, 어유소는 2진을 이끌고 종개령을 넘어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그 결과 남이의 부대는 종개령의 반란군을, 이숙기의 부대는 산개령의 반란군을 각각 물리치는 등 이명효가 이끄는 반란군 대부분을 격파하였다. 그러자 이시애는 1만여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북청에서 동쪽으로 68리쯤 떨어져 있는 만령에다 15리에 걸친 진을 쳐서 토벌군의 진격에 철저히 대비했다. 그 해 초가을에 토벌군은 1천8백여 명으로 구성된 총포 부대를 앞세워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준은 토벌군을 4개 편대로 나누어, 1군은 허종에게 맡겨 서쪽으로, 2군은 박중선, 김교에게 맡겨 우회하여 북방에서, 3군은 어유소에게 맡겨 배를 타고 만령 뒤로 돌아가 후위에서, 그리고 4군을 맡은 자신은 강순, 남이와 함께 정면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하여 3중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토벌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8월 4일에 어유소의 군대에 의해 좌측 허리가 공격당한 후 열세에 몰린 반란군은 이성 쪽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8월 5일에 이성마저 점령당하자, 북으로 도망치던 이시애는 잔류 반란군을 모아 단천에다 진을 치고 일시 저항하다가 다시 길주로 달아났다.
이시애는 자기 집 창고에 있던 곡식을 인근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이명효로 하여금 의복을 경성으로 옮기게 한 후, 의복 및 재물을 여진족에게 주어 환심을 사서 여진족을 규합하고, 그와 동시에 6진의 군사 및 잔류 반란군을 끌어 모아 전열을 가다듬으려고 경성으로 향했다.
이때 이시애는 만약 이것도 저것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배를 구하여 재화를 싣고 멀리 여진족의 마을로 도망치려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이 무렵 길주 출신으로 사옹별좌에 있던 허유례(이시애의 처조카)가 세조에게 간청하여 이시애 일파를 회유하러 나섰다. 당시 허종의 휘하에 있던 그는 위장하고서 이시애의 진중에 들어갔다.
당시 자기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거짓 항복하는 척하며 적의 진중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먼저 이시애의 부하들 중 이주, 황생, 이운로 등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 놓은 다음 그들과 함께 8월 12일에 천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이시애, 이시합 형제를 사로잡아, 영동역에 주둔하고 있던 토벌군에 넘겨 주었다.
도총사 이준은 반란군 수괴인 두 형제를 문초한 뒤 목을 베어 죽인 다음, 그들의 목을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세조는 그들의 머리를 확인한 후 3일 동안 거리에 내걸어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도록 명했다. 이로써 약 4개월간에 걸친 이시애의 난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조정에서는 길주를 길성현으로 강등시켰으며, 북도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통치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리고, 이 난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원변으로 귀양 보내 버렸다.
8. 박원종의 난(1506년)
박원종의 난(중종반정)은 1506년에 박원종이 유순정, 성희안,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 등과 함께 연산군의 실정과 학정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이다. 얘들아! 폭군 연산을 끌어내라. 박원종(1467-1510년)은 판중추부사 박중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순천, 자는 백윤이다.
그는 특히 무술에 뛰어나 음보로 무관직에 기용되었으며, 1486년(성종 17년)에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이 되었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왕을 측근에서 모시게 되었다.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된 후 공조 참의, 병조 참의를 거쳐 연산군 때에는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때, 그는 재정 문제에 대해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가 1500년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06년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연산군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실직당하고 말았다. 그랬다가 다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평성군에 봉해져 도총부 도총관의 직에 올랐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조선왕조 10대왕)에 오른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왜구 및 여진, 야인들의 침입이 잦은 것을 염려하여백성을 변경에 이주시켜 채우는 조치를 취했으며(1499년), 비융사를 두어 병기를 제조하게 하는(1500년) 등 다소의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어머니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 성격이 형성된 탓인지 점차 향략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가 거듭되는 동안에 그의 실정과 학정은 한층 더 심화되었다.
1498년에 학문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격을 교묘히 이용한 훈구파의 유자광, 이극돈 등의 사주를 받은 연산군은 김종직이 지은(조의제문)을 구실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으로 숙청해 버렸으며, 1504년에는 친어머니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을 듣고 갑자사화를 일으켜 그와 관련된 후궁들을 살해한 뒤 김굉필 등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을 학살하는 등 비극적 상황을 연출했다.
