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모든 산줄기의 根幹인 白頭大幹, 우리민족 고유의 산줄기 槪念인 이 백두대간을 답사하겠다는 생각은 그 동안 이 나라 모든 산꾼들의 念願이었을 것이다. 이 운동은 그동안 꾸준히 추진되어와 이제는 더 이상 낯설은 개념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백두대간으로 간다. 불현듯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늦었다가는 아마 영원히 못갈런지도 모른다는 초조감도 들었다. 대간 마루금만 따라 걷는것이 아니라, 대간이 우리네들의 삶에 어떤 影響을 주었는지, 그로 인해 文化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전 대간의 地形은 과연 어떻게 생겨 어떻게 이어가는지,그 것이 알고 싶어 잠을 못 이루다, 이제 우리는 백두대간을 간다. 가면서 생각하고 싶다. 나의 山을,나의 人生을,나의 哲學을,그리고 나의 삶의 意味들을. 나의 이 縱走가 주위사람들에게 우리민족의 고유의 산줄기를 찾는다는 어떤 좋은 의미의 영향, 自己發見,愛國心 아니면 自己意志의 實現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줄 수만 있다면 그 것으로 慰安을 삼고 싶다. 왜냐면 나는 그저 山이 좋아서 山을 찾았고 이제 우리 것이 있다기에 거기에 가는 것이니까"(1997,11,15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기 전날, 智異山 뱀사골에서)
우리나라의 옛 지도들은 산줄기를 그린 지도라 할 수 있다. 살펴보면 연결되지 않은 산줄기는 없다. 우리나라의 네 가장자리인 두만강 끝,신의주 앞산,木浦 유달산,釜山 앞바다 몰운대는 모두 다 산줄기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면 이 산줄기들은 어떤 의미를 지닌 산줄기인가? 옛지도에 그려진 산줄기는 白頭山에서 智異山으로 연결된 산줄기인 白頭大幹을 위시하여 아무리 미약한 湖南平野의 산줄기라 하더라도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편의와 직결된 의미있는 線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옛지도에 나타난 산줄기를 글로 정리한 것이 1800년 경 편찬된 「山經表」이다. 산경표는 旅庵 신경준(申景濬)이 동국지도류의 산줄기 흐름을 토대로 「동국문헌비고」중 지리관련 부분인 '산수고(山水考)'를 집필하여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山經表의 틀을 완성했다. 그 내용은 전국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大幹),백두대간(白頭大幹),하나의 정간(正幹),장백정간(長白正幹),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낙남정맥(洛南正脈) 청북정맥(淸北正脈) 청남정맥(淸南正脈)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규정하고, 여기에서 다시 가지쳐 뻗은 기맥(岐脈)으로 기록했다.
이들 산줄기 이름의 특징은 산이름 2개,지방이름이 2개 있지만 전체적으로 江이름에서 따와 그 江의 방위로 위치를 표시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한남금북정맥;한강 남쪽과 금강 북쪽에 있는 산줄기). 산줄기의 순서를 정하고 강이름과 관계한 까닭은 모든 正脈은 관계한 江의 경계능선인 分水嶺으로 정의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배워온 태백,광주,차령,소백,노령산맥 등은 1903년 일본의 지리학자 고또 분지로(小藤文次郞)가 발표한 '朝鮮의 山岳論'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들 산맥은 일반상식의 산줄기와는 달리 地質構造線을 기본선으로 한 것으로 땅속의 맥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한 것이다. 일직선으로 그어진 산맥을 따라가 보면 도중에 강이 나타나 산줄기가 끊기기도 하고 산맥과 무관하게 산들이 솟아있으나 산맥이라는 개념 자체가 땅위의 어떤 線上을 기준하지 않고 땅속의 構造線을 기준하고 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 100년 전의 한 일본인의 학설이 아직도 우리라는 '채'에 한번도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우리땅 산줄기와는 아무 관계없이, 우리생활과 아무 관계없이,그리고 자연지리의 활용에도 아무 관계없이,그저 학교에서만 그러려니 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애석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우리의 산은 삶과 정신의 산이다. 의식주 모두를 山에 묶어두고 살아온 우리였다. 산줄기에 의해서 사람이 나뉘고 물줄기가 나뉘고 문화가 나뉜다. 호남정맥에 의해서 판소리가 서편제와 동편제로 나뉘고 충청도,겅상도,전라도가 백두대간을 경계로 나뉜다. 경상도 사람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갈 때는 聞慶새재를 넘었다. 白頭大幹과 正脈이 이렇게 각 지방들을 자연스레 나누어 주어 自然,人文,植生,氣候 등 자연지리적인 측면에서 人文地理的 경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북부,중부,남부의 음식문화가 '황세기젓문화권','새우젓문화권','멸치젓문화권'으로 나뉘어져 재미있고, 住居의 양식도 산줄기 너머마다 다르며 경상도말은 강원도 속초지방에서 전라도 여수지방까지 분포되며,같은 전라남도지만 湖南正脈을 기준하여 서쪽의 光州말과 동쪽산간의 섬진강 유역인 곡성,구례말은 전혀 다르다. 우리땅 그 산들은 우리의 歷史와 文化를 창조한 母胎라는 옛 先人들의 認識,모든 산줄기는 물줄기 중심으로 가름한다는 山經原理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정립한 山과 산줄기의 원형을 되찾아 새롭게 認識한 바탕에서 우리 땅에 대한 내일을 기약하여야 한다.
약 1년 반 동안에 白頭大幹을 종주하고 이제 그 자연,인문지리에 대한 보고서를 쓰려고 한다. 총 도상거리 672 km,실제거리는 그 2배가 되는 약 1,340 km를 고통과 끈기,그리고 감동으로 지나오면서 그 느낀 감회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어느 때는 친구와 또는 제자와 아무도 없을 때에는 혼자서 줄기차게 대간을 지나왔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우리 산줄기를 직접 걸어보니 우리 산줄기에 대한 애정이 생겨났으며 심지어 조그만 애국심 마저도 일었다라고 하면 부끄러운 일일까? 어쨋든 이런 조그만 애국심은 종주를 하면서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승화되어 북쪽을 백두대간도 종주할 수 있는 그날을 기원하게 되고 말았다. 언제까지 연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행문 식으로 쓰는 이 백두대간 종주기에서 실수나 글의 미숙함 같은 것이 보일지라도 간접적으로 대간을 종주한다는 것만 기억하시지 꾸짖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울러 나는 42세에 불현듯 시작해 44세에 종주를 끝냈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더 일찌기 꼭 이 종주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白頭大幹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며 천왕봉을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천왕봉 남쪽,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이다. 중산리에서 칼바위, 법계사 지나 정상인 천왕봉(1915.4m)에 오르는 데에는 약 4시간이 소요된다. 중산리 버스종점에서 찻길을 따라 30분쯤 가면 국립공원매표소,그리고 두류교, 약 40여분 올라가면 칼로 자른 듯한 칼바위가 나타나고, 이어 길이 갈라진다. 이곳에서 왼쪽은 장터목산장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이 천왕봉 직선 코스인 법계사길이다. 법계사에서 천왕봉은 3km로 가파르기 그지없다.
천왕봉 정상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라는 글이 새겨진 정상표지석이 있으며 드디어 시작하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서쪽으로 길게 누워 나아가고 있음을 보니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산에 가면서부터 문듯문듯 생각해 왔던 백두대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어떤 필연처럼 내게로 다가왔던 백두대간은 이제 더 이상 늦출 수도 없고, 또 가고 싶어 잠 못이루다 나선 것이 지금이다. 같이 갈 친구를 물색하던 끝에 경주 한뫼산악회 후배이자 제자인 박영배(32세)군과 함께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천왕봉을 떠나, 천왕봉이란 이름의 정상이 있는 산(속리산,월출산 등)이면 꼭 있는 바위문인 통천문을 지난 뒤 완만한 능선길을 20여분 지나오면 하얀 고사목이 사방천지에 늘어선 제석봉(1807m)이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고사목들이 그대로 드문드문 수액을 빨아올려 결코 끊을 수 없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빨치산 토벌 때 이 주변에 불을 지른 바람에 모든 나무들이 타 죽어 그렇게 되었다나.......제석봉에서 40여분 가면 장터목산장이다. 이 산장은 북으로 백무동, 남으로 중산리로 하산할 수 있는 지리산 주능선 상의 교통요지이다.
