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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사집 제45권 / 비(碑)
중봉 조헌선생 김포 고택비(重峯趙憲先生金浦古宅碑) - 이정구(李廷龜)
[생졸년] 1544년(중종 39) - 1592년(선조 25) 전사 / 향년 48세
[문과] 선조(宣祖) 즉위년(156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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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1592) 8월, 금산(錦山)의 전투에서 중봉 조공 부자(父子)와 7백 명의 의사(義士)가 같은 날 죽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선왕(先王)이 크게 슬퍼하여 공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하는 한편 그 어머니에게 늠료(廩料)를 내리고 그 아들 완도(完堵)에게 벼슬을 내렸다.
금상(今上)이 무군(撫軍)하여 남행할 때 공의 아들을 불러서 보고 종관(從官)을 보내 공의 영전에 치제(致祭)하였으며 공의 집에 부역을 면제하고 조세를 감면하였다. 또 갑진년(1604, 선조 37)에는 선왕이 사제(賜祭)하고 지금의 벼슬로 증직하였다. 그리고 금상이 즉위한 이듬해 서원과 사당을 짓도록 하여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사액(賜額)하고 봄가을로 사당에 제사하게 하였다.
처음 공이 전사했을 때 휘하의 군사가 7백 의사의 유골을 수습하여 그 자리에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그 곁에 돌을 세워 ‘일군순의비(一軍殉義碑)’라 하였다. 이윽고 또 유생들이 뜻을 모아 김포에 있는 공의 고택의 빈터에 돌을 세우기로 하고 공의 평생의 언행 및 거의(擧義)의 사적을 모아 나에게 “그대가 글을 써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부탁과 거절이 서너 차례 오갔으나 갈수록 부탁이 완강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휘는 헌(憲), 자는 여식(汝式)이고 관향은 배천(白川)이다. 상세(上世)에 휘 문주(文胄)는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였다. 그 후대에 와서 휘 천주(天柱)는 홍건적(紅巾賊)의 난리 때 원수(元帥)로서 전사하였다. 부친 응지(應祉)는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이며, 차순달(車順達)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가정(嘉靖) 갑진년(1544, 중종 39)에 공을 낳았다.
공은 정묘년(1567, 명종 22)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 정자(校書正字)에 임명되었다. 당시 임금이 불사(佛寺)에 향을 하사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입으로는 성인의 경전을 읽으면서 손으로 불사에 보낼 향을 봉(封)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입니다.” 하였다. 이 일 때문에 공은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때부터 강직하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호조(戶曹). 예조(禮曹). 공조(工曹)의 좌랑(佐郞), 보은 현감(報恩縣監),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역임하였다. 통진 현감으로 있을 때 공이 내노(內奴)를 장살(杖殺)하였다. 이에 그 지방에서 호족(豪族)으로 횡포를 부리던 자가 남형(濫刑)한다는 말로 공을 무함하여 부평(富平)에 장배(杖配)되었다.
보은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상소하여 연산조(燕山朝)에 만든 공안(貢案)을 혁파하고 노산군(魯山君)의 후손을 세우고 육신(六臣)을 정표(旌表)하고 왕자의 제택(第宅)을 금제(禁制)할 것을 청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 19)에 우계(牛溪) 선생, 율곡(栗谷) 선생, 박사암(朴思菴), 정송강(鄭松江) 등 제공(諸公)을 신구(伸救)하는 소장을 올렸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았다. 이에 공은 재차 소장을 올려 조신(朝臣)들이 붕당을 짓는 폐단을 더욱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정해년(1587)에는 또 만언소(萬言疏)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한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凶悖)함을 논척(論斥)하고 그를 예(羿)ㆍ착(浞)에 비겼는데 관찰사가 막아 소장을 조정에 올리지 않았다. 당시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사신을 보내 우리의 정황을 염탐하였는데 공이 도보로 상경하여 전에 올리지 못했던 만인소와 함께 소장을 올려 ‘수길은 그 임금을 시해한 자이니, 그 사신을 내쳐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는 도끼를 가지고 복궐(伏闕)하며 상소하여 ‘재신(宰臣)이 나라를 그르친다’고 극언(極言)하였다가 삼사(三司)의 논핵(論劾)을 받고 길주(吉州)로 귀양 갔다. 그해 겨울에 정여립의 역모가 발발하자 선견지명이 있다 하여 공을 석방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은 적소(謫所)에서 조정이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하여 불가하다는 것을 극언하였다.
