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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평화의 길 32코스
소똥령숨터-장신1리마을-가마골-건봉사
20251028
1.코스 소개 : 두루누비
1)코스개요
- 소똥령마을을 출발해 금강산 건봉사까지 걷는 길이다.
- 백두대간 동쪽의 고즈넉한 농로, 숲길 등을 다채롭게 지나는 구간이다.
- 소똥령마을에서 농촌 체험과 캠핑을 즐길 수 있다.
2)관광포인트
- 팔려가는 소들이 주막 앞에 똥을 많이 누어 산이 소똥 모양이 되었다는 소똥령 고개
- 다양한 농촌 체험프로그램과 여름철 휴양지 야영장을 운영하는 소똥령마을
- 신라 법흥왕 시대에 창건한 금강산의 대표적인 천년고찰 건봉사
3)여행정보(주의사항)
- 민간인 통제구역 내 등공대 구간은 사전 예약을 통해 이용이 가능하다.
- 주요경로 : 소똥령마을 2.2Km 장신3교 2.6Km 장신1리 복지회관 4.0Km 건봉사
- 길이 8.8km, 소요시간 3시간 30분, 난도 보통
- 시점 :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간성읍 소똥령마을길 82
대중교통) 고성 간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10(흘리)’ 버스 이용, 장신리 유원지 앞 하차
- 종점 :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대중교통) 간성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 이용, 10km(농어촌·마을버스 없음)
2.가마골길을 따라 금강산건봉사에 가다
DMZ 평화의 길 32코스를 탐방했다. 32-1코스를 이미 탐방하였기에, 32코스&32-1코스 탐방 출발지점인 간성읍 장신2리 경로당 앞 휴선정(休仙亭)에서 출발하여 북천 둑방길을 따라 내려가는 대신에, 간성읍 장신2리 소똥령마을 장신유원지의 소똥령숨터에서 출발하여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를 따라 내려가기로 하였다. 평화의 길 32코스&32-1코스는 북천 남쪽 둑방길을 따라가다가 장신3교를 건너 북천 북쪽 둑방길로, 장신4교를 건너 북천 남쪽 둑방길을 따라 가마골2교까지 동행한다. 가마골2교 남단에서 평화의 길 32코스는 32-1코스와 헤어져 가마골2교를 건너고, 32-1코스는 계속 북천 남쪽 둑방길을 따라 광산3리 지역으로 내려간다.
평화의 길 32코스를 이탈하여 간성읍 장신2리 소똥령숨터에서 출발하여 북천의 장신2교를 건너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로 나갔다. 이곳에서부터 32-1코스와 헤어지는 간성읍 광산2리 가마골2교 출입구까지 진부령로를 따라 내려간다. 간성읍 장신리 북천 북쪽에는 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장신리(長新里)는 밭이 길게 이어진다는 장밭이(長田)와 새마을이라 불린 신평리(新坪里)가 1916년에 통합되었으며, 장밭이마을은 장신1리, 신평리는 장신2리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장신2리는 소를 팔러 인제로 넘어가는 고개의 주막 앞에 소들이 똥을 싸놓아서 소똥령이라 불리게 되어 현재 소똥령마을의 캐릭터 마스코트는 능청스런 한우 모습이다.
장신리 들녘에는 콩과 깨를 다 털어내고 묶은 콩대묶음과 깻단들이 널려 있다. 이것들은 소각하지 않고 파쇄하여 퇴비로 사용한다고 한다. 콩과 깨, 고추 등 식물들은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정수(精髓)를 인간들 목에 넘기고, 그 시신까지 인간과 자연을 위해 희생한다. 장신리 들녘에 널려 있는 식물들의 마른 줄기묶음이 가슴에 찡~ 골을 낸다. 정진규(鄭鎭圭, 1939~ 2017) 시인은 마른 들깻단을 보고 이렇게 읊었다.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 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 정진규의 '마른 들깻단' 전문. 시인은 마른 들깻단에서 노후의 삶을 연상한다. 마른 들깻단에서 잘 늙은 사람내음을 맡으며 그도 그렇게 늙어가겠다는 마음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진부령로 길가에는 간성읍 어천리 라벤더 마을 8.5km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32-1코스 탐방 때 간성읍 어천리 지역을 통과하여 북천의 어천교 동단을 지나갔다. 라벤더 마을은 어천교를 건너서 들어간다. 어천리의 라벤더 마을에서는 매년 6월 라벤더 축제를 개최하여 보랏빛 색채로 물들이고 향기에 취하게 하는 고성 지역의 명품축제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길손은 어천리 라벤더 축제에 아직 가보지 못하여 그 평가를 내릴 수 없지만 뒤이어 열리는 봉평의 메밀꽃 축제의 서막을 연다는 생각이 든다. 지중해 원산의 꿀풀과 라벤더(lavender)는 5~6월에 기다란 꽃대 위에 보라색의 작고 기다란 꽃망울들이 옹기종기 매달려서 향기를 뿜어낸다. 그 라벤더 꽃이 봄과 여름 사이의 보랏빛을 대표한다면 가을의 보랏빛을 대표하는 꽃은 층꽃나무일 것이다. 키낮은 층꽃나무가 줄기에 층층으로 보랏빛 꽃을 피우고 가을 산과 들에 서 있는 모습은 고혹적이다.
진부령로 길가에는 가을 풍경의 대명사 억새풀꽃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람에 날린다. 그 모습은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한 모습이다. 장신1리 장밭이마을을 지나 진부령로의 장신5교 앞에서 북천의 장신4교로 나가 탐방했던 평화의 길 32코스&32-1코스를 살피고, 진부령로로 되돌아왔다. 32-1코스를 탐방했을 때에는 비가 내려서 풍경을 제대로 구경할 수 없었다. 이번 탐방은 가을 날이 투명하게 맑아서 간성읍 장신리 지역과 간성 북천을 투명하게 살필 수 있다. 풍겨이 투명하니 마음도 투명해진다. 북천의 부서지는 흰 물결을 따라 마음이 함께 흘러가는 느낌이다. 가을, 가을, 저절로 입 밖으로 음절이 튀어나온다.
