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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단편소설>
마음의 소리 찾기에 관한 자전적인 말
-외할머니의 꽃씨에 관하여-
정 원 구
노트 북 화면에 뜨는 아이콘처럼 초가을의 청량한 산자락 기운이 산뜻하게 떠오른다. 지나간 시간에 묻어둔 마음의 소리 한 자락이 즐비한 고층 성냥 곽 아파트 넓은 유리창 틀 사이를 비집고 유유히 꼬리를 흔들며 지나간다. 그러다간 결국은 메아리가 되어 멀리 산의 능선을 따라 저 먼 하늘 서쪽으로 사라진다.
신시가지의 아파트 단지는 제법 잘 정리되어 있다. 하늘 높이 삐쭉 치솟아 있는 고만고만한 아파트 유리벽에 갈 곳 없는 햇살 한 아름이 화사하게 반사되면서 꼬리를 감춘다. 순간 아찔한 느낌을 남기면서 어쩔 수 없는 가을 서늘한 기분이 단지 내 오솔길을 느리고 낮게 포복으로 기어오고 있다. 단지 밖에는 가끔씩 오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금방이라도 기우뚱 넘어질 듯이 불안하다. 좀은 위압적인 고층 건물들 사이를 불안스럽게 좀 잰걸음으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바닷가 신시가지의 봄은 멀리서부터 휠체어를 타고 아장아장 느리게 살짝 다가선다 싶은 느낌이지만, 가을은 전혀 다르다. 스멀스멀 포복으로 기어서 오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무 위로까지 기어올라 잎사귀 끝자락부터 당당하게 햇빛을 받으며 청량한 소리 흔적들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히려 황량한 기분이 살며시 다가선다. 다음 순간 굽이 닳아빠진 여자구두 한 짝이 화들짝 눈 안으로 뛰어들면서 나뒹군다. 햇빛은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면서 부서지고 있다. 딱딱한 콘크리트 벽면들이 텅 빈 공간 구석진 곳 틈 사이에서 대칭을 이루며 수평의 모순을 뿜어내고 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신시가지 아파트 단지 내의 수화가 가지런히 놓인다. 소리 없는 마음의 소리가 서글프게 여운을 남기면서 가슴을 저리게 한다.
불현듯 기억의 늪에서 나를 건져 올린다. 나는 어디론지 달려 나가서 낯이 전혀 익지 않은 간이역에 내려 퇴색한 여인숙 방에라도 찾아들고 싶어진다. 혼자서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디에선가 무수한 소리들이 바람 끝을 따라 무더기로 휘몰아친다. 아련한 소리 하나하나에 마음을 실어본다. 나의 귀 밝음이 다음 순간 저 먼 삶의 뒤안길을 헤매면서 마음의 소리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소리의 늪에서 무수한 소리들이 무겁게 나를 얽어맨다. 마음의 소리들이 여러 가지의 나를 앙상한 몰골을 그려낸다. 어쩐지 나 같지가 않아서 어색해진다. 우연히 아득한 세월 전의 어두운 골목을 혼자 거닐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다. 후회스러움을 머금은 마음의 소리들은 느닷없이 나를 사로잡아 슬픈 과거의 올가미를 씌운다. 나는 더 이상 햇빛 쏟아지는 신시가지 거리를 걸어 나갈 수 없어진다. 어쩌면 마음의 소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여행 중이었던 것일까. 그러다가 다음 순간 나는 골목을 무조건 벗어나고 싶은 생각으로 다급해진다. 우선 빤히 건너다보이는 생맥주를 파는 호프집으로 눈을 빼앗긴다. 호프집 건물 모서리 짬에서 무참히도 늙어버린 사내 하나가 무너져 무릎을 꿇고 손을 마구 비비면서 동전 한 푼을 애걸하고 있다.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제법 익숙해질 법도 한 사람들의 얼굴을 곁눈질하면서 눈치를 본다. 나는 그가 나와는 완벽하게 무관한 세계의 화두를 몸짓으로 보이고 있다고 여긴다. 허지만 왜일까. 나와는 철저하게 무관해지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그를 볼 적마다 지극히 무관심하던 일들을 관심의 세계로 끌어들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의 소리의 늪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는 파장의 둘레에서 나의 뒤안길 그림자들에 무관심할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언젠가부터 마음의 소리 늪에서 건져 올린 어두운 골목에 관하여 내 운명을 접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텅 빈 주변의 허탈과 나 혼자뿐이라는 고독의 의미를 씹어보는 재미를 즐기고 있다고나 할까. 하염없이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나는 나의 몸무게 중심을 마구 흔들어 놓는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부터 걸어 지나기가 싫었던, 그래서 나는 골목의 형체가 그려내는 앙상한 몰골의 그림자를 따라 도망치고는 하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불현듯 나는 나의 출생에 관하여 그리고 별 보잘것없는 삶의 그늘에 관하여 궁금해진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원초적인 고독과 방황의 늪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결국 나의 고독과 방황의 늪은 마음의 소리들로 가득 차면서 여기저기에 참으로 많은 여울을 만들기도 한다. 좀은 모자라면서도 가끔씩은 나를 하얗게 만드는 세월의 질곡을 가슴으로 어루만지는 때도 있다. 이쯤에서 아무래도 나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도시의 거리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가끔씩 나의 마음의 소리들이 이명으로 나를 괴롭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나를 건져 올리기 위해 딴은 많은 아픔의 시간을 견디면서 마음의 소리 늪을 헤엄치기도 한다.
나는 우선 이런 세월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되는 근거를 나의 신체구조에서 찾아 합리화 해보고 싶어진다. 그것은 내가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타고난 신체 구조에서 어릴 적부터 뭔가 남의 무관심 속에서 잠시나마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다. 우선 나의 작은 체구에 비하여 머리의 둘레가 크고 정수리 위가 완만한, 말하자면 전형적인 짱구머리를 몸통 위에 얹고 다니는 과분수형 못난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되거나 좀은 외면을 당하면서 친구들을 쉽게 사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결국 나만의 고독의 아픔을 가슴에 묻어둔 채 그냥 외톨이 신세를 숙명처럼 익숙하게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면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다가 나의 그 과분수형 짱구머리는 철이 들고 학교에 입학을 하고부터 꽤 특출한 머리를 가졌다는 평을 듣게 된다. 말하자면 나의 과분수형 머리통이 수재 형으로 주변의 좋은 평을 듣게 된 것이다. 그것은 아마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받아쓰기 글씨가 또록또록했고, 특히 산수 시험에서는 언제든지 만점을 받고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자주 들으면서부터일 것으로 생각된다. 좀 더 구체적인 기억을 하나 들라면,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고 밤늦도록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치른 범위 없는 무제한 학력 경시대회에서 내가 전 학년의 최고 점수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J사범병설중학교 특차 입학시험에서 상당히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고 나서부터 주변에서 들은 나의 짱구머리에 대하여 꽤 기분 좋은 평을 하기에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장면이 있다. 천 구백 오십 년대 말부터 육십 년대 초 무렵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든가. <퀴즈열차>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당시 주변 여러 동료들이거나 친구들이 둘러앉아 즐겨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열 문제 중 여덟 개 정도를 맞춤으로써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각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가령 아나운서가 다음 숫자, 1.4 2. 2.8. 4. 5.8. 8. 11. 16.……등을 나열하면서 관련 있는 물건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스톱> 하고 답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는, <카메라> 하고 답을 한다. 그러면 <퀴즈열차> 참가자 중에서 한참 있다가 <카메라>라는 정답이 나왔고 나는 주변으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는 즐거움을 맛본다. 누군가가 왜 <카메라>인가? 하고 물으면 자신 있게 <카메라> 렌즈의 빛 조리개의 단위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자긍심을 키우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천성은 여전히 소심했고 결국은 내성적이고 도피증세의 나약한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이 오히려 마음 편하게 느껴지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만의 고독의 병을 꽤 오랫동안 앓아온 셈이다.