신묘년(1591)에 왜적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자 공은 또 상소하여 ‘풍신수길은 반드시 약속을 어기고 난리를 일으킬 것이니, 사신으로 온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를 참수한 다음 그 사실을 중국에 상주(上奏)하고 병력을 가다듬어 대비할 것’을 진달하였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았다. 이에 공은 궐문(闕門)의 주춧돌에 머리를 찧어 얼굴에 피가 낭자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이 광경을 구경하였다.
혹자가 ‘스스로 고생을 자초한다.’라고 기롱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년에 산골짜기로 피난갔을 때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공은 또 조정을 떠난다는 내용의 소장을 올리는 한편 자신이 지은 주문(奏文)과 함께 유구(琉球)와 대마도(對馬島) 등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바치고 통곡하며 도성의 문을 나왔다.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공은 즉시 문도(門徒)들과 더불어 서쪽으로 행재(行在)에 가고자 하였으나 전란으로 길이 막혀 결국 가지는 못하였다. 이에 순찰사(巡察使)를 보고 적을 토벌할 것을 강력히 청하고 격문(檄文)을 지어 팔도에 두루 돌렸는데 그 내용이 격렬(激烈)하여 의사(義士)들이 모여들어 1600여 명이 되었다.
공은 이에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더불어 곧바로 청주(淸州)를 공격하여 눈물을 뿌리며 혈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적은 크게 참패하여 시체를 불태우고 밤중에 도주하였다. 이에 호좌(湖左) 각 둔영(屯營)의 적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모두 숨었다. 이에 공은 일로(一路)에 두루 격문을 돌리고 군사를 정비하여 북행(北行), 군사를 온양(溫陽)에 주둔시켰다.
금산(錦山)에 주둔하던 왜적이 장차 양호(兩湖)를 침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순찰사가 그 급박한 사정을 공에게 알리고 함께 일하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군좌(軍佐)들은 말하기를, “적이 우리 강토를 짓밟지 않은 곳이 없고 오직 호서와 호남, 한 조각의 땅만 남았으니, 이마저 잃는다면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금성을 토벌하여 적의 배후를 끊은 다음 근왕(勤王)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공은 공주(公州)로 돌아갔다. 순찰사는 공과 의논이 맞지 않자 방해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공의 휘하에 군사들이 차츰 흩어지고 단지 7백 의사(七百義士)만 남아 공을 따르고자 하였다. 공은 강개(慷慨)한 심정으로 군사를 옮겨 금산으로 갔다. 예전에 호남순찰사(湖南巡察使) 권율(權慄)과 18일에 함께 군사를 출동하자는 약속을 하였다.
그 뒤 권율이 출동 시기를 바꾼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공은 미처 알지 못하고 이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전령(傳令)을 발동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적의 예봉이 매우 날카롭고 무리가 많으니, 군사를 주둔시켜 두면서 적의 형세를 살펴야 할 것이요 가벼이 대적(大敵)과 접전해서는 안 된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감히 형세의 좋고 나쁨을 말한단 말인가?” 하였다.
적은 공의 군사는 원조할 다른 군사가 없다는 것을 염탐하여 알고 채 방비가 안 된 틈을 타서 역공(逆攻), 들판을 에워싸며 진(陣)을 치고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번갈아 병력을 내보내 쳐들어왔다. 공은 명령을 내리기를 “사생과 진퇴에 있어 의(義) 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오직 명령을 따라 종일토록 힘써 싸웠다.