그 후 왕을 비방하는 한글로 된 투서를 빌미로 삼아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글 관계 서적을 닥치는 대로 불태워 버렸다. 또한 그는 충언하는 신하를 처형시켜 버리거나, 관직 박탈 또는 유배를 보내 버렸으며, 경연과 대제학 제도도 폐지해 버렸고, 사간원의 기능도 중지시켜 버렸다.
또한 그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유흥터로 삼았으며, 원각사에 장학원을 두어 기녀들을 양성시켰고, 전국에 채청녀사, 채홍준사를 파견하여 미녀와 양마를 징발해 오도록 하였다. 일반 사대부이 집 안에서 뛰어난 미녀들을 모조리 적발하여 궁중에 끌어들여 이를 속홍이라 하였고, 아직 시집 가지 않은 여자들을 궁중에 불러들여 이를 청녀라 하였다.
그 중에서 뽑힌 기녀 3백명을 궁중에 상주시키면서 자신의 정욕과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궁궐 내외를 수시로 잠행하면서 연일 향락과 음행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는 궁중 연회에 초대된 사대부의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방탕과 육욕에 가득찬 생활에 젖어 지냈다.
이렇듯 이미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 연산군은 온갖 횡포를 자행했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러자 자연히 정치는 그의 손에서 떠나, 숙원 장녹수, 내시 김자원, 외척 신수근, 간신 임사홍 등에게 맡겨져 그들 마음대로 주물러지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중신들은 오히려 왕의 외도를 방관 또는 조정했다. 이에 박원종은 크게 분개하였다. 그는 한 동네에 살고 있는 부사용 성희안(성희안은 이조참판으로 있었을 때 양화도 놀이터에서 연산군의 횡포와 방탕적인 생활에 대한 풍자시를 지어 올렸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무관의 말단직인 종 9품에 해당되는 부사용 직으로 좌천되고 말았다)과 함께 모반을 모의 했다.
때마침 이때 군자부정의 직에 있던 신윤무가 찾아와 들려준 다음 말은 그들을 크게 고무시시켰다. "지금 중외에 원한을 품은 이가 많소이다. 좌우의 친신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왕 곁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곧 무슨 일이 있을 듯합니다. 또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이장곤이란 자가 이미 도망쳐 버린 상태입니다.
그가 골짜기에 떨어져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무리를 모아 군, 현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한양으로 한양으로 쳐들어오면,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이리하여, 박원종과 성희안은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설득하여 호응을 얻은 다음, 장정 등과 모의하여 난을 일으키기로 했다.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유순정은 활도 잘 쏘아 문무를 겸비한 강직한 인물로서 당시 여러 문신, 무신들에게 두루 존경을 받고 있었고, 장정은 창성부사로 있다가 장녹수가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그 일로 인하여 파직당했다.
거사일은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하는 때에 맞춰 1506년 9월 1일 저녁으로 정했다. 박원종은 신윤무를 비롯하여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 첨정 박영문, 사복시 첨정 홍경주등과 함께 무사를 모아 거사일에 훈련원에 모두 모이기로 했다. 여기에 성희안뿐만 아니라 김수동, 김감, 유자광, 등도 가세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돌연 연산군이 석벽으로의 유람 행차를 취소해 버렸다. 그러자 박원종은 다시 무의하여 거사일을 연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격문 한 장이 한양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전라도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형조참판의 직에 있을 때 갑자사화로 인하여 모함에 걸려 전라도로 유배당했다)과 이과(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에게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충언하다가 전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가 보낸 거사 격문이었다.
"전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유빈, 이과, 김준손 등이 군사를 일으켜 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격문 내용은 박원종 일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때문에 박원종일행은 거사 연기 계획을 백지화하고 무사들을 긴급히 훈련원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진성대군에게 먼저 거사 계획을 알린 다음,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장정 등과 함께 무사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박원종은 장정으로 하여금 진성대군의 사저를 경비하도록 지시한 다음, 신윤무를 보내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을 먼저 살해하라고 지시했으며, 개성에도 무사들을 보내 신수근의 아우인 개경유수 신수겸을 베어 죽이도록 지시했다.
