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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인생
위성재•황정심 가정
1. 어린 시절 2. 통일교회 입교 3. 축복가정 4. 임지생활 5. 세 번의 죽을 고비 6. 목회출발 7. 나주교회로 발령 8. 환고향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황정심, 오빠의 죽음, 사업가 아버지, 노래하는 멋쟁이 남학생, 참아버님께서 1800약혼식장에서 두 번이나 일으켜 세우심, 이를 계기로 6000가정 축복 받음, 강원도 정선 임지, 연탄가스로 죽을 고비, 경제활동, 교회 빚 청산, 결의문 낭독 승리
1. 어린 시절
내가 5살이 되었을 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슬픈 추억이 있다. 우리 집 뒤에 친척들이 모여와서 매우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 당시 딸 넷에 아들 하나, 5남매 중 두 번째가 오빠였는데, 그 오빠가 9살 때 죽어버린 것이었다. 아들이 귀한 때이고 또 영특한 오빠였기에 그의 죽음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큰 슬픔이 되었다. 어린 나도 죽음을 체험했다. “가족 전체를 슬프게 만드는 죽음이 왜 있는지? 어떻게 하면 죽음을 없앨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았다.
오빠를 낳았을 때 스님이 우리 집에 시주를 와서 “아들이 수명이 짧으니 절에 파세요.”라고 했다. 즉 오빠를 사찰에서 생활을 하게 하여 액운을 피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오빠를 절에 보내었다. 그러나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결국 오빠는 영계로 일찍이 떠났다. 그 사건을 보면서 나는 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였다. 그 이후로 아들을 더 낳아서 8남매가 되었다. 영계에 간 오빠가 하늘부모님께 청원을 드려서 다른 아들들을 보내준 것 같았다.
나는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 949번지에서 태어났다. 내가 어렸을 때는 초등학교만 있었고 21개의 마을이 있는 섬이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기도 하였지만 여성을 차별하던 유교문화가 심했다. 부모들은 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에 보내고 출세를 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러나 시집가면 남처럼 지내게 되는 딸을 가르치려는 의식은 매우 저조하였다. 다행히 우리 집은 어렵게 사는 형편이 아니었고, 또 내가 공부도 잘 하였기에 읍내 중학교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중학교에 진학시키도록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그 덕분에 나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장수 황가(黃家)이시고 이름은 현주(賢周)이시다. 조선시대에 명성을 날렸던 황희(黃喜) 정승 할아버지의 17대 손이시다.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셔서 그 지역의 면(面)에서는 상당히 유지에 속하여서 정치인이나 기관장들이 많이 찾아오곤 했다. 아버지 친구가 수협 조합장에 출마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반대를 하셨다.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러자 그 친구는 고려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데려와서 아버지를 협박하였다. 그렇다고 정의감이 강한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아버지에게도 그 친구 아들 또래의 자식이 있었지만, 딸이라서 가르치지 않으셨기에 아들이 없는 아픔이 크셨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정치적으로 신민당에 가입하여 상당히 열성적이었고, 사업해서 번 돈을 펑펑 쓰셨다. 그만큼 가정살림에는 부담이 되었고, 어머니의 고통은 컸다.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서 어머니께 갖다 주셔야 살림살이가 편할 텐데, 돈을 많이 벌어도 외부로 다 써버리니까 어머니는 늘 빠듯하게 살림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선거 때가 되면 어머니는 큰언니와 형부에게 부탁하여서 아버지가 선거에 개입하지 못하시도록 단속했다. 물론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으셨다. 돈을 많이 쓰는 선거라서 그 후유증이 너무 컸기에 어머니는 그런 선거 기간을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유능한 사업가이시기도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어장을 2틀씩이나 하셨고, 남보다 먼저 양식장을 하시고, 부산까지 다니시면서 김장사도 하셨다. 갈 때는 김을 가지고 가서 팔고, 올 때는 우리 고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오시면 인기가 좋아서 금방 팔려 나갔다. 아버지는 돈을 마대자루에 가득 담아 가지고 다니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남들이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 잔뜩 놓여있었고, 늦게 본 아들에게 값비싼 색동옷으로 입히곤 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수백 박스를 부산의 어느 상회에 저장해 놓고 학생들이 봄 소풍을 갈 시기에 맞추어서 김을 팔려고 준비했다. 그 당시에는 학생들이 소풍을 가면 어머니들이 김밥을 만들어 주었기에 김이 잘 팔리는 때였다. 김을 파는 이들에게는 봄 소풍 계절이 돈을 크게 벌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아버지도 한 몫을 챙기려고 하셨다.
그런데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학생들의 봄 소풍이 깡그리 무산되고, 김 값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게다가 지서장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하여 건물을 대신 받았는데, 법을 조금 알고 있는 지서장이 사기를 치려는 마음으로 고소를 하였다.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까지 끌려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계속 승소를 했다. 그러나 지서장은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수작을 부려 지방법원부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아버지는 고등법원까지 가서는 그냥 포기하셨다. 그 건물을 세를 주었다. 지금처럼 전화도 없던 때였고, 지서장 측에서 횡포가 심하여 아버지는 이사를 하겠다고 인편으로 연락을 하였다. 응답을 전달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사를 해 버리니까 지서장은 그 건물에 막무가내로 들어가 점령해버렸다.
