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빛 억새 능선을 따라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 *
지리산 서쪽 최고봉인 노고단에서 종석대,고리봉,만복대,세걸산,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
지는 단단한 방책 능선이 바로 서북능선이다. 마치 지리산 속살을 보호하듯이 북으로 길게
감싸안고 있는데 서북능선을 등반하는 데는 여러 기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운봉면 수철리에
서 세동재(世洞峙)를 거쳐 세걸산(世傑山)으로 오르는 코스와 운봉 우무실절에서 바래봉까
지 비포장 산판도로를 따라 오르는 방법, 그리고 산내면 내령리와 부운리에서 팔랑재(八郞
峙),부운재(浮雲峙)등으로 각각 오르는 희미한 길도 있다. 그러나 서북능선 등반에는 보다
치밀한 준비와 주의를 요하기도 한다.
1989년 5월 15일 새벽 4시경 전주에서 모집관광(가이드 산행)차 왔던 일행 147명 중 10
명이 세걸산 부근에서 조난당하여 그 중 이(李)모(37세, 회사원)씨가 숨지고 나머지 9명은
출동한 경찰, 공단직원 등에 의해 다행히 구조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총 32㎞의 거리를 8시
간 동안 마쳐야 하는 다소 무모한 산행 스케줄에다 날씨까지 악화되어 생긴 비극인데 결코
서북능선 등반을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지리산 역사의 첫 페이지는 달궁의 마한왕조
여기에는 현재 관광도로가 관통하여 지나가는 정령치에서 성삼재까지 9㎞구간을 소개하
기로 한다. 두 기점 중 어느 곳에서 출발하더라도 약 4시간 정도 걸리는데 정령치가 해발높이
로 따져 더 높다. 만복대 북쪽 다름재로 빠지는 갈림길을 빼고는 능선 위로 난 등반로도 확연
하고 샘도 정령치 부근과 만복대 남쪽사면에 위치하므로 초심자들도 안심하고 오를 수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만복대 능선 코스는 가을철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는 전형적인
가을 산행 코스로 손꼽힌다. 차라리 요란하고 번잡스럽기까지 한 단풍관광보다 광활한 황금
빛 초원 능선을 호젓하게 걸으며 만추(晩秋)의 정취에 흠뻑 젖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등반기점인 정령치(鄭嶺峙)-한자로 달리 正嶺峙로 표기하기도 함-는 기원 전 84년(서산
대사의 '황령암기'에는 기원 전 78년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고 기록됨)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햐여 정(鄭)장군을 이곳에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지
명이다. 또 하나 이와 비슷한 유래를 가진 것으로 황령재(黃嶺峙)-지금 구체적으로 어느 곳
인지 불확실하지 만덕동리 뒷산 '황나드리'라는 곳으로 추정된다-가 있고, 한편으로 노고단
입구의 성삼재(姓三峙)와 바래봉 남쪽의 팔랑재(八郞峙)도 각각 각성받이 3명 장군과 8명의
병사들이 지키던 수비성터라는 얘기도 있다.
마한에 관한 구체적 역사기록은 그리 많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공식적 역사기록으
로 보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 26년(서기8년) 10월에 백제군에 의해서 마한의 국읍(國邑)이
함락되고 이듬해 4월 원산성과 금현성 등 나머지 두 성마저 정복당해 결구 마한이 멸망한
것으로 나온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 그러나 이 기록과는 달리 부족국가 마한이
그 후에도 계속 존속된 듯하다.