장터목 지나 연하봉, 삼신봉 지나, 촛대봉에 서면 저 아래에 그 유명한 세석평전이 보인다. 세석평전은 격동기 때 빨치산의 본거지가 있었던 곳으로 북으로는 유명한 한신계곡이, 남으로는 거림골과 대성골이 길게 산을 파 내고 있다. 완만하던 대간길은 세석평전을 지나면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세석평전 지나 바로 나오는 영신봉은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지리산 영신봉에서 여항산,마산 무학산 거쳐 부산 신어산까지의 산줄기)을 갈라내주는 분기점이다. 우리나라 산줄기 1대간 14정맥은 1대간인 백두대간에서 14개의 정맥이 새끼쳐 갈라져 나간다는 말인데 그 중 하나가 낙남정맥인 것이다. 영신봉에서 40여분 가면 닿는 칠선봉(1,576m)은 험한 암봉으로 철구조물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간다. 큰 바위들과 울창한 원시림 속으로 넓고 뚜렷한 길이 이어져 있고, 국립공원 제1호답게 이정표도 잘 정비되어져 있다. 칠선봉 다음의 덕평봉에는 왼쪽 조금 내려선 곳에 맑은 물이 솟는 선비샘이 있다. 대간은 능선이라 그리 물이 많지 않아, 어쩌다 만나는 샘은 반갑기 그지 없는 손님이다. 팀 박영배는 종주산행 경험이 부족해 기나긴 산행에 완급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간 종주산행이 어떤 류의 산행인지 파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힘이 좋고, 정확한 독도실력과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한결 믿음직 스럽다. 우리는 지리산 주능선 한가운데인 벽소령산장에서 밤을 지낸다. 천왕봉에서 이 벽소령까지는 꼬박 10시간 걸어서 온다.
간밤에 뜻던 빗방울이 아침이 되자 활짝 개었다. 벽소령에서의 지리산 주변조망은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산세를 자랑하는 지리산은 그 너른 품만큼이나 이름도 많다. 智異山, 頭流山, 方丈山, 地理山, 地利山, 不服山, 赤狗山 등 많은 이름이 있고 또 뜻과 유래도 많다. 벽소령에서 크고 작은 바위를 돌며 이어진 길을 따르면 암봉인 형제봉에 이른다. 수많은 돌 때문에 산행이 수월치 만은 않다. 어디서나 보이지만 뒤의 천왕봉, 앞의 반야봉의 위용은 대단하다. 형제봉에서 삼각봉에 이르고 그리고 연하천산장이다. 연하천산장에는 습기 머금은 땅에 산림보호용이 박혀 있는데 주변 전체가 습지여서 토양유실이 심각할 것 같았다. 산장 주변 전체에 등산객들로 人山人海여서 이 깊은 산중의 저 많은 인파는 역시 지리산의 유명세를 인정케 해주는 것이었다.
연하천에서 명선봉까지는 계속 가파르게 오르는 편이다. 명선봉에서 토끼봉까지는 1시간 가량 줄기차게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토끼봉 지나서도 오르내림은 계속되고 그리고 뱀사골산장으로 갈라지는 화개재다. 화개재에서 북으로는 유명한 뱀사골을 지나 반선으로 내려선다. 화개재 지나 경남,전남,전북, 3개도가 만나는 삼도봉은 가파르게 쳐 올리지만 삼도봉 지나면 이제 길은 부드러워지며 지리산 주능선 중 가장 편한 길을 가게된다. 피아골 갈림길이 있는 임걸령부터는 길도 더욱 넓어져 한결 산행하기 편하지만 이틀간의 전투로 몸은 지칠대로 지쳐있다. 노고단(1,507m)에는 저녁답에 도착한다. 노고단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仙桃聖母를 산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올렸던 곳으로 '老姑'란 선도성모의 높임말이다.
노고단에서 종석대로 방향을 잡는다. 종석대는 성삼재에서 노고단산장까지 비포장도로가 나면서 종주자들이 도로를 따라 내려가 거의 들르지 않는다. 지리산에서 가장 천대받는 봉이다. 노고단은 과연 넓기 이를데 없다. 섬진강과 구례의 평야지대가 발아래 굽어보여 차라리 한 마리 새처럼 비상하고 싶은 욕망마저 인다. 성삼재 지나 멀리 만복대가 거대한 산줄기를 형성하며 큰 산을 형성하고 있다. 다음 구간에서 넘어가야 할 대간줄기이다.
성삼재로 백두대간을 넘는 도로가 지리산에 생겼지만 그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은 자뭇 심각할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벽소령에서 성삼재까지도 약 9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이틀 꼬박 약 65km를 걸은 것이다. 대간 종주는 이제 시작이다. 지금 시작해서 언제나 마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지금 시작한다. 가다 보면 진도가 나가겠지. 무슨 일이든지 시작은 있는 법이니까. 실행해 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백두대간 종주 보고서>
제 2구간: 성삼재∼여원재 (도상거리 28km: 1997.11.22)
(성삼재-만복대-정령치-고리봉-주촌리-수정봉-여원재)
智異山의 새벽 산안개를 쐬며 노고단 도로를 달려 성삼재에 도착한 것은 아침 8시 10분, 1구간 지리산종주는 서부 지리산을 뺀 불완전한 지리산종주이기에 2구간이 끝나야 비로소 지리산을 종주했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오늘, 완전한 지리산능선을 연결하러 나는 백두대간으로 들어간다. 어젯밤 늦게 먹은 메기탕과 맥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속이 조화롭지가 못하다. 지난 주부터 산불 경방기간이라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일제히 등산금지령을 내려 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만 우리는 성삼재에서 북쪽으로 백두대간을 아침의 산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출발시간은 정확히 아침 8시 20분,처음부터 대간 종주자들의 표지기가 여기저기 날리고 있다.사점이 되기까지는 숨이 헐레벌떡이다. 어젯밤의 메기탕냄새가 트림으로 올라온다. 반시간 뒤 8시 50분에 구례 고리봉(1248m)에 다달랐다. 백두대간 표지기들이 군데군데 걸려있다. 97년 초부터 산 전문잡지 "사람과 山"에서 연재하고 있는 '백두대간 탐사'때문이리라. 작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금년에만 엄청나게 많은 종주자들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60대가 도전한 백두대간 .전남 나주교육청 산악회 김진식,윤성현,이동식'이라는 표지기다.대간종주도 저변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지리산을 조금 지나면서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을 나중에야 본다. 고리봉에서는 길이 우측으로 나 있었다.고리봉을 지나보니 눈앞에 히말라야같은 장엄한 서부 지리산의 만복대의 위용이 나타났다. 하나의 거대산이래도 아까운데 이름이 고작 만복대라니..........그 흔한 산이름하나 못 얻었단 말인가? 하기야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만은. 고리봉 지나 밑으로 조금 내려오니 바로 헬기장이 있었다. .호흡조절을 한 다음 만복대를 향해 대간 마루금으로 힘차게 발을 내 딛었다. 만복대까지 가는데 헬기장은 3군데나 있었다. 멀리 보이는 만복대의 정상에 우뚝 선 정상비는 십자가 모양이라 예수의 고난을 연상케하는 골고다의 언덕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교자들이란 말인가? 처음부터 줄곳 올라와서 힘이 좀 들었지만 우리는 쉬지 않고 올라갔다. 팀 박영배는 과연 무슨 뜻이 있어 이렇게 따라왔을까? 아무 말 안하는 그는 항상 수수께끼인채로 조용히 옆에 있다. 만복대에 숨가쁘게 올라가니 멀리 지리산 연봉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고단 넘어오면서 부터 천왕봉을 볼 수가 없지만 이제 여기에서 그 천왕봉은 능선 너머 너머에 맨 마지막 능선에서 우뚝 솟아있다. 10시 28분에 만복대를 올라서니 반대편 대간 능선이 드러난다. 멀리 남원 고리봉이 보이고 그 앞이 정령치리라. 여기서 성삼재는 10킬로이고 정령치는 3킬로라고 씌여져 있다.우리의 지원조 이은경씨는 지금쯤 우리를 기다리러 정령치로 치달리고 있겠지. 만복대에서 내려서면서 내리 달렸다. 5분쯤 가다가 두개의 능선으로 갈라진다. 왼쪽능선은 영재봉지나 숙성치가는 능선이고 오른쪽 능선이 바로 대간마루금인 것이다. 오른쪽으로 들어서서 30분 가량 치달리니 바로 정령치다.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을 막기 위해 정장군을 시켜 지키게 했다하여 정령치라 이름이 지어졌다는 곳이다. 산불경방기간이라 밑에서 감시원들이 잔소리하리라. 우리는 조금 비켜서서 정령치로 들어섰다. 11시 20분 정령치(1172m)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이은경을 만났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두번째 지원장소인 고기리를 지정해 주고 바로 12시 정각에 남원고리봉을 향해서 출발했다. 바로 위에는 유명한 정령치의 패러글라이딩장소가 있었다. 그 곳을 지나 20분 오르니 남원 고리봉(1304.5m)이다. 정상에는 송신탑이 있고 바로 앞에 정상비가 있고 바로 몇발자욱 지나 왼쪽으로 꺾어져 밑으로 솓아져야 대간길이다. 오른쪽 큰 줄기능선을 바로 타고 가다간 세걸산과 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보기에는 그 쪽이 더 큰 능선이지만 대간은 아니다. 고리봉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25분을 내려오면 무덤이 있고 거기서 8분쯤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철조망이 이어져 있다. 한 10분쯤은 이 철조망을 고집하면서 내려와야 한다. 왼쪽으로 길이 있고 큰 능선이 있지만 그리로는 안된다. 10분쯤 철조망을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길이 나있고 표지기로 알수 있다. 그리고는 표지기를 따라 또는 계속해서 왼쪽을 고집하면 밑으로 도로의 차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고리봉을 떠난지 거의 1시간,우리는 초창기 백두대간 찾던 선배들의 노고를 뼈저리게 느낀다. 아마 무수하게 많은 딴길을 택했으리라. 그러다가 찾고 또 찾았겠지. 어떤 이는 잘못된 길을 가놓고 제대로 갔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대간은 남원 고기리 3거리에서 도로와 만난다. 시간은 오후 1시 35분,이은경씨가 기다리고 있다. 정확하다. 그녀도 정확하고 우리도 정확하다.우리는 1시 30분경에 떨어진다고 했다. 예정에 비해서 시간을 많이 단축했다. 도로에 떨어진 관계로 우리는 식당에 들러 닭백숙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나선다. 대간종주하면서 식당에 들러 식사하는 것은 아마 다시 없을 것이다. 앞으로 엄청난 험준한 산들이 우릴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다시 떠난다. 오후 3시 5분에 고기리를 출발했다. 주촌리 원평마을(가재마을)까지는 2 km였고 우리는 3시 30분에 주촌리 원평마을을 뚫고 나있는 길을 따라 마을 뒤에 있는 산신당을 찾아냈다. 산신당에는 또 수많은 표지기가 달려있다. 우리 이웃인 포항 한마음산악회 표지기의 등장으로 포항셀파산장 표지기가 더 이상 외롭지는 않다. 처음부터 오르막이라 숨이 가쁘지만 견딜만 하다. 수정봉 가기전 대간능선의 좌우측 해발 고도차가 매우 심하다. 능선 좌측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쪽은 고도가 700m나 되어 고산 특유의 아침 운해가 너른 품으로 깔려있고 능선 우측 주촌리 덕산리 쪽은 해발 고도 300m 정도로 동네 뒷산을 연상시킨다. 수정봉까지는 봉우리를 여러개 넘어간다. "하이텔69동 「뒤집어도 같은 마을」<산골에 산적> 20대 마지막 8월에. 김춘현 외 9명"이라는 표지기가 눈에 띈다. 10명이 가는 걸로 봐서 우리한테 추격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4:40분에 수정봉에 섰다. 수정봉(804.7m)에서는 지나온 대간 마루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앞으로는 입망봉이 보이고 여원재지나 멀리 고남산 중계소도 보인다. 서둘러 여원재로 향하니 입망봉(700m)에 5:30분 도착이다.
