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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0:16-28
찬송가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기브온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가나안의 남부 지역을 정복한 기록을 다룹니다.
여호수아의 지략(16-21)
여호수아와 그 군대는 길갈에서 밤새 올라와 기브온에 이르러 연합군과 오랜 시간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그들은 다시 진영이 있는 길갈로 돌아와 전열을 정비합니다. 기브온과 길갈은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첩보가 들어옵니다.
(16-18) 그 다섯 왕들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 어떤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이르되 막게다의 굴에 그 다섯 왕들이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에 큰 돌을 굴려 막고 사람을 그 곁에 두어 그들을 지키게 하고
다섯 왕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섯 왕이 어떤 이유로 그 굴에 숨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충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지혜를 내서 굴 어귀를 큰 돌로 막고 사람을 두어 지키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지도부의 공백을 지속시키고, 대신할 지휘관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작전을 지시합니다.
(19-20) 너희는 지체하지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이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크게 살륙하여 거의 멸하였고 그 남은 몇 사람은 견고한 성들로 들어간 고로
여호수아는 머뭇거리지 말고 대적의 뒤를 공격해서 성읍에 들어가 항전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합니다. 대적들은 왕이 없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하며 독려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 명령대로 공격하여 적군을 거의 멸하다시피 했습니다. 몇 되지 않은 인원만 견고한 성들로 들어갈 뿐이었습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21) 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영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더니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
이제 그 모든 백성은 평안히 막게다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쟁을 수행한 결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샬롬의 복입니다. 올해 표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전쟁과 환난 가운데서도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평안함을 누립니다. 우리 역시 환난 없는 평안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 평안을 누리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혀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 환난을 없게 하여 평안을 주시옵소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 환난 가운데도 주님 안에 평안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오히려 환난으로 담대하게 뛰어들어 이기신 주님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게다가 더 이상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전투하는 자들로서 악의 영들을 상대합니다. 사탄은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 주위에서 칭찬합니까 아니면 조롱합니까?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주위에서 혀를 놀려 우리 삶의 방식을 비웃고 조롱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만 잘났느냐? 너만 깨끗하냐? 왜 이렇게 어리석느냐? 등등 말입니다. 아마도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한 이야기를 허무맹랑하다고 또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비웃고 대적하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다섯 왕이 연합하였기에 기브온과 이스라엘은 쉽게 물리치리라 허풍을 치며 장담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입은 다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주위에서 우리를 조롱하는 소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개의치 마시고 믿음의 길을 걸으며 믿음의 싸움을 지속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입이 닫힐 날이 곧 올 것입니다.
다섯 왕의 처형과 승리(22-28)
(22-25)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를 열고 그 굴에서 그 다섯 왕들을 내게로 끌어내라 하매 그들이 그대로 하여 그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을 굴에서 그에게로 끌어내니라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매 그들이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여호수아는 굴을 열어 왕들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도시 국가 수준에 불과하지만 국가의 왕들이 끌려 나옵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지휘관들에게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고 명하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불러서 그 광경을 보게 합니다. 지휘관들은 여호수아의 분부를 따라 그 목을 밟았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철저한 모욕과 완전한 승리의 징표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선포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하나님이 다 이와 같이 대적자들에게 행하실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도 근본적으로는 우크라이나를 본래 자신의 영토로 생각하기에 그곳을 쳐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은 하나님이 조상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땅이라고 주장하며 차지하는 것에 견주어, 러시아도 우크라이나가 조상의 땅이며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주신 땅이라고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말씀에서 보듯이 이스라엘도 고대 근동의 전쟁 풍속을 따라 왕들의 목을 밟고 멸절하는데 그 모습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 전쟁이 국가의 부를 쌓거나 정치 경제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면입니다. 오히려 이 전쟁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여 죄악이 들끓는 땅에 하나님만 기준 삼아 살아가는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를 일으키고 그들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기획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을 착취하고 죽이는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그 핵심 인물들을 처벌하는 일을 그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잔재를 철저히 제거하면 할수록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만연한 죄악을 몰아내고 뿌리 뽑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심는 작업은 의롭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땅의 권세를 잡고 우리를 영적으로 대적하는 왕들이 있습니다. 그 수장인 사탄은 우리를 구속하고 제압하기 위해 세상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을 내세워 우리를 억압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목을 밟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대적들에 맞서도록 승리를 주심을 믿고 담대할 수 있으십니까?