신윤무는 그 즉시 무사들을 데리고 가서 수각교에서 신수근의 목을 베어 버렸으며, 이어 신수영과 임사홍도 차례로 사로잡아 때려 죽여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박원종의 무리 쪽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자 박원종은 부서를 정하여, 용구의 말을 끌어내어 나눠 주어 각각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에워싸도록 지시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주어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윤형로를 진성대군에게로 보내서 이번 거사의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운산군 이계에게 무사 수십 명을 딸려 보내어 진성대군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인 9월 2일 새벽에 성희안 등의 봉기군이 포위하고 있는 돈화문 쪽으로, 궁궐 안에서 거사 소식을 듣게 된 장사들과 시종들이 서로 다투어 추항해 와서 봉기군에 대거 가담하였다. 그러자 궁궐 안은 텅 비다시피 되었다. 이때 입직승지 윤장이 조계형, 이우 등과 함께 급히 입궐하여 변란 소식을 연산군에게 알렸다.
이때 연산군은 너무 놀라서 맨발로 달려나와 윤장의 손을 잡고서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때 윤장 일행은 궁궐 바깥 정황을 살펴 봐야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연산군의 손을 뿌리쳐 버리고 수채 구멍으로 도망쳐버렸다. 날이 밝자 박원종 일행은 궁궐 안으로 힘이 센 2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광화문을 거쳐 침전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전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천명에 따라 순순히 옥새를 내 놓으십시오."
그러나 연산군은 벌벌 떨면서도 끝내 옥새를 내놓지 않고 버텼다. 그러자 박원종의 호령이 떨어졌다.
"얘들아, 폭군 연산군을 끌어내라."
칼을 뽑은 군사들이 침전 안으로 들어가 연산군을 끌어냈다.
이때 박원종이 이렇게 꾸짖었다.
"12년 동안의 행적을 돌아보시오. 포악무도한 지난 닐의 학정을 생각하면, 무딘 칼로 난도질을 하여도 한이 다 풀리지 않을 것이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연산군은 숙옹전에 사람을 보내어 옥새함을 가져오게 하여 상서원의 낭관에게 옥세를 내어 주었다. 이날, 박원종은 연산군으로 하여금 동궁으로 옮겨갈 것을 청한 다음, 전동, 심금손, 강응, 김효손 등을 잡아 죽인 후, 경복궁으로 찾아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모친인 대비에게 " 연산군을 폐하고 대신 진성대군을 왕위(중종, 조선왕조 11대왕)에 앉힐 것"을 간청했다.
"주상(연산군)이 크게 군도를 잃어 버려 천명과 인심이다. 진성대군에게로 돌아갔으므로 신하들이 뜻을 받들어서 진성대군을 옹립하여 하옵니다." 이윽고, 윤대비의 윤허가 떨어졌다. 그러자 유순정이 곧바로 진성대군의 사제로 가서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진성대군은 세 번이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다가 유순정의 간청에 못이겨, 진성대군은 할수없이 그 청을 받아들여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이때 길가에는 많은 백성들이 나와 기뻐하였다. 이날 오후 4시에 진성대군은 근정전에 나아가 조선왕조 11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중종)은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는 자리에서 선정을 베풀 것을 선언하였다.9월 3일에 연산군은 군으로 강봉되어 강화교동의 초가집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그 해 11월 6일에 병 들어(일설에는 독살되어) 죽었다.
또한 폐비 신씨는 정청궁으로 옮겨갔으며, 그리고 폐세자 이황은 정선에 창녕대군 이인은 수완에, 양평대군 이성은 제천에 각각 유배당했다. 그밖에 횡포를 일삼던 나인, 흥청 및 그 족친과 노비, 수령등 1백여 명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9월4일에는 지방에 파견 나가 있던 채청녀사와 채홍준사를 모두 소환 하였다. 9월 8일에는 함께 난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을 이룩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 유자광 등을 비롯한 1백여명이 정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와 동시에 박원종은 좌의정(영의정에는 유순, 우의정에는 김수동)이 됨과 동시에 평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성희안은 창산부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형조판서(이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신윤무는 영천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후 공조판서, 좌잠찬, 우참찬 병조판서)가 되었고, 유순정은 정천부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우의정이 되었다. 장정(그는 중종반정 직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해 버렸다.)은 하원군에 봉해졌다.
