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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청운실의 운영
1) 청운실(靑雲室)의 시작(1985.11.20)
1985년, 학력 향상을 위하여 우열반(優劣班), 자율 학습(自律學習), 방송 수업(放送授業)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지만 성적은 크게 향상되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 실정에 맞는 방안이 없을까 하고 권영춘(權寧春) 고등학교 2학년 주임(主任)과 2학년 담임 박치대(朴治大), 박재영(朴宰永), 황덕수(黃德洙), 김정채(金正彩), 권영식(權寧植) 교사 등이 모여서 몇 차례 회합을 갖고 연구하였다. 그 결과, 선택된 집단의 집중적인 지도의 필요성이 부각되었고, 그리하여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공부한다는 원칙이 정해졌다. 왜냐하면 전체가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과 우리 학생들은 집에 가면, 집안일을 도와야 하고, TV, 전자오락실, 친구의 유혹 등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행하고 있는 학교(大部分 大.中 都市 所在)가 있었지만 소도시에 기반을 둔 우리 학교로서는 획기적인 안이었다. 그래서 청운실이라 이름하고 세부적인 방안을 세워서 학교에 건의하였다. 교장 선생님께서 쾌히 승락을 하셨다. 2학년담임들의 방안과는 약간 달랐지만 공부방(工夫房)은 현 청운실로, 식사는 학교 앞 가정집에서, 침실은 도서관 지하 이발관을 개조하였다.
입실자는 2학년 학생 36명을 성적순으로 반 강제로 선발하였고, 11월 15일 청운실 개관에 따른 학부형회를 개최하였다. 11월 20일 1기생 36명을 입실시켰다. 지도는 2학년 담임 6명이 돌아가면서 하였다. 당시 일과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06:00 기상(起床), 세면(洗面) 및 운동, 정규 수업 때까지 자율 학습
18:00-24:00 자율 학습, 단 토, 일요일은 귀가
이때 청운실과 침실의 난방은 톱밥 난로를 사용하였다. 30분마다 톱밥을 공급해야 하는데, 이때 톱밥의 먼지와 연기로 저녁부터 아침까지 지도하고 나면, 기관지가 콱 막히는 것 같고 먼지로 온 몸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새벽이면 황덕수(黃德秀) 교사가 와서 학생들을 깨워서 한천(漢川) 둑을 구령과 노래에 발맞춰 구보하였고, 때론 흑응산(黑鷹山)에 올라가 새벽을 가르며 마음껏 소리도 외쳐 보았다. 혹한강행군이었다. 1기생들은 그 어려움을 견디었다. 그 해 겨울방학에 들어가면서 전체교사들이 청운실 지도에 임했다.
2) 청운실의 정착
1986년 3월에 도서관과(圖書館課)가 새로 생기고, 초대 주임으로 장병창 과장(張炳昌課長), 그리고 청운실 업무를 권영식(權寧植) 교사가 맡게 되었다. 식사와 잠자리의 불만이 매우 컸다. 너무나 열악한 조건과 안면방해(安眠妨害)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았다. 퇴실자(退室者)가 속출하였고 빈 자리를 충원하기도 어려웠다. 우선 시급한 대로 청운실과 침실의 난방을 석유난로로 교체하였고, 식사와 잠자리를 자율화하였다. 한숨 돌리는가 했는데 식사 대금 문제와 밥하는 아줌마의 항의가 생겼다.
빈번한 입퇴실자(入退室者)로 인하여 식사 대금의 회수(回收)가 어려웠고, 연체(延滯)된 돈이 상당액에 이르렀다. 학부형들의 협조로 해결하고 나니, 식사를 계속하리라 생각하고 담근 된장 등과 식기류 값을 변상하라고 나서기도 했다. 5월에 숙소를 옛 체육합숙소(體育合宿所)로 이전하고 1학년 3명을 입실시켰다. 기본적인 문제는 대충 해결되었고, 학생들의 공부 자세도 더욱 좋아졌고, 모의고사 결과도 전년도와 비교해 보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 참고로 모의고사 고득점자(高得點者) 수를 비교해 보면,
4월 6월 9월 10월
1985년(청운실 전) 3 1 4 4
1986년(청운실 후) 6 23 17 15
으로 나타났고 최고 득점도 적게는 13점(4月), 많게는 43점(9月)으로 향상된 것으로 나타나 큰 위안이 되었다.
3) 청운실 어려움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여름철에 접어들면서 지하 숙소를 폐쇄하였지만 가끔 잠자는 학생으로부터 피부병이 발생하였고, 전체 학생으로 번지기 시작해서 부득이 한일독서실(韓一讀書室)에서 1주일 간 공부시켰다. 주요한 시기였는데 매우 난감하였다.
그때 한일독서실의 여직원과 동기생인 L 군이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고 지금은 두 자녀의 가장으로, 공무원으로 열심히 생을 개척하고 있는데, 아마 독서실에의 1주일이 큰 계기가 되었다.
