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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본문 : 이사야 58장 1-12절
『오늘 읽은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짓 신앙과 사회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하나님의 책망’으로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1절에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크게 외치고, 아끼지 말며, 나의 백성에게 그 허물과 죄를 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 저들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금식을 하였기에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같았지만,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고, 생활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과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자 여러분!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할 계획을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면 다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만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5장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어떤 자인지’를 말씀하시면서 이런 자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도 저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1.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함께 2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 하는도다.” 여기서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했다’고 하는데, 지금 저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정답은 그 반대입니다. 지금 1절에서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물과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저들의 허물과 죄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 2절에서 그들이 날마다 나(하나님)을 찾았다고 했는데, 또한 하나님의 길 알기를 즐거워했다고 했는데, 왜 허물이라고 하실까요? 분명 저들은 하나님께 의로운 판단을 구하고, 또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을 즐거워했다고 했는데, 왜 죄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당시 저들이 진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 1장을 시작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1장 11-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 말씀이 오늘 본문 2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당시 저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많은 제물과 피를 드렸습니다. 문제는 뭐에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저들의 예배와 제물을 받지 않으실까요? 저들이 하나님께 보이려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마당만 밟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예배요, 금식이였다’는 말입니다. 가고 싶지 않지만, 남들이 가니 어쩔 수 없어 가곤 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면 벌을 내리신다고 하니, 억지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떨까요? ‘혹시 오늘 우리의 예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성전 마당만 밟고 가지는 않는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마지못해 드린다면, 또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부담이 된다면,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을 즐거워 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예배를 기뻐 자원하여 드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즐거워 하는 여러분이 될 때에 그런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2. ‘형식적인 금식과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스가랴 7장 5절 말씀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금식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을 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이뿐만 아니라, 넷째 달과 열째 달에도 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저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금식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금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4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을 하면서 논쟁을 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자. 여러분! 저들이 포로생활로 중한 노동의 일을 하면서도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 중에 저들이 무엇을 했다고 했어요? “논쟁을 하며”입니다. 히브리어로 ‘리브’라고 하는데, ‘분쟁하다. 소송을 하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식을 하는 중에 성도들끼리 법적인 싸음으로 서로 고소하고 난리였다’는 말입니다. 또 무엇을 했다고 했어요? “다투며”입니다. 이는 ‘혈기를 부리고 서로 싸웠다’는 말입니다. 또 “악한 주먹으로 쳤다”고 했는데, 이 말은 ‘악한 생각을 가지고, 권력의 힘을 휘둘렀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3절에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저들이 금식과 예배를 드리고선 ‘왜 하나님께서 내 예배를 받아 주지 않느냐?’ 따졌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게 마음을 찢으며 금식을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알아주지 않느냐?’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면, 속상할 것입니다. 또한 힘들게 금식을 하며 마음을 찢으며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서운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들이 금식을 하면서 뭘 했다고 했어요? 오락을 한 것입니다. 또한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의 뜻은 ‘저들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이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식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자 여러분! 금식을 왜 할까요? 지난 수요일에 임현심 집사님이 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해 금식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장 속에 있는 것들을 다 쏟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금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을 다 쏟아내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지 않으신 분은 실감을 못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금식을 예배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내 속에 있는 모든 죄악을 쏟아내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할 때에 우리를 묶고 있던 흉악의 결박이 풀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죄의 사슬이 풀어지고, 자유케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에요? ‘오늘 우리의 예배가 저들의 금식과 같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어떻게 해요? 논쟁을 하며, 다툽니다. 금식을 하면서 악한 생각을 가지고 성도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4절에 “너희의 목소리를 상당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요구하는 목적으로 금식과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금식을 어떻습니까? 더 쉽게 말해서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이느냐?’ 이것입니다. 혹시 저들과 같이 형식적인 금식,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아닙니까?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여러분의 목소리를 상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리지는 않으십니까?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만,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금식과 예배가 어떤하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여 형식적인 예배였다면, 돌이켜야 할 줄 믿습니다. 내 목소리를 상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드리는 금식과 예배라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여전이 내 속에 악성, 독성, 쓴뿌리를 버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금식과 예배가 되도록 바꿔야 할 줄 믿습니다.
3. ‘나누고 베푸는 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 함께 7절을 읽겠습니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냐? 금식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너희가 금식을 하는데, 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것이 있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었느냐?’ 또 ‘방황하는 자를 네 집에 들여서 쉬게 하였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네 형제들이 힘들어 할 때 숨어 있지 않느냐?’ 묻고 계십니다. 그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저들이 금식을 하면서도 이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실제 삶은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린 자를 돌보고, 유리하는 자를 보살피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 저들이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을 잘 믿는 척, 신앙생활 잘 하는 척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저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10절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기서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다’는 말은 ‘굶주리고 배고파하는 자를 보면 네가 어떻게 반응했느냐?’ 이것입니다. 또 ‘괴로워 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다’는 말은 ‘마음이 상한 자, 힘들어 하는 자를 보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편안하게 해주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할 일이 바로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 저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산다고 하면서, 또한 금식을 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제 저들의 삶은 주린 자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리하는 빈민에게 관심도 없었고, 헐벗은 자와 비록 골육일지라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주린 자가 어찌 되었는지? 괴로운 자가 어떤 심정인지?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자기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나누고 베푸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누고 베푸는 자에게 흑암 중일 중이라도 빛과 같이 떠오른다고, 또한 지금 어둠 같지만, 나중에 낮과 같이 밝혀지는 사람이 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교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아멘. 그렇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항상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만족케 해주실 것이고, 여러분은 물댄 동산과 같이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은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과연 고국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낙심하고 있는 저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때에 구원 받아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자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형식적인 금식과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셋째는 ‘나누고 베푸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11절에 나오듯이, 하나님께서 항상 인도하시고, 영혼을 만족게 하고, 물댄 동산과 같은 축복의 사람이 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다 천국에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