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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정온(鄭蘊)
1569년(선조 2) - 1641년(인조 19)
조선 후기에,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별제 정옥견(鄭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정숙(鄭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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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부록 제1권
동계(桐溪) 선생 행장(行狀) - 허목(許穆) 撰
증조부는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증(贈)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휘(諱) 옥견(玉堅)이다.
조부는 증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휘 숙(淑)이다.
부친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증 이조 참판(吏曺參判) 휘 유명(惟明)이다. -별호가 역양선생(嶧陽先生)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진양 강씨(晉陽姜氏)이다. -장사랑(將仕郞) 휘 근우(謹友)의 따님으로, 고려 국자박사(國子博士) 계용(啓庸)의 후손이다.
공의 휘는 온(蘊)이고, 자는 휘원(輝遠)이고, 성은 정씨(鄭氏)이다. 그 선조는 본래 팔계군(八溪郡) 사람이고, 시조는 광유후(光儒侯) 휘 배걸(倍傑)이다. 광유후는 자손들이 창대하여 달관(達官)과 귀인(貴人)이 많았으니, 지금 팔계 정씨는 모두 광유후의 후손이다.
고려 때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낸 휘 습인(習仁)이 있었으니, 곧은 도리로써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 사적이 《고려사(高麗史)》 본전(本傳)에 실려 있다. 7세(世)를 지나 역양선생(嶧陽先生)이 태어났다. 선생은 일찍이 갈천(葛川) 임훈(林薰) 선생에게 수업하였고, 지금 역천서원(嶧川書院) 향현일민사(鄕賢逸民祠)에 봉향되고 있다.
공은 역양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명(明)나라 목종황제(穆宗皇帝) 융경(隆慶) 3년,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 2년 기사년(1569, 선조2) 2월 6일에 공이 감음현(感陰縣) 역동리(嶧洞里)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린아이 때부터 식견이 있어 부모를 섬김에 반드시 뜻을 받들어 순종함이 한결같이 어른의 행실과 같았다.
이미 배우기 시작해서는 부지런히 스스로 힘써 경사(經史)를 두루 읽어 행실과 학업이 날로 닦여졌고, 15, 6세에 법도가 이미 이루어져서 바르게 앉아 종일토록 책 읽기를 좋아하니, 부친 역양선생이 은거하며 글을 가르치자 제자들이 날로 모여들었지만 모두 공보다 낫지 못했다.
처음 갈천 선생을 뵙고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역양선생은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어 일찍이 남다른 행실로 세속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 학문은 또한 어버이를 섬기는 데 유순하였고, 벗을 사귀는 데 마음을 다하였고, 남의 선행을 도와주기를 즐거워하였고, 일에 임해서는 엄정했으니, 향인(鄕人)과 부로(父老)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우리 소경대왕 25년에 왜구의 침입이 있어 전쟁이 크게 일어났다. 그 4년 뒤에 역양선생이 돌아가시자, 너무 슬프게 곡하느라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비록 난리를 피하여 떠도는 처지였지만 상제 노릇하는 범절은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도 난리가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부인(母夫人)을 섬기기 위해 몸소 천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하여 봉양할 물건을 마련했고, 겨를이 있으면 글을 읽었다.
당대의 명인(名人), 달자(達者)와 종유(從遊)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월천(月川)과 한강(寒岡)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지난날 정인홍(鄭仁弘)이 영남에서 높은 명망을 지니고서 강우(江右 경상 우도(慶尙右道))의 선비를 접인(接引)하였는데, ‘내암 제자(來菴弟子)’라 일컬으며 법도가 엄절(嚴切)하므로, 공 또한 일찍이 스승으로 섬겼다. 뒤에 오리(梧里) 이 문충공(李文忠公)에게 편지를 올려 깊이 서로 알게 되었다.
만력(萬曆) 34년(1606, 선조39)에 진사가 되었고, 그다음 해에 행의(行誼)로써 천거되었다. 또 다음해에 정인홍이 유영경(柳永慶)을 공격하다가 죄를 얻게 되자, 공은 초야에서 소(疏)를 올려 쟁송(爭訟)하였다. 당시 임해군(臨海君)을 고변(告變)하는 사건이 있었다.
공은 인홍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해군은 모반의 행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하며 힘껏 전은(全恩)에 관한 일을 진언하였고, 또 붕당(朋黨)의 편벽된 폐단을 논하였다. 임해군이 마침내 죽임을 당했는데, 이 옥사(獄事)에 정인홍이 도리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조정 신하 사이에 이미 전은(全恩)의 설이 있었으나 도리어 ‘왕실을 넘본다’고 지목하니, 대신들은 문을 닫아걸었고 어진 이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폐주(廢主) 원년(1609, 광해군1) 기유(己酉)에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다음해에 또 봉자전 참봉(奉慈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에 별시에 급제하여 신해년(1611) 2월에 시강원 겸설서(侍講院兼說書)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떠났다. 가을에 또 겸설서에 제수되었고, 조금 있다가 다시 설서의 소명(召命)이 거듭 이르자 곧 들어가 사은(謝恩)하였다. 그 해 10월에 사서(司書)로 승진하였고, 다음 달에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
이해에 창덕궁이 낙성되어 이어(移御)했으나 오래지 않아 새 궁궐이 상(上)에게 이롭지 않다는 요망한 말이 있어 장차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니, 핑계할 말이 없음을 걱정했다. 당시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광해군이 대비(大妃)가 경운궁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대비에게 문안하기 위해서라고 핑계했으나 실은 그 길로 머물러 있고자 한 것이었다.
공이 힘껏 간쟁하다가 말이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광해군 이래로 권력을 잡은 자가 날로 위협과 복록으로써 사람을 제어하니, 사대부들이 모두 조정에 잘 보이기 위해 비위를 맞추어 아첨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곧은 말로 감히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직언(直言)하다가 좌천되자, 사람들은 공을 봉황이 조양(朝陽)에서 운 것에 견주었다.
경성은 북쪽 끝의 먼 변방에 있기 때문에 왕의 교화가 미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졌고, 변방의 장수들이란 모두 무인이어서 대부분 거칠고 사나워서 법도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또 지난해 북쪽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경성이 더욱 심하였다.
공은 조정의 근신(近臣)으로 하루아침에 좌천되었으나 항상 겸손하여 뽐내는 기색이 없었다. 주장(主將)을 섬기는 데 예법이 있었고, 아전을 다스리거나 백성을 대할 때에는 은혜와 믿음이 곡진하였고, 궁핍한 이를 구휼하고 폐정(弊政)을 혁파하니, 백성들이 크게 소생하게 되었다.
선왕(先王 선조(宣祖))이 일찍이 영창대군(永昌大君)으로 세자를 바꾸려 하였다. 폐주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대신들이 그 일을 도모했다 하여 유영경(柳永慶)을 죽인 일을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기니, 이에 이이첨(李爾瞻) 등도 자신의 공로로 여기며 몹시 우쭐거렸다.
논공행상(論功行賞)할 때에 공 또한 일찍이 정인홍(鄭仁弘)이 죄를 얻게 된 일을 힘껏 변론했다는 이유로 마침내 소명(召命)을 내려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삼았다. 공이 스스로 공로가 없다고 하여 소(疏)를 올려 사직하니, 이이첨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이는 그가 훈맹(勳盟)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므로, 공은 사직하는 것이 한갓 무익한 일이라 여겨 그만두었다.
이때 큰 옥사가 연이어 일어나므로, 사람마다 두 발을 모으고 서서 곁눈질하며 매우 두려워하였다. 비록 소와 말을 훔친 도둑이라도 핑계할 말이 없어 요행을 바라는 자들은 고변(告變)을 통하여 혹 은택을 얻기까지 하였다. 이에 어떤 사형수가 고변하기를,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밤낮으로 모의한다.” 하니, 옥사(獄辭)가 만연하여 조정 신하들이 크게 연루되었다.
이에 권력을 잡은 자들은 말을 만들어 내어 영창대군을 한편으로는 ‘기화(奇貨)’라 하고, 한편으로는 ‘화본(禍本)’이라 하며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다투어 말하는 것으로써 공을 삼았다. 공이 이이첨을 보고 말하기를, “철모르는 어린아이로서 반역을 도모한 자가 있었소.
또 듣건대 대비께서 밤낮 근심으로 울먹이며 아들과 함께 죽지 못할까 근심하신다고 하니, 만일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면 제공들은 그래도 뒷날 할 말이 있겠소.” 하니, 이이첨이 버럭 소리 지르며 말하기를, “대비를 함께 폐위시키더라도 다시 불가하다고 할 자가 누가 있겠소.” 하고 성내며 일어나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일어설 것 없소. 내가 곧 갈 것이오.” 하고, 드디어 절교하였다. 공은 세도(世道)가 위험하고 종적(蹤跡)이 더욱 소원해짐을 보고서 작은 일을 빌미로 조정을 떠나려고 하여 일찍이 조회(朝會)에서 사헌부(司憲府)의 금령(禁令)을 범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간신들이 이미 국권(國權)을 잡아 시사(時事)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공은 답답한 마음에 일언(一言)을 올려 상(上)의 마음을 감동시키려 했으나 한갓 화(禍)만 취할 뿐 무익하리라 여겼고, 또 대부인(大夫人)이 생존해 계신 것을 생각하여 묵묵히 항상 혼자 상심할 뿐이었다.