이쯤에서 나는 어릴 적 동심의 여울목을 꽉 부여잡고 있는 마음의 소리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결국은 나의 못난 약점을 합리화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좀 더 부연을 달면 나의 약점이 많은 신체구조 중에서 짱구머리는 오히려 평가절상으로 반전됨으로써 약간의 자존심을 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고부터 나는 은연중에 나의 신체구조 중에서 그런 대로 좀 특출하다싶은 기능을 가진 부위도 있구나싶은 생각을 가져본다. 나의 신체구조 중에서 가장 쓸 만한 장기를 하나 더 들라면 여태껏 치과병원 신세를 한 번도 지지 않은 이빨이 될 것이고, 가장 특출한 기능을 들라면 유난히도 귀가 밝아서 주변의 소리들을 잘 분간할 수 있는 귀 밝음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에 근거를 둔 것이다. 내가 열 세 살쯤 되었을 무렵이었던가. 한여름 초승달이 서쪽 하늘 중간쯤에 걸려 있는 캄캄한 밤중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주 가늘면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기분 나쁜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깼다. 싸르락 싸르락 싸르락. 연이어 방문 창호지를 스치는 기분 나쁜 소리에 나는 무섬증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깨웠다. 아버지가 전등을 켜고 방문을 열었을 때 방문 창호지를 타고 오르는 커다란 지네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침착하게 지네의 앞머리와 꼬리 부분에 가는 대 창살을 활처럼 구부리어 꽂아 감나무 가지에 매달고 나서야 안심하고 다시 잠을 잘 수 있었지만. 그러나 검붉은 지네의 등 빛깔과 독이 올라 짙붉은 지네의 발들이 바둥거리는 모양새를 나는 참 오랫동안 꿈속에서 만나면서 몸서리치는 무서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어리던 시절 아주 특출하기까지 한 그 귀 밝음이 가끔씩 귀 멍멍 함으로 이어지면서 나를 괴롭히던 것은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던가?. 귀 안이 멍멍 해지면서 수많은 소리들이 와글거리다가 가끔씩은 나를 바깥으로 끌어내어 산야를 몽유병자처럼 헤매고 다니게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일찍부터 소리를 찾아 마음의 소리의 늪을 헤엄치고 있었다고 해도 될는지?
이건 요즘 와서 생각인데,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 있음의 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아니 살아 있지 않은 모든 것도 존재를 외치며 무한한 소리를 내고 있음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혼자만의 소리 세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온 누리에는 수많은 다양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 제마다 자기 생명의 빛을 쏟아내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소리를 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자기 스스로 무의미해지지 않으려고, 아니 오히려 하루라도 더 빨리 무의미해지려고 기를 쓰면서 소리들을 만들어 내는 건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나는 애써 소리의 신비로운 세계를 거닐다가 매우 아름답고, 어쩌면 화려하면서, 감동스런 소리를 발견한 적이 있다. 또 가끔씩은 무한의 신비스러운 소리들을 만들어 내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면서 참으로 부러워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면서 이왕이면 나도 마음으로 좀 뜻이 깊이 숨어있는 소리들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나의 소리에 진솔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잠시나마 담아낼 수 있기를 꿈꾸어 온, 말하자면 마음의 소리 찾기를 해 온 지가 꽤 오래 되었다고 다시 한 번 더 고백하고픈 심정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마음의 소리 찾기는 참으로 애매하고, 어쩌면 뜬구름 잡기처럼 허무맹랑한 노릇으로 결말을 내지 못하는, 말하자면 마음 쓰기의 낭비가 되기 일쑤이던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소리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소리에다 내 마음을 실어 담고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얽어매어 보려는 것인지? 뭔가 분별되어지지가 않은 채 좀은 혼란스러운 자가당착에 빠져버리는 기분이 되기 마련이던 것이다. 그러다가 참으로 주제넘은 마음이긴 하겠지만 내가 발견하고, 이왕이면 만들어 내는 소리들에 좀 더 재미있는 의미를 부여하고 색다르게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기를 염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푼수를 모르고 감히 마음의 소리들이 잠겨 있는 늪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면서 어쩌다가 반짝 빛을 반사하는 소리들을 건져 올려 좀 더 의미 있는 화두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막연히 가슴에 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쩌면 막연하고 하찮은 푸념이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마음의 소리 찾기에 관한 진솔한 고백은 처음부터 이렇게 어설프게 시작된다.
우선 나는 외할머니의 약손에 관련하여 나의 끈질긴 생명력과 함께 참으로 귀중한 동화들의 기억을 소리의 늪에서 건져 올리고 싶어진다. 그것은 지금 이 시간까지 나를 있게 한 가장 큰 공로는 당연히 외할머니 약손 덕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두류산 최고봉인 천왕봉 자락이 남쪽으로 한참 내리 뻗다가 살짝 서쪽 방향 얕은 산자락으로 갈라지는 능선의 한 끝에서 잠시 기를 모아 솟은 청수 옥산의 작은 연봉 고시랑봉을 등에 짊어지고 이룬, 동남쪽 좀은 큰 마을 한골에서 태어났다. 천생 약질로 태어난 나는 외할머니 등에 업혀서 자라다시피 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내가 첫아이로 태어나자부터 한 돌이 되기까지 일곱 번을 죽은 아이로 가마니에 둘둘 말려서 방안 윗목에 팽개쳐졌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그것도 첫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에 젖어 한동안 울다가 아버지가 이제 내다 버리려고 가마니 자락을 다잡아 매려 하면 손가락이거나 발가락이 꼼질대면서 숨을 발락발락 쉬더라는 것이다. 그러기를 일곱 번이나 했다니? 참으로 끈질긴 생명이기도 한 느낌이 든다.
