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은 시인인 동시에 소설가이다.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복기의 노래],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경외성서]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송기원은 시와 소설의 양면에서 적잖은 작품을 발표해온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시인으로보다는 소설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이렇게 알려진 데는 무엇보다 그 자신의 희망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가 시인으로보다는 소설가로 평가받기를 희망해왔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그의 문학적 활동은 시의 면에서보다는 소설의 면에서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가 빛날 때}(실천문학사, 1983)와 {마음속 붉은 꽃잎}(창작과비평사, 1990)과 같은 뛰어난 시집을 간행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이후 송기원은 시보다 소설에 주력해왔고, 그리하여 최근에는 거의 시를 발표해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시를 방기해왔던 그가 지금 무려 7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끌만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에게 시는 그 자신과 타자들이 만나 대화를 펼치는 꿈의 時空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삶의 무수한 존재들과 저 자신에게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 時空이 시이다. 하지만 시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시인과 시에서 말을 하는 화자는 다를 수도 있다. 실제로는 시인 자신도 마찬가지겠지만 시에서 말을 하는 화자는 그때그때 가공된 자아일 따름이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시인이 내세우는 화자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움직이고 변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매 편의 시에서 화자로서의 시인이 각기 다른 시점은 물론 각기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것도 실제로는 이 때문이다.
시인이나 화자가 갖는 이러한 특징은 송기원의 시라고 해도 크게 다를 리 없다. 그의 시에서도 시인이나 화자는 끊임없이 가공되는 가운데 대상에 따라 다른 시각과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송기원이 이번에 발표하는 시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대상은 꽃이다. 매화, 오랑캐꽃, 개나리, 영산홍, 능소화, 여름 민들레, 망초꽃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이다. 오늘의 송기원에게는 시가 예의 꽃들과 만나 저 자신의 시각과 태도를 매개로 하여 대화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時空이라는 것이다.
꽃은 자연의 사물이다. 하지만 일단 그의 시 안에 들어오면 꽃은 자연의 사물만이 아니라 인간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된다. 꽃이라는 사물이 일종의 객관상관물로 존재하면서 알레고리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다. 제목은 꽃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내용은 꽃보다 사람의 이미지나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 것도 이러한 방법적 자각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시인이 선택하는 시각과 태도에 따라 시의 소재로 등장하는 꽃의 내포가 적절히 변형되고 변주되는 가운데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의 시의 이해와 관련하여 정작 중요한 것은 꽃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대상과 관련하여 그가 갖는 시각과 태도는 크게 두 가지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하나는 예의 대상을 객관화하는 경우이고, 둘은 예의 대상을 주관화하는 경우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시각과 태도가 비교·대조되면서 병치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시각과 태도가 비교·대조되면서 병치되는 경우는 말 그대로 비교·대조되면서 병치되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대상을 바라보는 대강의 시각과 태도는 앞의 두 가지, 곧 대상을 객관화하거나 대상을 주관화하는 경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상을 객관화하는 경우는 대상을 3인칭의 관계로 포섭하는 경우를 뜻하고, 대상을 주관화하는 경우는 대상을 2인칭의 관계로 포섭하는 경우를 뜻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나-그'의 관계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가리키고, 후자는 '나-너'의 관계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가리킨다. 따라서 꽃을 소재로 하고 있는 그의 시는 '나-그' 구조를 갖는 경우와, '나-너' 구조를 갖는 경우로 대별해 살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것은 흔히 관계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마틴 부버의 논리이다. 마틴 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에서 인생을 만남, 다시 말해 관계라고 명명하면서 그 관계를 '나와 그', '나와 너', '나와 신'이라는 세 개의 근원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마틴 부버에 따르면 '나와 그'의 관계는 좀더 사물적인 관계, '나와 너'는 좀더 인간적인 관계, '나와 신'은 좀더 영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나와 그'의 관계로 대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3인칭의 존재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3인칭의 관계로 '그'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송기원 시의 주요 대상인 꽃이 자연의 사물 자체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서는 '나와 그'의 관계가 훨씬 더 인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객관화된 3인칭의 관계로 사물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2인칭으로 주관화된 관계, 곧 좀더 인간화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나-그'의 관계라는 것이다.
