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초(束草) 설악산(雪嶽山 1,708m)을 가다.
글 쓴 이 都 寅 高 枓 永
9월27일, 2년여 만에 가는 무박(無泊) 산행이다. 이것 저것 챙겨서 이튿날의 조식(朝食)과 중식(中食)까지 함께 담으니 한 가방이다. 어둠을 헤치고 22시에 차에 오르니 앉을 자리가 모자란다. 명산(名山)은 역시 인기가 좋아서... 차내는 낯선 분들이 더 많으시다.(51명)
차창 밖으로는 어둠의 장막으로 덮여 있어 초가을의 정취(情趣)를 볼 수 없음이 아쉬웁고, 차 내는 고요한 침묵(沈黙)으로 이어진다.
얼마를 달렸을까? 홍성(洪城)IC에 이르니 시계는 밤 1시를 가르킨다. 객(客)들은 선잠으로 졸고 있는 사이 기사님(김상문)은 운행(運行)에 열중이시다. 얼마나 고단 하실까? 인간 세상은 저마다 다른 역할로 모여져 이루는 것인가 보다! 마치 달리는 자동차가 2만여 개의 부품으로 조합(組合)되어 있듯이...
44번 국도를 타고 인제(麟蹄), 원통(元通)을 지나 한계령(寒溪嶺)을 힘겹게 오르니... 차도 힘에 겨운지 엔진 소리가 요란하다.
오색(五色)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구~불 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이다. 오색리(五色里)에 이르니 시계는 28일 2시40분에 이르고, 각처(各處)에서 무박산행(無泊山行)을 온 차들이 여러대 서 있다.
경기 부산 광주 대전 등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대고, 한 밤중임에도 불야성(不夜城)이다. 장시간 여행으로 굳어진 몸을 달밤에 체조로 간단히 풀고, 모처럼 만에 하늘에 총총한 별님을 보며... 어둠속의 山을 오른다.
오르는 사람마다 손전등이나 헤드램프(머리부착등)를 비추며 오르니... 울긋~ 불긋~ 아롱~ 다롱~ 찬란하여, 잊혀진 반딧불이 새로 살아 온 것 같으다. ‘21세기 반딧불’이라 이름 지으면 어떨까 싶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벗님들끼리, 동문들끼리, 이웃끼리 끝없이 이어져... 걷는게 아니라 밀려 오르는 기분이 든다.
경사도 심하고 어둠속이라 등산이 쉽지는 않으나, 등산로 보수나 철계단이 워낙 잘 시설되어 걷기에는 불편함이 없다.
아울러 철계단이나 나무계단 바닥에는 폐타이어를 잘게 썰어 그물처럼 깔아 놓아, 겨울철 빙설기(氷雪期) 등반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많은 시설 투자를 해 놓고도 국립공원 입장을 무료(無料)로 결정한 당국(當國)의 정책(政策)이 참으로 고맙고도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오르며 쉬고 쉬어가며 오르니 시계는 어느덧 4시를 조금 지나있다. 어둠속에서도 적당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가져온 포도나 과일들을 나누어 드신다. 김장길님은 준비해 온 포도를 골고루 권하시기에 몇알을 집어 입에 넣으니 퍅퍅하던 입안에 침이 돌고 온몸에 기운이 솟는다.
어둠속을 걸어 오르는 등산객들은 줄을 이어 오르니, 남산님들을 알아볼 수 없어 남산! 남산! 구호로서 회원님들을 불러 쉬어 가도록 전달한다.
6시가 다 되어 8부 능선쯤에 이르니 주위는 차츰 차츰 어둠이 걷히고 동쪽 하늘에 여명(黎明)이 밝아오니... 일출(日出)은 구름속에 가리워져 붉은 오름만 보일뿐, 찬란한 광명(光明)을 볼 수 없으니...
언뜻 언뜻 동해에 광풍(狂風)이 일었는가!
잠시 잠시 내미는 광명한 모습을 보니...