나의 선천적인 허약체질은 무던히도 부모의 애를 태우면서 명줄을 이어왔다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끔씩 하는 푸념의 틈새를 되새김질 해 보면 나의 허약체질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던 걸로 느껴진다. 그 사연은 먼 훗날 내가 제법 철이 들어서 유추를 해본 적이 있었는데, 대강 이런 내용의 우리 집 가족사 줄거리로 정리된다.
어머니의 성품은 서부 경남 황매산 남쪽 자락에 기반을 둔, 제법 알려진 의성 김 씨 문중 몇 대 종손 쯤 되는 양반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나서 전통적인 엄한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가는 선비 집안의 좀 깔끔하고 자존심이 내면에 깔려있는, 그러면서도 지방 향교 출입을 하던 유림 학자 풍류객들이 사랑방에 자주 드나들던, 말하자면 집안 풍도가 좀 있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왜정시대에는 외할아버지가 한참 젊은 나이로 서당에서 뛰쳐나와 의기투합되는 몇몇 우인들과 함께 뭉쳐서 왕성한 혈기로 3․1운동 이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 운동의 선봉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면 소재지 장터에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독립만세를 앞장서다가 마침내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는 고질병을 얻게 된다. 결국은 오랫동안 시달리다가 병 치료에 가산을 거의 탕진하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인정 많고 문자 속이 꽤 깊으면서 다정다감한 성품의 외할머니 슬하에서 올곧게 자란 규수로 짐작된다.
그에 비하여 나의 아버지는 조부님이 가문을 대표하여 향리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좀 했던 관계로 향교 출입을 했을 뿐, 가풍이나 경제적인 여유도 별로 없었던 집안의 별 볼일 없는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순전히 농사일에만 매달려야 했던 무지한 농군이었다. 그러나 마침 백부가 대를 이어 서당 공부를 좀 했던 관계로 융통성이 꽤 있어서 읍내 면사무소에 다녔고, 중부는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활달한 성품대로 세상 보는 눈이 있어서 일찍부터 서울인 경성으로 나아가 당시 제법 규모가 큰 일본인 소유의 물산회사에서 신임을 받고 관리인 책임을 맡아 있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는데, 일본인 사장이 귀국하면서 물산회사를 고스란히 물려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고, 꽤 큰 재산을 모아 고향 마을의 농토를 사들이게 함으로써 그 지방의 부자로 좀 괜찮은 호평을 듣는 가문이긴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사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 인연은 서부 경남 지방 유림들의 모임에서 자리를 같이 했던 나의 조부와 외조부가 우연히 통성명을 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어떤 연고인지는 모르지만 가문끼리 결혼 약속을 해버림으로써 지역적으로 꽤 먼 거리에 있는 두 집안의 혼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고 보니 외할머니의 깔끔하고 예쁘장한 모습을 닮은, 그리고 올곧은 선비 기질의 외조부 성품을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그리하여 사리분별이 분명하면서도 약간 고집도 있어 보이는 당찬 성품이던 어머니의 경우 청청시하의 시집살이가 좀 고되었을 것이고, 게다가 좀은 투박하고 무지스러운 농토 군이던 아버지의 처지가 마음에 미흡한 채로 마뜩찮게 생각되기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같은 동네이기는 하지만 시가에서 마련해 준 별채로 분가하여 살게 된 신혼부부를 두고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말하자면 맵시 고운 신부인 어머니가 신접살이 살림을 깔끔하게 잘하고 웃어른들에게 예의범절도 분명하여 칭송을 받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여 새신랑인 아버지는 농토군 본성대로 무디고 성격도 흐리멍덩하여 주변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찍부터 서모(아버지의 나이 아홉 살 때 나의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새 할머니가 들어왔다고 한다)와 큰형수의 눈치를 살피면서 살아 온 아버지의 경우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에 굶주려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성격이 밝지 못하고 내성적이며 특히 아내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주변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로 신랑보다 신부가 훨씬 낫다는 둥, 갑수(아버지의 아명)가 장가를 잘 갔다는 둥, 심지어 신랑에 비하여 신부가 아깝다는 둥, 신랑의 자존심을 흠집 내는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서 아마 짐작하건대 아버지의 심기가 어지러웠을 것이고, 더 나아가 의처증? 까지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본다.
어쨌든 신접살이를 하던 부부의 금실에 갈등이 있었고, 마침내는 임신 중이었던 어머니가 집을 뛰쳐나와 친정집으로 가 있는 동안 골병으로 앓아누워 자리보전을 겨우 하시는 외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외삼촌과 아버지가 교차로 오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뱃속에 든 아이마저 의처증의 도마에 오르자 마침내 독초를 삶아 먹기까지 이르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일찍이 이웃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어머니는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 뱃속의 아이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명줄이 질겼든지 마을 앞을 지나던 스님 한 분이 우연히 들러서 어머니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 약제를 내어주어서 급하게 달여 먹이고부터 점점 회복이 되어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 바로 나의 출생이라는 것이다.
내가 허약한 체질로 태어나서 일곱 번을 죽었다가 깨어나고도 명줄을 이은 것은 그 스님이 달여 먹인 약효가 참으로 영험했던 덕분이라고 어머니가 자주 들먹이는 것을 여러 번 들었던 적이 있다. 뱃속에 있을 적부터 독초 약물에 시달리거나 어머니의 정신적인 고통의 시련을 함께 겪은 나의 경우 태어나서도 처음 한동안 죽고 사는 기로에서 어머니의 간장을 몹시 태우게 했지만, 그러나 그런 끈질긴 생명력이 나의 평생 건강을 유지하는데 잠재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요즘 가끔씩 해 본다.
나는 선천적인 나의 허약체질이 그 후로 지금까지 별다른 큰 병 없이 살아오게 된 것은 순전히 내 어리던 시절 외할머니의 민간요법 치료 덕분이라는 생각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것은 나의 소생이 아버지의 불안하던 마음을 안정시켰고, 그 후로 연속되는 집안의 풍파를 겪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갈등도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 하나 더 보기 위해서 아래로 줄줄이 딸 넷을 낳고 보니 나의 존재가 장남 외동아들로서 저절로 좀 무거워지게 되고부터 외할머니의 약손에서 묻어나는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별다른 고통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이다.
집안의 풍파라는 것은 외가 쪽으로는 독립만세 운동에 선봉을 섰던 외할아버지께서 모진 고문으로 얻은 병마에 오래 시달리다가 해방 직전에 돌아가신 일이라든지, 육이오를 전후하여 대한청년회?라든가 하는 애국청년단체에 관여하던 큰외삼촌이 황매산 빨치산들에게 끌려가서 반죽음이 되어 돌아와서 시름시름 앓다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죽은 것이라든지 하는 죽음들과 관련된 집안의 몰락 과정이 될 것이다.
