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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공휘불비파(김불비,김수광,김석공,김맹손,김중손,김말손)비문 등
1. 正憲大夫吏曹判書愼黙齋金公遺墟碑銘 정헌대부 이조판 서 신묵재 김공(김불비) 유허비명
2.
通訓大夫奉常寺正喚惺軒金公墓道碑銘 통훈대부 봉상시정 환성헌 김공(김수광) 묘도비명
3. 奉常寺正遺事 봉상사정(김수광)
유사(1450년 문과)
4. 兩司獻納喚惺軒墓誌 양사 헌납 환성헌(김수광) 묘지
5. 翰林先祖 諱秀光 行蹟
<鮮王朝實錄에서 拔萃> (한림선조(김수광) 행적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
6. 通訓大夫行
珍原縣監羅州鎭 管兵馬節制都尉公墓碑銘 통훈대부 행진원현감 나주진관 병마절제도위공 묘비명(김석공,1463~1535)
7.
將仕郞公墓碑銘 장사랑공 묘비명(김맹손,1478~1502)
8. 山南公遺事 산남공 유사(김중손)
9.
參奉公遺事 참봉공 유사(김말손)
正憲大夫吏曹判書愼黙齋金公遺墟碑銘
□정헌대부 이조판서 신묵재 김공 유허비명(김불비)
원문 ; 1997년(정축) 판서공휘불비파보
해석 ; 2006. 10. 23. 金順大
維檜山之東面琴山里舊號金洞 金海金氏之舊庄而其先 有正憲大夫吏曹判書公 實爲肇基垂統之祖也 公諱不比 號愼黙齋 駕洛之裔而新羅大角干開國公庾信 其著祖也
회산의 동면 금산리는 옛날에 금동이라 불렀고 김해김씨의 고장으로서, 그 조상에 정헌대부 이조판서공이 계셨으니, 실로 기초를 확립하고 좋은 전통을 드리운 조상이시다. 공의 휘는 불비이고 호는 신묵재이며 가락국의 후예로서 신라 대각간 개국공 유신은 그의 훌륭한 조상이다.
其世 當麗末鮮初而生卒之歲 佚而無傳則其事行踐歷之祥 幷無得以考焉 惟見於譜乘者 有曰嘗師圃隱鄭先生 聞性理之學 歷官自奉常大夫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成均館祭酒兼議郞選西海道按廉使 超遷至吏曹判書云而他無所著錄則舊籍之踈略而文獻之杞宋 緯可慨也
휘 불비께서 계셨던 때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해당되어 태어나시고 돌아가신 해의 기록이 없어지고 전하지 아니하니 그 활동과 이력을 자세하게 아울러 고증할 수 없고 다만 족보에 나타난 것을 보니 적혀있기를, 일찍이 포은 정선생(정몽주)을 스승으로 섬겨서 성리학을 배우셨고, 벼슬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성균관 제주 겸 의랑선 서해도 안렴사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이조판서까지 역임하셨다고 하나 다른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옛 문서에는 개략적인 것만 적혀있고 문헌이 부족한 것이 한탄스럽다.
惟因此而有可推而知者 盖從師大賢 講明義理之原則其學術之正 蘊抱之重 可以見矣 歷踐淸顯而位至卿宰則其才器之偉 謨猷之密 可以見矣
오직 이로 인해 추측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대개 어질고 훌륭한 분을 스승으로 삼고 쫓아 의리의 근본을 강론해서 밝히니 그 학술의 바름과 가슴속의 깊이 품은 재주나 포부의 소중함을 볼 수 있고, 청환(승진이 유망한 벼슬)과 현직(중요한 직위)을 두루 지내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니, 그 재주와 기량의 위대함과 광범위한 계획의 세밀함을 볼 수 있다.
宜其有功業文章之混耀 可稱而不少 槩見者 不惟經亂之餘史多闕略 抑亦當鼎革之際 事多難處而跡有難安
마땅히 그 공덕과 업적 및 문장의 빛남을 칭찬할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난리를 겪지 않고 남아있는 사료이나 생략된 것이 많고 또한 역사의 변혁(난리나 전쟁)이 있어서 곤란한 일을 당하여 그 유적 또한 간직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故 雖黽俛供職 欲孝寧武之愚 沈晦以免患而不欲以功名 自表見故 無得以稱者歟 觀於愼黙之號而可知其意也
비록 힘써 일하고 직무를 성실히 행하나 나라가 어지러우면 일부러 어리석은 척하여서[1]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화를 면하고,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지 않았다 해서 자랑할 것이 없었겠는가. 신묵의 호에서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1]寧武憂; 정치가 잘못되어 나라가 어지러우면 일부러 어리석은 척하는 것
是則其無所傳者 益見其不可及而亦奚病哉 尙論者 以此求之而庶可以得公矣 其後子姓 承襲厥緖 世不隕聞
이러하니 전해지는 것이 없더라도 그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더 볼 수만 있다면 또 무슨 걱정을 하리오. 이를 논하는 자가 그것을 찾는다면 거의 모두가 공(휘불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손이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대대로 명망이 끊어지지 않았다.
子秀光 號喚惺軒 文科獻納 以淸直 著 淑光 正言 啓光 牧使 益光 郡守 孫男錫貢 縣監 錫根 參奉 錫夏 進士 錫徵 奉事 錫玄 縣監
아들 수광(1450년 문과)의 호는 환성헌이니 문과 헌납[1]을 지냈는데 청빈하고 정직한 것으로 소문났고, 숙광은 정언, 계광은 목사, 익광은 군수, 손자 석공(1463~1535)은 현감, 석근은 참봉, 석하는 진사, 석징은 봉사, 석현은 현감을 각각 지냈다.
[1]세조실록 1463년 윤7월6일 ; 以宋益孫爲礪山君, 金秀光守司諫院獻納, 崔灝司憲持平, 金仁民、權衡、金命中、李尹孫、(何)〔河〕吉之、趙秋、柳季孫、申自繩、趙安孝兼司憲執義, 任淑、權體、尹師晳、閔冲源兼司憲掌令, 權徵、李鍾山、朴崇質、金係錦、沈山甫兼司憲持平, 將分遣諸道, 糾檢號牌事也。 惟平安、咸吉、江原、黃海道以年歉不遣。
以下 甚繁衍而散居各邑 至今二十餘世 皆謹守遺範 久而不替 豈非公積累者 厚而餘陰之長耶
그 아래는 너무 번성해서 각 마을에 흩어져 살았고 지금 20여세(世)에 이르렀다. 모두가 삼가 조상들이 남긴 법도를 지켜 오래도록 쇠퇴하지 아니하니 어찌 공이 쌓은 것이 두텁고 조상의 음덕이 컸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公墓 在金海之居叱里云而未得其徵故 設壇於此 享之而諸後孫 又懼公之遺蹟 久而益泯乃謨伐石表其遺墟 倡議經紀者 其冑孫正煥與其族柱瑢昌熙 特捐巨貲者 性斗 述事請余文者 相福東卨
공의 묘는 김해 거질리에 있다고 하나 그 증거를 찾지 못하여 여기에 단을 만들어서 향사를 지내고 또 여러 후손들이 공의 유적이 오래되어서 더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이에 유허비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의견을 내고 추진한 사람은 주손 정환과 일족 주용, 창희고, 거액의 돈을 기부한 자는 성두고, 사적을 기술하기 위해서 나에게 비문을 청한 자는 상복, 동설이다.