재판으로 인하여 10년간 일도 못하고,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정말 최악의 기간이었다. 이런 물질의 어려움을 통하여 고통을 당하신 아버지는 한 맺힌 감정을 가진 채로 85세에 운명하셨다. 나는 “사람이 배워서 똑똑해야 사기를 당하지 않는구나. 나는 반드시 많이 배우자.”하는 다짐을 하였다.
어머니는 인동 장(張)가이시고, 화임(花任)이셨다. 여자이지만 강단(剛斷)이 있고 똑똑하셨다. 어려울 때 나와 동생 둘을 광주로 학교에 보내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동네 부녀회장을 맡아서 봉사를 많이 하셨고, 그 덕분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 일을 해 주시기도 했다. 이웃을 위하여 봉사를 하면 이웃도 우리 집안을 도와준다는 위하여 사는 수수작용의 법칙이 적용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머니에게 많이 죄송하다. 큰아들로 인한 충격으로 쓰러져서 3년을 누워계셨는데도 가 뵙지 못했다. 그때가 참부모님 지시를 따라서 환고향을 한 때였고,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빈손으로 찾아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뵙고 몸을 닦아드렸다. 회의 참석차 광주에 갔는데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께서 먼저 돌아가셔서 그 후에 아버지와 영육축복을 받게 해드렸다. 공직 생활의 바쁨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부모님께 생전에 충분한 모심의 생활을 못했지만, 영육 축복을 해 드린 것이 효도를 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부모님께서 영계에 가셔서 나를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
나는 말이 별로 없는 아이였다. 중학교 때부터 키는 커서 맨 뒷줄이 내 자리였지만, 시력이 좋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맨 앞줄 중앙이 내 자리가 되었다. 수업이 끝나서 쉬는 시간에도 나는 거의 내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겨우 뒷줄의 아이들과 몇 마디 나누다 다시 수업을 시작하곤 했다. 눈이 잘 안보이니까 친구들처럼 뛰어놀 수도 없었다. 좀 외로웠지만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2학년 때,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별도로 불러서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너를 반장으로 시키지 않아서 미안하다. 왜냐하면 1학년 담임선생님이 너를 평가하기를 말이 별로 없어서 반장이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도 잘 모르는 사이에 그 일이 왜 생겼는가 하면 청소시간에 중심이 되는 아이들이 나를 반장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반장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력이 안 좋은 것이 나를 소극적 심리를 갖도록 한 것 같다. 건강해야 자신감이 넘치고 각종 활동에 적극 동참할 수 있는 것을 깨달았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싶은데 아버지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그 당시에 대개 아버지들이 그러했듯이, 딸은 굳이 고등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도장을 파서 광주여고에 전기 원서를 내고, 후기에는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광주여고에 합격했지만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후기학교에 입학하여 장학생이 되어서 공부하고, 졸업하면 빨리 취직하여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는 데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세월이 지난 뒤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인 친구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야 이 바보야 너 그때 광주여고를 갔어야지~~”라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를 나와 미국으로 가는 그 앞에 왠지 내가 상당히 초라하게 느껴졌다. 학력이 갖는 후광은 은근히 힘이 되었다. “천일국이 실현되면 학력보다 심정이 더 존중을 받겠지?”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내가 한 결정에 이의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가 새삼 스스로 자문자답해 보았다. “그래! 만약 내가 광주여고에 진학했으면 어땠을까? 아마 틀림없이 광주여고에 진학했더라면 통일교회는 못 들어 왔을 거야. 축복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참부모님도 몰랐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참부모님을 만났고 축복가정이 되고 공직자의 길을 걸은 것보다 더 큰 가치와 영광은 없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도록 지도해 주신 참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2. 통일교회 입교
고등학교 때는 안경을 껴서 시력이 나쁘지 않았고, 키가 커서 교실에서의 내 자리는 맨 뒷줄이다. 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큰 유전자를 타고 난 것 같다. 가을이 되어서 이웃의 사례지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예능 활동인 ‘문학의 밤’이 열렸다. 같은 반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하여 동행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시 낭송, 콩트, 노래 등을 하였다. 그 중에서 어떤 남학생이 ‘산들바람’을 노래하는데 참으로 큰 감동이 내게 몰려왔다.
다음 날 교실에는 그 학생이 불렀던 노래가 화제가 되었다. 나도 그 자리에 같이 끼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멋진 학생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고 한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어디가면 굉장히 감동적인 강의를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하여 “그럼 한 번 가볼까?”라고 따라갔다. 무슨 강의를 들었는지 생각은 안 나지만, 학생부장이라고 소개하는 학생이 어제 ‘문학의 밤’에서 산들바람을 노래하여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그 학생이었다. 서로 노래가 감동적이었다며 인사를 하는데 그 멋쟁이 학생이 하는 말이 “유난히 그 날은 자기가 생각해도 노래를 잘 불렀다.”고 했다.