또 친가 쪽으로는 해방 전 천연두에 걸려 죽을 고비에서 오로지 어머니의 정성어린 병간호로 회생한 아버지가 마음의 눈을 뜨고 솔가하여 진주시내로 이사를 한 것이라든지, 집안의 우상이던 중부가 육이오 전후하여 남로당 사건에 연류 되면서 체포 직전에 일본으로 건너가고부터 당시 지독한 올가미였던 연좌제와 관련하여 집안 젊은이들이 전혀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하여 절망의 늪으로 곤두박질 당하면서 갑자기 집안 형편이 몰락해지기 시작한 것 등의 얽히고설킨 이런저런 사연들이 될 것이다.
어쨌든 나를 살려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어머니는 아이 키우는 일에 경험이 많으셨던 외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자주 오게 했고, 그래서 나는 거의 외할머니 품에 안기거나 등에 업혀서 키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예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에 관한 풍부한 경험들은 약손으로 알려져서 나의 어린 시절 주치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철이 들어서까지 이웃동네 많은 사람들에게도 초청을 받아 치료를 해주곤 하던 것이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약손에 관한 나의 기억들은 대개의 경우 나의 선천적인 허약체질과 관련 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생생한 것으로 남아 마음의 소리 늪에서 배를 띄우고 있다.
가령 머리 위 부스럼과 피부의 곪아터진 곳에는 말린 약쑥으로 뜸을 뜨거나 누룩 섞은 밀가루 반죽을 두껍게 덮어 바른다든지, 살갗이 상처를 입고 터져서 피가 멈추지 않을 때는 담배 잎을 꼭꼭 찧어서 바르면 지혈이 되면서 얼마지 않아 치료가 된다. 음식이 급체한 경우에는 손가락 마디에 무명실을 총총 감아 매고는 바늘을 콧김으로 씌우거나 머리카락에 쓱쓱 문지른 후 마디 바깥쪽 피부를 따면은 신통하게도 검붉은 피가 솟아오르면서 속이 확 트이는 효험이 있었다.
나의 선천적인 허약체질과 관련하여 외할머니의 약손 처방의 기억은 내가 평생을 두고 고만고만한 정도의, 그러면서도 모질고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갈 정도의 건강 유지에 큰 효험을 주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가령 어릴 적부터 나는 햇빛에 눈을 바로 뜨지 못했고 가끔씩 눈에 핏발이 선 채 눈물을 흘리거나 눈곱이 덕지덕지 끼는 눈병에 자주 시달렸는데,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나를 엎고 나가서 풀밭에 새빨갛게 열려 있는 뱀 딸기를 따서 즙을 내어 내 눈 속에다 흘려 넣어주었다. 그리고 위가 약하고 아래로 처지는 위하수 증세 때문에 소화불량으로 자주 배앓이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외할머니는 손을 비벼 따뜻해진 손바닥을 나의 배 위에 얹어서 문지르기도 하고 주무르기도 하면서 내 손은 약손이다라고 주문을 몇 번이고 외우시면 신통하게도 효험이 있어서 배앓이 고통이 사라지던 것이다. 또 어머니 말대로 거미처럼 허약한 나를 두고 외할머니는 지렁이를 잡아다가 고아서 먹이기도 하고, 개구리를 잡아다가 고아 먹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쥐를 잡아 구워서 먹이기도 했다. 그밖에도 곪아터진 상처에는 느릅나무 껍질을 가루로 처방하여 발라주거나, 목구멍이 붓고 코 안이 헐어서 숨길이 고르지 못할 때는 사마귀나 두꺼비를 잡아 말려서 볶아 만든 가루를 대롱으로 불어 넣어주면 신통하게도 잘 낫던 것이다.
외할머니의 약손 기억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고스란히 집을 짓고 살면서 신통하다는 느낌마저 들곤 했다. 가령 벌레가 귀에 들어가서 진물이 나면서 간지러울 때는 살구 씨 기름이거나 소풀(부추) 즙을 내어 솜에 묻혀 닦아내면 참 잘 치료가 된다. 특히 외할머니의 약손에서는 쑥의 처방이 많이 쓰였는데, 가령 토혈 하혈이 자주 발병하는 마을 아녀자들에게는 계란 크기만 한 쑥 뭉치 두서너 개를 좀 오래 삶아서 하루 세 차례씩 복용한다든지, 코피가 자주 나는 아이에게 마른 쑥을 태워 재 가루를 내어 콧구멍에 불어넣는다든지, 감기로 인한 오한 몸살에 쑥과 생강을 달여 먹이면 곧장 효험이 나타나곤 했다. 그밖에도 몸에 종기나 진물 고름이 그치지 않을 때는 쑥 한 묶음에 식초, 탁주, 약간의 소금을 넣고 진하게 달여서 창호지에 약을 발라 부치면 참 잘 나았다. 마을 아이들 중에 아랫배가 불룩하면서 늘 소화불량으로 배앓이를 심하게 앓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외할머니의 약손은 그런 아이들에게 마른 쑥을 찧어서 배 꼭지 위쪽에 서너 군데에다 침을 발라 붙여놓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주변 어른들에게 아이의 사지를 꽉 붙잡도록 했다. 그러면 아이는 온 전신을 움츠리면서 고통스러워했지만 그러고 나면 아이의 얼굴에 화색 끼가 돌면서 신통하게 나았다. 아마 외할머니의 그런 약손 처방이 옛날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만연되어 있던 위하수를 치료하는 민간요법이 아니었을까? 하고 요즘에 와서야 짐작해 본다.
외할머니의 약손 처방은 세상의 하찮은 물상들을 다양하게 활용하였는데, 그 처방들이 좀은 비위생적이더라도 치료효과는 신기할 정도였던 걸 기억한다. 가령 손발이 저리면 침을 코끝에다 찍어 바른다든지, 뼈를 다치거나 관절이 부어 고생하는 이에게는 어린아이의 노란 똥 덩이를 새까맣게 태워 술에 타서 마시게 한다든지, 마음고생을 하다가 화기가 가슴을 꽉 채워 기색혼절한 젊은 사람에게 돼지 똥을 뜨거운 물에 걸러 마시게 한다든지 등등 참으로 무지스러운 처방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밖에도 마늘, 파, 녹두, 미나리, 배, 은행, 귤껍질, 생강, 뽕잎과 뿌리, 보리, 삼씨, 옥수수수염, 검은콩, 도라지, 냉이 등등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와 풀, 채소와 열매 과일들이 외할머니의 약손을 거치면 모든 게 약효를 나타내던 것이다.