余感其義 不能辭 爲之叙 且銘曰
내가 그 뜻에 감동해서 사양하지 아니하고 서문을 짓고 또 새겨서 가로되,
學得圃老之傳兮 才兼文武之全兮 歷踐淸要而秉國銓兮 宜有勳業之赫焉兮 遭値鼎革而事多難兮 沈晦處愚而志實艱兮
학문은 포은선생에게서 전하여 받았고, 재주는 문무를 전부 겸하였도다. 유망한 벼슬과 요직을 두루 지내고, 나라시험(과거)의 감독관을 맡았으니 마땅히 공로가 혁혁함이었도다. 혁명(고려멸망)을 만나 일에 어려움이 많았고, 앞날이 암울하여 어리석음에 처했으나 의지는 실로 어려웠도다.
矧經滄桑之屢遷兮 杞宋莫徵固其然兮 惟其德厚而流光兮 驗餘蔭之孔長兮 眷言金洞之梓桑兮 留精彩於數百星霜兮 何恨其蹟之莫詳兮 令德長存不可忘兮
하물며 상전벽해의 변천을 여러 번 겪었기에 문헌이 부족해서 진실로 그런 것을 고증하지 못하였도다. 다만 덕이 후해서 흐르는 빛이여 조상의 음덕이 큼을 경험하였도다. 금동의 고향을 못 잊어 그리워하며 말하노라. 정묘한 광채는 수백년에 남겼도다. 그 사적의 소상하지 못함을 한탄하지 말고 덕을 길이 보전해서 잊을 수 없게 하라.
己未之歲仲夏 花山 權龍鉉 撰
기미년(1979년) 5월에 화산 권용현 지음
通訓大夫奉常寺正喚惺軒金公墓道碑銘
□통훈대부 봉상시정 환성헌 김공 묘도비명(김수광,1450년 문과)
[1]조선방목에 의하면 문종(文宗) 즉위년(경오, 1450년),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합격으로 기록되어 되어있음.
戚君金東卨 與其族相福 袖正言李公宅煥遺事及寒暄堂金先生墓誌 涉遠路 訪余于達句寓舍曰吾先祖獻納公冠屨之藏 在昌原郡東白月山頭臺峯負乾原 舊有碣 歲久磨滅 亦無記陰故 冑孫正煥 餘諸族 合謀改竪 願吾座 惠以一言銘之 余雖非其人 讀其誌若遺事 皆實錄也 豈可終辭哉
먼 인척인 김동설이 그의 종족인 김상복과 같이 소매속에 정언 이택환[1]의 유사(휘수광에 대한 것)와 한훤당 김굉필의 묘지(휘수광에 대한 것)를 넣어 가지고 먼 길을 달려와 나에게 찾아와서 조리있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이신 헌납공의 묘소가 창원군 동쪽의 백월산 꼭대기 봉우리의 건좌 언덕에 있고, 옛 묘갈이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닳아 없어지고 또 비음(묘비 뒷면의 글)이 없으니 주손인 김정환이 여러 종친들과 같이 계획하여 다시 세우려고 하니 원하건대 나에게 한마디 새길 말을 해 달라.’고 하여 나는 비록 그럴 만한 사람은 못되나 그 묘지와 유사를 읽어 보니 모두 사실이니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1] 이택환(李宅煥) 庚戌1850생, 고종(高宗) 19년(임오, 1882년), 증광시(增廣試) 병과38(丙科38)
公諱秀光 字天章 號喚惺軒 系出金海駕洛國首露王之後 知羅朝 大角干諱庾信 其遠祖也 厥後千載之間 滄桑 累變 文獻 無徵 世代之繼序 簪組之赫舃 不能攷詳 是爲慨恨也
공의 휘는 수광이요 자는 천장이고 호는 환성헌이며 김해에서 나온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이며 신라 때 대각간 휘유신은 그 먼 조상이다. 그 후 천년이 흐르는 동안에 세월이 많이 변하고 문헌에 증거가 없어 세대의 계속되는 순서와 벼슬한 이에 대한 빛나는 내용들을 상세히 알기가 불가능 하니 이것이 한이 된다.
考諱不比 號愼黙齋 奉常大夫典禮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 歷西海道按廉/使成均祭酒 累遷至吏曹判書
부친의 휘는 불비이고 호는 신묵재이며 봉상대부 전례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이었으며, 서해도 안렴사와 성균제주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여러번 임명되었다.
公 生長旅是父之家 其薰濡服翌者- 當何如而早遊權陽村之門 多所啓發 讀史 筆削大義 必法春秋 後得朱子綱目 自驗其識之正 聞人有善則喜而揚之 有過則勸而遷之
공(휘수광)이 임지를 옮겨다니는 부친의 집에서 자라며 그 기풍이 몸에 벼이고 권양촌[1]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여러 학문을 발전시키고 역사책을 읽으면 쓰고 삭제하는 기준을 반드시 춘추[2]에 따랐고, 그 후에 주자강목을 배워서 스스로 그 지식이 올바른가를 경험하고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기쁘게 하는 말을 듣더라도 너무 지나치면 그 자리를 피했다.
[1]권근(權近, 1352~140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보(溥)의 증손이다. 이 분과 휘수광을 동 시대 사람으로 본 것은 무리가 있다.
[2]春秋; 공자가 지었다는 중국고대의 역사책
平生 未嘗有疾言遽色 款接賓朋 置酒讌樂 商確古今 亹亹不倦 陽村 歎曰士別三日 刮目相對 吾於喚惺軒 見之矣
평생에 일찍이 말을 빨리하거나 얼굴색이 변하거나 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손님과 벗들을 사귀어 술로서 잔치를 베풀어 즐거워하고, 고금을 자상하게 살피시어 열심히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으시니, 권양촌이 감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선비를 3일 만에 보면 그 실력이 놀랄 만큼 향상되어 있다고 했는데 나는 환성헌에게서 그것을 보았느니라.’ 하였다.
宣陵造士 群彦 咸集 擢置公上第 出入槐院 同列 甚器重之 立朝以來 名動中外 專奉文書 由藝文春秋館兩司獻納 歷外除水原府使 至奉常寺正 皆優典也
선릉[1]에서 선비를 뽑을 때에 많은 선비들이 모였는데 공이 우등으로 뽑혔다. 괴원(승문원)에 출입하실 때 동료들이 아주 그를 중하게 여겼다. 조정에 들어온 이래로 이름을 안 밖으로 날렸다. 오로지 문서작성의 일에 전념하고 예문 춘추관과 양사헌납을 거쳐 외직으로서는 수원부사를 지내고 봉상시정까지 오르니 이는 모두 이 분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1]宣陵; 성종(1457∼1494)과 그의 계비인 貞顯王后(1462~1530)의 묘
見燕山之荒淫無度 解官歸鄕 昌之有金 自此始焉 自後 絶意進取 琴書自娛 以養閒修德 爲收楡之計 後徵以翰林院太學士 不就 以天年終 是在庚午也
연산군의 황음무도함을 보시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오니 창원에 사는 김씨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로 뜻과 벼슬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거문고를 뜯고 글을 쓰며 스스로 즐겁게 지내며 후손을 기르고 덕을 쌓으며 노후를 계획하셨다. 나중에 한림원 태학사를 내려도 나아가지 않으시고 천수를 다하시니 이 해가 경오년(1510년)이었다.
