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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 목사의 이야기 신학
자신 찾기
음력으로 새해가 되면 사주를 보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토정비결을 뒤적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러한 이들이 많다한다. 오래 전, 어떤 선배목사님이 내게 농담으로 이런이야기를 했다.
“김목사 점집 차리는 것이 어때, ‘철학전공, 신학전공, 전직 목사, 기독교인 환영 !’이라고 광고하면 대박날거야”
농담으로 한 이야기 이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다. 혹시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목사출신 점쟁이나 관상쟁이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목사출신 점쟁이나 관상쟁이 혹 무속인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역사를 보면 충분히 예견될 수 있다.
고려시대 불교가 매우 번성했었다. 얼마나 불교가 번성했던지 고려말 인구의 30%가 불교승려였다. 승려들이 많다보니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다. 절에서 술을 주조해서 팔고, 절 밑 마을(사하촌)에 음식점을 차려놓고 접대부를 고용하여 퇴폐영업도 했다. 세도가의 지원을 받는 규모 있는 사찰들은 권세를 부리고 풍요로움을 누렸지만 훨씬 많은 작은 사찰들과 자기 사찰을 갖지 못한 승려들은 정말 먹고 살기위해서 중노동에 임하던지 그나마도 어려운 이들은 탁발을 하면서 살았다. 말이 탁발이지 빌어먹는 삶이었다. 그도 어려우면 무리를 지어 도적질도 하고 반란세력에 가담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승려들은 글을 모르는 무식쟁이 였다. 그러나 글을 읽을 줄 아는 승려들 중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사주나 관상을 보아주고 풍수쟁이 노릇을 하면서 호구지책을 삼았다. - 불교 승려 중에는 관상의 대가들이 많았다. 사실 관상법이라는 것이 그 유명한 달마가 시작하고 마의 라는 도사가 <마의상서>를 써서 나름으로 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에 의하여 등용된 보우도 관상학의 대가였다고 한다.
불교 뿐만 아니라 조선 말 유가도 그러했다. 유명한 서원들이 서원 밑 마을(서원촌)에 유흥업소를 운영하면서 큰 이익을 취했다. 조선 후기 신분제가 붕괴되고 호구지책이 막막한 몰락 양반들이 관상쟁이, 점쟁이, 지관노릇을 했다. 그러한 풍조가 이어져서인지 백범 김구 선생도 과거시험에 떨어지고는 관상쟁이가 되려고 <마의상서>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관상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관상을 보니 참으로 한심했다. 그러던 중 <마의상서> 내용 중에 像(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 觀相不如心相, 心相不如德相.(관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맘 좋은 것만 못하다. 관상은 심상만 못하고, 심상은 덕상만 못하다)는 글귀를 보고는 자신은 맘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맘먹었다고 한다.
불교 승려들이 그러했고 유가 선비들이 그러했던 것 처럼 기독교 목사들도 그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성직자가 10만 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중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호구지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목사, 심야에 대리운전을 하는 목사, 승합차 한 대 가지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생수송을 업으로 하는 목사들이 무수하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한때는 막노동판을 전전 했다. 식품회사 운전기사도 했고, 과외선생도 했고 학원강사도 했고 일용직 노동자도 했었다. 그것이 창피해서 숨기면서 몰래 했다.
목사들의 형편이 이러하니 호구지책을 위해서 목사들 중에 멀지 않아 점쟁이, 관상쟁이, 무속인이 나올 가능성도 충분하다. 사실 목사 중에 공개적으로 관상쟁이나 점쟁이 무속인으로 활동하는 이가 아직은 없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러한 활동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귀신을 쫓아낸다면서 꼭 무당 같은 짓을 하는 목사, 예언을 한다고 하면서 꼭 점쟁이 짓을 하는 목사, 충고를 한다고 하면서 꼭 관상쟁이 짓을 하는 목사들이 의외로 많다.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신년운세를 보는 것에서 시작했는데 글이 딴 곳으로 흘렀다.
인생의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의 삶에 찌들어서 쫓기듯 살아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뜻이 있는 이들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찾기다. 또 달리 말하면 자신을 찾는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찾는 것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心을 찾는 것이고 유교식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本性을 찾는 것이다.
자신을 찾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관상쟁이에게 자신을 묻고 점쟁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묻고 손바닥 발바닥에 자신의 인생지도가 그려져 있거니 생각하여 들여다본다.
운세를 보는 이들이 그것을 믿을까? 옛날 토정비결을 보는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너무 잘 맞으면 일을 안 하고 빈둥거리며 놀까봐 토정선생이 점괘를 적당히 뒤섞어 놓았다”고 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점괘가 안 맞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점괘는 맞아도 그만 안 맞아도 그만이다. 좋은 점괘를 얻었는데 나쁜 결과가 나오면 “네가 맘을 곱게 쓰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면 그만이다. 나쁜 점괘를 얻었는데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오면 “네가 맘을 곱게 써서 점괘가 바뀌었다”고 하면 그만이다.