그때 피부병도 치료하고 기분 전환도 할 겸 부곡(釜谷)하와이로 심신수련회(心身修練會)를 가졌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에도 방학 때마다 이 수련회를 계속 실시하였다.
청운실 담당 교사들은 입실자 관리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김교용 교장 선생님의 지시에 대한 대처와 선생님들의 건의 사항을 반영하랴, 틈나면 공휴일이고 야간이고 청운실 돌아보랴... 바쁜 나날이었다.
그래도 여러 선생님과 학부형들이 간식(間食)도 제공하였고, 사물함(私物函) 등의 여러 비품이 하나하나 설치되었다. 또 야간에는 선생님들의 협조로 국어, 수학, 영어 야간 수업을 실시하였다.
4) 청운실의 성과
많은 공부 시간의 확보와 입실자들의 선의(善意)의 경쟁 -처음 청운실을 만든 의도대로- 으로 나날이 발전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참고로 앙케이트 실시 중 몇 가지를 보면(應答者 40名)
① 청운실에 들어온 것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가?
ᄀ) 그렇다(30명) : (이유) 분위기 양호, 규칙적 생활, 선의 경쟁, 잡념으로부터 단절, ᄂ) 그저 그렇다(9명) : 이기적이다. 환경 불량, ᄃ) 그렇지 않다. : 자만심이 생겼다.
② 청운실의 학습 분위기는?
ᄀ) 양호(22명), ᄂ) 집과 비슷(8명), ᄃ) 산만(5명), ᄅ) 기타(5명) : 입실자들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③ 청운실에 입실하기 전과 후의 공부 시간은?
ᄀ) 입실 전 : 1-4시간, ᄂ) 입실 후 : 3-8시간
그 해 학력고사를 치루고 뚜껑을 여니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하여 입실자39명 중 33명이 합격하였고, 특히 교원대는 3명이 합격하여 전국에서 가장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학교에 속하게 되었다.
어느 조직체든지 처음에는 큰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1기생들은 묵묵히 참고 견뎌주었다. 11월 20일 학력고사를 치르던 날 2기생이 입실하였다. 이미 2기생(2學年)과 3기생(1學年)이 입실되어 있어서 보강이 된 셈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1학년과 2학년을 입실시킨 것이 성공하였고, 3년을 공부한 3기생이 서울대 2명, 경찰대 1명, 서강대, 사관학교 등 전국 명문대에 다수 합격하여 청운실과 학교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 어려웠던 초창기의 청운실을 4년이나 맡아오며 고생하던 장병창(張炳昌) 선생이 연구주임(硏究主任)으로 가고, 2대 도서관 주임으로 안두식(安斗植) 선생이 왔다(89年 3月). 안 선생이 오고 청운실의 외적인 면에 특히 관심을 두고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 마련에 힘써서 학교측와 학부형의 협조로 에어컨 설치, 기숙사 대폭 수리, 식당 및 휴게실 마련, 냉장고 설치 등으로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완벽한 시설이 마련되었다.
청운실의 성과와 비입실자(非入室者)들과 학부형의 요구 등으로 더 큰 공부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향토실(鄕土室)을 개조하여(90年) 도서실(讀書室, 60席)로 운영하다가 91년 들어서 자운실(紫雲室)로 명명(命名)하고 윤주능(尹柱能) 선생 이하 여러 선생의 열성적인 지도로 청운실에 버금가는 분위기로 정착되었다. 서로 선의의 경쟁으로 보다 나은 결과가 나타났다.
91년 3월 청운실 담당이 김세용(金世龍) 선생께 넘어가면서 7년 동안 맡았던 권영식(權寧植) 교사가 과학과 주임(科學科主任)으로 자리를 옮겼다.
84. 재경 대창동문회 결성(1987.6.27)
김문한(金文漢), 황병극(黃炳極), 황중태(黃重泰) 등 뜻있는 동문(同門)들의 주선으로 1987년 6월 27일 서울 아사원(中國 飮食店)에서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님을 위시한 은사(恩師)들을 모시고 동문수학(同門修學)한 대창(大昌)의 형제 300여 명이 모여서 "동문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모교(母校)의 발전에 참여하자"라는 기치(旗幟)를 높이 들고 재경 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在京大昌中高等學校同門會, 會長 金文漢)를 창립하였다.
이와 같이 발족한 재경 대창동문회는 김문한(金文漢) 회장의 열성적이고 탁월한 지도력으로 1987년 9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仁寺洞) 130의 2 소재 해봉빌딩 305호에 동문회 사무실(電話 733-2212)을 개설하고, 회원 현황(住所, 職場 및 職業) 파악, 동문 기업가의 구인(求人) 업무, 취업 희망 동문들의 직장 알선 등 사업을 전개하였다.
