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묘
청천 우암 송시열유적은 화양동계곡 안에 있는 화양서원터와 만동묘터를
중심으로 암서재, 읍궁암, 애각서적, 묘소와 신도비 등 송시열과 관련된
사적들로 구성되었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은거하였던 곳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시대 학자들의 결집 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근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 의종의 위패를 모신사당으로
서 유지가 잘 남아있다. 이 외에도 화양동에는 충효절의 비례부통 등 많은
애각사적이 산재해 있어 송시열의 북벌 애국사상과 민족자존정신이 깃든
유적의 성격과 조선성리학의 중심지로서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
되고 왜곡된 사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암서재(岩棲齋)
석대 위에 지은 자그마한 서재
화양동(華陽洞) 수석(水石)의 빼어난 경치는 영·호남 가운데에서 최고인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병오년에 시냇가 남쪽에 정사를 지었다. 참으로 세상
바깥의 그윽한 곳이다.
정사의 동쪽으로 한 사람이 소리치면 들릴 만한 거리에 깎아지른 듯한 석대
(石臺)가 있다. 그 높이가 수십 척(尺)이나 되고, 석대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큼 넓었다. 이 또한 하늘이 만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우암 선생은 이곳에 세 칸 소재(小齋, 자그마한 서재)를 짓고, 틈날 때마다
여기에 머무르면서 매우 즐거워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회덕(懷德)에서 이 화양동 계곡으로 들어오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하다. 이곳에서 회덕을 돌아보면
그곳은 참으로 진세(塵世, 티끌 같은 세상)이다. 그런데 정사에서 다시
북재(北齋)로 옮긴 후에는, 북재가 더 빼어난 신선의 세계여서 정사가
오히려 진세인 듯하다. 이곳은 맑고 기이한 곳이라고 할 만하니, 다시 무릉
도원 가는 길을 찾을 까닭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수정의 세계에 들어선 듯한 풍경
석대 아래로는 깊은 못이 있어서 뗏목은 물론 자그마한 배도 띄울 만하다.
때때로 한 조각 작은 배를 띄우고 물살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밑바닥이 훤하게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아서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를 하나 둘 셀 수 있었다.
밤에 서재 창가에 기대어 있자면, 달빛이 대낮처럼 환하고 영롱하게 세상
을 비추고 있어 마치 수정(水晶)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이때 우암
선생이 지팡이를 끌고 시를 읊으면 금석(金石)이 내는 소리처럼 울려
퍼져서, 문득 세상 바깥에 서 있는 듯한 생각이 들곤 했다. 주자(朱子)가
무이산에 세운 무이정사(武夷精舍)의 맑은 정취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암서재, 바위가 깃들인 서재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암 선생이 기사년의 참화(慘禍)를 당한 후 재사(齋舍)
가 허물어지고 산 기슭은 적막해져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을미년에 김진옥(金鎭玉)이 재력(財力)을 보태 재사를 다시 지었는데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예전 모습과 조금
도 다르지 않았다. 우암 선생의 제자와 자손들이 모두 그곳에 올라 선생을
그리워하며 회상에 잠겼는데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듯 상쾌하여, 김진옥의
정성스러움을 입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금년 봄에 김진옥이 화산백(花山伯)이 되어 부임하는 도중에 황강(黃江)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암서재(巖棲齋)'라는 세 글자를 쓰게 한 다음
목판에 새겨서 그곳 재사의 문 위에 걸고 다시 기문을 써 달라고 청했다.
나는 우암 선생이 살아 계실 때 가까이에서 모셨던 제자였기에 감히 글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당시 내가 보고 기억나는 것들을 대강
이나마 이렇게 기록한다. 예전에는 반도(蟠桃,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바위 틈
사이에 나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어느 노스님(老僧)이 일찍이 암자
뜰에서 반도의 종자(種子)를 간직해 두었는데, 가을이 되면 예전처럼
많이 심을 것이라고 했다.