지나고 보니 그가 노래를 잘 하게 된 것도 하늘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했다. 선천적으로 노래를 잘 하기도 하겠지만 내가 감동을 받도록 역사하시고, 그래서 그 학생과 친분을 쌓데 되도록 된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인상이 좋으면 호감이 가고 그가 하는 부탁을 잘 들어주게 되어 있다. 겨울 방학이 되어 시골에 와 있는데 노래를 잘 부르던 멋쟁이 학생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7일 수련이 있는데,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방학 내내 시골에 있느니 수련에 한번 참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모님께는 거짓말하고 수련에 참석하였다.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부르던 학생부장이 이제는 나를 새 진리, 참진리의 광장으로 불러내었고, 또 다른 깨달음의 감동을 내게 주었다.
수련소는 광주 루문동에 있었고, 지금으로 말하면 전남 광주 교구본부였다. 전남지역과 광주에서 60~70명 정도의 많은 학생들이 참석했다. 생전 처음으로 많은 남녀학생들과 같이 수련을 받으며 숙식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밥은 보리가 꽤 많이 섞였고, 반찬은 깍두기 한가지일 때도 있었다. 음식 수준으로 보면 교회의 살림이 부유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새 진리를 듣고서 마음에 차오르는 성령의 불길은 날마다 나를 감동으로 채웠다. 그 동안 성장하지 못하고 있던 내 영인체에 비로서 영적 양식이 투입되기 시작했고, 영인체가 꿈틀거리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잠잘 때에는 교육받던 성전을 두 부분으로 정리하였다. 한쪽은 남학생, 다른 한쪽은 여학생이 가운데 사이를 두고 잤다. 새벽 4시면 일어나 4줄로 서서 ‘심정통일, 사상통일’을 외치며 구령에 맞혀 공원 성지까지 뛰었다. 청소년기의 왕성한 육체가 생소를 흡수하여 활기를 띤 영인체와 함께 새벽 찬바람을 가르면서 희열을 만끽했다. 수련생활의 불편함이 오히려 더 열정을 북돋우는 조건이 되었다.
수련을 받으면서 나는 후편의 ‘동시성 섭리’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역사와 성경과의 관계를 잘 알지 못했던 나는 반복된 역사가 흘러왔다는 것 자체가 그저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그 역사의 정점이 바로 참부모님의 성탄과 선남선녀의 축복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리수련을 받고 난 후부터 열심히 하던 공부를 일시 보류하고, 시험 때만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장학생이 되겠다는 생각은 접어두었고, 수업이 끝나면 여러 친구들이 모여서 친구집에 들러 밥을 해 먹고는 곧장 교회로 갔다. 특별히 교회에 가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매일 교회로 가서 밤늦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교회에서 있는 것 자체가 마냥 좋았다. 밥이 없으면 라면을 삶아 먹고서도 좋아서 웃었다. 마치 철로 만든 못이 자석에 이끌리어 주렁주렁 매달리듯이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에 이끌려서 틈만 나면 교회를 발걸음을 향하였다. 광주 성화 13회 동기가 남학생 5명과 여학생 8명이었다.
졸업식 때는 최창림(용석)지구장님께서 짚차를 몰고 오셔서 우리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 주셨다. 지구장님은 그 당시에 언변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졸업을 축하하는 식사와 함께 유창한 말씀으로 우리들을 격려하시며 뜻길을 향한 심정의 용사가 되라고 촉구하셨다. 선배의 말씀이 후배를 이끄는 큰 힘이 되었고, 인생 노정 가이드 역할을 해 주었다. 뜻길 신앙길에서도 선배의 조언이 필요하고 멘토가 선행될 때에 영인체 성장에 가속도가 붙게 되는 것을 깨달았다.
3. 축복가정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완도군 수협에 근무했다. 상업계통을 공부하였고, 은행에 근무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 속에 새 진리의 불길이 들어와서 나를 불태우고 있으니까 세속적인 만족으로는 내게 충족감이나 자부심이 없었다. 나에게 뭔가 참부모님의 뜻길을 향한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뜻길을 향한 신앙 노정에서 나 자신의 청춘을 몽땅 다 바쳐야 직성이 풀리고 만족이 느껴질 것 같았다.
1800가정 약혼 때 청파동 전본부교회에 갔었다. 광주 성화 선배 몇 분과 점심 후 다방에서 차를 마시는데, 한 선배가 나에게 “외모를 보니까 흘려버릴 상이 아니니까 아버님 눈에 띄는 곳에 앉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런가? 이왕이면 좋은 배필을 만나면 좋겠다.”하는 마음으로 성전 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기둥 곁에 앉았다. 남녀가 자기 다리를 붙잡고 웅크리고 앉아야 할 정도로 형제자매들이 가득히 찼다. 육신의 불편함을 극복하는 것도 그 동안 뜻과 무관하게 살아왔던 삶을 성별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짝을 지어주시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나에게 참아버님께서 “너 일어서라!” 하셨고, 또 창 밖에 있는 청년을 지목하셨다. 그러자 그 청년은 “선생님, 저는 일본여자하고 축복을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언뜻 본 그 청년은 머리가 하이칼라였다. 나는 혼자 서 있기가 부끄러워 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일어나서 다시 앉으려면 자리가 없어질 정도로 밀집한 상황이어서 몸을 이리저리 밀치고 쪼그리면서 겨우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참아버님께서 다시 “너 일어서라.”고 하셨다. 나는 일어났는데 어떤 남자를 불러주시지 않으셨다. 조금 서 있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직장에서 근무하다 왔기 때문에 다음날 일찍 돌아가려고 저녁을 먹고는 맨 뒤쪽 구석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다.