박원종은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유순정과 함께 이과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었고 그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6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평성부원군에 봉해졌으나, 1510년에 44세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9. 이과의 난(1507년)
이과의 난은 1507년(중종 2년)에 이과가 중종반정 후 전산군에 봉해졌으나 관직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고 이찬, 윤귀수, 김잠 등과 함께 모의하여 일으킨 난이다. 공신을 푸대접해도 되는 거야? 이과는 이창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과지, 본관은 전의이다.
그는 1491년(성종 22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의 길로 들어선 후, 저작, 부교리, 시독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495(연산군1년)에는 기주관이 되어(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호조 참의, 예조 참의를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저에 홍문관에 있을 때 연산군의 후원관사에 대해 논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에게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은 옳지 않으니 자제해 달라고 충언한 적이 있었는데, 이게 화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갑자사화(1504년)때 전라도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1506년 그는 전라도 유배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같은 처지의 유빈, 김준손 등과 함께 거병하여 진성대군을 추대하려 하였으나, 박원종, 유순정, 강희안, 신윤무, 장정, 박영문, 홍경주, 유자광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만 중지하고 말았다. 중종반정 직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그는 주문사의 이문을 글로 지어 제작하는 등 다시 관직의 일선에 나섰다.
1507년(중종 2년)에 그는 정국원종공신으로 전산군으로 봉해졌으나, 관직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게다가 전 대사성 이과는 그 해 6월에 정국공신 4등에 책록되었으나, 곧 대간에서 반대하여 원종 1등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크게 분개하였다.
그는 1507년 8월에 이찬, 윤귀수, 김잠, 손유 등과 모의하여 견성군 이돈(성종의 아들, 숙의 홍씨의 소생)을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고, 박원종, 유순정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1507년 8월 26일 밤 중종이 선능에 친히 제사를 올리러 가는 틈을 타서 거사하기로 날짜까지 잡아 놓았다.
그런데 왕이 제사를 지내러 막 떠나려는날 밤 전 우림위 노영손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전 대사성 이과가 공신이 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서, 하원수 이찬, 병조정랑 윤귀수,내금위 김잠, 손유 등과 함께 모의하여, 장차 공신이 되기 위해서 내금위 등을 규합하고 왕이 밖에 나갈 때 거새해서 진성군 이돈을 추대하고 박원종, 유순정 등을 죽여 없애려고 하고 있나이다."
이에 중종은 선릉으로 행차를 중단하고 즉시 죄인들을 잡아 들이게 하여, 엄히 문추했다. 그러자 이찬은 곧 되를 고백했으나, 이과, 윤귀수, 김잠, 손유는 한사코 죄를 부인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야 자신이 역적 모의에 관련된 것을 알게 된 진성군은 궁궐 뜰로 나가 무릎을 꿇고 처벌을 받을 것을 자청했다.
이날 다시 심문이 이뤄졌지만, 김잠과 손유는 이찬에게 이과의 음모를 전해 듣긴 하였으나 그 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이과와 윤귀수는 여러 차례의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고 끝내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8일에 이찬은 마침내 죄를 고백하면서 공모자가 더 있다고 발설해 버렸다.
이리하여, 28일에는 신희철, 유의정, 유영, 유흥조, 금릉수 등이 붙잡혀 왔고, 29일에는 구전, 한형윤, 윤천령, 김준손, 김석철, 이성종 등이 붙잡혀 문초를 당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신희철, 유흥조, 유영, 윤철령,등은 유배당했으며, 그 나머지는 방면되었다.
그리고 9월 1일에 견성군 이돈은 강원도의 간성으로 유배당한 후 사사당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그가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신원(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줌)되었다. 한편, 중종은 정승 등의 반대를 무릅써 가며 노영손 등 이과의 난을 미리 막게 하는데 공을 세운 자 21명을 정난공신으로 정하고 여러사람을 승진시켰다. 이 조치는 한때 대간의 빗발치는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자 중종은 승진을 취소했다. 그러나 공신의 책봉만은 그대로 놔 두었다.
