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2005~2020]/정기산행기(2006)
2006-05-16 21:19:10
90차 명지산 산행기 (서상국)
* 일시 : 2006. 5. 13(토)
* 참가 : 상국, 부종, 길래, 광용, 경호, 택술, 인섭, 문수, 김진영, 이환기(10명)
* 코스 : 익근리 - 승천사 못 미친 곳에서 우측 능선 - 사향봉 - 1봉 - 2봉 - 삼거리 - 폭포
- 승천사 - 익근리
(오전 9시 5분 산행 시작, 오후 6시 25분 원점회귀 - 식사 빼고 순수 산행시간 6시간 30분 정도)
(문수, 인섭은 오전 7시 30분 연인산 산행 시작, 명지 2봉, 1봉에서 합류)
1.
90차 산행, 명지산. 마루대사가 가면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 못 간다니까 총무 맡은 죄로 이것저것 알아본다고 바쁘다. 인터넷을 뒤졌다. 경기도에서 두 번째 높다는 것만 들었지, 정확하게 고도가 1,267m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산행기 몇 개 읽어보고 익근리에서 시작, 익근리로 돌아오는 것으로 정했다. 원점회귀를 하되 가능하면 서로 길이 겹치지 않도록 할 것이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있게 대처하는 것은 기본일 터, 돌발상황은 박대장에게 맡기면 되겠지.
그러다보니 희소식 하나, 분당팀에서 내가 차를 공출한다고 먼저 공지를 했는데, 부종이 오랜만에 재봉이랑 마신 술자리에서 차를 몰고 간다고 호언을 했던 모양이다. 얼씨구, 어찌나 반갑던지.
2.
5월 13일 토, 아침 6시 50분. 정자역에서 부종이 차를 타고, 평소 펭귄 타는 곳에서 길래를 태운 차는 가평을 향해 거침없이 달린다.
부종이는 명지산이란 이름을 듣고는 무의식중에 ‘낙동강 명지 갈대밭’을 떠올렸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어딘지 모르게 친근한 이름에, 재봉이 사무실 근처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라고 생각했다는구먼. 두 시간 가까이 차를 몰고 1,200m가 넘는 산을 오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거라고 억울해 한다. 그러다가 펭귄이 오지 않은 게 이상한지 전화를 건다. 펭귄은 어젯밤 12시까지 재봉이랑 한잔 했던 모양, 아직 술이 덜 깬 상태로 전화를 받는다.
“어이, 펭귄! 니, 오늘... 내 온다꼬, 쫄아서 안 나오는 거제?”
“어? 뭐? 뭐라꼬? 캬캬. 그기 아니고, 내가 오늘.. $#&^*&@!%^ 그래, 맞다. 내 오늘 니한테 쫄았다. 캬캬.”
“니 제일 높은 데 올라간 기 몇 미터 짜리고?”
“몰라. 니, 용문산에 가봤나? 내가 가본 산 중에 용문산이 아마 1,100m쯤 된다던데.”
“봐라, 나는 오늘 1,267m 짜리 명지산에 올라간다. 니는 확실하게 내 밑이다. 알았제?”
펭귄이 뭐라 뭐라 변명을 하는데, 부종인 쉽게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통역을 해주었더니 이해가 가는 모양이다. 그래도 한방에 펭귄을 날렸다고 좋아서 운전대를 잡고 계속 룰루랄라다.
3.
가평 익근리에 도착한 시각 8시 42분.
평상에 가방을 풀고, 커피 한잔 빼어먹고 있으니 30년 만에 보는 춘천 친구들이 도착한다.
“야, 일찍 왔네?”
“어, 우리 벌금 안 낼라꼬 억수로 밟았다.”
정확하게는 1분 늦었지만 30년만에 보는 친구한테 벌금 받을 수는 없고, 서로 악수를 나눈다고 바쁘다. 악수하는 와중에 수서에서 차를 몰고 온 아이들은 우리 눈을 피해 저 구석에서 짐을 풀고 있다. 5분 늦은 것을 안 들키려고 별 짓을 다 한다.
그래도 대단하다. 블러그에 공지하기를 ‘8시 45분 가평 익근리 주차장 집합.’이라 했는데 분당, 수서, 춘천에서 각기 떠난 차들이 제법 먼 길을 오차 5분 이내에 도착했다는 것, 대단한 일이다.
문수와 인섭이는 새벽에 일찍 출발해서 7시 반에 이미 연인산 등반을 시작했고, 명지 2봉에서 우리와 만나기로 하고 산을 타고 있다니 우리도 발길이 바쁘다.