진부령로의 장신5교를 건너 장신리에서 간성읍 광산2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광산2리 들녘을 따라 서잠마을을 지나면 북천의 가마골2교에서 진부령로로 나오는 평화의 길 32코스와 만난다. 그냥 통과할 수는 없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에서 북천의 가마골2교로 나가 평화의 길 32코스와 32-1코스가 갈라지는 가마골2교 남단으로 건너갔다. 지난 32-1코스 탐방 때 여기서 비 내리는 광산리 들녘을 걸어 남쪽으로 내려가 광산3리 마을로 이어갔다. 이번에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올라간다. 가마골2교를 건너 가지 못했던 32코스를 지금부터 이어간다.
평화의 길 32코스는 단순하다. 간성 북천을 따라 간성읍 광산2리 가마골2교 남단까지 내려와서 가마골2교를 건너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로 나간다. 진부령로의 가마골2교 출입구에서 진부령로를 따라 부동교를 건너면 광산2리 가마골마을이다. 가마골 광산2리 경로당 앞을 지나면 곧바로 가마골교회와 은혜미용실이 있는 가마골길 출입구가 나온다. 이제부터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와 헤어져 가마골길을 따라 가마골을 통과한다. 가마골은 가마처럼 움푹 파인 골짜기여서 한자로 부동(釜洞)이라 불린다. 가마골길 길가에는 가을의 진분홍 꽃향유꽃들이 무리를 이루어 반짝인다. 아름답다. 가마골은 올라갈수록 골짜기가 그윽하게 깊고 물은 폭포를 이루고 있다. 가마골길에서 서쪽 골짜기로 물이 흐르는데, 군데군데 숙박업을 곁들이는 듯한 전원주택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마골산장, 가마골동산 등 당호가 출입로에 표시되어 있다. 속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이곳은 탈속의 선경 같다. 봄날 꽃들이 피어나는 날에 이곳에 오면 무릉도원임이 증명될 것 같다.
간성읍 광산리에서 탑현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새오개인 듯. 새오개를 넘어 내려가면 백운동(白雲洞)이라고도 이르는 탑현골짜기를 가로지르는 탑평교가 보인다. 탑평교 아래를 흐르는 탑현골짜기의 물은 교동천의 상류일 것이라 판단한다. 교동천은 간성읍 탑현리, 해상리, 교동리를 흘러내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의 교동교 아래쪽에서 간성 북천에 합수하는 소하천이다. 진부령로를 따라 걸어보았기 때문에 교동천의 흐름이 가늠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가마골길에서 탑현교를 건너면 건봉사로와 만난다. 건봉사로를 따라 간성읍 탑현리에서 거진읍 냉천리 방향으로 올라간다. 간성읍과 거진읍의 경계가 탑고개라는 생각이 든다. 탑고개에는 대전차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탑고개를 넘어 간성읍 탑현리에서 거진읍 냉천리로 내려간다. 금강산 건봉사로 들어가는 건봉사 삼거리 남쪽 길가에 DMZ 평화의 길 안내판과 33코스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짧은 거리의 탐방길이었지만 고성군 간성읍 지역과 거진읍의 세밀한 곳을 살펴볼 수 있었다. 탐방을 마치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건봉사를 둘러보았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9.9km
전체 소요 시간 : 2시간 22분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장신2리 소똥령마을 장신유원지 주차장 앞에 소똥령숨터 건물이 있다.
소똥령숨터 건물 앞에 소똥령마을 캐릭터와 조형물, 소똥령숨터 소개 표석이 세워져 있다. 소똥령숨터 건물에는, 2층 소똥령마을 영농조합법인 사무실과 게스트하우스, 1층 고성군 다목적 농촌체험장, 고성군 특산물판매장, 소똥령 향로식당, 장신유원지 매점이 입주해 있다.
소똥령숨터 입구 오른쪽에 '백두대간 금강산의 시작 소똥령마을'과 장신유원지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안내도 왼쪽에 농촌체험프로그램·식사와 요리·캠핑장·게스트하우스의 사용료가 적혀 있고, 중앙에 소똥령마을과 장신유원지 안내도가 그려져 있다.
소똥령숨터 오른쪽에 전기차 충전소가 설치되어 있다.
소똥령숨터에서 소똥령마을길을 따라 카페 밸리를 지나, 오른쪽 뒤의 북천을 가로지르는 장신2교로 이어간다.
소똥령마을 장신유원지 소똥령숨터에서 소똥령마을길을 따라 전기자동차 충전소를 거쳐 카페 밸리 앞으로 이어왔다.
카페 밸리 입구에서 소똥령마을 장신유원지 주차장과 소똥령숨터를 돌아본다. 소똥령숨터 오른쪽에 전기자동차 충전소가 있다.
장신리 유원지는 46번 국도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물과 주위의 산, 계곡, 하천이 어우러진 자연 발생적인 유원지이며,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여름철 깨끗한 동해바다를 찾는 피서객이 늘어나면서 진부령계곡의 맑은 물을 함께 찾는 피서객이 계속 늘어나자 고성군에서는 비지정 관광지 조례에 의거 1990년 3월 22일 고성군 간성읍 장신2리 513번지 일대11,819평을 비지정 관광지로 지정 주차장 200평, 야영장 3,300평, 화장실 1동 등을 갖추어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운영 관리하도록 위탁했다. 매년 피서객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이에 따라 유원지의 기반시설을 계속 확충하고 명칭을 '장신리 마을관리 휴양지'로 개칭해 안락한 휴양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장신지구는 산악계곡과 원시림 입지의 특성을 살린 산림 휴양촌을 조성하고 계곡 주변 구릉지에 관광농원을 유치할 계획이며, 계곡유원지의 기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어린이 놀이공원 시설과 청소년을 위한 자연학습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 고성군문화관광
장신2리 소똥령마을 입구에 1987.12.3~1988.8.10.에 걸쳐 북천 위를 가로질러 건립된 장신2교는 폭 5m, 총연장 56m라고 한다.
장신2교에서 북천과 그 북쪽 언덕을 지나는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를 바라본다.
북천(北川)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을 북동류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강. 길이 26㎞, 유역면적 148.6㎢. 간성읍 진부리 칠절봉(1,172m) 북동쪽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 교동천과 합류한 뒤 거진읍과 간성읍의 경계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간성읍 중심지의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간성 북천이라고도 부르며, 그 남쪽에는 북천과 나란히 남천이 흐른다. 향로봉 동쪽 사면을 따라 흐르는 이 강은 물이 맑고 수량이 많아 좋은 피서지·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이 강의 상류에는 진부령과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이 있다. - 다음백과
간성 북천이 간성읍 장신리 지역을 흘러 광산리 방향으로 흘러간다.
