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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예수재림
1.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예수재림의 때는 언제인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승천하신 뒤 지금까지 성도들은 항상 예수께서 언제 다시 오실는지 궁금하게 여기며 그의 오실 날을 기다려오고 있다.
초대교회때부터 지금까지 주께서 언제 오실 것인가에 대하여 그때와 시기를 예언하는 허다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때마다 성도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고 또는 이러한 예언들로 인하여 소망스럽지 못한 부작용과 사건들도 종종 일어났었으며 지금 현재도 그러한 상황 속에 있다.
예수 재림이 아무 날 어느 때에 있으리라고 예언하는 사람들 거의 모두는 환상이나 꿈이나 기도 중에 음성이나 또는 입신 등으로 받은 계시에 의하여 그 시기와 때를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경말씀의 근거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는 환상을 보고 예언할 것이요(욜2:28이하, 행2:17-18)
내가 나의 큰 심판을 행하기 전에 반드시 나의 종들에게 그 비밀을 보일 것이며(암3:6-7) 너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살전5:4)는 말씀을 대체적으로 인용한다. 그리고 주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으니 (마24:37-38, 눅17:26-27) 홍수의 멸망을 하나님은 노아에게 미리 알리셨고 소돔 고모라의 멸하심을 아브라함에게 먼저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주의 재림의 시기도 하나님의 종들에게 먼저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2.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뒤 지금까지 이천년 동안 주의 재림에 대한 때와 시기를 예언한 이들이 많이 있었고 그러한 예언들 때문에 소동이 또한 많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강력했고 진실로 성도들이 확실하게 주의 재림을 믿었던 때가 바로 베드로와 사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초대교회시대였다.
그 당시 그들은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믿었었다. 저들의 주 재림에 대한 확신은 꿈이나 환상이나 계시에 의함이 아니었고 예수께서 살아있는 동안에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직접 저들에게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을 초대교회때 너무나도 확실히 믿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감람산에서 제자들은 심각하게 주님께 주의 재림에 대하여 질문하였다(마24:3).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생활한 주님의 공생애 삼년 동안의 후반기에 예수께서 자꾸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며 사흘만에 살아나고 아버지 집으로 가셨다가 저들의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와서 저들을 데려가시겠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나의 가는 그 길을 알리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무척이나 당황하고 두려워 하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하시니 주님이 감람산에 앉았을 때 심각하게 질문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며 주의 재림의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물었다(마24:3)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신 말씀의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병정들에게 철저히 부숴짐을 당하는 것과 주의 재림에 대한 두 가지를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이 두가지 내용을 분리시켜 들을 수 있는 귀가 도무지 없어 예루살렘성전의 무너짐과 주의 재림을 동시 사건으로 보았던 것이다.
수천년 동안 구세주에 대한 소망과 함께 시온의 영광이 회복될 날을 고대하면서 기다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세의 장막부터 지켜온 거룩한 예루살렘성전이 돌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뜨림을 당하리라는 말씀하심을 듣고 이 때가 곧 세상의 종말이요
이 세상에 대하여 진노하신 하나님이 이세상에 대하여 진노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셔서 시온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니 제자들은 또 다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고 예수께서는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고 예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라(행1:6-7)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리워 가신 것이다. 이때부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동안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보혜사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일백이십여 문도의 성도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가 곧 임박하였다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믿게 되었고 성령 충만함한 이들이 모여 이루어진 예루살렘 교회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으므로 네것 내것 할 것 없이 모든 물건을 한곳에 모아 두고 서로서로 기쁨으로 유물상통 하였으며 이러한 분위기에 휩싸여 얼떨결에 일어난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이하 사도들의 서신서에는 때가 임박하였다는 내용과 종말로 라는 표현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초대교회 때의 성도들은 주께서 이세상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가 임박하였음을 너무나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저들의 믿음대로 그때 재림하시지 않았으며 그리고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수많은 예언들이 있었으나 한때의 소동으로만 끝났었다.
3. 주님은 이 세상에 언제 다시 오실 것인가. 우선 분명한 것은 예수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을 향하여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셨다(마24:36).
오늘날 주님의 재림에 관한 때와 시기를 성도는 알 수 있다고 하여 예언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경말씀으로 요엘서2장 28절 이하에 기록된 환상과 꿈과 예언에 기초함도 불분명하며 아모스3장 7절의 말씀도 명확하게 뒷받침이 되지 못한다.