춘천에서 온 친구, 진영이와 환기가 처음부터 엄살을 피우며 질문도 많다.
“우린 300미터급에서만 놀았지, 정식으로 등산을 해보지도 않았고, 고도 1,000미터는 어떻게 가야 되는 건지, 가다가 짐 지키고 있으면 안 되나?”
부종이가 침을 튀기며 맞장구를 친다.
“그래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할 이야기도 많을 낀데, 우리는 대충 중간에서 내려오자.”
익근리에서 출발하면서 광용이는 바로 능선을 치고 올라가자고 선두를 선다. 쫄들은 왜 좋은 길 두고 경사가 심한 산길로 접어드느냐고 의아해 한다. 광용이 못 들은 척, 앞에서 걸음을 빼기 시작한다. 후미가 자꾸 쳐지는 것을 느낀다. 두 번 째 숨 돌릴 때 경호를 선두에 세우고 많이 힘들어하는 부종이와 진영이를 광용이가 밀고 올라온다.
군데군데 금낭화, 괴불주머니, 둥굴레가 지천이었고 위로 올라가니 얼레지 군락이었다. 꽃 이름 몇 개 설명해 주었더니 부종이 쉬면서 딴지를 건다.
“서총! 올라갈 때 야생화 공부 쫌 많이 시키주소. 설명도 좀 더 길게 해 주고, 우리는 늘 배우는 자세가 되어 있으니까, 가르쳐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맙다고. 보시 좀 하소.”
말만 그러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쉬는 시간을 늘리려고 잔머리를 굴린다. 덩치에 비해 아주 조그만 배낭에 뭐 든 게 있다고 쟈크를 훌딱 다 열어 풀어 젖히곤, 짐 챙길 때는 천천히 천천히, 하여간 시간 다 잡아먹는다.
지난 주 삼각산 산행때 너무 날이 더워, 나중엔 물이 좀 모자랐었다. 그래 요번엔 준비물 공지하기를 ‘충분한 물’이라 했더니, 그걸 읽은 부종이 동기회 회장답게 통은 크다. 2L짜리 큰 패트병을 3통이나 가져와선 “늦게 온 놈들 배낭에 하나씩 넣으라.”고 큰소리쳤다. 결국, 나랑 경호, 진영이가 넣었나? 하여간 자긴 넣었다가 다시 뺐다. 맨 뒤에 쳐진다고 건네준 무전기도 무겁다고 못 가져가겠다며 억지로 떼를 쓴다.
그래도 부종이를 살린 것은 군데군데 핀 연분홍 산철쭉. 그걸 보고는 힘이 솟았나보다. 38살짜리 쪽진 여인네로 보인다며, 뽀뽀를 하며 걸음을 멈추니 뒤에서 쳐다보는 길래랑 신곡사 눈빛이 가당찮다는 표정이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 봉우리 너럭바위에 앉아 한참 후미를 기다린다. 택술이가 배낭이 무거운지 막걸리를 한 통 비우고 가자고 자꾸 술을 권한다. 정상에 올라 마시고 싶었지만 결국 결국 택술이 의도대로 술을 입에 대고 거의 한 통 다 비우고 일어서려니 후미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크, 부종이 온다 어서 가자.”
다가온 부종, 이미 지 얼굴이 아니다.
“아, 씨. 볼 거 다 봤다. 이제 내려가자.”
“우린 너그 기다린다고 물도 안 마시고, 술도 안 묵었다.”
“이~씨, 술 냄새 나네. 나도 한 잔 도!”
왜 그런지는 몰라도 몹시 뒤틀린 나무들이 많았다. 그냥 지나갈 부종이 아니다. 쳐다보며 잠시 쉰다.
9시 5분에 시작한 산행, 처음부터 능선을 탄다고 제법 가파른 길을 3시간 20분 정도 왔으니 피곤할만하다. 아직 정상은 까마득하고 뒤를 돌아보니 몇몇은 얼굴이 노랗다.
명지 2봉이나, 정상에서 인섭이와 문수를 만나 같이 식사를 할 예정이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탈진할 우려가 있었다. 산행을 중지하고 자리를 깔고 기다리니, 부종이와 진영이가 광용이한테 떠밀려 온다. 진영이는 밥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폼이 “밥아, 너 본지 얼마만이냐?” 하며 체통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월매 앞에서 게걸스럽게 손으로 밥을 퍼넣던 이도령이 따로 없다. 부종이는 얼마나 좋았던지 김밥 하나 먹으면서 할렐루야 폼으로 학교 응원가를 부른다. 무전기에서 전해오는 문수의 굵직한 목소리가 칙칙하는 잡음에 뒤섞이더니, 다시 폰으로, 또 문자 메세지가 뜬다.
