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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그리 길지않다. 산 역시 높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 그 산길을 걷다보면 걷는것보다 서서 풍광을 음미하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길. 경북 포항 내연산(해발 710m) 폭포길은 시각과 청각을 깨우고 마음을 울리는 독특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들머리는 평이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보석같은 눈부신 풍경이 산속에 박혀있다.
내연산은 군립공원이다. 널리알려진 산이 아니다. 하지만 산의 규모와 풍광, 생태적 가치, 역사성은 국립공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원래 종남산(終南山)이라 불리다가, 신라 진성여왕이 이 산에서 견훤의 난을 피한 뒤에 내연산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내연(內延), '안으로 길게 끌어 들인다'는 이름처럼 문수봉~삼지봉~향로봉~매봉~삿갓봉~천령산 등이 말발굽형 산세를 이루고, 그 한가운데 형성된 30여 리 길고 깊은 골짜기가 청하골, 12폭포골, 내연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보경사계곡이다.
내연사 주차장에서 20여분 걸으니 보경사 일주문이 나타났다. 일주문에 들어서자 그윽한 솔향이 반겼다. 보경사는 진성여왕때 일조대사(日照大師)가 인도에서 가져온 팔면경(八面鏡)을 묻고 세웠다는 절이다. 그만큼 유서깊은 절이다. 경내에는 고려 때 이송로가 지은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 보물 제252호)와 사리탑(舍利塔, 보물 제430호)·숙종어필 등이 있다.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 절마당에 들어섰다. 초파일을 앞둔 경내엔 울긋불긋한 연등이 하늘을 가리고 청아한 풍경소리가 명징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절에서 감로수를 맛보고 보경사를 지나 갑천계곡과 나란히 걸었다. 12폭포중 관음폭포와 연산폭포까지 1시간여 소요된다. 연산폭포 위쪽으로도 은폭포, 복호 1, 2, 3, 시명폭포등을 지나 내연산 향로봉까지 등산코스가 이어지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가장 먼저 만나는 폭포가 상생폭포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두 줄기 폭포 물줄기도 장관이지만, 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빛 기화담이 절경이다. 하지만 감탄하긴 이르다. 상생폭포를 지나 좀 더 오르면 계곡 한가운데 병풍 같은 바위를 만나는데, 그곳에 작은 폭포가 2~3개 걸려 있다. 보현폭포와 삼보폭포다. 벼랑끝에 걸린 테크를 따라 걷다보면 오밀조밀한 바위 협곡을 따라 흘러가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4폭인 잠룡폭포는 청주출신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 '목욕 신' 촬영장소로 널리 알려졌다. 영화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장면은 계곡 풍광이 수려한 이곳에서 찍었다. 하지만 12폭포의 백미는 역시 관음폭포다. 비하대(飛下臺), 학소대(鶴巢臺) 등의 기암을 병풍처럼 두르고 넓은 소(沼)인 감로담(甘露潭), 폭포 두 줄기 옆으로 해골 형상의 관음굴, 그 위의 연산구름다리 등이 어울려 있다. 몽환적이고 기묘한 폭포앞에 서면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주인공이 된것 처럼 가슴벅찬 모험심이 발동한다. 관음폭포 옆으로 하늘높이 서있는 연산구름다리를 건너면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연산폭포가 말그대로 느닷없이 등장한다. 관음폭포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30m 높이에서 비단 같은 물줄기를 용추에 퍼붓는 광경에 살짝 놀랐다. 구름다리 끝에서 막 튀어나온듯한 연산폭폭는 갑작스럽고 그래서 더 극적인 감동을 준다.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이 대가인 겸재 정선이 폭포에 반해 화폭에 담았다. 늙으막에 청하현감을 지낸 겸재는 내연산을 자주 찾은듯 하다. '내연삼용추도' 2점, '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관란도' 등 내연산을 소재로 4점이나 그린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 중엽 우담 정시한은 '산중일기(山中日記)'에서 "용추는 금강산에도 없는 것"이라 극찬했다. 용추는 폭포 아래 소를 말하며 삼용추는 연산폭, 관음폭, 잠룡폭 일대를 가리킨다.
관음폭포에서 가파른 절벽에 설치한 철재난간을 타고 올라가 숲속으로 30분 걸으면 은폭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잠시 소(沼)에 발을 담그고 파란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한줄기가 목덜미를 스쳐지나갔다. 하늘과 폭포, 솔바람에 더위를 잊었다. 12폭은 하나하나 멋진 인상을 남겼지만 역시 관음·연산폭포에 비하면 사족이었다. 보경사에서 은폭포까지는 왕복 9km 남짓하다. 3시간30분 걸린다. 결코 짧은 코스는 아니었지만 길을 걸었다기 보다는 그늘진 너른바위에 앉아서 잠시 '진경산수'를 감상한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