옛날 중국의 연나라 사람으로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운 채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관상쟁이를 찾아갔다. 그때 관상쟁이 말하기를 “성인의 관상은 보아도 모른다.”고 했다. 그 관상쟁이는 제법 용한 관상쟁이인가보다. 채택의 사람됨을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알수 없음을 알아본 것이다. 아마도 채택의 관상이 바뀌었든지 채택의 관상이 관상쟁이의 인식용량을 뛰어넘어서일 것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슬프도다, 사람이 개나 닭을 놓치면 찾을 줄을 아는데 제 맘은 잃어 버리고 찾을 줄을 모르는 구나. 학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놓친 맘을 찾는 것이다.” -맹자 고자상-
고 했다.
학문을 해야 한다. 학문을 하여 놓친 맘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저 자신을 찾으면 뭐할까? 그 찾은 나가 참 나가 아닌 거짓 나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맹자가 한 말은 참 나를 찾는 것을 말한 것이겠지만 사실 나를 찾고 보면 그 나가 온통 죄 투성이 나고 허망한 나 인것을…. 거짓된 나를 찾았으면 이제 거짓된 나를 버리고 참나가 되어야 진짜 나를 찾은 것이리라. 진짜 나를 찾은 이가 성인이다. 진짜 나를 찾으면 그 안에 신의 모습니 어려 있는데 어떻게 관상쟁이가 알아볼 수 있겠는가?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거울로 삼는 이는 영원을 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내 자신이 나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남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면 동료들의 평가에 관심이 있고 좀 나은 사람은 선생님의 평가에 귀를 기울인다. 선생님의 평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동료들의 평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동료들의 평가는 선생님의 평가보다 편협 되고 또 시기와 질투가 포함될 수도 있기에 객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은 그 누구의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하늘이 알아주시는데 사람의 평가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세상이 알아주는 것은 현실적인 소망이요 하늘이 알아주는 것은 이상적인 소망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세상이 알아줌이 이상이고 하늘이 알아줌이 현실이다. 하늘은 알아주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다.
어떤 형태로든 옳은 삶을 살려는 이들은 하나님이 알아주신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면 되었지 뭘 더 바라겠는가?
-성서 연구-
나는 삯꾼이다 (요10장)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요10:11-13)
어떤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곳에서 여러분과 은퇴할 때 까지 살겠습니다.” 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갑자기 “오늘 설교가 작별설교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셨다” 하고는 훌훌 다른 임지로 떠났다.
어떤 성도들은 “큰 교회로 가시니 잘 된 일이다”고 하고 어떤 성도들은 배신감을 느겼다. 어떤 성도들은 거침없이 “참 목자인줄 알았더니 삯꾼목자였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 때,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와 적대국시민에 대한 압박으로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 때 성도들은 “어찌 목자가 이리들(일제) 앞에서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있느냐?”고 부르짖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어떤 목사들은 교회를 떠날 수 없다고 피난가지 않았다가 순교하기도 하였다.
참목자는 누구이고 삯꾼목자는 누구일까? 오늘날 목사들은 물론 역대 어느 목사도, 그가 성도들을 버리고 갔건 순교했건 관계없이 참목자는 없다. 모두가 삯꾼목자다. 목사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목사의 정체성이 바로 삯꾼이다.
나(필자)는 참 목자가 아니다. 삯꾼목자다. “주님의 종”이라 자부하는 목사들의 고백은 “예수님만이 참 목자다.”고 고백해야 한다.
참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다. 나는 참 목자가 아니기에 목숨을 버리지도 않고 버리고자 하지도 않는다. 혹 양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하더라고 그것은 충실한 삯꾼으로서 목숨을 버리는 것일 뿐 결코 참 목자라 해서는 안 된다.
삯꾼목자 이면서 제 스스로 참 목자인줄 안다면 건방진 일이다. 도둑이요 강도다. 나는 칭찬받는 삯꾼이고자 한다.
목자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자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가라!”, “때가 되면 가라!”
