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禮曹參議慶州李公傳
[原文]
李公諱慶善,一名慶徵,字君善,慶州人也。其先出於新羅佐命功臣瓢巖公李謁平,世爲東方望族,簪纓相繼,文武並顯。其家聲雖盛,而代遠年湮,至公之世,猶能以儒行自立,不墜其緒。
公生於萬曆庚子。性沈靜寡言,外若柔懦,而內實剛介。幼時不喜嬉遊,常獨坐誦書,或終日不語。其父異之,謂族人曰:「此兒非尋常輩也。」
及長,益篤志於學,不事詞華之習,專攻經史,以聖賢自期。嘗遊於鄕里學者之間,見浮薄之士競逐聲利,輒默然而退,終身不與俗輩交馳。
天啓甲子,登增廣司馬試,爲進士。是時士類競起,而公獨以沉毅見稱。既而復擧文科,於癸酉式年,擢乙科第七,遂登仕籍。時論以爲其學行相稱,非徒以詞章取也。
初,歷任內外職,多在州縣之間。公性不喜煩苛,遇事輒從簡易,雖不務赫赫之政,而民受其安。嘗宰藍浦,凡賦役獄訟,多從寬平,里人稱之曰:「不見威刑,而自無爭訟。」
時或有上官以刻核爲治者,公獨不屑附和,曰:「政在安民,不在立威。」其守如此。
公事親以孝,晨昏定省,未嘗有闕。與昆弟處,雖同堂異室,而情義甚篤,遇財利輒讓之。族中或有爭端,必推公以折之,公輒和解,不使成訟。
家門貴盛,而公常以謙約自守,衣食不求侈靡,出入不事輕華。時人以爲「門高而身卑,貴而能守者,鮮矣」。
及丙子兵亂,胡騎長驅,國勢危蹙。公聞命從軍,隨行在軍。時師旅潰散,諸將失據,人心惶惑,或有遁走者。公獨收散卒,整列旗鼓,雖兵少勢孤,猶不肯退。
敵見其軍中衣紫者,疑爲主將,乃專矢射之。矢如雨集,左右勸避,公曰:「今日之事,義不可退。」遂直前督戰。
公奮身力戰,親斬數人。劍既折,猶以拳擊之,血流被體,志不少衰。久之,中矢數處,猶扶刃立而不仆,終力竭而死。
其臨死之際,無懼色,惟顧左右曰:「勿亂軍伍。」言畢而絕。
公旣沒,朝廷聞之,甚悼惜之,褒其忠節,追贈承政院左承旨,錄其子孫。英宗朝,又命旌其門,遣禮官致祭,褒典累加。
後復議加贈禮曹參議,以顯死節之義。蓋所以崇勸忠烈,使天下知所勸懲也。
嗚呼!士之立身,有以文顯,有以位顯,有以德顯,有以死顯。公則生不甚顯,而死以成其名;位不甚崇,而節足以蓋於一世。
故論者曰:「榮名不在生前之貴,而在死後之義;顯達不在一時之位,而在千載之論。」信哉斯言也。
銘曰:
臨亂不懼,執義以行。
軍潰獨立,志不稍傾。
劍折猶戰,血盡猶鳴。
身雖已沒,忠與名生。
千秋之後,仰止其誠。
丙午年 五月 十八日 慶州後人 李相勳 謹撰
【역주】
沈靜寡言 : 성격이 침착하고 말이 적음
剛介 : 강직하고 절개가 있음
誦書 : 글을 읽고 암송함
競逐聲利 : 명예와 이익을 다투어 추구함
沉毅 : 침착하고 의지가 굳음
文科取人 : 문장 능력으로 선발됨
州縣 : 지방 행정 단위
煩苛 : 번잡하고 엄격한 통치
寬平 : 관대하고 공평함
上官 : 상급 관료
刻核 : 엄격하고 각박함
晨昏定省 :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문안함
異室 : 집은 같으나 방을 달리함
行在軍 : 임금이 피란 중 있는 군영
潰散 : 군대가 무너져 흩어짐
主將失據 : 지휘관이 통제력을 잃음
衣紫 : 고위 관복 착용
矢如雨集 :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옴
力竭 : 힘이 다함
扶刃 : 칼을 의지하여 버팀
絕 : 죽음
【번역문】
증예조참의(贈禮曹參議) 경주이공전(慶州李公傳)
이공의 휘는 경선이며 일명은 경징이고 자는 군선이다. 경주 사람이다. 그의 선대는 신라 개국을 도운 공신 이알평으로부터 나왔으며, 대대로 명문가로 이어져 문무 양면에서 이름이 끊이지 않았다.
공은 1600년에 태어났다. 성품은 조용하고 말이 적었으나 내면은 매우 강직하였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고 책만 읽기도 하였다. 부친은 그를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하였다.
