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먼 이국땅, 북간도에서 만난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 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 리 천 리 또 천 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 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출처 《이용악 시전집》 (2018) 첫 발표 《시학》(1939.8)
*가시내: '계집아이'의 방언. *얼구며: '얼리며'의 방언.
*호개: '호랑이'의 방언. *눈포래: '눈보라'의 방언.
*불술기: '기차'의 방언. *초마: '치마'의 방언.
*우줄우줄: 몸이 큰 사람이나 짐승이 가볍게 율동적으로 자꾸 움직이는 모양.
이용악 李庸岳 (1914~1971)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5년 3월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을 간행하였다. 집안 대대로 이어진 가난, 고학, 노동, 생활인으로서의 고달픈 삶 등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많은 시를 창작했다. 그러한 개인적 체험을 일제강점기 유이민의 참담한 삶으로 녹여 내어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 북간도에서 만난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
이용악 시인은 우리나라 최북단 북방 지역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민중의 삶을 주로 노래했다. 함경북도 두만강 인근에서 자란 그는 북방 지역 민중의 삶, 만주와 러시아를 떠돌며 살아야 했던 일제강점기 유이민의 삶과 정서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노래한 시인이다. <전라도 가시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1연에서 화자인 ‘나’는 얼룩조개에 입을 맞추며 자라 눈이 바다처럼 푸르고 얼굴은 까무스레한 전라도 가시내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나’는 함경도에서 살다가 추위에 동상을 입은 발을 끌고 압록강 철교(‘무쇠다리’)를 건너 먼 이국땅 북간도에 온 사내이다. 함경도 사내인 ‘나’가, 전라도 가시내인 ‘너’를 청자로 삼아 말을 건네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 끝과 북쪽 끝, 평생 한 번 가 보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진 전라도와 함경도의 가시내와 사내가 어떤 연유로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까.
2연에서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가 만난 곳은 북간도의 어느 술막이다. 술막이란 밥과 술을 파는 곳으로, 먼 길 가던 나그네가 하룻밤 잠을 청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룻밤 묵기 위해 들른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이 술막은 불길하면서도 두려운 공간이다. 북간도에서 살아가는 화자에게 살을 엘 듯 추운 바람 소리나 호랑이도 이제는 무섭지않다.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시름도 이제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 정도 시름은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이 오가며 묵는 북간도 술막은 어디선가 불시에 흉악하고 참혹한 소식이 들려올 것만 같은 공간이다. 벽을 두껍게 해도 미덥지 않으며 이웃조차도 믿을 수 없는 곳이다. 밥과 술과 잠을 청할 수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정체를 숨긴 낯선 이들과도 부대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술막에서 '나'가 전라도 가시내를 만났다.
| 가난한 민중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
3연과 4연에서 전라도 가시내의 사연을 들을 수 있다. ‘사내’는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 하기보다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세찬 눈보라를 이겨 내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가시내’는 북간도 술막에서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는 일을 하고 있다. 화자는 먼 이국땅에서 고국의 동포를 만났기에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그들은 술을 나누어 마시며 가난한 고향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석 달 전 전라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이곳 북간도로 왔다. 석 달 전이면 우리나라 삼천리(“천 리 천리 또 천리”) 강산이 가을 단풍으로 불타올랐을 때이다. 그러나 ‘가시내’는 외로움과 슬픔에 싸여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느라 그 단풍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고향을 떠났을 것이다. 또 마치 기차가 구름 속을 달리는 듯 유리창 밖이 흐리게 보일 정도로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며 울며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전라도 가시내가 북간도에서 낯설고 두렵고 외롭고 서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5연에서 알 수 있다. 때로 얼굴에 싸늘한 웃음을 짓기도 하지만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다. 힘들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든 이겨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너’가 어떤 슬픈 사연을 갖고 북간도 술막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함경도 사내는 그 사연 또한 자신이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화자는 같은 민족으로서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너’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런 마음은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이나 슬픔의 표현이 아니다. 고향을 떠난 이에게 들려주는 “너의 사투리”는 고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매개이다. 이 추운 겨울을 이겨 내고 맞이하게 될 따뜻한 봄의 노래를 “너의 사투리”로 불러 줄 테니 잠깐이나마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것은 ‘너’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의 표현이다.
