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진도군(珍島郡)은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섬으로서 한반도 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은 명량해협(鳴梁海峽) 일부를 사이에 두고 해남반도로 이어지고, 서쪽은 황해, 남쪽은 제주해협으로 트여 있으며, 북쪽은 명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해남반도의 일부인 화원반도(花源半島) 및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마주한다. 진도군은 본섬인 진도를 포함해 상조도·하조도·가사도 등 45개 유인도와 185개 무인도 등 230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도는 호남정맥에서 분기한 ‘땅끝기맥’이 황해에 이르러 서서히 침강하여 이루어진 다도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동쪽에는 첨찰산(尖察山·485.2m)·덕신산(德神山·385m)이 자리하고, 서쪽에는 지력산(智力山·325m), 남쪽엔 동석산·급치산(221m)·여귀산(457m)이, 북쪽에는 금골산(金骨山·193m)·설매봉(雪梅峰) 등 200~400m 정도의 낮은 산지가 많이 있다. 동북부는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서남부는 급경사로 인한 침식해안으로서 경관이 좋다. 하천은 석교천·인지천·이십오천·진도천·의신천 등이 있으나, 대부분 3~6km로 짧고, 첨찰산에서 발원한 의신천만이 10km 정도를 이룬다. 농토는 유기질이 많아 매우 비옥하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진도현으로 개칭하면서 무안군(茂安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나주(羅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진도군으로 독립하였으며, 995년(성종 14) 옥주군(沃州郡)이라 했다. 조선 태종 때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이라 하였고, 1437년(세종 19) 해남과 분리하여 진도군이라 하였다.
1906년(고종 43) 명산면(命山面)을 영암군(靈巖郡)에, 삼촌면(三寸面)을 해남군에 이속시켰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창면(安昌面)·가좌면(加佐面)·도초면(都草面)을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1973년에는 군내면(郡內面) 수역리(壽域里)·수류리(水流里)·산월리(山月里)·해창리(海倉里)를 진도면에 편입시켰고, 1979년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조도면(鳥島面) 만재도리(晩才島里)와 가사도리(加沙島里)의 일부가 신안군으로 편입되었다.
2005년 현재 진도읍·군내면·고군면·의신면·임회면·지산면·조도면 등 1읍 6면으로 이루어졌다. 면적은 430.6㎢, 인구는 37,408명(2004년 현재)이다. 군청소재지는 진도읍 성내리다.
진도군 일대의 해역은 대륙붕 지역이고, 북상하는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어족이 풍부하며, 해수 오염이 없어 해조류 양식에 유리하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지만 주민의 일부가 반농반어에 종사하고, 대부분의 주민은 농업을 전업으로 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참깨·고구마를 비롯해 마늘·대파·배추 등 각종 채소류가 생산된다. 특산물로는 구기자·돌미역·돌김·멸치·유자와 진도홍주가 있다.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진도는 예로부터 문화와 예술의 고장으로 이름 높았다. 한국의 대표적 민요인 진도아리랑을 비롯해 남도지방에서 불리는 창이나 민요 등 어디를 가나 부녀자들의 노래 가락을 들을 수 있다. 진도지방에서 불리는 민요는 김매기 등 농사를 하면서 부르는 농업요가 대부분이고, 닻배노래 등 고기를 잡으면서 부르는 어업요나 유희요 등도 많다. 또한 조선 후기 남종 문인화의 대표적 화가인 소치 허유~미산 허형~의재 허백련~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화가와, 서예가 소전 손재형 등이 진도 출신이다. 매년 4~5월 신비한 바닷길이 열리는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모도의 간조육계도에서 영등제가 열린다.
1984년 진도대교 완공으로 비로소 육지와 연결되었다. 진도대교를 지나온 18번 국도가 섬 중앙을 지나 남쪽의 임회면 팽목항까지 이어진 다음, 의신면~고군면을 연결하여 동남부를 돌고 있다. 서부는 801번, 803번 지방도가 면마다 연결되어 있다. 진도 내의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임회면 팽목항에서 조도와 관매도행 배편이 있다.