장신2교를 건너면 북단 입구에 소똥령숲길 안내판과 백두대간트레일 종합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소똥령 숲길 종합안내판 ●소똥령은 옛날 한양을 가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한양으로 물건을 사러 가거나 선비들이 괴나리봇짐을 메고 과거를 보러 가던 길로 산세가 험해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였다고 합니다. '소똥령'이라는 이름은 옛날 마을 주민들이 원통 장날에 소를 팔기 위해 능선을 넘다가 쉬어가는 주막에서 소가 똥을 하도 많이 누어 소똥령이라 붙여졌다는 설과 오랜 세월 사람들이 소똥령을 넘다 보니 봉우리에 자리가 패였고 그 모양이 소똥을 닮아 소똥령이라 불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소똥령 숲길은 지금까지 외지인에게 개방되지 않아 자연 수목이 잘 보전 되어있으며, 삼사백 년은 됨직한 웅장한 소나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자연의 소중함과 함께 옛 선조들의 발자취와 추억을 생각하며 넘어봅시다.
◆백두대간 트레일이란? ●산림청은 다양한 산림문화 향유와 산림의 보전적 활용을 도모하고자 국가숲길과 지역숲길을 연계한 전국 숲길 네트워크를 구상하였고, 국가트레킹길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5대 트레일(백두대간·DMZ·낙동정맥·서부종단·남부횡단트레일)을 계획하였다. 국가숲길 네트워크는 전국 숲길 네트워크 구축·관리를 위한 기본틀을 마련하고, 한반도 산림생태벨트를 구축하며 무분별한 산행으로부터 중요산림지역의 산림생태계를 보호하는 한편 주요 등산로에 집중되는 이용압력 분산과 함께 타부처 및 지자체의 걷는 길을 포괄하고 지역숲길 조성 및 운영·관리방안에 대한 방향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주변정보 ●장신유원지 : 진부령 정상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곳으로 여름 피서지로 유명하다. 이 물은 한여름에도 얼음같이 차갑다. 장신리 마을관리 휴양지는 넓은 주차공간과 수목이 우거져 있어 장거리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어 관광객에게 좋은 인기를 얻고 있다. ●마산봉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과 토성면에 위치한 산이다. 군의 간성읍과 토성면의 경계를 이룬다. 산세가 말과 같이 생겨 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전해지며 마산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금강산 1만 2천봉 가운데 하나로 설경이 뛰어나 건봉사·천학정·화진포 등과 함께 고성 8경에 속한다.
장신2교 북단 북쪽에 장신2리 소똥마을 휴양지 관리실, 맞은편에 소똥령숲길 안내판과 백두대간트레일 종합안내도, 바로 앞에 소똥령마을 캐릭터가 설치되어 있다.
소똥령마을 장신유원지 입구에 대형 문주가 조성되어 있다. 소똥령마을을 떠나는 방문객을 환송하는, 왼쪽 문주에 '그동안 당신이 있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와 오른쪽 문주에 '이제는 당신이 무척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문구가 각각 적혀 있다.
2019년 7월 완공된 고성 양묘사업소에서는, 산불피해복구를 위한 내화수종과 대북지원용 양묘장으로서, 소나무, 낙엽송, 잣나무, 아까시나무, 싸리나무 등 다양한 수종에 대한 대북지원용 종자 저장을 확대 중이라고 한다.
소똥령마을 방문객을 환영하는 대형문주가 소똥령마을 입구에 조성되어 있다. 소똥령마을은 농촌체험휴양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의 소똥령마을 출입구에 유네스코 세계생물권 보전지역 고성군 안내판과 소똥령마을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미술프로젝트 전문기업 마롱컴퍼니(Malong Company)에서 소똥령마을 마스코트 조형물을 제작하여 소똥령마을 입구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소똥령마을의 주민과 소똥령 마스코트 캐릭터, 산림청 마스코트 '그루' 캐릭터가 백두대간 금강산 소똥령을 보호한다는 내용이다. 조형물 바닥에 '동부지방산림청과 소똥령마을이 금강산 소똥령 보호에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50년간 자란 후 벌채된 나무의 그루터기를 모아 만든 나무인형 '그루'는 산림청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산림청의 방향과 이념, 비전을 대표하는 상징적 디자인으로 개발되었다. 친근한 대중적 이미지와 포근한 표정을 하고있는 '그루'는 산림청의 미래 비전인 건강한 숲과 산림복지를 의미합니다. '그루'가 입고 있는 나무 외투는 목재 산업을 뜻하며 산림 복지를 위한 가치를 실현하고 산림의 보호에서 산림의이용으로 변화하는 방향성을 나타낸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모티브로 대한민국 푸른 숲을 위해 헌신하고 숲을 찾는 모든 국민에게 행복하고 편안한 안식을 준다는 의미로 산림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사용한다. 산림청 캐릭터 숲의 친구 그루는 오랫동안 깨끗한 산소를 내뿜어 공기를 정화하고 목재산업의 일환으로서 필요한 곳에서 사용된 후 그루터기만 남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한평생 산림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음에도 산림 발전에 더 큰 도움을 주고 싶은 그루터기는 숲 속 동물친구들의 도움으로 힘이 세고 똑똑한 나무인형 '그루'로 다시 태어난다. 뿌리를 박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그루'는 건강한 숲을 만들기 위해 대한민국의 산림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산림청의 숲 가꾸기 사업을 함께하고, 산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산림 교육과 산림 복지 활동을 하고 있다. - 산림청
국도 제46호선 진부령의 소똥령마을 입구에 간성읍 장신2리 소똥령마을 표석과 소똥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에서 소똥령마을 출입구로 이어지는 소똥마을길을 돌아본다.
장신2리 소똥령마을 출입구에서 나와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를 따라 간성읍 장신1리 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장신2리 지역 들녘에 고성 양묘사업소 양묘장이 길게 자리잡고 있다. 밭에는 콩깻단이 자리한다.
고선군 간성읍 장신2리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 옆 북쪽에 약초향기 펜션이 자리한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에 간성 11km를 알리는 도로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황금궁전 주유소는 폐업하였는지 매매알림판이 붙어 있다. 양양고속도로 건설 영향 때문일까?