寒暄之誌 曰公 生而天資厚重 輔以學文 高明正大 正言之遺事 曰公 生長世家 以文章行誼 著聞於當世 於此 公之出處得正 行治異凡 皆可以知也
한훤당(김굉필)이 지은 묘지에 공이 나면서부터 자질이 의젓하시고 학문을 많이 하시여 현명하고 올바르다고 하였고, 정언(이택환)의 유사에 공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문학과 행동이 뛰어나 당시의 세상에 소문이 났었다고 하니 여기서 공의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고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일반 선비들과 달랐다는 것을 모두 짐작할 수 있다.
配淑夫人慶州崔氏 護軍淇之女 墓在金洞靑龍內艮坐 有表石 生二男 長錫貢 珍原縣監 次錫根 參奉
부인은 숙부인 경주최씨로서 호군을 지낸 최기의 따님이시며 묘소는 금동의 청룡내 간좌에 있고 표석도 있다.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은 석공으로 진원현감을 지냈고 차남은 석근인데 참봉을 지냈다.
錫貢男孟孫 將仕郞 仲孫 龍宮縣監 末孫 參奉 錫根男商孫 參議 孟孫男遇明 參奉 應明 縣監 弼明 奉事 仲孫男就明 生員將仕郞 河明文科 璡明僉使 末孫男翊明 禮賓寺主簿 載明通仕郞 商孫男郁明 文科 以下 繁不盡錄
석공의 아들 맹손은 장사랑을 지냈고, 중손은 용궁현감을 지냈고, 말손은 참봉을 지냈다. 석근의 이들 상손은 참의를 지냈고, 맹손의 아들인 우명은 참봉, 응명은 현감, 필명은 봉사를 각각 지냈고, 중손의 아들인 취명은 생원으로서 장사랑, 하명은 문과에 급제하고, 진명은 첨사를 지냈다. 말손의 아들인 익명은 예빈시 주부, 재명은 통사랑을 지냈고, 상손의 아들 욱명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하는 너무 많아 전부 기록할 수 없다.
系之以銘 銘曰 生于晟世 大振儒鐸 累入槐院 歷敭淸爵 適値昏朝 退臥林壑 擲彼榮利 任我耕鑿 考槃永矢 充然自得 月山明麓 精魄攸託 舊有石表 本無陰刻 今謀改樹敢闡厥德 誠孫 集力 墓道增色 爰銘不朽 昭視无極
이어서 새기니 새긴 내용은 밝은 세상에 태어나서 유가의 법도를 크게 떨쳤네. 여러번 괴원(승문원)에 들어가 높고 청빈한 벼슬을 지냈구나. 혼란한 조정을 만나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네. 영예와 이익을 버리고 밭갈고 나물캐며 살았다네. 모든 걸 영원히 맹세하니 충분히 그런 것이 스스로 이룬 것이라. 달빛 비친 산 기슭은 정령과 혼백이 서려있네. 옛날에는 비석이 있었으나 본래부터 비음이 없어 지금 이를 고치고자 하니 감히 그 덕을 널리 퍼지게 하네. 정성스런 후손이 힘을 모아 묘도를 새롭게 바꾸었네. 이에 이 새긴 것이 없어지지 말고 끝없이 영원토록 소상히 볼 수 있을 지어라.
歲己未榴花節 廣州 李能煥 謹撰
기미년(1979년) 류화절(7월) 광주 이능환 근찬
奉常寺正遺事
□봉상사정 유사(김수광,1450년 문과)
公諱 秀光 字天章 號喚惺軒 新羅大角干諱庾信之後也 本朝吏曹判書諱不比之子也 與宗室堤川君蒕 爲姻親也 夫人崔氏 大護軍淇女 亦慶州世家也
공의 휘는 수광으로 자는 천장이고 호는 환성헌이다. 신라 대각간 휘유신의 후예이고, 본 조선의 이조판서 휘불비의 아들로서 종실(조선 왕실의 종친)인 제천군 온[1]과는 인척이 되고, 부인 최씨는 대호군 기의 딸이시니 또한 경주의 세도있는 집안이다.
[1]堤川君蒕(1441∼1506); 태종->2자 효령대군 보(補, 1396~1486)->2자 서원군 (案의 女대신 立,1413~1475)->3자 제천군 온(蒕, 1441∼1506)으로서 휘수광과는 사돈간
公 生長世家 以文學行誼 著聞於當世 宣陵造士 群彦彙征 公 擇置上第 乃成化庚子試也
공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문학과 행동이 뛰어나 당시의 세상에 소문이 났었다. 선릉[1]에서 선비를 뽑을 때에 많은 선비들이 함께 다툴 때 공이 우등으로 뽑히니 이때가 성화 경자년(1480년)[2]의 시험이었다.
[1]宣陵; 성종(1457∼1494)과 그의 계비인 貞顯王后(1462~1530)의 묘
[2] 그렇다면 묘의 주인인 성종이 죽기 전에 선릉이 있었던 격이므로, 연도가 다른 사실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됨. 조선조 문과방목에는 1450년(문종 즉위 경오년,秋場) 식년시 정과급제자로 기록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원 실기를 찬할 때 국조방목을 보지 못한 것으로 추정됨.
出入槐院 同列 甚重之 歷剔兩司 屢遷至奉常寺正 見世子燕山之荒淫無度 解官懲毖 自京南遷于昌原山南居焉 昌之有金 自此始焉
괴원(승문원)에 출입하시니 동료들이 아주 그를 중하게 여겼다. 양사(사헌부와 사간원)를 역임하시고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봉상시정에 이르고, 세자 연산이 황음무도함을 보시고 관직에 있었던 것을 후회하시며 벼슬을 버리고 서울로부터 남쪽의 창원 산남으로 옮겨 사시니 창원에 있는 김씨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墓在府東白月山金洞乾坐原有表石而無他嬴 但曰文科奉常寺正金公之墓 鳴呼簡矣 聖人之書延陵季子之墓更無他辭 雖多 何以哉
묘소는 창원마을의 동쪽 백월산 금동 건좌의 언덕에 있고, 표석만 있고 다른 남은 것은 없으며 다만 문과 봉상시정 김공지묘라고만 씌여있다. 아! 너무 간단하구나. 성인(공자)이 연릉계자지묘라 쓰고[1] 다른 것은 쓰지 않았으니 비록 쓸 것은 많이 있었으나 어찌 할 수 없었다.
[1]공자가 연릉계자(延陵季子;오(吳)나라 공자(公子) 계찰(季札))의 묘비에 ‘연릉계자지묘(延陵季子之墓)’라고 썼다는 고사
世遠文殘 無以敬述其懿德 只據舊蹟中出處履歷而書之如此云爾
세대는 멀어지고 문중은 쇠잔하여 그 아름다운 덕을 다 말할 수 없고 다만 옛 유적 중에서 출처와 이력을 근거로 하여서 이와 같이 쓸 따름이다.
正言 星州 李宅煥 撰
정언 성주 이택환[1] 찬
[1] 이택환(李宅煥,1850~?) 고종(高宗) 19년(임오, 1882년), 증광시(增廣試) 병과
兩司獻納喚惺軒墓誌
□양사 헌납 환성헌 묘지(김수광,1450년 문과)
公諱 秀光 字天章 喚惺軒 其號也 金海人 金官國始祖首露王 前史 詳其所自出 以爲金卵 入金榼 從天而降 遂以金爲姓 傳十世末王仇衡 以其地 讓于新羅 子孫 皆從大角干 金庾信 乃其後也
공의 휘는 수광이고 자는 천장이며 환성헌은 그의 호이며 김해인이다. 금관국 시조 김수로왕은 역사책에 그의 탄생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금빛 알이 금빛 함속에 들어 있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니 드디어 김을 성으로 하고 10세 마지막 왕 구형에게 전해졌으나 구형왕이 그 땅을 신라에 주었다. 자손이 모두 대각간 김유신의 후예이고 김유신이 구형왕의 후손이다.
