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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굴포 전라도수영 고찰
이현석(함평문화원장)
Ⅰ. 머리말
Ⅱ. 대굴포 전라수영의 위치 비정(比定)
Ⅲ. 대굴포 전라수영의 국방상 역할(役割)
Ⅳ. 정유재란의 전적지며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대굴포
Ⅴ. 대굴포 부속시설 현장 조사
Ⅵ. 끝말
Ⅰ. 머리말
대굴포 전라수영은 나와 연(緣)이 깊은 것 같다. 그것은 대굴포의 문헌상 기록이나 위치 등에 대해서 학계에서도 관심 밖에 있었던 1981년부터 대굴포에 대한 문헌 기록을 찾아 현 학교면 대곡으로 위치를 비정(比定)한 글을 몇 번 발표하였고, 조선왕조실록 국역본 CD-ROM이 제작되기 전인 1992년에 태종․세종실록 국역본을 검색하여 1993년 1월에 간행한「함평군문헌사료집」중권에 ‘대굴포전라수영 사료’를 실었으며, 2003년 1월에 이정호 등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조사진과 함께 수영과 관련된 부속시설에 대한 현장 조사를 하였고, 같은 해 4월「함평 대굴포 전라수영(咸平大堀浦全羅水營)」이라는 조사 보고서가 발간되었으며, 2005년 영산강 고대문화 복원사업에 대굴포 전라수영 복원이 책정되어 있어 앞으로 이 사업에도 참여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글은 향토사 정리의 입장에서 쓰고자 한다.
Ⅱ. 대굴포 전라수영의 위치 비정(比定)
조선 건국 초기에는 전라도 수영이 현 전라북도 옥구(沃溝)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태종 8년(1408) 12월에 옥구는 전라도 해안의 중앙에 있지 않아 방비 허점이 많다는 전라도 도절제사의 상소에 따라 당시 무안현이었던 대굴포로 전라수영을 옮겼다.1)
1) 태종 8년 12월 24일 (정유)
전라도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가 사의(事宜)를 두어 조목을 올렸다.
‘-전략- 옥구(沃溝)의 수영은 해로(海路)의 중앙이 아니기 때문에 진수(鎭戍)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비옵건데 수영을 모두 옥구진에 붙이고 해도(海島)의 중앙인 무안현의 대굴포로 수영을 옮기소서.-후략-’
세종 14년(1432) 10월 20일 전라도 순찰사 정흠지(鄭欽之)의 상계에 따라 대굴포에 있던 전라도 수영을 당시 무안현이었던 목포만호(木浦萬戶)로 옮겼다.2)
2) 세종 14년(1432) 10월 20일 (을사)
전라도 순찰사 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본도의 수영을 목포(木浦)에 옮겨 설치하고 목포의 병선을 황원(黃原)의 남면 주량(周梁. 현 해남군 화원면 일원)에 옮겨 정박하게 하고 진도의 서면 소가포(蘇可浦)에 수영의 병선 3~4척을 매달 윤번으로 세워 정박하여 수호하게 하옵소서’ 하므로 이를 의정부, 제조(諸曹),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에 명을 내려 함께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아뢴 바에 따르심이 옳겠나이다.’ 하므로 그대로 좇았다.
1440년 목포의 전라도 수영을 해남의 황원(黃源)으로 옮겼으며 성종 10년(1479) 1월 6일에 해안선이 길어서 1개의 수영으로 방비가 어렵다는 이극배(李克培)의 상계에 의해 황원의 전라도수영이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 정3품)인 전라도우수영이 되었고, 당시 순천부 내례포(內禮浦. 현 여수시)에 전라도좌수영을 설치했다.