운림산방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1809-1893) 선생이 말년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로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소치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 때 대흥사 두륜산방의 초의선사 밑에서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 된다.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게 되었다.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이후 이곳은 소치(小痴)~미산(米山)~남농(南農)~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이어온 한국 남화의 본거지가 되었다.
첨찰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운림산방은 연못과 어우러진 정원이 조화를 이룬다. 운림산방 안에는 소치의 사당과 소치·미산·남농의 3대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소치기념관, 진도의 고유한 문화적 배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진도역사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초등학생 800원. 관람시간은 09:00~18:00. 주차료는 없다.
전화 061-543-0088
소전미술관
서예가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1903-198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옛 진도군청 자리에 있던 지하 1층, 지상 2층, 400여 평 규모의 문화예술관 건물을 미술관으로 새롭게 꾸몄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은 송간조월(松間照月), 사해인민송태평(四海人民頌太平) 등 300여 점으로,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초기작부터 1970년대 작품까지 소전의 작품 세계를 빠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소전은 광복 후 1949년 국전 심사위원을 지낸 이래 국전 운영위원장, 홍익대 교수, 문화재 보호위원장, 예총 회장, 예술원 부원장 등을 지내며 고대의 서체에 바탕을 둔 ‘소전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해 한국 서예를 예술로 자리매김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의 작품으로는 196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작품상을 수상한 팔마유풍(八馬遺風),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순신장군시(詩) 등이 유명하다. 벽파진에 있는 충무공전적비의 글씨도 소전의 작품이다. 입장료 어른 1,5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500원. 관람시간 09:00~18:00, 주차 무료. 매주 월요일 휴관.
전화 061-544-3401
남진미술관
임회면 삼막리의 남진미술관은 서예가 장전(長田) 하남호 선생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사설미술관이다. 1989년 문을 연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서화, 조각, 도자기, 서양화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모두 다 명품이다. ‘남진’이라는 명칭은 장전 선생의 이름 가운데 ‘남’자와 부인의 이름 ‘진’자를 합하여 지은 것이다.
이 미술관의 소장품은 웬만한 박물관을 차려도 좋을 만큼 넉넉하다. 이율곡의 서찰, 추사 김정희의 글씨, 윤두서의 산수도 등 국보급 서화를 비롯해 이상범, 조석진, 변관식, 안중식, 노수현, 허건 등의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리고 소치의 여덟 폭 매화 병풍도 전시돼 있다. 전시공간이 좁아서 촘촘히 걸어 놓기는 했으나 한 점 한 점 꼼꼼히 들여다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관람료 어른 2,000원, 관람시간 10:00~17:00. 월요일과 국경일에 휴관한다.
전화 061-543-0777
명량대첩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울돌목(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명량대첩(鳴梁大捷)은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해전이다. 조선군은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과 싸웠고, 왜선 31척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칠천량해전 이후 남해안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수륙병진계획은 차질이 생겼고,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명량해전의 현장인 울돌목은 해남반도와 진도 간의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다. 물길은 동양 최대의 시속을 지닌 11~13노트의 조수가 흘러 배를 운행하기 힘든 곳이다. 한편, 1984년 10월18일 진도군 녹진과 해남군 학동 사이의 울돌목에 놓인 진도대교는 길이 484m, 폭 11.7m의 사장교다. 현재 다리를 넓히는 마무리공사가 한창이다.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기리기 위해 1956년에 세운 비석으로, 커다란 바위 언덕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비석 머리에는 쌍룡이 휘감은 채 양편으로 머리를 내놓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썼다. 명량해협의 동쪽 길목인 벽파진은 진도대교가 놓여지기 전만 하더라도 진도와 육지를 오가는 관문이었다.