온조왕 34년(서기 16년) 10월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며
백제에 반역하다가 토벌당한 기록과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
복암성(覆巖城) 들어 항복했다는 기록(모두 '삼국사기'이 나오는 걸로 보아 또 3세기 후반
중국과 교류한 점이라든가 4세기경 마한의 일부세력이 전라도 해안에 진출하였다는 기록('일
본서기') 등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마한의 잔여세력이 멸망 후에도 계속 항거?유랑하며 살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볼 때 심원계곡 달궁(達宮, 月宮)마을에 일종의 망명국가로 쫓겨
들어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한 부족국가도 혹시 이들 유랑의 무리 중 하나가 아니었
을까? 김경렬씨는 지리산 달궁의 마한동성은 백제 온조왕의 마한 정복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하고 지리산의 마한왕조는 후에 지리산이 김해 가락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걸로
보아 가야세력에 의해서 정복된 것이 유력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확실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이 부분은 더욱 밝혀져야 하겠지만 지리산 심원계곡 일원에 자리잡은 마한 왕조는 곧
지리산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셈이다.
옛 수비성터 정령치에서 식수 준비라고 출발해야
아직도 옛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령치에는 지금은 넓은 산상 주차장과 휴게시설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식수는 달궁 쪽 도로를 따라 150여m 내려가면 구할 수 있다. 정령치 공터
에서 남쪽으로 빤히 올려다보이는 산불감시 초소 건물을 향해 소나무와 잡초 우거진 길을
오르는 것에서 등반은 시작된다.
일단 자그마한 봉우리에 올라서면 억새와 싸리나무 우거진 능선안부가 잠시 나오고 잡목
이 빽빽한 경사길을 오르게 된다. 여러 갈래로 늘어진 노송과 참나무가 있는 다소 벅찬 길을
조금 가면 높이 10m쯤 되어 보이는 바위 옆을 비켜 올라 경사도 완만해지면서 잠시 후 평탄
한 바위밤석 위에 도착한다. 바로 눈앞에는 유순하게 흘러내린 만복대가 다가오고 사방의
전망이 탁 트인 게 시원하다. 운봉평야가 멀리 내려다보이고 꾸불꾸불한 정령치 도로도 확연
하다. 반야봉의 튼 덩치는 이후로 줄곧 호위라도 하듯이 옆을 따라붙개 되는데 여기서는 노고
단과 천왕봉도 고개를 빼꼼이 내밀어 보인다.
이곳 전망 좋은 쉼터에서 평지 능선길을 따라 얼마 가면 수천 평을 헤아리는 보드라운
초원의 능선안부로 내려가게 된다. 일단 만복대 자락에 들어선 느낌을 강하게 받는데 허리께
차는 억새들이 바람에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억새향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능선안부에서 억새를 헤치며 완만한 오름길을 가다보면 잠시 후 오른쪽으로 능선이 하나
갈라져 뻗어 있고 능선 위로 소로길이 보인다. 요강바위, 다름재로 빠지는 전라남?복도의
경계선이다. 만복대로 오르는 길은 왼쪽으로 휘어져 계속되고 경사도 있다.
만복대 정상에선 화려한 억새 향연이 벌어져
해발 1,433m 만복대 정상에 올라서면 동남쪽으로 약 200m 정도의 능선이 누워있고 남?
북쪽에 두 개의 완만한 골짜기가 펼쳐지는데 주위가 온통 황금빛 초지일색이라 전형적인 시
골 초가집을 연상케 한다. 돌무더기와 몇 개의 구덩이가 패어 있는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산동지방 쪽으로는 경사 급하게 절벽을 이루고 있고 남쪽방향으로는 시암재 주차장과 도로가
보이고 노고단 방송 송신탑이 선명하다. 노고단-임걸령 능선도 뚜렷한데 반야봉은 앙증스러
운 일면을 느끼게한다. 노출된 작은 바위들이 동남쪽으로 몇 개 보이고 왜소한 진달래, 철쭉
도 몇 그루 찾을 수 있지만 만복대는 전체적으로 보아 한번쯤 나뒹 굴고 싶은 수만 평의 광활
한 초생지대이다.
