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4. 10. 11:58
■ 조선의 청백리로부터 치세를 배우다. - 이항복과 이원익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곧고 바른 치세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고 국민을 태평하게 하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고 이치다.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청백리라는 말은 과거 특별히 국가에 의해 선발된 깨끗하고 유능한 관리를 뜻한다.
정확히 말하면 청백리는 작고한 사람들에 대한 호칭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염근리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청백리나 염근리로 선발되면 당사자는 진급이나 보직에 특전을 받았고, 후손들에게도 벼슬을 주는 등 많은 혜택이 있었다.
문치를 바탕으로 관료제가 통치제도의 핵심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모두 217명의 청백리가 배출되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였던 이항복과 이원익을 통해 오늘날, 청백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백사집(白沙集)
▲오리집(梧里集)
▲백사 이항복선생 묘.
▲오리 이원익선생 묘.
●충(忠)과 의(義)에, 강직한 선비의 기개 - 백사 이항복
이항복은 명종11년(1556)에 태어나서 광해군 10년(1618)에 북청의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공로로 오성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오성(鰲城)이라 부르고 있다.
벗인 이덕형(李德馨)과 더불어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항복은 당파에 휩쓸리지 않는 곧은 성품으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대사간 이발(李潑)이 파당을 만들려는 것을 공박하였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玉堂)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정철(鄭澈)의 논죄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면담을 했는데, 이 때문에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이 즉위하며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항복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의 살해 음모를 반대하다가 북인파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또한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배향을 반대한 바 있어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도 이항복이 나서서 겨우 광해군을 설득하여 해결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정인홍 일당의 공격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선조의 장인 김제남 일가의 멸문지환, 선조의 적자였던 영창대군의 살해 등 북인파의 흉계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이항복은 홀연히 나서서 극렬하게 반대하였다.광해군 5년(1613)에는 인재 천거를 잘못하였다는 북인파들의 공격을 피해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1617년에 인목대비의 폐위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이정구(李廷龜)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직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였다.
●40년 재상에 초가 삼간도 없네 -- 오리 이원익
이원익(1547~1634)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나라에 공이 많아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완평부원군의 칭호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직하고 검소했으며, 바른 몸가짐으로 ‘오리정승’이라는 친근한 명칭으로 당대 백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치적이 드높았다. 관서지방에 두 번 부임했는데, 평안도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선조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다시 광해군 초기에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스스로 사직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하자 소장을 올려 대비에게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홍천으로 귀향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내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제일 먼저 그를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고 매우 신임하였다. 이원익이 늙어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사직하고 금천의 집으로 낙향하였는데 그의 집은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지냈다. 주변의 그 누구도 그가 재상인 줄 몰랐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인조는 세자를 보내 조문하게 하고 승지를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승지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집에 가보니 두어 칸의 띠 집이었고, 그나마 비바람을 가릴 수도 없는 낡은 집이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 40년 동안 재상을 하면서 초가삼간도 장만하지 못했단 말이냐?”
인조는 감회어린 심정으로 장례식에 필요한 물품 일체를 하사했다고 한다.이처럼 청렴했던 이원익은 22세에 승문원부정자의 직을 시작으로 평생을 관직에서 보냈다.
누구의 환심을 사거나 세태에 영합하려하지 않았고 묵묵히 맡은 업무들을 물 흐르듯 처리했다.
젊었을 적, 중국에서 온 사신이 이원익의 인품을 바라보고 통역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행동이 단정함과 그 마음 씀씀이가 자상한 것을 볼 때, 틀림없이 소년 재상이 될 것이다”라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훗날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내직인 정언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선조 29년(1596) 49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영의정이 되었다.1628년(인조 6) 이원익은 연풍 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약(守約)에게 서여손수약부연풍현(書與孫守約赴延豊縣)이라는 당부의 글을 써준다.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다스릴 때 유념해야 할 덕목을 정리한 것으로 자신이 지방관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들이다.너의 아버지는 전후 고을을 맡을 때마다 청렴과 간명(簡明)으로 백성을 보호한다고 여러 번 임금에게 알려졌다.
너는 네 아버지의 아들이니, 마땅히 마음에 새겨 자신을 가지고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라.◇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 천하의 실정을 안 다음에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 일에 임했을 때 지나친 분노를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실정을 파악하라.
◇ 사람을 다스림에 상벌이 없을 수가 없으니, 착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 하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하나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
◇ 읍중에 일이 있거든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인민에게 물어서 인정에 합하기를 힘써야 하고, 거만을 부리고 자신이 옳다고 하여 민심을 떠
나게 해서는 안 된다.
◇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지고 은혜를 베풀어야하고, 관속을 대우하는 것도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된다.
◇ 모든 일은 마땅히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 어찌 일일이 지휘할 수가 있겠느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