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손을 내밀면 바람이 잡힐 것만 같고 저 산등성을 넘으면 그리운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사각거리던 속닥거림도 만추 그 환희의 물결도 언제인듯 사라지고 초연히 그네들끼리 서 있었다. 11월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자작나무일 것이라고 단정했던 나는 마음이 조급해 지거나 스산스러울 때마다 그들을 찾아가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그다지 화려하지도 눈이 시린 원색초록도 아닌 민낮 수수함으로 한여름을 보낸 그들은 쪽머리를 한 여인의 단아함으로 가을을 맞는다. 비에 젖은 나목 자작을 보며 11월은 성찰의 시간,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절기라는 것도 그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숲에서 치유케 하는 피톤치드나 산소, 자연의 기운 등 임상적인 이로움을 제공해 주는 나무들과 달리 자작나무는 영혼을 치유하는 신비스러움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다만 영감을 통한 소통이 그들과 함께했을 때 가능하다.
전두환 정권시절 서슬이 시퍼렇든 형사들의 눈을 피해 찾아간 강원도 인재의 어느 산골에서 자작나무들을 처음 만났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친구는 그물망 같은 감시망을 피해 용케도 그 곳으로 숨어 들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던 내게 친구는 언제인듯 나무 박사가 되어 자작들의 내면과 역사를 속속들이 설명해 주었다. 나보다 두살 위인 그는 늘 말이 없었고 눈빛이 선했다. 의로운 일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고,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심취해 있었던 경제학도였다. 일년도 안된 그 기간동안 어떤 것들이 그를 자연과 동화케 하였고 영적충만의 자유를 찾을 것일까. 그와 함께 자작나무 숲을 걸으며 가졌던 그에 대한 수수께끼의 기억들이 새롭다.
며칠 머무는 동안 틈나면 자작나무 숲을 찾았다. 비가 내리거나 어스름한 시간이면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 놓은 순백의 초연함으로 나를 맞아주던 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또 귀기울여 주었다. 이젠 아득한 먼 거리에서도 담박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내게 가장 친숙한 나무가 되었고 그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그저 주기만 한 그 고마움이 얼마인지도 속속 알고 있다. 불을 지피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탄다고 해서 자작나무라고 부르며 더러는 봇나무 또는 화피목이라고도 부른다. 북러시아 대륙의 대표적인 수종이며 고도가 높고 추운 지방에서 자란다. 북유럽에서는 가장 신성시 되는 나무로 알려져 있고 오래전부터 우리 인간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이로움을 주었다.
의학적으로 탁월한 성분을 지녀 여러분야에서 치유의 원재료로 활용케 했는가 하면 중요한 먹거리 요소로 지금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또한 춥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기름기가 많아 불쏘시개의 대명사가 되었고, 껍데기는 얇고 질겨 종이 대신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천년도 훨씬 지난 천마총에 그려진 그림도 이 자작나무 껍데기에 그려진 것이고 팔만대장경의 일부 원판도 이 화피목으로 만들어졌다. 화촉을 밝힌다고 할 때 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이 자작나무 껍데기고 선비들이 중요한 기록을 남길 때도 이것을 사용했었다. 우리나라 식품분야에서 수출 1위를 차지한 껌도 설탕대신 이 나무들에서 추출한 자일리톨을 사용했기에 껌의 명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삶속에 늘 가까이 오래전부터 함께 해 왔으면서도 자작나무에 대해 물으면 갸우뚱 하거나 은사시나무로 착각하기 일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 BC주 어딜가나 계절에 관계없이 푸른 숲을 만난다. 더글라스, 햄록, 시다로 이뤄진 숲은 몇 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져 초록바다를 연출하고 있다. 늦가을 차를 달리다 보면 그 초록바다에 섬처럼 노란반점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바로 자작나무 동네들이다. 곧고 단단하게 철옹성처럼 그들만의 영역을 지키며 다른 수종의 나무들이나 식물까지도 철저히 배제한 그 침옆수 무리속에서 어떻게 저들만의 공간을 만들고 지켜 냈을까 숭고함마져 느낀다.
살다보면 마음에 쌓인 무언가가 있어 고민스럽고 알 수 없는 번잡스런 마음들로 심란해 질 때가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에게는 불편함을 줄수도 있고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거리가 느껴지거나 작은 벽이 생겼다는 느낌이든 그럴 때도 자작나무 숲에 가보라. 숲이 아니라도 몇이 모여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듣지 않고도 들을 수 있는 위안과 평화스러움을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으리라.
글: 자명
Vivtoria Today
신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