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ware that there is not, in this country, any intolerance of differences of opinion on most of these topics.
나는 이 나라에는 이 대부분의 논제들에 대한 의견의 다름에 대한 어떤 불관용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논제들은 다름을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밀은 다음 단락에서 ‘대부분의 논제들’ 외의 특정 논제가 다름을 허용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They are adduced to show, by admitted and multiplied examples, the universality of the fact, that only through diversity of opinion is there, in the existing state of human intellect, a chance of fair play to all sides of the truth.
그것들(=이 대부분의 논제들)은 받아들여지고 다양화된 예들을 가지고서, 현존하는 인간 지성의 상태에서는 오직 의견의 다양성을 통해서라야 진리의 모든 측면들에 대한 공정한 경기의 기회가 있다는 사실의 보편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시된다.
When there are persons to be found, who form an exception to the apparent unanimity of the world on any subject, even if the world is in the right, it is always probable that dissentients have something worth hearing to say for themselves, and that truth would lose something by their silence.
어떤 주제에 관하여서든 세상의 명백한 만장일치에 예외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발견될 때, 비록 세계가 옳음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다수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말하는 것을 들을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진리는 그들의 침묵에 의해서 무언가를 잃어버릴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It may be objected, ‘But somereceived principles, especially on the highest and most vital subjects, are more than half-truths.
이렇게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공인된 원칙들, 특히 가장 높고도 가장 필수적인 주제들에 관한 것들(=어떤 공인된 원칙들)은 절반의 진리 이상이다.
The Christian morality, for instance, is the whole truth on that subject, and if any one teaches a morality which varies from it, he is wholly in error.’
예를 들어서 기독교 도덕은 그 주제(=필수적인 vital 주제)에 관하여서는 온전한 진리이다. 그래서 만약 어떤 이가 그것에서 벗어난 도덕을 가르친다면 그는 온전히 오류 가운데 있는 것이다.’
As this is of all cases the most important in practice, none can be fitter to test the general maxim.
이것은 모든 경우 가운데 실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므로 일반적인 금언을 시험하기에 더 적합한 것이 있을 수 없다.
But before pronouncing what Christian morality is or is not, it would be desirable to decide what is meant by Christian morality.
그러나 어떤 것이 기독교의 도덕이고 어떤 것이 아니고를 선언하기 전에 기독교 도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If it means the morality of the New Testament, I wonder that any one who derives his knowledge of this from the book itself, can suppose that it was announced, or intended, as a complete doctrine of morals.
만약 그것이 신약성경의 도덕률 의미한다면 그 책 자체에서 자기의 지식을 이끌어내는 어떤 사람도 그것이 도덕의 완전한 원칙으로서 선언되었거나 의도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The Gospel always refers to a pre-existing morality, and confines its precepts to the particulars in which that morality was to be corrected, or superseded by a wider and higher; expressing itself, moreover, in terms most general, often impossible to be interpreted literally, and possessing rather the impressiveness of poetry or eloquence than the precision of legislation.
복음서는 언제나 기존의 도덕률을 언급하고 그것(=기존의 도덕률)의 원칙(precepts)을 그 도덕률이 더 넓고 더 높은 것(=도덕)에 의해서 교정되거나 교체될 특별한 것들에 한정시킨다. 게다가 그것(=도덕률) 자체를 가장 일반적인, 때때로 문자적으로 해석되기에 불가능한 말로 표현하면서, 그리고 법령의 정확성보다는 시와 웅변의 감명을 소유하면서 그렇게 한다.
마태복음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To extract from it a body of ethical doctrine, has never been possible without eking it out from the Old Testament, that is, from a system elaborate indeed, but in many respects barbarous, and intended only for a barbarous people.
그것(=신약성경)으로부터 윤리적인 원칙의 본체를 도출하는 것은 구약성경, 즉 정말로 정교하기는 하지만 많은 점에서 야만적이고 오직 야만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의도된 체계에서부터 그것을 보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였다.
신약에서 말하는 것은 법적인 윤리 강령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구약성경으로 보충을 하는데 구약성경은 야만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므로 모든 시대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St. Paul, a declared enemy to this Judaical mode of interpreting the doctrine and filling up the scheme of his Master, equally assumes a pre-existing morality, namely that of the Greeks and Romans; and his advice to Christians is in a great measure a system of accommodation to that; even to the extent of giving an apparent sanction to slavery.
성 바울, 원칙을 이렇게 해석하여 그의 주님의 계획을 보충하는 유대교적인 방식에 적으로 선언된 그는 똑같이 기존의 도덕률, 즉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그것을 가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그의 충고도 대부분 그것(=기존의 도덕률)에 합의한 체계이다. 노예제도에 명백한 승인을 하기까지 한다.
성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다른 원칙들에서 빌어와 예수의 가르침을 보충하는 방식은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런 바울마저도 기존의 도덕률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도덕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원래 예수의 가르침과 그를 이은 바울의 가르침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What is called Christian, but should rather be termed theological, morality, was not the work of Christ or the Apostles, but is of much later origin, having been gradually built up by the Catholic church of the first five centuries, and though not implicitly adopted by moderns and Protestants, has been much less modified by them than might have been expected.
기독교적 도덕률이라고 불리지만 오히려 신학적 (도덕률)이라고 칭해져야 할 그것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작업이 아니라 훨씬 더 후대에 연원을 둔 작업이다. 첫 5세기 동안의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수립되었고 근대인들과 개신교도들에 의해서 무조건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예상되었던 것보다 훨씬 덜 수정되어왔다.
For the most part, indeed, they have contented themselves with cutting off the additions which had been made to it in the middle ages, each sect supplying the place by fresh additions, adapted to its own character and tendencies.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각 분파가 자기 자신의 성격과 성향에 적합한 새로운 추가분을 가지고 그 자리를 보충하면서 중세에 그것(=원래의 기독교 도덕률)에 만들어진 추가분을 제거하는 데 만족해 왔다.
That mankind owe a great debt to this morality, and to its early teachers, I should be the last person to deny; but I do not scruple to say of it, that it is, in many important points, incomplete and one-sided, and that unless ideas and feelings, not sanctioned by it, had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European life and character, human affairs would have been in a worse condition than they now are.
인류가 이 도덕률과 그 초기의 교사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겠으나 그것이 많은 중요한 점에 있어서 불완전하고 일방적이어서 그것(=기독교적 도덕률)에 의해서 재가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 유럽인의 삶과 성격의 형성에 기여하지 않았다면 인간사는 지금보다 더 나쁜 상태에 있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오직 기독교적 도덕률에 의해서만 유럽인의 삶과 성격이 형성되었다면 인간사는 매우 일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 기독교적 도덕률 외에 다른 것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나마 지금과 같이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