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거대한 바위를 몸체 뒤의 광배(光背)로 삼고 자연 암반을 대좌(臺座)로 삼은 마애불인데, 매우 도드라지게 조각하여 부피감이 풍부하다. 3m가 넘는 이 불상은 현재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큼직하고 두 귀는 짧고 둥글다. 원만한 얼굴과 거기에 알맞게 묘사된 눈·코·입은 생기가 있으며 근엄한 편이다. 어깨가 넓고 가슴이 발달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볼록하여 다소 어색한 감은 들지만 팔과 다리에 입체감이 살아있어 생동감이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으며, 옷주름은 평행의 선으로 간략하게 나타냈다. 두 손은 배에 놓고 있는데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였고 오른손은 손등을 보이면서 검지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펴고 있다. 구슬처럼 둥글게 표현한 머리광배에는 연꽃잎을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구슬 모양의 머리광배는 그 예가 별로 없는 특이한 것으로 주목받는다.
양감이 풍부한 얼굴 표현 등은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지만, 풍만한 신체에 비하여 각 부분의 세부표현이 간략화된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여겨진다.
독립운동가추모비
남양방씨 집안의 희생과 봉사가 눈에 보였다.
1919년 4월 4일 항일독립만세운동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친 방양규 방진형 방극룡 방명숙 방제환 열사를 추모하고 그 숭고한 뜻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하였다.
1919년 3월 온 나라에 '대한독립만세'가 메아리 칠 때 남원에서도 4월 4일 장날을 기해 남원, 순창, 임실 등지에 사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광한루 광장과 북부시장터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일제의 무지비한 총칼에 현장에서 여덟 명의 열사가 순절했으며, 이중 다섯 명의 열사가 남양 방씨 가문 출신이었다.
사계정사 (沙溪精舍)
남양 방씨의 선조 방응현이 조선 중기에 처음 세운 정자이다. 정자 옆에 흐르는 냇물은 모래내, 즉 ‘사계(沙溪)’라고 불리운다. 임진왜란(1592년) 때 건물이 불에 타, 이후 후손들이 여러 번 다시 지었다.
방응현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닦으면서 일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이항, 노수신, 조식, 노진 등 유명인사와 가깝게 지냈으며, 정자 안에는 그들의 글이 여러 편 걸려 있다.
건물 가운데 한 칸의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둔 구조로서, 일반적인 호남지방 정자의 양식을 따랐다.
현재 보수중이나 둘레마루판 작업만 이루어 지면 보수가 끝날꺼 같다.
유천서원
5현사(五賢詞)라 불리우는 방사량·방귀온·안전·방응현·안창국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방사량은 고려말∼조선초의 의원으로 조선 정종 1년(1399)에 간행한 『향약제생집성방 』과 『신찬집성마의방 ·우의방 』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유천서원은 순조 30년(1830)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뒤 서원을 복원하지 못하고 1909년에 후손들이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현재 서원이 있던 곳에는 건물은 찾아볼 수 없고 담장만 남아 있다.
김주열 열사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데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이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다가 4월 11일, 왼쪽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사체 검안 결과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 때문으로 밝혀졌다.
그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마산을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의 마을 선산에 묻혔다. 그는 죽기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최락당 (취락당)
약 490년 전인 조선 중종(1506∼1544) 때 명주 김씨 별제공 김익기가 처음 지은 집이다. 뒤에 김익기의 아들 부사직 김유가 고쳐 짓고 야은당·쌍백당이라 하였다.
정자는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인데 방 1칸에 대청 3칸 구조로 공간 구성도 매우 단순하다. 천장에는 김선이 16세 때 쓴 ‘취락당(취樂堂)’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글자 하나가 1칸을 차지할 정도로 크다.
취락당은 주변에 사는 유학자들이 400여년 동안 모여 선현 추모와 함께 유도(儒道)를 토론하는 장소로 깊은 전통을 잇고 있는 곳이다.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400년 수령에 임하는 것은 선이 손수 심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