적은 세 번 패배하여 거의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군도 이미 화살이 떨어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침 해도 저물어 양군(兩軍)의 모습이 서로 보이지 않았다. 이에 관리와 군사들은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었으나 공은 의기(意氣)가 태연자약하고 더욱 다그쳐 독전(督戰)하였다.
적이 정예를 다 동원하여 공격해 오자 장하(帳下)의 군사들이 공의 옷소매를 당기며 도망할 것을 권하였다. 공은 웃으며 말안장을 풀어놓고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순절(殉節)할 곳이다. 남아는 죽을 뿐이니, 구차히 살 수는 없다.” 하고, 북채를 잡고 북을 치니 군사들이 다투어 직진(直進)하고 한 사람도 발꿈치를 돌리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단병(短兵)으로 접전하고 공권(空拳)으로 육박전을 벌였으나 역시 한 사람도 헛되이 죽은 이가 없었으며, 비록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군(全軍)이 모두 전사했으나 적의 사상자는 더욱 많았다. 그리하여 적은 기세가 크게 꺾여 남은 군사를 수습하고 시체를 운반하였는데 곡성(哭聲)이 들판을 진동하였다. 드디어 적은 무주(茂朱)에 주둔한 적과 함께 모두 도주하였고, 그 덕분에 호서와 호남이 온전할 수 있었다.
그 이튿날 공의 아우 범(範)이 공의 시신을 찾은즉 공은 대장기(大將旗) 아래에 죽어 있었으며, 장사들이 공을 둘러싼 채 죽어 시신들이 서로 베고 누워 있었다. 범이 공의 시신을 등에 업고 옥천(沃川)에 돌아와 초빈(草殯)하였는데 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치켜세우고 노기를 띤 기색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옥천의 안읍현(安邑縣)에 안장하니, 공의 부인과 같은 묘역(墓域)이다.
공의 아들 완기(完基)는 자품이 준위(俊偉)하였는데 패전하자 짐짓 관복(冠服)을 바꾸어 입어 공을 대신해 죽으려 하였다. 그래서 적이 대장인 줄 알고 그 시신을 돌로 짓이겼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겨우 강보(襁褓)를 벗어나자 이미 어버이를 섬기는 예(禮)를 알았고 부모에게 서신을 쓸 때는 반드시 세수하고 의관을 갖추었다. 매일 밤마다 반드시 《대학(大學)》 및 〈이소경(離騷經)〉, 〈출사표(出師表)〉를 외웠고 비가(悲歌)를 부르며 강개(慷慨)하여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짓고 때로는 논밭 사이에서 소를 먹였으나 역시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날마다 땔나무를 해 와서 어버이의 방에 군불을 때며 그 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 길주(吉州)로 귀양 갈 때 공은 어명을 들은 즉시 출발하였다.
금오(金吾)의 나졸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제가 올 때 동반(同班)께서 말씀하시기를 ‘조모(趙某)는 어진 분이니 반드시 지체하지 않고 길을 떠날 것이다. 너는 반드시 저녁에 그 집에 도착하여 밤에 행장(行裝)을 꾸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물녘이 되어서야 도착한 것입니다.” 하였으나 공은 “군명(君命)은 지체할 수 없다.” 하고 도보로 밤에 출발하였다.
공이 일찍이 대둔산(大屯山)의 절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람들과 식사하다가 한방에 있던 네 승려에게 음식을 미루어 주면서 말하기를, “내년에 변란이 있을 때 나는 반드시 위난(危難)에 달려갈 것이니, 오늘 이 밥을 함께 먹은 사람은 그때 와서 함께 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승려들이 괴이쩍게 여겼으나 겉으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하였다. 그 후에 그중 세 승려는 모두 공과 함께 전사했고 한 승려는 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 살아남아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얘기를 하였다 한다. 신각(申恪)이 연안(延安) 수령으로 있을 때 공이 그에게 서찰을 보내어 말하기를, “내년에는 반드시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이오. 연안은 삼국 시대 때 성을 수비하여 적을 이겼던 곳이고 공이 무장으로서 이 고을을 지키고 있으니, 속히 참호를 깊이 파고 성가퀴를 높여 사수(死守)할 대비를 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신각은 평소 공을 존중하던 터라 공의 지시대로 수어(守禦)에 대비하였는데 그 후 과연 이공 정암(李公廷馣)이 과연 이 성으로써 적을 격퇴하였다. 임진년(1592) 4월, 동남쪽에서 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공은 놀라 넘어지며 말하기를, “이는 천고(天鼓)이다. 적이 필시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하였다.
