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원없이 돈을 써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자신있게 ‘있다’이다. 수년전 창사 특집을 엮으려고 서아프리카 가나로 취재를 갔을 때 일이다. 체류비조로 가져간 경비를 현지돈으로 환전하니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심한지 돈의 부피가 가져간 여행 가방으로 하나가 됐다. 그 나라에 머무는 동안 호텔비며, 식비며 계산을 할 때마다 부호처럼 원없이 돈을 뿌려봤다.
이와는 좀 다른 경험이지만 터키에서도 돈쓰는 재미를 쏠쏠하게 느껴봤었다. 당시 터키쉬리 환율은 1달러당 2,000,000TL. 그러니까 TL대신 ‘원’을 붙여 말하면 커피 한잔값에 600만원, 화장실 1회 사용료가 100만원, 식사 한끼 값이 보통 1억원이 넘는 환율이었다.
한국에서 비리가 터질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억’‘억’하고 불리던 그 꿈같은 단위를 터키에서 실컷 이용해 봤다.
그러나 전 세계 국가 중 1달러당 화폐가치(단위)가 가장 낮아서 늘 화제가 됐었던 터키는 올해 초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해서 1달러당 1.356 YTL(New Turkish Lira라는 뜻)로 환율을 조정했다. 그러고나자 우리나라 화폐단위가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가 됐다.
터키가 한자릿수로 환율을 변경하고 나니 OECD 국가 중 한국이 유일하게 미국 달러화에 대해 4자릿수 환율을 유지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물론 화폐가치가 낮다고 해서 우리의 경제규모가 평가절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해말 영국의 경제전문잡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몇년사이 약 50개국이 화폐단위를 변경, OECD국가중 한국의 화폐가치가 가장 낮으므로, 한국도 1유로당 1원 수준으로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화폐단위 변경을 심각하게 고려할만한 시기가 됐다.
그러나 화폐를 1000분의 1로 줄이는 리디노미네이션이나 고액권 발행 등이 경제생활에 혼란이 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인지 정부와 한국은행은 내년 초부터 도안을 바꾼 새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으로 개혁의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단계적으로 새 화폐로 바꿔 나간다고 한다.
크기도 줄이고 색상 등을 포함한 디자인도 바꾼다는 것이다. 디자인을 바꾸는 것은 최근 기승을 부리는 위조 지폐를 막기 위한 기능적인 차원에서다. 위조 지폐 문제는 정말로 심각하다. 컬러 프린트가 정교해지면서 위조 지폐 발생횟수가 연평균 51%나 증가할 정도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새로 만드는 화폐는 각도에 따라 형태와 색채가 변하는 홀로그램, 숨겨진 그림과 미세 문자의 적용 요철 인쇄 등 위폐 확산을 예방하기 위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에 새로 만드는 화폐의 크기를 줄이겠다고 정한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지폐는 쓸데없이 크기만 커서 시대감각에도 맞지 않았다. 달러화가 기준은 아니지만 달러화는 작고 세련돼서 지갑에 넣고 다니기가 편한데 비해 우리 지폐는 불편한 편이었다.
이제 새 지폐가 만들어지면 20여년만에 디자인이 바뀌어지는 것이다. 20여년 전의 감각이 지금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세련되게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디자인은 바꾸되 화폐 속의 인물은 변경하지 않겠다는 한은 측의 발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세종대왕, 이율곡, 이퇴계 모두 존경할 만한 역사 인물들이다. 그러나 새 지폐를 만들기로 한 이때 국민적 여론의 수렴이 없이 당국이 일방적으로 화폐 속 인물을 정하는 것은 너무 졸속적이고 행정편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나라의 화폐를 새로 디자인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일이다. 화폐는 그 민족의 문화와 정서, 기술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상징물이자 국가를 대표하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한국의 지폐에선 한국의 정취와 이미지가 배어나는 디자인이 돼야 한다. 이는 지폐의 등장인물이나 상징물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20여년 만에 바꾸는 화폐 인물 중 국민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을 배제하는 것은 너무 편파적이다. 누구를 넣자, 빼자는 의견이 아니다.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화폐를 만들기 위해선 장기적 안목으로 신중하게 디자인을 결정해야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