입망봉에서는 바로 여원재로 내려가는데 30분 쯤 내려가면 좌측에 큰 바위가 서 있고 큰 바위를 우측으로 돌아서면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한 100m쯤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능선에 붙어야 한다. 여원재 바로 직전, 소나무 숲에 갇힌다. 대간 종주팀때문에 생긴 길인 모양으로 겨우 겨우 비집어 몸을 빼내면서 싸움하기 근 10여분, 오후 6:05분에 여원재로 떨어진다.
여원재는 남원에서 함양간 24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로서 길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남원과 운봉,더 나아가 영남과 호남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고개인 여원재(480m)는 전략적으로도 가치가 있어 임진왜란이나 신라와 백제,동학란 등 항상 쟁탈의 대상이 되곤 했다. 고려의 이성계장군이 이 곳까지 진출한 사상유래없는 대규모의 왜구를 대파한 황산대첩 승전의 현장이며,동학란 때는 김개남이 1만의 동학군을 끌고 이 여원재로 진격하여 영남으로의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운봉사람 박문달장군이 이끄는 관군들에게 무참히 대패했던 곳이기도 하다.영남으로 진출을 실패한 동학군은 결국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던 것이다. 유서깊은 여원재에서 우리는 2구간의 대간종주를 끝낸다.
<백두대간 종주 보고서>
제 3구간: 여원재∼치재 (도상거리 21km: 1997.11.29)
(여원재-고남산-통안재-88고속도로-사리봉-복성이재-치재)
백두대간 3구간 째에 접어드니 이제 가을이 깊어진다. 대간을 종주하러 우리는(팀 박영배, 차량지원조 이은경) 전날 지리산에 와서 1박하고 대간에 붙는데 이제 가을은 깊을대로 깊어져 계절의 깊이를 피부에 느낄 정도이다. 지리산 자락의 깊은 밤은 계절의 정취를 더 한층 느끼게해 주는데 술맛은 더더욱 감칠 맛이 난다. 우리는 11월 29일 오전 8시 25분 여원재를 출발한다. 차량지원조 이은경씨 한테는 미리 남원시 아영면의 봉화산자락의 흥부마을에 가서 기다리라 하고 대간에 붙는다.
버스정류장에서 남원쪽으로 잘려진 나무 울타리가 있는 곳이 대간 진입로다.마을에서는 합민성터와 고남산 정상 통신시설물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데 막상 산길로 접어들면 길이 없다. 고남산 가는길은 논두렁,밭두렁,심드렁(?)이다. 간신히 독도로 길을 이어 가다보니 드디어 고남산 오르는 길을 찾아낸다. 한참 오르고 있는데 산불감시원 아저씨가 서슬 퍼런 얼굴로 내려온다. 아차싶어 선수를 순간적으로 쳤다. 공손히 인사를 하고 길을 묻고 산불감시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다고 상대방이 대꾸할 틈도 없이 달아붙여 얘기해 댔다. 순식간에 당한 감시원은 이것 저것 가르쳐 주고는 "산불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 법이다. 오후 1시 40분, 고남산(846.4m)정상에 서자 그동안 터지지 않던 핸드폰이 갑자기 터졌다. 경주한뫼산악회 총무 김해욱이었다. 연점산 정상이란다. 산악회의 다음 정기산행지 답사였다. 리더 이종률이도 같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정말 애를 많이 쓴다. 저런 친구들의 뒷받침으로 우린 대간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이다.
고남산 정상 바로 넘어 커다란 중계소가 나온다. 사진을 찍자니 간첩같은 기분이 든다. 중계소는 대간능선에 차지하여 길을 뭉개버렸다. 중계소를 억지로 돌아 나오니 큰 도로가 생겼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통안재에서 다시 능선에 붙는다. 통안재는 신경을 써서 찾아야 하지만 도로따라 내려가다 보면 수많은 표지기가 능선길을 가르쳐 준다. 704봉에는 내려서는 능선이 여러개라 길 찾기가 힘든데 대간길을 정확하게 잘 찾아내면 그 다음부터는 탄탄대로이다.매요리마을 가기전에 왼쪽으로 사당이 나오고 유치재도 지난다. 그리고 매요리까지는 계속 평탄하게 간다. 매요마을에서는 대간의 주릉이 마을 집들의 돌담과 뾰족지붕인 교회건물을 지나 이어진다. 매요마을에 오후 12시 30분에 도착한다. 매요마을에 하나 밖에 없는 가게의 문에는 백두대간 표지기가 수없이 달려있어 그 가게에 들어가 덜덜 떨면서 막걸리 한잔하니 대간나그네들 대부분이 여기서 우리와 같았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날씨가 추워지는지 팀 박영배는 응달에서 막걸리 마시고 덜덜덜 떤다.
여원재에서 고남산을 지나 매요리까지 뻗은 대간은 운봉뜰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운봉은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홍보가"의 배경이 된 성상마을이 있어 판소리의 고향이라고 한다.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홍록선생도 조선말기 운봉 화수리 비전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매요리를 떠난다.