10. 신윤무의 난(1513년)
신윤무의 난은 1513년(중종 8년)에 신윤무가 박영문과 함께 영산군 이전을 왕위에 앉히고 무신정권을 수립하고자 일으키려고 한 난이다. 문신들이 나를 모함해 파직시키다니! 신윤무의 본관으 영월이다. 그는 무신으로서 연산군 때에 선전관을 거쳐 의주 판관을 역임하였다. 그 후 군자감 부정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실망을 느낀 그는 1506년에 박원종 등에게 궁궐의 내외 정세를 세세히 알려주어 중종반종을 성공시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거사 당일 그는 무사들을 모아 이끌고 신수근, 임사홍, 신수영 등을 살해하는 등 거사의 핵심적 일을 담당하여 거사를 성공리에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정국공신1등으로 책록되어 영천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508년(중종 3년)에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좌참찬, 우참찬을 지낸 후 병조판사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문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말았다. 1513년(중종 8년)에 그는 역시 파직되어 문신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박영문과 함께 조정을 비방했다.
박영문은 1506년 중종반정때 박원종을 도와 가사를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정국공신 4등으로 책록되어 함양군에 봉해진 후 1510년에 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었으며, 유순정을 따라 부원수로서 삼포왜란을 평정한 공으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간관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자 그 후부터 문신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영산군 이전을 왕위에 앉히고 좌의정과 우의정을 죽인 후, 홍경주를 영의정으로 하고 자신들이 좌의정, 우의정에 앉음으로써 무신정권을 수립하자고 모의한 후 이를 굳게 결의하였다. 그러나 의정부의 관노 정막개가 이를 엿듣고서 반역을 모의하였다고 고발하여 그만 탄로가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윤무와 박영문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어 목베임을 당해 죽었으며, 그 아들들도 모두 교살당하고 말았다. <끝>
[주해]
[주01] 불사후(弗斯侯) : 후(侯)는 왕(王), 후(侯), 태수(太守)의 세 등급으로 구분하였던 백제의 제도 가운데 하나이고, 불사(弗斯)는 옛
명칭이 ‘비사벌(比斯伐)’인 전주(全州)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성격에 대해 백제의 지방 통치 조직인 담로(湛盧)의 장(長)으로
보는 견해와 백제의 직호(職號)로 보는 견해, 대중국(對中國) 외교에 있어서 백제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譯註三國史記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672쪽》
[주02] 고쇠(高釗) :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이름이다. 사유(斯由)라고도 한다.
[주03] 수(須)가...매달았습니다 : 수는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이름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근초고왕이 태자인 근구
수(近仇首)와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第2》
[주04] 풍씨(馮氏)의...뒤 : 풍씨는 북연(北燕)을 가리킨다. 북연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한 나라로, 후연(後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시조인 풍발(馮跋)이 창려(昌黎)를 근거로 하여 나라를 세웠으며, 현재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남부와 하북성(河北省)의 북
부를 영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북연왕 풍홍(馮弘)이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주05] 고련(高璉) : 장수왕(長壽王)의 이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거련(高巨璉)으로 되어 있다.
[주06] 외효(隗囂) : 한(漢)나라 성기(成紀) 출신으로, 왕망(王莽) 말기에 농서(隴西)에서 웅거해 있으면서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
라 자칭하였다. 처음에는 유현(劉玄)을 떠받들다가 뒤에 광무제(光武帝)를 섬겼으며, 그 뒤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공손술(公孫述)
에게 붙었다가 광무제의 정벌로 인해 서역(西域)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이로 인해 외효는 번복(反覆)이 무상(無常)한
대표적인 인물로 칭해진다.《後漢書 卷13 隗囂公孫述列傳》
[주07] 유씨(劉氏) :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나라를 말한다. 송은 동진(東晉)의 권신(權臣)이었던 유유(劉裕)가 공제(恭帝)의 선양을
받아 세운 나라로, 현재 강소성(江蘇省)의 남경(南京)인 건강(建康)에 도읍하였으며, 8대 59년 만에 망하였다.