이상의 실록으로 대굴포 전라수영은 1408년에 설치되어 24년 만인 1432년에 폐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세종 14년(1432)에 찬진(撰進)된 세종실록 지
지리지에 수군처치사영인 무안현 대굴포 전라수영에 전선 24척(대선 8척. 중선 16척), 수군 1895명이 배치되었다는 기록은 대굴포 수영의 규모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굴포의 문헌상 기록이나 위치 등에 대해서 주무관서라 할 수 있는 해군본부는 물론 학계에서조차 관심에서 벗어난 채 1970년대 말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또 옛 문헌들이 대굴포로 기록한 곳은 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으로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함평군으로 편입된 무안현 진례면이다.
따라서 무안군은 편출된 지역이여서 관심이 없었고, 함평군에서는 당시만 해도 향토사연구가 초창기 단계여서 이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옛 진례면 지명 중 대굴포, 대굴산, 대굴사라는 지명이 전해오지 않기 때문이다.
1981년 초에 이르러 광주일보에서 “옛터” (집필 김정호)를 연재하면서 대굴포 전라수영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바 있고, “내고장전통가꾸기” 함평군편이 편찬되면서 필자가 편찬위원 한 사람으로 대굴포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현지를 답사 정리하여 게재했었다.
그 뒤 자료를 더 보강하여 작성한 ‘전라수영 대굴포의 위치 고찰’ 이란 논문을「함향(함평군향토문화회지)」 창간호(1989)와 「향토문화(한국향토사전국협의회지)」제 1집(1989)에 발표한 바 있다.
이 때 정리한 자료는 아래와 같다.
1432년에 맹사성, 윤희 등이 찬진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 관방수어(關防守禦) 항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무안현 대굴포(大堀浦)에 있고 대선 8척, 중선 16척, 군 1895명, 초공(梢工) 21명이 있다.’ 고 했고,
무안현의 관방항에
‘대굴포 수군처치사영 : 병선이 정박해 있다.’ 고 하였다.
1485년 김종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체제를 바꾸고 내용도 대폭 수정하여 보완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무안현의 산천항에
‘대굴포는 현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나주 금강(錦江)의 하류다. 고려 때 이 강을 지세에 등져 흐르는 3대강의 하나로 쳤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푸른 강 천만 이랑에 외로운 배 떠 있네
봉우리 끝에는 붉은 해를 보내고 바다 밑에 흰달 맞이하네
물가에 가득한 모래 서리 같고 공중에 연한 물결 눈(雪)인양
고기잡이 젓대소리 서너 곡조에 갈대 사이 절로 처량하구나’ 하였다.
불우(佛宇)항에
‘대굴사(大堀寺) : 대굴산에 있다. 김극기의 시에
서호(西湖)에 흥취를 따라 멀리 백련(白蓮) 스님을 찾네
대숲 동산에 가을 일찍 맞이하고 소나무 가린 창문은 새벽빛을 늦게 보내네
푸른 이끼는 깨끗한 길에 다투어 자라고 푸른 덩굴은 성긴 울타리를 기웠네
돌아가는 말고삐 재촉해 무엇하랴. 인간의 길은 평탄하지 않은데’ 하였다.
또 고적(古跡)항에
‘고수영(古水營) : 대굴포에 있다. 지금은 해남으로 옮겼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고종 때 증보한 재신증보본 비고 항에
‘강소창(舡所倉)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舡字는 船의 俗字)
1757~1765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고사(庫舍)항에
‘선소창(船所倉)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사호강(沙湖江. 현 영산강 중하류)의 사호포(沙湖浦) 동쪽에 산을 그리고 그 밑에 대굴포(大掘浦)를 표기했다.
1865년에 김정호(金正浩)가 완성시킨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산천조에
‘대굴산(大掘山)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하였고 산수(山水) 항에
‘대굴포(大掘浦) : 현의 동남쪽 20리에 있고 우수영의 옛터가 있다.’ 하였다. 창고항에
‘강소창(舡所倉)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하였으며 고적항에
‘고수영 : 현의 동쪽 20리 대굴포에 있었고 해남으로 이설하였다.’ 고 하였다.