하루는 대부인을 모시다가 자신이 마음으로 다하고자 하는 바를 갖추어 아뢰니, 대부인이 말하기를, “힘쓸지어다. 늙은 어미 때문에 그 마음을 바꾸지 말라.” 하므로, 공은 심히 기뻐하였다. 이때 공이 물러나서 지낸 지가 벌써 몇 달이 되었는데, 비난하는 여론이 더욱 심해지므로 부득이 한 번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그달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했고, 겨울에 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제수되었다. 시강원에 있은 지 한 달 남짓 만에 여론과 영합하지 못하여 곧이어 부사직에 부직(付職)되었다. 저들의 노여움은 날로 심해져서 온갖 일을 얽어내었고, 역적을 편든다고 지목하여 공의 행동을 밤낮으로 몰래 살폈다.
지난해에 영창대군이 이미 강도(江都)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2월에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몰래 죽이게 하니, 이 소문을 듣고서 그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공이 바로 소(疏)를 올려 극언하기를, “어린아이에게는 실로 모반의 정상이 없거늘, 정항이 핍박하여 죽게 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거칠고 사나운 무부(武夫)의 손을 빌린 것입니다.
정항을 죽이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선왕(先王)의 묘정(廟廷)에 설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영창대군의 작위(爵位)를 다시 회복시켜 예장(禮葬)을 허락하시고, 사방의 신민에게 포고하여 전하의 우애하시는 본심을 밝히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㼁)가 이미 죽었으니, 전하께서 대비(大妃)에게 다시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간세(奸細)한 무리 중에 양궁(兩宮)의 사이를 이간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넘겨 대죄(大罪)로써 다스리게 할 것이고, 전하 또한 마땅히 자식의 직분을 공손히 행하시어 대비가 기뻐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정조(鄭造), 윤인(尹訒), 정호관(丁好寬) 등이 모후(母后)를 폐위하자는 의논을 맨 먼저 제기하여 일신의 부귀를 도모하였으니, 신하 된 자로서 어찌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청컨대 이 세 사람에게 벌을 내려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리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소한 말이 모두 수백 글자였다.
상소문이 나오자 실색(失色)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혹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폐주가 크게 노하여 승정원에 내려 보내고, 흉소(凶疏)를 물리치지 않고 위로 올렸다는 이유로 상납을 주장한 승지를 우선 파직시키고 나머지도 모두 추고(推考)하였다.
이에 삼사(三司)가 절도(絶島)에 안치하기를 청하니, 폐주가 말하기를, “지난번 고상(故相) 이덕형(李德馨)이 올린 차자(箚子)는 크게 실언(失言)한 것이 없었지만 삼사가 안법(按法)을 청하였다. 지금 정온이 올린 소(疏)는 그 말이 크게 부도(不道)하건만 안치하는 것으로 과치(科治)하였으니, 임금을 무시하고 당인(黨人)을 비호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하였다.
삼사가 안법하기를 청하였을 때에도, 폐주는 비록 심히 분노했으나 간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싫어하여 짐짓 대신들로 하여금 함께 모여 의논하게 한 다음 반드시 중론을 빙자하여 죽이려 하였다. 우의정 정창연(鄭昌衍)이 헌의(獻議)하여 논쟁하였고,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원익(李元翼). 심희수(沈喜壽) 등은 모두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마침 대례(大禮)가 있었기 때문에 대신(大臣)들도 반대하므로 즉시 국문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화(禍)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론은 더욱 비등하여 대역죄로 논하였고, 또 관학(館學)의 생도들로 하여금 소를 올려 죄를 청하게 하였다. 정인홍 또한 차자를 올려 “그 말이 부도(不道)하니, 반드시 용서하지 말아서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신하들을 다잡아야 합니다.”고 하니, 폐주가 이에 크게 기뻐하여 정국(庭鞫)하려 하였다.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말하기를, “정온은 광망(狂妄)한 것에 불과하고 다른 죄가 없으므로 국문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폐주가 노하여 말하기를, “그렇다면 국문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안 됩니다.” 하였다. 폐주가 말하기를, “안문(按問)도 않겠다는 말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안 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것은 반역의 대죄가 아니니, 잠시 미루어 두었다가 우의정이 출사(出仕)한 뒤에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폐주가 국문하지는 못하고 안문만 한 뒤에 다시 하옥시켰다. 7월이 되어 다시 안문하여 제주(濟州)의 대정(大靜)에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3월에 체포되어 7월에 비로소 출옥하니, 형틀에 매인 채로 이미 봄과 여름을 났다. 경성(鏡城)의 부로(父老)들이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이분은 전날 우리들의 어진 판관이셨다. 우리 백성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의리상 저버릴 수 없다.” 하고 찾아와 어려운 사정을 도왔고, 호남 유생 송흥주(宋興周) 등도 소를 올려 죄가 없음을 말하였다.
이때 공을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 견책을 받았고, 공을 모함하는 자는 연이어 높은 벼슬을 얻게 되니, 앞다투어 옭아매어 위험과 재앙이 날로 닥쳐왔으나 공은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언제나 태연자약하였다. 뜰에서 신문할 때에 폐주가 몹시 분노하여 대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공은 사기(辭氣)가 어지럽지 않고 강개한 뜻이 더욱 긴절하였다.
정항도 대질 신문할 때에 몹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출옥한 뒤에 사람을 보내어 사죄했고, 근심과 한탄으로 인해 병들어 죽었다. 정호관도 그 소(疏)를 보고 깊이 혼자서 한탄하기를, “내가 죄인이다.” 하고, 날마다 폭음(暴飮)하며 밥을 먹지 않다가 술병으로 곧 죽었다.
대정은 남쪽 바다 끝의 궁벽한 섬에 있다. 경성(京城)에서 해남(海南)까지 천 리 길인데, 출옥한 후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6일 만에 해남에 이르러 19일 동안 순풍(順風)을 기다렸고, 해중(海中)에서 또 바람에 막혀 38일 만에 도착하였다.
이 고을은 습기가 매우 많고 지대가 몹시 낮아서 매서운 벌레와 독한 뱀이 우글거리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서부터는 혹 장맛비가 몇 달이나 계속되기도 하고, 혹 세찬 바람과 독한 안개가 하루 사이에 이변을 보이기도 하고, 혹 한겨울에도 춥지 않고 혹 한여름에도 덥지 않으니, 기후가 육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죄를 지은 자가 살기에 마땅한 곳이구나.” 하고, 고고자(鼓鼓子)라 자호(自號)하였다.
공이 이미 죄를 얻었으나 권력을 쥔 자들은 더욱 노하여 날마다 삼사(三司)와 관학(館學)으로 하여금 논죄해 마지않게 하더니, 9월에 궐문(闕門) 밖에서 공의 소를 불살랐고, 충훈부(忠勳府)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이언영(李彦英), 강대수(姜大遂)는 모두 논열(論列)하다가 죄를 얻었고, 오장(吳長)은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귀양지에서 죽었고, 박명부(朴明榑)는 남토(南土)에 금폐(禁廢)되었고, 한마디라도 원통함을 언급하는 이는 모두 죄에 저촉되었다. 이때 강우(江右)의 횡의(橫議)는 모두 정인홍을 중심으로 하였다. 공이 이미 정인홍과 사이가 좋지 않아 앞다투어 붙좇는 자들이 더욱 격동시켜 화를 끼치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 뒤에 결국 모후(母后)를 폐위하려는 일이 있자, 기자헌(奇自獻)은 혼자서 간쟁할 수 없음을 알고 널리 군신(群臣)의 의견을 수렴하기를 청하다가 북변(北邊)으로 찬축(竄逐)되었다. 이에 종실(宗室)과 귀신(貴臣)들이 많이 찬축되었으나 끝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고 서궁(西宮)이라 부르기만 하였다. 수찬(修撰) 윤지경(尹知敬)은 공이 죄를 얻게 된 이후로 벼슬살이에는 마음을 두지 않은 채 술을 마시고 가무(歌舞)를 즐기며 미치광이 행세를 하였다.
공은 해도(海島)에 갇혀 있으면서도 마음을 다하고 행실을 가다듬어 지조를 지키는 것이 더욱 견고하였다. 당시 송상인(宋象仁), 이익(李瀷)도 모두 죄를 얻어 이곳으로 귀양 오게 되었다. 송상인은 바둑을 두고 이익은 거문고를 배우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으나 공은 항상 글을 읽었다.
이에 위로는 은(殷)나라 말기부터 아래로는 남송(南宋)까지 경사(經史)에서 뽑고 전언(前言)에서 채록하여 그 기간의 성현(聖賢) 중에서 곤액(困厄)과 우환 속에서도 마음이 바르고 생각이 깊어 정도(正道)를 잃지 않았던 59인으로 《덕변록(德辨錄)》을 편집하여 자신을 반성하였고, 또 원조자경잠(元朝自警箴)을 지었다. 죄수에게 지급되는 곡식으로는 끼니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노복으로 하여금 날마다 품팔이하여 마련하게 하였다.
천계(天啓) 3년(1623, 인조1) 3월에 상(上)이 반정(反正)에 성공하자, 공을 석방하여 사간원 헌납을 삼았다. 지난날 영창대군의 옥사 때에 인목대비 집안은 이미 멸족을 당하였고, 대비의 어머니 노부인(盧夫人)은 제주로 유배되어 관비(官婢)가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노부인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사명(使命)을 받든 자가 공을 찾아와서 그 사실을 갖추어 말하고, 또 노고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어찌 당장 가시울타리를 치워서 하루라도 편히 지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아직 왕명을 받지 못했다’고 사양하다가, 전지(傳旨)를 받은 뒤에 비로소 밖으로 나왔다.