考諱不比奉常大夫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 遷西海度按廉使成均祭酒兼議郞 又遷吏曹判書
부친이신 휘불비는 봉상대부 전리총관 보문각직제학 지제교를 지내고 서해도 안렴사 성균관제주 겸 의랑에 옮겼으며 또 이조판서에 나아가셨다.
公 生而天資厚重 輔以學問 高明正大故 其發於議論 措諸事業 燁然可觀也
공이 나면서부터 자질이 의젓하시고 학문을 많이 하시여 현명하고 올발라 그 자신의 의견을 내어서 여러 일을 처리함에 있어 훌륭하셨던 것을 확실히 볼 수 있다.
早遊權陽村之門 讀史 筆削大義 必法春秋 後得朱子綱目 自驗其識之正 人有片善稱譽 惟恐不聞 先輩遺事 雖細 以爲難及 平生未嘗疾言遽色 有及於穢語
일찍이 권양촌[1]의 문하에 출입하여 역사책을 읽으시고, 기록과 삭제의 기준은 반드시 춘추[2]를 기준으로 하고, 뒤에 주자의 강목을 배워서 스스로 그 지식의 바름을 경험하시고, 남들이 한편으로 호의로서 칭찬을 하더라도 오직 두려워 듣지 않으시고, 선배등이 남기신 일들을 비록 작은 일이긴 하나 이를 따르기는 어렵다고 하였고, 평생에 일찍이 말을 빨리하거나 얼굴색이 변하며 더러운 말을 내지 아니하셨더라.
[1]권근(權近, 1352~140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보(溥)의 증손이다. 또한 권근은 1450년 경오년 식년시에 壯元을 한 권람(權擥,1416~1465)의 조부이다. 이 시험에서 휘수광은 尾末을 하였다고 서거정(1420∼1488)이 자신이 쓴 책인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적고 있다. <權翼平於庚午鄕會殿三試皆居魁金郡守秀光亦於鄕會殿三試皆居尾時人笑曰三場壯元古今多有三場爲尾天下必無>
아래 글에서 이 때 휘수광의 나이가 20 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1420년대 생으로서 권근이 사망한 후에 휘수광이 출생하게 되니 권근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2]春秋; 공자가 지었다는 중국고대의 역사책
對客置酒 商確古今 亹亹不倦 權陽村 歎曰士別三日 刮目相對 吾於喚惺軒 見之矣
손님을 대하여 술을 대접하고 고금을 자상하게 살피시어 열심히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으시니, 권양촌이 감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선비를 3일 만에 보면 그 실력이 놀랄 만큼 향상되어 있다고 했는데 나는 환성헌에게서 그것을 보았느니라.’ 하였다.
公自二十登科 名盖一世 立朝以來 專奉文書 歷外除 由藝文春秋館 至兩司獻納 人臣之極 解任來鄕 以琴歌飮博 自娛 後特拜翰林院太學士 不就
공이 20에 등과하여[1] 명망이 한 세상을 덮었다. 조정에 들어간 이래로 오로지 문서작성의 일에 전념하고 외직은 맡지 않아, 예문 춘추관으로부터 양사헌납에 이르니 신하의 도리를 다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거문고와 노래를 부르고 술을 들면서 스스로 즐겁게 지내고 후에 특별히 한림원태학사를 내려도 나아가지 않으셨다.
[1]조선방목에 의하면 문종(文宗) 즉위년(경오, 1450년), 식년시(式年試) 정과23(丁科23) 합격으로 나오니 이 때의 나이가 20대라면 1420년대 출생이 된다.
[2]세조실록 1463년 윤7월6일 ; 以宋益孫爲礪山君, 金秀光守司諫院獻納, 崔灝司憲持平, 金仁民、權衡、金命中、李尹孫、(何)〔河〕吉之、趙秋、柳季孫、申自繩、趙安孝兼司憲執義, 任淑、權體、尹師晳、閔冲源兼司憲掌令, 權徵、李鍾山、朴崇質、金係錦、沈山甫兼司憲持平, 將分遣諸道, 糾檢號牌事也。 惟平安、咸吉、江原、黃海道以年歉不遣。
公 娶慶州世家護軍崔淇之女 生二男 曰長錫貢 歲癸亥 以學行 遷參奉 出拜珍原縣監 次錫根 進士行參奉
공이 경주의 이름난 집안인 호군 최기의 딸에게 장가가시어 2남을 낳으시니 장자 석공(1463~1535)은 계해년(1503년)[1]에 학행으로써 참봉에 추천되고 진원현감에 나아가고 차남 석근은 진사로 참봉을 지냈다.
[1]따라서 이 글은 1503년 이후부터 김굉필이 졸한 1504년 사이에 작성된 것이라야 한다.
縣監長男孟孫參奉 生三男一女 長遇明 參奉 餘皆幼 次仲孫縣監 生三男二女 皆幼 季末孫參奉 生一男幼 進士男商孫參議 生一男幼 公 庚午 以疾不幸 葬于金洞辛坐之原
현감(휘석공)의 장남 맹손(1478~1502)[1] 참봉은 3남1녀를 낳으니 장자 우명(생졸년미상)은 참봉이고 나머지(應明,弼明,녀金熙 모두 생졸년미상)는 어리다. 차자 중손(생졸년미상) 현감은 3남2녀(就明;생졸년미상, 河明;1541~1611, 璡明;1571~1631, 녀崔彦淸,金世文;생졸년미상)[2]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고 막내 말손(생졸년미상) 참봉은 1남(翊明;생졸년미상)을 낳으니 어리다. 진사(휘석근)의 아드님인 상손(생졸년미상) 참의는 1남(郁明;생졸년미상)을 낳으니 어리다. 공(휘수광)이 경오(1510년)[3]에 불행하게도 병으로 별세하시니 금동 신좌의 언덕에 장례를 하였다.
[1]이 글은 1503년 이후부터 1504년 사이에 작성된 것이라야 하며 휘맹손이 졸한 후이다.
[2]보첩에 생졸년이 명기된 휘하명과 휘진명을 보면 생년이 김굉필 사망 후이다.
[3]김굉필은 사망 후의 일이 기록된 것을 보아 김굉필 찬이 아니거나 그 내용이 변개된 것 같다.
寒暄堂 金宏弼 撰
한훤당 김굉필[1] 찬
[1]김굉필(金宏弼)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翰林先祖(김수광)行蹟 <鮮王朝實錄에서 拔萃>
出處 :김희원족장의 아름다운 先賢의 얼 부록>
世祖七年辛巳(1461)八月戊辰朔庚午初三日; 세조7년(1461년) 8월 3일
禮曹正郞尹孝孫佐郞金秀光朴繼姓李仁堅等輪對; 예조정랑 윤효손, 예조좌랑 김수광, 박계성, 이인견 등이 차례로 대답하였다.
世祖八年壬午(1462)十月壬戌朔初一日; 세조8년(1462년) 10월 1일
全羅道經歷高台弼慶尙道都事金秀光來問安; 전라도 경력 고태필과 경상도 도사 김수광이 와서 문안하였다.