나는 가끔씩 나의 유년시절을 마음의 소리 늪에서 건져 올리면서 참으로 고마운 정으로 외할머니의 약손을 그려내곤 한다. 그리고 한참 후의 일이지만 사람은 먹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병마에 시달리는 괴로움을 전혀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끼곤 한다. 음식과 질병은 사람의 건강과 생존에 대하여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의 일생을 생로병사로 마감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아무리 발달한 현대의학으로도 결국 생로병사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의 병마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말하자면 좀은 과학스럽지 못하더라도 전래되어 오는 민간요법은 참으로 신비스럽다는 느낌을 가져본다. 다음 순간 외할머니의 약손 처방은 천생 허약체질로 태어나 일찍부터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던 나를 아직 이 세상에 있게 한 가장 위대한 은혜이자 고마움의 마음소리 울림이라고 새삼스럽게 되뇌어 본다.
어쨌든 외할머니의 약손은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과 관련하여 참으로 자상하고, 어쩌면 위대한 손으로까지 기억되면서, 나의 동양의학 상식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약손 기억이 그대로 살아서 훗날 나는 한때 한의사가 되는 꿈을 키우면서 당시 동양한의 방송통신대학에 적을 두고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다. 두 학기를 지나는 동안 성적은 올A를 받았고, 상당히 가능성과 소질을 인정받는, 그래서 나만의 자존심을 간추리기도 했던 적이 있다. 훗날 우연한 기회에 침술을 배웠고, 또 한약재상을 하던 먼 친척 형님과 자주 만나면서는 한약재의 특성과 민간요법, 몇 가지 보약 처방과 조제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나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팔자소관은 아무래도 교단을 지키는 일에 적성이었던 것으로 체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육이오 이후 갑자기 가정형편이 옹색하여 관비를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사범학교를 다녔고,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재미를 붙이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뭔가 숙명적인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면서도 그러나 그렇게 많이 후회스럽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잠시 외할머니의 약손과 관련하여 좀 더 운명적이다 싶은 특이한 느낌 하나를 꽤 오래 전부터 가슴에 묻어둔 것이 있음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외할머니의 약손이 항상 끼고 다니던 한 보따리의 고대소설책과 관련된 나의 호기심이 어쩌면 나의 운명적인 마음의 소리 찾기의 실마리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바깥에서 또래 아이들과 놀면서 해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항상 마치 습관처럼 눈을 찌푸리면서, 가끔씩은 눈알이 붉어지면서,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리고 유달스럽게도 눈병이 잦아서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걱정하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그 결과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선생님이 쓰는 칠판글씨가 흐릿하게 보이면서 참으로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나는 지독한 근시안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학교생활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큰 장애가 되었다는 사연이다.
내가 사범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기 직전에 시력검사도 없이 조그마한 변두리 안경점에서 최초로 두꺼운 근시안경을 적당히 맞추어 쓰게 되었다. 당시 안경점 주인이 혀를 끌끌 차면서 내게 건네는 말인즉슨 ‘그걸 눈이라고 달고 다니나’ 하더니, 두꺼운 안경알을 내 눈앞에 갖다 대고는 ‘잘 보이나?’ 한마디뿐이었다. 그런데 당시 안경을 쓰고 바깥세상을 보는 나의 경우 주변이 환해지면서, 약간은 어질어질하면서, 그러나 칠판 글씨가 참 잘 보이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또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간판 글자들이 확 눈앞에 다가서는 것이 참으로 신비스럽고 우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최초로 안경을 쓴 이후 상당한 세월을 보낸 다음 시내 큰 안경점에서 다시 안경을 바꿀 때 시력검사의 결과는 마이너스 4.5의 수치를 나타낼 정도의 거의 약시에 해당되는 지독한 근시안 판정을 받았다. 그러고부터 나는 눈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나름대로의 시력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지독한 근시안은 내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되고부터는 나에게 또한 책벌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할머니의 약손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지만, 항상 약손의 곁에 끼고 다니던 손때 저린 소설책 보따리가 초등학교 사 학년 무렵부터 나로 하여금 고대소설 애독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다음 순간 나는 혼자서, 때로는 침침한 석유등잔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마을 할머니들 앞에서 소설책을 낭낭하게 읽어시던 외할머니의 곱상스럽고 다정다감하던 얼굴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게 된다. 외할머니는 내 어린 날들의 이야기보따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먼 훗날까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동화의 샘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마음의 소리 찾기는 좀 더 오랜 세월 전의 일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내가 흥미를 가지고 어쩌면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소설 읽기와 쓰기에 대한 마음의 싹을 틔운 것은 순전히 외할머니의 손때 묻은 고대소설책 보따리에서 연유된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은 생각을 가져본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까지 소설가의 꿈을 머금고 있는 나의 모습을 있게 한 가장 큰 공로는 순전히 외할머니의 약손과 책 보따리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선 나는 외할머니의 약손에 관련하여 나의 끈질긴 생명력과 함께 항상 끼고 다니던 외할머니의 고대소설책 보따리에서 묻어나는 참으로 귀중한 동화들의 기억을 소리의 늪에서 건져 올리고는 참으로 마음 포근함을 느끼곤 한다.
외할머니는 잠시 일손을 놓을 때마다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가끔씩 밤에는 이웃 할머니들을 모아놓고 구성진 목소리로 읽어주기도 했다. 때로는 소설책을 덮어두고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소설을 읽는 외할머니 곁에서 구성지고 고저장단을 알맞게 구사하는 목소리를 듣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곤 했다. 내가 한숨을 자고 일어나면 그제도 외할머니는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한참 훗날에 안 일지만 조선 후기 고대소설 전성기에 전기수傳奇叟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곧 소설을 전문적으로 낭독하여 들려주는 일을 업으로 삼던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외할머니의 소설 낭독 기술이 전기수의 수준이 아니었을까? 하고 어림짐작을 해 본 적이 있다. 그 찰랑찰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나의 귀 바퀴를 감돌고 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소설 읽기와 주변의 꽤 많은 독자들의 감동 어린 독후감을 마음의 소리 늪에서 건져내고 싶다.
물론 할머니의 독자들은 마을의 늙수그레한 아낙네들이거나 할머니들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었지만 외할머니의 낭낭한 목소리에 울고 웃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독자의 반응도 즉흥적이어서 조그마한 호롱불 주변의 광경은 아직도 내 어린 시절의 동화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소설 읽기는 거의 창작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그것은 장면과 분위기에 따라 고도의 생략법과 적절한 장단완급을, 때로는 음향효과를 곁들여 장면을 구사하였는데, 소설책을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줄거리만 머릿속에 담아두고 구성은 외할머니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재구성하여 변화를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한참 훗날의 일이다. 외할머니의 소설 읽기 장면을 잠시 마음의 소리 늪에서 건져 올려본다.
유 충렬전이던가?
