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와 회암사 천보산, 칠봉산, 정상
지공화상이 창건한 회암사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에 경기 북부의 큰절인 회암사 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불우’조에 “1174년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춘천 길을 따라 인도하여 회암사로 맞아
들였다”라는 기록과 함께 고려 때의 스님인 보우의 비문에 “13세
의 나이로 회암사 광지선사로 출가하였다”라는 내력이 실려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록에는 회암사를 인도의 스님으로 고려 땅에
들어와 불법을 폈던 지공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나온다.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화상은 당시 인도 최고의 불교
대학이었던 나란타 절을 본떠 266칸의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공이 여기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나란타 절과 같다”라고 말한 후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던 나옹화상이 중건 불사를 하게 되며,
회암사는 드디어 전국 사찰의 본산이 되면서 수많은 승려들과 대중이
머물게 되었다. 한때 절의 승려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목은
이색은 「회암사 주조기」에 “집과 그 모양새가 굉장하고 미려하여 동방
에서 첫째”라고 적었고, 이 절은 그 뒤 나옹화상의 제자 무학대사가
중건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
르게 하였고,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게 하였다. 또한
이성계는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
대군과 함께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암사에는 그런 의미에서 역대 왕을 제사 지냈던 곳이며, 이성계의
정신적인 은신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이곳에
머물렀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2000년 6월쯤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
의 호칭이 새겨진 대형 청동 풍탁(건물 추녀에 매달던 종)이 발견
되었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조선국왕(朝鮮國王)’, ‘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라는 15자(字)가 새겨져 있어서 새삼
시공을 초월한 역사의 근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회암사는 성종 3년(1471)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3년간에
걸쳐 중창하게 되었고, 명종 때 이르러 크게 중창하게 된다. 불심이
깊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가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 중흥을 기도한 것이다. 낙성식을 겸한 무차
대회를 열고(1565년 4월 5일) 그 이틀 뒤인 4월 7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생들로부터 ‘보우를 처형하라, 회암사를 불태워라’
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실록에는 “명종의 그 일을 걱정한다”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초파일에 제주도
회암사 터 북쪽 한쪽의 부도전에 모셔져 있던 지공, 나옹, 무학대사
의 부도와 부도비 등 유물이 광주의 토호 이응준에게 제거되고 만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지방 토호들은 절을 빼앗아 자신들 선조의
묘택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응준은 풍수사 조대진이 “세 화상의
부도와 부도비를 없애버린 후 그곳을 묘역으로 삼고 법당 터에다
묘지를 세우면 크게 길한다”라고 부추겼다.
이응준은 이를 실행했고 이 일은 7년 뒤(순조 28년, 1828) 세상
에 알려졌다. 이응준과 조대진은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갔고, 경기
지방의 승려들이 모여 상의한 결과 현재의 절터에서 800여 미터
떨어진 천보산 중턱에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이어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산 언덕배기에 세 분의 부도와 부도비를 다시
세우고 흩어진 유물들을 수습했다는 기록이 무학대사의 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지공선사와 무학대사의 몸돌
을 복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회암사와 같은 폐사지로 이름난 곳은 경주의
황룡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원주의 법천사지와
거돈사지 그리고 여주의 고달사지 등이 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정성수 작사
전오승 작곡
주현미 노래
(나애심 1959원곡)
2017년 12월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가신 나애심 선생님의 대표곡 '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가사와 멜로디는 낮설어도
이 노래의 제목은 한때 유행어처럼 퍼져서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거예요.
1953년 가수로 데뷔한 나애심 선생님은 영화에서도
수많은 활동을 보이며 '노래하는 배우'의 성공적인 첫 사례로
꼽히고 있지요. 193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하신 선생님
은 1.4후퇴 때 월남 후 가수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작곡하신 전오승 선생님이 친오빠였기에
가요계의 길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법도 하지요.
오빠의 곡인 '밤의 탱고'와 '정든 님'으로 데뷔하신 후
'백치 아다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맘보는 난 싫어',
'미사의 종', '언제까지나', '물새 우는 강언덕' 등
300여 곡을 발표하며 전쟁 이후 국민들의 슬프고 공허한
마음을 위로하는 가수로 우뚝 서게 됩니다.
1950년대 중반, 휴전 후 많은 예술인들은 명동의 다방에 모여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곤 했지요.
'명동백작'이라 불리던 멋쟁이 시인 박인환 선생님은
한 술집에서 우연히 나애심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시를 쓰고 이진섭 선생님이 곡을 붙여 '
세월이 가면'이라는 명곡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포크가수 박인희 선배님의 곡으로 잘 알려진
'세월이 가면'을 처음 발표한 가수가 바로 나애심 선생님이시지요.
서구적인 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 허스키한 목소리로 가수 뿐만 아니라
100여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던 나애심 선생님은 큰 인기를 한몸에 받게 됩니다.
1959년에는 '과거를 묻지마세요'라는 영화의 주제곡으로 동명의 곡이 발표되지요.
황해, 문정숙, 박노식 선생님 등 당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영화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성실한 청년이 절도죄로 법정에 서게 되면서
친구인 변호사가 그를 위해 노력하고 결국 석방되어
새 삶을 살아간다는 휴머니즘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벼운 듯한 제목과는 달리 노래도 영화도 다소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지요.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흘러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은 풀려
애달픈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의 종이 울린다
아 흘러간 추억마저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작곡가 전오승 선생님, 작사가 정성수 선생님, 또 나애심 선생님까지
이 노래를 만들어낸 세 분 모두 전쟁 중에 월남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을 그분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요.
전쟁 후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외에도 월남인
혹은 월북인이라는 신분으로 살며
설움을 겪어야만 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 이야기인 셈이지요.
휴전선이라는 대립의 장벽이 무너지고 괴로움의 세월도 지나
꽃이 피는 세상을 꿈꾸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디 출신인가,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되어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인 셈이지요.
'과거를 묻지마세요'의 '과거'는 화려했던
이력을 농담삼아 표현하는 것이 아니지만,
유행어로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나애심 선생님이 소천하신 후, 2018년 2월 KBS 가요무대에서는
긴급편성으로 추모특집 방송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끼는 후배이자, 가수로서도 좋아하는 김혜림씨의 초대로
'물새 우는 강언덕'과 '영원한 사랑' 두 곡을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하늘로 먼저 떠나시고 아름다운 노래들은 또 우리 곁에 남아
이렇게 머물고 있지요. 후대에도 잊혀지지 않는 훌륭한 노래를 남긴다는
것은 가수로서 가장 큰 명예가 아닐까요. 가끔은 저도
먼 훗날을 떠올리며 조바심이 날 때가 있지요.
나애심 선생님이 데뷔하신 지 벌써 70여년이
지나고, 대를 이어 노래하는 김혜림씨도 50대가 되었네요.
'디디디', '이젠 떠나가볼까', '날 위한 이별' 등
저도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노래들을 많이 불렀답니다.
우리는 매년 나이를 먹지만 노래는 늘 그대로인 것 같아요.
우리에게 멋진 노래로 늘 마음을 위로해주셨던
나애심 선생님을 추억하며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여러분들과 함게 나누고자 합니다.
2020-09-0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