최근 넷플릭스에서 나온 두 프로그램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바로 ‘더 글로리’와 ‘나는 신이다’ 라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두 프로그램 모두 사람을 얽매어 죽이는 두 세력을 묘사합니다. 즉 학폭 가해자와 이단입니다. 학폭 가해자들과 이단은 모두 나름대로 촘촘하게 짜인 구조를 통해 피해자를 양산합니다. 그 정점에 있는 자들은 왕과 같이 군림하면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그 구조를 틀어쥐고 영속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백한 범죄가 드러나도 그들의 목을 밟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신이다’를 보면 피해자들이 아직도 그러한 영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변조합니다. 교주와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기에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고 그 권위를 힘겨워합니다.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들의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피폐해지는지를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픽션 작품답게 피해자가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성공하는 모습까지 전달하여 우리에게 통쾌함을 줍니다.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도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살아갈 용기를 준다면, 하나님의 이야기와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해방과 담대함은 얼마나 진실되고 위대하겠습니까? 어둠의 권세에 억눌려 죽음의 왕 노릇하는 사탄을 두려워하고 계시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담대하게 그 악의 세력을 발로 밟고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기를 소원합니다.
(26-28) 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죽여 다섯 나무에 매달고 저녁까지 나무에 달린 채로 두었다가 해 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령하매 그들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들이 숨었던 굴 안에 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더니 오늘까지 그대로 있더라 그 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여호수아는 그 왕들을 쳐죽이고 나무에 매답니다. 신명기 21장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로서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율법대로 해 질 때에 다시 시체를 내려 굴 안에 던져 넣고 큰 돌로 막아 승리의 표징으로 삼습니다. 이후 여호수아는 막게다를 취하고 거기 속한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서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며 사람들을 얽매고 죽음의 길로 내모는 세력의 목을 밟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목을 밟는 방식은 폭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은 저들이 유혹하고 꿈꾸게 하는 대상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힘으로서, 오직 하나님만 절대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곧 자족하는 마음과 경건입니다. 이 능력으로만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을 이길 수 있습니다.
경제적 독립과 자유를 설파하는 어느 유명 유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는 일에 목을 매고 살지만, 물질적 가치를 초월한 분들에게는 그러한 목표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 오히려 자신의 고개가 숙여진다고 했습니다. 150만원이든, 100만원이든 자기의 수입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거기에 맞춰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는 사람은 경제적 독립과 자유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서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들도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구나! 그렇게 살 엄두를 내지 못해서 그렇지 그들도 무엇이 바른지를 느끼는구나! 우리가 정말로 존경하는 그리스도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이 돈이 많고 건강하고 잘나서 존경하십니까? 잘 생각해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의 가치에서 자유하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며 온전히 자족하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의 품격과 향취를 느낍니다. 그런 분에게는 세상의 염려가 있을 수 없고 많은 재물도 눈꼽만큼도 의미가 없으며 이 세상의 정욕도 무가치할 뿐입니다. 양화진 역사강좌를 통해 초기 기독교인들은 남을 돕기 위해 스스로 며칠을 굶었다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현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굶어 남을 돌본다는 생각 자체가 생소합니다. 이러한 과격한 사랑만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만듭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라는 가시떨기를 걷어내는 방법은 그 어떤 대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구절입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믿음은 서로 닮아있습니다. 환난을 당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 세상의 가치를 넉넉히 이깁니다. 말씀에 집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희생적으로 사랑합니다. 이에 비해 나쁜 믿음이 발생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다양합니다. 이생의 염려, 재물, 향락으로 대변되는 세상 때문일 수도 있고, 사탄이 말씀을 낚아채기 때문일 수도 있고, 돌밭 같은 자기 자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처럼 왕과 같이 악의 권세를 틀어잡고 하나님과 맞서는 사람이나 세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사랑의 능력으로 그 목을 밟기 원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이긴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사순절 기간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넘쳐 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라는 가시 떨기를 걷어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그 목을 밟고 담대하게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경건과 자족함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혀를 놀려 조롱하는 자들을 접하신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2. 가나안 정복 전쟁이 일반 전쟁과 어떤 면에서 다른지 묵상해 보십시오.
3. 나를 두렵게 하는 왕과 같은 존재나 세력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어떻게 하면 그 목을 밟을 수 있을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4. 내 삶의 가시 떨기는 무엇입니까? 사순절 기간 그것들을 걷어낼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하십시오.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