공이 10년 동안 배소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위리망북두시(圍籬望北斗詩)와 백운가(白雲歌)를 지었는데, 듣는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배소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얘져 있었고, 바다를 건너서는 먼저 노모에게 나아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때 대부인은 나이가 이미 80여 세였다.
보는 사람들은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나 대부인은, “오늘에야 비로소 우리 아들을 만나는구나.” 하고 손을 잡고 웃으며 함께 말할 뿐, 멀리 떨어져 서로 그리워하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질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러한 어머니가 있은 다음에야 이러한 아들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5월에 사간(司諫)으로서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고, 이어 진언(進言)하기를, “《예기(禮記)》에 ‘8, 9십 세의 늙은이와 7세의 어린아이는 비록 자신이 죄를 범했더라도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정인홍이 80세의 늙은 몸으로 극형을 당하여 죽게 된다면 실로 성덕(聖德)을 상하게 할까 두렵고, 실상 또 그의 친척(親戚)들이 화를 전가시킨 것이므로, 혼암한 늙은이가 애처롭다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평소에 스승으로 섬겼던 죄인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사직하였다.
대비가 폐위될 때 정인홍이 비록 그 일의 주모자였으나 의논할 대신들이 대부분 따르지 않자 인심(人心)이 함께 하지 않음을 알고서 절충안을 내어 말하기를, “군신(君臣)과 모자(母子)의 명의(名義)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를 위하여 다투는 것도 이 명의를 아끼기 때문인데, 신은 부(府), 조(曹), 원(院)이 나뉘어 마치 두 조정과 두 군상(君上)을 둔 듯함을 유독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충실한 인사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서궁(西宮)을 지키게 한다면 저 홀어미로 사는 한 부인은 잘못을 포용해 주어야 할 한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견이 상달되기 전에 그의 측근이 모의하여 화복(禍福)으로써 그 친척과 무리를 동요시키고 그 말을 마음대로 바꾸어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 사실을 몰래 말하는 자가 있었고, 정인홍이 복주(伏誅)될 때에 또 스스로 말하려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공이 소를 올려 언급한 것이다.
다음 달에 폐세자(廢世子)가 땅을 파고 달아나는 사건이 있게 되자,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벌을 청하였다. 공은 폐조(廢朝)에서 벌어졌던 골육 간의 변괴를 갖고서 성상의 마음을 조금 감동시켰으나 뭇사람의 의논을 거슬렀기 때문에 곧 사직하고 떠났다. 대사헌 오윤겸(吳允謙)이 인피(引避)하여 말하기를, “신이 전날 아뢰었던 것은 전하를 잘못되게 할 뻔했습니다. 신이 만약 미혹된 의견을 고집한다면 신은 정온(鄭蘊)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해 6월에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가 되었고, 겨울에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고 조정에 들어가 이조 참의가 되었다. 다음해 1월에 이괄(李适)이 반란하여 경성(京城)에 침입하니, 상은 공주(公州)로 출행(出幸)하였다가 2월에 이괄이 패하여 죽자 어가(御駕)가 경성으로 돌아왔다.
호종(扈從)한 여러 신하를 포상할 때에 공은 가선대부에 오르고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조상 3대(代)에게 작위(爵位)를 추증(追贈)하였다. 늙으신 어머니 때문에 사직하고 돌아갔다가 겨울에 대사간이 되었다.
이때 고변하는 사건이 있었다. 죄수들이 혹 인성군(仁城君)도 역모를 알고 있었다고 끌어들이므로, 이에 삼사(三司)가 법에 의한 처벌을 청하였다. 공은 전은(全恩)의 설을 주장했으나 의견이 합치하지 않자, 인하여 계사(啓辭)를 올리기를, “의리의 당부(當否)와 행적의 허실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옥사(獄辭)로만 처리한다면 고변하는 일이 거의 해마다 일어날 것이고, 인성이 비록 제거되더라도 어찌 인성 같은 자가 없겠습니까.
아, 선왕(先王)의 자손이 다 없어질 것입니다. 폐조(廢朝)가 비록 혼란(昏亂)하였지만 골육을 죽이지 않고 모후(母后)를 폐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전하의 성대한 덕으로도 하루아침에 이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삼사의 요청은 다만 뒷날 간악한 자들이 구실 삼을 거리는 될지언정 종묘사직의 장구한 계책은 못됩니다. 훗날 사람들이 오늘날을 보는 것이,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지난날을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곧 대사간에서 체직되어 돌아갔다.
다음해 3월에 다시 대사간으로 부르자, 7월에 대궐로 들어가 사은(謝恩)하였고, 얼마 후에 승정원 도승지로 옮겨 갔다. 《정원고사(政院故事)》에 의하면, 승지는 동부승지에서부터 차례로 승진하는 법인데, 이때 사간원(司諫院)에서 바로 본직(本職)에 제수한 것은 특은(特恩)에서 나온 것이다.
관례에 의거하여 힘껏 사직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얼마 뒤에 휴가를 주어 돌아가도록 하였다. 9월에 또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러 노모(老母)를 이유로 떠나가기를 더욱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노모를 모셔다 봉양하라고 하였다. 공이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어 스스로 말하기를, ‘오래도록 여론에 배척당했기 때문에 의리상 구차하게 나아갈 수 없다.’ 하였다.
당시에 어떤 재상이 ‘유능한 인재가 많이 억눌려 있으니, 서얼(庶孼)의 등용 길을 넓게 열어 주자’고 건의하였고, 또 ‘변방의 병사가 부족한데 납속(納粟)으로 인해 유정(游丁)이 많으니, 이들을 모두 징발하여 변방을 지키도록 하자’고 건의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이것은 명분을 무너뜨리고 신의를 잃게 하여 백성에게 원망을 사는 일입니다.”라고 극언하였다.
이에 서얼들이 방자하여 사대부들이 모두 분노하므로, 억제의 수단으로 계세법(計世法)을 만들었다. 이듬해 봄에 휴가를 주어 돌아가도록 하였다. 경기(京畿)를 지나면서 소를 올려 자신의 사정을 진술하고, 이어 국군(國君)이 사상(私喪)에 복을 입는 예법을 논하여 신하들의 말을 따르기를 청하였다.
당시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이 있자, 상이 3년의 상제(喪制)를 단행(斷行)하려 하였다. 신하들이 여러 번 간쟁했으나 듣지 않았기 때문에 상소로 언급한 것이다. 4월에 계운궁의 장례 때문에 올라왔다가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대사헌으로 옮기자 차자를 올려 백성의 고통을 말하였다.
이때에 호조(戶曹)가 경비가 고갈되어 토지 4결(結) 당 포(布) 1필을 내게 하여 포 1필 값이 벼 4석(石) 값에까지 이르게 되니, ‘농업을 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여 나라의 근본이 흔들릴까 걱정스럽다.’고 극언하였다. 다음 달에 공에게 노모가 계신다는 이유로 상이 특별히 영남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그 당시 마땅히 처리해야 할 억울한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공이 부임하여 그 일을 안핵(按覈)하였다. 이 일을 계문(啓聞)하자, 탐탁지 않게 여기던 자가 고의로 다른 일로써 탄핵하였다. 그 해 겨울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1월에 오랑캐가 관서(關西)의 변방을 침범하였다. 우리나라가 중흥한 이후로 오랑캐와 화친을 끊고 국경 주위에 병력을 증강하여 싸우고 지키는 계책으로 삼았다. 또 어떤 이간하는 자가 “강홍립(姜弘立)의 노모와 처자가 모두 죽음을 당했다.”고 말하니, 강홍립이 깊이 원망하며 “조정이 이미 나를 저버렸다.” 하고, 실제로 오랑캐를 선도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한 것이라 한다.
관서 절도사(關西節度使) 남이흥(南以興)이 패전하여 죽고, 평양도 이미 무너졌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상은 강도(江都)로 출행(出幸)하고, 세자의 분조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사대부 중에는 삼남(三南) 사람이 많아서 대부분 분조(分朝)를 따랐고, 혹 기이한 공로를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갔다. 행재소는 바다 너머 자못 먼 곳에 있었는데, 이에 간사한 무리들이 도리어 이간하는 말을 지어내니 인심이 이를 두려워하였다.
공이 난리 소식을 듣고 호남의 도로로 출발하였다. 소란스럽게 서로 전하는 말에, “오랑캐가 이미 길을 막았으니 필시 이를 수 없을 것이다.” 하니, 모두들 “분조가 가까이 있고 또 길이 편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임금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사세를 관망하는 것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다.” 하고, 곧바로 행재소로 달려가니, 듣는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고, 민심이 이에 의지하여 안정되었다.
오랑캐가 화친을 요구하면서 반드시 왕자와 중신(重臣)을 인질로 삼으려 하였다. 강홍립이 왔을 때 공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홍립은 의리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하였으니, 죄로 말하자면 응당 죽여야 할 것이고, 또 오랑캐와 화친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어 우리의 병력과 형세를 논하며 말하기를,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오직 전하께서 확고하게 결정한 뜻이 없고 신하들 중에 담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3월에 오랑캐가 맹약을 체결하고 돌아갔다. 공은 동지중추(同知中樞)에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이배(移拜)되어 경성에 들어갔고, 조금 있다가 병조 참판에 제수되어 행재소로 돌아갔다. 4월에 어가(御駕)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와서는 소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청했으나 상이 머물러 있으라고 만류하였다. 5월에 어머니의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몇 해 사이에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년(1629, 인조 7) 4월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어 한번 대궐에 들어가 사은숙배하고 돌아갔다. 이듬해 3월에 태묘(太廟)의 나무에 벼락이 치자, 상이 자책하며 구언(求言)하였다. 공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형옥(刑獄)은 천하의 대명(大命)이니, 형옥이 들어맞지 않으면 원기(冤氣)가 생기고, 이 원기가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홍수와 가뭄의 재앙을 초래한다고 했습니다.
