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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고린도전서 4장 1~4절
김 우 영 목 사
(만나 교회)
서 론
목회를 수행하면서 목회자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목회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 어느 목회 현장에도 어려움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마치 가시 없는 생선이 없듯이 100% 지지받는 목사도 없으며 100% 반대를 받는 목회자도 없습니다.
목회학자 오토(Otto)에 의하면 목회자를 문제삼는 공식이 있다고 합니다. 이 공식은 세 가지인데 어느 교회나 목회자가 문제가 생겼다 하면 그 공식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독재한다고 하고, 두 번째는 사랑이 없다고 하고, 세 번째는 돈만 안다고 말하는 것이 목회자를 문제삼는 공식입니다.
더욱 심한 교회는 더 추가해서 스캔들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목회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이고, 문제 없는 목회는 목회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문제가 있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영적인 능력과 지도력으로 하는 것이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군목으로 10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언제나 지휘와 통솔이 붙어다닙니다. 지휘는 계급으로 하는 것이고, 존경받는 지휘관이 될 때 통솔이 가능합니다. 목회에 있어서도 필요한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고린도전서 4장 1~4절에 나오는 내용을 목회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하여 항상 묵상하고 기억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1. 바울의 신앙과 신학
바울의 신앙과 신학에는 두 가지 큰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본문 속에서 바울의 신앙과 신학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첫째는 1차적인 판단으로서 다른 사람이 바울 자신을 판단할 때에 지극히 작은 것으로 여겨 무시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은 선입관, 편견, 이해관계, 감정 등이 개입될 수 있어서 잘하는 것을 잘못하는 것으로 오판할 수도 있고, 잘못한 것을 잘하는 것으로 오판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2차원의 판단으로서 내가 나를 판단하는 자기 판단입니다. 즉 내가 나를 판단하여 스스로를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자기 판단은 타인의 판단보다는 상당히 정확합니다. 그러나 자기 판단 역시 불완전합니다. 자기 판단은 자신도 모르게 양심의 바늘이 흔들릴 수 있고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인 것이기에 온전치 못합니다.
세 번째는 3차원의 판단으로서 주님의 판단입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처럼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궁극적인 판단의 기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하는 바울의 참 목회자로서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사람을 바라보고 목회를 하거나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할 때에는 불완전합니다. 왜냐하면 잘한다고 하면 교만해지고, 못한다고 하면 열등감에 빠져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서 있느냐?”를 중시했고, 언제나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힘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 35~37)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신앙의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신앙의 힘이 바울을 바울 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일꾼으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비밀은, 사실은 사실인데 숨겨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실이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일꾼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니라 나 혼자만 체험한 체험, 자기만이 아는 비밀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울이 바울 되었던 것,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를 생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2. 이사야의 소명(사6장)
이사야는 소명을 받을 때에 성전에 충만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먼저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본 눈으로 자기를 보니 자신의 정체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 눈을 가지고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 열려져서 하나님을 보고 난 다음에 자신을 보면 자기가 제대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그는 부정하고 화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정체를 정확하게 발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심판과 형벌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6~7)라고 하시며 죄를 사하시고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았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일꾼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하고 나서게 됩니다.
감격이 있는 사람, 죄를 사함받은 확신이 있는 사람, 죽을 수 밖에 없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은혜를 아는 사람, 일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원하는 일꾼, 감격 있는 일꾼이 역사 속에서 귀하게 쓰임받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선교 신학(Missio Dei)
교회성장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성서적입니다. 구원받는 수가 늘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단순히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수가 많아지는 것이 성서의 중심사상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또 하나의 중심 사상이 있다면 그것이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복음화시키고 제자 삼는 선교가 성경의 시작이요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나가서 구원 사역을 통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가 성경 전체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받은 숫자가 늘어나서 성장하여 대교회가 되어야 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결합하는 힘으로 선교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은 종래의 신학 사상을 뒤집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의 기능이 선교, 교육, 봉사등 3대 기능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으로 분류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서는 선교는 선교, 교육, 봉사 중의 하나로서 교회 하부구조 중의 하나가 아니라 교회는 선교 때문에 필요하고 선교 때문에 세워져야 하며 선교 때문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사역하고 또한 영혼구원을 위해 사역을 함에 있어서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에게 가끔 후배 목사나 신학생들이 찾아와서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이처럼 짧은 기간에 그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저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합니다. 병이 있는 환자가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지 먹어서 병이 나은 다음에 무슨 약 때문에 나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나는 목회현장에서 영혼이 구원받고 교회가 성장해서 선교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슨 일이든지 다 했기 때문에 교회가 왜 성장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분명한 사실은 사람을 찾아다니지 말고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 말고 “목회는 무릎으로 해야 된다.”라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말해 줍니다.