만복대에서 남쪽으로 경사 급한 초원길을 내려서면 좌측으로 어지럽게 희미한 길들이 나
있다. 샘으로 가는 길이다. 싸리나무가 무성한 곳인데 만복대 남쪽 내리막 능선길에서 동쪽으
로 200m쯤 다시 꺾어 내려오면 야영장터와 함께 만복대 샘이 나온다. 수량도 많고 시원하기
그지없다. 샘에서 나와 싸리나무 군락을 헤치며 다시 능선 위로 오면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참나무와 산죽이 우거진 내리막 길이 계속된다. 등반로가 왼편으로 휘어지는 듯하다가 전망
이 좋은 기암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되고 다시 길을 가로막은 잡목숲을 헤치며 얼마 안 가 억새
숲이 장관인 헬기장이 나오고 내리막길은 아직도 계속된다.
계곡 물소리가 왼쪽으로 들려오고 잠시 뒤돌아보면 만복대 정상이 아득한데 억새의 노란
색, 사리의 은회색, 산죽의 푸른색, 참나무잎의 주황색빛이 마치 수직 스펙트럼같이 보인다.
이 코스의 최저지대에 속하는 묘봉재(卯峰峙)에는 또 하나의 헬기장이 있고 심원?산동 쪽으
로 희미한 길이 교차한다. 이 만복대 능선을 등반하다보면 지형적으로 특이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심원 계곡 쪽 동쪽사면은 대개 완만하고 반면 산동지방 쪽 서쪽사면은 거의 급경사를
이룬다. 남원, 곡성, 구례, 운봉 등 큰 도읍으로부터 차단된, 바로 이 천연적 요새다운 면 때문
에 마한의 피난왕조는 물론이요, 한동안 심원계곡 일원에 진을 치기도 한 빨치산측도 유리하
게 버틸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다른 얘기지만 묘봉재 부근이라든가 몇몇 야트막한 고개(재)
에는 참호 흔적이 무성하다. 6?25 전후의 옛 흔적인지 아니면 그후 군사상 필요에 의해
구축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억새와 잡목이 우거져 평화와 생명이 무심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송곳처럼 뾰족한 작은 고리봉에서 속세로
묘봉재에서는 한동안 경사진 길을 올라야 한다. 잡목 우거져서 보행에 지장을 받을 정도인
데 얼마 후 능선평지에 올라서면 앞에 작은고리봉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비교적 평탄한 능선
길을 지나 작은고리봉으로 올라가다보면 정상으로도 길이 나 있지만 동쪽사면을 스치듯 횡단
하는 길도 있으므로 여길 이용하면 고리봉 남쪽사면에 곧 다다른다.
성삼재가 가깝게 다가와 있고 이제는 내리막길과 평지길뿐이다. 소나무숲을 내려와서 잡
목터널을 지나면 헬기장이 나오고 성삼재를 오르내리는 차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온다. 다시
잡목터널을 뚫고 20여 분 가면 곧 성삼재다.
교통과 숙박
성삼재까지는 구례읍에서 정기노선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있지만 정령치에는 없다. 남원
에서 정령치까지 택시요금이 12,000원 정도 하므로 이 편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데 운봉읍에
서 버스를 타고 고기리로 와서 8㎞를 걸어 오를 수도 있다.
정령치에 있는 휴게소도 아직은 여름 휴가철 정도나 개점하는 가건물식 임시매점에 불과
하여 야영할 수밖에 없다. 정령치와 만복대 등에 야영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고 성삼재
에서 3㎞ 더 올라간 노고단에 역시 현대식 산장과 넓은 야영장이 있다. 굳이 민박한다면
정령치에서 20여 리 떨어진 달궁과 고기리 부근을 찾을 수 있다.
이 코스는 대절버스를 이용한 단체관광 형식으로 찾는다면 당일산행 코스로 충분하다. 물
론 서울 등지에서는 1박2일 코스가 된다. 봄철이나 가을철에 메마르고 건조한 만복대 억새밭
을 지날 때는 특히 산불에 조심해줄 것을 새삼스럽게 당부한다.
총거리 12㎞ 등정시간 4시간 00분
하산시간 3시간 10분
아름다운 소와 담이 연속되는 지리산의 빼어난 계곡 명소
남원군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에서 화개재까지 12㎞의 완만한 계곡을 오르는 코스
이다.