반정(反正)한 이후에 사방 변방으로 유배당한 자는 그 수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이니, 죄인이 많은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일개 필부가 가슴을 치더라도 5월에 서리가 내리고, 한 아낙네가 원한을 품어도 3년 동안 가뭄이 든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온 나라 안에 가슴을 치거나 원한을 품은 자가 일개 필부와 한 아낙네일 뿐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그대로 명하시어 무릇 사면할 만한 죄에 해당하는 사람은 시원스레 탕척(蕩滌)하여 그대로 묶어 두지 않게 하신다면 또한 재앙을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一助)가 될 것입니다. 아, 보통 사람이라도 죄가 없으면 오히려 이렇게 해야 하는데, 더구나 선왕의 자식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공(珙 인성군(仁城君))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신이 이미 앞에서 진술했습니다. 설령 공의 역모가 이미 드러났다 하더라도 응당 절도(絶島)에 안치하여 죽이지 않는 것으로 대우하셨더라면 전하께서는 죄인을 벌주고 친척을 친애하는 도리를 모두 온전히 했다고 할 터인데,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의 늙은 아내와 어린아이를 아직까지 해도(海島)에 있게 하여, 그들이 비단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다가 하루아침에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괴로워하며 애처로이 울부짖는데도 보살펴 주지 않으시니, 어찌 생민(生民)이 다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계하는 즈음은 어떤 때보다도 두려운 것이니,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면 하늘의 변괴가 위에서 상응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골육(骨肉)을 이처럼 대우하셨으니, 재이(災異)의 발생은 괴이한 일이 못됩니다. 만약 이를 고치지 않으신다면 재이가 없을 때가 없어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청하건대, 이제라도 그 원통함을 풀어 주시어 그 봉작(封爵)을 회복시키고, 그 자녀들을 돌아오게 하여 혼인할 때를 잃지 않게 하소서.”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이미 그 어미를 석방했으나 어미는 늙고 자식은 병들었기 때문에 애틋한 정에 서로 이별하지 못하고 사정을 아뢰어 머물기를 청한다고 합니다.
신이 이 소문을 듣고 전하의 어진 마음에 깊이 감격하였고, 또 차마 떨어지지 못하는 정을 슬퍼합니다.”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논하되, “재이(災異)에 억지로 끌어다 붙여 시비(是非)를 현란시켰다.”고 탄핵하였다. 이때 대부인(大夫人)은 93세이고, 공은 62세였다. 비록 자신의 지위가 높았지만 반드시 몸소 봉양하였고, 또한 늙음을 이유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형제 두 사람도 모두 늙었는데, 서로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그 해 7월에 대부인이 돌아가시니, 예법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몸이 훼상(毁傷)되었다. 장사를 치른 뒤에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하니, 그 거처하는 것과 곡읍(哭泣)하는 모습을 보고 어진 사람은 모두 ‘군자가 예법을 잘 행한다’ 하였고, 불초(不肖)한 사람은 돌아와서 자신을 반성하며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는데 마음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장지(葬地)는 가조현(加祚縣)의 용산(龍山)에 있으니, 역동(嶧洞)에서의 거리가 70리이다. 지금 산 아래에 용천정사(龍泉精舍)가 있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순종하는지를 보고, 상을 당해서는 슬퍼하는지를 보고, 제사 지낼 때에는 공경하며 때에 맞는지를 보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 세 가지를 일찍이 선군자(先君子)에게서 보았고, 내가 또 선군자에게서 배웠다.” 하였다.
숭정(崇禎) 5년(1632, 인조10) 6월에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여 10월에 혜릉(惠陵)에 안장하였는데, 공이 도성에 들어가 임곡(臨哭)하고 발인(發引)한 뒤에 돌아왔다. 그 해 11월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또 대사헌으로 부르자, 3월에 대궐로 들어가 사은숙배하였다. 이때 사사로운 원한으로 고변한 자가 있었다. 공이 이 일에 대해 논하여 무고(誣告)를 당한 사람은 모두 석방되었으나 고변한 자에게 죄가 없게 되자 공이 이를 쟁론해 마지않았다. 4월에 왕자의 가례(嘉禮) 때문에 상이 창경궁을 중수하도록 명했으나 공이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자 상이 그 말을 따랐다.
5월에 대호군(大護軍)에 제수되자, 사정을 진달하여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휴가를 주어 돌아가도록 하였다. 가을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쳤다. 공이 집에 있으면서 봉사(封事)를 올려 군덕(君德)을 논하며 재이(災異)를 언급하였다.
숭정 7년 봄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고, 여름에 대사간으로 이배(移拜)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가을에 또 대사헌이 되었다. 상이 대통(大統)을 계승한 이후로 공신(功臣)들이 대부분 ‘상(上)이 국가를 중흥시킨 공덕은 열성조(列聖朝)보다 높으니, 마땅히 고비(考妣)를 추존하여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중국 황제에게 청하여 이미 봉호와 시호를 추존하고 바야흐로 부묘(祔廟)의 전례(典禮)를 의논하였다. 부당함을 간언하는 사람은 모두 죄를 얻게 되어 대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갔는데, 공이 마침 간관이었으므로 모두 공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9월에 공의 행차가 용인(龍仁)에 이르렀을 때 도승지로 이배(移拜)되었다.
대궐에 들어가 사은숙배하고 이어 소를 올려 떠나가기를 청하였다. 또 부묘(祔廟)의 실례(失禮)를 논하여 말하기를, “《예기》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부모를 여읜 뒤에 크게 귀하게 되었으면 부모를 위하여 시호(諡號)를 짓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선유(先儒) 여중(呂中)이 주석하기를, ‘아버지의 관작(官爵)이 낮아서 시호를 올릴 수 없는데 자신의 관작이 시호를 올릴 수 있다고 하여 부모의 시호를 짓는다면 이는 자신의 관작을 아버지에게 더하는 격이니, 높이려다가 도리어 낮추는 것이 되므로 어버이를 공경하는 처사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시호를 추존하려는 거조(擧措)는 이미 지당한 도리가 아닌데, 또 예법이 아닌 예법을 가지고서 열성조의 위차(位次)에 올리려 하십니다. 옛날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생부모(生父母)에게 시호를 추존하면서 ‘도고(悼考)’, ‘도비(悼妣)’라 하여 원읍(園邑)에 안치했을 뿐, 종묘(宗廟)에 배향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애제(哀帝)가 생부모 정도공황(定陶共皇)의 사당을 세울 때에 조서를 내려 국호(國號)인 정도(定陶) 두 글자를 제거하게 한 다음 경사(京師)에 공황묘(共皇廟)를 세웠으나 또한 종묘에 배향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광무제(光武帝)가 사친(四親)의 사당을 장릉으로 옮겼고, 이들에게 일찍이 시호를 가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일찍이 종묘에 배향하려는 의논이 있었겠습니까. 호씨(胡氏)가 논하기를, ‘왕망(王莽)이 찬탈했을 때에 한(漢)나라의 국운은 이미 끊어졌다. 광무(光武)가 난리를 평정하고 분연히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비록 고조(高祖)를 시조(始祖)로 삼고 사친(四親)을 황제로 추존하더라도 의리상 크게 불가함이 없다.
그러나 장순(張純) 등의 건의를 한 번 듣고 단호히 받아들여, 장릉(章陵)의 사묘(四廟)에 특별한 예우를 하지 않았어도, 부모에 대한 보답이 적다는 비방이 당시에 일어나지 않았고, 예법을 잃었다는 비난이 후세에 발생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선제와 애제의 거조가 지나쳤다는 것은 더욱 명백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본받아야 할 광무제는 본받지 않고 선제와 애제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행하고자 하시니, 신은 천지처럼 크신 전하께 서운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송(宋)나라 때 구양수(歐陽脩)가 칭친(稱親)의 의논을 먼저 발의하자, 여회(呂誨)가 이를 사론(邪論)으로 지목하고 옥리(獄吏)에게 내려 보내 심리(審理)하기를 청했으니, 옛사람이 대를 잇는 종통(宗統)을 중시하고 조종(祖宗)을 높이는 의리가 엄격하였다 할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따로 사당을 세워서 종묘와 다름이 없이 향사(享祀)한다면 전하께서 어버이를 높이고 어버이를 드러내는 방도가 극진한 것이니, 어찌 굳이 지나치게 융성한 예법으로 응당 더하지 않아야 할 곳에 더하시어 ‘높이려다 도리어 낮추게 되었다’는 비난을 사려 하십니까.”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제와 광무제는 모두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계승했으나 《강목(綱目)》에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지 않았던 것’을 폄하하지 않았고, 선유(先儒)도 ‘특별한 예우를 두지 않았던 것’을 아름다운 일로 여겼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비답(批答)은 내려오지 않았다.