이처럼 1800가정 약혼 때 참아버님의 관심을 두 번이나 받은 나는 “다음 약혼식에 참석하면 틀림없이 멋있는 남자를 골라 주실 것이다.”라는 굳은 믿음이 생겼다. 그때의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믿음의 부모도 없이, 신앙의 케어도 받지 못한 채 나 스스로 신앙을 정립한 입장이고, 나이도 많은 상황에서도 1978년 약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만약 청파동전본부교회에서 내가 두 번이나 지목을 안 받았더라면 축복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을 것이다. 참아버님께서는 내가 딴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불러 세워주신 것이었다. 축복도 때가 있는 법인데, 나는 1800가정에 들어가지 않을 운명이었던 것 같고, 그런 나를 관심과 애정으로 붙잡아 두시기 위한 참아버님의 특별한 방법이었던 것 같았다. 모든 남녀들의 사정을 고려하여서 축복을 시켜주시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참아버님의 사정은 얼마나 복잡하고 힘이 드셨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1978년 수택리 일화 수련소에서 먼저 미국 청년들과 한국 여자들을 중심한 99쌍의 매칭이 있었다. 이어서 남자 가운데 대학교 졸업자와 여자 가운데 대학교 재학중 및 대학 졸업자, 그리고 여자 30세 이상으로 고등학교 졸업자들을 세우셨다. 나도 해당이 되었다. 아버님께서 내 앞으로 지나가시는데 그냥 떨리고 무서웠다. 앞에서 뒤로 가시더니 한 쌍이 앞으로 나갔다. 짝으로 지시를 받은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나눈 뒤 경배를 드려야 하는데, 참아버님께서 계속 왔다 갔다 하시면서 짝을 맺어주시다 보니까 그들은 참부모님께서 앞으로 나오시면 경배를 드리려고 계속 서 있었다.
참아버님께서 다시 앞으로 나오시더니 내 오른쪽 어깨를 당기셨다. 그리고 청년 한 명을 불러 세우셨다. 나는 절대복종의 입장에서 무조건 얼떨결에 그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서서 함께 경배를 드리려고 하였다. 힐끗 옆눈으로 보니까 키가 나와 비슷해 보였다. 경배를 드리고 나오니까 신평근 가정부장께서 내 명찰을 떼어 확인한 후에 다시 달아 주시며 “당신 주체가 학사장입니다. 축하합니다. 공직자와 축복을 받는 것이 큰 복입니다.”라고 반가이 맞아 주셨다. 101번째 약혼이었다.
4. 임지생활
약혼 후에 곧장 임지로 나가야 하는데 직장 정리 등의 문제로 6개월 뒤에 강원도 정선으로 갔다. 처음으로 밟아보는 강원도 땅, 전혀 낮선 곳이었다. 교회는 읍내 뒤편 산 아래 있었다. 정선은 탄광이 많은 곳이라서 냇물이 까맣게 보여서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냇물을 까맣게 색칠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석탄촌이었다. 지붕, 도로, 사람 얼굴, 검은색 개울 등 까만색이 많았다. 정선에는 큰 강이 시내 가까이 흐르고 있어서 겨울이면 얼음이 꽁꽁 얼어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검은색의 여운이 있는 얼음위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저들에게는 공해가 없고 순수 자연이 있는 에덴동산이 만물축복으로 주어지기를 기원하였다.
임지를 바꿔 정선으로 와있는 5명의 언니들과 합류했다. 새벽 정성을 드리고, 청소하고, 아침을 먹고 나면 전도하기 위해 교회를 나섰다. 전단지를 가지고 각자가 맡은 임지를 돌면서 누군가와 만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찬스를 갖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어느 가정을 방문했는데 아주머니가 하소연을 하면서 “하나님은 없어요!”라고 강변했다. 사연을 들어보았다. 남편도 일찍이 돌아가셨는데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외아들이 강에서 놀다가 얼음이 깨져서 그만 죽고 말았단다. 남편없이 힘들게 살면서 희망이던 외아들마저 잃은 그 아픔과 설움이 너무나 억울했다. 그래서 울면서 나에게 떼를 썼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 아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데려갔느냐고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 아주머니에게 나는 어떤 답도 드리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도 내 마음에 어두운 그늘로 남아있다. 가끔 그 아주머니의 절규가 뇌를 스치곤 한다. 목회 사모로서 활동을 많이 하였고, 은퇴를 한 지금도 “그 아주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해 본다.
일 년 동안의 임지를 마치고 충남 당진교회로 갔다. 당진교회는 위치가 높아서 계단이 많다. 그래서 겨울을 나기 위한 연탄을 옮길 때 상당히 힘들었다. 그 시절만 해도 마을에 이렇다 할만한 공공건물이 없었다. 그래서 “교회가 지어지면 평일에는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문화센터로 하라. 어린이집과 노인학교를 운영하라.”는 참부모님의 지시를 따라서 교회를 전면 개방하였다. 교회 개척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언니들과 더불어 한겨울 꽁꽁 언 얼음물을 깨고 들어가서 냉수욕하면서 간절하게 정성을 드렸다.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학생들을 전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끝까지 키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비록 외적인 식구 증가는 미흡했지만, 그 대신에 우리 식구들의 영인체는 광명으로 빛났다.