데살로니가전서5장 4절에 기록된 말씀인 성도는 빛의 아들이니 어두움에있지 아니하여 도적 같이 임하지 못하리니 주님의 재림으로 알수있다 하는 것도 잘못된 설명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으로 말씀하시는 대상은 예수를 믿는 제자들로서 빛의 자녀들이며 동일한 내용의 말씀으로 주님은 마가복음13장에서와 누가복음21장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때와 시기를 모른다고 하셨고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눅12:40)고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혹 저기있다 하여도 믿지말고 (마24:23)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26-27)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니라(행1:7)
성경말씀은 많은 곳에서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살전5:2, 벧후3:10). 데살로니가전서5장 4절의 말씀으로 성도는 빛의 아들이니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여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는 뜻은 성도가 주의 재림하시는 그때의 시기를 안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은 어두움의 자식이기 때문에 주의 날이 밤의 도적같이 임하여 저들은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니 성도는 빛의 자녀들이라 주의 날이 밤의 도적같이 임하지 아니하여 멸망치 않고 구원받아 해같이 빛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성도들에게 멸망의 권세가 임하지 아니하도록 깨어 있으라(마25:13), 예비하고 있으라(눅12:40). 길이 참으라(약5:7)너희가 흠없이 보전되도록 하라(살전5:23)고 열심히 주의 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는 천국을 소유하였다는 뜻이고(마25:1-13)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나(눅12:35-40)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게으른 종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주인이 이르러 엄한 형벌에 처하게 됨의 말씀도(눅12:41-48) 모두 예수를 믿는 성도가 오래 참으며 항상 깨어 있어 멸망받지 않도록 하라는 주님의 사랑이신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5장 4절의 말씀도 성도는 빛의 아들이라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하라(살전5:6)고 하시므로 성도가 어두움에 처하지 아니하도록 자지말고 깨어 근신하라에 더욱 말씀의 중심을 두고 있다. 그날이 도덕 같이 임하지 못한다에서 못한다의 뜻도 아니한다와 달라서 빛의 아들들은 결코 멸망받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언제 다시 오시는가 우리는 그 시기와 때를 아무도 모른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시기 때문에 예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마24:44). 인자의 임하시는 그때를 안다면 항상 예비하고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 주님이 오시는 그때에만 깨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와 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 예비하라시는 것이다.
4. 빛의 아들들인 성도는 주님의 재림의 그때를 분명히 안다. 그러나 재림의 때를 안다는 것은 아무 날 아무 시에 오신다는 그 때의 뜻함이 아니고 주께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그 때를 징조들을 여러 군데에 자세히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항상 듣고 있는 우리는 주께서 오시는 그 때를 반드시 알 수가 있다는 뜻이다.
다음의 천년왕국 항목에서 자세히 언급되겠지만 요한계시록 등을 통하여 주님의 오시는 때와 징조에 대하여 많은 곳에서 너무나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재림의 때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때가 아무 날 아무 시라고는 결코 알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은 빛의 아들이라 주님 재림의 시기를 알 수 있다함은 이와 같으니 곧 주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공중재림하면서부터 삼 년 반 동안의 큰 환난이 있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성도들은 천사들이 일곱개의 인을 떼는 환난 중에서 여섯째 인까지의 환난을 통과하고 일곱째 인의 환난이 시작되기 직전에 공중으로 들림받게 되는데(계7:9-17,계41:12-16) 주님은 이러한 환난을 성경말씀으로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주시고 있으므로 성도들은 진행되어가는 환난을 보면서 이 다음의 차례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또 그 다음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언제 들림받는다 이제 우리의 휴거의 때가 다 되어간다는 등으로 그때와 시기를 분명하게 알아 빛의 아들인 성도들에게는 그 날이 결코 밤에 도적같이 임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시편 107편의 말씀(시107:23-32)을 마태복음(마8:23-27)에서 이루시고 있는데 이 시편의 말씀을 온전히 잘 알고 있지 못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이 무서워 떠니 예수께서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고 꾸중하심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된 경의 말씀으로 알려주신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면 바다 위에서 광풍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광풍은 주님이 일으키시는 것이고 그 광풍의 다음 순서는 당연히 제자들을 잔잔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인즉 제자들이 도무지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빛의 아들들인 우리에게는 주께서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들을 성경말씀으로 이미 자세히 알려주시고 있기 때문에 그 때와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이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없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인자의 임함은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하신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주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먹고 마시고 장자가고 시집간다는 세상의 풍조를 말한 것이지 그 때와 시기를 안다는 뜻은 아니다(마24:37-38).