육니오 사변 때인데요. 걸음발이 어려운 늙은 노파와 눈이 먼 열 세살 손녀 둘이만 미처 피난을 못가고 집에 남았더랍니다. 어느 무더운 날 노랭이와 껌둥이들이 두억시니같이 들이닥쳐 눈 먼 손녀를 겁탈하려 하자, 늙은 노파가 안간힘으로 나섰습니다. '내 걸 허우. 내 걸 허우.' 자청하여 속곳을 벗은 채 두억시니들 앞에 벌러덩 눕고, 하늘이 세 번쯤 노랗게 돌 때 늙은 노파는 그만 명줄을 놓고 말았습니다.
―[여름 민들레] 전문
이 시에서 '여름 민들레'는 단순한 자연의 사물이 아니다. 민들레의 이미지에 '늙은 노파'라는 소외되고 버려진 민중의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 3인칭의 존재, 곧 민들레는 자연의 사물 자체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민들레라는 자연의 사물이 "늙은 노파"라는 구체적인 인물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눈 먼 손녀"를 대신해 "노랭이와 껌둥이들"로부터 겁탈을 당하는 "늙은 노파"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여름 민들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민들레라는 자연의 사물보다는 "노랭이와 껌둥이들"에게 겁탈을 당하던 중 "명줄을 놓"아버린 "늙은 노파"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물론 "늙은 노파"를 이처럼 민들레로 비유한 것은 이 시에 투영되어 있는 시인의 심미적 자각 때문이다. 조금쯤 에돌려 말함으로써 예술적 효과를 증가시키는 방법적 지혜가 함유되어 있는 것이 이 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난 1980년대에 익히 보아왔던 상투적인 민중시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심미적 고려가 십분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이 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인 시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 시의 소재인 민들레의 경우 여전히 3인칭의 관계, 곧 '나-그'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민들레를 "늙은 노파"로 치환하여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에 민들레로 상징되는 "늙은 노파", 곧 민족사의 비극과 함께 했던 "늙은 노파"에 대한 시인의 연민이 강하게 담겨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의 시에서는 이러한 '나-그'의 관계가 좀더 주관화되어 드러난다. 여기서 주관화되어 드러난다는 것은 시인의 감정이 훨씬 짙게 묻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골장터 장돌뱅이 동무들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벽기차 타고 도회지로 나가
사내아이들은 중국집뽀이, 점원, 신문팔이로 풀리고
계집아이들은 식모, 요꼬공장시다, 어린 갈보로도 풀리고
시골장터는 홀연히 텅 비었습니다.
이제 막 중학교 교복에 교모까지 광나게 쓰고
시골장터에 혼자 남은 내 두 눈도 텅 비었습니다.
그런 두 눈을 메우며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그렁대면
싸전 지나 어물전 비린내 속에 피어나는
오랑캐꽃, 진한 자줏빛 속에서
여지껏 쌀밥보리밥 놀이하는 동무들.