1980년도에 전두한 대통령이 되었을 때, 승공연합 이름으로 승공강의를 하며 조직을 다져 나갔다. 군청에서 봉고차와 운전기사를 내어주었고, 읍면 기관장들과 군청 공무원들이 마을마다 인원동원을 해 주었다.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씩 마을에 들어가 승공강의를 하고 다녔다. 봉고차를 타고 ‘광야의 사나이’를 부르면서 울면서 다녔다. 운전을 맡아주던 일반 시민이었던 군청의 봉고차 기사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 달쯤 같이 다니다 보니 봉고차 기사하고도 친해졌다. 한사람, 한사람씩 마을 앞에 내려주고 맨 끝 사람이 끝나면 반대 차례대로 싣고 돌아왔다. 어떤 언니들은 일찍 끝나서 큰길에 나와 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기사도 차츰 우리의 내용에 친숙해졌다. 그를 전도하고 축복가정으로 세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쉽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강의하기가 어려운 언니들에게는 “어려우면 그냥 울고 다녀라.”고 하면서 밀어붙였다. 강사도 부족했지만, 그만큼 광주사태로 나라가 온통 혼란스런 상황에서 “6월 30일까지 순회 승공강연을 마치라.”는 명을 받들어야 하였다. 나에게는 형사가 늘 동행했다. 강의를 마치고 나니 경찰서장이 나에게 “부녀회원들을 교육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대전으로 인사이동이 나서 부녀회원교육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 때의 열기를 갖고 부인들에게 승공교욱을 했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인사이동이 된 것도 섭리적으로 더 큰 뜻이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기간 안에 강의를 거의 마쳤는데, 그때부터 마을 지부장들에게 국제승공연합 조직에서 나오라며 협박이 들어갔다. 혹자는 “무서워 그만 두겠다.”고 포기하였으나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한 일인데 뭐가 잘못이냐?”며 오히려 따지고 들면서 끝까지 사명을 지켜낸 분들도 계셨다. 누가 왜 협박을 했을까? 그 배후는 지금도 궁금하다. 기독교인? 공산당? 만약 기독교가 배후세력이라면 정말 슬픈 일이다. 재림메시아로 강림하신 참부모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천추에 남을 한을 만든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6월말까지 강의를 끝내라는 지시가 왜 있었는지를 알았다. 참부모님의 섭리는 항상 우리들보다 한발 앞서 가셨음을 확인했다.
내 강의를 듣고 나서 모시로 곱게 차려입으신 할아버지께서 5,000원 짜리 새 돈을 쥐어주시면서 “수고하셨습니다. 맛있는 것을 사 먹고 힘내세요.”라며 격려를 했다. 이를 지켜본 면사무소 직원이 “저 할아버지 집안은 교회를 짓고 열심히 믿는 집안입니다.”라고 내게 귀띔을 해주었다. 그 말의 의미는 그 할아버지가 강사인 내가 통일교회 식구임을 모르고 돈을 주고 격려를 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 연륜이 깊은 할아버지께서 내 강의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용돈도 쥐어주시고 나아가서 식구가 되고 축복가정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참부모님께 보고를 드리고 큰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무지와 불신의 가면을 속히 벗기를 바랬다.
5. 세 번의 죽을 고비
뜻길을 따라오면서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첫째, 광주교구 문간방에서 숙직을 할 때였다. 그때는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두 명씩 숙직을 설 때가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친구와 둘이서 숙직을 섰다. 그런데 잠을 자다가 화장실에 가는 도중 밖에서 쓰러져버렸다. 아마도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일어나 보니 바지가 젖어 있고, 수고하시는 언니들의 방에 누워 있었다. 왠지 부끄러워 일어나 곧장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자취방에 있는 동생들은 학교에 갔을 것이고, 이미 학교는 너무 늦었고, 새삼스레 마음이 많이 허전했다.
둘째, 연탄가스에 죽을 뻔했다. 임지를 마치고는 갈 곳이 없었다. 가정출발을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갈 수도 없었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에도 갈 수가 없었다. 결혼을 했다고 동네방네에 다 알렸는데, 살 집이 없어서 친정집에 와서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교회 구석진 공간이나 동생들이 사는 곳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영계로 갈 뻔했다.