간성읍 어천리 라벤더 마을 8.5km를 알리는 표지판이 앞에 세워져 있다. 오른쪽 뒤에 보이는 건물은 설악양만장이다.
간성읍 장신2리 지역에 목재소로 보이는 사업장이 있다.
간성읍 장신2리 들녘 건너편 북천 남쪽 중앙에 민물장어양식장인 설악양만장(하얀 두 개의 기둥)이 보인다.
장신2리에서 1리 지역으로 드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오른쪽에 북천의 장신3교, 중앙 뒤에 간성읍 장신1리 마을이 보인다.
장신리(長新里)는 동쪽에 어천리, 서쪽에 수동면과 향로봉산맥, 남쪽에 진부리, 북쪽에 광산리와 각각 이웃하고 있다.『여지도서』에는 장전리(長田里), 속칭 장밭이(長田)라고도 부르는데 그 유래는 정확치 않으나 지금부터 약450년 전(조선 중종에서 인종)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는 마을 앞이 모두 밭이었고 그 밭의 규모가 장신2리까지 길게 분포되어 장전(長田)이라 부르고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16년 8월 1일 신평리(新坪里)와 합하여 장신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행정구역상 1, 2리만이 있으며 1, 2반을 아랫말, 3, 4반을 웃말이라고도 부르며, 장신2리는 새마을(新坪里)이라 불렀다. - 고성문화원
간성읍 장신1리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 북쪽에 비목 음식점&민박이 자리한다.
북천의 장신3교를 살핀다. 평화의 길 32-1코스는 북천의 남안(南岸)에서 장신3교를 건너 북안(北岸)을 따라 내려간다.
간성읍 장신2리에서 장신1리 지역으로 넘어왔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를 따라 장신1리 장밭이마을로 내려간다.
간성읍 장신1리 진부령로 길가의 억새풀꽃이 가을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진부령로를 따라 장신1리 장밭이마을의 장신1리복지회관 앞으로 이어간다.
왼쪽 장신1리복지회관 앞 장밭이(長田)마을 표석이 보인다. 오른쪽 지역이 장밭이마을의 중심지이다.
장신1리복지회관은 마을대피소로 이용되며 회관 앞에 마을유래 안내판과 마을표석이 세워져 있다.
장신1리는 속칭 장밭이(長田)라고도 부르는데 그 유래는 정확치 않으나 지금부터 약 450년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는 마을앞이 모두 밭이었고 그 밭의 규모가 장신2리까지 길게 분포되어 장전(長田)이라 부르고 그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신1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설 및 마을 명소 ●낡은 터골 : 장신리 마을 2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곳에 저수지가 있다. ●터박골 : 장신리 동북쪽 1km 지점에 있는 계곡으로 옛날 건봉사 절터로 추천되기도 했다 하여 터박골이라 전한다. ●가재골 : 마을 중간을 지나는 소하천으로 가재가 많이 있다 하여 가재골이라 불렀으며 장마 때만 물이 흐르고 상류에는 마을 간이상수도가 있다. ●문암골 : 마을의 서쪽 계곡으로 산나물 및 버섯류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나물캐던 할머니가 이상한 산나물이 있어 한보따리 뜯어와 마을사람에게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산삼이라고 판명돼 심마니들이 모여 나물 뜯은 곳을 다시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지금도 문암골 어딘가에 산삼이 있다고 믿고 있다. ●냉천 : 터박골 바위 틈에서 나오는 샘물로 가뭄 때나 우기 때에도 물의 양이 일정하고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우며 겨울에는 얼지 않아 계절따라 마을들의 놀이터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은 약수터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신앙 : 양력 3월3일과 9월9일에 서낭골의 제당에서 지내는 산신제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형성이 된 후부터 지내왔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마을의 전가구가 제사에 참여하여 마을의 평안과 풍년들기를 기원하고 있다. ◆산, 바위 등의 전설 ●터박골 바위의 외문포 : 터박골 바위에는 외문포라고 쓰여져 있는데 그것은 바위 옆에 외줄기 폭포가 있기 때문에 약 100년전에 새겨져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선녀탕 : 터박골 외문포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전에 의하면 선녀가 달밤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는 바위 웅덩이다.
2022년 5월 30일 장신1리 마을회
장신1리복지회관 앞에 장신1리 장밭이(長田)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고, 진부령로가 장밭이마을 중심지를 통과한다.
장신1리복지회관 왼쪽 벽에 예전의 농촌 생활용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장신1리복지회관 왼쪽에 마을공동 창고가 있고, 중앙에 88서울올림픽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가 수동파출소 등이 있었던 장신1리 장밭이마을의 중심지를 통과한다.
간성읍 장신리 수동파출소는 지금 사라졌다고 한다. 진부령로 배수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왼쪽 주택 벽에 금강운수주식회사 장신리영업소 표지판이 붙어 있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 장신5교 서단에 장신1리(오교앞) 버스정류장이 있다. 오른쪽 장신4교로 나가 살핀 뒤 되돌아온다.
장신5교에서 다녀온 장신4교 방향을 살핀다. 평화의 길 32-1코스는 북천 북안(北岸)에서 장신4교를 건너 남안(南岸)을 따라간다.
간성읍 광산2리 들녘에 대형 축사가 자리한다. 북천 건너편 남안(南岸)에 태양광발전시설이 보인다.
앞쪽 간성읍 광산2리 지역에 농가들이 있으며, 평화의 길 32-1코스는 건너편 북천 남쪽 둑방길을 따라간다.
간성읍 광산2리 들녘이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북천이 흐른다. 비닐하우스 오른쪽에 북천 위를 가로지르는 가마골2교가 보인다.
간성읍 광산리(廣山里) 지역의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의 광산2리(서잠) 버스정류장을 지나간다.
국도 제46호선 진부령로를 따라 광산2리 가마골마을로 이어간다. 길가에 대한불교 법안종 굴바우사 방향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굴바우사는 간성읍 광산2리 굴바우에 있을 것이다. "굴바우는 마을 북서쪽 12㎞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 밑에 넓이 15㎡정도로 5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굴이 있다고 하여 굴바위라 칭하고 있다." (고성문화원)
진부령로를 따라 간성읍 광산2리 서잠마을을 지나서 진부령로를 벗어나 오른쪽 북천으로 나가 가마골2교로 나가본다.