<아침부터 밥 같이 먹으려고 열나게 뛰어왔는데 그래 너그끼리 묵나? 맛있나? 몇 명이고?>
미안한 마음 한량없지만 아~들이 다 죽어 가는데 우짜겠노. 이왕 편 것, 다 묵고 가자. 술도 많고, 밥도 많고, 제육볶음에, 목동 제일김치에, 맨밥에, 김에... 세상에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동종주가 남아 나무에 부어주고 왔다. 나중에 명지산 정상에선 부어버린 동동주가 그리웠지만...
쫄들은 언제나 핑계가 많다. 아까는 힘들어서, 이제는 배가 불러 못 가겠다고 야단이다. 하지만 길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가다보면 늘 끝이 있는 법, 정상 바로 앞의 나무계단이 징그럽더라만 포토-라인도 있고 연인산을 올랐던 친구는 연인처럼 반갑게 맞아주니, 이게 정상에 서는 맛 아니겠는가?
4.
하산은 그냥 내려가면 가까운데 명지2봉을 들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뒤에서는 왜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로 돌아가느냐고 불평이 대단하다. 이때는 못 들은 척 멀리 내빼는 게 상수다. 명지 2봉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이젠 그야말로 돌아갈 수 없는 외길이다.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자칫 실수하면 데굴데굴 굴러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이 길 밑에서 치고 올라온다면 제법 땀방울이며 신음 꽤나 쏟겠다.
신록도 좋았지만 계곡도 길어 좋았다. 군데군데 맑은 물에 손도 씻고, 세수도 했는데 부종이만 간혹 이렇게 이상한 폼을 잡는다. <순간포착>코너에 단골로 등장했던 부종은 조심조심하면서 오늘은 한 장 도 안 찍혔을 거라고 안심하더니 언제 저런 포즈가 찍혔는지 나는 모른다. 사진기가 4대나 되니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찍힐지는 아무도 모른다.
명지산에선 명지폭포를 꼭 보고 와야 하는데, ‘폭포 60m’ 팻말에 슬쩍 내려다본 그곳엔 공포의 나무계단이 끝도 없이 밑으로 내려가자,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도망간 사나이들, 나중에 승천사 석조미륵보살 밑에서 불경스럽게도 사지를 쫙 펴고 드러누워, ‘이놈의 다리땜에, 이놈의 다리땜에...’ 하면서 명지 폭포 콸콸 쏟아져 내린다던 물소리와 시퍼렇다는 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더라.
5.
오전 9시 5분에 산을 오르기 시작해 오후 6시 30분에 익근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문수가 인터넷을 보고 찾아놓은 음식점, 손두부와 김치, 감자전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깔끔한 맛이었지만, 오늘은 땀을 너무 많이 흘려 그런지 삼겹살이 먹고 싶어 가평으로 차를 몰고 내려갔다.
무작정 들어간 <맛고을>이란 식당. 흑돼지 삼겹살에 두릅과 취나물, 곰취, 쪽파로 쌈을 싸니 그 향이 어찌나 좋은지 술이 술술 넘어가고 된장도 된장찌개도 여느 식당과는 맛이 달라 택술이는 밥을 한 그릇 더 청한다.
밖엔 가느다란 빗줄기, 안엔 10명의 친구들이 산행후담을 쏟아내고... 여기 2차 술값은 자기가 꼭 계산을 해야 한다며, 환기가 하는 말.
“친구들 오늘, 정말 반갑다. 친구들하고 지낸다는 게 이리 좋은 걸 우리는 모르고 산 셈이다. 춘천에 오면 꼭 연락해라. 내가 구경시켜주고 풀-코스로 접대할게. 닭갈비에 막국수, 그거 얼마 안 하니까 언제든지 춘천 오면 연락해라. 어이? 알았제?”
그러면서 명함을 돌린다. 마지막 하는 말이 걸작이다.
“근데 있제. 춘천 오더라도... 산에 올 때는 연락하지 마라! 오늘 죽는 줄 알았다. 다시는 너그들하고 산에는 안 갈 끼다.”
*
춘천에 친구 셋 산다기에
춘천하고 가까운 산에 가는 김에
정말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재봉이가 연락해놓고 막상 자기는 일이 생겨 못 오고
우리는 길에서 만났으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지나간 세월을 사이에 둔 그런 친구들이었는데
땀 흘리며 산을 오르고, 술잔 주고받으며 아무 격의없이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그만큼 젊어져 있더라.
술잔 놓고 악수하며 다시 헤어지면
젊어졌던 나이
다시, 다시, 나이 들더라도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