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m 찰학 카페 /장미와 주판>
소설가 구보 박태원에 대한 생각 / 『구보가 아즉 박태원일 때』
박태원 지음, 류보선 편, 『구보가 아즉 박태원일 때』(깊은샘, 2005)
1.
구보 박태원은 이른바 '월북작가(越北作家)'이다.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간 작가들이 해금된 것은 1987년 유월항쟁이 있은 뒤였다. 금서(禁書)의 시대에 문학사를 공부할 때, ㅇㅇ으로 혹은 ㅁㅁ으로 밖에는 드러낼 수 없었던 슬픈 소설가였다. 그런 까닭으로 그가 28세(1936년)에 쓰고, 30세(1938년)에 출간한 그의 장편소설『川邊風景』과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등은 198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읽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북으로 간 뒤에 쓴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도 그 무렵이 되어서야 책방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대학 1학년(1985년) 문학개론 강의 시간에 월북한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을 무슨 비밀문건처럼 돌려보던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기가 막힌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반공독재(反共獨裁)에 이어 광주를 핏물로 물들이며 그 주검들 위에 들어선 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이 대학의 강의실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문학사의 절반은 절맥되었고, 소통되지 못했다.
오늘, 2005년에 다시 읽는 작가 박태원은 그리하여 눈물겹도록 반갑고, 안타깝다.
2.
구보의 수필, 문학비평을 포함한 에세이를 읽는 일은 즐거움을 넘어 경이롭다. 스무 살 전후로 시작한 본격적인 글쓰기에 있어 그는 가감 없는 스타일리스트이다. 더위를 끔찍해하고, 산에 오르는 일을 어이없어 하며, 여행을 즐기지 않고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애용하며 사과와 파인애플 그리고 바나나를 좋아하는, 천하없는 도심 속의 모더니스트이다. 1989년 깊은샘 판『川邊風景』에 실린 사진을 봐도 영락없다.
에세이의 줄기를 이루는 것은 가족과 문우들이 태반이며, 간혹 기행문을 싣기도 하지만 드물며 문학비평은 신인, 기성작가를 가리지 않고 두루 포괄하고 있다. 또한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것은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비평이며, 일제 말기에 『삼국지』, 『수호전』과 같은 중국소설을 번역한 일이었다.
그에게 문학은 생활이었으며 다시 말하면 일상이 문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문학비평은 신랄하다. 작금의 주례사 비평문과 비교하여 보면, 통쾌하기까지 하다. 스타일리스트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문체, 형식, 기교에 대해서 천착한다. 심지어 한개의 콤마와 을/은 과 같은 조사에까지 칼을 들이댄다. 누구라도 걸리면 여지없이 작살난다.
그런 반면 '구인회'를 중심으로 한 문우들 이를테면, 이태준의 단편과 이상의 날개 그리고 스물 여덟의 나이로 요절한 김유정의 소설에 대해 바치는 헌사는 각별하다. 또한 어린 시절 사숙한 이광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리하여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을 때, 이광수의 매국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문학가동맹의 제1강령이 '일본 제국주의 잔재의 소탕'이었으니 말이다.
3.
구보의 이 수필집을 읽고 있으면 1930~40년대의 세태/풍경, 이를테면 지금처럼 '의사선생님'이 아닌 '의사아저씨'라고 불렀다는 것과 만원전차에서 일어나는 무임승차 행위 같은 것, 또 집에는 어멈/할멈이라고 하는 안짬재기 내지는 일하는 사람을 두었으며 전기를 쓰게 되었으되 미터기를 단 집과 도둑전기를 쓰는 집의 차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딸을 둔 뒤에 아들을 바라는 심정하며 자식없는 이에 대한 연민을 엿볼 수는 있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이때가 일제 식민의 시대라는 것을 도통 알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위 수필집에서는 사회, 정치 경제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작품에서 이데올로기, 내용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카프' 진영 문인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과 같은 맥락은 아닐까. 작품의 내용은 산만하고, 문장은 제대로 안 되고, 문체는 아무런 개성이 없는 것에 대해 구보 박태원은 한마디로 미쳐버린다. 카프 진영에서는 이기영 정도 인정한다. 강경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수련을 요구한다.
문필가에 있어 문체, 기교, 묘사는 기본이라는 그의 말은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 형식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도 간과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용과 형식이 고루 조화를 이룬다면 바랄 게 더 있을까. 내용이 괜찮으면 형식은 지리멸렬이고, 형식의 실험이 신선하면 내용은 없고. '새로운 것과 동시에 참된 것이어야 할 것.' 박태원은 '문장은 간략하게'를 쉬지 않고 되뇌이는데, 그것은 그가 끊임없는 '공부'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보는 한국전쟁 중에 이남에 가족을 남겨두고 북으로 갔다. 읽고 쓰고 하는 일이 전부였던 그는 1956년(48세) 남로당 계열로 몰려 창작활동을 금지 당한다. 그리고 1960년(52세)에 복권되지만 1965년(57세) 망막염으로 실명하고, 1975년(67세)에는 고혈압으로 전신불수가 된다. 완전실명과 전신불수에도 불구하고 구술을 통해 1986년(78세)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완성한다. 그리고 1937년 이상(李箱) 없는 서울이 '너무나 쓸쓸하다'던 그도 이 해, 1986년 78세의 일기로 영면에 든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계기로 '구보학회'가 만들어지고 창립총회를 갖는다는 신문 기사를 보는 나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가정하여 본다. 구보 박태원이 북으로 가지 않고 남에 남았었더라면 그의 문학은 과연 어떠한 행보를 걷게 되었을까. 부질없는 노릇이지만, 하도 안타까워서 원망처럼 그러한 공상도 해보는 것이다. 상허 이태준과 구보 박태원 같은 이들이 이남에 남았더라면 채만식의 <레디 메이드 인생>을 읽고 '권태와 피로를 느낄 뿐'이라던 구보 씨는 과연 어떠한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하고.
첫댓글 지지난 학기였던가요.. 박태원과 이태준 사이를 맴돌면서 그들이 이 곳에 살아남았다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류보선 씨도 같은 생각을 했었네요.*^^* 아마 글쓰는 이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