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에 들어서 필립은 메독의 네 일등급인 라피트, 마고, 라투르와 오브리옹에 무통을 더하여 다섯 연합 (Association of Five)이라고 알려진 한 기구를 설립하였다. 필립은 무통을 일등급과 일치시키려고 했고 이 연합이 형성됨으로 인해 비공식적으로 나마 실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53년 라피트가 무통을 이 그룹에서 내쫓음으로써 그의 꿈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필립은 라피트의 이와 같은 태도에 격로하였고 이를 일종의 선전포로 받아들였다. 두 집안의 경쟁관계의 불씨로 남아있던 선대 내서니엘과 알폰세 간의 불화가 이 사건으로 인해 무통의 남작 필립과 라피트를 운영관리하는 남작 엘리(Elie 1917-1989 )와의 라이벌 관계를 더욱 악화 시켰다. 이 사건 이후에도 라피트의 롯드쉴드 가문은 무통을 일등급으로 승격시키려는 필립의 끈질긴 시도를 방해하곤 하였다. 권위적인 에리와 풍류적인 필립은 기질과 성격면에서 판이하게 서로 달랐다. 이러한 성격의 차이가 서로 간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던 것이다. 1988년 필립의 사망으로 롯드쉴드 가문의 여주인이 된 필리핀(Philippine 1933-)의 말에 의하면 에리는 군을 지휘하는 장군과 같이 라피트의 종업원을 통솔하는 반면, 필립은 그의 침실에서 편안히 쉬면서 사업의 회의를 갖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공명 공감이 전혀 가능하지 않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큰 문제가 많이 존재하였다. 그래서 1974년 엘리의 뒤를 이어 라피트의 대표가 된 남작 에릭(Eric 1940- )은 한참 안 좋았던 때에는 그의 삼촌 에리가 만찬에 참석하기만 하면 "무통이 일등급이라고 천만에 무통은 이등급이야" 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 두 라이벌 집안 사이에 1961년 봄 이틀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으니 이날은 바로 무통의 주인인 남작 필립 롯드쉴드의 외동딸 필리핀 (Philippine 1933- )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결혼식이 열린 1961년 3월4일. 모든 롯드쉴드가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이 결혼 또한 굉장한 축제 파티였다. 필립은 필리핀을 위해서 미용사를 부르고 엄청난 양의 케비어와 샴페인을 준비하는 것 외에도 결혼하객을 파리부터 수송하기 위하여 기차를 전세 내기도 했다. 날씨마저 이 결혼을 축복했던지, 신부와 신랑 작크 세레이(Jacques Sereys)가 리무진을 타고 난초꽃이 일렬로 늘어선 샤토 무통에 도착하였을 때 날씨는 가히 환상적이였다.
검은 눈의 신부 필리핀은 어린 나이에 보르도를 떠나 파리에서 배우 수업을 받았으며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와 같은 스타와 함께 프랑스의 유명한 국립 극장인 라코메디 프랑세제(La Comedie Francaise)의 멤버로 활동했었다. 그녀는 결혼 당시 수상 격력이 있는 27세의 연극 배우였으며 그녀의 신랑 작크 세레이는 그 극장의 연출가였고 이들의 만남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들의 결혼식 날, 밴드는 전 마을을 행진하였고 거의 80명의 롯드쉴드의 가족들이 참석하였다. 이날 무통의 가족들이나 라피트의 가족들이나 다같이 감정이 고무되어 있었다. 결혼피로연에서는 양가에서 선택하고 상호 존경을 표시로 내놓은 와인들이 서빙되었으며, 서로를 자신의 샤또에 초대하여 대접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통에서 마련한 점심 식사에 필립은 1933년산(필리핀이 태어난 해)과 1928년 산을 대접했으며, 식사 끝 무렵에는 1869년산 무통을 대접해 라피트 집안을 환대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샤토 라피트의 저녁 만찬에서는 엘리와 그의 부인이 무통 롯드쉴드 1869년산 와인에 대한 정중한 답례로 1949년 산과 1926년 산 라피트를 대접하였다. 