이에 연이어 사직을 청하여 도승지에서 체직되었다가 곧바로 동지경연(同知經筵)에 제수되었다. 또 힘껏 사직하는 소를 세 번 올리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숭정 8년(1635, 인조 13) 봄에 고변하는 자가 있어 옥사(獄事)가 공에게까지 연루되니, 상이 심문하지 말라고 명했으나 공은 오히려 대명(待命)하였다.
한달 남짓 만에 대사간에 제수되자 즉시 들어가 사은숙배하고 이어 계속 사직을 하였다. 6월에 목릉(穆陵)과 유릉(裕陵)에 모두 변고가 있으므로, 대신이 두 능을 봉심(奉審)하여 그 상황을 계진(啓陳)하였다. 공신(功臣)들이 다시 대신과 모의하기를, “벼락이 친 것이 아니라,
비로 인해 무너진 것이다.” 하여 능침랑(陵寢郞) 홍유일(洪有一)이 도리어 무망(誣罔)의 죄를 얻게 되었다. 이때에 능침을 수리하는 의절(儀節)이 거행되지 않았는데, 예조에서 길일(吉日)을 택해 장효(章孝 인조(仁祖)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부묘(祔廟)하는 경례(慶禮)를 먼저 시행하려 하였다.
공이 봉사(封事)를 올려 대신의 허물을 책망하고, 또 지척(指斥)하여 말하기를,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신경진(申景禛)과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재이(災異)를 엄닉(掩匿)하여 선왕의 은혜를 저버리고, 전하를 허물에 빠뜨렸습니다.” 하였다. 이어 죄인 중에 잘못 처리된 자가 많다는 것을 논하면서 길(佶), 억(億), 건(健)의 무죄를 언급하고 골육을 애련(哀憐)히 여겨서 석방하는 명을 내리기를 청하니, 시의(時議)에 크게 어긋나게 되었다.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글을 올리며 한달 남짓 논핵(論劾)하였으나 상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래도록 봉록을 받지 않은 것을 진념(軫念)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반찬을 보내어 보살피게 하니,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는 전하께서 신하를 염치(廉恥)로써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예조 참판으로 이배(移拜)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이때 또 폭풍이 불어 종묘사직 안에 나무가 뽑힌 것이 몹시 많았다. 소를 올려 재이에 대해 논하면서 생민(生民)의 곤궁과 후원(後苑)에서 유연(遊宴)하는 즐거움을 언급하니, 상께서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서 경기(京畿)와 관동(關東)에 시행하기로 한 양전(量田)을 그만두어 풍년이 들 때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뒷날 상이 경연에 임어(臨御)할 때 공이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정경세(鄭經世)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장현광(張顯光)은 늙었으니, 경은 떠나서는 안 될 것이오.” 하였다. 공이 또한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이어 재변(災變)의 대응책을 논하면서 삼남(三南) 지방의 양전(量田)에 기망(欺罔)이 많음을 언급하였다.
그달 부제학으로 옮겨 가서는 연이어 소장(疏章)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그 세 번째 소에서 붕당(朋黨)의 폐해를 극언하면서 ‘전고(前古) 이래로 이와 같이 심하면서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난날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범진(范鎭)은 63세, 여회(呂誨)는 58세, 구양수(歐陽脩)는 62세, 부필(富弼)은 68세, 사마광(司馬光)과 왕도(王導)는 모두 50세에 혹은 치사(致仕)하고, 혹은 병을 핑계 삼고, 혹은 한직(閒職)을 청했으니, 이는 모두 당시 여론에 용납되지 못했기 때문에 떠나갈 때 모두 70세라는 연한(年限)에 구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으로 말하면, 나이는 저들보다 이미 많이 먹었고, 여론에 용납되지 못함은 더욱 심하여 신이 서울에 온 이후 여섯 달 동안 탄핵을 받은 상황에 있었던 것이 석 달이었고, 예조에 있은 지 한 달 남짓 만에 또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꾸물대는 사이에 끝내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니, 비록 포만(逋慢)한 죄를 입더라도 신은 사직하고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힘껏 돌아가고자 하였다.
9월에 사간(司諫) 조경(趙絅)이 대신의 탐오(貪汚)를 말하다가 죄를 얻게 되었는데,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용서해 주기를 청하자 상이 받아들였다. 일찍이 소대(召對)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경연(經筵)을 날로 게을리하여 점점 처음만 못해지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응당 힘쓰리라.” 하였다.
그 후 경연에서 《시경》 제풍(齊風)의 동방미명편(東方未明篇)을 진강하고 아뢰기를, “예(禮)에 임금이 허물이 있으면 신하는 진실로 기탄없이 비난한다고 했으니, 옛날 비방목(誹謗木)을 세운 것은 또한 이러한 의미입니다.”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삼남(三南) 지방은 양전(量田) 문제로 원망이 많은데, 반드시 삼남에 먼저 부과한다면 삼남 백성은 더욱 원망이 많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연이어 쟁론하다가 호조 판서 최명길(崔鳴吉)과 성상 앞에서 쟁론하기까지 했으나, 호조에서는 이미 신결(新結)을 삼남에 반포한 상태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법은 묘당에서 이미 칠로(七路)의 백성들과 일시에 반행(頒行)하기로 한 약속이 있지 않소.” 하자, 최명길이 말하기를, “애당초 이러한 약속은 없었소.” 하였다.
공이 다시 따져도 최명길이 거듭 숨기므로, 공은 분변할 수 없었다. 물러 나와서 사실을 물어본즉, 공문이 벌써 두 차례나 내려졌었다. 공이 또 소를 올려 말했으나 대신이 반대하여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 공이 또 소를 올려 말하기를, “일국(一國)의 정치라는 것은 어느 곳에 먼저 시행하고 어느 곳에 뒤에 시행해서는 안 되며, 일국의 부세(賦稅)라는 것은 누구에게 가볍게 매기고 누구에게 무겁게 매겨서는 안 되는 것인데, 명길이 기필코 먼저 삼남 지방에 부세하여 삼남의 민심을 잃으려고 합니다.
오늘날 남쪽 오랑캐가 쟁단(爭端)을 야기하여 위협하는 말이 날마다 이르고 있으니, 우리들이 대비할 좋은 계책은 오직 민심을 보합(保合)하는 데에 있는데, 일을 도모하는 신하들은 도리어 원망의 독기로써 다그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흩어져 버리면 비록 기계(器械)가 있다 하더라도 누구와 함께 방어할 것이며, 비록 성지(城池)가 있다 하더라도 누구와 함께 지키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받아들이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떠날 때에 또 소를 올려 말하기를, “옛날에 풍환(馮驩)은 맹상군(孟嘗君)의 일개 식객(食客)이었지만 오히려 능히 채권(債券)을 불살라서 설(薛) 땅의 백성으로 하여금 임금을 친애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물며 신은 풍환을 변변찮게 보는 사람인 데다 두터운 은혜를 받은 것이 일개 식객에 그치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예모(禮貌)는 아직 쇠하지 않았지만 말이 시행되지 않으면 떠나간다.’고 했으니, 옛사람 중에 임금을 섬기다가 뜻이 합치되지 않아 떠나간 이가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은혜를 저버린 처벌을 받더라도 신이 원망하고 후회할 바는 아니지만, 신이 어찌 감히 전하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신은 마땅히 난리에 달려가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으며, 베옷을 입고 나물을 먹으며 스스로 시골 선비와 같이하여 일찍이 현달한 사람 같지 않았다.
숭정 9년(1636, 인조14) 1월에 도성으로 들어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초상에 임곡(臨哭)하였다. 지난해 도성을 떠난 뒤로도 작록(爵祿)이 그대로 있어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2월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고, 얼마 뒤에 대사간으로 옮겨 갔는데, 전후로 여러 번 사직했으나 승정원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아 소를 올려 사정을 진달하였다.
이때 노장(虜將 청(淸)나라 태조(太祖))이 위호(位號)를 참람되이 고치고 사신을 막 보내왔으므로 그 소에서 또 말하기를, “답서는 반드시 준엄하게 거절하여 우리나라를 구실로 삼지 말게 하소서. 서달(西㺚 청나라)이 새로 중국을 배반했으니, 이는 부모의 적자(賊子)입니다.
비록 관문(關門)을 닫고 거절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랑캐를 대하던 예대로 대접하고 그 소종래(所從來)를 묻지 않는다면 저들이 비록 겉으로는 성난 기색을 보이더라도 마음으로는 반드시 ‘이 나라에 인재가 있다.’ 할 것입니다.” 하였다.
3월에 부제학으로 이배(移拜)되어서는 차자를 올려 먼저 임금의 덕을 말하고, 당시의 극심한 폐단을 언급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신(功臣)이 병권을 잡고서 외적을 방어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기찰(譏察)만 날로 엄밀히 하기 때문에 장사(將士)들은 태만해져서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공로가 있어도 죽고 공로가 없어도 죽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남이흥(南以興)이 죽을 때 한탄하기를, ‘내가 장수로 변방에 있으면서 병졸 한 명도 훈련시키지 못하고 싸움 한 번도 연습하지 못하고서 끝내 패배하게 되었구나.’ 하였으니, 이는 비통한 말입니다. 지금의 방식대로만 하고, 지금의 폐단을 바꾸지 않는다면 비록 손빈(孫殯)과 오기(吳起) 같은 명장(名將)이 있더라도 하루아침도 쓰이지 못할 것이니, 전하께서는 이들의 힘으로 반정(反正)하셨으나 이들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여름에 대사헌으로 이배(移拜)된 뒤, 장릉(長陵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의 장례 문제로 나와서 사은숙배했다. 얼마 후 스스로 인혐(引嫌)하여 체직되었고, 반곡(反哭) 뒤에 곧바로 돌아갔다. 6월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7월에 부제학으로 옮겼고, 9월에 또 대사헌으로 옮겼고, 11월에 다시 이조 참판이 되자, 부득이 대궐에 들어가 사은숙배하였다.