각설하고…‥…이 때 정 한담과 최 일귀는 귀찮은 존재 유 심이를 멀리 연경으로 귀양 보낸 것을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구나. 외할머니는 잠시 뜸을 두고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누군가가 유심이가 누고? 하면서 끼어든다. 아 그 안 있나, 만고 충신 유 충렬이 부친 아니가. 맞다. 잠깐 뜸을 들이다가 외할머니는 계속한다. 만고 충신 유심을 저 멀리 연경 땅으로 귀양살이 보낸 뒤로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하니 온 세상이 그의 눈앞에서 하늘마저 내려다보일 지경에 이르렀겠다. 마침내 그들은 어느 날 밤에 별관으로 옥관도사를 찾아 들어가서 마음속에 깊숙이 숨겨온, 천자를 도모할 묘책을 묻는구나. 이 때 옥관도사 말없이 문밖으로 나서서 조심스럽게 천기를 관찰하고 들어와서 하는 말이, 요새는 밤마다 천기를 살피건대 참으로 이상하구나. 두렵고 요상한 일이로다. 하거늘 정 한담이 몹시 놀라 황급히 그 까닭을 물었것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도사의 설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미리 짐작해 오던 바를 생각하고는 그의 결심을 굳게 다짐한다. 옥관도사 왈, 천상의 황태성이 황성에 비치온대 그 중에서도 유 심의 집에 비쳤다는 말이오. 유심이 비록 저 멀리 연경에 가 있다한들 신기한 영웅이 아직 황성 안에 살아 있다고 보면 그대가 도모할 일도 어려울 듯하오. 이 한마디에 정한담의 기대는 완전히 배신당한 것만 같구나. 그는 확신을 잠시 잃고 마음속으로 무서운 혼란에 빠져들었것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을 잠시 멈추고 정중히 그 자리를 물러 나와서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 일귀를 만난다. 어찌 되었소? 묻는 최일귀의 귀에 대고 정 한담이 도사의 하던 말을 모두 설명하였다. 최 일귀 왈, 그럴 것이오! 도사의 신기함은 천신에 비길 수 있지요. 아직도 신기한 영웅이 황성 안에 있다고 하거더면 진실로 마음이 황공하구려. 정 한담이 왈, 지금 내가 생각하기로는 유 심이 나이 늙어서도 자식이 없지 않았소. 그래서 수년 전에 형산에 올라가서 산제를 지내고 비로소 자식을 두었다는 이야기를 잠시 바람결에 들은 것 같소 만은. 그렇지요, 나도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소. 하거더면 말씀이야. 신기한 영웅이란 건 그 유심의 늦게 둔 자식을 가르키는 말인가 하오. 암! 그렇다면 좋은 도리가 있소. 무슨 도리? 유 심의 집을 아예 함몰해서 후한이 없게끔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 그제서야 정 한담이 자신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구나. 저런 저런. 저 일을 우찌 할꼬………. 마침내 두 간신들이 얼굴을 맞대고 계획을 꾸미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대로 실행은 당장 이날 밤중으로 해치우기로 하였것다. 깊은 밤 삼경 무렵 귀신도 잠들었을 듯한 고요한 밤에 가만히 승상부에 나와 나졸 십여 명을 뽑아내어 유심의 집을 둘러싸고 화약 염초를 듬뿍 갖춰서 그 집 사방에 묻고 화승에 불을 붙여 일시에 불바다로 만들어버리자는 약속을 다짐하였것다. 이렇듯 끔찍한 방화살인 계획을 하건마는 정작 유심의 집에서는 누가 감히 알 수 있었을 것인가? 오로지 남편을 머나먼 연경으로 귀양길 떠나보내고 생이별 슬픔에 잠겨 한숨과 눈물로 아들을 부여잡고 하소연 할 길조차 없는 장 부인이 또한 어찌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으리요. 그렇구 말구. 그런데 장 부인은 누고? 아따 유 충렬이 어마이 아니가. 그래. 그렇제. 아이고 불쌍하다. 어린 유 충렬이 꼼짝없이 죽겠구나. 저 일을 어쩔거나 어쩔거나………. 이쯤에서 어둠침침한 방안은 동네 할머니들의 슬픈 한탄이 섞인 감동의 소리들로 가득 찬다. 때를 맞춰 외할머니는 찬물 한 사발을 반쯤 마시고 잠시 쉰다. 그리 되면 유 충렬이 우찌 되노? 계속하소. 외할머니의 구슬픈 목소리는 좀 느긋이 이어나간다. ……이 때 두 모자 밤늦게까지 한숨만을 쉬고 앉아 있다가 얼핏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취해버리는구나. 특히 장부인은 잠 귀신에 포로가 된 것만 같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그러자 꿈에 전신이 하얀 백발노인이 한 손에 홍선 한 자루를 들고 부인 앞에 슬며시 나타나더니 그 부채를 부인에게 건네주면서 타이르듯 말한다. 오늘 밤 삼경에 큰 변이 있을 것이니 이 부채를 갖고 있다가 불꽃이 일거든 부채를 흔들면서 후원 담장 밑으로 가서 숨으시오. 그러다가 인적이 그치거든 충렬이를 데리고 남쪽을 향해 끝없이 도망하오. 만일 그렇게 못할 때는 옥황께서 주신 아들을 불 속의 고혼이 되게 하고 말 것이오. 부인은 놀라서 깨어 황급히 일어난다. 남가일몽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충렬은 깊이 잠들어 있고 옆에는 노인이 건네준 홍선 한 자루가 놓여 있지 않은가. 장씨 부인은 그것을 들고 몇 번이고 확인해 보면서 신통한 꿈도 다 있구나 한다. 어느덧 삼경 무렵. 아니나 다르랴. 무섭게 사방에서 불길이 일시에 솟아오르며, 일진광풍이 미칠 듯이 회오리쳐 오르는구나. 마치 천불처럼 앞뒤 집채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대대손손 지켜온 커다란 저택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불 지옥을 이룬다. 그 와중에서도 장씨 부인 정신을 차려 어린 충렬을 데리고 또 한 손으로는 노인이 남겨놓은 신비의 부채를 흔들면서 후원의 담장 밑으로 은신하여 거기서 사경이 될 때까지 숨어 있었다. 잠시 인적이 드물어지고 불꽃이 사그라 들 무렵,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도 중문 밖에 군사 두 놈이 지키고 있거늘, 충렬 모 망설이다가 중문으로 나가기를 포기하고 후면 담장 밑에 있는 수채 구멍을 더듬어 뚫고 나갈 결심을 한다. 이 때문에 어머니와 아들의 온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었건만, 그러나 두 모자는 아픈 줄도 모르며 그 길로 인적 뜸한 새 길을 더듬어 남쪽을 향해서 끝없이 도망쳐 나간다. 달빛 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가는 불난 옛집을 뒤에 남겨놓고………. 이 때쯤이면 마을 부인네들의 입에서 후유이- 한숨 쉬는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연이어 그러면 그렇지. 유 충렬이 이제 살아 났구마. 하모 인명재천 아니가. 그렇게 수이 죽을 수야 있나. 외할머니도 이쯤에서 책을 놓고 냉수 한 그릇을 청해 마시며 잠시 쉰다.