이날 이들이 보여준 화합은 과거의 적개심을 극복한 듯이 보였지만, 웃으며 대화하는 이면에는 칼이 감추어 있었다고 필립은 그의 자서전에 기록하였다. 여하튼 가족간의 분위기는 점차 좋아지면서 몇 시간 동안 등급 분류 사건은 잊을 수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팔대손에 이르는 롯드쉴드 가문의 왕성한 활동과 때로는 자원과 자본의 결속, 손익의 분배 등을 통해 빈틈없는 가족우애를 보여주었으나, 두 집안간의 긴장 상태는 1800년대 초 롯드쉴드 은행의 설립자들로부터 현재까지 참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협동과 경쟁, 이 두 상반된 상호 작용은 256년 동안 끊임없이 명문가의 결속과 명문가의 기업 성공을 유지시킨 원동력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부적으로 어떻게 보였든, 그리고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자아내었던 간에 롯드쉴드가의 무통과 라피트 두 집안이 벌인 와인사업의 경쟁은 지속되었고 점차 치열한 싸움으로 발전되었다. 1961년 필리핀의 결혼식에 보여주었던 두 집안의 평화는 그 후 필리핀의 아버지가 12년을 더 등급 싸움을 계속함으로 무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노력의 대가로 필립의 청원은 결국 모든 행정적인 난관을 통과하였고 결국 무통이 일등급으로 승격되는 데에 라피트 집안의 동의을 얻어네게 되었다. 보르도는 물론 세계의 훌륭한 와인이 되기 위해서 광범위하고 중대한 가격 경쟁을 벌여 왔던 롯드쉴드 가문의 난타전은 이로써 끝이 났던 것이다.
1970년대 초 두 샤또가 서로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렸고, 덩달아 보르도의 와인들도 가격을 상향 조정했으나, 1973년 무통이 일등급으로 승격되면서 이러한 폐단이 붕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라피트 롯드쉴드 가문은 마지막에 가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필립의 일등급 승격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라피트 롯드쉴드 가문은 필립의 일등급 승격은 그 지역 사회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1973년 에리는 드디어 그의 입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고 필립에게 무통 롯드쉴드의 일등급을 인정하고 더 이상의 반대를 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은 중대한 사건이었다라고 필립은 그의 자서전에서 회고하였다. 필립은 등급 분류 싸움 동안 가졌던 슬픔과 깊은 원한을 그 한순간에 기억에서 지워버렸고, 이를 자축하기 위해 그의 종업원들에게 제로보음(jeroboam: 6병들이) 1924년산 무통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일등급으로 승격된 샤또 무똥 롯드쉴드를 상속받은 필리핀(Baroness Philippine de Rothschild). 그녀는 남작 필립 롯드쉴드의 외동딸로 이밖에도 5등급 샤또 다미약(Ch. d'Armailhac)과 샤또 크레르 미롱 (Ch. Clerc-Milon) 또한 무통 까데(Mouton Cadet)는 물론 보르도의 제일 큰 네고시앙 블랜드를 상속받은 올해 68세인 활력이 넘치는 여성 기업가다. 그녀는 롯드쉴드 가문의 여성 중 보르도의 실질적인 대사의 역할을 하며 전세계 와인 제조자 중 가장 훌륭하고 활동이 두드러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바론 필립 롯드쉴드 주식회사(Baron Philippe de Rothschild S,A )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이 사회 회장이기도 하다.