권상하, 『한수재집』 '암서재중수기(巖棲齋重修記)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생전에 화양계곡에 지은 서재가 무너진
후 김진옥이 이를 다시 세웠다.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한수재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이를 기뻐해 지은 기문이 '암서재중수기(巖棲齋重修記)'이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의 주자, 즉 송자(宋子)로 추앙받으면서 성리학과 소중화
주의(小中華主義) 사상의 수호자임을 자처한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 노론계열의 영수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성리학의 명분과 대명사대(對明事大)를 앞세워 항상 당쟁의
최선두나 배후에서 서인(노론) 세력을 이끈 탓에, 평생 동안 벼슬살이와 귀양
살이 그리고 사직과 낙향을 거듭했다.
한때 자신의 제자였고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계획의 정치적 동지였던 효종
(孝宗)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난 후 송시열은 보위를 이은 현종(顯宗)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낙향을 결심한 송시열은 1666년(현종 7년) 8월 화양동(華陽洞)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한사코 거절하면서도 끊임없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정치적 사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전달하는 한편 서인
(노론) 세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언제나 당쟁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 자신의 당파인 서인(노론)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숱한 정치적 피해자와 적대 세력을 만들어냈다.
특히 주자 성리학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그 어떤 유학적 해석도 용납하지 않는
편협하고 전투적인 이념의 수호자 역할을 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대학자들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조정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자 백호 윤휴이다.
이렇듯 평생을 이념과 당쟁 속에 파묻혀 산 송시열이었기에 그 죽음 역시 결코
순탄치 못했다. 사대부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고 또 대역 죄인에게나 가하
는 형벌인 사사(賜死)를 당했기 때문이다.
1689년(숙종 15년) 송시열은 장희빈과 장희빈이 낳은 원자(元子)의 세자
책봉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반대한다. 장희빈과 원자의
세자 책봉은 곧 인현왕후와 서인 권력의 몰락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서인들의 권력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긴 숙종은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파당을 지어 상소나 올리며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들어 송시열
을 제주도에 귀양 보냈다. 그리고 송시열을 국문(鞠問)하기 위해 서울로 압송
하던 도중 정읍에서 사사(賜死)했다. 권상하가 '암서재중수기'에서 언급한
'기사년의 참화(慘禍)'가 다름 아닌 1689년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사건이다.
앞서 말했듯이, 송시열은 60세가 되는 1666년 8월에 화양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원래 화양동은 송시열이 거처로 삼기 전에도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고 불리는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 명승지였다. 그런데 송시열이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로는
남송 성리학의 비조(鼻祖)인 주자(朱子,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비교해
조선의 주자인 송자(宋子, 송시열)의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 화양구곡은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면서 경천벽→운영담→읍궁암→금사담→
첨성대→능운대→와룡암→학소대→파곶으로 이어진다.
송시열이 지었다는 세 칸짜리 자그마한 서재는 제4곡(읍궁암과 금사담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둘을 합쳐 제3곡이라고도 한다)인 금사담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서재는 시냇물이 바라다보이게 지었는데, 송시열이 가장 좋아하고 즐겼던 곳
역시 금사담 위의 서재였다고 한다.
송시열이 이 서재를 지을 당시 이름은 '암서재(巖棲齋)'가 아니라 '암재(巖齋)'
였다.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은 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허물어졌는데, 그가
죽은 뒤 26년이 흐른 1715년(숙종 41)에 김진옥이 서재를 중건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6년이 지나 권상하가 '암서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이때는
남인이 권력에서 완전히 실각하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제자들인 서인(노론)
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암서재는 현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으며, 충북 유형문화제
제175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지금은 목조기와로 방 2칸, 마루
1칸으로 되어 있다. 방 안에는 현판 5점이 걸려 있고, 건물 앞으로는 일각문
이 세워져 있다.
이 암서재 이외에 송시열이 말년에 지은 서재인 남간정사(南澗精舍)가 현재
대전 동구 가양동에 남아 있다. 남간정사는 주자가 운곡의 남간에 거처했다고
해서 이름 붙인 곳이다. 이곳에서 송시열은 2년 남짓 살다가 제주 유배 길에
올랐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출처:바위 위에 지은 서재
(조선의 선비 서재에 들다, 2008. 12. 5. 고전연구회 사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