물론 노아의 때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그 때와 시기를 칠일 전에 알려주셨다.(창7:4).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에게 그 시기를 말씀하신 때는 이미 노아에게 그날 바로 방주에 들어가라고 명하신 날이었고(창7:1-5) 그리고 칠 일 후에 홍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천사들의 나팔소리로 임하시는 주 재림의 때에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이 들림받아 공중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고 성도들이 공중에 들림받은 후 주께서 지상에 재림하시는 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는 결코 방주를 짓기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수십년 동안 방주를 준비하면서 홍수 심판의 때를 알지 못하였다. 지금은 주께서 말씀으로 완벽하게 주 재림에 대한 시기와 징조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시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 외에 따로 환상이나 계시로 그 때와 시기를 아무 날 아무 시라고 말씀해주실 이유가 없다. 우리는 말씀에 의하여 주재림의 때를 분명히 안다. 그러나 그 때를 아무 날 아무 시라고는 결코 알지 못한다.
5. 예수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님의 재림의 때와 시기를 분명히 너희는 모른다고 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때와 시기에 대한 징조를 열심히 설명하시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가 주 재림의 때에 관하여 상고해 보되 그 때를 추정해 보려는 자세를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등의 계시에 의하지 아니하고 기록된 말씀을 근거하여 말씀안에서 찾아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과 누가복음21장 5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은 예수께서 감람 산에 앉으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동일한 내용의 사건이다.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왔을 때 예수께서 이 성전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고 이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심각하게 그 때와 그 징조에 관하여 질문함으로 주님의 말씀이 있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표상인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승천 하신 후 주후70년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때 법궤도 가루로 빻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법궤가 곧 하나님인 유대인들은 법궤의 가루됨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지금도 구예루살렘성전 장소인 지금의 회교사원 황금돔 안의 어떤 지점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법궤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으로 자기들의 점령지 안에 있는 회교사원이지만 만약 그 안에 잘못 들어갔다가 그 법궤를 다치기라도 하면 즉시의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온 세상의 관광객들은 다 들어가지만 자기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회교사원의 건물 밖에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을 부여잡고 법궤를 찾아 시온의 영광이 이루어질 것을 통곡하며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사랑을 다 이루신 뒤에는 예루살렘성전도 법궤도 이 땅에서 모두 필요 없게 되었음을 유대인들은 모르고 있다.
예수께서 감람산에 앉으사 제자들에게 답변하신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때와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재림의 때를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재림의 때를 겸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21:35).
6. 많은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한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고 이런 일이 있어야 하지만 끝은 아직 아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다. 그때에 성도들이 예수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고 사람들이 성도들을 환난에 넘겨주며 죽인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4-14) 이 세상의 끝이라고 할 때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주님이 이세상에 재림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재림하신 주님의 천년왕국이 다하고 이 세상의 완전한 종말을 말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의 끝은 주님의 재림을 뜻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스스로 구세주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시킨다. 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는데 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판단하기는 좀 어렵다. 성도들이 예수 이름 때문에 미움받고 환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직은 그러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다.
불법이 성하여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 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4-14) 이 세상의 끝이라고 할 때 두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주님이 이세상에 재림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재림하신 주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재림하신 주님의 천년왕국이 다하고 이 세상의 완전한 종말을 말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의 끝은 주님의 재림을 뜻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스스로 구세주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시킨다. 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는데 이것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판단하기는 좀 어렵다. 성도들이 예수 이름 때문에 미움받고 환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직은 그러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다. 불법이 성하여 사람의 사랑이 식어짐은 이미 이 세상에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천국복음이 온세상에 전파됨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마태복음 24장 4절로 14절까지의 말씀으로는 주 재림의 시기를 추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7.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유대인들은 급히 도망하라 이때에 큰 환난이 있겠는데 이 환난은 창세 이후 가장 큰 환난이다. 마태복음 24장 15절로 31절까지의 내용은 예수께서 공중재림하시면서 시작되는 대환난을 뜻한다.
다음에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설명하겠지만 요한계시록은 거의 모두가 주님이 재림하시면서 있을 큰 환난에 대한 내용이다. 주께서 공중에 재림하시고 일곱 인으로 인봉한 책의 첫째인을 떼시면서 시작되는 환난(계6:1)의 내용이 바로 마태복음24장 15절이하에 기록된 큰 환란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바다에서 올라오는 참람된 이름을 가진 짐승(계13:1)이며 이 짐승은 용으로부터 마흔 두달의 일할 권세를 받아 하나님께 대항하여 (계13:1-10) 예루살렘의 거룩한 곳에 설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된다. 참란된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다(마26:63-65).
주께서 이 세상에 임하시는 징조는 참람된 이름을 가진 짐승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곳에 서는 때를 기준하여 이의 전에 있을 세상징조(마24:4-14)와 이의 후에 있을 큰 환난(마24:15절 이하)으로 구분된다.
큰 환란의 시작은 이미 주께서 공중재림하시고 진노의 첫째인을 떼실 때이다.