찌든 도시의 일출 보다는 밝고도 찬란하도다!
해 오름에 붉게 물든 운무(雲霧)를 보노라면
어둠을 헤치고 밤새 오른 보상의 선물이로다!
정상이 가까워 질수록 경사는 완만하여 오르기는 한결 수월하고, 모진 풍우(風雨)에 시달렸슴인지 초목(草木)들이 나지막 나지막 하다.
등산로는 정상까지 잘 다듬어져 있으며 정상부근에는 나무들은 거의 없고 이름모를 잡초들로 무성하여, 띄엄 뛰엄 보이는 주목(朱木)이나 철쭉계통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스스로 생명을 보전키 위해 환경에 적응 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정상 아래 동쪽 풀밭에는 일출(日出)을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인지 여러명이 보이는데... 하나 같이 105mm 포문같은 렌즈를 달고 기다리는 폼이 그럴 듯 합니다. 덩달아 한 틈에 끼여서 일출 담는 폼을 재고 싶지만, 갈길이 멀고 일출이 흡족치 못해 서둘러 정상으로 향합니다.
얼마 만에 밟는 정상인가! ‘대청봉(1,708m)’의 정상표석(頂上標石)은 예나 지금이나 여여(如如)합니다.
정상은 평평하고도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쉴 수 있으며, 모진 풍우(風雨)에 시달렸슴인지 초목(草木)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답산객(踏山客)들에게 밟히고 닳은 돌덩이 들만 반질 반질한 모습으로 즐비(櫛比)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표석(頂上標石)에 기대고 매달려 기념촬영을 하느라 순서도, 질서도, 양보도 없다.
먼저 도착한 최대장 홍총무 윤진석 최영수 이은종 천여순 등 남산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니, 우리 님들보다 객(客)이 더 많다.
정상의 날씨는 벌써 겨울 날씨다. 어제는 얼음이 얼었다드니... 후미에 오르는 남산님들을 기다리는 시간에 잠시 천하(天下)를 조망(眺望) 합니다.
설악산(雪嶽山 1,708m)은 백두대간(白頭大幹)상의 중간 기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제(麟蹄), 양양(襄陽), 고성(高城), 속초(束草)에 걸쳐 3개군 1개시에 인접(隣接)해 있는 명산(名山)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설악이 아니라 벼락이요, 구경이 아니라 고경(苦境)이요, 봉정(鳳頂)이 아니라 난정(難頂)”이라 하여 그 아름다움을 역설적(逆說的)으로 표현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는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夏至)에 이르러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한다” 하였으며, 또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이라 이름짓게 되었다” 고 한다.
명산은 이름도 다양하여 설산(雪山),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花山) 등으로 불리워 지며, 그 품 또한 넉넉 하여 사방(四方)에 이름난 고찰(古刹)들이 자리하여 사바세계 중생들의 전법도량(傳法道場)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으니...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신라 헌덕왕 13년(821)에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창건한 진전사(현,폐사지)터가 있으며, 그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은 서당지장(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불교(敎宗佛敎)가 절대적이었던 신라에 선종(禪宗)을 소개한 인물이다.
또한 도의선사의 사상은 염거화상에게 전해지고, 다시 보조선사(804~880)에 이어져 맥을 잇게되며, 도의선사는 현 조계종 종조(宗祖)로 모셔져 있는 분이다.
그 외에도 양양군 서면 황리에 가면 선림원터(禪林院址)가 있는데... 이는 802년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順應法師)가 804년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강현면 전진리에는 약 1,300여 년전에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낙산사(洛山寺)가 있어 관음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설악동 입구에는 자장율사가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신흥사(新興寺)가 있고, 경내는 동양 최대의 청동불좌상(靑銅佛坐像)이 최근에 모셔져 있으며, 6.25사변 당시에 아군(我軍)에 의해 불태워지다 남은 경판(經板)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이 경판은 은중경(恩重經), 법화경(法華經), 다라니경 등이 새겨져 한자, 한글,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의 세 언어로 된것들이어서 문화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이라 한다.