오후1시 10분, 우리는 매요마을에서 치재로 출발한다. 매요마을을 지나서 618봉을 거쳐 전진하면서 왼쪽으로 슬슬 감으면서 우리는 아실재쪽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아실재는 88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왼쪽으로는 1Km 떨어져 모래재마을이 잘 정돈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1km떨어져 지리산 휴게소가 보인다. 우리는 88고속도로를 무단횡단으로 가로질러 다시 대간에 붙었다. 이곳은 지도에는 아실재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도로에는 사치재라고 이정표가 붙어있다. 여기서는 오르막이 가파르다.계속 헉헉거리며 올라보니 전방에 나타난 대간의 줄기는 멀리 새맥이재까지 전부 발가숭이다. 94년과 95년 연이어 산불이 전체를 휩쓸었단다. 시커멓게 탄 나무더미를 헤치고 황폐화된 대간의 굴곡을 계속 오르락 내리락했다. 가다보면 두개의 임도가 나오고 다시 임도지나 대간을 고집하면 새맥이재로 떨어지는 대간길을 고수할 수 있다. 독도가 좀 까다롭고 능선은 어느 하나만이 대간이다라고 고집할 수도 없는 것같지만 분명 대간은 하나다. 왜냐면 물을 가르는 분수령은 반드시 하나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조그만 능선이 여러개 같이 새맥이재로 떨어져 내린다. 지리산에서 올라가는 대간종주자들과 설악산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종주자들은 다른 능선을 선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맥이재에서는 같이 만나 떨어진다. 오늘 팀인 박영배는 굉장히 빠르다. 스트레스가 있는가? 어쨋든 영배 덕에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되고 있다.이대로면 목적지까지 6시 20분이 아니고 5시 10분이면 되겠다. 사리봉(776.8m) 오르는 길은 소나무 숲지대라 잡목이 없어 걷기가 수월하다. 대간은 시루봉을 거치자 낮아지며 왼쪽으로 슬그머니 비껴간다. 그리고는 얼마되지 않아 헬기장이다. 멀리 아영면이 보인다. 복성이재로 방향을 트는 781봉까지의 길은 거의 철쭉밭이라 손과 발을 귀찮을 정도로 때린다.작은 봉우리를 3개나 넘어 거대한 男根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멀리 정북 방향으로 누렇게 벌거벗은 봉화산이 우뚝 솟아있다. 봉화산은 철쭉으로, 지리산 바래봉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산이다. 복성이재로 내려서면서 아막산성터를 만난다. 그저 그렇고 그런 산성이려니 하고 알아보니 그게 아니다. 아막산성은 사리봉과 봉화산 사이에 있는데 옛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제법 옛 성터 석축을 간직하고 있는 이 성터는 전북지방 기념물 38호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아직 개발이 되지않아 산길조차 제대로 없어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곧 복성이 뒷재지나 바로 복성이재다. 복성이뒷재는 오른쪽 남원으로는 성상마을을 끼고 왼쪽 장수쪽으로는 복성이마을을 끼고 있다. 성상마을은 흥부가 살았던 마을로 유명하다. 전북 남원을 춘향과 흥부의 고장이라고 하는 것도 이 마을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복성이마을은 임진왜란때 천문지리에 밝았던 奇人 변도탄이라는 도사가 어느날 밤 福星(길조가 드는 별로 지금 목성)이 유난히 남쪽에 빛을 발하고 있어 모든걸 싸 짊어지고 들어왔었다고 한다. 얼마후 임진란이 일어나자 전국이 전란에 휩싸였는데 이 마을은 의병과 관군과 피난민들의 양곡 창고가 되었다고 한다. 전란 후 나라에서 큰 상을 받은 변도사의 선정이 널리 알려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룬것이 복성이마을이라 한다. 오른쪽 남원쪽은 도로가 났으나 왼쪽 장수쪽은 지금 한창 도로공사중이었다.지원조 이은경씨와는 오후 6시 20분에 만나기로 했으나 이제 겨우 5시 05분이다.영배가 막 달린 덕분이다. 사리봉 넘어서면서 보이기 시작하던 철쭉나무들이 치재로 넘어가는 사면에 이르러서는 전체가 철쭉나무 천지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이 인근의 바래봉과 함께 전국적으로 유명한 철쭉군락지(봉화산 철쭉군락지)란다. 치재는 옛날 고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길이 거의 없어졌다. 잡목터널을 뚫고 간신히 가시나무에 찔리면서 내려서니 공터가 하나있고 오늘의 구간은 여기서 마친다. 잠깐 내려오면 치재마을에 이른다. 지원조 이은경씨는 치재마을 철쭉식당슈퍼에서 라면을 섭렵하고 있었다. 우리도 거들어야지. 배가 고프다. "대간종주자는 거지행색이 제격이라"했다는데....................
년말에 모두가 바빠서 당일에 바로 떠나서 2일 동안 대간을 치기로 했다. 우리집에서 97년 12월 31일 밤에 모두 모였다. 밤 12시 정각,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팀인 박영배, 이번에 함께 객원으로 참여하는 한뫼산악회 산행리더 박광태(그는 경주에 있는 몇 명의 최고의 클라이머 중 한명이다), 차량지원조 이은경, 함께 지원하는 한뫼산악회 장비부장 이상무(그는 다리가 삐어서 절고 있다)와 다같이 신년의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새해다. 우리는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7시에 경주를 떠났다.
지리산 I.C로 들어와 치재마을에 도착하여 드디어 2일에 걸친 제 4구간 백두대간 종주에 들어갔다. 지원조로 이은경,이상무가 남고 나와 박영배,박광태가 탐사대원으로 중무장을 하고 대간을 나선다. 산에서 1박을 해야하는 긴 코스이므로 모든 장비를 챙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짐이 무거우니 산행속도도 자연히 느려졌다. 아침 9:30에 치재마을을 출발하여 치재에 올랐다. 영배는 더욱 더 빨라졌다. 전문가인 박광태가 같이 붙으니 더더욱 그렇다. 나는 혼자 처져 줄기차게 따라갔다. 지난 구간 우리가 내려올때 찾지 못했던 나무계단을 올라 치재에 서고는 드디어 대간을 밟아 나갔다. 치재에서 오른쪽 완경사와 왼쪽의 급경사를 조화롭게 이끌어 가는 주릉을 내려서면 꼬부랑재다. 여기까지도 철쭉나무들은 잘도 따라온다. 그 북쪽의 다리재 능선까지도 철쭉은 이어져 있지만 키가 작은 철쭉나무들이어서 운행이 훨씬 편하다. 다리재에서 왼쪽으로 100m 지점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주위가 온통 억새밭이어서 산불 위험이 높은 지역이다. 봉화산 정상을 향해 펼쳐진 억새평원은 사람을 키를 넘는 억새들로 가득 메워지고 잡목하나 없고(예전에 큰불이 난 것 같다)전체가 완벽한 노란색을 띠고 있어 그 어떤 억새평원보다 아름답다. 오전 11:30분 봉화산 정상에 섰다.봉화산 정상(919.8m)에는 전부 억새밭으로 주위가 휑하다. 봄이 되면 이 봉화산은 철쭉으로 산 전체가 덮인다. 우리나라에서 지리산 바래봉과 이 봉화산이 철쭉으로 가장 유명한 산이라나........그래서 봄이 되면 봉화산에는 철쭉제가 열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봉화산 넘어서니 큰 임도가 산 전체에 어지럽다. 대간은 임도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 광대치로 가면서 흐리던 날씨는 드디어 눈을 뿌리기 시작한다. 대간의 겨울눈은 차기만하다. 광대치까지는 비슷한 길이 계속된다. 박광태씨가 기다리고 기다리던(너무 빨라 모두가 따라가기 힘들어서....) 광대치에는 오후 1:40분에 도착했다. 박광태는 끝까지 광대치가 아니고 광태치라고 우긴다. 광대치 지나서 월경산으로 오르기 시작하면서 오르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눈보라 속에서 기온이 한창 떨어져 몸이 서늘하다. 눈은 슬슬 쌓이기 시작한다. 울창한 숲을 이리저리 헤치고 다니면서 2:40분에 월경산 정상을 살짝 비켜 내려서기 시작한다. 드디어 중재가 보인다. 중재에 내려서서 처음으로 대간을 가는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그들은 중재에서 음식을 끓여 먹는 남녀였는데(여자는 상당히 미인이다)실망스럽게도 인사도 받지 않고 같이 먹자는 말도 없다. 내일 산행이 걱정이 되어 중재에서 멈출 수 없어 우리는 다시 산을 올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오후 4:45분에 드디어 중고개재를 찾아 중기마을로 조금 내려서다가 야영지를 찾는다. 중고개재에서 대간을 위에서부터 종주해 내려오는 한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백운산 넘어 오늘은 광대치에서 야영 예정이라 했다. 준비가 단단히 된 팀이었다. 막강한 지원조 박광태씨가 와서 훨씬 힘이 덜 든다. 처음에 대간 산행의 수월함에 대해 "생각보다 너무 쉽다"",이런 식으로 표시기가 달려 있으니 길을 잃어버릴래야 잃어버릴 방법이 없다"를 주장하던 박광태씨는 갈수록 생각을 달라지는 지 드디어 오후가 되자 "대간은 역시 대간이다"라는 그 특유의 명말(?)을 남긴다. 내일 육십령까지 가기 위해 우리는 중기마을 위에 있는 중고개재에서 1박을 하기로 한다. 신년부터 외박이라 그것 참 심란하기만 하다. 내일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서 지원조는 오늘밤 함양에서 자고 내일 육십령으로 차를 가지고 오겠지. 그들도 고생이다. 기다림은 힘든 것이다. 더욱이 위험이 존재하는 산속에 보내놓고 기다리는 심정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제 한동안 지나왔던 전라남도 남원은 오늘로 끝이다. 오늘 봉화산을 넘어서면서 경상남도 함양땅에 들어선 것이다. 육십령은 함양의 북쪽 끝이다.그래서 내일은 함양땅을 완전히 하루에 넘어가는 대장정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1월 2일, 오늘 갈길이 멀어 새벽부터 잠에서 깼다. 벌써 박광태는 밥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야영했던 중고개재는 옛날 번암면 사람들이 함양 장을 볼 때 오가던 고개다. 