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7)
◎ 셋째 형님
남편은 맏아들이긴 했어도 형제들 중 첫째는 아니었다. 위로 누님 세분이 계셨으니까 부모님께는 네 번째 자식이다. 누님들은 손아래 올케인 나에게 늘 다정하게 대해 주셨다. 그 중에서도 남편 바로 위인 셋째 형님은 성품이 서글서글해서 다가가기가 편했었다.
셋째 형님은 위의 형님들과 아래 동생들을 이끄는 중심이고 리더였다. 집안에 행사가 있어 의견이 분분할 때면 셋째형님이 정리를 해주고 모두 그 의견을 따르곤 했다. 또한 어머님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자식이었다. 시뉘 남편이 농협직원으로서 고정 수입이 있는데다가 재테크 능력도 있어서 어머님께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드렸다. 형제들 모두가 서울로 올라와 있었을 때 어머님을 가까이서 오래 보살펴드렸으니 더 각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형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청천벽력이었다. 형님 나이 43세였던 1979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님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황급히 논산으로 내려가셨다. 딸이 병원에 입원하여 의식을 찾을 때까지 딸네 집 살림을 해주시고, 외 손주들을 밥 해 먹여 학교에 보내셨다. 애들 친할머니가 계셨지만 밭농사 일 하시느라 바쁘셨다.
형님은 병석에서 일어났지만 후유증으로 오른 쪽 편마비가 왔다. 한 쪽 팔과 손으로 조석도 끓여 먹고 그럭저럭 집안일을 하기는 했지만, 마비가 풀리지 않자 경희대 한방 병원을 다니게 해야겠다고 시뉘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올라왔다.
형님은 우리 집에서 6개월 정도 머물며 한방 병원에도 다니고 보라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도 받았다. 애들 고모부는 토요일이면 마나님을 보러 올라왔다. 올 때면 소고기 돼지고기를 두둑한 뭉텅이 째로 사왔다. 시골에서는 어른을 찾아뵐 때 고기를 사갖고 가는 것이 예의였다. 방학이면 형님의 초등하교 3학년인 막내딸이 와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우리 큰 애보다 한 달 먼저 난 아이로 막내면서 외동딸이었는데, 성격이 밝고 명랑하여 우리 애들하고도 잘 놀았다.
어머님은 오매불망하시던 딸을 곁에서 보시니까 좋으셨겠지만 나는 식구가 늘어 힘에 부쳤던 기간이었다. 힘들었다 해도 지나놓고 보면 잠시인데, 그 때 내가 지친 모습을 그들에게 보이지는 않았을까 돌이켜 생각해본다. 며칠 전 형님 딸과 카톡을 길게 주고받았는데, 그 때 외숙모가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사촌들도 잘 해줘서 고마웠다는 말을 해 주어 다행이다 싶었다.
셋째 형님은 3년 후인 1982년에 병이 재발하여 2년을 투병한 후 84년에 세상을 떴다. 의식은 있었지만 말을 전혀 못하고, 대소변 받아내고, tube feeding(경관영양)하면서 꼼짝 못하고 누워서만 지내다 갔다. 어머님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형님이 병원에서 중환자로 있을 때나, 퇴원해 와서 집에 누워 있을 때나 애들 고모부의 아내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어머님이 전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사위가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집으로 달려와서 아내 기저귀 갈아주고, 소변 주머니 비우고, 영양식 주입하고, 얼굴 쓰다듬고, 안아주고, 입 맞추고 다시 직장으로 간다는 것이다.
시뉘 남편은 형님이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재혼을 않다가, 자식이 없고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자와 재혼을 하였다. 그 여인은 우리 집에도 왔었고, 논산에 볼일이 있어 고모부 집에 들리게 되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순하고 착한 여자였다.
하루는 그녀가 우리 형제들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남편이 전처 사진을 앞에 놓고 매일 바라보며 운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서 고모부를 나무랬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고, 거기다가 새 마나님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냐고, 당장 사진 치워버리라고 말을 했다. 그랬음에도 애들 고모부는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얼굴에 기쁨이 없었고 늘 우수에 잠겨 있었다. 고모부는 2011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어머님은 사위의 죽음을 알지 못하셨다.
참척의 아픔을 겪으신 어머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무 슬퍼하면 살아있는 자식들에게 해롭다는 말씀을 어디서 들으시고는 울음을 꾹꾹 누르며 참아내셨다. 외 손주들 보는 것을 너무 힘들어 하셔서 사위도, 생질들도 외가를 차츰 찾지 않게 되고 서서히 멀어졌다. 어머님 미수 때 생질들 모두가 한번 왔었고, 어머님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가 연락해서 외할머니를 찾아 뵌 것이 전부였다. 놀라운 것은 20년 만에 보는 외 손주들, 세월이 흘러 모습이 많이 변한 그 아이들을 생명이 다 해 가시는 할머니가 다 알아보시고 대화를 나누신 것이었다.
한동안 연락을 않고 지내다 며칠 전 생질녀와 카톡으로 안부를 두루 물었었는데, 새 어머니는 오빠 내외가 잘 보살펴드려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신다고 했다. 큰 생질부는 형님이 중환자실에 있을 때의 간호사였는데, 아내한테 잘 해준다고 고모부가 며느리로 삼은 여자였다.
지금 쯤 어머님은 그렇게 애틋하고 보고 싶던 따님과 천국에서 만나 기뻐하고 계시려나? 당신 아플 때 찾아오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셨던 사위도 만나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