진부령로에서 북천의 가마골2교를 건너 평화의 길 32코스 분기점으로 왔다. 이곳에서 32코스는 다리를 건너 진부령로로 나간다.
북천 남쪽 둑방길을 따라온 평화의 길 32-1코스는 가마골2교 남단에서 계속 둑방길을 따라 광산2리 들녘을 지나 광산3리로 이어간다.
1988년 폭 5m, 길이 70m로 완공된 가마골2교를 건너 진부령로로 되돌아간다.
간성읍 장신리 소똥마을에서 헤어졌던 북천을 다시 만나 중앙 뒤쪽 장신리 방향을 올려본다. 위쪽에 장신4교가 보인다.
북천의 가마골2교에서 광산2리 가마골마을을 살핀다. 평화의 길 32코스는 중앙 뒤 능선을 넘어 건봉사로 내려간다.
가마골2교 북단에서 공사 현장을 지나 진부령로로 되돌아가 오른쪽 부동교로 이어간다.
1981년 폭 5m, 길이 20m로 완공된 부동교(釜洞橋)를 건넌다. 다리 건너 왼쪽에 광산2리경로당과 가마골쉼터정자가 보인다.
간성읍 광산리 광산2리경로당과 그 앞에 가마골쉼터정자, 그 앞에 가마굴 표석이 세워져 있다. 가마골을 가마굴이라 적었다. "옹기점이 있던 마을인 옹기점말(土器店里)은 점말이라고도 불리며, 옹기점말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 가매골(釜洞)이다." (고성문화원)
광산2리경로당 왼쪽에 광산2작목반 농산물간이집하장이 있고, 중앙 뒤 가마골길 입구에 가마골교회가 보인다.
북천의 가마골2교에서 진부령로 나와서 부동교를 건너 광산2리경로당과 광산2작목반 농산물간이집하장을 지나왔다.
간성읍 광산2리 진부령로에서 가마골길로 올라간다. 가마골길 왼쪽 언덕에 가마골교회와 은혜미용실이 있다.
가마골교회 뜰에 가마골교회에서 운영하는 은혜미용실이 있다.
가마골길을 따라 중앙 뒤 능선의 고개를 넘어간다. 가마골에는 군데군데 농가와 전원주택 등이 자리한다.
왼쪽길은 가마골길35번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평화의 길은 가마골길을 따라 직진한다.
가마골의 아름다운 곳에 전원주택인지 숙박시설인지가 자리하고 있다. 가마골길53번 아래쪽에도 건물이 자리한다.
가마골산장 표석과 가마골길 105-6 시은&의석 우편함이 설치되어 있다.
가마골길141번 출입구에 가마골동산145-15 표석이 세워져 있다.
가마골길에 토사유출 방지벽이 설치되어 있는 곳을 지난다.
간성읍 광산리에서 고개를 넘어 간성읍 탑현리로 내려간다. 이 고개는 탑고개로 가는 중간에 있는 새오개가 아닐까?
간성읍 탑현리 지역의 가마골길을 따라 내려간다.
가마골길을 따라 탑현골짜기의 탑평교를 건너 건봉사로와 만난다.
탑현리(塔峴里)는 동쪽으로 해상1리, 서쪽으로 민통선 북방 수동면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에 광산리, 북쪽에 거진읍 냉천리와 각각 이웃하고 있다. 마을 유래는 탑고개 아래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탑동으로 부르다가 후에 탑현리로 개칭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건봉사 일대가 민통선 북방지역으로 설정되어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고기(古記)에는 탑현골짜기를 백운동(白雲洞)이라 하고 상원봉에서 발원하여 계곡을 따라 구절폭포(九折瀑布) 등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이어져 있다고 한다. - 고성문화원
백운동(白雲洞)이라고도 이르는 탑현골짜기의 탑평교를 건너 건봉사로로 넘어간다.
탑현골짜기의 탑평교를 건너며 걸어온 가마골길을 돌아본다.
건봉사로의 가마골길 출입구에 DMZ 평화의 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가마골길을 내려와 탑평교를 건너 건봉사로로 나와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간성읍 탑현리 건봉사로를 따라 탑고개로 올라간다.
백운동(白雲洞)이라고도 이르는 탑현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간성읍 교동리에서 북천에 합수하는 교동천의 상류인 듯.
건봉사로를 따라 이주일 양봉장 출입구를 지나 탑고개로 올라간다.
간성읍 탑현리에서 사오남고개라고도 불리는 탑고개를 넘어 거진읍 냉천리로 넘어간다.
탑고개에 대전차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중앙 뒤쪽 거진읍 산북리에 해발 383.4m 노인산이 솟아 있다.
탑고개를 넘어 거진읍 냉천리로 넘어와 건봉사로를 따라 건봉사 삼거리로 내려간다. 뒤쪽 중앙에 노인산이 보인다.
건봉사로 북쪽에 자작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맨 뒤 거진읍 산북리에 해발 383.4m 노인산이 솟아 있다.
건봉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삼거리의 건봉사 출입구에 DMZ 평화의 길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은 건봉사 가는 길, 아래쪽은 도보 통행은 되지 않고 자동차 통행만 가능하며 거진읍 냉천리에서 송강리로 이어진다.
거진읍 냉천리(冷泉里)는 동쪽에는 석문리, 남쪽에는 간성읍 탑현리, 서쪽에 수동면 고진동계곡, 북쪽에 송강리와 용하리가 있다. 대찰인 건봉사(乾鳳寺)가 있는 마을로써 찬 샘이 있으므로 찬샘골 또는 냉천동(冷泉洞)이라 하였고, 관모봉(冠帽峰)과 건봉령(乾鳳嶺)에서 신비롭게 흐르는 맑고 찬 샘물이 사찰과 마을 중심을 흐르므로 냉천리(冷泉里)라고 불렀다.『간성군읍지』『관동지』『조선지지자료』에는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장항리(獐項里) 마을이 있었는데 송강리와 연접하고 있었다. 1916년 8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항리와 냉천리가 병합하여 냉천리(冷泉里)로 개칭되었고 오대면(거진면)에 편입되었다. 산은 청상봉(靑裳峰, 치마산), 감로봉(甘露峰)으로, 고개 이름은 건봉령(乾鳳嶺)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다. 1989년도 민통선이 북상함에 따라 건봉사에 승려들의 거주가 시작됐고, 현재는 활발한 건봉사 복원사업으로 점차 옛날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냉천골 사하촌(寺下村)은 송강리저수지(현 거진저수지) 축조로 인해 많은 지역이 물속에 잠겼다. - 고성문화원
건봉사삼거리 출입구 남쪽에 DMZ 평화의 길 고성구간 안내판과 그 오른쪽에 33코스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길 끝에 건봉사가 있다.
