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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1919년 10월 이전의 상해임시정부는 미국을 비롯하여 구미열강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무장투쟁노선을 부정하고 외교노선에만 치우쳤다. 11월초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부터 상해임정에서는 독립전쟁론이 지배적 조류가 되었는데 지난날 외교노선 위주의 안창호도 1920년의 〈신년축사〉에서 ‘독립전쟁을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라고 하면서 ‘진실로 독립전쟁을 주장할 때 반드시 일제히 이동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후 임정의 포고문이나 독립신문의 사설에서도 독립전쟁론이 빈번하게 논의되었다. 1920년 1월에는 ‘육군임시군제’ • ‘육군임시군구제’ • ‘육군무관학교조례’ 등을 제정하였으며 1920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이동휘는 시정방침으로서 ‘독립전쟁올 대대적으로 개시하기 위해 ’군사지식 양성’ • ‘의용병 모집’ 등을 제시하였다. 이동휘는 또한 11월 29일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임정의 대방침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가운데서 “우리독립이 국제연맹에 대한 요구에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최후 철혈주의로 해결되리라고 보는가?”고 질문하면서 자기는 “철혈주의에 의하여만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이숭만의 답복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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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에서 ‘독립전쟁의 개시’라고 전하여지고 있는 1920년 6월 7일의 봉오동전투는 연변의 반일무장단체들이 1920년초부터 빈번히 두만강을 건너 북부조선의 일본경비기관을 습격하여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를 소란시킨 결과 불안을 느낀 일본군이 두만강 강안을 습격한 한인 반일부대를 추격하여 연변에 칩입하였다가 왕청현 춘명향 鳳格洞에서 홍범도가 지휘하는 반일연합부대의 매복전에 걸려 섬멸적인 타격을 받은 이름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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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에 참가한 반일부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있다.
첫째, 중국조선족력사발자취총서의 1권 〈개척>편에서는 봉오동전투에 참가한 부대의 총 병력은 300여명이라고 하면서 ,홍범도부대, 최명록의 독군부 4개 중대, 신민단부대 그리고 허형권의 소대가 참전하였다고 하였는데 그중 흥범도부대가 얼마이고 신민단부대도 얼마인가 하는 구체적인 숫자는 없다. 둘째로 부대의 배치 위치가 명확하지 않으며 허형근 소대는 신민단부대인지 아니면 어느 부대인지도 불명확하다.
둘째,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교전 당시의 반일부대는 흥범도가 지휘하는 부대 63명, 독군부 부대 100명, 신민단 이흥수가 지휘하는 부대 60여명이고 총병력은 200여명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봉오동정황약도>는 반일부대와 일본군의 배치 및 전투시의 병력이동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였다. 즉 봉오동 상촌의 삼개 지방의 골안길(봉오동 중촌으로부터 북으로 가는길) 건너 북쪽고지에는 흥범도부대, 북동 북쪽 고지에 (왕청현 대감자로 가는 길과 고려령으로 가는 두 갈래 길 중간에 있는 고지) 1개부대(부대명 미상), 홍범도부대의 길건너 남쪽고지 (남동에서 비파동 방향으로 가는 골짝 길 건너면 서쪽고지)에 최명록부대가, 최명록부대의 서남 개활지에는 신민단부대가 각기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셋째, 1920년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 l남부지방회의 ‘호외’에서는 ‘참전부대는 북로독군부 (홍범도 최명록)부대와 신민단부대 30명”이라고 하였다.