기병(起兵)한 뒤에도 공은 어느 날 밤에 천상(天象)을 보고는 북향(北向)하여 절하며 곡(哭)하고, 한참 뒤에 또 하늘을 우러러 말하기를, “나는 화(禍)가 행조(行朝)에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살펴보니 북지(北地)로 들어가신 두 왕자께서 적에게 사로잡혔겠구나.” 하였다. 문인(門人)이 이 말을 기억해 두었는데, 적이 바다를 건너온 시기와 왕자가 적의 포로가 된 시기가 모두 공이 말한 그날이었다.
공은 처음에는 토정(土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뒤에는 우계(牛溪)ㆍ율곡(栗谷)의 문하에 들어가 《주역(周易)》을 강론하고는 곧 사사(師事)하였다. 나는 연배가 뒤라 공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들은 얘기로, 당시의 명류들이 공을 기용하려 하자 율곡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변통할 줄 몰라 당우(唐虞)의 선치(善治)를 단번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이라도 뜻과 맞지 않으면 견거절함(牽裾折檻)하여 반드시 소란에 이르고야 말 것이니, 세상사에 숙련된 뒤에 크게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내가 주제넘은 소견으로 공을 논한 것도 이와 같았다. 유독 토정만은 당세의 인물을 논할 때 반드시 공을 제일로 꼽았다. 대개 율곡은 조몰(早歿)하여 공의 학문의 진전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공은 고집이 너무 세고 조행이 너무 깨끗하여 의로운 일에는 미친 듯이 달려가고 남의 과실(過失)을 보면 더러운 물건을 보듯이 싫어했다. 그리하여 한마디 말이라도 옳지 않으면 비록 공경대신(公卿大臣)이라 할지라도 조정에서 마치 종이나 개를 꾸짖듯 거침없이 질책했다.
어전에서 임금과 간담을 터놓고 시비를 다툴 때에도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고 터럭만큼이라도 남을 용서한 적이 없었으니, 유찬(流竄)되어 곤액을 당하고 세상에 용납되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지 않았다면 어떻게 공의 공렬(功烈)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 높고 통달한 식견은 신명(神明)에 질정해도 틀림이 없었으며 애군애국(愛君愛國)은 지성에서 우러난 것이었으니, 공의 뜻을 당시에 펼칠 수 있었다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큰 업적을 이루리라 상상해 봄 직하다. 그러나 순절한 한 지사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니, 애석하고 애석한 일이다.