1871년 간행 무안현읍지(務安縣邑誌) 창고항에
‘선소창(船所倉)이 현의 남쪽 20리에 있고 어변정(禦變亭)’이 있다고 하였다.
1822년 이후에 저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진례면(進禮面) 이름 왼쪽에 산을 그리고 대굴산(大掘山)이라 표기했다.
1924년에 발행한 면성지(綿城誌)의 산천조에
‘대굴산은 일명 서흥산(瑞興山) 산으로 현의 동쪽 20리 진례 속금산(束金山) 서쪽에 있는 산인데 다음과 같은 김대유(金大有)의 시가 전해온다.
강상에는 전조(前朝)의 절이 있고
층층 바위에는 빨간 기운 서려있네
학사가 분명 기록하거늘
천년 실은 탑이 구름을 뚫은 절을 보네
또 대굴사에 대해서는
일명 옥천암(玉泉庵)이라고 하며 대굴산에 있고 언제 창건했는지는 모르나 현종 정미년(顯宗丁未年. 1667)에 절이 퇴폐되어 현감 어진열(魚震說)이 철거를 하고 불상과 기물은 총지사(摠持寺)에 보내고 산은 어진열이 소유하였다.’ 라 하였다.
이들 기록들에 의해 속금산 서쪽의 산을 답사해 보니 현재 지네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지네봉, 한편으로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과 같이 보이는 바위가 있다하여 책봉으로 불리우는 산의 층층 바위가 붉은 기가 서려 있는 것까지 청사진처럼 김대유의 시와 같았고 전조의 절이 있다는 구절을 뒷받침할 고려청자와 조선시대 분청자 파편, 깨진 기왓장들이 산 아래 밭에서 무수히 나왔고, 절터로 확증되는 밭의 바로 위 북쪽에 무안현감을 지낸 어진열의 아버지 묘소가 있으며 어씨 문중에서도 ‘중들을 울리며 쫓아냈다.’ 라는 말을 했다.
또 절터 근처의 대숲은 김극기의 시를 연떨어진 곳에 어떤 가믐에도
논 몇 두락에 물을 댈 수 있는 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을 마을 사람들이 옥천(玉泉)이라 부른다. 지세에 등져 물이 흐른다는 배류지인 배야까지는 1㎞ 거리다.
대굴산과 대굴사를 문헌 기록에 의해서 정확히 찾아낸 것이다.
마을 앞의 도랑에 있는 평펀한 바위는 수위는 수통막(水統幕), 배야가 펼쳐지는 망월동 마을의 얕은 산은 동막(東幕), 동막에서 남쪽 강기슭에 자리한 언덕은 빈정(賓亭)이라 부르고 있다. 배들의 통제소가 있어 수통막이라 했고, 동막은 동쪽의 초소며 빈정은 외래객을 맞는 정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사람들이 마을 동쪽의 골짜기를 양창(糧倉), 양창 앞의 득량(得梁)골 절벽 위 등성이를 창골, 창등이라 부르며 기왓장 파편과 주추가 있어 기록으로 전해오는 선소창(船所倉) 또는 강소창(舡所倉)과 일치하는 지점이 된다.
이 곳은 현재 학교면 곡창리 대곡(大谷)마을 이며, 1789년 ‘호구총수 지명’ 진례면 조에 ‘대곡(大谷)’ 으로 표기된곳과 일치한다. 골짜기를 뜻하는 우리말은 ‘굴’ 과 ‘골’이 함께 쓰임을 볼 수 있다. '대사동(大寺洞)’ 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골짜기를 ‘한젓굴’ ‘한절골’ ‘한적굴’ ‘한적골’ 로 부르는가 하면 ‘수박굴’ ‘수박골’ 로 쓰는 것이 그 예이다.