넷째, 1968년 최계립(최봉설)의 회고록에서는 홍범도부대 1개 중대, 최명록 독군부부대 2개 중대와 의군부부대가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또 당시 흥범도부대가 최명록이 있는 붕오동에 가게 된 원인, 최명록 2개중대장의 이름은 강우흥과 강채정인데 자기와는 나자구 사관학교의 동창이며 가까운 동지였다고 하였다. 그의 회억록에서는 또 당시 부대의 배치상황을 홍범도가 “독군부군대는 산에 올라서 복병”하라고하여 두 중대장은 부대롤 산에 오르게 하였으며 “의군부부대는 길 서편별판에 엎드려 있다가 내(홍범도)명령에 의하여 (기발로 신호)사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하면서 일본군이 ‘산 절반이나 올라갔
을 때 홍범도군과 의군부군에서 사격을 시작하여 왜놈을 멸망시켰다.” 고 하였다.[정신문화연구원,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 편) 76 ∼77. 최계립이 김세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명록 독군부가 5월에 북로독군부로 편성할때의 병력은 2개 중대라는 것이 정확하며 독군부 내에서 군인들이 최명록에게 불만이 있어서 부대률 거느리고 떠나려는 계획이 탄로나 국민회에서 파견한 두 중대장은 처벌을 받게 되니 국민회에서는 홍범도를 파견하여 최명록 부대를 검열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봉오동전투 때 최계립은 강무흥의 처남인 국민회군 참모장 정일무 • 정기선 등은 국민회 제2북부지방인 영안에 있었는데 강무흥 등이 최명록에게서 ‘형별’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정일무와 정기선은 그곳에서 떠나 하마탕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 편지는 최계립이 김세일의 문장에서 잘못된 것을 시정하라고 한 편지였다.]
이상 네가지의 다른 주장을 종합 분석하여 보면 첫째 봉오동 전투에 참가한 부대는 홍범도부대 • 최명록 독군부부대라는 것은 4개 자료가 모두 일치하고 있다. 둘째 신민단부대의 참가문제도 최계립의 회고록 이외에 3개 자료가 모두 일치한다. 다만 군민회 남부지방회는 신민단군 30명이라고 하고 일제자료에서는 신민단 이흥수 지휘하에 60명이라고 하였다. 셋째 의군부군이 참가하였다는 것은 최계립의 회고에서만 주장하고 다른 기록에는 없다. 그리고 허형권 소대가 참가하였다는 것도 〈개척>에서만 제기되었다.
둘째 최계립의 회고대로 홍범도가 6월 6일 최명록 독군부부대를 검열하여 갔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신빙성이 있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면 홍범도는 전투가 아니며 또 부대의 이동도 아닌 이상 전부 부대(모두 2개 중대의 산포대)를 인솔하고 갈 수 없었으니 1개 중대 또는 63명이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셋째 독군부 부대가 국민회군과 합하여 정일 제1군 제3대대로 편입되어 이전 대대가 4개 중대로 된 것은 봉오동전투 이후인 7월 초경의일이다. 즉 봉오동전투때 독군부군은 4개 중대가 아니고 2개 중대 또는 일제의 자료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약 100여명이라고 한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만약 7월 이후의 병력대로 4개 중대가 참가하였다면 총병력이 400명 이상이나 된다. 이것은 너무나 과장된 수이다.
넷째, 최계립의 회고에 의군부군이 참가하였다고 하면서 독군부군은 산에 오르는 한편 기마병을 의군부에 파견하여 응원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당시 의군부는 봉오동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회고라고 본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의군부는 연길현 의란구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의란구는 봉오동에서 서쪽 방향으로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와는 달리 신민단군은 봉오동에서 멀지않은 석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최계립이 말하는 의군부는 신민단에 대한 착각이 아닌가 한다. 특히 이흥수가 지휘한 선민단 50여명은 6월 4일 삼둔자 전투, 5일밤 삼둔자 북쪽 고지에서 남양수비대의 보초선을 습격하다가 봉오동방향으로 후퇴하였다고 하였으며, 6월 7일 새벽 후안산전투도 신민단이 진행하다가 봉오동 골짜기 끝으