8.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서(마24:32-34) 이스라엘의 독립이 1948년에 있었고 이때로부터 한 세대인 사십년을 계산하여 1988년이 주재림의 때라는 추정도 있었으나 이 또한 실현되지도 않았지만 무리한 해석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고 (마24:37, 눅17:26) 롯의 때와 같으리니(눅17:28-29) 인자가 올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하셨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세상에 알리시면서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천년을 하루 같이 참고 기다리신다(벧후 3:8-9). 마지막 날에 온 세상이 모두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오직 노아 한사람만이 믿을때까지 기다리시며 오직 롯 한사람만이 믿을때까지 오래 참으신다.
인자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는 더 이상 구원할 자가 없다고 판단하실 때이다. 아직 우리는 우리의 복음을 전할 대상이 너무나 이 세상에 많다. 그러나 세상은 부요해지고 완악하여져서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하나님과 멀어져 가고 있다. 오래지 아니하여 세상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 노아의 때와 같이 되고 롯의 때와 같이 되리라.
9. 노아의 자손은 셈과 함과 야벳인데(창5:32) 홍수 후에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웠을 때 둘째 아들 함이 이를 보고 두 형에게 말하였고 두 형은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서 노아의 하체를 옷으로 덮었다(창9:20-23). 이를 인하여 노아는 함의 네 아들중 하나인 가나안의 이름을 들어(창10:6) 그 형제의 종이 되라고 저주하였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야벳은 창대하고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고 축복하였다(창9:24-27). 노아는 함에 대한 저주를 함의 아들 가나안의 이름을 사용하여 저주하였는데 함은 뜨겁다는 뜻으로 애굽을 말하며(시78:51, 시105:23-27) 함의 장자 구스는 검다는 뜻으로(렘13:33) 아프리카 지역을 말한다(겔29:10).
셈의 노아의 장자로서 아브라함의 조상이며(대상1:24-28) 야벳은 노아의 삼남으로 그 족속들은 소아시아와 유럽에 정착하였다.(창10:2-5).
이러므로 셈은 황인종이고 함은 흑인종이며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이 노아의 입을 의탁하사 선포하신 말씀대로 함은 이미 저주를 받은 상태이고
야벳은 창대하게 되었으니 그러나 아직 백인이 황인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술취해 벌거벗은 아비의 하체를 본 세 아들의 행사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이 어떠한 뜻인지 모르겠으나 백인이 황인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백인이 황인에게 신세지고 의지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에 대한 인류의 예언의 말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0.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홀연히 인자의 임함이 있으리라(살전5:3)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예수 재림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부인할 터이요(벧후 3:3-5) 예수를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요일2:18)와 배도하는 일이 있으리니(살후2:3)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고 인자의 임함이 있으리라 세상은 마지막 때로 갈수록 평화를 외치고 죄악이 관영해지고 불법이 성하여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
예수를 부인하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분명한 배도의 일이 있게 된다.
주님이 재림 하실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분면한 세가지의 현상으로는
첫째가 사람들이 서로 평안하다 할 것이요(살전5:3)
둘째는 주님을 믿는 자가 점점 적어질 것이요(눅18:8)
셋째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하게 되는 것이다(마24:14).
그리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볼때는 이미 주께서 공중재림하시고 큰 환난이 시작되는 때이다.
11. 이것으로 성경에 기록된 주 재림의 시기에 대한 말씀으로 그 때를 알아 보려고 하였지만 알 수가 없다. 이외에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와 예레미야, 에스겔 및 다니엘 서 등에 주의 재림에 대한 말씀이 있고 소선지서 등에 더러 기록되어 있지만 대부분 재림과 함께 있을 하나님의 진노와 천년왕국의 영광에 대한 말씀이고 재림의 시기가 언제일 것임을 뚜렷히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면 언제 주님이 오실 것이며 그때와 시기는 어느 때일 것인가 오늘날의 현 시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의 상황을 보고 우리의 판단으로 주 재림의 때와 시기를 알 수 있을 것인가. 공해로 인한 환경의 파괴로 지구의 종말이 있을 것인가. 전쟁으로 인한 폭탄으로 지구가 터져버릴 것인가. 인구가 과잉증가하여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음으로 인하여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인가.
처처에서 일어나는 질병과 기근과 지진과 살인과 범죄 등으로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올 것인가 유럽의 통합이 신생로마제국의 탄생이며 이것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되는가. 분명한 것은 이 땅과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받았고 또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지을 당시에 그 동일한 말씀으로 없애기 위하여 빛이 있으라 하신 것과 같이 불살라 없어질지어다 라는 말씀을 이미 선포하여 놓았으며(벧후3:7) 다만 하나님이 우리 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모두 회개하기에 이르도록 (벧후3:9) 하나님의 때까지 천사들로 땅의 네 귀퉁이를 붙잡아 보존하여 두시고 있는 것이다(계 7:1).