여름철을 피하고 가을 단풍을 노려라
뱀사골계곡은 반야봉과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수림지대를 맑은 계류가 기암 괴석을 감돌
아 흐르면서 아름다운 소(沼)와 명소(明所)를 일구어놓은 경치가 빼어난 계곡 중 하나이다.
가히 폭포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계곡이지만 수없이 많은 명승지를 안고 있는 계곡인
데 철다리 10여 개가 중간중간에 가설돼 있고 경사 급한 곳도 없는 넓은 등반로가 차라리
산책로에 가깝다.
때문에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안심하고 찾아올 수 있는 곳에 해당된다. 다만 연중 등반
객의 70이상이 여름철에 몰려 오염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될 정도로 번잡스럽다. 가을철 단풍
도 훌륭하여 많이 소개되고 있는 편이고 겨울철에도 웬만한 장비로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때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참고로 지난 1980년대 초반에 전주 모대학 학생 6명이 이웃 심원계곡 쪽에서 야영하다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 참사도 있었으므로 어느 계곡보다도 유역 면적이 넓은 이곳 뱀사골계
곡에서의 야영은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특히 깊은 소(沼)에서 물놀이하다 익사하는 사건
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므로 호기는 금물이다.
뱀사골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분분하다. 옛날 석실(石室)부근에 배암사라
는 절이 있어서 뱀사로 줄여 부르다가 뱀사골로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뱀소(沼)에서 유래되
어 뱀소골, 뱀사골로 부른다는 한 가닥의 얘기도 있다. 반면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
(死)골이라 부른다고도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예로부터 송림사(松林寺, 지금의 전적기념관에 위치)에는 칠월 칠석날 밤이면 주지스님이
없어져 마을사람들은 부처가 되어 승천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서산
대사가 의아하게 생각하던 중 칠석날 장삼 속에 극약 주머니를 달아 주지스님에게 입혀 예년
처럼 독경을 읽도록 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새벽녘이 되자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큰 뱀이 송림사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뱀의 뒤를 쫓아가보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
기가 뱀소에 죽어 있어 그 배를 갈라보았더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뱀사골은 이처
럼 뱀에 얽힌 얘기도 많고 또 실제로 한동안 뱀이 많이 잡히는 골짜기로 유명했다. 지금은
마구 잡아 그 수효도 격감된 상태라고 하지만 그래도 건강식, 강정제로 그 수요가 끊이질
않아서 뱀탕(湯)과 뱀술(酒)을 파는 집은 뱀사골 주변뿐만 아니라 지리산 주변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489년 4월 중산리 쪽으로 해서 천왕봉을 오르던 김일손(金馹孫)은
그의 기행록에서 "매우 고생스럽게 전진하는데 이제 뾰족뾰족 솟아오르는 산죽을 함부로 밟
고 또 차며 나가니 뱀이 지나가고 도마뱀이 우글거려 길을 막는다"고 적고 있다. [동국여지승
람]에도 지리산 주변 각 군현(郡縣)의 토산물로 백화사(白花蛇)가 자주 등장한다. 최근에는
흑질백장(黑質白章)이나 홍사(紅蛇), 청사(靑蛇) 그리고 커다란 살모사 등을 잡아 한몫 챙긴
사람들도 있어서 지리산 인근 주민들에게는 뱀 잡는 일도 꽤나 유익한 일감이다. 대개 자루
와 집게를 들고 숲을 누비지만 어느 곳에서는 높이 30여cm의 그물망을 쳐직진(直進)성향의
뱀들을 무더기로 훑기도 한다.