추운 겨울이라서 연탄을 갈아 놓고 동생들이랑 한 방에서 셋이 자다가 그만 연탄가스에 노출되고 죽을 경지에서 살아났다. 연탄가스가 상당히 많이 방에 침투하였다. 동생들은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어렴풋이 등이 차갑다는 느낌이 있었다. 동생들이 나를 메고 나와서 밖 차가운 땅바닥에 눕혔기 때문이었다. 의식을 잃은 나를 방에서 메고 나와 마당에 눕히고 인공호흡을 시키고 난리가 났다. 깨어나 보니 멀리 사는 사촌들까지 와 있었다. 창피하기도 하지만 걱정해 주는 이들이 많아서 고마웠다. 관심이 곧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셋째, 40일 전도기간에 친정 집으로 갔다. 첫째 아들을 데리고 쓰지 않던 방에 연탄을 넣고 잤는데 목이 말라 물을 먹으러 부엌으로 가다가 그만 부엌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전도를 위해 많은 활동을 했고, 경제적 빈궁으로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여서 발생한 빈혈 사건이었다. 연탄아궁이 위로 쓰러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엄마가 놀라서 보건소로 나를 업고 달렸다. 몸이 축 쳐져서 몹시 무거웠을 나를 업고 달리신 엄마의 그 사랑을 결코 잊지 못한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콧등이 찡하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염려하시는 엄마에게 “엄마,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괜찮아요.”라고 하니까, “너는 이런 지경에서도 하나님 찾니?”라고 핀잔을 하셨다. 통일교회에 들어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보시고 엄마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이 다 잘살기를 원하는데, 통일교회에 들어가서 고생을 하고 빈혈로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
세 번씩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살려주신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세 번 모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다가 연탄가스에 노출되었지만, 유난히 나만 위험상황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하늘부모님 천지인 참부모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40일 전도를 나간 기간에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교회 마당에서 시소를 타며 놀던 아들이 넘어져서 이마를 다쳐 세 바늘이나 꿰매는 일이 일어났다. 또 친정집에 가서 4촌 오빠네 2층에서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우연은 아닌 것 같고, 뭔가 탕감을 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6. 목회출발
동원기간에는 6000가정의 남편들이 동원되는 때여서 남편은 기독학생연합에서 근무를 했다. 그러나 생활비는 교통비 정도만 받아오고 나머지는 헌금을 했다. 그래서 어려운 생활에 보탬이 될까하여 장사를 해 보려고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친정과 시댁, 양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입장도 안 되어서 몹시 힘든 기간을 지냈다.
원리연구회와 기독학생연합에서 10여년 동안 활동해오다가 1986년 일반 목회로 충남 청양교회로 발령을 받았다. 청양교회는 식구가 많지 않아서 생활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전임 목회자의 수고로 유치원을 잘 운영하고 있어서 그럭저럭 생활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빚이 많았다.
처음으로 목회사모로 출발하는 나는 교회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에 상당히 무거운 마음이었다. 유치원에서 나오는 돈은 무조건 빚을 갚았다. 인수받은 금액을 2년여 동안에 걸쳐서 다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인수받지 않은 빚이 또 불거져 나왔다. 빚 덩어리의 무게가 나와 남편을 눌러댔다. 빚 걱정으로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끼고 또 아껴서 그것마저 다 갚고 이제는 돈을 여유 있게 써도 되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발령이 났다. 다행히 빚을 모두 갚고 오게 되었다. 후임자는 우리를 대신하여 좀 여유가 있는 목회를 했을 것이다.
7. 나주교회로 발령
1991년 환고향 섭리에 맞추어 전남 나주교회로 명을 받았다. 6500가정의 축복을 받고 일본의 선교사들 10명이 나주로 임지를 배정받아 왔다. 일본 선교사들은 4시부터 세계일보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배달하고 남은 신문은 아침식사 후 버스 정류장 등에서 팔았다. 그 돈을 모아서 선교사들에게 운동화를 사 주었다. 일본식구들이 한국에 와서 고요한 새벽을 깨우는 일을 하였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한국인을 감동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는 식사 때마다 20여명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물론 당번을 정해서 했지만, 선교사들에게만 식사준비를 맡겨둘 수만은 없었고, 내가 전체를 주관하였다. 그때만 해도 일본과의 교류가 별로 없던 때였기에 언어도 잘 통하지 못했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였다. 만약 우리들이 뜻과 심정을 토대로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가 같이 있는 것이 많이 어려웠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목사님의 뜻을 잘 받들어 주었고, 나 역시 그들의 보호자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그들을 보살폈다.
어느 날 선교사들과 목사님은 활동을 나갔고, 나 혼자 교회에 있었는데 동신대 학생이라는 청년이 교회를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오게 하고 차를 대접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면서 속으로는 전도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 기뻤다. 이야기 도중 그 학생이 “저는 이미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무엇이 준비 되었느냐?”고 내가 물었다. “일본인 선교사들이 내가 원하면 잠을 자 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참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우리교회의 타락론과 국제축복에 대하여 말해 주니까 많이 미안해하면서 “죄송합니다.”라며 돌아갔다. 아마도 일본 부인들이 한국말이 서툴러서 “시간이 되시면 함께 갑시다.”라고 하면서 교회로 안내를 하려는 것인데, “갑시다.”를 “잡시다.”로 잘못 말한 것 같았다. 언어의 미숙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나주교회는 평지이며 터가 넓은 편이었다. 전라도라는 말이 전주와 나주를 합한 말이라고 하는 역사적 배경을 갖는 만큼 나주는 살기가 좋은 곳이다. 전임 목회자가 교회 땅 18평정도가 옆집에 들어가 있는데 이사하든가 팔 때에 땅을 찾아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 옆집 주인은 예전에 간판을 우리 대문 기둥에 붙였는데 우리 공직자가 그 간판을 떼에 달라고 하니까 그냥 떼라고 하여 그 간판을 뗐다. 그런데 그 이웃이 경찰에 신고를 하여서 목회자가 갑자기 경찰에 붙들려가서 구류를 살았다.