85. 직원상조회 규약 개정
1987년 9월 20일에 대창중고등학교 직원상조회 규약을 개정하였다. 제1조 본회는 대창중고등학교 직원상조회라 칭한다. 제2조 대창중고등학교 직원의 경사, 흉사, 및 전퇴직 때의 상호 부조와 친목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본회는 대창중고등학교 직원으로 구성한다. 제4조 본 회원의 경사, 흉사 및 전·퇴직 때의 상조 규정은 다음과 같다. 1) 경사 ① 본 회원의 회갑, 결혼, 정년퇴임 때 1인당 5,000원정, ② 본 회원의 배우자, 부모 회갑 때 1인당 4,000원정, ③ 본 회원의 자녀 출산 때 1인당 500원정, ④ 본 회원의 직계 자녀 결혼 때 1인당 4,000원정, 2) 흉사 ① 본 회원의 사망 때 1인당 10,000원정, ② 본 회원의 부모, 배우자, 직계 자녀 사망 때 1인당 5,000원정, ③ 본 회원의 조부모 사망 때 1인당 3,000원정, 3) 전퇴직 ① 만 1년 이상 2년 미만은 1,000원으로 하되, 2년 이상일 때는 1년에 200원씩 가산한다. 2년 이상 근무한 회원은 1년 미만이더라도 6개월 이상이면 1년으로 가산한다. 단, 경사, 흉사 각 1항과의 중복 때 2중 부담은 하지 않고, 많은 쪽의 항목에 근거한다. ᄋ 부칙 ① 본 규약의 개정은 회원 전원의 찬성으로 한다. ② 개정안의 금액에 대한 인상은 1988년 1월 1일부터 봉급 인상율을 적용하며 일 단위는 절사한다. ③ 시행은 1987년 9월 20일부터 적용한다.
86. 김정길 선생, 정년 퇴임식
본교에 과학 담당으로 있던 김정길(金政吉) 주임 교사의 정년 퇴임식(停年退任式)이 1989년 8월 26일 12시에 본교 강당에서 있었다. 배순택(裵舜澤) 중학교 교무과장의 사회로, 개식사(開式辭), 국민의례, 국민교육헌장 낭독, 벽천(碧泉) 선생 추모묵념, 약력 소개(略歷紹介), 식사(式辭), 치사(致辭), 격려사, 축사, 국민포장 전수및 기념품 증정, 배별사, 퇴임사, 스승의 노래 제창, 교가 제창, 폐식사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김정길 선생은 흥남공대(興南工大)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함북(咸北) 고무산국민학교 교사(1942.4.1-1944.3.30), 함북 청진(淸津) 수원국민학교 교사 (1944.4.1-1946.8.31), 경상북도 산업국 산림과에 산림주사(山林主事)로서 근무 (1952.2.22-1955.3.15), 대창중고등학교 교사(1955.4.1-1959.3.31), 예천여자고등학교 교사(1959.4.1-1962.2.28), 대창중고등학교 교사(1971.3.5-1989.8.26)로 근무하였다. 이날 전교생과 전교직원, 그리고 내빈들이 모인 데서 정년퇴임식을 하였는데, 우리 학교 사상 이렇게 한 것은 김정길 선생이 처음이었다. 저녁에는 예천읍 동본리에 있는 모 회관에서 교직원들의 송별회가 있었다.
87. 통기타와 함께
1989년 11월 25일(토) 오후 2시 반과 저녁 6시 반에 예천문화원에서 대창고등학교 학생회 음악부 주최로 노래와 기타연주회가 있었다. 인사 말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들이 공부하는 여가를 이용하여 취미로 활동하던 통기타연주와 음악을 발표합니다. 나날이 메말라가는 오늘 날의 학생들에게 꿈과 낭만을 심어주고 가꾸는 것은 참 소망스런 일이라 생각하며 활동해 왔습니다. 막상 여러분 앞에 펼쳐 보이려니 미숙함이 많고 의욕만이 공전하지 않았나 두렵습니다만 우리 청소년들의 아름다운 꿈과 낭만이오니, 함께 즐기는 한마당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대창고등학교 음악부장"
프로그램을 보면, 권오병의 사회 하에 제1부로 박창현의 시 낭송, 변우정과 채유돈(새들처럼/ 떠나가는 배), 윤종식(사노라면/ 상아의 노래), 허정희(Take me Home Cotntry Road/ 꿈에), 허정희와 권오훈(그녀의 웃음소리 뿐/ Holiday), 이정식과 조재근(가시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이세희와 김형성(젊은 여인들/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심기홍(촛불/ 거리에서), 조재근(동해의 태양/ 야화), 권오훈(가시나무/ 제비꽃) 등의 노래가 있었다. 제2부로 통키타와 함께 사모하는 마음, 사랑의 미로, bye bye love, 풀잎 사랑, 사랑해, 짝사랑, Love me tender, 두 개의 작은 별, 사랑, 꿈을 먹는 젊은이, 가을밤, 바위섬, 겨울 아이가 연주되었고, Sing along으로 다함께 노래를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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