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의 사자성어(54)>
귀생사지(貴生死地)
귀할 귀(貴), 살 생(生), 귀생이라함은 ‘몸을 귀하게 여긴다. 몸을 편하게 한다’ 라는 뜻이고, 죽을 사(死), 땅 지(地), 사지라 함은 ‘죽을 땅에 들어간다. 나뻐진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귀생사지’라함은 “내 몸을 귀하게 여겨 편안함을 추구하면 몸이 더욱 나뻐진다”는 말이다. 이 말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자기 몸을 귀중하게 여겨서 좋은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서 살면 그 몸이 과연 생각대로 튼튼한 건강 체질로 바뀔 것인가? 오히려 그런 몸 대접이 건강을 해치고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100세 장수자들의 공통된 습관 중의 하나는 “몸을 그냥 편하게 뇌두지 않고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추나무에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염소를 묶어 놓으라고 한다. 묶여있는 염소는 특성상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히게 된다. 그러면, 대추나무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껴 열매를 번식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그래서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한다는 것이다.
미꾸라지를 싱싱하게 서울로 보내려면, 미꾸라지 무리 속에 천적인 메기 몇마리를 넣어 보내면 된다고 한다. 미꾸라지가 천적을 피해 다니느라고 계속 움직이다보면 서울에 싱싱한 상태로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섬에서 토끼를 풀어놓아 사육하는데, 몇년 지나니, 토끼 숫자는 늘었는데 토끼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살만 쪄서 재대로 날렵한 토끼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이다. 맛도 제대로 본래의 토끼맛을 못냈다. 그래서 그 섬애 늑대 몇마리를 구해 풀어 놓았더니, 토끼들이 잡혀먹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어 달아나는 바람에 본래의 토끼 구실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 몸도 그냥 '편하게 놔두면' 급속히 쇠퇴하고, 질병과 노화에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말이 그대로 우리 인체에 적용된다. 요즘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자연인’ 프로그램을 보면 한결같이 약해진 몸을 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다보니, 병든 몸과 마음을 치유(治癒)했다는 스토리이다.
필자도 정무직 공무원으로 재직 시, 항상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면 차안에 들어가 앉았다가 사무실에 도착하면 또 운전기사가 차문을 열어주어 내리곤 했다. 도무지 몸을 쓸 기회가 없으니 체중이 늘어가는 대신에 다리힘은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퇴직하고 내 발로 걷고 내 손으로 물건을 들며, 매주(每週) 배낭메고 땀 흘리며 산을 꾸준히 오르니, 점차로 몸이 회복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는 웬만한 거리는 되도록 걸어서 가는 습관을 들였다. 많이 걷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다.
무릇 움직이면 생기가 발랄해지고 건강이 유지되어 오래 살 수 있게 된다. 노자는 이러한 논리를 귀생(貴生)과 섭생(攝生)으로 설명했다.
‘귀생’은 자신의 생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오히려 '생'이 위태롭게 될 수 있고, '섭생'은 자신의 '생'을 억누르면 '생'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물질의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이 화두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내 몸을 귀하게 대접하는 귀생이 오히려 병이 될 수 있고, 내 몸을 적당히 고생시키는 섭생이 생을 위해 이롭다는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귀생사지(貴生死地)는 인생을 살아감에도 교훈이 된다.
지금 고통스럽고 부족함이 많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모든 빛은 어두움에서 시작되듯이 현재의 힘듬과 참담함은 미래의 성취를 더욱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전설적인 산악인 김홍빈씨는 열손가락을 잃었지만, 7대륙 최고봉을 오른 기록적인 장애산악인이었다. 열손가락이 없는 중증장애인으로는 세계최초의 진기록이다.
1991년 북미 매킨리 봉을 등반하던 중, 조난사고로 동상을 입은 김씨는 열손가락을 모두 절단하는 아픔을 겪었다. 손 등까지 망가져 손목 부위에 철심을 박아 뭉툭한 손만 남게 되었다. 김홍빈씨는 참담한 좌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완등하겠다는 목표였다.
1997년부터 엘부르즈(5642m:유럽), 칼리만자로(5895m:아프리카),
아콩카과(6959m:남미),매킨리(6194m:북미), 코지어스코(2228m:호주),
에베레스트(8850m:아시아)를 차례로 등정한 후, 2009년 1월 2일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의 정상에 오름으로써 12년 만에 꿈을 실현했다.
김홍빈씨는 온전치 못한 손으로 암벽, 빙벽 타는 ‘맞춤기술’을 스스로 개발했다. 버스 안에서 빈자리가 있어도 서서가며, 발로만 중심을 잡는 훈련을 했다. 넘어질 경우에 대비해 엉덩이나 어깨부터 땅에 닿게 해 다치지 않도록 하는 낙법도 익혔다. 그는 말했다. ‘매킨리의 조난사고가 없었더라면 7대륙 최고봉 완등이라는 도전은 없었을 것이다.’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곳에서 가장 강렬하고 찬란한 햇빛이 솟구치는 법이다. 대나무는 매듭의 고통이 있어야 이를 발판으로 하늘로 쭉~쭉 치솟을 수 있다. 독일속담에 ’간난(艱難)이 너를 옥(玉)으로 만든다‘라고 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3년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 고명재(46)씨는 “배부르면 시(詩)가 안 써질까봐, 하루 한끼만 먹기도 한다”고 술회한다. 마치 옛날 청화큰스님이 1일1식(一日一食)하고 수행했던 것과 흡사하다.
공부나 예술이나 등 따습고 배부르면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든 법이다. 어둠속에서 고민할 때에 비로서 찬란한 빛을 보게 된다. 귀생(貴生)은 사지(死地)이고, 섭생(攝生)이 무사지(無死地)임을 알 수 있다.(2023.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