필리핀은 카미이(Camille), 필립( Philippe), 쥬리앙(Julien)의 세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현재는 세레이(Sereys)와 이혼한 상태이지만 세레이는 바론 필립 롯드쉴드 주식회사의 이사로 남아 있다. 그들의 장남 필립은 (38세) 하버드 경영대학을 졸업하였고 차남 쥴리앙(29세)은 대학생으로 다같이 회사의 이사다. 이들 형제들은 가업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지만 이들의 누이 카미이(39세)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필리핀은 1970년대 말 아버지의 노쇠로 무통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세계 와인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1981년에는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망라한 무통의 유명한 예술가 레이블 시리즈의 첫 전시회를 주관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자신의 경영 능력을 과시했다.
" 필리핀은 모든 것을 대단히 잘, 대단히 빨리 이해를 하는 사업가이지, 대차 대조표나 보면서 그녀의 시간을 낭비하는 사업가는 아니다."라고 그녀의 장남 필립 세레이는 평했다. 그는 또 " 나의 할아버지의 성공은 할아버지 사람들이 함께 하므로 이루어 질 수 있었으나 나의 어머니의 성공은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장소에 적용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빈틈없이 운영하여 훌륭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세심한 주의를 늦추지 않는 꽤 까다로운 사람이고 완벽주의자다. 쉽게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녀의 참모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현재까지 그녀가 일궈 논 업적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1988년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회사의 와인 매출은 년 1백 3십만 케이스였던 것에 반해, 현재는 2백십만 케이스이다. 12년 동안에 필리핀은 바론 필립드 롯드쉴드의 매상을 배로 증가 시켜 10억 프랑, 달러로 1억5천54백만불(1999년 12월 31일 기준 환율)을 달성했다. 롯드쉴드가문의 은행가들은 이러한 그녀의 사업 성취를 극찬한다.
스위스에 기반을 둔 남작 벤자민은 사업에 그 같은 적극성을 발휘하는 롯드쉴드가의 여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하다고 극찬을 하며 그녀가 자신이 롯드쉴드 가문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롯드쉴드 가문은 가문의 진정한 사업은 오직 금융업이나 은행업이라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필리핀이 와인은 세계를 상대로 하는 생산이 될 것이고 만약 세계를 상대로 하는 사업에서 성공한다면 그 성공 또한 과히 나쁘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라피트가의 창시자인 남작 제임스가 그의 아들들에게 경고한 바였던 '롯드쉴드가 사람들은 은행가이지 농부가 아니다'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한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녀의 성공이 자신의 눈에도 '가히 나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활력을 띠고 있지만, 그녀는 이 사업을 과도하게 키우길 원치 않고 가족기업으로 남기고 싶어한다. 즉, 이는 그녀가 가족에게만 필히 보존되어 전해지는 그 어떤 조상 전래의 가보를 절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The Wine- Chateau Mouton Rothschild
무통은 요즈음 항상 일등급 수준의 와인만을 생산해 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라투르나 라피트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수준의 와인들은 질보다는 선호하는 스타일이 무엇이냐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지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무통은 라피트의 훌륭한 균형과 우아함에는 조금 못 미치고, 신비스러운 기교로 나쁜 해(bad vintage)에도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라투르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향의 진한 농도, 순수하고 풍부한 다량의 과일 향, 명백히 매력있는 마호가니 나무 향이 잘 익은 무통에서 하나가 되는 참으로 상쾌한 와인이다.
와인에는 인간의 개성과 예술이 녹아 있는데 이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와인이 표현 하는 바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포도원의 객관적 특성을 알려고 한다면 농장소유주의 자질을 알아야 한다.
그럼, 무통의 특성/개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여기에는 분명한 해답이 있다. 무통의 특성 뒤에는 남작 바론 필립 롯드쉴드가 있다. 즉, 심오한 지성을 가진 문화인이며 문예인이고 또한 전체적으로 이기적이 아닌 의식이 있는 화려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의 성격이 그의 와인에 표현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것이다.
무통은 틀림없이 일등급의 훌륭한 와인이다. 1971년부터 1981년 동안 생산되었던 몇 몇 빈티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리고 그 특징이 진한 색과 향기와 공명에 있지는 않은지 하는 소견으로 무통에 대한 소개를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