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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헤게모니와 주체 형성의 문제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pp. 167-208.
-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월의 봄, 2013, P. 560.
그는 유럽이 광기에 찌든 양차대선 사이 시대에 감옥과 병원에서 살다가 갔다.
그람시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핏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이중분절, 즉 정치적인 면에서 이중분절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람시에서는 이 둘을 하나로 묶는 다양체로서 무리(떼)가 당인 것 같다. 이는 혁명의 희망이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무리는 인민이며, 인민의 욕망(리비도)이 흐르고 분출하는 데서 혁명 또는 새로운 정치판이 이루어진다.
내가 보기에 그람시가 러시아 혁명의 레닌의 영향으로 당이 중심이다. 그 당의 내용이며 표현은 정치인가? 그람시에게는 농민의 표현과 노동자의 표현이 함께 결속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다. 마오가 농민의 결속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천하를 재배치하는 중국의 특성일 수 있다. 서구는 산업ㅎ서ㅏ 이다. 한다.
# 안토니오 그람시: 헤게모니와 주체 형성의 문제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pp. 167-208.
제1장 지도로 가장된 지배, 지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지도. 169
그람시에 따르면 (지배와 피지배 관계뿐만 아니라) 지도하고 지도받는 관계를 인정하고 깨닫는 데에 있다. 그런데 그는 옥중수고 중 「정치의 요소」라는 글에서 “가장 잊기 쉬운 정치요소”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69) [그람시의 주제는 정치이다. 정치경제학이 아닌 것 같다.]
스스로를 자율적 존재, 자율적 주체라고 여기면서 지배(domination)는 물론이고 지도(leadership, direction)의 존재까지 거부한다면, 나아가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지배받기를 원한다면 그람시가 말하는 지적, 도덕적 지도의 필요성은 더욱더 절실해 진다. (169-170)
제2장 그람시에 관한 진실 그리고 오해 바로잡기 170
우선 국내에서 번역된 옥중수고1(정치편), 옥중수고2(철학, 역사, 문화편) ... 이 두 번역서는 퀸틴 호어(Quintin Hoare)와 제프리 노웰 스미스(Geoffrey Nowell-Smith)가 편집한 Selections from Prison the Notebook: SPN (NY, International Publishers, 1971)을 한국말로 옮긴 책이다. (170)
옥중수고 전체 분량은 방대하다. 수첩으로 32권(2,848쪽), 타이프로 치면 약 4,000쪽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람시가 다시 고치고 편집하면서 이기(移記)한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그보다 적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졸의 전기에 따르면 노트로 33권 인쇄하면 2,350쪽이라 한다. (171)
그람시는 1926년[서른다섯] 11월 28일 로마에서 체포되었고, .. 1933년[마흔둘] 12월부터 나폴리 근처 포르미아 병원으로 옮겨졌다. 1935년[마흔넷] 8월 로마의 퀴시사나(Quisisana)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때부터 옥중소고 집필도 중단되었다. (172)
그의 형기 만료일은 1937년 4월 21일이었다. 그렇지만 집에 갈 수 있는 몸의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일주일 뒤 27일 46세의 나이로 병원에서 사망한다. 직접적인 사인은 뇌출혈이다. (173)
이탈리아 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냈고 한때는 최고 지도자이기도 했던 그람시의 장례행렬은 초라할 정도로 쓸쓸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 몇 년 전부터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접촉한 흔적도 없다. 그람시는 스탈린이 주도하고 있는 코민테른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는 이탈리아 공산당으로부터도 고립, 배제되어 있었다. (173)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표현도 그람시가 한말로 오해하는 이가 있다. 이 말은 그람시 구명운동을 펼쳤던 로맹 롤랑이 한 말이다. (173)
제3장 공장 평의회 운동(1919-1920)과 혁명적 정당의 문제 177
1) 운동의 조건과 실패 그리고 헤게모니 개념의 확대 177
졸의 전기에 따르면 노조 가입자가 1918년에 25만명에서 1920년에는 200만명으로 증대되었고, 1919년 11월 의원선거에서는 사회당이 현저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람시는 이 운동이 실패한 이후부터는 피지배계급 특히 농민의 동의나 파시스트 세력의에 반하는 다른 세력과의 통일전선전략(통전)을 중시하게 되었다. (177-178)
2) 주요실패 원인: 노조와의 갈등, 사회당 지도부의 무능 178
이탈리아 사회당(PSI)은 농민이나 농업노동자들(약 400만명으로 추정) 속에서 산업프롤레타리아(약 400만명)의 동맹자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 군대내에서도 별로 이렇다할 활동을 하지 않아았으며 ... 도시의 프티부르주아와 제대한 장교집단을 소외시[켰다.] .. (180)
3) 공장평의회 운동 실패이후 농민과 혁명정당에 관한 사색 180.