신비의 바닷길
세계적으로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茅島) 사이 약 2.8km가 썰물 때 개펄이 드러나는 현상이다. 매년 음력 3월 초와 보름에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로 해저의 사구가 40m 폭으로 1시간쯤 완전히 드러나는데, 이때를 ‘영등살’이라 한다. 매년 이 현상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이 몰려온다. 전세계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을 보기 위해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알려졌다.
진도군에서는 영등제 기간에는 국내외 관광객들을 맞아 진도 고유의 민속예술인 강강술래, 씻김굿, 들노래, 다시래기 등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만가, 북놀이 등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를 선보이고 다양한 이벤트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엔 5월중에 열렸다. 제28회인 올해엔 7월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열린다. 바닷길이 완전히 열리는 시간은 오후 5~6시 전후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도 불리는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대사 피에르 랑디 씨가 진돗개 연구를 위해 진도에 들렀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귀국 후 프랑스 신문에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요시미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를 불러 히트를 하면서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바닷길 입구엔 2000년 4월 뽕할머니 상징 조형물을 제작해 설치했다.
진돗개
진도의 자랑인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 세계명견 제334호)는 한국 특산의 개 품종이다. 석기시대 사람이 기르던 개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개 중에서 나온 한반도 토종견으로서,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고유의 품종으로 유지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견이다. 기원은 중국 남송(南宋)의 무역선에서 유입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기에 진도군 지산면에 설치된 군마 육성 목장을 지키게 하기 위해 몽골에서 들여온 개가 진돗개의 원종이라는 설 등이 있다.
대륙과 격리된 채 비교적 순수한 형질을 그대로 보존해온 진돗개는 여러 우수한 품성을 지녔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기본으로 용맹성과 수렵성이 뛰어난 사냥개다. 또한 귀소본능, 대담성, 결벽성, 경계성, 비유혹성 등의 우수한 품성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진도에서는 매년 10월 한국진도개 전국품평회를 개최한다.
진도읍 동외리의 진돗개시험연구소는 진돗개의 우수 혈통을 보전하고 세계적인 명견으로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연구소다. 진돗개의 질병·체형·유전자·인공수정 등 진돗개 연구와 관리 등이 주요 업무로서 훈련장과 사육장, 진료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선 다양한 진돗개 종류를 관람할 수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중엔 진돗개의 묘기와 훈련과정 등을 구경할 수 있으며, 도우미로부터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주차와 관람은 무료다. 전화 061-540-3389
진도홍주
진도 홍주(紅酒)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는 진도의 토속명주다. 조선시대엔 지초주(芝草酒)라 하여 최고 진상품으로 꼽혔다. 조선 세조 때 경상도절도사 허종(許琮)의 부인 청주 한씨가 홍주의 양조비법을 후손들에게 전하였다. 그 후 5대 후손 허대(許岱)는 진도로 내려와 부인 경주 이씨가 전수한 양조법으로 홍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비법은 진도의 양천 허씨 문중에 대대로 전해져 계승 보전되었다.
전라남도는 1994년 진도군내 홍주 제조자 15명으로 구성된 진도홍주보존회를 단체지정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하고 기능자를 허화자씨로 결정했다. 진도 홍주는 1994년 전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알코올 도수는 40도 이상이다. 현재 진도 내에서는 현대적 시설을 갖춘 홍주 술도가가 5~6군데 있다.
국립남도국악원
임회면 상만리 언덕에 2004년 문을 연 국립남도국악원은 600석 규모의 대극장과 1,200석 규모의 야외공연장 등을 갖추고 있다. 국립국악원 가운데 세번째인 남도국악원의 대극장은 특히 최첨단 음향장비와 무대설비 등 초현대식 시설을 자랑한다.
매주 금요일 펼쳐지는 상설공연에는 전통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남도민요, 진도다시래기, 진도 북놀이를 비롯해 심청가·흥보가 등의 판소리와 살풀이 등의 경연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공연문의 061-540-4033.
