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병조 : 조선시대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중추적 기관.
업무는 무선·군무·의위(儀衛)·우역·병갑(兵甲)·기장(器仗)·문호(門戶)·관약(管鑰) 등이었다. 이것들은 무관들에 대한 인사 행정과 왕의 행차에 뒤따르는 의장 및 교통에 대한 행정, 그리고 국방을 위한 군인의 조발(調發), 병기 시설의 확보 등 병무행정 일반으로 구분되었으며, 각각 병조 예하의 3개 속사에서 분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처럼 병조는 군정(軍政)을 총괄하는 관서였다.
병조는 군정 업무와 별도로 군사의 지휘 계통을 뜻하는 군령체계(軍令體系)상으로도 중추적 위치에 있었다. 원래 군령기관으로는 의흥삼군부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405년에 병조가 승격되어 승추부를 흡수,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그 예하에 두면서 군령상으로도 병조는 독존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병조 관원으로는 판서(정2품), 참판(종2품), 참의(參議: 정3품 당상), 참지(參知: 정3품 당상)가 각 1원, 정랑(정5품), 좌랑(정6품)이 각 4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사품관(四品官)으로 오른 사람은 병조정랑으로 제수(除授)받을 수 없었고, 정랑을 지낸 사람은 좌랑으로 제수 받을 수 없었다.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3) 墓 : 連山 혹 瑞山
墓(?)井邑市 七寶面 香挑洞(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내 탑주변(탑거리))
✿원촌(院村) 마을
원촌마을은 무성리의 으뜸 마을이며 여기에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고, 서원(書院)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원촌이라고 하였다 한다.
서쪽에 성황산이 있고, 남서쪽에는 화룡산(花龍山)이 있다.
사뫼재는 서쪽에 있으며 백암리 신흥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고, 서죽평(西竹坪)은 북쪽에 있는 들이며, 서쪽에는 은석으로 가는 돌모랭이 모퉁이가 있으며, 성황산 상봉(上峰)에는 서낭당 터가 있다.【정읍시청 - 칠보면 - 마을 유래】
✼ 祭壇碑 : 영운재(永雲齋) 전북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산 213, 산622
✼연안부사 유허비각(延安府使遺虛碑閣)
〖지신공 린(璘)의 증손인 연안부사 계성(繼性)의 유허비가 있다. 공의 자취가 불멸한 가양, 지금의 시산리에 유허비를 세워서 영구히 추모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소재지 : 전북 정읍시 ①칠보면 시산리 동편. 전북 정읍시 칠보면 시산서길 11-4〗
香挑洞設壇 于 井邑 山內面 梅竹里 3월16일 祭焉
✱유허비에는 ㉠延安府使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간 발행된 족보(1916, 1923,1937,1989, 2017)에는 ㉡延山府使로 되어 있음.
㉠ 연안 : 황해도 연백 지역의 옛 지명. 황해남도 남동부에 있는 군.
㉡ 연산군(延山郡) : 황해북도 북부에 있는 군.
① 칠보면(七寶面)
본래 태인군 고현내면(古縣內面)과 남촌일변면(南村一邊面)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두 면을 병합하여 이 지역에 있는 칠보산(七寶山) 이름을 따서 칠보면이라 하고, 정읍시에 편입하였다.
❃ 시산리(詩山里)
본래 태인군 고현내면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행단리(杏壇里), 복호리(伏虎里), 상오리(上五里), 동변동(東邊洞), 원촌리(院村里), 만궁리(滿弓里)와 남촌일변면(南村一邊面), 흥삼리(興三里), 흥이리(興二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옛 고을 대시산(大尸山)의 이름을 따서 시산리라 하고, 정읍시 칠보면에 편입 하였다.
❃ 동편(東遍) 마을
동편마을은 양사재(養士齋)가 창거리에 있으며, 「동촌리」(東村里)라고 부르다가 동편마을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남쪽에 동각(洞閣, 古賢洞 鄕約)이 있어 마을 일을 의논하던 곳이며, 조선조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이 마을 사람들을 교화(敎化)시키기 위한 곳이기도 했다.
○ 태인 고현동 향약(泰仁 古縣洞 鄕約, 寶物 弟 1181號). ○ 용계서원(龍溪書院).
○ 정순왕후 태생유지(定順王后 胎生遺址)가 있다.【정읍시청 - 칠보면 - 마을 유래】
4) 配 ①叔夫人 尙州金氏 父 三司右使 商山君 得齊 祖 左代言 尙城君 祿 曾祖 贊成事 鎰
숙부인 상주김씨 부 삼사우사 상산군 득제 조 좌대언 상성군 록 증조 찬성사 일
묘소 : 전북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에 제단
① 숙부인(淑夫人) : 문무관 정3품의 당상관인 通政大夫·절충장군의 적처(嫡妻)에게 내린 작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時享 五月 첫째주 日曜日
6) 子 四男 長男 宋復元 (官 議政) 次男 宋復享 (官 主簿)
三男 宋復利 (官 吏曺參判) 四男 宋復貞
一女 ①수도군(이덕생)(守道君 李德生)
① 수도군(덕생) : 전주이씨의 수도군파의 종친록에는 부인(礪城君夫人 礪山宋氏)은 추밀원부사(樞密院府事) 여산송씨 송계성(宋繼性)의 따님이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수도군은 정종(定宗 : 조선 제2대 왕. 초명은 방과. 제1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왕위에 올랐으며, 재임 2년 후 보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였고 상왕으로 물러났다)의 7남으로 휘는 덕생(德生)이고 자는 회부(晦夫)이며 호는 묵은(默隱)이다. 어머니는 대사헌 방언(邦彦)의 딸인 숙의 해평 윤씨이다. 해평 윤씨는 수도군 등 4남과 2녀를 두었는데 그 장남이 수도군이다. 초봉(初封)은 수도정(守道正)이고 품계는 명선대부였다. 중봉(重峰) 조헌(趙憲)은 <동현문집>에서 수도군에 대해 이르기를 `조선 건국 초기에 수많은 명현과 절사가 있었으나 특히 종실의 여러 왕자 중 유독 수도군만이 부귀영화를 거절하고 충효겸전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백이(伯夷)의 절개가 있음으로써 또한 칭송을 받았다. 항상 호학수도에만 열중하고 당세의 동방의 안자(顔子)다.'라고 적고 있다. 수도군은 1456년(세조 2) 단종이 손위(遜位)하고 영월 배소로 행차할 때 홀로 배송하고 온 것이 화가 되어 병자사화에 연루되자 호를 `묵은(默隱)'이라 하고 양주 묵은동(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에 있는 자연 마을)에 은거하였다.