아, 그렇지만 가령 공의 언행과 계책으로 당시에 현요(顯要)한 직위에 올랐다 할지라도 지금 사람들이 공의 이름을 듣고 충분(忠憤)으로 머리털이 곤두서며 공의 글과 유사(遺事)를 읽고 충담(忠膽)이 들끓어, 그 찬연히 빛나는 정신이 만고토록 죽지 않는 것에 비교해 본다면 어떠한가. 끝내 저것으로 이것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열렬한 조공이여 / 烈烈趙公
그 자품이 우뚝했도다 / 稟挺特兮
가꾸고 심은 공부가 깊고 튼튼하니 / 培深植固
그 행보가 남달랐도다 / 行也獨兮
자신의 내면 진실을 믿고 / 自信其中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았도다 / 不求知兮
반드시 뭇사람들과 배치될 터이니 / 必背群馳
하물며 남들의 뒤를 따르리오 / 矧敢隨兮
넘어질수록 더욱 뜻이 견고하니 / 愈躓愈堅
곤경한 중에서 형통하였도다 / 困而亨兮
누차 급한 소리로 일깨우니 / 屢疾其呼
사람들은 그저 듣고 놀랄 뿐 / 衆聽驚兮
공의 앞을 보는 선견지명은 / 先知逆見
촛불로 비추어 보듯 환했건만 / 若燭照兮
누가 그 말을 믿어 주리오 / 孰信其然
떠들썩하게 비웃을 뿐이었지 / 譁而笑兮
본성대로 행동하는 것은 / 以性而行
천성에서 얻어진 것이었네 / 得之天兮
위태한 상황에서 놀라지 않고 / 不駭危機
정신은 더욱 태연하였어라 / 神益全兮
혁혁히 높은 벼슬자리를 / 衣車赫赫
헌신짝처럼 버렸도다 / 視弊屣兮
머리를 부숴도 후회하지 않거늘 / 首碎不悔
하물며 남의 비방 아랑곳하랴 / 遑恤毁兮
매우 어려운 시국을 만나니 / 逢時孔艱
공은 죽을 곳을 얻은 것이었네 / 得死所兮
장검을 비껴들고 한 번 소리쳐 / 仗劍一呼
드디어 의병을 일으켰어라 / 從義旅兮
누가 공의 충성을 막으리오 / 疇遏公誠
온통 혈성으로 뭉쳐진 것을 / 一團血兮
의를 모아서 병기로 삼으니 / 集義爲兵
아무리 써도 이지러지지 않았네 / 用不缺兮
마치 우레처럼 적에게 달려가니 / 奔敵如雷
아무도 공을 막을 자 없었어라 / 莫我嬰兮
그 용기 헛되이 죽지 않았으니 / 勇不徒死
죽었어도 외려 산 것과 같아라 / 死猶生兮
칠백 명 의사의 시신이 / 七百義骨
공의 시신을 둘러싸고 있었지 / 環公屍兮
그 기운이 맺혀 무지개 되어 / 氣結爲虹
저 하늘에 높이 뻗쳤으리니 / 亘天維兮
그 밝기는 해와 같으며 / 有炳如日
그 높기는 산악과 같아서 / 峙如岳兮
천추에 길이 변치 않고 / 不涅千秋
우매한 자의 본보기가 되리 / 昧者式兮
아 공의 우뚝한 공렬이야 / 嗟公之烈
어찌 비석을 기다려 드러나랴만 / 何待碑兮
고택의 유허에 비석을 세운 것은 / 石于墟者
공을 사모하는 선비들의 뜻이라네 / 多士思兮
[註解]
[주01] 무군(撫軍) : 나라에 전쟁(戰爭)이 있을 때에, 임금이 밖으로 나가고 세자가 안에서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이라 하고 세자가 전쟁
에 나가는 것을 무군(撫軍)이라 한다.
[주02] 예(羿)ㆍ착(浞) : 예(羿)가 하(夏)나라 왕 태강(太康)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어 유궁씨(有窮氏)라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그
재상인 한착(寒浞)이 또 예를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書經 五子之歌》 《春秋左氏傳 襄公4年》
[주03] 견거절함(牽裾折檻) : 견거(牽裾)는 임금의 옷소매를 당기는 것으로 삼국 시대 위 문제(魏文帝) 때 신비(辛毗)의 고사이다. 문제가
기주(冀州)의 사가(士家) 10만 호를 하남(河南)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당시 황충〔蝗〕의 피해로 흉년이 들었던 터라 신하들이 불가
하다고 말렸으나 문제는 듣지 않고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자 신비가 문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절반만 옮기게 하였다. 《三國志 魏書 卷25 辛毗列傳》 절함(折檻)은
어탑(御榻)의 난간을 부러뜨리는 것으로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괴리령(槐里令)으로 있던 주운(朱雲)의 고사이다. 주운이 성제
에게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을 주면 간신 한 사람을 참수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겠다.’라고 하였다.