―[오랑캐꽃] 전문
이 시의 '나-그'의 관계에서도 '그'는 자연의 사물, 곧 오랑캐꽃으로 명명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이 이 시에서 "시골장터 장돌뱅이 동무들"을 '오랑캐꽃'의 이미지로 상징화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시인이 "새벽기차 타고 도회지로 나가" "중국집뽀이, 점원, 신문팔이로 풀"리거나 "식모, 요꼬공장시다, 어린 갈보로도 풀"린 "시골장터 장돌뱅이 동무들"로부터 오랑캐꽃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에서 시인은 "교복에 교모까지 광나게 쓰고/시골장터에 혼자 남"아 눈물을 그렁대던 중학생 시절의 시각과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여기서 막 이농이 시작되던 과거의 어느 한 때로 돌아가 "시골장터 장돌뱅이 동무들"의 현실을 짐짓 연민 어린 시각과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때의 시각과 태도에는 "두 눈을 메우며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그렁대면" 등의 구절로 미루어 보아 시인의 감정이 앞의 시에 비해 훨씬 더 강하게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그'의 관계에서 '그'에 대해 좀더 감정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감정이 적극적으로 묻어나는 것은 이 시의 소재가 본래 시인의 구체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시 [여름 민들레]와는 달리 시인이 중학생 시절 직접 겪은 체험, 즉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장돌뱅이 동무들"이 모두 "시골장터" 떠나버리고 자신만 "혼자 남"아 눈물을 그렁대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중심 소재인 "시골장터 장돌뱅이 동무들" 역시 3인칭의 존재, 즉 객관적 관찰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랑캐꽃을 사람으로, 즉 "시골장터 장돌뱅이 동무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것이 객관화된 대상으로 자리해 있다는 뜻이다.
시의 대상이 객관적 존재인 '그'로 드러나 있다고 해서 항상 이와 같은 시각과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에서처럼 인간의 형상과 자연의 형상이 상호 병치되고 비교·대조되는 가운데 이미지를 침투시키는 예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미 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에
지아비 모르는 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정신마저 놓아버린
지어미가 있습니다.
서너 해 좋이 낯선 마을들을 헤맨 끝에, 오늘은
양지 바른 담장 아래 쭈그려 앉아
때묻은 인형에 젖을 물리고 있습니다.
정이월 햇살의 시늉뿐인 온기가 지어미를 감싸고
담장 안에서 뻗어 나온 매화나무 가지에, 우연이듯
서너 송이 매화도 피어나고 있습니다.
―[매화] 전문
전반부와 후반부로 대별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7행까지가 전반부라면 그 이하는 후반부이다. 전반부에는 "지아비 모르는 아이를 낳다가/아이와 함께, 정신마저 놓아버린" 한 여자가 묘사되어 있고, 후반부에는 이 여자를 감싸고 있는 정이월의 햇살과, 햇살과 더불어 피어나는 "서너 송이 매화"가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전반부는 지어미라는 '사람'이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후반부는 매화라는 '사물'이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에는 지어미라는 '사람'과 매화라는 '사물'이 비교·대조되고 병치되면서 각각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제목은 '매화'라고 되어 있지만 매화 자체를 묘사하기보다는 지어미와 매화를 비교·대조시키고 병치시키면서 지어미의 이미지를 매화의 이미지로 이월시키는 기법이 응용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하지만 각각의 이미지를 비교·대조시키고 병치시키는 가운데 중심을 이동시키는 이 시의 기법의 경우 그다지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우연이듯"이라는 부사구를 통해 그것이 갖는 부자연스러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다소 석연치 않아 보이기도 한다. 이 시의 화자인 시인이 소외되고 버려진 지어미를 통해 겨울의 온갖 수난을 뚫고 피어나는 매화를 발견하는 자세만은 아름답지만 그 과정을 형성하는 시적 이미지의 전개가 세련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서도 시인과 지어미 및 매화의 관계가 여전히 '나-그'라는 3인칭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송기원의 시에서 정작 기대가 되는 것은 대상을 2인칭의 관계, 즉 '나-너'의 구조로 받아들이는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시를 통해 논의하는 2인칭의 존재, 곧 '너'로 인식되는 대상이 반드시 '꽃'인 것만은 아니다. '나-너' 구조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이 때의 '너'가 꽃 자체를 지시하지 않는 경우도 적잖다는 뜻이다.
마침내 보았단 말이지?
누구도 보지 못한 캄캄한 나락에서
기어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
돌아보면 이승과 저승이 함께 먼데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끝끝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
오늘밤도 벌판 가득히
망초꽃 하얗게 흐드러지는데.