왼쪽의 DMZ 평화의 길 고성구간 안내판 아래에 평화의 길 33코스 방문인증 QR코드가 붙어 있고, 그 오른쪽에 33코스 안내판이 있다.
평화의 길 32코스 : 9.07km, 3시간 소요. 소똥령마을과 건봉사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마을길, 농로, 숲길 등 다양한 걷기 여행길 유형을 만날 수 있는 구간입니다. 천년고찰인 건봉사 일원은 과거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입지였으나, 최근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며, 건봉사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민간인 통제구역 내 등공대 구간을 탐방할 수 있습니다.
DMZ 평화의 길 안내판 뒤쪽 숲에 사명당 송운대사 유정 상(四溟堂 松雲大師 惟政像)이 조성되어 있다.
사명당 송운이 전서체로 쓴 한시와 번역문이 유정 상(惟政像) 뒤쪽 벽면에 붙어 있다. "머리를 풀어헤친 녹의의 늙은이, 안공은 천지의 가운데 두었더라. 안개를 삼키고 정소를 마시니, 홀로 선 기상이 무지개 같구나. 서산의 적자 송운"
유정 상(惟政像) 뒤쪽 벽면에 李睟光(이수광, 1563~1628)의 한시 '사명당의 도일 송별시'와 번역문이 새겨져 있다.
盛世多名將(성세다명장) 奇功獨老師(기공독노사) 舟行魯連海(주행노연해) 舌聘陸生辭(설빙육생사) 變詐夷無厭(변사이무염) 覊縻事恐危(기미사공위) 腰間一長劒(요간일장검) 今日愧男兒(금일괴남아) - 李睟光(이수광, 1563~1628)의 시. 성세에 명장이 많지만, 노스님 홀로 기특한 공 세웠네. 배는 노련의 바다를 건너고, 혀는 육생의 말을 닮았도다. 오랑캐의 속이려는 꾀 한이 없으니, 달랠 일 위태로울까 두렵도다. 허리에 찬 긴 칼을 오늘날 남아 부끄러워 하도다.
사명당 송운대사 유정 상(四溟堂 松雲大師 惟政像) 왼쪽에 건봉사 부도전이 있다. 이 골짜기를 부돗골(浮屠谷)이라 이르는 듯.
잠시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 건봉사를 살피기로 하였다. 사명당 의승병기념관과 만해한용운기념관은 문이 잠겨 있었다. 건봉사 전체 중에서 사명당 의승병기념관 앞의 사명대사 기적비(泗溟大師 紀蹟碑)(복제품)와 건봉사 불이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친다.
정면 왼쪽이 사명당 義僧兵기념관, 오른쪽이 만해한용운기념관, 왼쪽 앞에 사명대사 기적비(泗溟大師 紀蹟碑)(복제품)이 있다.
사명당 義僧兵기념관 앞뜰에 사명대사 기적비(泗溟大師 紀蹟碑)(복제품)와 안내판, 기적비명(泗溟大師紀碑銘) 비문 안내판, 왼쪽에 1990년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비신의 파편이 전시되어 있다.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의병대장(義兵大將) 홍제존자(弘濟尊者) 사명대사(泗溟大師) 기적비명(紀蹟碑銘) 서문을 병기함.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원주목사(原州牧使) 원임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지제교(知製敎) 남공철(南公轍)이 찬술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영월도호부사(行寧越都護府使) 겸(兼) 원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原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토포사(討捕使) 허질(許晊)이 글씨를 쓰고 전액을 아울러 썼다.
금강산(金剛山)은 비로봉(毗盧峯)으로부터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된다. 단발령(斷髮嶺) 서쪽을 내점(內岾)이라 하고 안문(鴈門)의 동쪽을 외점(外岾)이라 한다. 내점의 표훈사(表訓寺)는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가르침을 베푸시던 곳이고 외점의 건봉사(乾鳳寺)는 사명대사(泗溟大師)께서 의병을 모으시던 곳이다. 이 두 사람은 비록 불가 출신이나 서산대사는 그 절의로써, 사명대사는 그 공적으로 유명하였다. 땅은 사람 때문에 중요하게 되니 절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국내에서 으뜸이 되었다.
도지(圖誌)를 살펴보면 '당(唐) 건원(乾元) 연간(758~759)에 산인(山人) 정신(貞信)이 도량(道場)을 열어 그곳에 아미타(阿彌陀)와 관음(觀音) 두 보살상(菩薩像)을 봉안하였으며 건봉사(乾鳳寺)라 칭하였다.'고 한다. 사찰에 오랜 기간 대사의 화상(畵像), 원불은탑(願佛銀塔), 향로(香鑪), 철장(鐵杖, 쇠지팡이), 취혜(橇鞋, 나막신)·산호염주(珊瑚念珠)가 각각 하나씩, 금으로 직조한 가사(袈裟) 한 벌 등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여래(如來)의 어금니가 보관되어 있어 일이 더욱 신기한데, 그 설은 이적을 서술하는 것에 가깝고, 이른바 석탑(石塔)은 지금까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산(山)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밤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무지개가 되었다.'고 한다.
대사의 이름은 유정(惟政)이고 본래의 성은 임씨(任氏)이며 밀주(密州) 출신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다. 그는 다소 장성하자 은사(恩師)인 중덕(中德)을 좇아 사찰의 낙서암(樂西菴)에서 삭발하였다. 그리고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을 사사(師事)하여 연화경(蓮華經) 6만 9천여 마디를 배웠다. 만력(萬曆) 20년(1592)에 왜구(倭寇)가 조선(朝鮮)을 노략질하자 휴정(休靜)이 묘향산(妙香山)에서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의병(義兵)으로 삼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왜병(倭兵)을 대파하여 목을 벤 것이 2천이었다. 소경왕(昭敬王, 선조)이 행재소(行在所)로 불러 만나보았고 친히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사사하고, 그를 팔도도총섭 의병장(八道都摠攝義兵將)으로 삼았다. 임금의 수레가 환도(還都)할 때에 이르러 집정대신 가운데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정(休靜)이 상에게 청하기를, “신은 늙어서 장차 죽을 것이니 병사(兵事)를 제자 유정(惟政)에게 맡기고 해골을 받아 돌아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소경왕(昭敬王)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다. 그리고 유정(惟政)에게 명하여 역마를 타고 경사(京師)에 이르도록 하고 마침내 그 대중을 통솔하게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이르기를, 만이(蠻夷)는 본래 불도(佛道)를 좋아하니 유정(惟政)을 보내어 강화를 성사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마침내 1품의 명복(命服)을 하사하고 사신의 예식으로 그를 보냈다.