장안산이 가로막아 장수읍으로 장을 보러 가지 못하고 고개가 낮은 중고개재를 넘었다. 중고개재만 넘으면 운산리에서 버스가 있어 시간상으로 함양장이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큰 길이 난 고개가 함양장 서는 날에는 밭작물과 산나물을 내고 고무신이며 명태꾸러미를 사들고 막걸리 한사발에 거나해져 고개를 넘어오던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 7:40분, 중고개재를 출발하자마자 근처에서 야영을 한듯한 한 대간종주자를 만났다. 그도 육십령까지 간다고 했다. 우리보다 훨씬 더한(혼자왔기에) 저런 무게를 지고 거기까지 간다면 굉장히 고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백운산을 향해서 달린다. 어제는 흐려서 전국적으로 못 봤던 신년 일출을 오늘에야 본다. 날씨가 쾌청해서 태양은 무척이나 선명하다. 백두대간에서의 日出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지리산 이후 처음 만나는 명산인 백운산(1278.9m)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생각보다 빨리 9:35분에 백운산 정상에 선다. 전국에는 백운산이라는 이름의 큰 산만 23개나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백운산 3개는 여기 함양 백운산이 높이와 주변 조망으로,광양 백운산이 호남정맥의 바다경치 좋은 마지막 산으로, 포천 백운산은 아름다운 계곡으로 손가락에 꼽히고 있다. 백운산 정상은 전망이 좋은 곳이다. 바로 지리산 주능선이 뻗어 있고 북서쪽으로 장안산이 지척이고 북쪽으로는 영취산 지나 장수덕유와 남덕유가 쌍동이봉같이 나란하고 그 오른쪽으로 거창의 말발굽산맥(U자 산맥) 기백,금원,월봉,거망,황석산 5개명산이 굽어있고 그 오른쪽으로 또 빨치산의 원발생지인 괘관산이 솟아 있다. 멀리 육십령은 까마득하다. 꼭 지리산 주능선을 종주하는 기분이다. 죽었다는 생각과 함께 가야만 되는 어떤 숙명의 비장감이 생기면서 먼저 백운산을 내려서기 시작한다. 영취산까지는 별 문제가 없지만 눈이 얼어붙어 길이 미끄러워 애를 먹는다. 차라리 눈이 쌓여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2:10분 영취산(1075.6m) 정상이다. 영취산 정상에는 갈색의 팻말이 서 있다. 영취산은 금남호남정맥이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시작되는 중요한 곳이다. 이 곳에서 왼쪽 무령고개로 나가는 금남호남정맥은 장안산을 거쳐 장수 팔공산 지나 주화산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의 두 갈래로 갈라진다. 호남정맥은 내장,추월,무등,사자를 거쳐 광양 백운산에서 그 수명을 다하고, 금남정맥은 대둔,계룡을 거쳐 부여 부소산에서 끝맺음을 한다. 두 갈래로 갈라진 정맥은 다시 지맥으로 가지를 치고 금강,섬진강,영산강,동진강,만경강,탐진강 등 여섯갈래로 물줄기를 갈라놓는다. 충청과 호남의 땅과 물을 가르는 역사의 출발점인 영취산은 의외로 초라하기만 하다.
영취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대간을 따라가면 곧 산사태가 난 곳에 억새가 무성하다. 덕운봉 지나 오후 1:45분에 밥상같은 돌봉우리인 전망대바위에 도착한다. 주변 조망이 좋다. 전망대바위를 지나자 사람 키를 넘는 고생스러운 산죽지대가 다가왔다. 산죽에는 눈이 쌓여 있어 지나가자 온몸이 눈에 묻힌다. 순발력 좋은 박광태씨가 앞에 서서 치고 나가고 나는 두번째 서고 박영배가 마지막으로 섰다. 박광태는 허리를 굽혀 터널통과로 돌파해 나가고 나는 온몸을 우의(오버트라우져)로 봉하고 모자쓰고 돌파를 시도했다.지팡이로 미리 앞을 쳐내니 큰 힘이 된다. 산죽지대를 지나자마자 977.1봉이 나온다. 그 왼쪽으로 저 아래 "충절의 여신" 주논개가 태어난 장수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 보인다. 논개가 13세가 되던 해 부친 주달문이 세상을 떠나자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숙부 주달무는 당시 장수 토호 김충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았다. 그러나 논개 모녀가 완강히 반대하자 주달무는 논개 모녀를 상대로 장수 현감에게 訴狀을 올렸으나 오갈 곳 없게 된 모녀는 현감부인의 병수발을 하면서 머물렀다. 이후 현감 부인은 세상을 뜨고 결국 이게 인연이 되어 현감 최경회와 논개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경상우병사가 된 최경회는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당하자 최경회는 南江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에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연 왜군들 틈으로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10여일간 내린 장마비가 넘실대는 진주 南江에 몸을 던졌다. 그 후 지방의 義兵들이 남강에서 최경회와 주논개의 屍身을 찾아서 고향으로 옮겨 주씨 문중과 장사지낼 것을 상의 했지만, 왜적의 보복이 두려워, 또는 妓生이었기 때문에 대간을 넘지 못하고 대간 오른쪽 삼남대로변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잡아 장사지내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 고개인 민령으로 내려간다. 벌써 산을 쉬지않고 달려온지 9시간이 되어간다. 지겨운 생각이 엄습한다. 빨리 산행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왜 이 지겨운 산에 오는 걸까 ? 이것도 전생의 업보인 모양이다. 이 고생도 평생해야 되는 건지? 나는 왜 이 산에서 평생 이렇게 헤매야 하는 건지 ? 또 박영배는 산에 큰 관심도 없었으면서 왜 저렇게 올때마다 따라와 고생하며 가는 것인지 ? 그 또한 업보인가 ? 민령지나 송전탑이고 그 지나 오후 4:35분에 깃대봉(1014.8m)에 도착이다. 저 아래에 육십령이 보이지만 생각보다 엄청나게 멀기만 하다. 깃대봉 이후 독도가 상당히 까다롭다. 깃대봉 정상에서 완전히 왼쪽으로(북쪽)틀어 한개의 봉우리를 지나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 나가다가 능선을 버리고 완전히 계곡으로 떨어지듯이 내려오지만 지나고 보면 그 것이 대간이다. 앞으로 장수덕유,남덕유가 가로막는다. 계속해서 내려가다가 가능하면 왼쪽길을 고집해야 한다. 마지막 무덤에서도 오른쪽길로 들어가면 육십령식당이고 대간은 왼쪽길이다. 6시 10분, 드디어 육십령이다. 장장 10시간 30분 동안 우리는 달리다시피 했다. 그래서 체력이 많이 소모됐지만 아직 끄덕없다. 많이도 강해진 것 같다. 욱십령은 함양과 전라도 장수를 이어주는 고개다. 이 고개이름을 六十領이라 하는데는 여러 얘기가 전하는데, 첫번째는 안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 육십리이고, 장수 감영에서도 육십리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두번째는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육십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다 해서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세번째는 산적의 화를 피해 육십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제 여기 육십령에서 남덕유산에 오르면 거기서 부터는 경남 거창인 것이다. 아내 이은경은 육십령을 참 좋아한다. 처음 사귀어서 서해안지나 마이산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육십령을 넘었던 것이다. 그 때 찍었던 육십령사진은 지금도 귀중히 여겨, 방안에 걸려 있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을 도와주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육십령식당의 조정자할머니를 만났다. 친절한 분이었고 돼지고기도 아주 질이 좋은 고기였다. "백두대간은 몰라도 대간종주자는 한눈에 압니다."라는 말로 유명해 진 분이다. 쉽게 말해서 종주자는 꼴이 거렁뱅이라는 것이다.
육십령에서는 본격적으로 덕유산줄기가 시작된다. 기록에는 덕유산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난 때는 15세기말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덕유산이라 해놓고 '흙산인데 구천동이 있고 천석이 깊숙하다'하고 쓰여있다.
이번 구간에는 최강의 팀이 뜬다. 경주에 몇 안되는 정상급 클라이머들 중에 속하는 박광태,이종률씨가 같이 참여한 것이다. 중간에 1박을 하기로 하여 배낭의 무게는 무겁기만 하다. 육십령의 정자에는 어느 대간종주팀이 간밤에 막영을 한 것같다. 빨래가 늘려있고 취사하느라 연기피우고 아침에 난리법석이다. 간밤엔가 오늘 새벽엔가 눈이 제법 내린 것 같다.
우리는 육십령 고개에서 아침 8:30분에 바로 대간줄기에 붙는다. 대간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계속 숲길을 40여분 걸어올라 조그만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바로 전면에 거대한 암봉이 버티고 있다. 할미봉(1,026km)이다. 할미봉은 암봉을 이루고 있어 앞뒤 모두 가파른 암릉구간이지만 밧줄이 매어져 있다. 시간은 9:25이다. 할미봉에서 뒤돌아 내려다 보면 대간 동쪽능선 월봉,금원산 쪽으로 채석한다고 완전히 산줄기를 뚫어 뭉게 놓았다. 대간을 손대면 여론이 시끄럽고 그래서 대간을 좀 비켜간 저곳을 박살내는구나 싶다. 사람들은 광산이나 채석장, 도로건설 등으로 대간을 파괴할 때 환경파괴를 우려하지만 나는 사실 별로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뭉개어 놓아도 그 지역의 환경파괴는 있겠지만 물 가르는 선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니 대간이 없어질 수는 결코 없다. 대간은 물 가르는 선이기 때문이다. 평지가 되어도 물은 갈라내니까 대간은 존재하는 것이다.