―[망초꽃] 전문
모두 8행인 이 시 역시 전반부와 후반부로 대별된다. 앞의 6행이 전반부이고, 뒤의 2행이 후반부이다. 전반부에서 시인은 명확히 '너'라고 하는 청자를 설정하고 있다. '너'라고 불리는 청자에게 계속해서 시인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 전반부의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때의 '너'가 누구이고,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너'는 누구이고, '너'가 이 "캄캄한 나락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너'는 시인과 함께 삶의 진리를 탐구해온 道伴일 가능성이 높고, '너'가 본 것은 삶의 진리나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화자인 '나'가 "이승과 저승이 함께 먼데/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어/끝끝내 너만은" 그것을 보았다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정작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시의 전반부의 내용과 제목이기도 한 '망초꽃'의 이미지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컨대 '너'로 인식되는 대상이 곧바로 망초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에서 '망초꽃'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부분은 후반부 2행, 즉 "오늘밤도 벌판 가득히/망초꽃 하얗게 흐드러지는데"이다. 따져보면 후반부 2행의 내용은 전반부 6행의 내용에 대한 배경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후반부 2행의 내용만으로 이 시의 제목을 '망초꽃'으로 삼는 것은 얼마간 어색해 보인다.
물론 이 시의 내용과 제목의 관계가 얼마간 어색해 보인다고 하여 곧바로 그것을 이 시의 심미적 한계로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이들 관계가 어색한 것과는 달리 이 시는 그 자체로 어떤 절대적 감흥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너' 관계가 드러나 있는 시, 곧 대상을 2인칭의 너로 인식하고 있는 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디엔가 숨어
너도 앓고 있겠지
사방 가득 어지러운 목숨들이
밤새워 노랗게 터쳐나는데
독종(毒種)의 너라도
차마 버틸 수는 없겠지.
―[개나리] 전문
이 시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어디엔가 숨어" "앓고 있"는 '너'와, "밤새워 노랗게 터쳐나는" "어지러운 목숨들"이 이루는 관계이다. 이들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자와 후자가 결코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전자인 '너'보다는 후자인 "어지러운 목숨들"이 '개나리'의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나-너' 구조의 시각으로 보면 이 시에서도 "어디엔가 숨어" "앓고 있"는 '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2연의 내용, 즉 "어지러운 목숨들이" "노랗게 터쳐나는" 밤이라고 할 수 있다. "밤새워 노랗게 터쳐나는" "어지러운 목숨들"인 '개나리'로 상징되는 봄 역시 이 시의 배경으로 존재할 따름이라는 얘기이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너'라는 대상의 배경이 되는 자연의 사물, 즉 '개나리'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중심 연은 2연이 아니라 1, 3연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1, 3연은 개나리꽃이 피는 계절인 봄이 온 만큼 "어디엔가 숨어" "앓고 있"는 '너'도 "차마 버틸 수" 없으리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시를 제대로 알기 위해 '너'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묻나니 "어디엔가 숨어" "앓고 있"는 '너', "차마 버틸 수" 없는 '너'는 누구인가. 앞의 시 [망초꽃]과 관련해서는 '너'를 시인과 함께 삶의 진리를 탐구해온 道伴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너'는 [망초꽃]에서 '너'가 본 것, 곧 삶의 진리나 진실까지 포괄하는 듯해 한층 주의를 요한다. "어디엔가 숨어" "앓고 있"는 '너', "차마 버틸 수" 없는 '너'를 삶의 진리나 진실이 의인화된 것이라고까지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시라는 것이 본래 추상이나 관념을 물질화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기서의 삶의 진리나 진실이 인간으로 의인화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음의 시에는 이러한 '너'가 성애의 대상으로까지 구체화되어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마지막 한 방울 정액을
붉게 게워내야겠다.
폭염이 목까지 차올라
눈 먼 기다림도 녹아나는데,
하루해 기우는 서녘 어디쯤
뒷소문처럼 너 또한 붉어오는데.