세종실록지리지가 발행되던 때 대굴포도 굴과 골이 함께 쓰임에 의해 훗날 표기가 ‘굴(堀)’이 아닌 ‘곡(谷)’이 되어 ‘대곡(大谷)’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
배들의 정박지였을 포구는 현재 토사에 의해 논이 되었고식수원이었을 옥천은 마을 간이상수원으로 쓰고 있다.
또 위의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1789년 당시에 마을 이름이 ‘大谷’으로 불리는데 보편화되었지만 1822년 해동지도를 만들 때 ‘대굴산’을 표기하였고,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1861년에 대굴포를 표기하였으니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자료가 전하였거나 당시까지도 대굴포라는 지명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Ⅲ. 대굴포 전라수영의 국방상 역할(役割)
대굴포로 전라수영을 옮긴 주원인은 고려말부터 조선조 초까지 왜구가 전국 각지에 자주 침입하여 극심한 피해를 주었는데 그 중 남서해안의 침입에 적극적인 방어와 즉각 대응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수군처치사영이 대굴포로 옮기면서 대굴포를 중심으로 우도와 좌도로 나누어졌고, 우도는 도만호인 원곶(垣串. 현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과 만호진인 목포, 다경포, 법성포, 검모포, 군산, 좌도는 도만호진인 여도량, 만호진인 내례, 돌산, 축두, 녹도, 녹도, 회령포, 마도, 달량, 어란으로 편성되어 병선과 수군, 초공 등이 보강 배치되었다.3)
3) 전라도 수군진 현황 <세종실록 권 151. 지리지>
편제(編制)
명 칭
군선 정박처(軍船碇泊處)
대선
중선
맹선
(猛船)
별선
(別船)
군사
수
초공
(梢工)
수군처치사영
(水軍處置使營)
대굴포(大堀浦)
무안현 대굴포(務安縣 大堀浦)
8
16
1,895
21
우
도
도만호(都萬戶)
원곶(垣串)
함평현 남 원곶(咸平縣南垣串)
8
10
1,055
9
만호(萬戶)
목포(木浦)
무안현 남 목포(務安縣南木浦)
9
2
490
4
만호(萬戶)
다경포(多慶浦)
무안현 서 다경포(務安縣西多慶浦)
4
4
479
4
만호(萬戶)
법성포(法聖浦)
영광군 북 법성포(靈光郡北法聖浦)
6
2
493
4
만호(萬戶)
검모포(黔毛浦)
부안현 남 웅연(扶安縣南熊淵)
4
4
455
4
만호(萬戶)
군산(群山)
옥구군 북 진포(沃溝郡北鎭浦)
4
4
461
4
좌
도
도만호(都萬戶)
여도량(呂島梁)
보성군 동 여도량(寶城郡東呂島梁)
6
12
1.012
19
만호(萬戶)
내례(內禮)
순천부 남 미포(順天府南彌浦)
6
6
766
6
만호(萬戶)
돌산(突山)
순천부 남 용문포(順天府南龍門浦)
8
518
4
만호(萬戶)
축두(築頭)
고흥현 남 고흥포(高興縣南高興浦)
6
2
512
4
만호(萬戶)
녹도(鹿島)
장흥부 동 녹도량(長興府東鹿島梁)
6
2
483
4
만호(萬戶)
회령포(會寧浦)
장흥부 남 주포(長興府南周浦)
4
4
472
4
만호(萬戶)
마도(馬島)
강진현 남 원포(康津縣南垣浦)
8
510
4
만호(萬戶)
달량(達梁)
영암군 남 달량(靈岩郡南達梁)
7
2
517
4
만호(萬戶)
어란(於蘭)
해진군 남 삼촌포(海珍郡南三寸浦)
4
480
4
대굴포로 전라수영을 옮긴 9년 후인 태종 17년(1417) 광산현(光山縣. 현 광주광역시 송정동)에 있던 전라병영(全羅兵營)을 남쪽 연해안지역인 강진군 병영으로 이영한 이후 왜구의 침입은 아주 크게 줄었으니 대굴포 수영의 일차적 방위 역할은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대굴포 전라수영의 기록은「조선왕조실록」과「금성일기(錦城日記)」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위의 두 기록을 검토해 보면 대굴포에 수영이 있던 당시에 가장 큰 역할은 세종 원년(1419) 6월 20일 대마도 정벌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함평 대굴포 전라수영」(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2003)에서는
“세종 1년(1419) 6월에 이루어진 대마도 정벌은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불리운다.