이 땅의 전쟁이 이 세상의 종말을 만들지 못하며 공해가 이 세상의 끝을 만들지 못하며 인구폭발이 이 세상을 마감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미 선포된 말씀이 살아 운동하여 (히4:12) 이 세상의 끝을 완성한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시니 하나님의 경륜을 시작하심도 하나님이 하시고 끝마치심도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
공해나 전쟁이나 인구폭발 등의 피조물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경륜이 종결되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결코 인간에게 맡기시지 않는다. 말씀은 빛이라 고무풍선과 같은 흑암의 우주를 바늘 끝으로 찌르듯이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우주와 온 세상은 순식간에 터져 사라지게 된다.
주 예수는 언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 때와 시기는 어느 때일 것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그 때와 시기를 분명히 모른다고 하시면서 또 열심히 그 때와 시기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주시고 있다.
꿈이나 음성이나 환상은 희미한 안개와 같은 것이어서 우리에게 비취는 확실한 예언인 성경이 있으므로(벧후1:19-21) 결국 우리는 기록된 성경말씀에서 그 때와 시기를 찾아 추정하여 볼 수밖에 없다.
12. 주 재림의 때와 시기를 추정하려함에 있어서 기록된 성경말씀을 다른 방향에서 한번 바라보자. 때와 시기라 함은 숫자이므로 성경에 나타난 여러가지 숫자와 이 숫자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고 주 재림의 때와 시기를 추정해 보는 것도 매우 재미있고 유익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개념은 아주 묘하고 재미있다.
일과 삼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삼위일체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요2:19) 하셨고 예수의 사생애가 삼십년이요 공생애가 삼년이라 일과 삼은 이 세상의 일과는 별로 연관되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숫자이다. 사와 사십과 사백은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에덴동산에 네개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창2:10-14). 이스라엘(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성도를 뜻한다)이 이방애굽(애굽은 이 세상 음부를 뜻한다)에서 사백년 동안 객이 되어 있다가 예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사대만에 가나안(가나안은 천국을 뜻한다) 으로 돌아올 것임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창15:13-16).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광야생활(광야생활은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생활이다)을 사십 년 간 하였다(출16:35).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은 사십 주야 동안 이 세상에 비를 내렸다(창7:11-12).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앞에 두고 열두 지파의 열두명이 사십일간 그 땅을 탐지 하였고 그 사십일이 사십년이 되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죄악을 짊어졌다(민 14:33-34). 이스라엘 곧 야곱이 죽어 장사될 때 요셉은 사십 일 간 이스라엘의 몸에 향재료를 넣었다(창50:1-3).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일차씩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대속죄제에서 사십 일 간은 대제사장이 성소에 있고 백성들은 각각 자기의 집에 있으며 사십 일째 되는 날 대제사장은 지성소로 들어가고 백성은 나팔소리를 듣고 모두 자기 집에서 성전으로 나와 열흘 동안 통곡하기 시작한다.
예수께서 사십 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셨고 (눅4:1-2) 부활하신 후 사십일 간 이땅에 계시면서 사역 하시다가 승천하셨다(행1:3). 니느웨성에 대한 심판의 유예기간이 사십일이었고 (욘3:4)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가 사십 일간 금식하였고(왕상 19:8) 율법의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사십 일간 시내 산에 있었으며(출24:18)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십일 간 기도하였다(신9: 25-29).
사사시대에 옷니엘이 사십 년 간 이스라엘을 태평으로 통치하였고(삿3:11) 다윗이 사십년 동안(왕상 2:11), 솔로몬이 사십 년 동안(왕상 11:42), 사울이 사십년 동안(행13:21)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율법에 의하여 사람을 형벌로 때리는 태형의 한계가 사십 대다(신25:3, 고후11:24).
13. 오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이 대속죄제에서 오십 일이 되는 날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고(출23:16) 사람들은 기쁨에 환호하며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여 열흘만에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시니 예수 부활로부터 오십 일의 오순절 날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 땅에 다시 오셨다.(행2:1-4). 육의 숫자는 이 세상의 숫자이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육 일 동안 하셨고(창1:31)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제삼시부터 제구시까지 여섯시간 동안 당하시고 다 이루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십세 이상 주의 군사로서 싸움에 임할수 있는 장정이 육십만이었고(출12:37)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육 일 동안 만나를 얻었다(출16:26-30). 이스라엘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출20:9,출23:12) 히브리종은 육 년 동안 그 주인을 섬기고 제칠년에 자유하게 된다(출21:2)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랐을 때 구름이 육 일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칠일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불렀고(출24:15-16) 이스라엘은 육년동안 땅을 경작하고 제칠년에는 땅을 쉬게 하였다(출23:10-11, 레25:1-5). 주의 재림시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사단의 앞잡이 짐승의 숫자는 육백 육십 육이다(계13:17-18).