| 눈보라 세차게 휘감아 치는 벌판으로 나서다
5연까지 전라도 가시내에게 화자의 시선이 머물고 있었다면 6연에서는 “나는”이라는 주어와 ‘-ㄹ 게다’라는 표현을 통해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술막에서 하룻밤을 묵은 화자는 해가 뜨면 그곳을 떠나야 한다.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화자는 눈보라가 세차게 휘감아 치는 ‘벌판’으로 나설 것이라고 한다. 날이 밝아도 ‘나’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얼음길’, 눈보라 세차게 휘감아 치는 ‘벌판’이다. 운명공동체로서 진한 연민과 연대감을 느꼈던 전라도 가시내와도 이별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이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병상련과 연민이라는 감정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노래에도 자국에도 연연하지 않고 사라지겠다는 표현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 ‘벌판’은 ‘너’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나서야 하는 곳, 나아가 한 차원 높은 연대를 위한 시련과 고난이 기다리는 곳일 것이다.
과연 ‘나’가 무엇을 위하여 떠나는지 시에는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얼음길’, ‘눈포래 휘감아 치는 벌판’에 나서겠다는 표현에서 다가올 시련과 고난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세찬 눈보라 속을 걸어가겠다는 ‘나’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벌판’으로 나서는 행위는 자신이 불러 온 노래도,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자국도 모두 사라질 것임을 전제로 하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 점에서 “눈포래 휘감아 치는 벌판”은 이육사의 <절정>(1940)에 나온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와 비견되는 표현이다. <절정>의 화자가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섰다면, <전라도 가시내>의 화자는 ‘눈보라가 세차게 휘감아 치는 벌판’으로 나서고 있다. 지금 내딛는 걸음의 끝에서 무엇을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며, 알 수도 없다. 하지만 화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세찬 눈보라와 그것이 휘감아치는 벌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우줄우줄’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한다.
마지막 연은 시 전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시를 사내가 가시내에게 품은 연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마지막 연에 있다. 마지막 연을 통해 ‘전라도 가시’와 ‘함경도 사내’는 개별적인 유이민에 그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던 우리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로 확장된다. 유이민들이 느꼈을 감정을 외로움과 슬픔에 머물지 않도록 하는 이유, 전라도 가시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힘을 얻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변모”한, “격동하는 역사적 현장의 한복판으로 결연히 내닫는”(윤영천, 2018: 487-488) 화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 '전라도 가시내', '함경도 사내'일까
앞서 언급했듯 이 시는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단순한 의미 구조로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화자인 ‘나’와 청자인 ‘너’의 인물 설정에 있다.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는 일제강점기의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 국경을 넘어 먼 이국땅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갔던 당대 우리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나’와 ‘너’를 개별적인 이름이 아니라 가시내와 사내 앞에 각각 ‘전라도’와 ‘함경도’라는 지역명을 붙여 칭한 것, 그것도 한반도의 남쪽 끝과 북쪽 끝 지역을 택한 것은 그들이 당대 우리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보편성을 면 인물임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를 통해 보여 준 고통스러운 삶은 전라도에서 함경도까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민중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시를 통해 당대 “뿌리 뽑힌 식민지 고향 상실자들의 삶”(유종호, 2002: 219-220)의 표상을 볼 수 있으며, 또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카프 계열의 시인들이 꾸준히 시도했으나 이렇다 할 문학적 성취로 이어지지 못했던 모티프가 이용악 시에 와서 성공적으로 구상화”(유종호, 2002:220)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해진다. | 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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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유종호(2002), 「식민지 현실의 서정적 재현: 이용악」, 『다시 읽는 한국 시인』, 문학동네. 윤영천 (2018), 「민족시의 전진과 좌절, 윤영천 책임편집, 《이용악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윤영천 책임편집(2018), 《이용악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5. 1. 3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