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을 묻다
瓦也 정유순
익산(益山)!
일 년이면 거의 한 달에 한번 이상 가까이 다니던 고향 길인데, 오랜 세월동안 나와 길동무를 했던 자동차를 폐차시키자마자 갑자기 고향에 갈 일이 생겼다. 20여 년 만에 서울 발 기차를 타고 열차에 몸을 실은 후 나는 아주 작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도착역에서 내 고향으로 가는 버스가 몇 번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서탑>
전에는 일이 있거나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자가용으로 바람처럼 다녀 온 곳이었으며 옛날에는 가는 길이 하나여서 무조건 그쪽 방향으로 가는 버스만 타면 되었고, 웬만하면 고향 길 단숨에 걸어갔을 텐데 지금은 철길을 걷기도 그렇고 도로도 여러 갈래로 길을 내어 잘못 타면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에서 해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자기 낯선 타향 땅에 처음 오는 길손처럼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익산미륵사지 전경 -경향신문>
내 고향은 평야지대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소나무가 많아 다송리(多松里)로 불리었고, 내가 필명으로 쓰는 '와야(瓦也)'도 내 고향마을 이름이다. 해발 100미터도 안 되는 야산이 있지만 아주 옛날에는 솔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가끔 도둑들이 나타나 지나가는 행인을 괴롭혔다고도 한다.
<소나무>
그리고 전답과 야산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농촌으로 초등학교 시절 소풍가던 낮은 산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양질인 화강암 채굴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새로 뚫린 길들은 희미한 옛 추억마저 다 지워 놓았다. 지금은 그저 논두렁 밭두렁 그리고 솔밭사이로 비집고 다니면서 뛰어 놀던 게 어릴 적 추억의 전부다.
<익산미륵사지 사리장엄구 사리호(壺)>
내가 고향을 떠나온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춘기의 티를 벗지 못한 어린나이에 무조건 서울로만 가면 청운의 꿈을 펼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무작정 올라왔으나 홀로 선다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향수병이 엄습할 때는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느라 더 힘들었다. 먹거리며 잠자리가 불편하면은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용케도 잘 참아온 것 같다.
<와야마을 맨드라미>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둥지에서 갓 꺼내 삶아 주신 계란을 서울로 가는 야간열차에서 먹던 그 맛이다. 또한 추석이나 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 광장에서 발이 저리도록 쪼그려 앉아 몇 시간이고 기다리던 일은 몸이 피곤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즐거웠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아마 고향 가는 기대감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외호(좌) 내호(우)>
<익산미륵사지 사리장엄구>
고향에서 천리 길이 떨어진 원주에서의 육군 일등병시절에는 연병장으로 고향 번호판을 단 택시 한 대가 들어오자 반가운 김에 달려가 생면부지인 택시기사와 고향얘기를 주고받다가 집합시간을 훨씬 넘겨 나는 그 벌로 엉덩이가 헤지도록 맞은 적도 있으나 고향생각하다 스스로 불러 온 화로 생각해서 그랬던 건지 입에서는 신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독종이라고 불리었다. 이렇게 고향이라는 것은 어떠한 고통도 참아내는 힘의 근원인가 보다.
<보리수열매>
봄에 앵두꽃이 피면 열매를 맺어 익어 갈 때가지 손꼽아 가며 기다림을 배웠고, 그 붉은 앵두가 입속에서 씹히고 난 후 단물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씨앗을 뱉어낼 때 고마움을 배웠다. 물이 넘쳐 개천길이 막혔을 때 멀리 돌아가는 지혜를 배웠고, 물고기가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배웠다.
<앵두꽃>
여름 날 천둥과 번개가 칠 때 무서움과 이를 이겨내는 방법을 배웠고, 수심 깊은 방죽에서 개헤엄 치며 멱을 감을 때 두려움과 겸손을 배웠으며, 보리이삭이 소매를 타고 옷 속으로 들어갔을 때 이를 빼내는 방법으로 자연의 순리를 배웠다. 여름에 무성했다가 겨울에 지는 잎을 보고 세상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배웠고, 일곱 색 갈 무지개를 보고 세상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
<앵두>
이렇게 나에게 무한한 자양분과 인격을 제공해 준 고향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다. 들녘의 비바람 폭풍한설이 북서풍을 타고 내 가슴으로 휘 몰아쳐도 학교 가는 십리 길 오가면서 읍내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벽촌에 사는 부모님을 원망해 본적이 없으며 개울에 빠지고 황토먼지를 다 뒤집어써도 마냥 즐거운 기억 밖에 없다.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리 유물항아리>
그런 고향을 이제는 내가 떠나고 나면 누가 찾아줄까? 누구나 고향 떠난 이유야 절절하겠지만 결국은 고향을 버리고 마는 처지가 되었다. 고향을 다녀올 때 손 흔들며 따라 나오시던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시고 난 후 전 보다 내 몸 하나 반갑게 맞이할 이 없고 앉을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보니, 고향을 버린 사람처럼 허무한 마음이 처량하게 더 다가온다.
<상사화>
그리고 어린 나를 사람답게 키워 주었던 동구 밖 초등학교도 학생 수가 줄어들어 문 닫을 형편이라니 세월이 나의 어릴 적 꿈을 다 뺏어가는 것 같아 씁쓸함이 더해지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도 고향 가는 길을 물어 가며 그 옛날 추억으로 발길을 돌린다.
<미륵산>
https://blog.naver.com/waya555/220244545840
첫댓글 익산
좋은 고장입니다
좋은 고향 두셨네요
고맙습니다.
설 명절 잘 쇠시고
복 많이 나누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즐명절 보내셔요
고향시골집 뒷 마당에 두구루 앵두나무
지금은 사람은 살지 않지만
앵두나무는
여전히 있는지 ㆍ
궁금 ᆢ
길을 가다가 어릴적 고향에서 보았던
나무나 꽃들을 보면
왜 이리 이쁘고 정겹게 보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