이어서 계속 떠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원객(遠客)이라 하여 미염(米鹽)을 하사하여 특별한 뜻을 보였으나 포인(庖人)과 늠인(廩人)이 태만하여 이행되지 않았다. 12월에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여 내달린 지 3일 만에 선봉이 이미 봉산(鳳山)을 통과했다.
지난해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대군을 거느리고 정방산성(井方山城)에 주둔하면서 험지(險地)에 의거하여 스스로 지켰는데,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다가 적의 후기(候騎)를 만나 군사가 흩어져 사로잡히게 되었다. 상이 장차 강도(江都)로 출행(出幸)하려고 종묘와 사직, 비빈(妃嬪)과 후궁(後宮)을 먼저 보냈으나 적이 이미 도성에 육박했기 때문에 상이 곧 급히 남한산성으로 달려 들어갔다.
백관은 대부분 도보로 뒤를 따랐고 간혹 도중에 도망치기도 하였다. 신경진(申景禛)이 정병(精兵) 수천 기(騎)를 거느리고 지나다가 공을 바라보며 외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누구의 허물이오? 공은 중신(重臣)이거늘, 어찌 강화(講和)하자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아 사직을 안정시키지 않는단 말이오.” 하니, 공이 웃으며 답하기를, “공은 이렇게 용감한 군사를 거느리고서 적을 한 번도 공격하지 않고 장차 무엇에다 쓰려 하는가.” 하였다. 경진이 떠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구나, 오활(迂闊)함이여!” 하였다.
임금을 지키는 군사가 연이어 모두 패전하였다. 산성이 포위된 지 40여 일이 되었을 때, 공이 차자를 올려 원수(元帥)를 참수함으로써 장사(將士)의 마음을 격려시키기를 청하였다. 이때 성중(城中)에서 화친을 청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오랑캐가 허락하지 않았다.
최명길이 은밀히 상에게 아뢰고 오랑캐 군중으로 가게 되자, 공은 또 차자를 올리기를, “밖에서 떠들썩하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난밤 사신이 가지고 간 국서(國書)에 신(臣)이라 일컫는 말이 있다고 하니, 통곡할 일입니다. 전후의 국서가 모두 명길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그 아첨하고 위축된 말은 실로 항복문서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신이라고 일컫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신이라 일컫는다면 이는 군신(君臣)의 관계가 정해지는 것이니, 이미 군신의 관계가 정해지고서 그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명길은 한 번 신이라 일컫기만 하면 산성의 포위도 풀리고 군부(君父)의 신변도 온전할 것이라 여긴 것이지만, 이는 아녀자나 내시의 충성일 뿐입니다. 하물며 이렇게 될 리가 전혀 없는 데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천하의 국가가 망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오랑캐는 만족할 줄을 몰라서 항복해도 망하고 항복하지 않아도 망할 것이니, 어찌 예의를 지키다가 사직을 위해 죽는 것만 같겠습니까. 더구나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죽을 각오로 최후의 일전을 치른다면 만에 하나 성을 보전할 수 있는 이치가 있는데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천조(天祖 명(明)나라)와 부자(父子)의 은혜가 있으므로 의리상 저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오랑캐가 우리 국서를 받고 나서 척화(斥和)한 자를 문책해야겠다고 주장하니, 공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드나들며 그 일을 의논하자, 밤에 군사들이 궐문(闕門)에서 난동을 부리며 척화한 자를 찾아 분풀이하려 하였다.
난동을 부린 자들은 모두 세 대장(大將)의 휘하 군사들이었으나, 유독 수어병(守禦兵)만 움직이지 않았다. 수어장(守禦將) 이시백(李時白)이 말하기를, “내가 군중에 금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군중에 난동을 부리는 자를 따르는 무리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세 대장은 삼수(三手)를 거느린 신경진(申景禛), 총융사(摠戎使) 구굉(具宏), 어영장(御營將) 원두표(元斗杓)이다. 이튿날 전후로 척화를 간언했던 신하 10여 인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 최명길이 다시 오랑캐 군중으로 가려 했다. 어떤 사람이 상에게 아뢰기를, “이상의 제신(諸臣)은 모두 당대에 명망이 중한 사람이므로, 민심이 복종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즉시 돌아오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강도가 함락되어 유도대장(留都大將) 김상용(金尙容)은 분신자살(焚身自殺)하고, 여러 왕자(王子), 비빈(妃嬪), 종실(宗室), 귀신(貴臣)의 처첩 자녀(妻妾子女)는 모두 이미 사로잡히고, 그 나머지는 거의 도륙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성중(城中)은 더욱 싸울 뜻이 없어지고, 오랑캐는 더욱 급박하게 성을 공격하였다.
최명길이 또 오랑캐 진중으로 가서 내일 어가(御駕)가 산성에서 내려올 것이라 약속하니, 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은, 나는 수치라고 생각한다.” 하고, 패도(佩刀)를 뽑아 배를 찔러 칼날이 뱃속까지 들어갔다.
성안 사람이 모두 크게 놀라며 그 의리를 슬퍼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상이 어의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고, 또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하여금 의약(醫藥)을 공급하여 반드시 살려내도록 하였다. 상이 산성을 나오려 할 때에 공은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위독했지만 오히려 머리를 들고 임금에게 호소하기를, “명길이 전하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였으니, 오랑캐는 장차 예전의 약속을 바꾸어 우리나라의 옥새를 요구할 것입니다.
이것은 명나라에서 받아 거의 300년을 전해 왔으니, 마땅히 천조(天朝)에 바쳐야 하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하십시오. 또 왕사(王師 명군(明軍))를 공격하는 데 원병(援兵)을 요구할 것입니다. 명나라는 우리에게 부자(父子)의 은혜가 있음을 오랑캐 또한 알고 있으니,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할 수 없고, 또한 자식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격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시오. 오랑캐가 비록 흉악하고 교활하지만 반드시 강요할 만한 명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로 맞서서 천하 후세에 죄를 얻지 않게 하소서.” 하였다.
2월에 편여(箯輿)에 실려 향리(鄕里)로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주상이 욕을 당했는데 신하의 죽음이 이미 늦었으니, 다시 무슨 마음으로 남들처럼 나라의 백성 노릇을 하며 처자식의 봉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금원산(金猿山) 골짜기로 들어가 초가집을 지어 ‘구소(鳩巢)’라 명명하고, 산을 일구어 조를 심어 스스로 생계를 마련하였다.
이때 국가에서 황명(皇明)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양 해가 바뀌더라도 다시 새 책력을 보지 않았고, 세속과 발길을 끊어 꽃 피고 풀 자라는 것으로 계절을 징험하였다. 산속에 기거한 지 37갑자(甲子)에 세상을 떠나니, 숭정(崇禎) 14년인 신사년(1641, 인조19) 6월 21일이었다.
지난해 5월 4일에 정부인(貞夫人) 윤씨(尹氏)가 세상을 떠나 거창(居昌)의 주곡(主谷)에 안장했는데, 이듬해 1월에 그곳으로 합장했고, 10년 후 신묘년(1651, 효종2)에 용산(龍山)으로 개장(改葬)하였다. 학사(學士) 조경(趙絅)이 말하기를, “옛말에 ‘군부(君父)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친하지만 송종(送終)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끝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은 지 이미 오래되어 지나온 세월이 많으니, 경대부들은 조정에서 편안하고, 사서인(士庶人)은 농토에서 편안하고, 상인들은 시장에서 편안하여, 모두가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형제를 떠나고 처자를 물리친 채 홀로 궁벽한 산속에 살며 나쁜 옷과 거친 음식으로 겨울과 여름을 보내고 아침과 저녁을 지내면서, 칼로 배를 찔러 의리를 맹세했으나 남한산성에서 즉시 죽지 못했던 일을 자신의 죄로 인책하여 감히 잠시도 잊지 못했으니, 이는 천백년 동안 선생 한 분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아, 옛날의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은 그 마음이야 마찬가지지만, 당면한 시대의 치란(治亂)이 같지 않아 그 사업이 동일하지 않았던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나면 일세(一世)를 모두 선하게 만들어 은덕이 만물에 미침으로써 당대에 공업(功業)이 드러나는 것이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면 세상을 피하여 홀로 도를 행하거나 자신을 희생하여 의리를 따름으로써 후세에 이름을 전하게 되는 것이니, 그 도가 당시에 행해지는 것과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성인과 현인에 대해 한 번 논하자면, 우(虞)나라와 하(夏)나라의 태평성대에는 우(禹)가 홍수를 막았고, 익(益)이 산택(山澤)을 불태웠고, 직(稷)이 곡식을 심었지만 이를 공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은(殷)나라가 망할 때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서 미친 척하였고, 비간(比干)은 심장이 도려내졌고, 백이(伯夷)는 굶어 죽었지만 모두 원망이 없었으니, 그 행한 사업은 같지 않으나 그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군자가 마음을 다잡고 행실을 가다듬어도 혹 도에 미치지 못하고, 학자가 부지런히 날로 강마하여도 도를 얻은 자가 드문 것이다. 선생의 도를 가만히 살펴보건대, 옳은 의(義)가 아니면 함께 하지 않고, 옳은 도(道)가 아니면 나아가지 않았다. 의리를 앎이 분명하여 큰 환난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절의를 지키고 의리를 취하였기 때문에 살신(殺身)을 보기를 마치 좋아하는 일을 보듯이 하였고, 몸을 깨끗이 하여 은둔한 것을 온 세상이 모두 비난했으나 원망하거나 노여워함이 없었다.