며칠 전 극동방송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45분 동안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역시 “목회는 무릎으로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35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여러 가지의 방법을 동원하고 적용해 보았지만 결국 교회성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힘이나 방법이나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무릎을 끊고 기도해도 목회의 현장 거기에서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 할 때 그 기도가 거기서 그 사람에게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목회자가 지도력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교인들을 이끌고 간다고 하면 누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무릎을 끓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설교집의 제목을「기도가 방법이다.」「예수가 해답이다」,「이겨놓고 싸운다」, 「믿음이 재산이다」라고 했습니다.
2년 전에 동경 복음화대회 강사로 동경에 갔습니다. 저를 초청한 목사님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셨는데 온천이나 하고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해서 스케줄을 보니 온천을 하고 가도 주일을 지키는데 지장이 없을 것 같아서 온천에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은 들어가시고 나는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칫솔을 가지고 치약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먼저 들어가셨던 목사님이 잠깐 나와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칫솔은 있는데 치약이 없다고 대답하니 칫솔만 가지고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그 안에 치약이 있는 줄 알고 들어가보니 안에도 치약은 없었습니다. 초청한 목사님이 말하기를 칫솔로만 닦으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빈 칫솔질을 하느냐고 하니 믿음으로 닦아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닦았는데 신기하게도 화학처리를 했는지 치약이 칫솔에 묻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나오면서 빈 칫솔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주일에 설교하면서 말하기를 “여러분 보이는 것만 있는 줄 압니까?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이슬과 같이 임해 있는데 이 은혜를 믿음으로 나아가 만날 때 역사가 일어나고, 믿음으로 만날 때 기적으로 일어납니다.”라고 말하면서 칫솔을 들고 믿지 못하겠거든 이 칫솔을 가지고 가서 한번 닦아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권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목사님은 빈 칫솔을 가지고도 설교를 잘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능력이 임할 수 있고 지혜도 임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늘 허락되어 있습니다. 이 허락된 은혜를 받아 우리가 믿음으로 나갈 때 즉 은혜와 믿음이 만날 때에 그곳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를 하면서 언제나 우리가 힘을 얻을 수 있고, 지혜도 능력도 권능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무릎을 끓고 믿음으로 엎드릴 때, 즉 하나님의 은혜와 만날 때에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5년 동안 아무리 목회를 해보아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안됩니다. 도저히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됩니다. 역사가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무릎을 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머리로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기도로 해야 가능합니다. 큰 문제도 기도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고 작은 문제도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의 지도력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기도에서 나옵니다.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이지만 기도할 때 확신이 오고 기도할 때에 힘이 생기고,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나고, 기도할 때 변화가 일어나고 기도 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제가 졸업한 감리교 신학교에 부흥회 인도를 위해 세 번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신학생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는 날아야 새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날지 못하는 것은 새가 아닙니다. 무엇으로 날아야 하느냐 하면 날개를 가지고 날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쪽 날개만으로는 새가 날 수 없습니다. 새가 날려면 두 날개가 필요합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은 훌륭한 교수님들 밑에서 밤을 새워 공부하는 학교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실력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는 영력의 날개를 달아야 합니다. 교역자의 한쪽 날개는 실력의 날개요,또 다른 한 쪽 날개는 영력의 날개입니다. 이 두 날개를 달아야 날아갈 수 있습니다. 목회의 현장에 나가보면 학교에 다닐 때 공부하고 실력 있는 목회자로 준비하고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영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가 회심한 후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설명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내가 믿는 것을 고백하고 증언을 할 때 그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교역자는 실력의 날개와 영력의 날개 두 날개를 달아야 합니다. 총을 쏠 때는 정조준과 함께 실탄을 장진해야 합니다. 조준은 정조준을 했는데 실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으면 공포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실탄을 장전하여 쏠 때에도 조준을 잘 해야 명중할 수 있지 조준을 잘 하지 못하면 오발입니다. 정조준은 신학의 정립이요, 실탄의 장전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정조준을 해도 실탄이 없으면 공포입니다. 이것은 성령받지 못한 설교입니다. 실탄을 장전해도 정조준이 안 되면 오발입니다. 이러한 설교는 신학이 정립되어 있지 못한 설교입니다.