칠과 칠십의 숫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과 심판의 숫자이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마치고 제칠일에 안식하시고 이 날을 복 주셨다. 하나님은 생명의 표를 주신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칠 배의 벌을 내리시리라 하셨고(창4:15) 가인을 위한 벌이 칠배이지만 라멕을 위하여는 그 벌이 칠십칠 배가 된다.(창4:23-24)
노아의 때에 하나님은 칠 일 후에 홍수로 땅을 덮으셨다(창7:10). 히브리종은 칠년만에 자유하고(출21:2) 이스라엘은 제칠일에 안식하며(출20:9) 광야에서 만나 얻음도 제칠일에는 쉬었고(출16:29-30) 땅의 경작이 육 년 동안 있었고 제칠년은 안식년으로 땅이 쉬게 하였다(레 5:1-5).
이스라엘의 희년은 오십 년째인데 이는 칠 년이 일곱번 지난 다음 해가 된다(레 25:8-13). 야곱이 라헬을 위해 칠 년 동안 봉사하였고 (창 29:20) 야곱 집 사람이 애굽에 이른 숫자가 칠십 명이었다(창46:27). 이스라엘이 죽어 장사될 때 애굽 사람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호곡하였다(창50:3).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된 기간이 칠십 년이며(렘25:11)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 땅이 황무하여 안식하였다(렘29:10,단 9:2).
이스라엘은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여 죄와 허물이 끝나며(단9:24)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 동안 부정하고(민19:11)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먹은 후 칠 일 동안 발효되지 아니한 떡인 무교병을 먹어야 하며(출12:15,레 23:6) 남아를 낳은 후 칠일 동안 부정하다(레12:2)
모세가 세운 이스라엘 장로들이 칠십 명이었고(출24:1, 민11:16) 예수께서 따로 칠십 인 제자들을 세우셨으며 (눅10:1)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일곱 번 그 성을 돌았고(히11:30, 수6:4)예수는 베드로에게 죄지은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마18:21-22).
이스라엘의 속죄제에서 짐승의 피를 일곱번 뿌리고(레 4:6) 이스라엘의 증거장막 성소에 일곱 등잔의 불이 있으며(출25:37) 이스라엘의 모든 저주가 일곱 길로 도망하고 (신28:7)
주의 재림 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일곱 금대접(계15:7)과 일곱 재앙으로 이 땅에 내려진다(계15:6).
주님은 이 땅에 큰 환난으로 재림 하실 때 성도와 교회를 보전하시려고 일곱 교회에서 먼저 편지로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있다.(계1:4, 계1:20).
14. 성경에 기록된 숫자의 개념에서 사와 오가 서로 대칭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숫자가 사이고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에 있어서 예수 이름 가지고 하나님께 숫자에 대하여 하나님이 예수 이름으로 복주시는 숫자가 오이다. 인간의 사의기도에 하나님의 오의 응답이다. 이러므로 사와 오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숫자이다.
이에 반하여 육과 칠은 이 세상 곧 음부의 숫자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숫자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육의 숫자를 일하시고 칠의 날에 안식하시며 칠이 끝나는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으시는 임마누엘의 계획을 마감하셔서 하나님의 일터였던 우주와 음부를 모두 없애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데리고 아버지 집 영원한 천국으로 가신다.
이 세상 사단왕국의 숫자인 육으로 사단은 하나님의 일 곧 칠의 숫자에 대항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 임금으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영적 존재인 인간들을 종으로 삼아 왕노릇 하므로 이 세상의 일은 인간 곧 아담이 있고부터 육의 숫자의 개념이 적용된다. 우주와 흑암은 수천억년 전부터 있었으나 영적존재 아담은 지금부터 약 육천 년 전부터 있었고 하나님은 아담이 있고부터 사의 숫자인 사천 년만에 십자가의 사랑까지 다 이루신 것이다(요19:30).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아담부터 시작하여 육천 년 동안에 이 땅에서 일하시고 일천 년 동안 안식하시며 이후에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마감하신다. 성경말씀에 육천 년이란 말씀은 없다. 그러나 육과 칠의 숫자의 개념과 마지막 일천 년으로 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왕노릇 하시는 주님의 계획이 성경에 기록되어(계20:4-6) 칠의 숫자 개념과 뜻을 같이 하므로 우리는 육천 년의 사역과 천 년의 안식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으로 주의재림의 때를 알아봄에 있어서 그 숫자 개념으로 육천 년의 사역과 천년의 안식으로 유추하여 결론함이 매우 객관적일 것 같다.