할미봉에서는 북으로 장수덕유, 남덕유산이 완전히 드러나고 우측 밑으로 덕유교육원과 영각사까지도 드러난다. 할미봉을 다 지나가는 지점에서 가파른 암릉구간이 나온다. 겨울철에는 위험하다 했는데 과연 암릉에는 얼음이 붙어 상당히 애를 먹는다. 박광태씨가 자일을 깔고 내려가고 모두 뒤를 따른다. 짧은 암릉구간이지만 장비없이는 곤란한 지역임에는 틀림이 없다. 할미봉을 지나서는 계속 평탄한 산길이지만 눈이 엄청나게 쌓여 진도가 더디다.
설산의 정취에 마음껏 취하면서 발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장수덕유를 향해서 가다보면 덕유교육원에서 올라오는 일반등산로와 합쳐지는 지점이 나오고, 거기서 부터는 등산로는 넓어지지만 가파름은 심해진다. 계속 오르막을 20여분 오르면 넓은 공터에 헬기장이 나오고 전망은 더 없이 시원하다. 시간은 10:50분이다. 헬기장에서 부터는 계속 오르막이다. 장수덕유 정상에 가까워 질수록 암릉이 많아진다. 오후 12:25분에 장수덕유(1,510km)정상에 선다. 호남사람은 장수덕유산을 진짜 남덕유산이라 하고 영남사람은 지금의 남덕유산을 진짜 남덕유산이라고 다퉈왔지만 영남사람들의 의견이 관철된 모양이다. 개인적인 의견인데 남덕유산을 이 장수덕유산으로 해야 될 것 같다. 우선 정상부의 경관이 장수덕유가 앞선다. 게다가 정상부 면적도 훨씬 높고 높이도 남덕유보다 2.6m 더 높으며 백두대간도 이 장수덕유를 지나가지 남덕유산은 살짝 좌측으로 비켜가는 것이다. 장수덕유산에서부터 안부까지는 줄곧 내리막이다가 눈속에 산죽이 밭을 이루고 있는 안부에서부터 남덕유산까지는 줄곧 오르막이다. 대간은 남덕유산 정상에 약 100m정도 못가 왼쪽으로 빠져 나간다. 그래도 남덕유산을 거쳤다가 다시 내려와 가는 것이 좋다. 남덕유산은 제 혼자서도 우리나라 유수의 명산인 것이다. 남덕유산에는 오후 1:30분 도착이다.
우리 팀은 남덕유산에서 본격적으로 덕유종주에 들어간다. 멀리 펼쳐진 덕유산 본줄기는 한정없이 길기만하다. 최근에 몸이 몹시 아팠던 이종률씨는 많이 지쳐 보인다. 짐도 많이 졌고 눈도 많아서 그럴 것이다. 길이 멀어 속도를 낼 필요가 있었다. 배낭의 하중에 견디어 내어야 하는데 지체하면 하중은 자꾸 더 걸릴 것이다. 월성치까지는 내가 속도를 내어 치고 내려갔다. 월성치까지 줄곧 내리막이다가 다시 삿갓봉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봉우리를 몇 개 오르 내리지만 막상 삿갓봉 정상은 살짝 비켜간다. 오후 3:40분 경에 삿갓봉을 넘어선다. 그리고 나타나는 삿갓골재도 사거리 안부다. 그 안부에서 얼마간 가다보면 헬기장이 나오고 작은 봉우리를 몇 개 넘어 이제 본격적으로 무룡산으로 오르게 된다. 아마 덕유산에서는 무룡산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가? 또 예전에 진짜 덕유산은 이 무룡산에서 빼재넘어 덕유삼봉산까지를 덕유산이라 했다고한다. 무룡산 오르는 길에 설원은 함껏 겨울 설산의 멋을 살려준다.
나무가지가지마다 설화가 만발이고 온통의 백설의 천지이다. 명산이라 등산객들도 많이 보인다. 너무 아름다워 모두들 사진촬영한다고 난리친다. 맨 앞에 선 박광태는 진도를 내겠다고 달려 가 나, 이종률과는 제법 많이 거리가 떨어져서 저 멀리에 개미같이 가고 있다. 오후 4:50분에 무룡산 정상에 선다. 무룡산(1,492km)정상에 있는 '남덕유 7.1km 향적봉 8.9km' 이라는 이정표로 보아, 무룡산이 바로 덕유산 주능선의 중간정도로 보면 맞을 것이다. 무룡산 지나 내리막길에 내려서서는 부드러운 능선을 한참 간다. 덕유능선인 대간줄기는 멋들어지게 뻗어나아가 있다. 거대한 산줄기이다. 아마 지리산 주능선, 소백산 주능선과 함께 난형난제일 것이다. 무룡산 지나 솟은 높은 봉우리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박광태가 먼저가고 내가 두 번째로 가고 이종률씨가 뒤에서 따라오기로 했다. 시간이 지체되니 먼저 가서 막영구치고 취사해야 할 것 같았다. 동엽령으로 길게 내려서는 마지막 봉우리에서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어젯밤 덕유교육원 야영장에서 한잔 술에 취해 있을 때 보았던 보름달이 불끈 떠올랐다. 우리는 계속 내려가다가 결국은 어둠속에서 선두 박광태와의 연락상태가 불량하여 중간에서 미아가 되고 만다. 길은 알지만 그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지고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박광태씨를 찾지 않고 우리만 갈수도 없고 동엽령이 어디인지도 완전히 모르겠고 아마 우리를 찾아 올 거라는 예상으로 잠깐 기다리다가 별 해결책이 없어 다시 걸음을 돌려 다시 높은 봉우리로 올라갔다. 거기서 불을 켜 들고 '한뫼'를 외치다가 저 멀리 산을 몇 개 넘은 곳에서 조그만 불빛이 보였다. 우리는 다시 외치고 저 멀리서는 불이 흔들렸다가 없어지고 하다가, 우리는 다시 우릴 찾으러 뒤돌아온 박광태를 만난다. 박광태를 따라간 동엽령은 예상보다 훨씬 멀었다. 동엽령은 제법 괜찮은 야영지였다. 다만 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바람이 거세었지만 모두 바람을 피해 취사를 하고 막영지를 점검하고 여유를 찾으면서 덕유의 밤을 맞았다. 하늘에 별도 떨어지고 피곤해 하던 이종률은 벌써 코를 골며 뻐들어지고 박광태와 나는 소주로 밤의 낭만을 즐길 때 덕유의 밤은 자꾸 깊어지면서 별들이 점점 우리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다음날 우리는 별로 서두름도 없이 아침먹고 출발준비를 하고 오후 9:10분에 출발한다. 동엽령에서는 서쪽은 무주 통안리이고, 동쪽은 거창 병곡리이다. 동엽령지나 작은 봉우리를 왼쪽에 두고 지나서 20여분 가면 동엽령삼거리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통안리 자연학습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여기서 칠연폭포는 약 3km다. 육십령에서 대간을 타려면 동엽령까지는 중간 탈출로가 용이하지 않다. 왜냐면 남덕유에서 영각사로 내려설수 있지만 다시 올라오려면 그만큼 힘들기에 그냥 동엽령까지 가서 통안으로 내려서는 것이 좋다. 덕유산은 전체가 상고대로 뒤덮혀 온가지 설경을 연출해 냈다. 해발 1300m이 넘는 수준의 고도로 계속 이어지는 덕유의 주능선은 그야말로 백설과 설화의 천지였다. 지난 여름에 이곳에 왔을 때는 덕유는 산나물과 원추리꽃의 천국이었던가? 하여튼 덕유는 풍성하고 느르고 여유가 넉넉함이 항상 우리를 푸근하게 한다. 계속해서 백암봉으로 내 달았다. 지난 하계훈련 때의 산모습과는 판이했다. 그때는 여름이었으니까.......... 산은 계절마다 여러가지 경치를 만들어 낸다. 백암봉에는 오전 10:30분에 올랐다. 여기서 부터는 덕유평전이고, 내 생각이지만 지리산의 세석평전보다 이곳이 한 수준 높은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곳이다. 왼쪽으로 가면 중봉, 덕유산정상 향적봉(남한 제4봉, 1614m)이고, 대간은 백암봉에서 오른쪽인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대간 쪽을 바라다 보니 멀리 귀봉,지봉이 보인다. 대봉과 투구봉갈림능선을 안보이는 것을 보니 엄청난 거리로 판단된다. 시간이 넉넉치 못한것 같아 서둘러 대간쪽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백암봉에서 우리는 갈라지게 된다. 박광태와 이종률은 개인 사정상 덕유평전을 지나 중봉지나 덕유산 정상,향적봉에 서고 무주구천동으로 나와 귀향하기로 하고, 나는 계속 대간종주를 해야 하므로 백암봉(덕유평전 시작점)에서 그들과 헤어져 오른쪽으로 틀어 대간을 타면서 빼재쪽으로 나아간다. 대간을 따라 북쪽으로 내 달리니 그 쪽은 나 밖에 없었다. 조금은 걱정이 되지만 이제까지 닦아온 산행력이 있어 큰 걱정은 없었다. 대간의 마루금은 엄청난 눈이 쌓여 있었다. 나는 몸무게가 76kg 정도되어 한번씩 눈속에 깊이 빠져 발을 빼내는데 그때마다 힘이 쭉쭉 빠졌다. 작은 바위군이 있다는 상여듬도 눈에 덮여 알수 없었고 눈과 씨름하면서 봉우리 하나 넘어 두번째 봉우리에 오른다. 이 곳이 귀봉이다. 백암봉에서 한참 걸어왔다 싶다. 눈 때문에 힘이 많이도 빠졌다. 중간에 반갑게도 한사람 만났지만 코스를 묻기 위해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으니 "저는 거제도에서 왔습니다."해서 더 이상 설명하고 얘기할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눈이 많이 쌓여 힘이 몇배나 더 드는 것 같다. 귀봉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니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시간은 12:40분이다. 송계사 갈림길이다. 이정표엔 '덕유산 3.5km,지봉 2.3 km,송계사 3.9km'라고 적혀있다. 계속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가다 오후 1:10분에 싸리듬재 안부에 닿는다. 이 곳에서 왼쪽으로 백련사로 빠질 수 있다. 여기서 부터는 대간길에는 '등산로 아님'이라고 쓰여있고 대간에 눈이 깊이 쌓여 있어 보통 애를 먹는 것이 아니다.