옛 송림사터에 자리잡은 전적기념관
반선리(伴仙里)주차장에서 매표소를 지나면 각종 기념품과 건강식품, 음식을 파는 현대식
2층 상가건물이 이어지고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전적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뱀사골과
심원계곡이 만나는 옛 송림사(松林寺)터에 자리잡은 지리산 전적기념관(戰蹟記念館)은 연면
적이 462평방미터의 2층 건물로 1979년 11월 23일 건설부와 국방부가 약 2억원의 예산으로
건립하였다. 제1전시실에는 지리산 전적에 관한 각종 자료와 사진, 모형, 그리고 당시 국군과
빨치산들이 사용하던 장비와 물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전시실은 6?25에 관한 각종 전적
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어 반공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과거에 뱀사골과 반야봉, 심원계곡 일원이 빨치산 근거지로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여순사건
의 주모자인 김지회(金智會)와 홍순석(洪淳錫)을 1949년 4월 9일 이곳 반선마을에서 사살했
기 때문에 여기에 세웠다고 한다. 과거 같은 동족끼리 살점을 뜯고 피를 흘리며 싸워야 했던
비극적 역사의 한 단면을 상기 시켜주는, 지리산 주변에서는 그나마 유일한 곳이다. 단지
안타까운 점은 전시된 자료와 기록들이 대부분 군경(軍警) 토벌대측의 전승(戰勝)에 관한
것이라서 최근 수기류 등으로 출간된 빨치산측의 여러 문제제기에 부합되지 않는 것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보다 객관적인 민족사의 한 페이지로 새롭게 정리되어야만 할 것이
다. 그런 후에 이곳을 불행한 역사 속에서 비운에 숨겨간 군경은 물론 빨치산까지, 그리고
당시 양민들의 억울한 죽음까지도 최소한 진혼할 수 있는 화합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전적기념관을 나오면 계곡 옆으로 뚫린 폭 3~4m 콘크리트 포장길이 계속된다. 이 길을
포기하고 계곡변 소로길을 택해 오를 수도 있는데 결국 두 갈래 길은 석실 부근 제3야영장에
서 만난다. 감나무가 10여 그루 있는 야영장에는 화장실과 간이매점도 있다. 커다란 바위굴
석실과 정진암(岩)을 보고 조금 올라가면 용이 머리를 흔들고 승천(昇天)하는 모습과 같다는
일명 흔들바위 요룡대(搖龍臺)가 나타나고 다시 얼마 오르면 반야교가 나온다. 길이 10m,
폭 20m의 철다리이다. 여기서 얼마 안 가 탁룡소(濯龍沼)가 나온다. 긴 암반 위로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물줄기가 장관이다. 탁룡소에서 금포교를 건너면 용이 못 된 이무기가 살던
곳이라는 뱀소가 나오고 병(甁)모양의 병소와 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한 병풍소 등 기묘한
형상의 소가 연이어진다.
절경 뒤의 슬픈 이야기, 산판도로와 오염
천장이 아치형인 명선교와 옥류교를 거쳐 개울가로 철제난간이 30여m나 계속되는 곳에
소위 정진스님이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제승대가 있다. 제승대에서 30여 분쯤 계곡을
몇 번 건너면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소금가마가 빠졌다는 간장소가 나오고 이제껏 편하던
길은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밭길로 변한다. 뱀사골 상류의 이 일대를 '들돌골'(擧
石谷)이라고 하고 작은 지류와 합쳐지는 곳이 몇 군데 나타나며 경사도 차츰 높아진다. 가끔
어지럽게 난 희미한 길들이 명선봉, 반야봉 쪽으로 나 있는데 옛 빨치산 루트와 도벌꾼들의
통행로이다. 뱀사골계곡 등반로가 잘 다듬어진 이유도 옛 도벌꾼들의 산판도로가 상류까지
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끔 지도상에 삼차, 막차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모두 산판차량
이 드나들던 당시의 명칭이다.