15. 예수께서 언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인가. 이것은 이제 아담부터 육천 년이 되는 때가 언제인가를 알아보면 된다. 에덴동산의 아담부터 육천 년이 되는 때가 언제인가 기록된 성경말씀에 의할 때 이것도 매우 어렵고 정확하지 않다. 성경에 년대의 숫자가 애매하고 빠진 곳이 많기 때문이다. 아담의 나이 일백 삼십 세에 셋을 낳고 구백 삼십세에 죽은 뒤(창5:3-5) 셋, 에노스,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므두셀라, 라멕을 지나 아담의 십대 손 노아가 태어날 때까지 일천 오십 팔년이 지났다(창5:6-31).
노아는 오백세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고(창5:32) 노아의 나이 육백세에 홍수가 났으며(창7:6) 노아는 구백 오십세에 죽었다(창9:29). 노아의 아들 셈에서부터 아르박삿, 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 데라를 지나 아브라함이 탄생할 때까지 삼백 구십 구년이어서(창11:10-26) 아담부터 아브라함의 탄생까지 일천 구백 사십 팔년이 된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삭을 낳았고(창21:5) 야곱의 나이 일백 삼십세에 애굽으로 내려 갔으며(창47:9)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사백 삼십 년 동안 종노릇 하였으며(출12:40-41)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사십 년동안 지내다가(출16:35)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수5:10-12).
이러므로 아담부터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의 햇수가 이천 칠백 일십 삼년이 된다.
16.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하고 여호수아와 그 세대가 다 죽고 이후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메소보다미아의 왕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을 섬기고 여호와께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선지자 옷니엘을 하나님이 세우시기까지 (삿3:7-9)의 햇수가 애매모호하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옷니엘이 이스라엘을 사십년 동안 치리하여 태평케한 이후부터 선지자들인 에훗,드보라,기드온, 돌라,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돌, 삼손 등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였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모압 왕, 야빈 왕, 미디안, 아비멜렉,암몬, 블레셋 등을 섬겼는데 옷니엘 선지자부터 삼손까지의 기간이 사백 이 년이 된다.
삼손부터 엘리사까지의 햇수가 애매하고 엘리의 기간 사십년이 지난 뒤 사무엘의 시대까지가 또 애매하다. 이후 사울이 사십세에 왕이 되어 사십 년 간 이스라엘을 다스렸고(행13:21-22) 다윗이 사십년 동안(삼하5:4-5). 솔로몬이 사십년 동안(왕상 11:42-43)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갈렙이 팔십세에 가나안을 정복하고 일백 이십세에 죽었고 이후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 동안 섬기다가 옷니엘 선지자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까지 약 육십 년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옷니엘까지 육십 년과 옷니엘부터 삼손까지 사백 이년, 엘리 선지자부터 사무엘, 사울 왕, 다윗 왕, 솔로몬 왕까지 적어도 일백 육십년 광야생활 사십 년까지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솔로몬 왕의 마침까지 약 육백 육십 년이나 된다.
그러나 열왕기상 6장 1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년 곧 솔로몬왕 제4년에 성전을 칠년 동안 공사하여 준공 되었다(왕상 6:38).
그러므로 이 말씀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솔로몬의 마침까지는 오백 일십 육년이 된다. 르호보암 왕에서 시드기야왕까지 삼백 구십 사 년이고 이후 칠십년 동안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이러므로 아담부터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 끝나기까지의 햇수의 합계는 삼천 육백 오십 삼(3653)년이 된다.
17. 포로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이 돌아와 스룹바벨의 성전을 재건하면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선지자 없이 약 사백년을 지나 침례요한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의 햇수도 매우 모호하다.
성경말씀이 아닌 다른 일반 사료에 의하여 그 햇수를 어디까지나 인간의 문화에 의한 결론이 된다. 이러한 인간의 역사에 의하여 산출된 햇수를 톰슨성경의 주석에 의하여 참고할 때 포로 귀환시대는 기원전 오백 삼십 팔년에서 기원전 사백년까지 되어 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항은 톰슨성경의 주석은 예수께서 주전 오년에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의 연대를 참고한 확실한 문화적인 자료일는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주님 본인이 오시기 전 오년에 태어났다는 말인데 이것은 아무래도 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예수는 분명히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므로 요셉도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자기들의 고향 베들레헴에 올라갔으며 이때 예수는 베들레헴에 올라갔으며 이때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이 때가 주의 나심으로 이 세상연수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눅2:1-7). 이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연수를 산술함으로 아담부터 육천년이 되는 때를 알아 주의 재림의 시기를 결론내리려 함에는 무리가 따른다.
18.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아담부터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육천 년의 때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우선 한 가지 객관적인 사실부터 기준으로 세워야 한다. 즉 예수께서 태어나심의 때로부터 정확하게 주후 일천 구백 구십년이 되는 때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아담부터 주님의 나신때까지가 정확하게 몇 년인가를 알면 된다.