世祖九年癸未(1463)閏七月戊午朔癸亥初六日; 세조9년(1463년) 윤7월 6일
以宋益孫爲礪山君金秀光守司諫院獻納崔灝司憲持平金仁民權衡金命中李尹孫何吉之趙秋柳季孫申自繩趙安孝兼司憲執義任淑權體尹師晳閔冲源兼司憲掌令權徵李鍾山朴崇質金係錦沈山甫兼司憲持平; 송익순을 여산군으로, 김수광을 수 사간원 헌납으로, 최호를 사헌지평으로, 김인민, 권형, 김명중, 이윤손, 하길지, 조추, 류계손, 신자승, 조안효를 겸 사헌 집의로, 임숙, 권체, 윤사석, 민충원을 겸 사헌 장령으로, 권징, 이종산, 박숭질, 김계금, 심산보를 겸 사헌 지평으로 삼았다.
成宗十三年壬寅(1482)十一月乙未朔己酉十五日; 성종13년(1482년) 11월 15일
上御宣政殿洪應盧思愼李克培徐居正許琮李坡入侍成均館司藝金秀光等五人各講一書;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니 홍응, 노사신, 이극배, 서거정, 허종, 이파가 임금을 알현하였는데 성균관 사예 김수광 등 5인이 각각 책 한권씩을 강의하였다.
成宗十四年癸卯(1483)正月甲午朔辛丑初八日; 성종14년(1483년) 1월 8일
金秀光通訓司憲府執義; 김수광을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로 삼았다.
成宗十四年癸卯(1483)正月甲午朔庚申二十七日; 성종14년(1483년) 1월 27일
執義金秀光啓曰宗廟祭執事多而齋室甚窄又墻外閭閻甚逼如有火災則臣恐或驚動神靈矣旁近民舍撤去何如詩云於穆淸廟穆者深遠之意今宗廟無深遠之勢又南墻門路絶主山來脈甚不可也山川之氣不虧則子孫靈長萬世之業可占矣又宗廟位甚卑而仁政殿位甚高御此殿而受朝則鍾皷管籥之聲皆聞於宗廟大體未穩今修繕壽康宮臣願移御于此以昌德宮爲離宮永不復御何如; 해석생략 (대략 집의 김수광이 성종임금께 종묘와 재실의 정비와 확장을 건의하는 내용)
成宗十四年癸卯(1483)二月甲子朔癸酉初十日; 성종14년(1483년) 2월 10일
司憲府執義金秀光等來啓曰送行詩作冊韓明澮請於姜子平請幷鞫之不聽; 사헌부 집의 김수광 등이 와서 아뢰기를 “송행시를 책으로 만든 것은 한명회가 강자평에게 청한 것이니, 청컨대 한명회와 강자평을 국문하소서.” 하였으나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成宗十四年癸卯(1483)二月甲子朔丁丑十四日; 성종14년(1483년) 2월 14일
司憲府執義金秀光等來啓曰利老貪饕無厭之蕃妄庸無識皆不可用也之蕃蕃字與凡韻相近故時有戲稱朴之凡者據此俚語足知其爲人上不聽; 사헌부 집의 김수광 등이 와서 아뢰기를, “홍이로(공조참판)는 재물과 음식 탐내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박지번(호조참판)은 망령되고 용렬하고 무식하니, 다 기용해서는 안됩니다. 박지번의 --- 이하 생략 ---.” 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成宗十四年癸卯(1483)三月癸巳朔庚子初八日; 성종14년(1483년) 3월 8일
御經筵講訖執義金秀光正言金直孫啓曰爵賞至重孫舜孝陞正憲未幾又加崇政恐爲太過; (임금이) 경연에 나아갔다. 강연을 마치자 집의 김수광과 정언 김직손이 아뢰기를, “서작과 상사는 지극히 중요한데 손순효(공조판서)는 정헌대부에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숭정대부로 승진시키니,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하였다.
成宗十四年癸卯(1483)三月癸巳朔甲辰十二日; 성종14년(1483년) 3월 12일
御經筵講訖執義金秀光啓曰京中聽訟則其員非一同議斷決且在輦殼之下民之冤抑無多外方則一道守令公平者少故富强者請托以得勝貧殘者不獲自盡雖呈誤決移於他郡又如是如是而至于三則謂之三度得伸無所更改此民之冤抑益甚也臣意謂令監司擇守令公正者備三員決訟則三人之中必有公平者其弊不至此極也上曰其弊則果如是也然此事不可行也秀光及司諫柳自漢啓曰今當農月旱氣已甚壽康宮土木之役停寢何如上顧問左右, 領事鄭昌孫對曰壽康宮營繕不得不爲況民飢役而食之可也上曰予不待臺諫之言心有所未安然此役不得已也停役則材木必朽矣秀光曰當春農務最切材木雖朽不足惜也上曰材木本勞民轉輸今若腐朽而壽康之役終不得已則必復勞民此誠可慮也秀光曰歲豐而民食足則雖營百室何所不可哉上曰將問修理都監而處之; 해석생략 (대략 집의 김수광 등이 성종임금께 지방의 송사제도의 개선과 농사철에 가뭄이 극심하니 수강궁의 건축을 정지하자고 건의하는 내용)
成宗十四年癸卯(1483)三月癸巳朔庚戌十八日; 성종14년(1483년) 3월 18일
御經筵講訖執義金秀光啓曰今世子年齒甚少血氣未壯而日御書筵勞損氣體臣歷觀唐虞三代典樂敎冑子必優游涵泳養其中和之氣王宮之學又有暇日以敎灑掃應對之節請稽古禮依宗擧儀月置暇日以休養心體上問左右侍講官金宗直對曰此言甚不然學問之道不可少廢暫有止息則安於怠惰習以爲常臣則以爲非也秀光曰宗直之言徒以學問之方爲言耳未知國家長遠之慮而非愛重國家之重寶也宗直曰秀光之言徒以姑息而言耳涵養德性固其血脈非學問不能而學問之功必須自幼成習乃能有立他日國儲非學何爲秀光之言大無理也上曰宗直之言是矣; 해석생략 (대략 집의 김수광이 세자의 교육방법에 대하여 임금께 건의하면서, 김종직과 토론을 벌인 바 결국 임금이 김종직의 말을 들어 줌)
成宗十四年癸卯(1483)七月辛卯朔甲辰十四日; 성종14년(1483년) 7월 14일
右承旨成俔行護軍崔灝元行司直金貴枝前觀象監副正丁明道奉事梁孝舜繕工監正李尹孫敦寧府副正李壽稚弘文館副提學柳洵通禮院右通禮金敬祖司贍寺正盧好愼司饔院正尹慜奉常寺正李諿禮賓寺正辛肅濟用監正金秀光掌樂院正柳自漢尙衣院正金景光子壻弟姪中代加; 해석생략 (대략 제용감정 김수광 등은 그의 아들, 사위, 아우, 조카 중 한사람에게 대신 품계를 주어라. 예종임금이 승하한 국상 중에 수고한 신하들에게 논상을 하는 내용임.)