아, 옛날의 성인과 현인에 견주어도 행실과 사업이 더욱 드러나서 거의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다. 학자들이 동계선생(桐溪先生)이라 일컫고, 용문서원(龍門書院)의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사당에 종향(從享)하였다.
공의 아들은 창시(昌詩), 창훈(昌訓), 창모(昌謨)이고, 또 측실의 아들로 창근(昌謹)이 있다. 창시는 전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아들 기수(岐壽)를 낳았고, 창훈은 기헌(岐憲)을 낳았고, 창모는 기윤(岐胤)을 낳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양천(陽川) 허목(許穆)은 삼가 쓰다. <끝>
[주01] 역천서원(嶧川書院)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주02] 월천(月川) : 조목(趙穆)의 호이다. 안동 예안(禮安) 출신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고제(高弟)이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상
덕사(尙德祠)에 종향(從享)되었다.
[주03] 한강(寒岡) : 정구(鄭逑)의 호이다.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으로, 퇴계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이다.
[주04] 봉황이 …… 견주었다 : 과감하게 직간(直諫)한 이선감(李善感)에 견주었다는 말이다. 당(唐)나라 한원(韓瑗)과 저수량(褚遂良)
이 무고(誣告)를 입어 억울하게 죽었으나, 두려워서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 후 고종(高宗)이 봉천궁(奉天宮)으로 거둥하였
을 때 이선감이 처음으로 상소하여 극언하니, 당시 사람들이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鳳鳴朝陽]” 하였다. 조양은 봉황이 깃드는
곳을 말한다.
[주05] 선왕(先王)이 …… 하였다 : 선조(宣祖)가 말년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 하자, 당시의 대신인 유영경(柳永
慶) 등이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유영경은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아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주06] 정인홍(鄭仁弘)이 …… 변론했다 :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정인홍을 귀양 보내지 말기를 청하였다.
《宣祖實錄 41年 1月 28日》
[주07] 사헌부(司憲府)의 금령(禁令) : 《동계선생연보(桐溪先生年譜)》에 의하면, 당시 사헌부에서 통견(通絹)을 입지 말라는 금령을 내
렸는데 동계가 고의로 이를 입어서 마침내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주08] 8, 9십 …… 않는다 : “8, 9십 세를 모(耄)라 하고 7세를 도(悼)라 하니, 도와 모는 비록 죄가 있더라도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八十九十曰耄 七年曰悼 悼與耄 雖有罪 不加刑焉]” 하였다. 《禮記 曲禮上》
[주09] 군신(君臣)과 …… 것입니다 : 당시 좌의정으로 산림(山林)에 있던 정인홍이 이이첨(李爾瞻)에게 편지를 보내어 폐모에 대한 입장
을 밝힌 내용을 간략히 줄여서 말한 것이다. 《光海君實錄 9年 11月 24日》
[주10] 폐세자(廢世子)가 …… 사건 : 폐세자 이지(李祬)가 위리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에 밤
중에 빠져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힌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1年 5月 22日》.
[주11] 계사(啓辭) : 《동계집(桐溪集)》 제3권에 실린 〈갑자계사(甲子啓辭)〉를 말한다.
[주12] 계세법(計世法) : 대수(代數)를 세는 법이다. 1627년(인조5)에 제정한 서얼(庶孼)의 허통(許通)에 관한 사목(事目) 가운데, 양첩
의 소생은 손자 대에서, 천첩의 소생은 증손자 대에서 등용을 허용하는 제도이다. 《燃藜室記述別集 卷12》
[주13] 계운궁(啓運宮) : 인조의 생모(生母)인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具氏)를 말한다.
[주14] 그 당시 …… 탄핵하였다 : 전(前) 감사(監司)가 예안(禮安)의 유생을 장살(杖殺)한 사건이 있었다. 그 아들이 원통하다고 소송했
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자, 예안의 유생이 열읍(列邑)에 통문을 돌려 전 감사의 죄를 지적하였다.
조정에서는 감사를 능욕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게 하였다. 이에 동계가 조사하여 보고하기를, “향곡(鄕曲)의 유생
들이 사체(事體)를 알지 못한 채 오직 죽을죄가 아닌 것으로 죽은 것이 원통한 것만 알고서 자신도 모르게 감사를 모함하는 죄를 지
었습니다.
지금 만약 엄형(嚴刑)을 가하여 죽게 한다면 성상께서 잘못을 포용하시는 도량이 아닐 것이고, 법전에 의하더라도 장형(杖刑)과 도
형(徒刑)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귀(李貴)가 “토호를 구원하려고 왕명을 무시한다.” 하였고, 또 성상 앞에서 “고향에서 벌
인 수연(壽宴)이 너무 지나쳤다.”고 심하게 비난하였다. 《桐溪先生年譜》
[주15] 중흥(中興) : 여기서는 인조반정을 말한다.
[주16] 예법에 …… 훼상(毁傷)되었다 : 예(禮)에 이르기를, “상을 치르는 예법은 50세가 되면 몸을 극도로 훼상시키지 않아야 하며, 60
세가 되면 몸을 훼상시키지 않아야 되며, 70세가 되면 상복만 입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안에서 거처한다.” 하였다. 《禮記 曲禮上》
[주17] 고변한 …… 마지않았다 : 1633년(인조11) 3월 2일에 임석간(林碩幹)이 반역의 주모자로서 고변한 사건이 있었다. 추국청(推鞫
廳)이 설치되어 심문한 결과 공초 내용이 고변한 사실과 대부분 달랐다. 이에 국청에서는, 그가 고변한 자이긴 하지만 무고(誣告)한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어 형신(刑訊)을 가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이 사람을 처벌하면 고변의 길이 막히므로 특별히 방면하라.” 하
였다. 이 기사로 볼 때, 동계가 ‘무고한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간쟁한 듯하다.
[주18] 칭친(稱親)의 의논 : 송(宋)나라 때, 복의(濮議)가 일어났을 당시에 구양수(歐陽脩)가 폈던 주장을 말한다. 송나라 인종(仁宗)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복안의왕(濮安懿王) 윤양(允讓)의 아들 월서(越曙)로 뒤를 잇게 하니 그가 영종(英宗)이다.
영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조칙을 내려 생부(生父) 복안의왕의 숭봉(崇封) 문제를 의논하도록 함으로써 일어났던 논의를 복의라 한
다. 이때 여회(呂誨)ㆍ범순인(范純仁)ㆍ여대방(呂大防)ㆍ사마광(司馬光) 등은 인종(仁宗)을 황고(皇考)라 부르고 복안의왕을 황
백(皇伯)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한기(韓琦)ㆍ구양수 등은 복안의왕을 황고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19] 비방목(誹謗木) : 요(堯) 임금 때 백성들에게 정치의 득실을 적도록 하기 위해 교량 주변이나 궁궐에 설치했던 나무이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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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桐溪先生行狀 - 許穆.