그 여가를 틈타서 나는 외할머니의 앞자락에 펼쳐진, 한지를 접어서 묶어진, 손때가 묻어 기름이 밴, 그리고 책 모서리가 닳아 넌더리가 나기까지 한 소설책을 만져보면서 책장을 넘기며 살펴보곤 했다. 세로 글씨로 다닥다닥 이어 내려간, 줄도 약간 비뚤비뚤한 것이 지금 생각으로 짐작컨대 그 소설책의 크기는 사륙배판의 크기로 세로 쪽이 약간 길게 쳐진, 그리고 가는 붓으로 직접 쓴 육필본이었던 것 같다. 글자 모양도 완전히 고체로 <ㅅ계 된소리 부호>와 <아래․자> 가 쓰였던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민초 서민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십전소설 본을 외할머니가 손수 베껴 쓴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곤 한다. 외할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세월을 넘어 나를 휩싼다.
대개의 고전소설들이 중국을 배경으로 영웅호걸들의 무용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조 웅전은 연애담을 전반부에 설정하고 후반부에 무용담을 배치하고 있어 좀은 다른 장면을 만들어 내곤 했다. 좁은 방안에서 희미한 석유등잔불을 중심으로 마을의 아낙네들 오륙 명을 둘러 앉혀놓고 조 웅전의 연애 담을 낭독하기에 이르면 외할머니의 구성진 입담은 마을 아녀자들의 흥미를 참 효과적으로 감동을 고조시켰고, 가끔씩은 깊은 한숨과 눈물까지 글썽거리게 했다.
각설하고………거문고 소리는 또한 더욱 아름다운 노래를 실어다 주는구나. 감명 깊은 소년의 귀로 전신의 신경이 집중되어 듣고 있네. 초산에 남글 베어 객실을 지은 뜻은 인걸을 보렸더니 영웅은 아니 오고 걸객만 흔히 오도다. 석상의 오동 베어 금실을 만든 뜻은 원앙을 보렸더니 오작만 지저운다. 아이야 잔 잡아 술 부어라 만단수회나 풀어볼가 하노라. 얼씨구 조 웅이 가슴에 사랑 병이 들겠구나. 장 소저 거문고 소리에 조 웅 가슴이 활활 타 들러 가것다.. 어 휴이 한숨이 절로 나는구나. 그라문 처녀가 먼저 총각을 꼬시리기 위해 꼬리를 치는 게로구만. 하모 그런 셈이지 대개 안 그렇더나, 가시나가 먼저 꼬리를 흔드는기라. 외할머니는 빙긋이 웃으며 좀 뜸을 들이다가 다시 책을 읽어나간다. 소년은 방으로 달려들어가 행장을 끌러서 퉁소를 찾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침 후원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구나. 조 웅은 퉁소를 입에 대고 화답의 노래를 불러 주변을 살핀다. 십 년을 공부하야 천문도를 배운 뜻은 월궁에 솟아올라 항아님을 보렸더니 세연이 없었던지 은하에 오작교 없어 오르지 못하는구나. 소상의 대를 베어 퉁소를 만든 뜻은 옥섬을 보려 하고, 월하에 슬피 분들 지음을 뉘 알리요. 두어라 알 리 없으니 원객의 수회를 위로할가 하노라. 이 때 위부인 모녀 행적 보소. 후원 별당을 소리 없이 나서서 중문을 조금 열어놓고 소년을 바라보는데, 두 모녀의 얼굴이 그늘 진 달빛 아래서 얼마나 흥분하고, 눈은 얼마나 초롱초롱 빛나는지 참으로 가관이로다. 저런 저런? 홀딱 반했구마. 아녀자가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휴 안 그렇겠나 말이제. 조 웅의 젊은 얼굴은 달빛에 반사되어 백옥처럼 빛나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잘 생긴 얼굴은 월하의 미소년이라. 해서 두 모녀 경탄이 절정에 오르는구나. 위부인 경탄하여 하는 말인 즉슨, 성인이 나시매 귀인이 나고 경애 나매 영웅이 나도다! 그 딸 장 소저는 빨간 얼굴이 더욱 빨개져서 두 손을 양 뺨에 갖다 대고 재빨리 후원 별당으로 도망쳐 버리는 구나. 그 때 퉁소를 끝낸 조 웅은 거문고 화답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때마침 달은 중천에 떠서 휘영청 더욱 밝아온다. 더욱 외로운 마음 달랠 길 없어 한탄하는 말인 즉, 아 거문고 임자는 나의 마음 이렇게 울려놓고 어디로 갔나이까! 이 때 문득 거문고에 맞추어 아름다운 여인의 풍월 읊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구나. 귀를 기울여 검문고 소리를 따라 쫒던 조 웅이 하는 거동 좀 보소. …… 거의 미친 듯한 젊은 조 웅은 자신도 모르게 중문을 밀고 그 아름다운 유혹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서는데 커다란 호기심과 무서운 죄의식이 가슴을 교차하는구나.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는 방문으로 접근하여 되도록 정중히 문을 열었것다. 그 때 방안의 장 소저는 풍월을 멈추고 놀라 기성을 질렀으나 그 소리는 다른 방 잠든 사람을 깨울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것다. 소녀는 기겁하여 이불 속으로 몸을 감추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구나. 상황이 이러할 적에 두 남녀 은근히 주고받는 말 좀 보소. 조 웅 하는 말, 소저는 놀라지 마소서. 나는 초당에 유하는 손이옵더이다. 마침 풍월소리 들리거늘 행여 귀댁 공자이신가 하여 시흥을 탐하여 들어왔더니, 이러한 심규에 남녀 봉책 하였사오니 바라건대 진퇴에 없는 자취를 인도하소서. 소저 왈, 천지가 불변하고 예절이 아직 끊기지 아니하였거늘 신명을 불고하고 이렇듯 범죄하니 바삐 나가 신명을 보존하소서. 조 웅 왈, 꽃 본 나비 불인들 어찌 알며, 물을 본 기러기 어옹을 어찌 두려워 하리요. 바라나니 소저는 빙설 같은 정절을 잠깐 굽혀 외로운 자취를 이웃삼기가 어떠하니이까? 하고 정욕에 불붙은 젊은 조 웅은 성급해져서 여자에게로 접근해간다. 장 소저 크게 공포를 느끼며 이불로 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자기의 몸을 감싸면서 다스곳이 비켜 앉는다. 그러한 소저의 모습을 자기에 대한 순종으로 보고 조 웅은 더욱 대담해져서 그의 짐승 같은 욕정을 더욱 강렬하게 발산하며 자신도 모르게 여자에게 달려드는구나. 여자는 저항을 한다. 남자가 공격을 할수록 필사적인 저항을 한다. 그러나 아! 가련하도다. 흥분한 젊은 조 웅은 여자의 저항이 이어질수록 더욱 난폭해져서 장 소저를 감춘 이불이 이리저리 찟기고 머리는 흩어져서 어떻게 보면 야성적인 아름다움마저 없지 않아 보인다. 폭력의 공방전이 잠시 멈추었을 때 서로는 마주 보며 빙그레 웃고 있지 않는가. 벌써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서로 마음을 허락한 한 쌍의 연인처럼 보이는구나. 또다시 젊은 남녀의 사랑싸움이 공격과 저항으로 시작되었을 때 잠시 장 소저 손으로 상대방을 저지하며 말을 건넨다. 요조숙녀는 군자호구라. 첩인들 공방독침을 좋아 하리오 마는 선영을 생각하니 구대 진사의 후예라. 