당시 왜구는 흉년으로 인해 중국의 해안으로 향하던 중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의 도두음곶(都頭音串. 현 충남 서천군 동면 두둔리)과 황해도 해주 연평곶(延平串) 에 침구하여 불태우고 노획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로, 우박(禹博), 이숙무(李叔畝), 황의(黃義)를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도절제사, 박초(朴礎), 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절제사로, 김을지(金乙知), 이순몽(李順蒙)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 전라, 충청의 병선 227척과 군사17,285명을 주고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대마도 정벌과 관련하여「세종실록」1년 5월 16일조에 박초와 우박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병선과 군사 및 군기들을 점검한 후 징발하기 위해 나주에 내려 온 사실이 실려 있고,「금성일기」세종 1년 5월조에 좌수군도절제사 유습, 절제사 박실, 박초, 첨절제사 장기사(張奇思), 병마사 김우생(金祐生), 한을기(韓乙奇), 남득량(南得良), 지병마사 이호(李浩), 이즙(李楫), 박홍신(朴弘信), 병마부사 박동수(朴東秀), 박무양(朴茂陽), 손유호(孫攸好) 등이 대마도를 정벌할 일로 나주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대마도 정벌에 관한 기록 중 대굴포수영과 직접 관련 된 기사는 찾을 수 없지만 대마도 정벌을 위해 전라 병선과 수군을 징발했다는「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금성일기」의 기사는 당시 전라수영이었던 대굴포의 역할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즉 당시 대굴포가 서남해안 수군 방어의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대마도 정벌을 위해 대굴포 수영을 통해 병선과 군사를 징발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기해동정 때 좌군도절제사였던 박초가 당시 전라수군도절사였던 사실은 이에 수반하여 대굴포수영의 역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세종 1년 5월조 대마도 정벌을 위해 나주를 지나갔다는「금성일기」의 기사는 당시 대마도 정벌의 중심적 인물들이 대굴포수군진으로 내려가던 상황을 기록한 것임에 틀림없다.” 고 정리하고 있다.
대마도 정벌과 관련된 중요 인물들이 대굴포에 집결하였다면 이곳이 당시 대마도 정벌을 위해 서남해안지역 군사와 병선들의 집결지, 또는 이와 관련한 지휘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Ⅳ. 정유재란의 전적지며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대굴포
대굴포는 정유재란 때 왜군과 격전을 벌린 전적지라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으며, 2003년 7월 10일부터 전남매일에서 거북선이 대굴포에서 제작되었다는 기획특집(글 : 정철 기자․양권승 사단법인 한국족보학연구소 부소장)을 연재한 바가 있다.
먼저 정유재란 때 왜군과 격전을 벌린 전적지에 대해 살펴보면 무안 출신 구암 김충수(龜巖金忠秀. 선무원종공신 1등훈)의 행장에 정유재란이 일어나니 집안에서 심부름하는 사람과 마을 사람은 물론 인근의 뜻을 같이하는 천여명을 규합하여 관군을 돕고자 길을 떠나려던 1597년 9월 5일 적의 배가 몽탄강을 거슬러 올라오니 부인 금성나씨(나덕원-羅德元-의 누이)와 두 어린 아들을 대굴산에 은신케 하고 병졸을 사포나루에 모이게 하여 준비된 배에 올라 적을 맞아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대굴산으로 후퇴하여 진을 치고 싸웠으나 사로잡혔다. 적이 항복을 권유했으나 ‘나는 조선의 신하인데 어찌 너희들에게 항복할 수 있느냐?’며 굽히지 않았다. 적은 좌우로 서서 공의 몸을 후리쳐 죽게 하였다. 부인 금성나씨도 함께 순절하였다.