아울러 한계령(寒溪嶺)에서 대청봉으로, 다시 공룡능선을 지나 마등령, 황철봉,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능선을 따라 내설악 쪽으로 흐르는 물은 한계천, 수렴동계곡, 백담계곡 등 수많은 계곡의 물들이 모여 북한강(北漢江)의 원류가 되고 있으며, 팔당댐 부근에서 남한강(南漢江)과 합류(合流)되어 1,200만 서울시민들의 생활용수가 돼고 있슴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想念)을 뒤로하고 잠시 옷깃을 여미니, 한기(寒氣)가 심하게 느껴져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중청봉의 대피소로 내려간다.
선착(先着)한 회원님들과 한자리에 모여 1,500여 고지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조식(朝食)을 하니 추위로 손이 시려 젓가락질이 쉽지 않다.
식후에 잠시 우측 능선을 바라보니, 2년 전에 등산했던 공룡능선이 바로 눈앞에 있어 손에 닿을 듯 하고, 그 우측으로 화채봉, 권금성(權金城), 저만큼 뒤쪽으로는 거대한 울산바위군(群)이 한눈에 들어와서 마치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함께하신 모든님들이 감탄을 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회원중 한분이 “금강산과 어느것이 더 낫슴니까?” 필자왈, 조물주께서 금강산을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설악산을 만들었다 캉~이~ 금강산이 쪼~맹~이 더 안 낫겠슴니꺼? 최대장이 옆에서 “먼저 맨들은 것 보다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서 만들면, 뒤에 맨든기 더 안 좋겠슴니꺼?라고 캉~이~ 모두가 폭소(爆笑)에 폭소를 자아낸다.
그럭 저럭 후미(後尾)에서 오신 분들과 합류하여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가니, 소청봉(小靑峰)주위로는 대피소가 2년전 보다 많이도 늘어났다. 가는 곳 마다 와~글 와~글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이제 추위도 한결 누그러 져서 설악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는데. 벌써 단풍(丹楓)이 제법들어 성급한 놈들은 선홍색으로 물들어 있고, 뒤이어 노락 노락 황엽(黃葉)으로 물들어 내려오고 있으니, 올 가을 단풍은 설악에서 맞이 합니다.
봉정암으로 내려 가는길은 경사가 심하고, 바닥에는 험한 돌들이 많아 진행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20여 분을 걸어 내려 오니 이제는 더위가 느껴져 다시 외투를 벗어드니 한결 시원하고, 저만큼 암자(庵子) 주위의 바위들이 기이(奇異)한 모습으로 다가 온다.
모두가 탄성(歎聲)을 지르며...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자리한 경치가 범상치 않음에 또 한번 놀라신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암괴석(奇巖怪石)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경내(境內)로 들어서니... 많은 불사(佛事)가 있었음을 알겠슴니다. 이 깊은 山中에 건축비용이 세속(世俗)보다 10배는 더 덜텐데... 인간의 정성(精誠)이 가히 하늘에 닿아 있슴니다.
곧 바로 서편(우백호)의 돌 계단을 올라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모셔진 5층석탑(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제31호)에 이르니, 햇볕도 따스하고 바람기도 없이 고요하다.
예(禮)를 드리고 물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백호(白虎) 끝자락에 암반(巖盤)이 단단하게 뭉쳐진 곳에 5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수맥봉으로 재어보니 수맥(水脈)이 없다.
봉정암(鳳頂庵)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갔다 돌아오면서 가져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우리나라 5대적멸보궁(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의 하나이다.
주산(主山)은 대청봉에서 흘러 내려 온 지맥이 단단한 암반으로 뭉쳐져 골기(骨氣)가 대단하고, 청룡(靑龍)이 안산(案山)까지 겸하여 감싸 안아 있으며, 백호는 짧고 약하여 비보탑(裨補塔)과 비보림(裨補林)을 조성 하였으니 천하에 길지(吉地)로다!