로 후퇴하였다. 그러므로 안천월강추격대는 신민단을 추격하여 가야하로부터 봉오동으로 침입하였기에 봉오동 전투에 신민단군이 참가하였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개척〉에서 말하는 허형곤 소대 문제인데 만약 허형근 소대가 봉오동 전투에 참가하였다면 그의 소속이 홍범도군인지 아니면 신민단군인지 알 수 없다. 서쪽 홈차기에 매복하였다면 신민단의 1개 소대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홍범도가 자기 1개 소대를 특별히 매복시켰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봉오동 전투에서 반일부대와 직접 싸웠고 또 그후 전문적으로 전적지를 조사한 일제의 자료는 무시할 수 없는 근거라고 본다. 나는 홍범도부대 1개 중대, 최명록 부대 2개 중대와 신민단의 60여명(이흥수부대), 합계 250 ∼300명이 참가하였다는 것을 개인적인 의견으로 남겨둔다. 홍범도와 이흥수는 대종교인으로 이흥수는 해방후 홍익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고 대종교 총전교 및 대종교유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대종교의 지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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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전과에 대하여서도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일제는 “20여명을 죽이고 교전 4시간 이후 이를 격퇴”하였다고 하면서 본 전투에서 “자기들은 1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하였다. 7월 3일 간도 국자가에 있는 일본 영사분관에 소속된 경부 와구의(和久井)가 조사한 <복명서〉에서는 “아군의 전사 병졸 1 명, 부상 5명, 7명 또는 10여명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6월 22 일 상해 〈독립신문〉에서는 “적 사상병 12명 아군(반일부대)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국무원이 입수한 통신을 받고 공포한 〈號外>에 근거하여 ‘적 120명을 섬멸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일본군의 “적 20여명 사살”이나 <독립신문>에서 “시체 24”라고한 것은 전투 3일 후 반일부대에서 전쟁터를 정리하면서 마을 특히 ‘남동의 남녀노소 24명의 시체를 처리하고 부상자 2명이 있었다는것”과 동일한 숫자이기에 그것은 반일부대의 전사자가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의 사상 수자였다. 6월 24일 <독립신문>의 보도에는 또 ‘적의 사자 60, 부상자 50 이고 아군은 부상자 2명’이라고 하고 “촌민의 사상자는 9명”이라고 보도하였다.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 1남부지방회의 ‘호와’에서는 또 “적 전진
부대 150명을 섬멸하고 아군사망자는 근근히 3명”이라고 보도하였다.
6월 13일 간도국민회 제2지방회의 <공보〉에서는 ‘“1. 적의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기 1명. 병졸 49명이 즉사. 2. 중경사자수는 미상. 3.아군의 황백하. 군인 주택렬 두씨가 순난 경상 2명, 피해를 받은 부녀와 아동 16명 그리고 소 6두 • 개 2마리가 피해. 4. 무기 20자루 및 기타 잡품 약간을 노획“이라고 보도하였다.
6월 14 일 연길보위단 제 1대 대장 서육련은 상급에 보고하기를 “본월 6일 본인은 변복하고 단신으로 그곳으로 가니 7일 아침 3시 월경한 일본군 120 ∼ 130명이 대장 안천소좌의 지휘 아래에 왕청현 고려령 초모정자 즉 전투지점 일대를 침입하였는데 무릇 한민들 촌이면 집집마다 수색하고 사격하여 한민 남녀 17명을 살해하였다. 초모청자에 이르렀을 때 독립군 200여명과 맞닥뜨린 쌍방은 대항사격을 하였는데 독립군은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 당하였는데 일본군은 병사 49명과 장교 3명이 죽었다. 시체는 그날로 모두 모아 수레에 실어 가져갔다. 독립군은 보총 13자루를 노획하였는례 이로서 전투는 끝났다”고 하였다.[연길도윤공서 외교과, 〈왕청현 물報韓짧L等제 20호〉 民國9년∼ 10년 제40호권 연변자치주당안관장서]
내가 생각하기에도 상기 서육련의 보고는 비교적 사실에 부합된다고 본다. 그것은 첫째 서육련은 변복을 입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본군의 뒤를 따라 전투상황을 관찰하였고 전투 이후 일본군이 시체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자였다.
둘째는 서육련의 보고는 상기 국민회 제2북부지방회의 ‘공보’와 비록 숫자는 다르나 일본군의 총 살상자수와 백성들의 사망수는 기본상 일치한다. 그리고 제 2북부지방회의 공보는 성축과 가축의 수해수가 구체적이고 오직 무기노획수가 다르다.