부모 명령 없고 육례를 행치 못하면 조상님을 뵈올 낯이 없는 죄인이 될 것이고, 문호에 욕이 되면 어찌 살기를 바라리요. 바라옵건대 돌아가 후기약을 두소서. 조 웅이 대답하기를, 말인 즉슨 당연하나 가득한 사정이 염치를 가리었으니 예절을 어찌 분별하리요. 성현 문하에도 유장찬혈지행이 있사오니 명령과 육례는 제왕과 귀부인의 호사라. 나 같은 혈혈단신이 어찌 육례를 바라리요. 다만 내 몸이 매파 되고 상봉으로 육례 삼아 백년가약을 정하리라. 이러한 말장난은 서로의 마음과 욕정을 폭력보다 훨씬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인연을 이루기 마련이다. 조 웅은 소저의 손을 잡고 가만히 끌어당기고, 수줍은 소저는 아무런 저항 없이 활활 얼굴을 붉히는구나. 마침내 서로 뜨거운 몸둥이를 맞대어 비비며, 어루만지며, 황홀한 운우의 쾌락으로 빠져들며, 이불 속에서 허둥대다가 잠시 서로의 존재조차 잊어버린다. 한참 후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부자리를 겨우 정돈하여 나란히 누워 다정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때쯤이면 할머니의 소설 읽기 목소리도 고즈넉해지면서 더욱 차분해지기 마련이다. 방 안 분위기도 좀 무겁게 가라앉으면서 가끔씩 제마다 깊은 한숨소리를 뿜어내기도 한다. 어두컴컴한 초롱불 아래지만 얼굴들이 상기되어 서로 말을 아낀다. 누군가의 입에서, 장 소저하고 조 웅이 첫날밤을 지낸 거라 말이제……. 하모 그런 셈이제. 아이구 좋겠네. 느닷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등잔불빛에 흔들리는 얼굴들이 약간은 분홍색을 띠기도 한다. 모두들 나름대로 환상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외할머니의 소설 읽기는 참으로 다양했고 책 권수도 한 보따리였으니 독서 양도 꽤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훗날 내가 고등학교 국어 선생이 되어 안 일이지만 중국소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름난 고전소설들을 거의 섭렵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마을 아낙네들 앞에서 낭독할 때 외할머니는 다양한 소설 줄거리들을 분위기와 구색을 맞춰서 독창적으로 각색하여 재미있게 구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 고대소설들의 전형적인 장면과 구성의 틀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각각의 장면과 분위기에 알맞은 이야기 틀을 끄집어내어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듯했다. 이를테면 심청의 효성과 춘향의 열애사건, 장화홍련의 비련과 사씨남정기의 가정 갈등 구조, 홍길동의 신출귀몰한 무술과 임경업 장군의 무용담 등이 화소話素의 단위를 이루면서 장면과 분위기에 맞추어 엮어내는 화술은 참으로 뛰어난 작가 수준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전기수의 수준을 넘어서 오히려 시대를 초월하는, 재미있는 소설을 창작하여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참으로 훌륭한 이야기꾼으로 기억된다.
나는 능력 있는 소설가로서 외할머니의 아담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마음의 소리 늪 깊은 곳에 상당한 세월 동안 가만히 가라앉히고 소중히 간직해 온 셈이다. 그리고 나를 오늘까지 이 세상에 있게 한 생명의 은인으로서 훌륭한 민간요법의 치료사로서 외할머니의 영상을 가끔씩 기억의 늪에서 건져 올리곤 한다. 참으로 고우시던 외할머니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선연하다.
불현듯 외할머니는 내 마음의 소리 늪에 숙명적이다 싶은 꽃씨 하나를 던져두고 가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꽃씨가 아름다운 것은 네모로 접혀진 계절의 모서리에서 제마다 피어날 때 아픔과 벅참과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전율되는 엄숙한 순간의 반짝임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 지나 봄, 여름, 가을로 바뀌는 철마다 뿌리로부터 빨아올린 생기를 가만히 머금어 두었다가 치밀하게 겨냥을 하고 섬세하게 바람에 휘감기어 따뜻한 체온을 틈새로 쏘옥 밀어 올리는 그 신비스런 힘은 도대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또 어디든지 싹틔울 어금니 깨무는 힘이 응축되어 시간의 점 하나로 끈끈한 의지와 큰 지혜를 모으고, 축적된 추상으로 하늘을 날고 싶은 희망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어리던 시절 내가 찾아 헤매게 될 마음의 소리 늪에 꽃씨 하나를 머금어 품게 했다.
어쩌면 그 꽃씨가 움을 틔우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후회는 안 하기로 마음 작정을 하면서 평생을 두고 외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을 그리움으로 고이 간직할 것이다.
약력 : 晉州師範, 문교부 시행 중등교사 자격검정고시합격('64), 한국방송통신대학 영어과,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70년대 부산 향토문학 동인지「남부 문학」 동인, 소설작품 다수 발표. 시조문학 동인지 <볍씨>에 시조작품 다수 발표. 교육신문, 교육 관련 월간지 등에 소설, 수필 다수 발표. 전국 공무원 문인협회지 「옥로문학」,「푸른문예」소설부문 신인상. 소설집 <마음의소리찾기>등. 부산교육과학연구원 연구관. 부산시 국공립 중등교장협의회 회장, 충렬고등학교 금정고등학교 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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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전적 소설 잘 읽었습니다.글을 통하여 과거가 현재에 연결되고,그리고 현재에서 미래가 .....누구나 자전적 글을 한번 써보는 것이 의미있다 싶습니다.
유려한 문장력이 한결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외모에서 풍기는 동림의 느낌이 이 소설을 읽으며 그대로 소설 속에서 와 닫았습니다.
외할머니의 약손에 경의를 표합니다 또한 교단을 지켜주신 동림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