어느 날 뭔가 소란스러워 알아보니까 그 집을 팔았단다. 새로 오는 사람은 그곳에서 식당을 하려고 왔다. 그는 흔히 말하는 나주의 조폭 두목이고 왕초였다. 뚱뚱한 체격에 가죽옷까지 입고 있는 전형적인 조폭 모습에 나는 위압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용기가 솟았고, 일단 측량부터 했다. 그리고 주인을 만나 교회 땅을 찾겠다고 하니까 주인 입장에서는 큰일이라고 하였다. 18평은 적은 땅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가건물도 하나 있었고, 측량상으로는 화단과 안방도 약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잃으면 땅을 찾기가 어려우니까 꼭 찾으려고 하는 우리와, 식당을 하기 위하여 집을 산 주인의 입장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그 주인은 주인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다녔다.
더구나 남편은 참부모님의 부름을 받고 미국에 가고 없었다. 내게 주어진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는 기도하며 하늘 앞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중심식구들과 모여 회의도 하였다. 그런데 다수의 식구들은 우리가 땅을 찾겠다고 할 경우에 새로 이사 올 왕초의 기세와 나주시 주민들의 편견을 염려하였다. 땅을 꼭 찾아야 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었다. 어느 식구는 밤늦게 전화로 항의하였다. “사모님은 다른 교회로 떠나면 끝이지만, 우리 식구들은 계속 여기에서 살아야 되는데, 조폭과 이웃하여서 살 수가 있습니까?”라고 큰소리로 따졌다.
어느 날은 중심식구가 나에게 따졌다. “왜 땅을 뺏으려고 합니까? 그 동안 평온하게 있었던 것처럼 그냥 있으면 나쁜 사건이 안 생길 겁니다. 왜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려고 하십니까?” 나는 설명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땅이 점령을 당했다가 이제 겨우 기회가 되어서 땅을 찾으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 그렇게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다 잘 될 겁니다.” 나는 마음이 아파서 기도실에 가서 엎드렸다. “하나님, 이것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 식구가 정말 밉습니다.” 하며 펑펑 울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말씀에 따라서 그 동안 나는 “누구든지 미워하면 안 된다.”고 믿어 왔는데, 그땐 정말 미웠다. 평소 그 식구는 신앙도 아주 좋은 분이었고 다정한 분이었다. 물론 나도 그 왕초가 두려웠고 속으로는 겁도 났다. 그렇지만 이런 기회에 땅을 찾아야만 할 것 같아서 싸우기로 했다.
다행히 젊은 학사장과 청년식구 몇 명의 도움으로 그나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밤이면 왠지 무서웠다. 여름을 맞이하여서 본부교회 식구가 고향이라며 나주에 오셔서 밤이면 성전에서 주무셨다. 그렇지만 나는 왕초가 쳐들어올까 봐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그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나는 잠을 안 자려고 커피를 마시며 밤을 지켰다. 때로는 작은 과도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주머니가 없을 때는 허리춤에 품고 잤다. 하루 밤을 지내는 시간이 그렇게 길고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남편도 없고, 나와 동조하는 식구도 없이, 나 혼자 그것을 감내하려니까 정말 힘들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무게가 어렴풋이 느껴졌고, 참부모님께서 통일교회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겪으셨던 고통들을 조금이나마 체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하늘은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같이하고 계셨다. “하나님 이것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 식구가 정말 밉습니다.”고 하며 펑펑 울다 나도 모르게 지쳐서 쓰려져 잠을 잔 그날 밤에 꿈을 꾸었다. “네가 생각한 것보다 10배나 더 너를 사랑한다.”는 굵은 바리톤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원 안에 내가 섭섭하여 밉다고 하는 그 식구님도 그 원안에 들어있는 환상이 보였다.
깜짝 놀라 깨어서 그 음성이 나는 곳을 바라보니 참부모님의 존영이 걸려 있었다. 예전 A타입 성전에 붙은 사택 방의 벽 중앙에 창문이 있기 때문에 벽면 안쪽에 존영을 모셨는데, 그 존영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나는 즉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참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회개하며 빌었다. 역시 하나님에게는 미움이 없는 것이었다. 식구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부모는 결코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여러모로 땅을 찾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어려울 때마다 꿈을 통해서 하늘은 내게 가르침을 주셨다. 큰 곰처럼 생긴 사람이 나를 잡으려고 쫓아오고 나는 잡히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을 갔다. 어느 길을 돌아가니까 대문 앞 계단에 40대 쯤으로 보이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첫눈에 그가 무술을 잘 할 것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내 옆으로 오면 막아 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세히 보니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봉사였다. 그것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해석을 했다. 그가 눈을 뜨고 있지만 봉사인 것은 그가 원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봉사로 보여준 것이라 나는 해몽하였다. 그러면서 오늘은 뭔가 해결이 되겠구나 싶었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였다. 아침 식사 후 청소를 마치고 있는데 손님이 오셨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시청에서 왔습니다. 땅 문제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 입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관련 서류를 보여주었더니 그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고 하고 그냥 나가버렸다. 나는 그 동안 동사무소에도 가보고 했지만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시청직원에게도 큰 기대를 안 했다. 까 도망을 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직원이 다시 와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옆집에서 땅을 내어 주기로 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잠시 멍했다. 내가 잘못 들었는가 싶었다. 그토록 어렵게 보이는 일이 순식간에 해결이 되다니 믿기가 힘들었다.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제발 현실이기를 바랐다.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되었다.
