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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47년5월 |
진주대교당 설립 |
전국대교구 50개중 진주대교구를 진주시 비봉동에 설립하다. 대교구를 중심하여 사천,고성,남해,산청,영남일원에 각처 도인들로써 구성조직하여 대교구를 운영하였다. 교구장은 전희순선생이 맡음 |
포덕55년7월 |
임원개선 |
대교구장겸 군교구장:전희순 공선원:이백련,금융원:김용식 순회교사:최상용,정태호, 평거전교사:이광준 명석전교사:백영희, 정촌전교사:김주성,성산전교사:정재병,사죽전교사:윤정현, 도동전교사:강길규 |
* 동학혁명 관련한 진주지역의 기록과 전희순 대교구장에 관련한 기록 정리
................................. <천도교백년약사> 중에서
백년약사 p 222-223
(1894년 4월 동학혁명 기포이후)
이 때에 진주 營將 朴熙方이 砲軍 수백명을 거느리고 矢川面 大刹里에 이르러 대접주 白樂道를 결박하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이곳에 너희 동학군이 어디 있느냐, 모두 바른대로 고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대접주가 정색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나라를 안보하고 백성을 편안테 하려는 사람이요, 너희는 백성의 기름과 피를 빠는 관원이니 내 어찌 너희에게 보국할 사람을 죽이라고 내 입으로 불러 대일 수 있겠느냐? 내 차라리 수십만 동학군을 대표하여 죽으리라. 너희는 생각대로 하라]하였다. 이에 영장이 크게 노하여 백낙도에게 악형을 가하자 다리뼈가 부서졌다. 이때 백낙도가 크게 꾸짖어 가로대 [이 무도한 놈들아. 죄없는 백성을 이렇게 악형을 하니 강약이 부동하여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편모시하에 불효를 면치 못하게 됨은 천추의 유한이요, 너희는 반드시 만년의 원수로다. 내가 너희 손에서 오늘 이 시간에 죽을지라도 나의 혼신은 기어코 너희의 원수를 갚으리라]하였다.
드디어 16일에 영장 박희방은 진주 君子亭에서 대접주 백낙도를 참형에 처했다. 이 때 광풍이 크게 일어나며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고 우레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면서 큰 비가 퍼부어 영장 이하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랐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밤마다 영장의 숙소에 백낙도가 나타나 영장을 호령하므로 영장은 황겁하여 긴 칼을 방구석에 세워두고 촛불을 밝히고 잠을 자려해도 눈만 감으면 백대접주가 나타나 큰 소리로 호령하므로 영에 있지 못하고 민간에 나가 유숙하였다. 그러나 또한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어 부득이 사직한 후 어부로 가장하여 남강 하류로 도망하였다.
백년약사 249
9월 9일 경상도 진주군 三壯面 菊洞에 사는 도인 孫殷錫이 4월 16일 진주감영에서 희생된 대접주 백낙도의 위령제에 참석하였다. 이 때 좌중에 백낙도를 밀고하여 잡히게 한 中山里에 사는 成順相이란 자가 있으므로 손은석은 성순상을 불러 일갈하여 가로되 [네가 이 자리에 온 것은 감사하나 우리는 이미 너의 소행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예로부터 ‘殺人者 死’라 하였으니 우리 대접주를 살해케 한 너를 당장 이 자리에서 쳐 죽일 것이로되 갑자기 죽이면 그 뿐이니 네 생전에 고생을 하게 하여 써 백대접주의 원수를 갚고 이것으로 네가 적악한 죄과를 알게 하리라]하고 모진 매를 쳐서 내어 쫓아 버렸다.
백년약사 p.257
(10월 5일에) 경상도 진주 대접주 全熙淳은 기포하라는 통문을 받고 기력이 장대한 도인 金學斗와 더불어 昆陽 軍器所에 이르러 군기감역 文某에게 사유를 말하고 군기를 달라고 하자 문모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전대접주는 숫불이 가득한 화로를 들어 그의 앞에 던지고 빰을 후려치면서 이르되 [우리는 나랏일을 위하여 탐관오리를 제거하려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인데 네가 만약 이 나라의 백성이 되어 우리의 뜻을 순종치 않으면 너부터 당장 쳐 죽이리라] 하고 다시 상 위에 있는 벼룻장을 집어드니 문모가 황겁히 군기고의 열쇠를 내주었다. 이에 군기고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이 힘껏 한 짐씩 지고 나왔다.
10월 6일 이들이 덕산에 이르니 경상도 7포 도인 2만여명이 모여 있었다. 이 날 李文浩가 선봉이 되고 각 포 두령은 중군이 되어 각기 자기 포를 지휘하여 먼저 昆陽邑에 이르러 討捕使를 징치하고 대오를 정비하였다.
p. 258
(10월13일) 한편 동학군 이문호를 선봉으로 한 각 포 두령은 이 날 高僧堂 山下에 유진하였다.
10월 14일 새벽 동학군은 관군과 맞아 싸울 때 군기 부족으로 크게 패퇴하여 고승당 산 위에 이르렀으나 東南北면은 관군에게 이미 포위 당하고 서쪽은 절벽이라 동학군은 대오를 잃고 단병접전으로 혈전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이 때 대접주 전희순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차에 소년 동학군 金龍玉의 구원을 받아 徐弘武의 집에 갔는데 서홍무는 피난가고 늙은 할머니가 있었으므로 피묻은 옷을 바꾸어 입고 3일을 치료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하였다.
고승산 전투에서 전사한 주요 인물은 泗川 首接主 金成龍, 大正 崔璣鉉, 中正 姜五元, 昆陽 大正 崔蒙元, 金敬連 崔聖俊 韓明善 金命完 中正 姜夢生 金旦桂 趙性仁 執綱 崔學權 申寬俊 書司 金華俊 등이며 그 밖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p.351
(갑진개혁 1904) 경상남북도 列郡에서 개회
전희순 김상정 손은석 박충일 강필만 지태련 정용태 박동남 김수택 김영선 서응회 김학두 김석의 조유석 김종화 황태익 박경준 이태성 박규일 전대규 박경원 김민종 이상규 이지우 최상관 윤치수 윤만수 이광로 백수기 강병길 전경호 이재향 진환수 노기현 정봉규 김진규 정봉조 박영보 허봉서 허학서 송영만 최진규 김응두 김관태 정찬용 김석찬 정재안 김성간 지학선 이광준 정용안 전학천 오성운 이옥규 최갑룡 최상룡 전봉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