목사가 같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같은 강단에서 설교를 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라고 능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기도하고 확신을 가지고 하는 설교와 만들어서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준비된 설교를 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때에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셔야만이 오늘 이 말씀을 바르게 전할 수 있다고 맡기고 단에 섰을 때에 뜻밖에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교는 준비도 열심히 해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준비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항상 기도의 골방, 연구하는 글방, 그리고 사랑방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또한 목회자는 네 가지의 시험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① 자기 시험 - 정복 - 예수 - 확신 - 자중
② 사람 시험 - 때 - 미리 - 존경 - 인중
③ 마귀 시험 - 승리 - 천사 - 자녀 - 마중
④ 하나님 시험 - 합격 - 축복 - 기업 - 신중
4. 성공적인 목회철학 열두가지
첫째, 기도가 방법임을 믿어야 합니다.
무릎으로 승리하는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발광체도 아니고 원동체도 아닙니다. 힘은 항상 원동이 있고 피동이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힘이 와야만이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구리선을 그냥 방치해 두면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전류가 통할 수 있을 때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사람이라도 기도함으로 영적인 힘이 생길 때에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내힘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6)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무슨 일이 있든지 항상 기도하는 생활이 우리의 목회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회를 바른 목회가 되게 합니다.
우리 교회는 분당에 종교부지 1,561평을 2년 전에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하는 날이 월요일이었습니다. 월요일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강단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33억이라는 돈은 너무나 큰 돈입니다. 제가 이 돈에 깔려 버렸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철벽이어서 뚫고 갈 수 없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사방이 막혔는데 33억이 나를 누르니 숨을 쉴 수 없이 답답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나의 기도가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33억이 문제입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 가득히 남았는데 이것이 문제입니까?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33억은 보이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만 보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신 하나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때 금도 은도 내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없을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할 때 33억을 내가 깔고 앉았습니다. 위도 환하게 열리고 앞도 뚫렸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시작하여 모든 빚을 청산하였습니다.
제가 얻은 결론이 무엇이냐면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에는 큰 것이 어려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크신 하나님이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것을 믿으니 그 믿음대로 되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목회는 무릎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협력자는 기억하고, 찌르는 자는 잊어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협력하는 사람도 있고 찌르는 가시처럼 괴롭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이러한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속담에 “원수는 물 위에 새기고 은혜는 돌 위에 새기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괴롭히는 사람은 늘 잊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협력하는 교인들이 어느 교회에나 있습니다. 목사님이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돕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자꾸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느냐면 찌르는 사람은 잊어버리니 낙심되지 않고 돕는 사람들은 자꾸 기억하니 힘을 얻어서 일하게 됩니다. 기도를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목회를 하기 때문에 사람 가운데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 협력하는 사람들을 돌에 새겨놓고 기억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은 물 위에 새겨서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고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하지 않고 우리 속에서 지워버려야 할 것은 지워버려야 합니다. 반면에 도움을 준 사람과 힘이 되는 사람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제 사무실에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타이핑을 해서 책상에 가져다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힘내세요. 큰 일을 앞에 두고 계시지만 목사님 걱정없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전 교인이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힘을 내라고 하는 편지를 가끔 가져다 놓습니다. 어떤 때에는 어려움으로 낙심하고 절망하다가도 그러한 사람을 생각하면 힘을 얻습니다.