또 무안읍 고절리 보평산(寶平山)에서 왜군과 접전하던 의병 지도자 송백(宋珀), 박간 등이 사로잡혀 피살되고, 박제(朴悌)와 송욱(宋頊)이 남은 의병을 거
느리고 대굴포에 이르러 김충수 의병 부대와 합세하여 싸웠으나 패하자 송욱은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고 박제는 탈출하였다. <무안군전통가꾸기 1981. 무안군사 1994>
곤재 정개청(困齋鄭介淸) 문하생으로 대학자며 무역선단의 대선주였던 해광 송제민(海狂宋劑民)이 대굴포 서쪽 1㎞ 지점인 사포의 언덕에 백일홍당(百日紅堂)을 짓고 우거하였으며, 그의 아들 송타(宋柁)가 대곡마을 앞 창등 득량골 벼랑에 층층이 쌓은 바위들이 있는데 이 바위들을 해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적의 배를 격침시키기 위해 타가 주도하여 쌓았으므로 사람들이 ‘송장군바위’라 불렀다고 전하며, 1597년 9월 5일 왜적 수군 7,000여명이 사포에 상륙하여 이곳 일대에서 무안․함평의 의병들과 대접전을 벌렸고 불행히 의병이 패하였으며 타는 밤에 포로가 되어 한산(閒山)바다까지 끌려갔고, 배안 사람들과 밀모하여 적의 무기를 빼앗아 모두 베었으나 적 하나가 부상한 채 피하여 이 사실을 알리자 왜선 수십 척이 몰려들었다. 타는
‘나는 광주에 사는 송해광의 아들 타다.’ 라고 크게 외치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 일을 같이 배에 탔던 평창 사람 진사 이신(李紳)이 일본에서 영광 사람 수은 강항(睡隱姜沆)에게 알렸고, 강항이 1600년에 귀국하여 송씨 가문에 전했다.
초혼하여 대곡마을 앞산의 묘좌에 있는 부인 성주김씨 묘 곁에 장례하였다. <송타 행장>
2003년 7월 10일부터 전남매일에서 거북선이 대굴포에서 제작되었다는 기획특집에서는, 거북선은 고려말부터 남해안과 영산강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의 기습공격에 대비한 공수 전용 전함으로 대굴포에서 처음 제작되었으며, 태종 15년 병조의 좌대언으로 있던 나주 출신 탁신의 상소에 의해 성능이 강화되고 외형이 개조되었고, 나주 노안 출신 신숙주에 의해 중국, 일본, 유구국 선박의 장점을 살려 거북선을 재개량했으나 왜구의 소멸로 인해 그 효용이 떨어져 200여년 세월이 흐르다가 왜적의 침입을 예견한 곤재 정개청(주 : 1588년 곤재의 도이장욕설-島夷將慾說- 상소문을 말한 것 같음)과 그의 문도인 송제민, 오익창
(吳益昌), 나덕신(羅德愼), 나덕명(羅德明)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羅大用), 박만천(朴萬天), 나치용(羅致用), 이설(李渫)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에서 다시 건조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제민의 해광집,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과 번앙집,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 임환의 습정유고(習靜遺稿), 임전(任錪)의 명고집(鳴皐集), 나대용, 박만천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고, 대굴포는 고려말 나주시 문평 출신 정지(鄭地)와 전북 부안 위도 출신 이희가 왜구 방어책 10조를 통해 전함 제작의 최적지로 지목하였으며, 바다에 인접한 선소보다 내륙에 있는 대굴포의 선소가 왜적의 급습을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고, 고려말에 제작된 구선(龜船. 거북선)이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나대용, 송제민 등에 의해 재 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전함 제작과 해전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정지의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던 광산탁씨, 홍주송씨, 예안이씨, 광산김씨, 나주나씨, 금성나씨, 담양김씨, 무안박씨, 함평이씨, 함양오씨, 양성이씨, 고령신씨 등을 통해 거북선 설계도 또는 제작 기술이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고 하였다.