또한 암자가 위치한 고도(高度)는 1,250m라 하며, 금강경(金剛經)에 “부처님의 제자가 1,250명이라” 고 기록되어 있어 자장(慈藏)스님의 혜안(慧眼)이 어떠 한가를 짐작할 수 있슴니다.
2,500여 년전에 불법(佛法)이 동방으로 건너와 다시 1,300여 년전에 이 곳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奉安) 한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없다 하리요! 아~ 아~ 천년의 도량이 다시 만년을 가 오리다.
탐승(探勝)을 마치고 나려오니 뒤 이어서 디카맨 황부회장님이 오르며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으시다. 그 뒤로 금와보살님이 힘겹게 오르고, 함께 오신 언니와 형부, 친구분도 뒤 이어 오르신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김진여심 보살님도 108배를 하고 나왔다면서 뒤 늦게 5층석탑 계단을 오른다.
축대 난간에 기대어 여러 회원님들과 여담(旅談)으로 얼마를 쉬었다가,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수렴동계곡(水簾洞溪谷)으로 내려 갑니다.
내설악 쪽으로는 여러 계곡들이 있어 한계천, 곡담계곡, 흑선동계곡, 창암계곡, 십이선녀탕계곡 등 끝없이 많지만 그 中 에서도 수렴동계곡이 가장 뛰어난 경치라고들 하는데...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외다!
한 시간여를 걸었을까? 쌍룡폭포(雙龍瀑布) 부근에 이르러서는 천하의 절경이다. 볼그스럼하게 물들어 내려 오는 초가을의 단풍이, 새악시 볼처럼 살포시 홍조(紅潮)로 번져 내리고, 광명한 날씨 까지 금빛 찬란하게 비추시니...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여기가 설악산의 진면목을 다 볼 수 있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로다!
가을 가뭄에 폭포의 물 줄기는 가늘어서 수렴동(水簾洞:물이많은 골짜기)의 이름에 걸 맞지 않아 한가닥 아쉬움이 있을 뿐인져...!
연이어서 용아폭포, 용손폭포, 만수폭포, 백운동에 백운폭포, 작은귀때기골의 숨은폭포, 황장폭포, 구용소, 영산담(靈山潭) 등 아휴! 숨차다! 백개의 용담(龍潭)이 있다드니, 진실로 참말인가 봅니다!
옛말에 물좋고, 정자좋고, 반석좋은 곳 이라드니... 바로 여기가 아니던가! 봉황(鳳凰)이 어찌 오동나무를 비켜 가리요! 널찍한 바위에 모두들 둘러 앉아 가져 온 점심과 과일들을 나눠 드시니... 신선(神仙)이 따로 없다. 선남선녀(仙男仙女)들이 모여 허튼소리, 알소리 다 해가며 원족(遠足)을 즐기는데...
물은 수정(水晶)같이 맑고, 반석(盤石)은 넓고 평평하여 1,000여 명은 너끈히 앉겠도다!
흐르는 물소리에 선남(仙男)의 귀가 먹고
아름다운 풍광에 선녀(仙女)가 눈이 멀구나
아~아~ 산천초목은 마음에서 아름다워라!
얼마를 더 걸었을까? 여러 사람들이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여 스프레이 파스로 간단한 응급처치를 해 드리니 한결 좋으시단다.
영시암(永矢庵)을 지나 백담사에 이르니 15시를 가르킨다. 장장 12시간여를 걸어서 행군 했으니 모든님들이여! 장하십니다.
백담사 경내는 예나 지금이나 여여(如如)하여서, 옛 다리를 건너 천왕문(天王門)을 지나니 “백담사(百潭寺)”라는 현판(懸板)이 보이고, 제일 안쪽에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진좌(鎭坐)하고 있다.