성제가 ‘누구냐?’라고 묻자 바로 성제의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라 하였다. 이에 성제가 크게 노하였으나 주운은 굽히지 않고 직
간하며 어전(御殿)의 난간을 잡아당겨 부러뜨렸다. 성제가 뒤에 주운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난간을 그대로 두어 직간(直諫)하는 신
하의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 《漢書 卷67 朱雲傳》 <끝>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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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重峯趙公金浦故宅碑
壬辰八月錦山之戰。重峯趙公父子與七百義士同日死。事聞。先王震悼。贈公吏曹參判。又命廩其母官其子完堵。今上之撫軍南行也。召見公之子。遣從官致祭。復役減租。又甲辰。先王賜祭加贈今官。逮今上卽位之明年。聽建書院祠。賜額曰表忠。俾春秋祭于祠。始公之歿。麾下士收七百義骨。卽其地作一塚。豎石其側。名之曰一軍殉義碑。旣又諸生以金浦公故宅。相與謀石樹于墟。遂撮公平生言行及擧義事跡。屬不佞曰。子其文。凡往返三四。請益堅。則謹按。公諱憲。字汝式。白川人。上世有諱文胄。麗朝兵部尙書。至諱天柱。紅巾之亂。以元帥戰死。考應祉。贈吏曹判書。娶車順達女。生公於嘉靖甲辰。中丁卯文科。補校書正字。時降香佛寺。公上疏言。口讀聖經。手封佛香。所不忍也。坐削官。自是直聲籍甚。歷戶,禮,工佐郞,通津,報恩縣監全羅都事。在通津。杖殺內奴。豪橫者誣公以濫刑。杖配富平。在報恩。上疏請革燕山朝貢案。立魯山後。旌表六臣。禁制王子第宅。丙戌。上疏伸救牛溪,栗谷先生及朴思菴,鄭松江諸公。寢不下。再疏益論朝臣朋比。丁亥。又上萬言疏。仍論鄭汝立兇悖。比之羿,浞。觀察使格之不以聞。時秀吉遣使來覘。公徒步上京。幷前未達疏以進。言秀吉弑君。宜斥其使。己丑。持斧伏闕上疏。極論宰臣誤國。三司論竄吉州。冬。鄭逆謀發。以公有先見。命放公。公在謫。聞朝廷遣使日本。上疏極言其不可。辛卯。賊使至。公又疏陳秀吉必背約構亂。請斬玄蘇,義智首。上奏天朝。嚴兵以待。不報。仍叩首石礎血被面。觀者如堵。或譏其自苦。公曰。明年竄山谷。必思吾言。又以一疏辭朝。竝進自草奏文及諭琉球,對馬島等書。痛哭出都門。及壬辰聞難。卽與門徒。欲西赴行在。道梗不果行。見巡察使。力請討賊。草檄傳告八道。辭旨激烈。義士坌集。得千有六百餘人。乃與僧將靈圭。直擣淸州。洒泣血戰。賊大衂焚屍宵熸。湖左諸屯賊。望風皆遁。遂飛文一路。整軍北行。師次溫陽。錦山之賊。將侵軼兩湖。巡察使告急於公。要與共事。諸軍佐亦言賊無所不躪。而獨餘湖西南一片土。失此則無國也。宜先討錦賊。以絶其後。而勤王未晩也。公乃還公州。巡察使議不合。事多沮撓。麾下稍稍散去。只七百義士願從之。公慨然移軍向錦山。曾與湖南巡察使權慄。約以十八日齊擧。慄移書改期。而公未及知。是日蓐食傳發。