셋째, KO시키지 말고 판정승을 해야 합니다.
KO를 시켜놓으면 처음에는 내가 이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게는 게편이고 가재는 가재편이라는 말과 같이 아무리 장로가 잘못을 했어도 그 사람을 책벌하거나 KO를 시켜 놓으면 내게 손해가 옵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도 교인들이 볼 때에도 저것은 목사님의 잘못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모든 교인들이 판정승을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실제 목회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현재의 교회를 짓기전에 송파동에서 교회를 지을 때 어떤 장로 한 분이 매일 나와서 현장 감독을 하고 열심히 교회를 짓는 데 협조했습니다. 내가 집회를 갔다가 와서 그것을 보고는 너무나 고마워서 현장에서 장로님 손을 잡고서는 “표창은 장로님 혼자 받아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회가 모두 건축되고 봉헌식을 하면서 패를 만들 때에 공헌한 모든 사람에게 공로패를 드리자고 해서, 받을 분을 꼽아 세보니 12분이나 되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다시 의논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장로님 한 분이 말하기를 패를 남발을 하면 의미가 없으니 꼭 필요한 사람 세 사람을 선정해서 패를 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 좋으실 대로 하자고 결정 했습니다. 그리고는 시공자, 설계자, 건축위원장 3인으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모였을 때에 회의를 하는데 제가 표창을 혼자 받아야 하겠다고 칭찬한 장로가 일어나서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목사님이 일구이언을 하느냐고 고함을 쳐댔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구이언을 하느냐고 대답하니 목사님 입으로 무엇이라고 했느냐며 장로님만 혼자 표창을 받아야 한다고 해놓고서는 왜 내게는 표창을 주지 않느냐고 감정을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어나서는 그 장로를 향하여 “자기 집을 짓고 표창을 받는 사람 보았느냐? 뭐 이런 장로가 다 있어. 밖에서 와서 건축한 사람은 교회가 표창을 하지만 교회 장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또한 내가 주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장로님들이 다 앉아서 결정을 했는데 뭐 이런 것이 있어. 네 집 짓고 네가 표창을 받어?”라고 하려다가 참았습니다. 그렇게 했으면 나는 그분을 KO를 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앉으세요. 내가 할 이야기가 없어서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가 교회를 짓는 데 수고한 것은 잘한 것이고 상급은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것입니다. 자기 집을 짓고 표창를 받으려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장로님 돌아가서 기도해 보십시오.” 한 다음에 회의를 정회하였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교인들 입에서 그 장로가 잘못한 것이라고 하고 목사님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장로들끼리도 그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주에 그 장로가 일어나더니 코다 땅에 닿기까지 큰 절을 합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아마 무엇에 씌어서 그런 것 같다고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제가 하나의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만 아무리 상대방이 잘못을 해도 KO시키지 말고 판정승을 해야 합니다. 불도저가 흙을 밀고 가면 다 밀리는 것 같지만 뿌리를 뽑지 않으면 다시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기도하고 참고 기다리다 보면 모두 돌아오게 됩니다. 목회를 해보니 좋은 사람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제 기분이 나면 좋은 사람이고 제 기분이 나쁘면 나쁜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는 기분이 나빠서 십일조를 안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는 기분으로 십일조를 하느냐는 말을 하려다 참았는데 이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으니 변화되어 좋은 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넷째, 이해의 교량을 놓아야 합니다.
교량이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리를 통하여 섬이 육지가 됩니다. 목회란 언제든지 ‘이해’라는 다리를 놓아서 상대방과 연결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해하면 다리가 놓입니다. 이해가 없으면 다리가 끊어집니다. 이해할 때 새로운 교제가 가능해짐을 믿어야 합니다.
목사가 장로들을 볼 때에 부족함이 너무나 많습니다. 장로가 목사를 볼 때에도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집회에 나가는 것이나 기아헌금, 구제헌금을 마음대로 하는 나를 볼 때에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들은 나를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중요한 것은 이해입니다. 이해란 주님의 십자가상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니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왜,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이해입니다. 그래서 이해는 둘 사이에 교량을 놓아서 왕래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불어 사는 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다섯째, 감정 섞인 설교를 피해야 합니다.