7) 公 小時 遊學山房 猝 披寇掠處 倭島三年矣 一日 薪于 海濱見虛舟 適來祝天 跳上 忽遇迅風 一晝夜間得到 扶安 ①黔毛浦 人皆驚嘆欽仰 ②古縣嘉陽里 今 七寶2里
공 소시 유학산방 졸 피구약처 왜도3년의 일일 신우 해빈견허주 적래축천 도상
홀우신풍 일주야간득도 부안 검모포 인개경탄흠앙 고현가양리 금 칠보2리
〖공이 젊어서 ③산방에 유학하던 중 갑자기 왜놈에게 납치되어 일본에 있는지 3년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하루는 해변에 나무하러 갔다가 빈 배 한척이 바다에 떠 있음을 보고 하늘에 빌며 뛰어올랐더니 뜻밖에 쏜살같이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 하룻밤 사이에 부안 검모포(곰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놀라 탄식하고 공경하며 우러러 보았으며 비로써 고현의 가양리에 살았다.【1989년 대동보 1권 93, 96쪽】△ 猝 갑자기 졸 △ 薪 섶 신 섶(땔나무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① 검모포진 :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곰소항에서 영전 사거리쪽으로 1km 지점, 곰소염전 동쪽 해안가 마을이 구진(옛날에는 검모진이라 불렀다)마을인데, 이곳은 조선시대에 수군 진이 설치되어 있었던 곳이다. 문헌에 처음 나오기는 『고려사』공민왕 27년(1378) 7월조에 「왜적이 검모포에 침입하여 전라도 조선을 불태웠다.(倭侵 黔毛浦 焚全羅道漕船)」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검모포는 부안의 남쪽 웅연(곰소)에 있다(黔毛浦 在扶安縣南熊淵)」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 관방조(關防條)에는 「검모포영은 현의 남쪽 51리에 있는데 수군만호 1인이 있다.(黔毛浦營 在縣南五十一里, 水軍萬戶一人)」라고 하였다. 『생략』 『여지도서』 부안지(扶安誌)에는「검모포진은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만호, 군관 18, 진리 16, 지인 6, 사령 9, 군뢰 7(黔毛浦鎭 在縣南 五十里, 萬戶, 軍官 十八, 鎭吏十六, 知印 六, 使令九, 軍牢 七)」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곳 행정구역명이 진서리인데, 이것은 검모포진의 서쪽이란 뜻이고 별도로 鎭東里가 있다. 【부안군지】
② 전라북도 태인현 고현동古縣洞 :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 가양리(嘉陽里) : 시산리 람전(藍田삼리) 서쪽에 있던 마을이었는데 1835년 전후로 대홍수로 마을이 없어진 곳으로 추정되며, 현 지명으로는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남전마을
❃ 삼리(三里) 마을 : 남전마을
삼리마을은 동현 서쪽에 있는 마을이고,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때에는 「가양촌」(嘉陽村)으로 부르다가 그 뒤에는「남전」으로 불렀는데, 그 까닭은 남전은 중국 송(宋)나라의 고을 이름으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이 시행된 고장이여서 그 이름을 따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일 합병이후 1914년 부, 군, 제(府, 郡, 制)가 새향되면서, 고현내면(古縣內面)을 칠보면으로 바꾸면서, 고현내면을 일리(一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사리(四里), 오리(五里), 육리(六里) 등으로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어 삼리로 이 마을을 부르고 있다.
③ 산방 : 산속에 있는 절에서, 중이 거처하는 방. 산속 마을에 있는 집의 방.
☼ 우왕 2년(1376) 병진년. 9월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왜적이 고부(古阜 : 전라북도 고부군)·태산(泰山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흥덕(興德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등지를 침구해 관아를 불사른 다음 다시 보안현(保安縣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인의현(仁義縣 : 전라북도 정읍시)·김제현(金堤縣 : 전라북도 김제군)·장성현(長城縣 : 전라북도 장성군) 등지를 침구했다.
☛ 고려사에 1376년 9월에 고부에 왜적이 침입한 기록으로 보아 이때 피랍되신 것으로 보이는데 1369생이라면 당시 나이는 8세였다.
☛ 여산송씨 수은공(宋郊)께서 처음으로 고려 1300년 초에 터를 잡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宋繼性의 손자인 宋演孫(宋復利의 아들. 중종이 대군시절 스승. 관직 : 통훈대부 평시서령. 증직 : 이조참판)의 비문을 보면 고부에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부에 전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송계성이 1376년 9월에 고부 별장의 산방에서 공부하는 중에 어린나이에 왜적에 피랍되어 3년을 고생하다 천우신조로 탈출하여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고려말 산내면 운주산 아래에서 고현내면(칠보면) 가양리에 터를 잡으신 것으로 보이고 동생인 송계양은 고부에 세거지를 이루게 된다. 【정읍시 칠보면 향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