고목이 나뒹굴기도 한 선명한 등반로를 한참 오르면 울창한 숲속 평지에 뱀사골산장과
야영장이 나온다. 1978년 10월 8일 '반야봉산장'이란 이름으로 조립식 철제건물에 지나지
않았던 뱀사골산장은 그후 보수?개축하여 지금은 80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149평방미
터 면적의 아담한 건물로 변했다. 1989년 12월 개통된 뱀사골 산장의 전화번호는
0671-33-1732번이다. 반야봉의 큼직한 덩치 아래에 위치하여 샘물도 풍부한데 주변이 지
저분하여 역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임을 알게 해준다. 산장에서 200m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바로 뱀사골 정상부인 화개재가 나타나 삼도봉과 토끼봉 방향으로 계속 등반할 수
있다.
교통과 숙박
남원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인월을 거쳐 반선리까지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배차되고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부산, 대구, 광주, 등지에서 오는 직행버스가 인월에서 정차하기 때문
에 여기서 30분 거리인 뱀사골의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숙박은 반선리 집단시설지구에 민박집이 다수 있고 산내면 부근과 달궁에도 민박촌이 많
이 있는 편이다. 연휴, 휴가철, 인원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보통 8,000~10,000원 정도 한다.
야영은 석실 부근과 계곡 곳곳에 산재해 있어 불편은 없으리라 본다.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칠불사(七佛寺)에서 토끼봉까지 8㎞의 능선 코스이지만 교통문제
때문에 신흥(新興)에서 출발하므로 실제로는 13㎞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이 코스는 토끼봉
에서 최단 하산 코스로 가끔 이용될 뿐 굳이 식수도 부족한 짜증스런 능선 오르막길을 택해
오르려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신흥의 삼거리에서 좌측의 비포장 2차선 도로를 따라 한참 오르면 범왕리 오송 마을에
도착한다. 수각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우측 다리를 하나 건너면 콘크리
트 포장길을 따라 원 범왕리를 거쳐 칠불사로 오르는 지름길이 각각 있다.
산에 오르는 이치를 새삼 확인하며 고되게 올라
한편 목통마을에서는 계곡을 따라 화개재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은 뱀사골 산장의
물품을 운반하는 길로도 이용된다. 우선 이 칠불사 코스를 오르려면 칠불사 우측 샘터에서
식수를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토끼봉까지는 완전한 능선길이라 식수도 없고 또 토끼봉에서
뱀사골산장, 총각샘 혹은 연하천까지 연계코스까지도 감안하여 식수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칠불사 우측 샘터 위로 산죽숲길을 오르면 소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에 올라선다. 여기서
부터 완만하던 오름길은 차츰 경사 급한 미끄런 흙길로 변하고 갖가지 잡목들로 빽빽한 능선
길이 계속된다. 등반로도 뚜렷하고 리본도 많이 매달려 있다. 서쪽 산비탈을 가로지르는
듯하던 길이 다시 경사 급한 길로 접어들쯤 해서 야영한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북동방향의
이 오르막길은 범왕리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길과 능선 평지에서 만나고 이후로는 참나무가
빽빽히 들어찬 길이 펼쳐있고 대성골, 삼정골이 아득하게 내려다 보인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장중한 산울림으로 들리는 길이다.
평지길과 오르막길이 번갈아 교체되면서 바위 위로 올라서면 토끼봉이다.
이 코스의 등반 기점인 해발 700m의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칠불사(七佛寺)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모은다.
전설에 의하면 가락국(駕洛國)시조 김수로왕의 7왕자가 인도에서 온 외삼촌 보옥선사(寶
玉禪師, 長遊和尙)를 따라 지리산 이곳에 입산수도하여 모두 성불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수로왕 62년, 서기 103년이었다고 하는데 이 자체로 보면 흔히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
되었다고 말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보다 무려 270년이 앞선 시기이다. 그리고
종래의 불교 북래설(北來設)과는 달리 이 땅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직수입됐다느는 남래설(南
來設)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논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아직껏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된 것은 아니고 다만 전설로 전해올 뿐이다.