[주08] 유유(蠕蠕) : 북방에 있는 오랑캐 종족으로, 성씨는 욱구려씨(郁久閭氏)이다. 처음에는 탁발씨(拓跋氏)에 속하였다가 사륜(社崙)
이 유연가한(柔然可汗)이 되면서 내외몽고(內外蒙古) 지방을 영유하였다. 그 뒤에 후위(後魏)에게 패하고, 이어 돌궐(突厥)에게
멸망당하였다. 송나라와 제(齊)나라 때에는 ‘예예(芮芮)’라고 칭하였으며, 주(周)나라와 수(隋)나라 때에는 ‘여여(茹茹)’로 칭해졌
다.
[주09] 요(堯) 임금은...벌하였고 : 옛날에 요 임금이 단수포(丹水浦)에서 남만(南蠻)인 유묘씨(有苗氏)를 정벌하였다.
[주10] 맹상군(孟嘗君)은...않았습니다 : 맹상군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인 전문(田文)을 가리킨다. 그는 어진 인재들을 끌어 모아
식객(食客)이 3000명에 달하였는데, 일찍이 조(趙)나라에 들렀을 적에 조나라 사람들이 그를 비웃자, 노하여 동행자와 함께 수백
명을 쳐 죽이고 한 현(縣)을 멸하였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주11]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 《譯註三國史記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676쪽》
[주12] 송(宋)나라에서...뛰쳐나갔고 : 신주(申舟)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문지무외(文之無畏)이다. 초나라 장왕(莊王)
의 명을 받아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송나라를 지나던 중 송나라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장왕은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송나
라를 치러 달려 나갔다.《春秋左傳 宣公14年》
[주13] 왕이 사신을 보내어 : 원문에는 ‘三遣使’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王遣使’로 바로잡았다.
[주14] 가행(假行) : 가(假) 자는 중국 왕조에서 임명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당시에 백제는 가행(假行)의 형식을 빌려 관원을 임명한 다음
에 중국으로부터 추인(追認)을 받은 뒤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주15] 태시(泰始) : 송나라 명제(明帝)의 연호로, 백제의 개로왕 11년(465)에서 17년(471)까지에 해당된다.
[주16] 험윤(獫狁)이...쳐들어왔습니다 : 험윤은 중국 북방의 오랑캐 가운데 한 종족으로, 여기서는 북위(北魏)를 낮추어서 부르는 말로 쓰
였다. 깊숙이 쳐들어왔다는 것은, 북위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를 쳐들어온 것은 아니고 중국에 진출해 있던 백제의 지역에 쳐들어온
것을 말한다.
[주17] 흉리(匈梨) : 역시 북위를 낮추어서 부르는 말이다.
[주18] 과하마(果下馬)...은(銀) : 과하마는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키가 작은 말의 이름으로, 일찍부터 중국에 이름이 알려져서 중요한 조
공품이 되어 왔다. 두발(頭髮)은 미체(美髢)로, 여자들이 머리를 꾸미는 데 쓰는 것이다. 주(紬)는 조하주(朝霞紬)와 어아주(魚牙
紬)이다. 해표피(海豹皮)는 바다표범의 가죽이다.
[주19] 천객(泉客) : 교인(鮫人)으로, 이들은 남해(南海) 바깥의 물속에 사는 종족인데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된다고 한다.
[주20] 연(燕)...닭 : 바치는 사람은 소중한 것으로 여기나 받는 사람은 하찮은 것으로 보는 물품을 뜻한다. 옛날에 요동 사람이 기르는 돼지
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가 희었다. 이에 기이하게 여기어 임금에게 바치려고 서울로 가지고 올라갔는데, 하동(河東)에 이르러서
보니 모든 돼지들이 다 희었으므로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되돌아갔다고 한다.
또 초(楚) 땅 사람이 닭을 들고 있는데 길 가던 사람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흰 봉황(鳳凰)이라고 속여서 답하자, 길 가던 사람이 이를
비싼 값으로 사서 초왕(楚王)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닭이 죽어 버리자 돈을 허비한 것은 아까워하지 않고 닭이 죽은
것만 애석해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33 朱浮列傳》
[주21] 봉호(蓬壺) : 봉래(蓬萊)와 방호(方壺)로, 모두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있는 신선이 산다고 하는 산이다.