成宗二十年己酉(1489)二月己丑朔壬辰初四日; 성종20년(1489년) 2월 4일
刑曹正郞趙之瑞來啓曰臣以兼持平往江原道掌試鄕闈進士入試之日入門官平昌郡守金成慶報曰監司關文至此外面書試官開拆試官原州牧使金秀光襄陽府使柳自漢謂臣曰監司關文可開見否臣答曰見之何傷秀光拆而見之乃八佾賦與李愿歸盤谷詩題也秀光等語臣曰監司欲以公道選取自命題以送今以此試之何如臣曰我以御史爲掌試而來監司不宜命題安知此題於中路不爲他人所窺乎遂焚之卽出他題以試之臣竣事上京而秀光等疑監司嫌怒具由報監司實非監司所命題也監司囚成慶問關文所由來則乃儒生稱監司所送授方林驛吏以傳於入門官也臣於其時計不及此不卽擧劾請待罪傳曰御史在焉監司安得命題李陸必不爾也假如陸所爲爾棄而不推可乎然如之何其勿待罪之瑞慙謝而退; 해석생략 (대략 조지서가 강원도의 향시 시험 감독관이 되어 갔을 때, 이때의 입문관인 평창군수 김성경이 시험문제가 도착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시험문제가 든 봉투에 ‘시관은 뜯어보시오.’ 하고 적혀 있어 이때의 시관인 원주목사 김수광과 양양부사 유자한이 뜯어보고 그 제목대로 시험을 치려고 하자, 조지서가 이는 필히 감사가 시험문제를 냈을 것이니 시험문제를 다른 사람이 보았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불태워버리고 다른 문제를 내어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감사가 직접 낸 문제가 아니고 올바른 경위를 거쳐 나온 문제라 조지서가 자기가 잘못했다고 죄를 청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임금은 죄를 묻지 않았다는 내용.)
成宗二十四年癸丑(1493)三月丙寅朔乙亥初十日; 성종24년(1493년) 3월 10일
傳旨吏兵曹典祀官金秀光協律郞慶絍韓忠順贊者鄭旻左通禮鄭叔墀右通禮鄭蘭孫奉禮金靈雨司僕寺正朴林宗夾侍金守貞畿邑令李仁文權仲愷尹坡金悰耆民朴仲成代加一資執禮崔璡大祝趙文琡表沿沫祝史李復善李均齋郞李琚黃啓沃執尊盧公裕兪好仁捧俎官李懿孫趙穎閔訔金瑩李德洪黃厚仁掌牲令邊希達爵洗位李粹彦盥洗位柳應龍贊者閔琳謁者金崶李世英李管林贊引李孝篤尹承世奉常寺副正朴璟主簿閔景翼籍田令朴三吉奉靑箱官安晋生受俎官李守元禮曹正郞金淑貞李自健許輯佐郞南慄李大亨梁賀祭監韓謹姜諿注書宋千喜孫澍夾侍文賮耆民李昌文方山崔繼霖李春尹自賢安從仁魯忠金壽張仲老柳美崔子諸李永徐存徐好韓有才朴仲善朴長守孫七星金守卓典樂令朴O姜仲孫金福根雅樂令張得仁各加一資; 해석생략 (대략 이날의 선농제에 참여한 전사관 김수광 등에게 한 자급씩 올려주라는 내용임.)
通訓大夫行 珍原縣監羅州鎭 管兵馬節制都尉公墓碑銘
통훈대부 행진원현감 나주진관 병마절제도위공 묘비명(김석공,1463~1535)
公之先 駕洛金首露王之後 世居金海 考 通訓大夫奉常寺正秀光 妣 慶州世家護軍崔淇之女 天順癸未 生公
공의 선대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후예이며 김해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부친은 통훈대부 봉상시정 수광이요 모친은 경주세가 호군 최기의 딸이시니 천순 계미(1463년)에 공을 낳으셨다.
公諱錫貢 字圭甫 自少力學篤志 屢擧不中 遂不赴試 弘治甲子 以門蔭 拜典涓司別座 遷司宰監直長內瞻寺直長 陞拜軍資監主簿 出拜珍原縣監 解任還歸 若將終身
공의 휘는 석공이고 자는 규보이니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쓰고 뜻을 세웠다. 여러 번 벼슬에 추천되어도 나아가지 않고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홍치 갑자(1504년)에 문음[1]으로 전연사 별좌를 받아 사재감 직장 내첨시 직장으로 옮기시고 군자감 주부로 승진되고 진원현감을 받아 나아갔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순조롭게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
[1]門蔭;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친인척의 명망으로 벼슬길에 나아감
歲戊子 朝廷 特拜通禮院引儀 卽馳詣射恩 未幾 固辭來鄕 以鷹太管絃 爲娛
무자년(1528년)에 조정에서 특별히 통례원 인의를 내리니 곧 달려가서 감사히 사례하고 얼마 후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자유로이[1] 악기를 타며 스스로 즐기셨다.
[1]鷹太; 직역하면 사냥개와 사냥매
公娶 太宗恭定大王曾孫堤川君蒕之女 生三男二女 長男孟孫 娶 世宗大王之孫富林君湜之女 生三男一女 一男遇明 承仕郞集慶殿參奉 生一女幼 二男應明 生一女幼 三男弼明 生一女 適幼學姜璹 女 適司憲府監察金熙 生一女 適牧使沈彦光之子鉉
공(휘석공)이 태종공정대왕 증손 제천군 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으셨다. 장남 맹손(1478~1502)은 세종대왕의 손자인 부림군 식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으시니 1남 우명(생졸년미상)은 승사랑 집경전 참봉이고 1녀를 낳으니 어리고, 맹손의 2남 응명(생졸년미상)은 1녀를 낳으니 어리고 맹손의 3남 필명(생졸년미상)은 1녀를 낳으니 유학 강숙에게 시집가고 맹손의 따님은 사헌부감찰 김희에게 시집가서 1녀를 낳아 목사 심언광의 아들 현에게 시집갔다.
次男仲孫 通訓大夫前行龍宮縣監 娶進士郭承華女 生三男一女 男就明 承仕郞 生三男一女 長男彦忠 次男彦孝 末男彦悌 女 幼 女 適幼學崔彦淸 後娶生員金銓之女 生二男一女 長男河明 生一男彦世 次璡明 生一男彦信 女 適節度使金鐸之子應文 一女 適判官河泓 生五男二女 長艦萬戶 次航 次{舟+發} 內禁衛 次{舟+晃} 次{舟+玄} 一女 適郡守崔瑞麟子弘毅 末女 適固城縣令李裕
차남 중손(생졸년미상)은 통훈대부로서 그 전에 행용궁현감을 지냈다. 진사 곽승화의 따님에게 장가가시어 3남 1녀를 낳으시니 아들 취명(생졸년미상)은 승사람이다. 취명은 3남 1녀를 낳으니 장남은 언충 차남은 언효 막내는 언제이다. 중손의 따님은 유학 최언청에게 시집갔다. 중손의 후취는 생원 김전의 따님으로서 2남 1녀를 낳으니 장남은 하명(1541~1611)[1]인데 하명은 1남 언세를 낳고, 차남 진명(1571~1631)[2]은 1남 언신을 낳고, 중손의 따님은 절도사 김탁의 아들 응문에게 시집가서 그의 따님 중 1녀는 판관 하홍에게 시집가서 5남 2녀를 낳으니 장남 함은 만호요 다음의 황과 발은 내금위요 다음은 황과 현이다. 또 1녀는 군수 최서린의 자 홍의에게 시집가고, 막내 따님은 고성현령 이유에게 시집갔다.
[1][2] 1754년 갑술보에는 휘하명, 휘진명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1771년 신묘보에 휘하명, 휘진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 생년이 신축생(1541년?)과 신미생(1571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이 비문과 부합되지 않는 점에 비추어 비문이 위작 ,변개의 의심이 있다.