대사가 일본(日本)에 당도하자 곧 삼도(三塗)와 오계(五戒)로 만왕(蠻王, 오랑캐 왕)과 평수길(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설파하니 그 말이 모두 청정(淸淨)과 죽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종지를 삼았다. 이에 화의가 성사되어 장차 귀국하려 하니 포로가 된 남녀 3천여 명을 풀어주었다. 이전에 신라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서축(西竺)에 들어가 여래의 어금니 여래아(如來牙) 10매(枚)를 얻었으나, 그후에 왜구에 으해 약탈되었는데, 대사가 곧 간절한 말로 요구해 돌려받아 절에 보관하니 석탑(石塔)이 곧 이것이다.
유가와 불가는 가르침이 다르므로 사대부가 늘 불교를 기롱하고 배척하며 함께 하고자 아니하여 말하기를, “자비(慈悲)와 인의(仁義)는 종지가 다르고 견성(見性)은 격물치지(格物致知)만 못하며 고요함을 익히는 것은 정성과 경건에 어긋남이 있다. 그 터럭 끝만큼의 차이가 성인의 도와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서산(西山)과 대사가 수립한 것을 살펴보면 그 군신 부자의 의에 무슨 모자람이 있겠는가. 저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성리(性理)를 세세히 탐구하고 인의(仁義)를 높이 이야기하면서도 그 실질이 없는 것과는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불가의 명목이면서 유가의 행실을 함은 나의 도(吾道)이지만, 유가의 명목이면서 불가의 행실을 함은 이단(異端)일 뿐이다. 그것을 물었는데 그르다 하고 고쳤는데 옳다고 한다면 나는 마땅히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무렁ㅆ는데 옳다고 하고 고쳤는데 그르다고 한다면 나는 마땅히 물러날 것이다.
조정이 일본과 강화를 맺을 때에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이 나아가서 죽을 만한 곳이 없으니 물러나서 자기 몸을 깨끗이 하자는 것은 옳다. 서산이 떠났던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줄로 나는 안다. 그런데 대사 같은 자가 그과 함께 떠나지 않고 더욱이 힘써 그 의론에 찬동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서산은 경(經)에 가까워 그 절개가 높았고, 사명은 권(權)에 가까워 그 공적이 넓었다. 그러나 화의의 성사에 대해서는 당시 선비들이 그 일을 주장함이 많았으니 비록 대사가 아니더라도 그 성사되지 못함을 근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일본은 불교를 높이고 믿으므로 요순(堯舜)과 공자(孔子)의 도로 교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일은 진실로 그 형세에 따라 인도해야 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또한 대사의 충(忠)과 신(信)은 만맥(蠻貊,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도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는 것이니 이 어찌 구구하게 유세하는 선비들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리하여 국가가 그 이익을 누린 것이 지금까지 3백년이 되었다. 그렇다면 서산의 '몸을 물려 도를 지킴'과 사명의 '뜻을 굽혀 만인을 구제함'이 각자의 의(義)가 있는 것이지만 그 국가를 위해 충성함은 동일한 것이다. 같은 때에 서산에게 학문을 배운 자로 또 해안(海眼)과 영규(靈圭)가 있다. 해안은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는 일찍이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자이다.
밀주(密州)에는 옛날부터 대사의 영령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목릉(穆陵, 선조) 때에 칭호를 내리기를 표충(表忠)이라 하였다. 우리 성상(정조)이 즉위하신 이래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일에 더욱 감동하여 일찍이 영변(寧邊)의 옛 사당에 나아가 이를 표창하였다. 본조(本朝)는 유가(儒家)를 존숭하여 일찍이 승도를 널리 도첩(度牒)하거나 사찰을 높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두 성상께서 여기에 마음을 쓰신 것은 단지 충의를 장려하기 위함이니, 어찌 성대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관동 지역을 순찰하면서 본사(本寺)의 유적을 예조(禮曹)로 이문(移文)하여 논의하였고 또 장차 조정에서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무리 가운데에는 기적비에 속한 자들이 있었다. 마침내 전(錢) 100꾸러미를 덜어서 베풀고 모연문(募緣文) 다섯 두루미를 지어서 그 역사를 도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서역천축으로부터 중원으로 들어 왔네! 한나라와 양나라를 거쳐 당과 송, 원나라까지 유가가 이단이라 헐뜯으며 더불어 동문으로 여기지 않으니 누가 대사를 알까? 스스로 참선하여 깨달았으니 의(義)를 수레로 삼고 신(信)을 길로 삼아서 무리 중에 으뜸이라 수립한 바를 더욱 보았네. 엄연한 대사의 상이 있으니 금강산의 사찰이라 곁에 석탑이 있으니 여래의 뼈를 모신 곳이네. 유리의 목구멍 산호의 혀 천 개의 수레바퀴 묘상이 전해진 듯하네. 만력 연간에 섬 오랑캐가 천명을 거역해 서산이 공적을 아뢰니 제자가 유정이라 왕이 말씀하시길, "저 왜구가 내 원수라 전쟁한 지 8년이니 백성이 쉬지 못하도다. 조정 신하 중에 누가 내 근심 풀어줄까?" 공경(公卿)이 말하기를, "아! 이 왜구가 교활하여 변방에 치우쳐 있고 풍속이 본래 불교를 숭상하니 차라리 형세로 인도할 일이지 이치로 굴복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이에 대사를 일으켜 일본으로 보냈다네. 아득한 만리 길 하늘과 땅이 장구하구나. 3월에 바람을 기다리고 4월에 돛을 펴니 곧 왜왕을 만나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니 평화로이 담소하며 강화가 마침내 이루어졌구나. 이 팔로(八路)를 좇아 왜구 분위기 일신하여 사녀(士女)들은 노래 부르고 춤추니 우리와 태평을 함께 하네. 서산의 높은 절개 사명의 위대한 공적이여, 혹 떠나고 혹 떠나지 않으나 그 의는 같다네. 산하를 떠돌며 푸른 빛 말과 불 뿜는 용, 동로(銅鑪)와 철장(鐵杖), 목혜(木鞋)와 주낭(珠囊), 천년간의 마사(摩挲)에서 부처의 향이 나는 듯하네. 서산은 구름 같고 사명은 물 같으니 물 흐르면 자취 남지만 구름 떠나면 머문 곳이 없네. 숭정(崇禎) 기원후 경신(정조 24, 1800년) 4월에 비를 세우다.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 조선시대 승직(僧職)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내린 벼슬로, 전국의 승군(僧軍)을 통솔하였다.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 조선시대 각 도에 설치된 진(鎭)의 장수로 병마(兵馬)를 통솔했던 종4품의 서반 외관직. ●도량(道場) : 불교와 도교에서 경전을 송독하고 예배를 하는 장소를 이른다. ●밀주(密州) : 경상남도 밀양(密陽)의 옛 이름이다. ●삼도(三塗) : 악한 일을 저지른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지옥(地獄)·축생(畜生)·아귀(餓鬼)의 세 가지 생존을 말한다. ●오계(五戒) : 불가에서 행하는 5가지 경계로, 생물을 죽이지 말고(不殺生), 훔치지 말고(不偸盜), 사음하지 말고(不邪淫),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不妄語), 술을 마시지 말(不飮酒) 것 등을 말한다. ●서축(西竺) : 서천축국(西天竺國)으로 인도를 말한다.
