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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63) 2024. 4. 24
다윗의 자기 정체성
사무엘하 23:1
삼하21~24장은 일종의 부록과도 같습니다. 이 중 21~22장은 다윗의 초기 역사를 중심으로 한 부록이고, 23~24장은 다윗의 통치 후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2장의 다윗의 노래가 23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2장의 찬송이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찬양이라면, 23장의 찬양은 다윗의 통치 말기, 곧 임종이 가까운 때에 기록한 찬송입니다.
<다윗의 자기 정체성>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유언과도 같은 찬양 시를 남겼습니다.
1절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스스로 이 글이 자신의 ‘마지막 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일단 ‘유언’처럼 들립니다. 그렇지만 이후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유언’보다는 ‘예언’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실제로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개인적으로 남긴 유언은 왕상 2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말’이라는 표현은 개인적인 유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백성들에게 남긴 ‘마지막 연설’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네 가지 특징적인 말로 정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이새의 아들’ 임을 밝히고 있습니다(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누구의 아들로 불리는 것은 그 당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문과 출신이 드러나는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옆 사람이 먼저 말해 줍니다. ‘이분은 누구의 자제분이시다.’ 그러면 한 자락 깔고 들어갑니다.
요즘 유머 가운데 하나가 “내 소원은 재벌 2세인데, 아버지가 노력을 안 하신다”랍니다.
실제 현실의 삶에서 가정적인 배경이 성공(?)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신라 시대 골품제도 – 성골(왕족), 진골(귀족), 최소 육두품은 되어야 할 텐데... ㅎㅎ).
(인도 카스트 제도(4단계) : 1. 브라만(사제), 2. 크샤트리아(왕, 귀족, 무사 – 정치, 군사 담당), 3. 바이샤(서민 – 농, 공, 상인 –납세의 의무), 4. 수드라(농노, 육체노동자), 계급 외. 찬달라(불가촉천민, 힌두교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 기독교인도 인도에서는 불가촉천민)).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출신과 과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신데렐라는 열두 시가 되기 전에(자신의 비천한 신분이 드러나기 전에), 급히 무도회장을 뛰쳐나와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누가 출신 배경을 물어도 ‘뭘 그런 게 중요하냐’고 얼버무리고 맙니다.
그러면 다윗에게 있어 ‘이새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자랑스러운 고백이었을까요? 아니면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별로 알리고 싶지 않은 배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은 ‘이새’라고 분명히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의 누이 스루야(요압, 아비새, 아사헬의 모친)와 아비갈의 아버지는 이새가 아니라 ‘나하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삼하17:25, 대상2:16-17). 어떻게 된 일일까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나하스가 이새의 다른 이름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윗의 어머니가 두 딸을 낳은 후에 죽은 남편 ‘나하스’를 대신하여 기업 무를 의무가 있던 ‘이새’에게 시집을 가서 다윗을 낳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이른바 ‘계대(繼代) 결혼’을 통해서 이새의 아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렸을 때, 홀로 양 떼를 치는 등 홀대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목동으로서 어떻게 일했는지, 사울 왕 앞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골리앗과의 대결을 앞두고). 삼상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자신의 용맹함을 설명한 내용이지만, 다윗의 삶의 이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단지 성실하게 일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정확히 몇 살 때부터 양을 쳤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어린 나이 때부터 목동으로 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목숨 걸고 목동으로 일할 나이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는, 짐승을 쫓아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한두 마리 잃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진정한 아버지라면 한두 마리 주더라도 사나운 짐승과 맞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숨을 걸고, 사자나 곰과 맞섰고, 심지어 그것들을 쳐 죽였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단순히 책임감이 강한 아들이어서가 아닙니다. 한두 마리라도 잃어버렸을 때 오는 책망이 두려웠거나, 아니면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고 싶은 동기가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찾아갔을 때, 이새는 다른 아들들은 다 소개해줬지만 다윗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사무엘이 “다른 아들이 또 없느냐?”고 묻자, 그제서야 다윗을 부르러 보냈습니다. 이때도 다윗은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새는 사무엘에게 다윗을 그저 양치는 사람쯤으로 소개했습니다(삼상16:11). 즉, “양이나 치는 애를 불러서 뭐 하려고 하느냐?”는 반응입니다. 그렇습니다. 종합해 보면 이새는 다윗을 아들로 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목동으로, 일꾼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또, 다윗을 대하는 형들에 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번은 블레셋(골리앗)과 전쟁이 일어나 다윗의 형 세 명이 참전하게 되었습니다(엘리압, 아비나답, 삼마). 이때 이새는 다윗에게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해 주는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전쟁터에 가보니까 골리앗 얘기도 나오고, 블레셋이 강하다는 소리도 들리고, 아무튼 이런저런 비관적인 소식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냐?”면서 오히려 용기를 주고 믿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마침 그 얘기를 큰 형(엘리압)이 듣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17:28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엘리압은 다윗에게 노를 발하였습니다. 불같이 화를 냈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화를 낼 건 또 무엇입니까? 그냥 철이 없어서 그러나 보다 하고 말면 되지. 그리고 보통 어린 동생이 전쟁터에 왔으면, 위험하니까 도시락을 주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되지, 기껏 한다는 말이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라고 비난할 것은 무엇입니까? 무슨 뜻일까요? 평소 다윗을 향한 이 집안 사람들의 기본 말투가 늘 짜증 섞인 말, 화를 내는 말로 말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엘리압의 다음 말입니다. “들에 있는 양은 누구에게 맡겼느냐?” 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큰 형 엘리압은 다윗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양을 더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족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존재의미, 존재 가치는 그저 양이나 치는 인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새의 아들’ 다윗의 정체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대적들도 다윗을 조롱할 때(사울이나 나발, 그리고 세바) ‘이새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잘것없고 비천한 가문 출신임을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
그래서 다윗이 자기 입으로 “나는 이새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두 번밖에 없습니다.