장성한 뒤에는 학문에 전념하여 경전과 역사에 깊이 몰두하였고, 세속의 명리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당시 학자들 가운데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모습을 보면 조용히 물러났으며 끝내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162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어 163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학문과 행실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평하였다.
처음에는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번잡하고 가혹한 정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남포를 다스릴 때에는 세금과 송사를 너그럽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었다.
그는 “정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뜻이 있을 뿐, 위엄을 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부모에게는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고 형제와도 우애가 깊었다. 재산이 생기면 양보하였고, 집안의 분쟁이 있으면 항상 중재하여 화합을 이루게 하였다.
가문이 귀하였으나 항상 검소하게 지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귀하지만 교만하지 않은 드문 인물”이라 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군에 참여하였다. 군대가 무너지고 지휘 체계가 붕괴되었으나 그는 흩어진 병사를 모아 진형을 다시 세웠다.
적군이 자주색 옷을 입은 그를 장수로 오인하고 집중 공격하였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으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끝까지 싸우며 여러 적을 베었고, 칼이 부러진 뒤에도 맨손으로 싸웠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여러 화살을 맞고도 잠시 칼을 짚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해 쓰러져 죽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군대의 질서를 걱정하였다.
그가 죽은 뒤 조정에서는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승정원 좌승지를 추증하고 자손을 등용하였다. 이후 정문을 세우고 제사를 내리는 등 여러 차례 포상이 내려졌다.
후에 다시 논의하여 예조참의로 추증하여 그 절의를 더욱 높였다.
아아, 선비의 삶에는 살아서 이름을 얻는 경우도 있고 죽어서 이름을 얻는 경우도 있다. 그는 살아 있을 때에는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죽음으로 이름을 이루었고, 지위는 높지 않았으나 절개는 영원히 남았다.
병오년 5월 18일 경주후인 이상훈 삼가 찬하다.
【부주】
【부주】
이경선(李慶善, 초명 李慶徵)은 경주이씨 출신으로, 이시발(李時發)의 아들이다. 자는 군선(君善)이며, 1600년(선조 33)에 태어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광주 험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33년(인조 11) 계유 식년 문과에서 을과 제7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교서관·홍문관·성균관 및 예조 등의 관직을 거쳤으며, 1636년에는 남포현감으로 재직하였다. 전사 후에는 충절을 인정받아 1637년 예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경선의 가계는 당시 경주이씨의 유력한 관료 가문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선계는 이경윤(李憬胤)으로부터 이어져 이대건(李大建)을 거쳐 이시발에 이르며, 이시발은 여러 아들을 두었다. 그 가운데 이경휘(李慶徽), 이경억(李慶億), 이경선(李慶善) 등은 각각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 및 지방의 관료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경억은 훗날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이경휘 역시 고위 관직을 역임하여 가문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가계의 형성 과정에서는 혼인 관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시발은 여흥민씨와 고령신씨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이후 후손들도 당대의 여러 사족 및 관료 가문과 혼맥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조선시대 사족 가문에서 흔히 나타나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으며, 가문의 사회적 기반과 인적 관계망이 여러 가문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이경선의 경우 과거방목의 전력(前歷) 항목에 ‘허통(許通)’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의 과정에서 개인의 신분적 조건과 제도적 승인 문제가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경선의 관료 진출은 단순히 개인의 학문적 능력만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의 학문적 역량과 함께 가문적 배경, 제도적 조건, 혼인 관계 및 당시의 사회적 네트워크 등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경선은 이시발의 아들 가운데 측실 소생으로 분류되는 인물들과 함께 기록되기도 한다. 이경충(李慶忠), 이경선(李慶善), 이경종(李慶從) 등이 이에 해당하며, 이들 역시 각각 주부·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 관료 사회에서 적서(嫡庶)의 구분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개인의 능력과 가문의 조건, 그리고 제도적 허용 범위에 따라 일정한 관직 진출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경선의 형제 및 후손들의 혼인 관계를 살펴보면 중앙 관료층과 사족 가문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혼맥은 단순한 가족 관계를 넘어 당시 양반 사회의 정치·사회적 관계망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따라서 이경선의 생애와 가계를 이해할 때에는 한편으로는 병자호란에서 전사한 인물로서의 충절과 관료로서의 행적을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속했던 가문의 사회적 기반과 과거제도, 신분적 조건, 혼인 관계 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이경선이 충절의 인물로 기억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후자의 관점에서는 조선시대 관료층의 형성과 재생산 과정 및 사족 사회의 인적 네트워크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이경선의 사례는 개인의 충절과 관료적 활동이라는 인물사적 측면과, 가문·신분·과거·혼맥이라는 사회사적 측면이 함께 나타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생애를 단순히 가문의 영예를 보여주는 일대기로만 이해하기보다는, 개인의 행적과 당시의 사회적 조건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보다 균형 잡힌 역사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