진도해양생태관
고군면 회동리 영등축제 현장과 가까운 곳에 세워진 진도해양생태관은 각국의 희귀 조가비와 어류생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으로 홍보관·조가비관·생태관·수족관·기획관 등이 갖춰졌다.
생태관 1층 조가비전시관에는 전세계에서 수집한 조가비 830종 12,525점이 전시되어 있다. 또 1층의 대형 수족관에는 상어 등 바다생물 350마리가 전시되어 있고, 홍보관에는 바닷길이 열리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상영돼 시기를 맞추지 못한 관광객도 신비의 장관을 볼 수 있다.
2층 해양생태전시관에는 철갑상어 등 각종 상어와 연안에서 서식하는 생물 등 700여 종이 전시되어 있고, 담수관과 웅덩이생물관 코너도 있다. 9㎡ 넓이의 바닥에 관람객이 올라서면 바다 생물과 진도 지도가 화면으로 나타난다. 3층은 신비의 바닷길이 드러나는 회동 앞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휴게전망대, 그리고 그림과 조각품 상설전시공간을 마련해 200여 명에 이르는 진도 출신 국도전 작가들과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해양생태관에 기증된 전세계 희귀조가비 12,500여 점은 진도 출신 허병운씨(78)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외항선 선장 시절 세계 각국을 돌며 수집해 보관해 오던 것을 진도군에 기증한 것이다. 이것을 모태로 생태관 건립이 이뤄졌다. 입장료 어른 1,5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500원. 관람시간 09:00~18:00. 월요일 휴관. 주차 무료. 전화 061-542-3404.
용장산성
1231년(고종 18)부터 침략해오던 몽골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 전쟁을 벌였으나, 1270년(원종 11)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다.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배중손(裵仲孫)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은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候 溫)을 왕으로 삼은 뒤 진도로 내려와 용장산성(龍藏山城)을 쌓고 몽골에 대항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38,741척(尺),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 놓지 않았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내엔 용장사지와 행궁터가 있다. 성의 길이는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 높이는 4m 내외다. 용장산성은 축성 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현재 용장산성 행궁터 옆에 자리한 용장사에 안치되어 있는 석불은 광배(光背)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동체(胴體)도 원형이 아닌 시멘트로 발라버려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 없다. 배중손이 진도로 왔을 때 조성한 불상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대좌석을 만든 솜씨로 고려 초기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도석성
임회면 남동리 바닷가에 자리한 남도석성(南桃石城)은 고려 원종 때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고 최후까지 격전을 벌인 성이다. 패주하던 삼별초가 돈지에서 둘로 나뉘었는데, 임회 방면으로 패주했던 배중손 장군과 그 부하들은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마쳤다 전한다. 금갑에서 배를 탄 김통정, 유존섭은 제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2년 남짓 항몽전을 펼치다가 여몽연합군에 섬멸되었다.
이곳엔 삼국시대에 이미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현재의 성은 조선 초기 진을 설치하면서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1765년경(영조 41)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의 성이었다고 한다. 동·서·남문이 있던 자리가 잘 남아 있으며, 둘레가 400여m 정도이지만, 해안지방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성문 앞에 있는 쌍운교와 단운교는 석성의 외곽을 건너다니기 위하여 축조한 것인데, 편마암의 자연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는 드물어 학계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 왕온의묘
고려 삼별초군의 항몽전 당시 진도에서 10일 동안 벌어진 전투로 삼별초군은 위기에 몰려 결국 후퇴하게 된다. 당시 왕으로서 패주하던 승화후 온(承化侯 溫)은 왕무덤재 근처에서 잡혀 몽골장수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논수곡(論首谷)과 논수동(論首洞)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바로 밑에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으나 아들 항의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 이때 함께 도망치던 여인들이 몸을 던진 만길재 아래 우황천은 급창둠벙이라는 이름으로 전하여 온다.