或言賊鋒銳甚且衆。宜按兵相勢。毋輕嘗大敵。公曰。君父何在。敢言利鈍。賊詗知兵無助。乘未備而逆之。箄野而陣。分兵爲三。迭出以肄之。公下令曰。死生進退。毋愧義字。士皆惟命。力戰終日。賊三北幾潰。而我兵已矢盡無可爲。會日且入。兩軍不相見。吏士皆無人色。而公意氣自若。督戰益急。賊悉銳攻之。帳下士挽公請跳。公笑解馬鞍曰。此吾殉節地。男兒死耳。不可苟活。援枹鼓之。士爭直前。無一人旋踵。短兵接空拳搏。亦無一人徒死。雖衆寡不敵。全軍盡歿。而賊死過當。勢大挫。收餘兵運屍。哭聲震野。遂與茂朱屯賊皆遁。湖西南賴全。翌日。公之弟範。尋公屍。則公死於旗下。將士環公死相枕。範負公屍。還殯沃川。張目掀髥。怒色如生。葬于沃之安邑縣。與夫人同塋。公之子完基。姿性俊偉。兵敗故異其冠服。冀代公死。賊認爲將矺其屍。公性至孝。纔免襁褓。已知事親禮。修書父母。必盥濯整衣冠。每夜必誦大學及離騷經,出師表。悲歌慷慨。達朝不寐。家貧躬自耕耘。或牧牛田間。亦未嘗釋卷。日採薪爇親突。映火而讀之。其竄吉州。公聞卽登程。金吾卒止之曰。來時同班敎我云。趙某賢者。必不留。汝必以夕抵家。令夜治行。所以遲暮而至。公曰。君命不可宿。徒步夜發。嘗遊大屯山寺。一日對食。推與房中四僧曰。明年有變。我必赴難。今日共此飯者。可來同事。僧怪之而陽應曰諾。後三僧皆與公同死。而其一病未赴。說人如此云。申恪宰延安。公貽書曰。明年必有倭難。延是三國時城守剋賊地。君以武將守土。宜速浚壕增陴。爲死守計。恪雅重公。卽治守禦具如公指。後李公廷馣果以此城却賊。壬辰四月。聞東南有聲如巨雷。公驚仆曰。此天鼓也。賊必渡海矣。及起兵。嘗夜觀天象。北向拜哭良久。又仰天而曰。吾以爲禍及行朝。更察之。二王子入北者。其獲於賊乎。門人識之。賊渡海。王子被虜。皆其日也。公始遊土亭門。晩從牛溪,栗谷。講論周易。便師事之。不佞年輩後。未覩公面。嘗聞一時名流欲用公。栗谷先生曰。此人不知變通。以爲唐虞之治。可以猝復。一事不合。牽裾折檻。必至騷擾。俟其練達可大用。不佞之妄論公亦如此已。獨土亭論當世人物。必以公爲第一。蓋栗谷早歿。未及見公學進也。獨其執太固守太潔。奔義如狂。見人過若浼。一言不是。則雖公卿大臣。廷叱之如奴狗。立玉陛前。與人主抉腎腸爭是非。不得則不已。未嘗以毫髮恕人。宜其流竄困厄。不容於世也。然不如是。焉能成就此哉。況其高見達識。可質神明。愛君憂國。出於至誠。使公之志得展於當時。則經濟事業。亦可想見。而終於伏節一士而止。惜矣惜矣。嗚呼。雖使公言行計用。顯寵一時。視如今聞公名而髮立。讀公文與遺事而膽裂。韡韡精神亘萬古不死者。何如哉。終不以彼易此。銘曰。
烈烈趙公。稟挺特兮。培深植固。行也獨兮。自信其中。不求知兮。必背群馳。矧敢隨兮。愈躓愈堅。困而亨兮。屢疾其呼。衆聽驚兮。先知逆見。若燭照兮。孰信其然。譁而笑兮。以性而行。得之天兮。不駭危機。神益全兮。衣車赫赫。視弊屣兮。首碎不悔。遑恤毀兮。逢時孔艱。得死所兮。仗劍一呼。從義旅兮。疇遏公誠。一團血兮。集義爲兵。用不缺兮。奔敵如雷。莫我嬰兮。勇不徒死。死猶生兮。七百義骨。環公屍兮。氣結爲虹。亘天維兮。有炳如日。峙如岳兮。不涅千秋。昧者式兮。嗟公之烈。何待碑兮。石于墟者。多士思兮。<끝>
月沙先生集卷之四十五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