목자를 떠나 참 목자인 예수를 만나게 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붙들고만 있다면 목자가 아닌 강도이고 도둑이다. 제자들을 가르쳐 자기를 딛고 올라가는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고 졸업시키지도 않고 진학시키지도 않는다면 도둑놈이다. 가르침은 없고 조직으로 붙잡아 놓는 영적 교도소이다. 삯꾼이 삯꾼임을 인정하지 않고 참 목자노릇하고 있으면 불충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간혹 목사들 중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참목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참목자인줄알고, 참목자이고자 하니 그것이 문제다. 목사는 마땅히 “충실한 삯꾼”으로 칭찬받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
불타오르는 남대문(2008.2.10)
2008년 2월 10일 남대문(숭례문)이 소실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하고 6년 후인 1398년 2월에 건립되어 610년을 그 자리에 있다가 어이없는 방화에 의하여 소실되었다. 17대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보름 앞두고 일어났다. 남대문이 불타는 장면은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언론사들은 연일 특종보도하고 정치권은 책임공방으로 뜨거웠다. 시민들은 애도의 표시로 국화꽃을 가져다 두었고 불타 무너진 남대문을 보고 눈물짓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목조 문화재에 대한 대대적인 안전점검을 해야 한다고 호들갑들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괜히 심사가 뒤틀린다. 과연 문화재라는 것들이 그렇게 대단한가? 어찌 보면 모두 바벨탑 쓰레기들 아닌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문명이란 진정한 문명이 아니다. 문명의 찌꺼기이다.
시골 촌부들이 유럽여행을 갔다. 로마에 들렀는데 가는 곳 마다 무너진 돌덩어리들이다. 그 중 한사람이 투덜거린다. “우리가 이런 돌덩어리 보러 여기까지 왔나?” 옳은 얘기다. 권력자들이 쌓아놓은 권력의 쓰레기들, 민중의 살과 뼈로 세워놓은 인골탑이다. 그나마 부서져 돌기둥 몇 개와 돌무더기들이 대부분이다. 거지 밥그릇이다. 그 때 묻고 찌그러진 밥그릇 애지중지하며 관광객 끌어들여 밥벌이한다.
옛 문명의 거대한 흔적들은 자랑할 것이 아니다. 그 거대한 것들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을까? 조선말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서 당백전을 발행하여 국가경제가 파탄에 이를 정도였으니 거대한 토목공사와 건축공사들은 도무지 민중의 형편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폭정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200-4,600년 전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강제노역으로 시달렸을까?
2,200여 년 전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는 병마용을 만들고 만리장성을 쌓기 위하여 또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빼앗았을까?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는 1506년부터 1667년까지 161년의 기간이 소요되었으니 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로마교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면죄부까지 발행하였다.
남대문이 거대한 건축물이라고는 하나 피라미드에 비하고 병마용에 비하고 베드로성당에 비한다면 소박한 수준이니 자랑한다면 오히려 그 소박함을 자랑하고 그 규모작음을 자랑해야 할 것이다.
-논어 읽기-
향당 8장 食(식)不(불)厭(염)精(정), 膾(회)不(불)厭(염)細(세). 食(식)饐(의)而(이)餲(애), 魚(어)餒(뇌)而(이)肉(육)敗(패), 不(불)食(식). 色(색)惡(악), 不(불)食(식). 臭(취)惡(악), 不(불)食(식). 失(실)飪(임), 不(불)食(식). 不(불)時(시), 不(불)食(식). 割(할)不(부)正(정), 不(불)食(식). 不(부)得(득)其(기)醬(장), 不(불)食(식). 肉(육)雖(수)多(다), 不(불)使(사)勝(승)食(식)氣(기). 惟(유)酒(주)無(무)量(량), 不(불)及(급)亂(난). 沽(고)酒(주)市(시)脯(포)不(불)食(식). 不(불)撤(철)薑(강)食(식). 不(불)多(다)食(식). 祭(제)於(어)公(공), 不(불)宿(숙)肉(육). 祭(제)肉(육)不(불)出(출)三(삼)日(일). 出(출)三(삼)日(일), 不(불)食(식)之(지)矣(의). 食(식)不(불)語(어), 寢(침)不(불)言(언). 雖(수)疏(소)食(식)菜(채)羹(갱), 瓜(과)祭(제), 必(필)齊(제)如(여)也(야).
(음식은 정갈한 것을 싫어하지 않았고 회는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쉰밥과 생선과 고기의 상한 것을 먹지 않았다. 빛깔이 나쁜 것, 냄새가 고약한 것, 익지 않은것, 제철이 아닌 것, 바르게 썰지 않은 것은 먹지 않았다. 음식에 맞는 장이 없으면 또한 먹지 않았다. 고기가 많다하더라도 밥보다 많이 먹지는 않았다. 오직 술에는 그 양의 한계를 두지 않았는데 난잡한데 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시장에서 사온 술과 고기는 먹지 않았고 늘 생강을 먹었으며 과식하지 않고 공적 제사고기는 밤을 넘기지 않았으며 가정에서의 제사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았다. 3일이 지난 것은 먹지 않았다. 식사 시에는 말하지 아니하였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말하지 않았다. 비록 거친 음식이라도 식사 전에는 고수레를 하였는데 필히 목욕재계하듯 정성껏 하였다.)