배중손장군사당
배중손(裵仲孫·?-1271) 장군은 가장 유력한 삼별초 지휘관이어서 대몽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1270년(원종 11) 몽골에 다녀온 원종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단행하고 삼별초에 대해 강화도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에 삼별초는 왕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정부를 수립하여 저항을 시작하였다.
배중손 등은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 성곽을 구축하고 궁전을 짓는 등 장기 항전태세를 굳혔다. 고려군의 지휘관 김방경(金方慶)이 몽골군과 연합하여 공략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몽골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김방경·흔도(欣都)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진도를 함락시켰다. 당시 임회 방면으로 패주했던 배중손 장군과 그 부하들은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마쳤다 한다. 임회면 굴포리 바닷가엔 배중손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조도군도
진도 서남쪽엔 크고 작은 150개의 섬들이 새떼와 같이 모여 있어 조도군도(鳥島群島)라 한다. 그 중 이마에 등대를 얹은 하조도는 가장 큰 어미새로서 진도에 딸린 섬들 중에서 중심이 된다. 하조도 주변의 서남해는 수많은 섬들이 파도를 막아주어 육지의 호수처럼 보인다. 짙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아기자기한 섬들과 섬 사이를 떠다니는 고깃배들, 그리고 바닷가에 움을 튼 아담한 어촌은 아주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하내 마을 끄트머리 갯바위 벼랑에 서서 ‘새떼’ 사이를 오가는 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하고 있는 하조도 등대도 제법 운치 있다. 등대까지 해안선을 따라난 오솔길을 걷는 맛이 쏠쏠하다. 진도 팽목항(061-544-5353)에서 조도까지 여객선이 1일 4회(08:00, 10:20, 14:00, 17:00) 운항.
관매도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조도군도 가운데 관매도는 절경이 많은 섬이다. 천연기념물 제212호로 지정된 후박나무가 있으며, 특산물로는 자연산 돌미역이 유명하고, 이외에도 멸치, 꽃게, 우럭, 농어, 돔 등 싱싱한 자연산 활어가 많이 생산된다.
관매8경은 고운 모래가 돋보이는 3km 길이의 관매도 해수욕장, 선녀가 방아를 찧었다는 방아섬(남근바위), 하늘장사가 묻힌 돌묘와 옥황상제가 애지중지했다는 꽁돌, 비 오는 날이면 할미도깨비가 나온다는 할미중드랭이굴, 바위산을 칼로 자른 듯이 잘린 하늘다리, 선녀들이 목욕하고 밥을 지어먹었다는 서들바굴폭포, 자연산 돌미역·톳·돌김·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이 풍부한 다리여를 말한다.
진도 팽목항에서 관매도까지 하루 1차례(14:00) 운행. 문의 조도농협(061-542-5383~5).
세방낙조
진도 서남쪽의 지산면 가치리 세방 마을에서 보는 일몰을 일컫는다. 해질 무렵 섬과 섬 사이로 빨려드는 붉은 빛 일몰로 장관을 이뤄 중앙기상대가 ‘한반도 최남단 제일의 낙조 전망지’로 선정했을 정도로 일몰이 장관이다.
전망대 바로 앞으로는 각흘도·곡섬·불도 같은 작은 섬들이 떠있고, 좀더 멀리로는 조도군도에 속하는 가사도를 중심으로 한 주지도, 양덕도, 구멍 뚫린 섬이라 하여 공도라고 불리는 혈도,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광대도(사자섬)가 있다. 진도군은 다도해 낙조의 장관을 볼 수 있는 세방 마을 일대에 해넘이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금골산 5층석탑
군내면 둔전리에 솟아있는 금골산(193m)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우뚝 솟았다. 수십 길 절벽에는 층층바위를 이룬 곳과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 있는가 하면 보는 방향에 따라 사람으로, 또는 짐승으로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들이 산 전체를 수놓고 있다.