지금도 부끄러운 것은 전도사 때에 감정을 품고서 설교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 감정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설교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 감정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설교할 때에 반드시 꼬집어 주었습니다.
어느 목사님과 이웃 교회 목사님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웃 교회 목사가 헐뜯기 시작하는데 심지어는 자기가 지옥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저 목사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왜 지옥을 가려면 직행을 할 일이지 왜 교회는 들러서 가느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예수를 믿는데 목사의 입으로 지옥을 가도 저 사람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하니 그 감정의 골이 대단히 깊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도 이웃 교회의 목사에 대한 욕을 해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선배 목사가 그 사람을 불러서 말하기를 젖먹이는 엄마가 신경질을 내며 젖을 먹이면 그 아이가 설사한다고 했습니다. 설교할 때에 더 이상 감정을 섞어서 말하면 교인들이 설사한다고 그만하기를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용서하지 못한다고 계속하니 교인들이 견디지를 못하고 그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복음은 복음대로 전해야 됩니다. 누구에게 감정이 있다고 해서, 설교하는 강단에서 이야기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특권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내가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에 거기에 따르는 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언제든지 목회자로서 지도력을 상실하지 않고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려면 말씀은 말씀대로 순수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알아서 판정을 내립니다. 감정 섞인 설교는 피해야 합니다.
여섯째, 진리가 아니면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양보하지 못한다는 때가 되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 때문에 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방법들 가지고는 충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것 때문에 충돌하면 큰 일을 하는데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 반드시 작은 일로 인하여 충돌하여 문제가 생기면 큰 일을 하는 데 성도들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슈퍼마켓이 경쟁을 하는데도 손님들이 잘 아는 것은 다른 곳보다 전부 100원이나 200원씩 싸게 받고 손님들이 모르는 것은 비싸게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회에서도 작은 일에는 양보하고 충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를 잘 하다가 주택 하나를 자기의 이름으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다투다가 교회에서 쫓겨나서 고생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것이나 방법들로 문제삼아서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다. 성경의 말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할 때에 목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일곱째, 교인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인들을 믿으면 안 됩니다. 믿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인은 내가 용서하고 사랑할 사랑의 대상이지 믿다가는 큰 일을 당하게 됩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어려움을 당한 분의 집에 매일 가서 기도해 주고, 위장병으로 고통 당하는 것도 믿음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분이 나음을 입어 충성을 잘하는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곳에 나가더니 부정적으로 되어서는 사람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별것도 아닌데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왜 대낮인데 불을 켜고 예배를 보느냐, 커튼은 왜 고급으로 하느냐, 목사는 왜 땅만 사고 마당만 늘리려고 하느냐 등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그분이 병이 들어서 나가게 되었는데 교인은 한 번 시험에 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교인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인들이 저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배신하고 나가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후 더욱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연단의 신호가 올 때에는 그 과정을 지나서 새로운 축복이 오리라는 영적인 신호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회를 하다가 어려운 경우를 당하면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자기 교인이 나가는 것은 욕을 하면서 남의 교인이 오는 것을 환영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목회자들이 아무리 억울하고 분해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는 목회 철학만을 갖는다면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덟째, 주머니 끈을 풀어놓고 목회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교회를 건축하면서 몇 년동안 사례비를 전혀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교인들이 따라오기 시작합니다. 목사가 희생하니 교인들이 따라 옵니다. 저의 체험에 의하면 주머니를 닫아 놓으면 주머니에 있는 것은 나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닫아 놓았기 때문에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열어서 쓸 때에, 바치고 쓸 때에 열려 있으니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주머니를 열어 놓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나는 목회자가 빌딩을 가지고 있고 돈이 많다는 것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부러운 것은 은혜로운 설교를 하는 목회자, 성공하는 목회자, 참 좋은 목사님이라는 말을 듣는 목회자가 부럽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헌신하려는 목회자가 존경스럽습니다. 