末男末孫 奉訓郞行禧陵參奉 生一男翊明 末女 適仁川都護府使金敬思 生四男一女 長沃次溥淮渢 女 幼 公 乙未十月初九日 以疾不幸 是年十二月二十九日 葬于金洞先塋之側辛坐之原
막내아들 말손(생졸년미상)은 봉훈랑으로 행희릉[1]참봉을 지냈다. 1남 익명(생졸년미상)을 낳았다. 석공의 막내따님은 인천도호부사 김경사에게 시집가서 4남 1녀를 낳으니 장남은 옥이고 다음은 부, 회, 풍이고 딸은 어리다. 공(석공)이 을미(1535년) 10월 초9일에 병으로 별세하시어 이해 12월 29일에 금동 선영의 옆 신좌 옆에 장례하였다.
[1]禧陵;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嘉靖十六年丁酉七月二十九日 進士 全 榮 書
가정16년(1537년) 정유 7월 29일 진사 전 영 서
將仕郞公墓碑銘
장사랑공 묘비명(김맹손,1478~1502)
君諱는 孟孫 字伯胤 駕洛國王首露之裔 世居駕洛 祖諱秀光 登第奉常寺正 始家昌原之山南 考諱錫貢 監湖南之珍原縣監 遂老於鄕 妣李氏 宗室中義大夫堤川君諱蒕之女 本朝 太宗恭定大王之孫也
군의 휘는 맹손이고 자는 백윤이며 가락국왕 수로의 후예로 가락에서 대를 이어 살았다. 조부 휘수광은 과거에 합격하여 봉상시정을 지내고 창원 산남에서 가문을 처음 이루고, 부친 휘석공은 호남의 진원현무를 지내고 드디어 고향에서 늙으셨다. 모친 이씨는 종실인 중의대부 제천군 휘온의 딸이며 조선 태종공정대왕의 손녀이다.
君少事名宦 始階將仕郞而止 娶正義大夫富林君湜之女 世宗莊憲大夫之孫也 有三男一女 長曰遇明曰應明曰弼明 女 適司憲府監察金熙 成化戊戌生 在世二十五年壬戌七月九日 卒于京第
군이 젊을 때부터 명환에 일삼지 않고, 장사랑에 올랐다가 그치었다. 정의대부 부림군 식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 분은 세종장헌대왕의 손녀이시다. 3남 1녀를 낳으니 장남은 우명이고 다음은 응명, 필명이고 따님은 사헌부감찰 김희에게 시집갔다. 성화무술(1478년)에 태어나시어 나이 25세인 임술(1502년) 7월 9일에 서울집에서 별세하셨다.
大人珍原公俱慶 在堂而年老 三子皆幼不省事 乃以翌年癸亥十二月二十九日 返葬于金洞辛坐之原 孤參奉 有至誠 以九歲之孤 不就集慶殿參奉 持先妣之服 因增先君墓制 至砌碣皆盡其情
대인 진원공 내외분[1]이 살아계시나 연로하시고 세 아들이 모두 어리어 장례를 치를 수 없어 다음해 계해(1503년) 12월 29일에 금동신좌의 언덕에 반장을 하였다. 고아인 참봉(휘우명)이 지극한 정성이 있어서 9세[2]의 고아로써 집경전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돌아가신 모친의 옷을 가지고 부친의 묘제와 크게 하여 돌을 쌓고 비석을 세우는데 있어 모두 그 정성을 다하였다.
[1]휘맹손의 부모인 휘 석공(진원현감을 지냄) 내외분
[2]그렇다면 휘우명의 생년은 1493, 또는 1494년이 된다.
余聞而悲之曰眞孝子也 不必他求 但喪盡其情 是爲孝也
내 그것을 듣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효자라 다른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상례를 지내는데 그 정성을 다하는 것, 이것이 효도라 하였다.
昔 韓退之作人碑誌 雖使女奴請之 亦不辭焉 其用心 可 想矣 况得江之於珍原公 識面於朝 慕其門欄之盛有德人也 今其主鬯之孫爲孝如是則可不爲之銘諸 使得江 以族其行 銘曰
옛날에 한퇴지[1]가 남의 비문을 지을 때에 비록 부리는 여자 종의 부탁이라도 또한 사양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가상하다 하였는데, 하물며 득강이 진원공(휘석공)을 조정에서 서로 알게 되어 그 문중이 번성하고 덕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 지금 그 종손의 효성이 이와 같으니 어찌 새기지 못하겠는가. 득강이 그 종족의 행적을 표시하니 새겨서 말하기를
[1]韓退之; 한유 (韓愈 768∼824); 중국 당(唐)나라 문학자·사상가. 자는 퇴지(退之).
積善與惡 殃慶不一 天道喜乖 自古難詰 無官則壽 理固有之 官年之欠 理實難知 不裕於先 知其有後 仍雲萬世 瞻仰螭首
적선과 악에 재앙과 경사가 하나가 아니다. 하늘이 주는 것은 자고로 말하기 어려워라. 벼슬을 하지 않으면 오래 산다는 것은 이치가 맞으나, 벼슬한 사람이 수명이 짧다는 것은 이치가 실로 알기 어려워라. 조상이 넉넉하지 못하면 그 후손이라도 있을 것이다. 후손들이 만세에 이수를 우러러 사모하리라.
嘉靖十六年朝鮮九葉世丁酉十一月 日
가정16년(1537년)[1] 조선9엽 세정유 11월 일
[1] 1537년이면 진원공(휘석공,1463~1535)이 돌아가신 후에 이 글을 씀.
大司諫 魚得江 撰
대사간 어득강[1] 찬
展力副尉 朴 俊 書
전력부위 박 준 서
[1]어득강(魚得江, 1470~155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순(子舜), 호는 자유(子游)·관포당(灌圃堂)·혼돈산인(渾沌山人). 아버지는 문손(文孫)이다.
山南公遺事
산남공 유사(김중손)
公諱 仲孫 字仲胤 自號山南居士 姓金氏 系出駕洛國璿源而新羅大總管諱武力 實爲始祖也 曾祖諱不比本朝吏曹判書 祖諱秀光號喚惺軒文科奉常寺正 考諱錫貢號自晦堂通禮院引儀 妣全州李氏 堤川君蒕自出也
공의 휘는 중손이고 자는 중윤이며 스스로 호를 산남거사라 하였다. 성은 김씨이니 가락국 왕의 계통에서 나왔고, 신라 대총관 휘무력이 실로 시조이다. 증조인 휘불비는 조선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부인 휘수광은 호가 환성헌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정을 지냈고, 부친의 휘는 석공이고 호는 자회당이며 통례원 인의를 지냈고 모친은 전주이씨로서 제천군 온의 따님이다.
公 制行高潔 造詣篤實 出入於金寒暄堂之門 餘金東泉諸賢 契宜最深 以遺逸 擧薦禮賓寺 出拜知禮縣監 政淸訟簡 以課 最遷龍宮縣監 及解官 民有去思碑 此公履歷之大略也 生卒墓所 自經龍蛇後 佚而不傳 可悲也己
공의 여러 행동이 고결하시고 문학이 독실하여 김한훤당(김굉필) 문하에 출입하여 금동천의 여러 선비와 더불어 사귐이 매우 깊었다. 유일[1]로써 예빈시에 천거되어 지례현감에 임명되어 나아가니 정치가 깨끗하고 송사가 없어 그 성과로써 최종 용궁현감에 옮겨갔으며 관직을 그만 둘 때에 백성이 거사비를 세웠으니, 이것이 공의 이력에 대한 대략이요 생졸과 묘소는 용사의 난(임진왜란)을 지난 후로부터 아무도 몰라 전하지 않으니 가히 슬플 뿐이니라.