[주22] 패강...주셨습니다 : 패강은 대동강(大同江)이다. 성덕왕(聖德王) 34년(735)에 신라에서 김사란(金思蘭)을 사은사(謝恩使)로 파
견하면서 패강 이남 지역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그 결과 당나라에서는 패강 이남의 지역에 대해 신라의 영유권을 정식으
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당나라가 신라를 통하여 발해(渤海)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신라는 선덕왕(宣德王) 3년
(782)에 이곳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였다.《譯註三國史記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77쪽》
[주23] 삼무(三無) : 불교 용어로,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을 가리키는데, 불법(佛法)을 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왕발(王勃)의 석가
불부(釋迦佛賦)에, “은혜는 구유에 젖어 들었고, 행실은 삼무에 흡족하였다.[恩沾九有 行洽三無]” 하였다.
[주24] 구유(九有) : 불교 용어로, 중생들이 윤회하는 삼계구지(三界九地), 즉 욕계(欲界) 1지(地), 색계(色界) 4지, 무색계(無色界) 4지
를 가리킨다.
[주25] 빈공(賓貢) : 제후(諸侯)가 천자에게 천거한 선비라는 뜻으로, 당송(唐宋) 시대에 변방 제국의 출신들을 등용하기 위하여 빈공과
(賓貢科)라는 과거제도를 두었다.
[주26] 급제(及第) : 원문에는 ‘笈第’로 되어 있는데, 《송사(宋史)》 권487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27] 우이(隅夷) : 해가 뜨는 곳, 즉 동방 바닷가에 있는 족속이란 뜻으로 고려를 가리킨다.
[주28] 헌감(軒鑑) : 헌원경(軒轅鏡)으로, 곧 사람들의 사특함을 조감(照鑑)하는 거울을 말한다.
[주29] 노유(魯儒) : 노(魯) 땅의 유생이란 뜻으로,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선비를 가리킨다.
[주30] 계적(桂籍) :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이다.
[주31] 운대(芸臺) : 도서(圖書)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비서성(祕書省)의 별칭이다.
[주32] 공목리(孔目吏) : 고려 때 예빈시(禮賓寺)의 하급 관리이다.
[주33] 관고(官告) : 옛날에 관리에게 주던 위임장(委任狀)으로, 요즈음의 신임장(信任狀)과 비슷한 것이다.
[주34] 연조(年條)는 상고할 수가 없다 : 《고려사(高麗史)》 권16 인종 9년 조에, “경술년에 상의 봉어(尙衣奉御) 이중연(李仲衍)을 금나
라에 보내어 정조를 하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보낸 것인 듯하다.
[주35] 삼양(三陽) : 음력 정월(正月)로, 봄이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동짓달에 1양이 생기고, 12월에 2양이 생기며 정월
에 3양이 생긴다고 하였다.
[주36] 대일통(大一統) : 천자의 나라가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대(大)는 중시(重視), 존중(尊重)의 뜻이고, 일통(一統)은 천하의
제후가 모두 천자에게 통속(統屬)되는 것을 뜻한다.
[주37] 중부(中孚) : 주역(周易) 육십사괘의 하나로, 태하손상(兌下巽上) 괘(卦)인데, 마음이 성실하여 만물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을 상
징한 괘이다.
[주38] 어렵고 어지러운 때 : 광해군(光海君)이 폭정하던 시기를 말한다.
[주39] 천명(天命)을 바꾸어 버리셨습니다 : 원문에는 ‘降出厥命’으로 되어 있는데, 《명사(明史)》 권320에 의거하여 ‘降黜厥命’으로 바
로잡았다.
[주40] 배신(陪臣) : 원문에는 ‘部臣’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명사》 권320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41] 제복(題覆) : 명나라 시대에 황제에게 올렸던 공문서를 말한다.
[주42] 양곡이 다 떨어져서 : 원문에는 ‘餼牢將竭’로 되어 있는데, 《명사》 권320에 의거하여 ‘餼牽將竭’로 바로잡았다.