셋째 국민회 제2북부지방회는 봉오동 근처인 석형 부근에 있었으니 그 어느 지방보다도 전투상황을 잘 알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서육련과 제2북부지방회의 보고나 통보는 신병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제 2북부지방회의 통보에서 대대장 1명이 죽었다는 것은 오보로 보인다.
대대장이라면 안천소좌를 말하는데 안천은 그후 돌아가서 이번 전투상황을 보고한 일이 있었고, 특히 동년 10월 21일 청산리전역의 백운평전투에서 선봉추격대 90명을 거느리고 직소에서 북로군정서의 교성대와 싸웠다. 어떤 자료에서는 안천소좌가 거느린 1개 대대병력이 참가하였다고 나오는데 과장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평시 편제에 근거하면 보병 1개 대대는 600-700명의 병력이다. 이런 과정으로 하여 전과에서도 "120명 또는 150명을 섬멸”하였다고 하는데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
1920년 일본 육군 편제에 의하면 1개 사단은 2개 여단 병력 8,000∼l만명, 1개 여단은 2개 연대 병력 4,000여명, 1개 연대는 3개 대대 병력 2,000여명, 1개 대대는 4개 중대 병력 600명, 1개 중대는 4개 소대 병력 120명 가량, 1개 소대는 3개 분대 병력 40명 가량이었다. 기병 27연대 주력의 군마는 360필, 기병 한 개 중대의 군마는 96필, 1개 소대는 30필이었다고 한다.
봉오동전투 승리의 의의는 자못 크다. 첫째 전투의 승리는 연변반일부대와 민중들의 반일독립의지를 크게 고무하였다. 일제는 당시 반일단체의 반영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우리 월강추격대에 반항 교전한 불령단은 이번 전투에서 매우 큰 승리를 취득하고 아군을 조선측에 격퇴한 것처럼 고취하며 따라서 이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말하면서 금후 계속하여 전투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군량준비, 간호대의 조직, 청장년 모집 등에 더욱 박차롤 가하고 있다…. 그리고 격문을 산발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이번 전투를 교묘하게 악용하여 기세를 높이고 있다”라고 하였다.
상기 일제의 반면적인 자료를 통해서도 당시 반일부대와 민중들의 반일기세를 엿볼 수 있다고 본다.
둘째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연변 각지 반일부대들의 통합을 촉진하였다. 전투 승리 이후 각지의 반일무장단체들은 협동전선의 필요성을 심각히 느꼈다. 전투 승리 후 봉오동 부근에는 다수의 반일단체가 집결하였는데 이를 기회로 6월 21 일 가야하의 장암동에서 단체대표들이 모여 각 단체의 통합문제를 토의하였다.
셋째 각 단체들은 대일작전올 위해 무장 장비와 군사훈련에 힘썼으으며 군수 물자의 장만에 힘썼다. 예컨대 6월 중순 최명록은 노령에서 온 무기를 접수하기 위해 훈춘현 태명구에 가서 보총 50자루 • 탄알 1.200발, 기관총 1정을 접수하여 왔으며 각지 부대에서도 무기구입과 운수에 힘을 경주하였다. 이리하여 8월에 이르러서는 각지 반일부대의 장비는 크게 강화되었다. 국민회의 각 지방회에서는 또 군사통신망의 건립, 군량준비 및 간호대의 조직 등에 힘썼는데, 남부총회에서는 경호대를 기초로 32명의 간호대를 조직하여 붕오동방면으로 보냈다. 나자구의사부는 만단의 준비를 갖추면서 일단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포고하기 전 언제든지 출동하겠다고 하였다.
넷째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또 중국 영토인 연변으로 침입한 일본군을 격퇴한 반침략전이기도 하였다. 그려므로 연변지방 군경들은 비록 봉계군벌의 명령에 의하여 표면상으로는 한인반일부대를 취체하는 것처럼 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동정 • 지지 • 비호하였다. 상술한 바 봉오동전투 때 왕청현 가야하의 순경들의 실례가 이를 보여 주고 있다. 봉오동전투의 송리는 비단 조선민족해방운동사 뿐만 아니라 연변 각 민족 나아가서는 동북인민들의 반일 반침략투쟁사에도 빛나는 편장을 기록하여 놓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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