이 비석(碑石)은 <한국금석총탑>과 <조선사찰사료> 및 <건봉사본말사적>에 비문(碑文)이 소개되어 있어 본래부터 건봉사(乾鳳寺)에 건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비석을 완전히 파괴하고 매몰시킨 탓에 コ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1990년 단국대학교 사학가 학술조사단에 의해 파손된 비신 파편 일부와 비좌(碑座) 및 이수(머릿돌)가 건봉사 사역 안에서 수습되었다. 이 비석은 1800년(조선 정조 24년)에 건립되었으며, 비신(碑身)은 너비 80cm, 두께 33cm, 높이 약 190cm이고 전체의 높이는 294cm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비문(碑文) 탁본(拓本)과 조사에서 수습된 비신 파편 및 이수를 고증해 2017년 11월에 복제품을 제작해 건립했다. 복제된 비석의 비좌는 본래의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조사에서 수습된 비신의 파편과 이수는 새로 제작한 기적비의 주변에 전시하였다.
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명대사의 이름은 유정(惟政)이고 성은 임씨(任氏), 본관은 밀주(密州)이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시 왜구(倭寇)가 조선(朝鮮)을 노략질하니 휴정은 묘향산(妙香山)에서, 유정은 건봉사에서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명나리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왜병(兵) 2천여 명을 대파하였다.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日本)에 건너가 왜왕을 설득하여 강화를 성립시키고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3천명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서축(西竺)에 들어가 모셔온 부처님의 치아사리 10과가 왜적에게 약탈되었지만, 사명대사가 돌려 모셔와 건봉사에 보관하였다. 서산대사의 높은 절개와 사명대사의 위대한 업적은 실로 영원할 것이다. 조정에서는 유교를 존숭하여 일찍이 승려를 널리 제도시키고 사찰을 높인 적이 없었지만, 두 대사의 나라를 위한 충정을 기리고자 조정에 청하여 기적비를 세운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남공철(南公轍)이 글을 쓰고, 행영월도호부사(行寧越都護府使)가 글씨와 전액을 썼다. 경신년(정조 24, 1800년) 4월에 비를 세웠다."
건봉사 주차장 끝에 건봉사 설명안내판과 1920년대 건봉사 전경 사진, 건봉사 대웅전 올라가는 입구에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금강산 건봉사(金剛山乾鳳寺)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감로봉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절로, 석가모니의 치아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때 3,183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이문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1994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한 곳이자 일제강점기 때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 사찰이기도 하다.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승려 아도(阿道)가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승려 발징(發徵)이 절을 고쳐 짓고 1만 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를 열었으며, 이 모임은 우리나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 세조 2년(1456)에 임금이 행차하여 이곳을 왕실의 안녕을 비는 왕실 원당(願堂)으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御室閣)을 지으며 큰 사찰이 되었다. 조선 고종 15년(1878)에 불이 나 모두 타버려 이듬해에 다시 고쳐 지었다. 대한제국 광무 10년(1906)에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을 위한 봉명학교를 설립하여 관동지역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11년에는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규모를 회복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고성 지역에서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건봉사 터는 휴전하며 민간인 통제선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9년부터는 민간인 출입이 가능해졌다.
●염불만일회 : 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며 만일동안 염불하는 불교 의식. ●원당 : 개인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사찰 혹은 사찰 내 전각. ●말사 : 본사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본사에서 갈라서 나온 절
불이문(不二門) 옆에는 수령 약 500년, 나무높이 15m, 나무둘레 2.2m의 건봉사의 상징목 팽나무가 불이문을 지키고 있다.
건봉사 불이문(乾鳳寺不二門)은 1920년에 세워졌다. 한국전쟁 때 모두 무너진 건봉사 터에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원통형으로 다듬은 4개의 돌기둥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린 형태이다. 각 돌기둥에 새겨진 문양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인 금강저(金剛杵)를 나타낸 것이다. 금강저는 고대 인도에서 쓰던 무기로, 부처를 수호하고 번뇌를 없애는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한다. 정면에 걸린 현판은 서화가 김규진(金圭鎭)의 작품이다. '불이(不二)'란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하며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전통적으로 사찰 입구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 세 개의 문을 지나도록 구성되는데, 이 중에서 천왕문은 부처의 가르침과 불국 정토를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공간이다. 건봉사는 천왕문을 따로 세우지 않고 불이문에 금강저를 새겨서 사찰 수호의 기능까지 더하고자 하였다. 건봉사 불이문은 1920년에 세워졌다. 한국전쟁 때 모두 무너진 건봉사 터에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