몇일 전에 엄청나게 내린 눈이 쌓였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어 눈들이 불쑥 올라온 대간마루금에 모두 모였다. 아직 덜 굳어져 대간을 밟으니 다리가 심하게 빠진다. 그렇다고 대간마루금을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도 없다. 대간을 벗어나면 나무가 뒤엉켜 더 힘이 드니 다시 대간마루금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한발에 힘이 실리면 여지없이 깊이 빠져버리고 그 다리를 빼자니 엄청난 힘이 든다. 진도가 전혀 나지 않는다. 오르다 오르다 눈에 다리가 빠지고 빼고 하다 지쳐버리고 만다. 시간은 4시로 치달리는데 산행진도는 자꾸 더디다. 한 순간 위기의식이 돌았다. 계속 눈이 이런 식으로 쌓여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겠구나 싶었다. 어쨋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고 빼재까지의 진도는 대충 알고 있으므로 여기서 쉽게 포기하고 백련사나 송계사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한참의 오르막을 다 올라가서 그대로 누워 가쁜 숨을 내쉬고 정신을 차려보니 헬기장이었다. 눈속에 누워 쓰려져 있어도 땀은 비오듯이 흐른다. 전망은 트였지만 앞에 더 큰 정상이 또 있었다. 계속 내달렸다. 그 곳이 지봉(1302.2m)이었다.
지봉 정상은 넓지 않지만 동쪽이 막힘이 없고 서쪽으로 뎍유평전서부터 대간 줄기와 귀봉 밑의 산불감시초소도 보이고 싸리듬재 이정표와 바로 앞 헬기장과 대봉까지 잘 보인다. 어쨋든 대봉만 가면 되겠지 생각해 보지만 벌써 체력은 많이 소진되어 있어 긴장감이 돌았다. 아직 이런 눈과의 시간다툼한 경험이 없는 편이었다. 설악이나 지리에서 눈하고 싸움은 해봤지만 이런 긴코스에 혼자서 시간다투는 산행은 아니었었다. 별 방법이 없다. 그냥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죽으나 사나 가야한다.
대봉 가는 도중 대봉 거의 다가서 왼쪽으로 투구봉으로 능선이 갈라지면서 그 능선이 더 큰 능선 같지만 대간은 아닌 것이다. 오른쪽으로 대간을 타고 달려 대봉에 서지만 문제는 심각하다. 빼재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봉에서 시간은 5:15분을 가리킨다. 대봉 정상(1190m)은 잡목숲이라 전망이 없고 내려서는 길도 급경사다. 정신없이 내려달리다 보니 편평한 안부다. 왼쪽 계곡인 신바람골로 무주군 삼오정쪽에서 올라온 임도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거창 절골쪽에서 올라온 임도가 보이나 대간 마루금을 넘어 연결되지는 않았다. 이제 어두워 진다. 차량지원조 이은경은 오후 4시쯤 내가 도착하는 걸로 알고 그때부터 기다릴건데 걱정이 되었다. 아마 어떤 조치를 취할 것만 같았다. 거의 탈진 상태로 어둑어둑한 산길을 계속 치고 있는데 신풍령휴게소방면에서 어렴풋이 '야호'하는 소리가 두번 들려왔다. 나를 찾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같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헤드랜턴을 꺼내 머리에 쓰고 밑에서 나를 보게끔 하고는 막 내달렸다. 왠지 힘이 좀 나기 시작했다. 빼재는 만만치 않았다. 봉우리의 연속이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몇개나 오르내린 후 절벽이 나타났다. 바로 밑에가 빼재였다. 이 절개지에서 이번 대간은 끝난다. 길을 낸다고 대간이 끊겨 나간 것이다. 도로 절개지에서 오른쪽 임도를 타고 내려서면 빼재다. 이곳은 '수령' '삼오정고개' '신풍령'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름은 빼재이다. 본래 이 고개 부근에는 사냥군과 도적들이 많아 그들이 잡아 먹은 동물뼈가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해서 뼈재라고 했다. 뼈재가 경상도 발음으로 빼재가 되었는데 이 고개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면서 빼어날 수(秀)자를 쓴 것이다. 빼재의 또 다른 이름 신풍령은 추풍령을 본 떠 바람도 쉬어넘는 새로운 고개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고 상오정고개는 고갯마루 북쪽 무주에 있는 상오정마을에서 빌려와 붙인 것이다.
빼재에 내려와 시간은 보니 6:57분이니 7시인 셈이다. 총 산행시간은 9시간이나 되었다. 산행 중에 제대로 쉬어 본적이 없으니 힘든 산행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겨울에는 눈 때문에 산행에 심각한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상식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산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풍령에 떨어져 추운 날씨였지만 주차장 얼음판 위에 그대로 드러누워버렸다. 혼자서 힘든 산행을 해냈다는 성취감과 포만감이 추위와 함께 온몸을 감쌌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고 처음 경험한 위험한 산행이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 모레로 예정된 다음 구간은 다음 주말까지 미루어야 겠다. 콘디션도 별로고 할일도 많이 있다. 어쨌든 힘든 구간은 무사히 넘긴 셈이다.
이제부터는 경부고속도로 타고 김천 방향으로 간다. 88고속도로보다 더 빠를지는 모르지만 자꾸 대간은 김천쪽으로 올라오고 또 88고속도로 쪽은 귀향할 때 너무 복잡해서 그렇다. 내일이 한뫼산악회 정기산행으로 백두대간 우두령-궤방령 구간을 하기 때문에 미리 가서 지난 번 구간을 연결하는 것이다.