호주머니 끈을 풀어 놓고 목회하는 것이 우리 목회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홉째, 예수가 해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시 해결이 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길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고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문제 곁에는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어도 주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예수가 해답이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줄을 믿고 행해야 합니다. 물론 시간적으로 길어질 수는 있지만 예수가 함께 계시므로 해결된다는 이 목회철학은 지도자인 목회자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열째, 중간 결산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조급하게 중간 결산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감리사를 할 때에 어떤 목사님을 심방했는데 그때 그분은 한강으로 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러한 생각을 다 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찾아가서 붙들고 기도하고 교통비를 준 다음에 돌아왔습니다. 이 목사님이 한강으로 가려다가 감리사가 와서 기도해 주는 바람에 성경과 모포를 들고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빚으로 교회의 땅을 사서 빚으로 건축하였는데 빚을 갚지 못하자 빚쟁이들이 와서 목사의 멱살을 잡고 사기꾼이라고 하니 교인들이 나가고 목사는 자꾸 헌금하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교인들이 견디지를 못하여 더 나가자 이제는 한강으로 가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한강으로 가지 않고 강단으로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기도하라는 신호요, 잠이 오면 자라는 신호입니다. 이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서 잠이 안 오면 기도하고 잠이 오면 잤습니다. 기도하다 자고, 자다 일어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은혜와 믿음이 만나니 오는 것은 영력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설교하는데 설교가 달라집니다.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새벽에는 타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기도하는데 누가 눈물을 흘리면서 와서는 통장과 도장을 주면서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감동이 되어 참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을 급한 대로 찾아서 쓰세요.” 하고 주고 갔는데 열어보니 10년 전에 2,300만 원이 입금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풀리기 시작하여 증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릴 때에 제가 가서 축사를 했습니다.
중간결산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부르심을 받은자, 그 뜻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목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가 마지막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삶의 결단만 바로 하면 변화가 오고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열한째, 목회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생가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모든 사람들의 은사를 발견해서 그것을 개발하여 전체 교인들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폴 틸리히가 말하기를 교회 안에는 깨어 있는 사람이 10% 있고, 80%는 졸다 깨다 하는 사람이고, 나머지 10%는 깊이 잠든 사람이라고 하는데 목회에 성공하려면 10%의 사람은 내버려 두어도 괜찮고 졸다가 깨다 하는 사람을 깨우면 된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목사가 이 기능이 다른 사람을 전부 깨워서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도록 하면 자동적으로 교회는 성장합니다.
열두째, 목회는 인정으로 하지 말고 진리로 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인정으로 돌보아 주어야 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파산 선고를 받았는데 헌금합니다. 인정으로 말하면 새벽에 나오지 않도록 하고 헌금하는 것도 부자가 하게 해야 합니다.
한번은 왕십리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3,000만 원을 작정했습니다. 재무부장 장로가 나에게 약속한 봉투를 가지고 와서는 이것 300만 원을 잘못 쓴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알아보았더니 3,000만 원이 맞았습니다. 이 사람이 산꼭대기에서 3,500만 원짜리 전세방에 사는 분인데 3,000만 원을 헌금하고는 500만 원을 가지고 사글세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으로 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하고 오히려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버려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분은 3년도 되지 않았는데 집을 샀고 입주 예배를 제가 가서 드렸습니다. 생각해보면 3,500만 원 전세에서 3,000만원을 헌금하고 500만 원으로 월세 사는 교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가 감사해서 내 집이 문제가 아니라 성전을 먼저 지어야 한다고 헌금하는 모습을 이 교인에게서 발견합니다.
내가 목회하면서 경험하는 것은 인정으로 목회하지 않고 진리로 목회하면서 교인들을 이끌고 가면 그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인정에 치우쳐서 목회하면 교인도 버리고 나도 잘못됩니다. “나는 목회는 반드시 진리대로 한다. 인정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라고 결단하며 목회합니다.
시골에 바쁜 일이 있다고 주일에 내려가겠다고 사정하는 교인들에게 인정으로 하면 내려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진리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교인을 위하는 일이고 그것이 교회를 바로 되게 하는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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