산 아래 초등학교에 위치한 금골산 5층석탑(보물 제529호)은 기단부와 1층 몸돌은 매우 길게 조성되어 정읍의 은선리 삼층석탑(보물 제167호) 양식과 비슷한데, 고려 후기 작품으로 보인다. 석탑은 석질 등이 별로 좋지 않고 우주(隅柱) 간의 체감비례 등이 맞지 않으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을 모방한 백제 양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첨찰산 쌍계사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尖察山·485.2m) 남서 기슭에 자리 잡은 쌍계사는 신라 때인 857년(문성왕 19)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다.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 이름하였다.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은 1982년 수리할 때 발견된 기록에 숙종 23년이라 쓰여져 있어 169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목조삼존불좌상은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시불을 모시고 있는 형태인데, 대웅전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쌍계사 사찰 뒤쪽 계곡을 따라 첨찰산을 10분쯤 오르면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록수림으로서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으므로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숲을 구성하고 있는 식물은 동백나무·후박나무·참가시나무·감탕나무·졸참나무·느릅나무·말오줌때·쥐똥나무 등 50여 종류에 이른다. 있다. 면적 621,351m2.
길에서 만난 별미 l 간재미찜
간재미는 가오리와 비슷하지만 맛은 홍어에 뒤지지 않는 바닷고기다. 간재미 살은 부드럽고 담백해 별미로 꼽히는데, 영양분을 비축해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겨울부터 이른 봄 사이 춥고 눈 올 때가 제 맛을 낸다. 다른 계절엔 뼈(연골)가 드세져서 맛이 덜하다. 간재미는 우리나라 서해안에 고르게 서식하지만, 진도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데다가 맛도 좋아 오래 전부터 진도 사람들이 즐기는 요리로 자리를 굳혔다.
진도 사람들은 서부 해안의 서촌 간재미를 가장 쳐준다. 모래가 아니라 뻘 바닥이라 더 맛있기 때문이다. 또 진도는 같은 섬이라 해도 동부 해안과 서부 해안의 온도 차이가 심한데, 수온이 차가운 서부 해안에서 잡은 물고기가 맛이 좋다고 한다. 진도사람들은 간재미를 된장에 찍어서 곧바로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회무침·탕·찜 등으로 내놓는다. 홍어처럼 톡 쏘는 맛이나 비린내가 없어 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쉽게 맛볼 수 있다.
회무침을 할 때는 우선 얇게 포를 뜬 간재미를 막걸리로 씻어 낸다. 막걸리 속의 유기산이 생선의 단백질을 응고시켜 고깃살이 풀어지지 않고 쫄깃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 포를 뜬 간재미를 채 썬 무, 미나리를 함께 푸짐하게 넣고 여기에 해풍 맞고 자라 향이 독특한 진도 대파와 마늘, 참깨, 고추장, 고춧가루, 참기름, 식초 등을 넣어 맨손으로 잘 무친다. 그러면 새콤달콤하고 오들오들 씹히는 간재미회무침이 완성된다. 여기에 진도 전통 명주인 홍주를 곁들이면 상은 더없이 푸짐해진다.
싱싱한 간재미 한 마리를 통째로 쪄내는 찜은 양념이 밴 속살과 연골이 입에서 부드럽게 넘어간다. 맵지 않고 부드러워 누구나 먹을 수 있다. 간재미를 토막 내 신김치와 함께 넣고 푹 끓여낸 탕은 국물 맛이 얼큰하면서도 시원해 숙취해소에 제일이다. 진도파출소 맞은편의 문화횟집(061-544-2649), 성내리의 제진관(061-544-2419)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간재미찜 한 접시(2~3인분) 20,000원, 회무침은 20,000~30,000원, 탕은 20,000원이다.
흐르는 곡 : 진도이야기 - 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