한 번은 아주 오래전에 골리앗을 죽인 뒤, 사울 왕을 처음 만났을 때, 사울 왕이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삼상17:58)라고 대답한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때에도 사울이 “누구의 아들이냐?”고 물으니까 “이새의 아들”이라고 답한 것이지, 만약에 그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했다면, 아마 굳이 이새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이 두 번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새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다윗에게 그리 자랑스러운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유언 같은 말씀(시)을 남기면서, 평소 쓰지 않던 ‘이새의 아들 다윗’이란 표현을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윗의 두 번째 고백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높이 세워진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절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한번 들어보세요. 과거보다 현재가 더 나은 사람은 항상 어두웠던 과거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현재보다 과거가 더 나았던 사람은 항상 ‘왕년에 잘나갔던’ 시절을 얘기합니다. 그것이 할 이야기의 전부인 것입니다. 즉, 어두운 과거를 꺼내 놓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은 어둡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과거를 역전해주신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어두웠던 과거, ‘이새의 아들’이었음을 고백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만큼이나 높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높여 주셨습니까?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자리, 곧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까지 높여 주셨습니다. 일개 목동의 신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수동형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아야 합니다. 즉 스스로 높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높이 세워졌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무도 다윗을 주목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주목하셨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의 아들들을 찾아갔을 때도, 아무도(심지어 부모도) 다윗은 염두에 두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들판에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끝내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가 어떤 사명을 받아, 어떤 위치에서 어떤 직책을 수행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다윗은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당시 세 가지 직책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에게 직책을 수여할 때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이가 사무엘이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안수를 받고, 직분을 받는 모든 행위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속임수로 일관된 미천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야곱을 고난의 세월 끝에 변화시키셔서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창32:28). 그리하여 그를 이스라엘의 직계 조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야곱에게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미천한 야곱을 높여 주신 하나님께서 미천한 자신도 기름 부으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편, ‘기름 부음 받았을 때’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삼상 16장에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그 의미를 정확히 알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자 기름 붓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혼자만 그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다음 다윗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삼상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기름 부음을 받음 순간부터 하나님의 영이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선택된 사람이라고 하는 자부심과 영성이 그 마음 중심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할 때, 어떻게 그런 큰 용기가 생겨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식입니다. 곧 하나님의 영에게 사로잡혔고, 그 스스로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신다는 확신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동안 다윗은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골리앗과 담대히 싸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때를 끝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영이 그를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님의 영과 상관없이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을 때, 그리고 직분을 받을 때(특히 목사 안수, 장로 안수), 다윗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영(성령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성령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오셔서 자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내 몸을 성전 삼고 임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의 문(믿음의 문)을 열고 날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다윗은 자신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고백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입으로 부르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다윗은 자타가 공인하는 노래 잘하는 자였습니다. 사람들이 사울 왕에게 다윗을 소개하는 장면을 보면, ‘수금을 잘 타는 준수한 자’라고 말합니다(삼하16:18). 악기도 잘 다루고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입니다. 단순한 시인이라 아니라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찬송가 작사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시편 150편이 대부분 다윗이 지은 노래들입니다. 하나님이 포함되지 않는 노래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좋은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힘들고 슬플 때도 노래했고 답답하고 억울할 때도 노래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한 시편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오늘 본문) 다윗은 마지막 유언과 같은 한 편의 시를 읊고 있습니다.
삶의 ‘희로애락’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고백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윗은 마지막 시편을 통해서 다윗이 스스로 정리한, ‘자신의 정체성’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미천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주셔서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영’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희로애락’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하는 삶을 살았음을 고백했습니다.
이 다윗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에 큰 도전을 줍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시고,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셔서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고백하고, 우리의 입술에 찬송과 기도가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다윗의 마지막 말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의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가 다가오거든, 그때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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