동재(東齋)의 빈방에는 근세(1987년)에 전두환 전대통령이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하였던 거소(居所)라 쓰여 있고, 그 외에도 만해기념관, 교육관, 다실(茶室), 선방(禪房), 범종각(梵鐘閣) 등이 즐비하여 도량의 규모가 많이도 확장되어 있다.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1년(647)에 자장율사가 장수대 부근에 처음 세운 한계사라는 절이었는데, 그 이후로 일곱차례나 대 화재를 만났으며, 그 때 마다 절터를 옮기면서 비금사, 운흥사, 선구사, 영축사 등으로 바뀌었고, 백담사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은 1783년 이었다고 적혀 있다.
전하는 얘기로는 백담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데는, 주지의 꿈에 한 도승이 나타나서 “대청봉으로부터 절까지 웅덩이가 몇 개 있는지 세어보라” 해서 이튿날 세어보니 꼭 100개 였다. 그래서 담(潭)자를 넣어 “백담사(百潭寺)”라 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부속 암자로는 오세암(五歲庵), 영시암(永矢庵), 봉정암(鳳頂庵)이 있으며, 이름난 도량에는 거쳐간 스님들도 많아서...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세조1년(1455)에 오세암의 전신인 관음암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 하였고, 조선 명종(明宗)임금때는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1565)스님이 수도 하였으며, 근세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수도 했던 곳이다.
특히 만해 스님은 젊은 나이에 1894년 동학난의 쓰디쓴 패배를 맛보고, 27세에 오세암으로 탈속의 발길을 옮겨 득도식(得道式)을 하였다.
그는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민족대표 33인中의 한사람으로 '백용성 스님'과 함께 유일한 승려로 참가한 분이며,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죽음을 무릅쓴 각오로 3.1만세 운동을 주도 하였고, 또한 일제 밑에서는 교육을 시킬 수 없다 하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출생신고도 하지 않을 정도로 투철한 항일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제치하에서 곡필(曲筆)하지 않고 당당히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 하였으며, [불교유신론]도 집필하여 “산간에서 길거리로”의 불교대중화론을 폈으니... 잠시 “님의 침묵(沈黙)”을 몇구절 옮겨 봅니다.
님은 갔슴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슴니다.
~ 중 략 ~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중에서*
이 외에도 [불교대전]을 편찬하였고, 55세 이후에는 방영모, 박광선생 등이 주도하여 서울 성북동에 집을 마련하여 그 곳에 기거 하면서 장편소설 ‘흑풍(黑風), 후회(後悔), 철혈미인(鐵血美人), 박명(薄命), 죽음’ 등을 썼으며, 집을 지을 당시 ‘조선총독부청사’가 보기 싫다하여 북향(北向)으로 지었다는 일화는 그의 항일정신을 엿보게하는데 충분하다.
특히나 위당 정인보(1892~?)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라고 했으며, 스스로 한국문학의 국보라고 자칭하는 무애 양주동(1903~1977)선생은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을 대하면 “자신이 초라해 진다.”고 했으니... 만해 선생의 위업이 어떠한 것인가를 이 미련한 후학(後學)은 짐작이 감니다.
여러 회원님들과 만해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송만공(宋滿空)스님의 말씀이 떠 오른다.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데 꼭 하나 반이 있다.”고 하였다. 그 하나는 만해를 가리킨 것이었는데, 나머지 반은 누구인가?
단기 4341년(서기2008년)9월27일,28일 무박으로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1708m)을 가다.
|
첫댓글 산행후기만 보아도 눈에 선합니다... 풍부한 역사의 지식은 물론 세밀한 관찰력으로 자세한 설명...고문님의 애쓰신 노력에 감사를 드립니다
취산님! 장문의 부족한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슴니다. 앞으로도 우리 "남산산악회"에 많은 관심과 협조와 사랑으로 격려 해 주시길 바람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그간안녕하세요,,,, 염체불구하고 회장님의 산행기록을넘보고갑니다 항시산악회가발전하고 가족같은산악회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