[주43] 수미(須彌) : 신미도(身彌島)로, 모문룡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다가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곳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주44] 회간왕(懷簡王)이...졸하였다 : 회간왕은 덕종(德宗)을 가리킨다. 덕종은 세조(世祖)의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인데,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20세의 나이로 죽어 즉위하지 못하였으며, 뒤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주45] 김질(金礩) : 원문에는 ‘金礸’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46] 발해(渤海)의...국서(國書) : 발해의 국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는 일본의 역사서에 실려 있는 것 자체가 오자(誤字)가 많으며, 여러
종류의 교감본(校勘本) 역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에 뜻이 통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여러 종류의 교감본을 참고해 바로잡아 번
역하였다.
[주47] 우러러...없지만 : 원문에는 ‘披膳未期’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披瞻未期’로 바로잡았다.
[주48] 천황의 성스러운 예지(叡智)는 : 원문에는 ‘天皇聖殿’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天皇聖叡’로 바로잡았다.
[주49] 조신광업(朝臣廣業) : 평군조신광업(平群朝臣廣業)을 말하는데, 어떤 데에는 ‘조신광성(朝臣廣城)’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당나
라 개원(開元) 26년(738, 문왕2) 3월에 조신광업 등이 당나라에 조회하러 갔다가 소주(蘇州)로 돌아서 바다를 건너오던 중 표류하
여 곤륜국(崑崙國)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대부분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조신광업 등 8명만 겨우 빠져나와 다시 당나라
로 돌아갔다가 등주(登州)를 경유해서 바다를 건너 5월에 발해의 국경에 도착하였다.
[주50] 16년 : 원문에는 ‘十五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51] 이에...아룁니다만 : 원문에는 ‘謹狀力奉啓’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謹狀另奉啓’로 바로잡았다.
[주52] 기거(起居)가 만안하시고 : 원문에는 ‘動止萬社’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渤海考)》에 의거하여 ‘動止萬福’으로 바로잡았다.
[주53] 관료들이 의로움에 감동하여 : 원문에는 ‘官遼感義’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官僚感義’로 바로잡았다.
[주54] 광간대부(匡諫大夫) : 원문에는 ‘庭諫大夫’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55] 연조는 미상이다 : 이 국서에 나오는 광악(廣岳)이 발해에 사신으로 온 것은 강왕(康王) 3년(797)인데, 이때에 보낸 국서인 듯하
다.
[주56] 저...사람으로 : 원문에는 ‘嵩璘狠以冥德’으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嵩璘猥以冥德’으로 바로잡았다.
[주57] 국토는...되었는데 : 원문에는 ‘土統舊奉’으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土統舊封’으로 바로잡았다.
[주58] 사신의 … 않더라도 : 원문에는 ‘送使雖不過二年’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送使雖不過二廿’으로 바로잡았다.
[주59] 일을 …바랍니다 : 원문에는 ‘事與望則異足表不依’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事與望異則足表不依’로 바로잡았다.
[주60] 보내 주신 : 원문에는 ‘其所奇’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其所寄’로 바로잡았다.
[주61] 하만(賀萬) : 내장하만(內藏賀萬)을 말하며, 내장하무(內藏賀茂)로 표기되기도 한다.
[주62] 이 어찌...통하여서 : 원문에는 ‘豈非彼此齊契’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豈非彼此契齊’로 바로잡았다.
[주63] 특별히...아니겠습니까 : 원문에는 ‘特叶天心者我’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特叶天心者哉’로 바로잡았다.
[주64] 실로...알겠지만 : 원문에는 ‘奉知實輸’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奉知實諭’로 바로잡았다.
[주65] 사신을...앞당겨서 : 원문에는 ‘從其期限’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促其期限’으로 바로잡았다.
[주66] 선백(船白) : 자야숙녜선백(滋野宿禰船白)을 말하는데, 자야숙녜선대(滋野宿禰船代)로 표기되기도 한다.[주
[주67] 재주가...부족하여 : 원문에는 ‘愗專對’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才慙專對’로 바로잡았다.
[주68] 허성(許筬) : 원문에는 ‘許荿’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69] 청사피(靑斜皮) : 청서피(靑黍皮)의 잘못인 듯하다. 청서피는 담비 종류의 털가죽이다.
[주70] 해송자(海松子)...1좌(座)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豹皮心兒虎皮邊 海松子六碩 猠皮裏阿多介一座’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海松子六碩 豹皮心兒虎皮邊猠皮裏阿多介一座’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아다개(阿多介)는 털가죽으로 만든 요이다.
출처>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