다행히 외국에 갔던 남편도 돌아오시어 목회를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가건물도 정리하고 담도 허물어 가벽을 만들었다. 옆집의 사정을 고려하여 적은 금액으로 임대해 주었다. 그 후 옆집 왕초는 “나도 통일식구가 되겠습니다.”며 스스로 찾아와서 입회원서를 썼다. 그는 성전에 큰 석유난로도 헌물하면서 충성스런 식구가 되었다. 우리 식구들이 염려하였던 것과는 전혀 달리, 다방 등 사람이 모인 곳에서 “통일교회만큼 좋은 곳도 없다.”며 자랑하고 다녔다. “인간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심중을 헤아리신다.”는 말씀이 이 왕초 식구를 통하여 입증이 되었다. 고독한 상태에서 초긴장상태로 투쟁을 해 온 나 스스로가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8. 환고향
1991년 환고향 섭리에 따라 남편의 고향 여수로 왔다. 여수출신 축복가정 중 몇 가정은 여천의 4층 건물에 거처지를 정하였고, 우리는 관문동 여수교회로 왔다. 교회에서 3가정이 사는 것도 좋다고 의논하여 아직 가정출발을 하지 않은 젊은 교회장을 모시기로 하고 교회로 들어왔다. 작은 방 2개에 살림을 풀었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고 작은아들은 아직 미취학이었다. 교회에서 살았지만 목사님을 모시면서 교회에 얹혀살지는 않았다.
6개월 정도를 교회에서 살다가 두 분 누나와 막내 동생의 도움으로 동초등학교 후문 이층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환고향 얼마 후에 참어머님의 순회강연이 전국적으로 있었다. 남편은 연합회장이라는 직분으로 환고향하는 선배들과 함께 전남 동부지역의 참어머님 강연회장소를 순천 팔마체육관으로 정하고 준비하느라 바빴다. 참어머님을 모시는 강연회를 위해서 식구들의 정성어린 헌금이 있었고 어려워서 못하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부족해서 죄송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자세를 갖자며 독려하였다.
준비회의 결과 결의문 낭독은 현장 식구 중에서 하도록 정해졌다며 내게 그 임무가 주어졌다. 준비 회의에서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정해진 상황이었으나 복종하였다. 성전에서 연습을 하였다. 마지막 “결의한다!”에서 군중의 “결의한다!”목소리가 끝나기 전에 내가 “결의한다!”라고 해야 맥이 끊어지지 않고 힘을 실어가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옷이었다.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원활하지 못하던 때여서 옷을 맞춰 입지를 못했다. 마침 투피스를 입고 있던 교구사모가 한복을 갖고 있어서 그 옷을 대신 내가 입었다. 다행히 딱 맞았다. 궁즉통(窮卽通)이라고 하는 말처럼 일을 놓고 집중을 하니까 이러저리로 짜서 맞출 수가 있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무대 단상에 앉았다. 단의 오른쪽으로는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이 자리하셨고, 왼쪽으로는 귀빈 몇 분과 더불어 나도 전면에 자리하였다. 참부모님을 모시고 하는 결의문 낭독이라서 식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연단에 서서 리허설을 하였지만, 긴장으로 떨리는 맘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하늘부모님 천지인참부모님이 보호하사 생각했던 것보다 더 결의문 낭독을 잘 해냈다. 결의문을 마치고 귀빈실에 참부모님께서 들어가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복도로 나오니 협회장 사모님께서 내 손을 꼭 잡으시면서 “수고했어요.”라는 격려의 말씀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주셨다.
지생년 사모님, 홍협회장 사모님, 이정옥회장님, 등 쟁쟁하신 어른들과의 기념사진이었다. 처음에 옷 때문에 걱정했는데 “어디서 그 옷이 났느냐? 아주 잘했다!”고 모두들 칭찬을 해주셨다. 칭찬을 들으니까 몹시 기분이 좋았다. “고래도 칭찬을 들으면 춤을 춘다.”고 하는데, 나 역시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시는 분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니까 마음이 고조되었다. 나도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많이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행사가 끝난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바로 전날 목포에서 결의문 낭독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순천에서는 결의문 낭독을 잘해야 할텐데.” 하면서 염려가 컸다고 한다. 걱정과 달리 모든 순서들이 잘 진행되었고, 내 일생에 있어서도 영광스런 시간을 가졌다. 참부모님께서 계신 식당으로 가서 경배를 올리니 참아버님께서 웃으시면서 “너희 중에서 누가 더 키가 크냐?”고 하시며 격려해 주셨다. 수택리에서 약혼 당시에 남편의 키를 두고서 생각했던 추억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연합회장으로서 3년쯤 일한 후에 여수 교역장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여수교회는 사방이 주택이다. 교회에는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큰 나무들이 있어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이 있고, 매미가 울어대어서 낭만이 있었다. 그러나 주위로부터 “나무가 너무 무성하니 좀 잘라주세요.”라는 요청이 오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