曾大父司圃署別提。贈司憲府執義諱玉堅。
大父贈承政院左承旨諱淑。
父成均館進士。贈吏曹參判諱惟明。別號嶧陽先生。
母貞夫人晉陽姜氏。將仕郞諱謹友之女。高麗國子博士啓庸之後也。公諱蘊。字輝遠。姓鄭氏。其先本八溪郡人。始祖光儒侯諱倍傑。光儒侯子孫昌大。多達官貴人。今八溪之鄭。皆祖光儒侯。高麗時有爲左散騎常侍者。諱習仁。以直道顯。事在麗史本傳。七世。至嶧陽先生。先生嘗受業於葛川林薰先生。今嶧川。有鄕賢逸民之祠。公嶧陽先生之次子也。明穆宗皇帝隆慶三年我昭敬大王二年己巳二月六日。公生于感陰縣嶧洞里。自孩提有識。事父母。必承意順適。一如成人之行。旣就學。勤苦自力。博讀經史。行業日修。十五六時。法度已成。好危坐對卷終日。先先生隱居敎授。弟子日進。皆莫之先也。初見葛川先生名益賢。先先生敎訓有法。未嘗崖異以爲驚俗之行。故公爲學。事親順而交友忠。樂與人爲善。而臨事峻正。鄕人父老皆敬憚之。我昭敬大王二十五年。有倭寇。兵革大起。後四年。先先生沒。哭泣幾滅性。雖在奔竄流離中。持喪之節。未嘗少懈。旣卒喪。亂離未定。事母夫人。身親鄙事。以供奉養。暇則讀書。樂從當世之名人達者。嘗遊月川,寒岡之門。而初。鄭仁弘持重名於南州。接引江右諸生。號爲來庵弟子。而繩墨嚴切。公亦嘗師事之。後上書梧里李文忠公深相識。三十四年。擧進士。其明年。以行誼被薦。又明年。鄭仁弘攻柳永慶得罪。公從草野上疏訟之。時有臨海君上變事。公抵仁弘書。言臨海謀逆未著。力陳全恩事。又論朋黨偏私之弊。臨海君竟殺死而獄成。仁弘反有力焉。時縉紳已有全恩之說。而反目之曰。覬睮王室。大臣杜門。賢者屛跡矣。廢主元年己酉。除光陵參奉。不就。後年。又除奉慈殿參奉。秋。別試及第。辛亥二月。除侍講院兼說書。辭去。秋。又除兼說書。尋復以說書。召命再至。乃入謝。其十月。陞司書。後月。遷司諫院正言。是年。昌德宮成。移御未久。有妖言。以新宮不利於上。將還居慶運宮。群臣皆曰。不可。惡無辭。時兩宮已有間。太妃尙留慶運宮。辭以問寢。實欲留居之。公力爭言。觸忌諱。斥爲鏡城判官。自光海以來。用事者日以威福制人。士大夫皆苟容於朝。諛佞成風。無諤諤敢諫者。及公以直言貶。人擬之鳳鳴朝陽。鏡在絶塞窮北之境。去王化甚遠。邊帥皆武人。率多麤悍不法。民多怨。又前年北路大浸。鏡尤甚。公近臣一朝左遷 。常退讓無矜氣。事主將有禮。而御吏臨民。曲有恩信。賑窮乏革弊政。其民大蘇。以先王嘗欲易世子。廢主旣得立。以爲大臣謀其事。心德殺柳永慶。於是李爾瞻等。亦自以爲功。力誇矜。論功賞。公亦嘗力言鄭仁弘得罪事。以故卒有召命。爲掌樂院僉正。自以無功。上疏辭之。爾瞻慍言曰。此其意以勳盟爲不久也。公以爲徒無益。乃止。時大獄繼起。人人重足仄目。雖牛馬之盜。辭窮望幸者。以告變或得恩澤。於是有死囚。上變言金悌男欲擁立永昌。日夜爲謀。獄詞滋漫。縉紳大陷。於是用事者造爲辭說。以永昌。一則曰奇貨。一則曰禍本。爭言必殺以爲功。公見爾瞻曰。孺子之無知而尙有謀叛逆者乎。且聞大妃日夜憂泣。恐不得偕死。萬一不幸。諸公尙有辭於他日乎。爾瞻厲聲曰。亦且幷廢太妃。誰復有不可者也。怒欲起。公笑曰。毋起。我且去矣。遂絶。公益見世道危險。蹤跡益疏。欲以微故去。嘗於朝會。犯憲令。得劾罷。奸臣旣執國柄。時事日亂。公鬱鬱欲一言感上意。以爲徒取禍無益。且念大夫人在。默默常自傷。一日。侍大夫人。具白其所欲盡者。大夫人曰。勉之。毋以老母故變其心。公喜甚。時公逬居已累月。時議益非之。不得已一至都下而歸。其月除成均館司藝。以疾不就。冬。又除侍講院弼善。居講院月餘。不與時議相俯仰。尋遞。付副司直。彼銜怒日深。搆煽萬端。指爲黨逆。日夜陰察其所爲。前年。永昌旣禁閉江都。二月。使府使鄭沆陰殺之。聞者莫不憐悲其死。於是公乃上疏。極言幼稚實無謀叛狀。鄭沆迫之令死。此殿下假手於麤悍之武夫也 。不殺鄭沆。殿下無面目立先王之廟庭也。請追復爵位。許以禮葬。布告四方臣庶。以昭殿下友愛之本心。又曰。㼁已死。殿下於大妃。復何疑間之有。如有姦細之徒交搆兩宮者。宜付有司。治之以大罪。殿下亦宜恭爲子職。務得大妃之懽心。頃者。鄭造,尹訒,丁好寬等首發廢母后之議。以圖其身之富貴。爲人臣是可忍也。請罪此三人者。以正三綱五常之道。疏凡累百言。疏出。莫不失色。或有感激流涕者。廢主大怒。下政院以凶疏不沮却上達。承旨主納者先罷。而餘竝推考。於是三司請安置絶島。廢主曰。往者故相李德馨上箚。無大失言。而三司請按法。今鄭蘊上疏。其言大不道。而以安置科罪。無君護黨。如是甚矣。三司請按法。廢主雖甚怒。而惡殺諫者名。故令諸大臣雜議。必欲假群議而殺之也。右議政鄭昌衍獻議爭之。而原任大臣李元翼,沈喜壽等皆以爲不可罪。而時適有大禮。大臣持之卽不鞫。以故禍少弛。然時議益怒。論之以大逆。又令館學生徒等上疏請罪。而鄭仁弘亦上箚以爲。其言不道。必毋赦。以礪群臣之爲異議者云。廢主乃大悅。欲庭鞫。領議政奇自獻曰。鄭蘊不過狂妄。無他罪。不可鞫也。廢主怒謂曰。然則欲不鞫乎。曰不可。廢主曰。且不問乎。曰不可。且曰。此非叛逆大罪。姑徐之。右議政出仕。然後議之。廢主不得鞫。猶按問然後復繫之。至七月。復按問。命安置濟州之大靜。公自三月逮繫。至七月始出獄。繫械已經春夏。鏡父老聞之。嘆曰。此前日吾賢宰也。民賴其賜甚厚。義不可負也。來助患難。湖南儒生宋興周等。亦上疏言無罪。時直公者皆被譴。而陷公者接跡得顯仕。爭相媒孼。危禍日迫。而公未嘗憂嘆咨嗟。常自若。及庭訊。廢主盛怒以待。左右皆懼。公辭氣不亂。慷慨愈切。鄭沆亦對獄。惶怖失次。旣出。遣人謝之。因憂恨發病死。丁好寬見其疏。深自恨曰。吾爲罪人矣。日縱飮不食。病醉乃死。大靜。極南海中窮島。自京城至海南千里。自出獄幷日迫行。六日到海南。候風十九日。海中阻風。又三十八日。乃得達。邑最地濕卑下。多蟲蛇毒螫。自春夏之交。或淫雨連月。或盲風毒霧。一日異變。或窮冬不寒。或盛暑不燠。風氣與中土絶殊。公咄咄曰。宜負罪者居之。自號鼓鼓子。公旣得罪。而用事者益怒。日令三司館學。論之不已。其九月。焚其疏於闕下。削名盟府。李彥英,姜大遂。皆以論列得罪。吳長指爲黨人謫死。朴明槫禁廢南士。一言及冤者。皆抵罪。於是江右橫議。皆主仁弘。公旣不悅於仁弘。爭付者益激爲禍。人人仄目。其後果有廢母后事。奇自獻知不可獨爭。請廣收群臣議。竄北邊。於是宗室貴臣多竄逐。而竟不得逞。號曰西宮而已。修撰尹知敬。自公得罪。因不肯仕。飮酒酣歌。托於佯狂。公拘囚海島。苦心勵行。操守益堅。時宋象仁,李瀷。皆得罪。遷謫至此。宋象仁彈棋。李瀷學琴。以暢其壹鬱。而公常讀書。於是訂經史。摭前言。上自殷之末世。下至南宋。其間聖人賢人之困厄憂患。心危慮深。不失其正者凡五十有九人。輯爲德辨錄以自省。又作元朝自警箴。以囚徒日給廩粟苦不繼。令僕隷日傭賃取資。天啓三年三月。上克大難。釋公爲司諫院獻納。前時永昌之獄。大妃家旣族滅。母盧夫人流濟州。沒爲官婢。至是召迎。其奉使者來而具言其事。且勞苦曰。盍一日撤棘以自便乎。公辭不得命。見有旨然後乃出。公居圍籬十年。嘗作圍籬望北斗詩,白雲之歌。聞者悲之。旣出。鬚髮盡白。涉海。乞先就老母。時大夫人年已八十餘矣。見者莫不感歎泣下。而大夫人曰。今日。乃得見吾兒耶。執手笑與語。不一見遠別悲思之色。人賢之曰。有是母。然後有是子。五月。以司諫入謝。因進言曰。禮。悼與耄。雖於其身親犯其惡。不加刑焉。鄭仁弘八十耄荒之年。被極刑死。恐傷聖德。而實且親戚嫁禍。昏耄可哀。又自以平日師事罪人自辭。大妃廢時。弘雖爲事首。當議大臣多不從。知人心不與。爲兩端說曰。君臣母子之名義。出天而不可易。今之爲殿下爭之者。惜此名義也。臣獨未曉。分府分曹分院。有若兩朝廷兩君上者然。使忠實之士。屯兵守之。彼孀居一婦。不過包荒中一箇人而已。議未上。其客聚謀。以禍福動其族類。私易其語。議遂決。當時有竊言者。而弘當誅。且欲自言云。以故公上疏言之。後月。有告廢世子掘地事。合司請法。公以前日骨肉之變。微感上心忤群議。卽去。大司憲吳允謙引避曰。臣前日之啓。幾誤殿下。臣若執迷。臣鄭蘊之罪人云。其六月。爲南原都護府使。冬。特加通政。入爲吏曹參議。明年正月。李适叛入京城。上出幸公州二月。李适敗死。車駕還京。賞扈從諸臣。公陞嘉善。拜刑曹參判。於是追贈三世爵位。以親老乞歸。冬。爲大司諫。時有上變者。諸囚或引仁城君。亦知其謀。於是三司請法。公執全恩之論。旣不合。因啓曰。不問義理之當否。形跡之虛實。一以獄詞而已。告變殆無虛歲。仁城雖除。豈無仁城。噫。先王之子盡之矣。廢朝雖昏亂。不殺骨肉。不廢母后。雖以殿下之盛德。不能一朝居此位也。三司之請。適足爲奸人藉口之資耳。非宗社長遠之計也。<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