[1]遺逸; 사림(士林)에서 유명한 재야선비를 말함
配苞山郭氏 進士承華女 繼配安東金氏 生員銓女 墓俱在金洞先塋下
부인인 포산곽씨는 진사 승화의 딸이고 둘째부인 안동김씨는 생원 전의 딸이다. 묘는 모두 금동의 선영하에 있다.
子男就明生員承仕郞 郭出也 河明文科璡明僉使 金出也 女婿崔彦淸 奉事 金世文 兵使 兵使之子松菴沔 龍蛇之亂 倡義 有討賊勳 略述其譜牒之所載者如此 後之覽者亦不可以不知此意也
장남 취명은 생원 장사랑을 지냈는데 곽씨의 소생이고, 하명은 문과에 급제하고, 진명 첨사는 김씨의 소생이다. 사위인 최언청은 봉사이고, 김세문은 병사이니 병사의 자 송암 김면(金沔)이 용사의 난(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공훈이 높았다. 대략 그 보첩에 기록된 것을 이와 같이 서술하니 후에 보는 분이 또한 가히 이 뜻을 알지 못하여서는 아니 되니라.
參奉公遺事
참봉공 유사(김말손)
公諱 末孫 季胤 其表德也 少有才名 愚齋仲暾 一見而嗟異 以女妻之 自是學問 日就 愚翁 屢加獎詡 自以爲知己 不以館賓而待之 講論經禮 商確古今 李晦齋崔南溪相與爲道義交 講劘切磋 警發甚多
공의 휘는 말손이고 계윤은 그 덕행과 선행을 나타내는 것이다. 젊어서 똑똑하여 이름을 날려, 우재 손중돈[1]이 한번 보고는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그의 딸을 그 처로 하게 하니, 이로부터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우옹(손중돈)이 여러 번 권장하고 자랑스럽게 여겨 스스로 자신을 알도록 하고, 선생의 입장(館賓[2])에서 대하지 아니하고 예로서 강론하고 고금을 헤아리게 하니, 이회재[3]와 최남계와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어 서로 익히고 갈고 닦으니 남들이 많이 경계하였다.
[1]손중돈(孫仲暾, 1463~152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아들이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2]明나라때 賈仲名이 지은 《蕭淑蘭》에 나오는 단어라고 하며 뜻은 개인교사 쯤이라고 한다.
[3]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及愚齋易簀 痛深安倣 以致心喪三年焉 嘗遊漢師 洛中名士齋刺請謁 戶屨常滿 莫不以嶺南師表 期待焉
우재(손중돈)께서 임종(易簀[1])하실 때에 <휘말손께서> 고통을 많이 겪어 3년간 근신하셨다[2]. 일찍이 한양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서울안의 명사들이 뵈옵기를 청하여 문밖에 신발이 가득하였으니 영남의 사표로 기대가 컸었다.
[1]중국 5경의 하나인 禮記에 나오는 단어이다. <曾子曰然斯季孫之賜也我未之能易也元起易簀, 증자가 말하기를 “그래. 이것은 바로 계손(노나라의 3대부 중 한분) 준 것이다. 나는 병이 들어 이를 바꿀 수 없다. 원(元)아, 일어나서 침상을 바꾸라.” 하였다. 뜻; 내가 죽을 것 같으니 나를 다른 자리로 옮겨라>
[2]3년간 마음으로 슬퍼하였다는 뜻이나 다른 뜻이 될 수도 있다.
손중돈이 사망한지 8년 후에 작성된 손중돈 재산의 분재기(分財記; 사망한 사람의 재산을 미망인과 그의 자손들에게 분배한 기록, 현재의 상속과 유사한 기록)를 보면 손중돈의 아들과 둘째딸(조국량의 처), 셋째딸(정호의 처)에게는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있으나 첫째딸인 김말손의 처에게는 분재가 되지 않고 있다. 이는 재산 분재 시점 이전에 김말손의 처가 사망하였거나(확인 필요) 또는 김말손과 그의 장인 손중돈 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것 같으나 보첩에서는 생졸년 등을 확인되지 않는다.
每見朝著不靖 深懲元垂祐之禍 遯跡於檜山之白月山南陽橋上 題詩曰垂竹滄洲伴白伴白鷗故故近滄洲滄洲濯足因成睡夢幻白萬里浮 人以爲出塵遐想也
매번 조정에 부정한 것이 횡행하는 것을 보고 깊이 화가 드리워 질 것을 걱정하여 회산(현 경남 창원의 별칭)의 백월산[1] 남양다리 위에 숨어살며 시를 지어 말하기를 ‘창파에 낚시던져 백구(갈매기?)와 노니 백구가 점점 창주를 가까이 하네. 창주에 발씻고 졸았더니 꿈에 백구가 되어 만리를 날아가네.’[1] 하였으니 사람들이 티끌을 벗어나 멀리 생각한다 하였다.
[1]현 창원 북면 마산리에 있는 백월산
[2]창주(滄洲)는 일반적으로 선비가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물가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현재 주남 저수지 쯤으로 생각되는데, 옛날에 주남 저수지가 낙동강이었다고 한다.
構數椽於淸流上 題其楣曰陽橋散人 日與伯仲公 壎箎湛樂 友于之篤洽 有椿津之趣味
푸른 물위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그 문 위에 액자를 써서 가로대 양교산인[1]이라 하고 날마다 큰형(맹손)[2]과 작은형(중손)과 더불어 서로 우애하며 즐기니 우애와 돈독함이 춘진의 형제[3]와 같더라.
[1]위의 백월산 남양다리위에 숨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이란 뜻
[2]큰형 휘맹손은 25세에 별세하였으니 이때 휘 말손은 많아야 불과 20세 정도일 텐데 위와 같은 표현은 어색하다.
[3]椿津之趣味; 중국고서 ‘德育課本’ 에 나오는 구절로서 楊播와 동생 椿津 간의 형제간의 우의를 나타냄
間以琴書 娛樂而常語人曰士生斯世 出而不扶持於斯道則寧處而獨善其身 不負吾儒家計是十分盡這道理也
간혹 거문고와 글로써 즐기고 항상 남에게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을 살면서 나아가 이 길을 서로 도와 보존하지 못하면 차라리 산중에 살면서 홀로 몸을 착하게 하여 우리 유가의 도리를 버리지 않는 것이 이것이 십분이라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하였다.
晩境 被剡除禧陵參奉 亦不屑也 嘗戒子孫曰惟忠與孝我家箕裘 無忝所生 以保餘聲焉
만년에 희릉[1]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오직 충과 효는 우리 가문에서 조상대대로 전해오는 것이라. 소생을 더럽히지 말고 명성을 보존하라.’ 하였다.
[1]禧陵;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作家訓數千言 藏于家而屢經兵燹之餘 孱仍 零替 又値回祿 蕩佚無傳 何天之生公厚而報公者薄耶 敬掇數語 以遺來裔而烏敢望善繼善述耶 可慨也夫
가훈 수천 개를 만들어 집에 소장하였는데 병란을 여러 번 겪어 남아 있지 않고, 또 화재가 나서 없어져 전하지 않으니 어찌하여 공이 태어날 때에는 후하게 하시고 공에게 보답은 박하게 하였을까? 공경히 몇 마디 말을 모아 후손에게 남겼으나 어찌 감히 이어져 잘 서술할 수 있겠는가. 가히 슬플 뿐이다.

첫댓글 ?진원공 사위 김경사 연안인 증 영의정
현감공 중손의 외손 김면 고령인 은 임진란 일등공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