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창기한 김천일 장군 휘하의 의병이 무려 500척의 전함을 동원하여 강화도 양화진 전투를 벌렸던 것은 막하 종사관인 송제민, 이광주 등이 선박 제작 기술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거북선을 건조했던 나대용, 나치용, 이설 등이 영산강 유역의 나주 출신이며 나주에서 창의한 김천일 장군과 송제민, 이광주, 임환, 양산룡(梁山龍) 등 가문과 복합적인 혼인 관계에서 그 개연성을 유추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또 양 부소장은 정유재란을 전후해서도 대굴포에서 거북선이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니 1597년 9월 3일 영산강을 거슬러 침투해 올라 온 왜적의 기습 공격으로 대굴포에 정박, 제작 중이던 거북선과 전함들이 고스란히 수장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순신 장군이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도수군절제사(정 3품)에 임명되었고, 난중일기에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조달 받았다고 했으며, 동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실험을 했다고 하였다. 부임 1년만의
(吳益昌), 나덕신(羅德愼), 나덕명(羅德明)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羅大用), 박만천(朴萬天), 나치용(羅致用), 이설(李渫)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에서 다시 건조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제민의 해광집,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과 번앙집,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 임환의 습정유고(習靜遺稿), 임전(任錪)의 명고집(鳴皐集), 나대용, 박만천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고, 대굴포는 고려말 나주시 문평 출신 정지(鄭地)와 전북 부안 위도 출신 이희가 왜구 방어책 10조를 통해 전함 제작의 최적지로 지목하였으며, 바다에 인접한 선소보다 내륙에 있는 대굴포의 선소가 왜적의 급습을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고, 고려말에 제작된 구선(龜船. 거북선)이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나대용, 송제민 등에 의해 재 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전함 제작과 해전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정지의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던 광산탁씨, 홍주송씨, 예안이씨, 광산김씨, 나주나씨, 금성나씨, 담양김씨, 무안박씨, 함평이씨, 함양오씨, 양성이씨, 고령신씨 등을 통해 거북선 설계도 또는 제작 기술이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고 하였다.
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창기한 김천일 장군 휘하의 의병이 무려 500척의 전함을 동원하여 강화도 양화진 전투를 벌렸던 것은 막하 종사관인 송제민, 이광주 등이 선박 제작 기술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거북선을 건조했던 나대용, 나치용, 이설 등이 영산강 유역의 나주 출신이며 나주에서 창의한 김천일 장군과 송제민, 이광주, 임환, 양산룡(梁山龍) 등 가문과 복합적인 혼인 관계에서 그 개연성을 유추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또 양 부소장은 정유재란을 전후해서도 대굴포에서 거북선이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니 1597년 9월 3일 영산강을 거슬러 침투해 올라 온 왜적의 기습 공격으로 대굴포에 정박, 제작 중이던 거북선과 전함들이 고스란히 수장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순신 장군이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도수군절제사(정 3품)에 임명되었고, 난중일기에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조달 받았다고 했으며, 동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실험을 했다고 하였다. 부임 1년만의
단 시일에 거북선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1591년 이전에 연구 또는 제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제작소가 대굴포였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대굴포 앞 창등이 옛 기록에 나오는 선소창(船所倉. 舡所倉)이라면 그 가능성은 더욱 크다. 선소창의 치폐 기록을 아직 찾지 못해 전라수영을 옮기기 이전에 선소창이 세워졌고 수영을 옮긴 이후에도 선소창은 존속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고수영(古水營)은 지금은 이설했다고 기록하면서 강소창(舡所倉)은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고만 기록한 것을 보면 당시에 존속하고 있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강소창은 앞으로 더욱 주목하여 밝혀야할 유적이다.