19. 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개념에서 사와 오는 인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나타낸다. 아담이 영이 없는 사람으로 있다가 어느날 하나님이 그 코 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사람이 생령 곧 아담이 되었는데 이때 아담의 나이가 몇살이었을까. 하나님이 갖난 애기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고 아담을 만들고 에덴동산에 끌어와 지키게 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아브람으로 있었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이제 너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하라 하여 아브라함이 된 후에도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브람 때의 나이를 포함하여 기록되고 있어 아담도 영이 없는 사람이 아담이 된 뒤에 기록되는 아담의 나이는 영이 없던 사람 시절의 나이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셋을 낳고 구백 삼십세에 죽었다 함은 아담 되기 전의 나이도 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아담은 몇살에 아담이 되었을까 하나님의 경륜은 아담의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0. 하나님은 하나님의 숫자 개념으로 보아 아담부터 사천 년만에 인간의 기도와 노력을 다 이루신다. 예수께서 둘째 아담으로 이땅에 오셔서 삼십 삼세에 십자가의 고난을 이루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눈물로 부르짖는 구원의기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 이루셨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운명하시면서 인류를 향하여 외치신 '다 이루었다'하신 말씀은 에덴동산의 아담부터 사천년의 인간의 기도와 하나님께 나아감에 대한 온전한 이루심이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담은 영이 없는 아담의 나이 삼십 삼세에 아담이 되었고 이때로부터 정확히 사천년이 되는 때인 둘째 아담 예수의 나이 삼십 삼세에 인간의 기도가 끝난 것이다.
이러므로 십자가 고난이 다 이루어진 때부터 이천 삼십 삼(2033)년이 에덴동산의 아담부터 정확하게 육천 년이 되는 때이며 이천 삼십 삼년부터 이 땅에서의 천년왕국이 시작되므로 주께서 공중재림하시고 주의 진노가 큰 환난으로 시작되는 주의 재림의 때는 큰 환난기간 삼년 반을 제한 이천 이십구(2029)년에서 이천 삼십(2030)년이 된다. 주의 재림과 함께 있을 큰 환난의 기간을 칠년이 아니라 삼 년 반이다(다음 항목 천년 왕국 참조)
예수 재림의 때와 시기는 주후 이천 이십 구년에서 이천 삼십년이라는 재미 있는 결론이 나왔다. 주후 이천 삼십(2030)년까지는 앞으로 사십 년이 남았다.(기록년도,1990) 이 사십 년 동안에 마태복음 24장 4절로 14절까지의 징조가 모두 이루어진다.
21.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 재림의 때는 주후 이천 삼십년 앞으로 꼭 사십년이 남았다. 이 사십년 동안에 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말씀은 다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구세주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한다.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며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이 있게 되고 이 때에 예수 믿는 성도들을 미워하고 죽이는 성도의 환란이 있게 된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또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데 넘겨준다. 거짓선지자가 많이 일어나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 모든 인간들은 더욱 죄악으로 빠져들어 가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며 예수 믿는 사람이 점점 적어진다. 백인들은 황인종에게 의지하고 신세지게 된다.
앞으로 사십년은 그야말로 촌각의 시간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이후의 장구한 시간과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고부터의 세월인 육천년에 비하면 이 사십년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동안의 시간보다 짧다. 하나님은 급하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까지 어찌하든지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려 한다.
하나님은 빛의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오늘도 다급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때가 급하다. 세월을 아끼라 내가 곧 간다 때가 임박했다 빨리 전해라 내 이름 예수를 빨리 전하여라 그러시고는 사도요한을 통과하고 이기게 하기 위하여 이 땅의 일곱교회들에게 마지막 편지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22. 기록자는 주후 이천 삼십(2030)년경에 주께서 재림 하신다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그 때와 그 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아무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외에는 어떠한 존재도 예수 재림의 때를 절대로 모른다. 예수 재림의 때를 아무도 모른다. 예수 재림의 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성경말씀에 가까운 것이고 성경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이다.
성도는 빛의 아들이므로 그 때를 알 수 있다든가 또는 성도가 열심히 기도할 때 주님의 응답이 음성이 음성이나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나 그 때를 알 수 있다는 논리는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이다(벧후 1:18-21).
주후 이천 삼십년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기록자의 추정도 성경 안에서 주님의 뜻을 헤아려 보고자 노력한 하나의 예에 불과할 따름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그 때와 그 시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직접 말씀 하셨고 우리가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막 13:33-37).
주님의 다시 오시는 때를 우리가 안다면 무엇 때문에 항상 깨어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늘 잠자면서 놀다가 그 때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으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 때와 그 날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고 근신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이다. 예수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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