대덕에서 대간 쪽으로 붙어 덕산재에 올라가서 지원조 이은경씨한테 확인시킨 후 다시 돌아나와 관기를 돌아서 소사고개로 가서 중간 만나는 지점을 확인시킨 후 다시 돌아나와 빼재쪽으로 달렸다. 벌써 시간이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원조 혼자서 지도보고 픽업지점을 찾아갈 수 있으면 정말 좋을건대..............전번 동엽령-빼재구간에서도 10시에나 출발해서 무척 고생했듯이 걱정이 앞섰다. 빼재쪽으로 올라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빼재(수령,신풍령,상오정재)오르막에는 빙판이 그대로 있었다. 마침 주말에 한파가 엄습해서 기온이 밤새 영하권으로 떨어지고 눈이 와서 전부 결빙된 상태였다. 가까스로 빼재에는 도착했지만 이은경씨 혼자 내려보낸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랬지만 대간이 더 급했던지 나는 빼재에 내리고는 그냥 대간에 붙기 시작했다. 그때 시간이 벌써 10: 25분이었다. 오늘도 조금 문제가 있겠구나 싶었다. 지원조 이은경씨가 걱정이 되었지만 신풍령휴게소 내외분을 잘 아니까 해결책이 있을지 싶었다. 들머리 올라붙기전에 벌써 빙판에 한번 된통 넘어져서 오른쪽 무릎이 쩍뚝거릴 정도로 통증이 왔다. 급히 대간쪽으로 올라 붙었다. 빼재도로에서 돌무더기 비탈을 조심스럽게 올라 바로 대간이다. 지난 번에 왔던 폭설에 다시 눈이 많이 내려 눈이 2단계로 층을 이루고 있었다. 더군다나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거의 전방시야는 가려진 상태였다. 잘못하면 오늘도 고생심하게 하겠구나 싶어 처음부터 막 내달았다. 날씨도 영하권이라 매우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구간을 쳐야한다. 아니면 다시 와야 하기때문에 반드시 오늘 쳐야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이 산행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다. 어떤 업이 있었던 걸까? 수령봉가기 전에 작은 바위가 있다하고 그 바위에 올라서면 덕유삼봉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가스로 전방시계는 제로다. 독도와 감각과 경험으로 가는 것이다. 수령봉지나 된세여재지나면 가스가 차있는 상태에서 덕유삼봉산의 전면 바위군이 간혹 모습을 내비채면서 눈속에서 사투를 벌이면서 시간에 쫓기는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어차피 이 구간은 겨울철에는 난구간이다. 암봉구간이기 때문이다. 눈은 점점 더 굵어지고 바위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날씨는 고도가 높아질 수록 점점 더 추워진다. 된세여재를 지나면서 덕유삼봉산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눈때문에 등산로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독도력과 감각만이 희망이다. 몇번인가 가다가 이길이 아닌 것같다하고 다시 되돌아나오면 역시 옳았다. 그동안의 경험에서 나온 감각은 무서운 것이었다. 오늘은 갈길이 멀고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한치의 잘못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길이 사라진 잡목숲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서 조금 오르다가 갑자기 대간은 능선을 버리고 밑으로 내리 솥아진다. 한참 떨어져 다시 오른쪽으로 개울건너 트래버스해서 길은 다시 찾으면 이제 다시 뚜렷한 대간길을 만나고 오르막이 심해지면서 덕유삼봉산으로 오른다. 그러기를 한 30여분 눈발속에 갑자기 산의 정상,그리고 돌무더기에 비석, 덕유삼봉산...............옛날에는 여기 덕유삼봉산에서 부터 무룡산까지를 덕유산이라 불렀다 한다.
덕유삼봉산지나 계속 가지만 악천후다. 손을 얼어붙고 눈발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암봉구간에서는 위험하지만 그래도 잘도잘도 통과해서 지나간다. 계속가다보면 갑자기 또 능선을 버리고 밑으로 솥아져야 한다. 그 고도는 엄청나다. 눈이 있으니까 망정이지 이건 눈속에 묻혀 굴어내려오는 형상이다. 그렇게 소사고개(도마치)로 내려간다. 30-40분 비탈과 씨름하면 능선 한가운데 묘 한기가 있고 대간 마루금을 거의 파먹은 밭이 있다. 그 밭을 지나 조금 내려오면 엄청난 규모의 배추밭이다. 이 배추밭에도 중간에 분수령의 원리는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어마어마한 고냉지 채소밭을 한참만에 통과하내 아래 동네 민가마당에 서 있는 차,경북 1오 2460,이은경씨의 차다. 소사고개에 1:40분에 내려서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날씨는 그저 그렇다. 빼재 출발한지 3시간 15분만이니 딴에는 죽자사자 달려 온 것이다. 소사고개 민가 구멍가게에서 컵라면과 계란으로 요기를 하고 또 출발해야 했다. 거리 상으로는 아직 반이 아니다. 그냥 이대로 끝내고 다음에 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돼는 것이다. 소사고개는 고도가 700미터 내외의 고지대이지만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구릉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 백두대간을 따르게 되어 있는 도경계 또한 밋밋한 흐름의 산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마루금을 벗어나 무풍면 덕지리 부흥동으로 쳐져 있다. 신라와 백제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에도 경계는 소사고개가 아니라 덕유삼봉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 즉 나제통문을 경계로 한 설천면과 무풍면이었다. 무풍면이 전라도에 속해 있으면서도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있는 것은 소사고개가 고개로서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소사고개는 고갯마루에 마을이 들어설 만큼 터가 여유가 있었고 그러한 연유로 강원도에나 있을 법한 고랭지 채소밭이 곳곳에 만들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2:15분에 나는 소사고개를 뒤로하고 다시 대덕삼도봉과 대덕산을 넘어 덕산재를 행해서 출발이다. 아직 반도 못 온 것이다. 언덕길 올라서니 밭이다. 다시 밭으로 올라붙으니 멀리 대덕삼도봉이 알프스 같은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위에는 하얗다. 저걸 오늘 쳐야한다. 그러면 끝이다. 오늘 무사해야 내일 한뫼산악회원들을 김천에서 만나 황악산구간을 치는 것이다. 오늘이 문제다. 긴 밭을 지나가니 조그만 숲으로 들어가서 지나보면 오른쪽으로 엄청난 넓이로 땅을 허물어 놓았다. 그러니 대간은 허물어진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지나가게 된다. 다시 왼쪽 소사분교쪽에서 올라오는 시멘트포장길을 만나고 그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왼쪽은 목장지대이고 목장길이 계속 목장 오른쪽으로 이어져 올라간다. 대간 능선이 전북과 경남의 도계와 일치하지 않는 구간이다. 도계는 삼도봉 넘어 급사면 비탈을 내려오다가 북쪽 부흥동 도계다리에서 분교 북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서 대덕삼도봉에서 대간능선과 다시 만난다. 언뜻 보면 오른쪽 건너 뛴 곳으로 대간 능선이 이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아니다. 지나고 보면 독도 하여 지나온 길이 바로 대간인 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밭을 지나 리본들이 늘어져 있고 이제 본격적인 산길이다. 왼쪽에 있는 큰 목장을 끼고 독도와 표식 기를 잘 찾아 오른쪽 산길을 찾아 올라야 대간을 바로 찾는 것이다. 상당히 애매한 길이지만 대간이다. 목장도로타고 오르다가 길은 오른쪽으로 넘어가고 대간 길은 왼쪽 낙엽송 밭으로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 능선을 따라 넘어가야 한다. 이 능선을 넘어서면 묘가 하나있다. 능선에 붙어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 한참 이어지지만 올라갈수록 전망이 트이고 쉬지 않고 오르막을 올라치면 드디어 눈에 발에 빠지기 시작하며 힘이 많이 빠졌다. 하루에 너무 멀리 왔는가? 아니면 눈 때문에 힘이 너무 소진되었는가? 참아야 한다. 어차피 이건 넘어야 하는 길이다. 이게 나의 업보인 것이다. 대덕삼도봉의 능선은 눈이 많았다. 독도가 많이 어려웠지만 독도와 감각, 그리고 경험으로 계속 길을 더듬어 나갔다. 대덕삼도봉 능선은 억새 밭이었지만 가스와 혹한 그리고 눈보라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다. 북동쪽으로 올라오던 길이 북서로 크게 꺾이며 심한 잡목에 내리막길이었다. 심하게 떨어졌다가는 다시 긴 오르막이 이어졌다. 대덕삼도봉에서- 대덕산까지는 평상시에 꼬박 30분을 걷는다 했는데 이건 1시간을 넘게 걸어도 대덕산은 보이지 않는다. 눈덮힌 억새밭을 걷고 걸어 드디어 넓은 헬기장이 있는 대덕산에 선다. 여기서 잘해야하는데 앞이 안보이고 너무나 추워서 왼쪽길로 들지 못하고 오른쪽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래도 잘못가도 저 멀리 덕산재가 보이니 내려가면 되겠지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길은 점점 낭떠러지성이 되었고 다시 돌아가려니 힘이 빠져 이젠 틀렸다. 계속 갔다. 눈이 허리까지 빠지고 저 앞에 뚜렸이 보이는 대간능선이 보이니 그리고 가면 되겠지 하지만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이제는 힘의 싸움이다. 지칠대로 지쳤지만 허리까지 빠지는 눈과 잡목수풀과 싸우며 계속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1시간 쯤 싸우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하는 수준까지 왔다. 머리를 써야했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저멀리 보이는 대간능선으로 크래버스를 시도했다. 계속 크래버스해 댔다. 6시 다되어 드디어 극적으로 덕산재로 내려서는 길을 찾았고 백두대간 표식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힘을 내어 내려갔다. 덕산재로 떨어지는 임도의 끝을 내려서면서도 가시에 얼굴을 긁히면서 덕산재로 내려섰다. 약속한 시간보다 3시간 가량 지났다. 시간은 저녁 6:15분이었다. 30번 국도가 넘는 덕산재에는 쌍방울주유소와 휴게소가 있다. 이은경씨는 기다리다 지쳐 차안에서 자고 있었다. 덕산재를 뒤에 두고 김천으로 간다. 오늘은 김천에서 자는 것이다. 내일 한뫼산악회원들과 만나기 위해서다. 힘이 많이 빠졌다. 힘이 들어 허거적거리면서 우리는 김천으로 나왔다. 밤이었다. 김천시내 여관에 들어서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힘을 다시 추스린 것은 1시간쯤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