특집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송제민이 우거했던 백일홍당 바로 위 옥수봉 남쪽 기슭에 나대용의 아들인 원(源), 손자인 우량(友良), 증손 만기(萬紀), 현손 재신(再新)의 묘소가 있어 더한층 대굴포와의 연을 깊게 하고 있다.
Ⅴ. 대굴포 부속시설 현장 조사
2003년 1월에 이정호(李正鎬) 등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조사진과 함께 수영터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 1과 창고지(양창-糧倉)로 추정 되는 유물산포지 2와 선소창지(船所倉址)로 추정건물지, 그리고 대굴사지를 조사하였다.
1. 유물산포지 1 <수영터로 추정>
절대좌표 : N 34°59′24.5″ E 126°33′04.6″
대곡 마을 중앙부에 해당하는 민가를 중심으로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이곳은 대곡 마을을 감싸고 있는 대굴산의 지맥 말단부로 해발 10m 정도의 평지이며 지금은 밭과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물이 산포한 범위는 마을 북쪽에 위치하는 대수골과 서쪽에 (林道) 진입로주변을 포함한 약 15,00평의 넓은 지역이다. 수습유물은 청자, 분신설된 임도청
2. 유물산포지 2 <창고지(양창)로 추정>
절대좌표 : N 34°59′14.7″ E 126°33′29.9″
대곡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친지골 골짜기에 위치하며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전한다. 곳곳에 대숲이 우거져 있어 유구를 확인하기 어렵다. 유물이 수습된 지역은 산기슭 대숲 사인인데 민묘를 조성하기 위해 길을 닦는 과정에서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청자, 도기편 등이다.
3. 건물지 <선소창지로 추정>
절대좌표 : N 34°59′10.9″ E 126°33′28.5″
유물산포지 2에서 남쪽으로 50여m 떨어진 득량골 벼랑위 구릉에 위치하며 마을 사람들이 창등, 선소창이라 부르는 곳에 있다. 북쪽 부분은 군도를 개설하면서 절개되었으며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은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하고 잡목과 소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건물지 곳곳에는 건물의 부재로 판단되는 석열과 석재가 노출되어 있으며 다량의 기와편들이 산재해 있고, 노출된 석열은 전체 길이가 8m로 다양한 크기의 활석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습 유물은 와적(瓦積)과 수지(樹枝)무늬 평기와와 숫기와편 등이다.
4. 대굴사지
절대좌표 : N 34°59′26.4″E 126°33′15.8″
현재 최영호 소유의 민가 뒷편 어씨 선산을 중심으로 한 넓은 지역이다. 대굴사는 태종 7년(1414) 12월 신사(辛巳)에 여러 고을에서 복을 빌 명찰(名刹)을 발표할 때 천태종 사찰로 강진의 무위사(無爲寺)와 함께 발표된 대가람이었다.
현재 대굴사지에는 대숲과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수습된 유물은 기와를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도기편, 청자편, 그리고 조선시대의 분청자, 백자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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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굴포 전라수영은 조선 초기에 전라도에 있던 단 하나의 수군 지휘소로 창궐하던 왜구의 침탈을 막았으며, 세종 원년 6월 대마도정벌을 위해 서남해안지역 군사와 병선들의 집결지, 또는 이와 관련한 지휘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고, 정유재란 때 격전지였다는 점에서 사적지로 지정하는 것이 옳으며, 거북선이 이곳에서 제작되었다는 전남매일의 특집은 앞으로 주목하여 연구해야할 과제다.
영산강 고대문화 복원사업이 이루어질 때 철저히 기획된 발굴조사가 먼저 이루어져 유적의 성격을 손상하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