언뜻 보면 공자의 식생활이 까다로운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평범하고 당연한 식생활이다. 당연히 깨끗한 음식을 먹었으며 부패한 음식을 꺼렸을 것이다. 생고기를 덩어리째 입에 넣고 씹는다는 것이 좀 야만스러울 것 같아서 거부했을 것이다.
중국, 일본, 한국의 음식문화를 비교하자면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음식문화는 불을 잘 다루는 데 있다. 중국인들은 주로 火食을 한다. 이에 비하여 일본인들은 生食을 한다. 서양에 일본인들이 소개되기를 “생선을 날로 먹는 나라”라고 소개될 정도이다. 우리나라 음식의 특징은 발효음식이다. 특히 콩 음식이다. 콩은 만주와 한반도가 원산지 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는 콩 음식이 크게 발달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두부, 비지, 콩나물 등인데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등의 발효음식이 기본이다. 이외에도 발효음식으로 김치가 발달했는데 김치도 수많은 종류가 있고 또 개발되고 있다. 생선도 발효시켜서 먹는다. 굴비, 홍어, 각종식해(가자미식해, 동태눈깔식해 등등...) 그 뿐인가? 각종 젓갈류가 수도 없이 많다. 실로 우리나라의 음식은 발효음식이 많이 있다.
한국음식은 발효음식이 많기에 음식의 냄새가 고약하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접하기가 쉽지 않다. 서양에는 대표적인 발효음식으로 치즈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치즈는 우리의 입맛에 맞는 것으로 선별된 것이지만 저들이 먹는 치즈는 종류도 다양하고 타문화 사람들이 접하기에는 매우 힘든 음식들이다. 어쨌든 음식의 절정은 발효식품에 있는 것 같다. 발효 식품의 깊은 맛을 어찌 알겠는가?
중국음식에도 발효음식이 있었겠지만 공자시대에는 발효음식이 발달하지 못했으리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은 대체로 썩은 것으로 먹을 수가 없었다. 혹 먹을 것이 없어서 부패한 음식을 먹을 경우에는 십중팔구는 식중독에 걸려 고생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먹거리가 부족하고 냉장고와 같은 음식보관시설이 없어 상한음식을 먹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인지 식중독이 자주 발생하였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수명이 크게 증가하는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유럽으로 감자와 옥수수가 전래된 이후이다. 유럽인들의 식량사정이 좋아지면서 수명이 늘었다. 인간의 수명이 짧았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영양부족 이었다. 기근으로 인하여 질병에도 쉽게 걸렸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1608년 고구마의 전래가 인구증가에 큰 기여를 하였다. 당시 1억 명 정도의 중국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아 4억으로 늘어났다. 또 한 번의 큰 증가는 냉장고의 보급이다. 냉장고의 보급으로 식품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었고 식중독이나 콜레라 등과 같은 식품으로 인한 질병이 줄어들면서 수명이 늘어나게 되었다. 공자께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굶지 않을 수 있었고 또 위생적인 식생활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9장 席(석)不(부)正(정), 不(부)坐(좌). 鄕人(향인)飮酒(음주), 杖(장)者(자)出(출), 斯(사)出(출)矣(의). 鄕人(향인)儺(나), 朝服(조복)而(이)立(립)於(어)胙(조)階(계).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동리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는 어른이 먼저 자리를 뜬 후 자리를 떴다. 동리사람들이 나제를 드릴 때는 조복을 입고 계단에 서 있었다.)
이 장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나 이 장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이야기 한다.
조상님 제사에 필자도 여러 번 참석했다. 기독교인은 제사하지 않는 것이 통례인 우리 사회에서 목사인 내가 제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좀 어색했다.
제사에 임하되 절하지 않고 옆에 서 있기만 하였더니 어떤이가 “목사는 조상도 없느냐?”한다. 다음제사에는 참여하여 분향하고 절을 하였더니 또 어떤이가 “목사도 절을 하느냐? 사이비 아니냐?” 한다.
제사가 끝나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해에는 이러하고 금년에는 이러하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했더니 숙고한 끝에 어른 되는 분이 결정을 내린다. “목사님께서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참여하신 것이 고마우니 차후로는 목사님을 비롯해서 우리 집안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절을 하던 하지 않던 문제 삼지 않을 것이며 다만 제사자리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라”했다. 현명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결정이 모범이 되었으면 좋겠다.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고루한 유가와 제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근본주의적인 기독교로서는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민과 갈등을 했을까? 세월이 좀 더 지나고 사람들이 좀 더 성숙해 진다면 갈등은 많이 완화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 이야기 신학 50호에 글을 보내주신 조수현목사님과 이건종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독자들께서 글을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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