칠불사는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요람
지금도 칠불사 입구에는 허왕후가 성불한 일곱 아들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영지(影池)가
남아 있고 또한 수로왕이 머물며 범왕사(梵王寺)를 세웠던 범왕리(凡王里), 허왕후가 머물며
천비사(天妃寺)를 세웠던 대비리(大比里)의 지명이 지금도 전한다.
[다큐멘타리 지리산]의 저자 김경렬(金敬烈) 씨는 보옥선사의 불교 전래는,그가 지리산에
들어와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깨우쳐 불법을 전수하고 한때 꽃을 피웠다 할지라도 뿌리깊은
토속신앙, 산천제신(山川諸神) 숭배사상과의 심한 갈등으로 그 전개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면
서도 그러나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온 악기와 음곡은 토속음악에 수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 {잡지 악조}(雜志 樂條)에는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
와 거문고를 배워 속명득(續命得)→귀금(貴今) 선생→안장(安長)과 청장(淸長)→극상(克
相)과 극종(克宗)으로 이어지는 전수체계를 통해 옥보고 스스로가 지은 30곡이 전해 내려온
다고 적혀 있다. 물론 여기서도 쟁점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음악의 전수자들이 어느
연대 사람이고 또 운상원이 어디였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다. 운상원이 과연 7왕자와 보옥선사가 들어와 수도한 칠불암 전대(前代)의 운상원인지 아니
면 운봉지방 근처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옥보고가 보옥선사라는 얘기도 있어 어리둥절
할 뿐이다.
한편 칠불사에는 불가사의한 온돌방 아자방(亞字房)이 지금도 전해 내려온다. 지금은 지
방문화재 144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독특한 온돌구조 때문에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 건축사전]에가지 올라 있는 가히 국보급의 문화재이다. 1949년 음력 정월경에
불에 타버려 구들만 보호되다가 1982년경 복원되어 지금은 스님들의 선방으로 쓰이고 있다.
아자방은 중앙에 십자형 통로가 있고 둘레에 높은 좌선방(坐禪房)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 이중식 온돌은 통로나 높은 방이 모두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보통 한 번에 일곱 짐
정도의 장작을 세 개의 아궁이에 지피면 두 달 정도는 온기가 유지된다고 한다. 아자방 축조
연대에 관해서는 신라 지마왕(祗摩王) 8년(서기 119년)과 신라 효공왕(孝恭王, 897~911년)
때라는 두 가지 얘기가 있는데 아자방을 축조한 사람은 두 시기 모두 담공선사(曇空禪師)로
전해지고 있다.
칠불암은 통일신라 이후로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으로 내려오면서 고려시대 때 정
명, 조선시대 때는 벽송, 부휴, 추월, 서산대사, 인허, 월송, 무가, 백암, 금담, 대은, 초의 등
고승들이 거쳐간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에 중건하였는데 순조 20년(1830
년)에 아자방 건물인 벽안당(碧眼堂)이 역시 실화로 소실되었다가 금담 대운 두 스님이 복구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대웅전인 보광전을 비롯 아자방 건물인 벽안당 등 옛 시설들은 거의
다 갖추었지만 규모는 예전에 못 미친다고 한다. 1980년초 당시 고위 권력층인 허(許)모
씨가 복구사업과 도로공사를 지원했다는 풍문도 들린다.
교통과 숙박
구례읍에서 07:00~18:00까지 하루 8차례 화개를 거쳐 신흥까지 오는 완행버스가 있고
또 의신마을로 들어가는 4차례의 버스편을 화개에서 타고 역시 신흥에서 내리면 된다. 범왕
리까지 들어가는 버스편은 단 한 차례 있는데 대개 저녁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나온다.
민박할 수 있는 곳과 야영할 수 있는 곳이 범왕리와 칠불사 주위에는 거의 없는 편이다.
신흥마을에 민박집이 몇 곳 있는 편이고 쌍계사 쪽 집단시설지 구내에 다수의 민박집이 있으
므로 이곳을 이용하는게 좋을 듯하다. 보통 7,000~10,000원 하며 때에 따라서는 가감되기
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