―[능소화]
이 시에서 '너'는 "마지막 한 방울 정액을/붉게 게워내야" 할 性愛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너'가 연민의 대상을 넘어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性愛의 대상을 삶의 진리나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간 어색해 보인다. 일상적인 시각에서는 삶의 진리나 진실이라는 추상을 性愛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너'의 의미는 좀더 확대되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되는 것은 앞의 몇몇 시에서 논의한 바 있는 '나-그'의 관계에서의 '그'이다. 특히 [여름 민들레]에서 '그', 즉 민들레가 "늙은 노파"를 상징한다거나, [오랑캐꽃]에서 '그', 즉 오랑캐꽃이 "시골장터 장돌뱅이 동무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시에서 "늙은 노파"나 "시골장터 장돌뱅이 동무들"이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 즉 민중을 가리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위의 시 [능소화]에서 시인이 性愛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너'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로서의 민중을 '너'라는 좀더 인간적인 2인칭의 관계로 응축시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性愛는 본래 분리나 분열이 아니라 일치나 합일을 상징하는 상호 작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시에서 性愛의 이미지는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진리나 진실, 나아가 그것을 의인화한 민중들과 하나 되고자 하는 의지를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너'를 성애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상의 삶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꽃으로 상징되는 낮고 보잘것없는 존재들, 즉 민중을 일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더듬고
네가 나를 더듬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이 아니라
찰나간에 스러진들 어떠랴.
스러져, 바닥 모를 허방으로
너와 나, 붉게 사라진들 어떠랴.
―[영산홍] 전문
이 시에서도 '너'는 性愛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나-너'가 이루는 성애의 관계가 매우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이 시에서 '나'는 너와 서로 더듬다가 "찰나간에 스러진들 어떠랴"라고 말하고 있기까지 하다. "스러져, 바닥 모를 허방으로/너와 나, 붉게 사라진들 어떠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시의 화자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너'는 일단 "찰나간에 스러"져도 좋을 '나'의 연인으로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꽃을 소재로 한 송기원의 시들 전체를 살펴보면 '너'를 단순한 연인으로만 볼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꽃의 이미지로부터 '연인'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못지 않게 그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붉게 사라진들 어떠랴"라고 말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이론의 여지없이 '영산홍'이다. 하지만 '너'로서의 영산홍은 충분히 '나'의 연인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문제는 '너'가 단순히 연인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때의 너, 곧 연인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삶의 진리나 진실을 의미할 수도 있고, 버려지고 소외된 민중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시는 '너'와의 찰나적인 성애로부터 느끼는 기쁨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있는 것처럼 파악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일치에의 의지를 그렇게만 파악할 수는 없는데, 무엇보다 그것이 버려지고 소외된 꽃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참된 일치가 갖는 내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에는 '너-너'의 관계가 "찰나간에 스러진들 어떠랴", "붉게 사라진들 어떠랴"라고 노래되어 있거니와, 따져보면 이러한 관계를 가리켜 참된 일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참된 일치는 소멸에 기여하는 '너-너'의 관계가 아니라 탄생에 기여하는 '나-너'의 관계이기 마련이다. 탄생에 기여하는 '나-너' 관계는 당연히 내일의 역사에 기여하는 일치를 뜻한다.
이 때의 '나-너'의 관계는 있는 그대로의 일치가 아니라 둘이면서 하나인 일치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너'의 관계가 이루는 참된 일치는 너이면서 나, 나이면서 너인 일치라는 것인데,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일치를 흔히 不二의 관계로 설명한다. 不二는 不一而不二의 준말인 만큼 참된 일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관계를 가리킨다.
이러한 일치에는 수직적 일치만이 아니라 수평적 일치도 포함된다. 不二로서의 일치는 無而有의 일치, 空則色의 일치이기도 한 만큼 꽃과의 관계는 물론 연인과의 관계, 나아가 삶의 진리나 진실, 민중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실현될 수 있는 일치이다. 不二로서의 일치가 실현될 때 나날의 삶에서 참된 '나'가 실현될 수 있고, 참된 탄생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송기원의 시에서도 '나-너'의 관계가 피차 상생하는 가운데 탄생에 기여하게 되길 빌며 글을 맺는다.({시와사람} 05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