1920년 4월 튜린 파업이 실패한 후 9월에 다시 여러 지역에서 소요가 발생하긴 했다. .. 혁명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과 혁명이 내리막길로 가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 경제 불황에 대한 두려움은 혁명운동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불황은 혁명의 계기 될 수도 있고 혁명의 열기를 식히게 하는 원인이될 수 있다. 지적, 도덕적 지도의 문제, 헤게모니에 관한 언급이 그람시 사상에서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80-181)
[튜린의 실패: 개량주의자들의 입지만 강화] 이 경험들은 노동자가 다른 집단 특히 농민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명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이르게 했다. (182) [이탈리아의 지리적 환경의 특수성이 아닐까? 남부의 농업과 북부의 공업, 그 중간에 위치한 튜린지방?]
제4장 당노선문제: 그람시와 보르디가의 차이 그리고 코민테른과의 관계 251
1) 당노선 차이와 공산당 창당 251
보르디가는 1912년 청년 사회주의자 대회에서 지식인의 영향을 부정하고, 교육과 학습을 강조하는 그람시의 입장을 비판했다. (182) [보르디가 23살, 그람시 20살(대학2학년), 둘 사이에 대립이 있었고 1919년에는 분당이 있을 때 레닌은 보르디가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레닌은 분당과 관련해서는 보르디가를 지지했지만 당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와 관련해서는 그람시를 지지했다. “1920년 7월 코민테른 대회의 이탈리아 대표단이 좌와 우를 불문하고, 그람시 비판자들로만 구성되고 그람시 그룹의 인물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그들 대표단이 무척 당황할 정도로 레닌이 이 대회에서 새로운 질서지, 특히 거기 실린 그람시의 소논문 「사회당의 쇄신을 위하여」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임스 줄, 40쪽)
2) 코민테른의 결정, 그람시와 보르디가의 차이 184
1922년 11월 2일에 열린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이탈리아에 내세운 전술은 공산당과 사회당의 연합이었다. 그람시는 이에 동의 했지만 보르디가는 이 전술을 추종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르디가는 코민테른에서 퇴출되고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질적 지도가 된다. (184)
1921-1926년의 시기는 공장평의회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기대했던 유럽혁명이 가까운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현실에 직면해야 할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로서는 진지전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할 때였다. (184)
3) 보르디가와의 견해 차이 지속 184
보르디가는 ..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있을 뿐 .. 그람시는 .. 당대회를 앞두고 오랜 기간 지방을 순회.. 이때 조반니 파리나(Giovanni Farina)가 기억해냄 그람시의 말.. “현재 이탈리아 인민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해서 싸우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84-185)
1926(서른다섯)년 1월 그람시는 프랑스 리용에서 열린 이탈리아 공산당(PCI) 전국대회에 참석해서 연설했다. 여기에서는 그람기가 초안을 작성한 ‘리용 테제’가 채택되었다. 보르디가(1923년 6월)된 후 그람시는 사실상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가 된다. (185)
이때 당은 보르디가가 주장한 것처럼 대중과 분리된 노동계급 운동의 한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람시는 ‘아래’ 즉 대중으로부터 통일전선을 통해 대중에 침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185) [안에서 즉 심층에서부터, 리좀의 연결, 그리고 활동의 확대가 필요하다. (49WLB)]
4) 스탈린 눈 밖에 난 그람시 185
소련에서 권력투쟁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트로츠키가 정치국에서 배제되고 지노비예프는 인터네셔널의 의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지노비예프의 자리에는 부하린이 앉았다. 카메네프도 정치국에서 추방되었다. 부하린은 이로부터 약 2년 6개월 뒤인 1929년 4월 정치국과 인터내셔널 의장단에서 제명되었다. (186)
1928년 7월 7일부터 9월 1일까지 열렸던 이 대회[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는 ‘우익적 국면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186)
톨리아티가 주재하는 이탈리아 공산당 월간지 노동자국가는 파리에서 인쇄되었는데, 1929년 3월호의 논설 「우리 당내에서 기회주의의 위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7) [좌우 합작에서 좌파 독자노선 강조이다. 이 시기가 세계 공황의 시기이다. 공황이 전쟁으로 치닫는 시기로 넘어갈 때, 나치와 일제가 등장하면,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코민테른은 1935년 7-8월에 열린 제7차 대회에서 기존의 방침을 변경한다. ‘세계 인민의 가장 위험한 적인 파시스트 제국주의자와 투쟁을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잠시 미루고 노동자 농민 이외에도 독립[자유]을 바라는 모든 계층과 연합하기로 노선을 바꾸었다. 중국공산당이 집요하게 추구했던 통일전선전술을 베트남 공산당도 받아들였다. 통일전선전술과 관련하여 레닌은 멘셰비키가 ‘노동계급의 힘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 절대자수인 ‘농민과 노동자가 계급 동맹을 맺어 노동자, 농민의 정권을 즉각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187) [전선이 형성될 때 전술은 각 나라의 환경과 역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현시국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49WLB)
1936년 2월 스페인 상황 ... 총선에서 사회당, 좌익 공화파, 공산당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473석 중 289석을 확보하고 토지개혁을 포함한 혁명적 정책들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188)
에릭 홉스봄은 그람시를 두고 “무솔리니가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스탈린으로부터 구출된 그람시”라는 표현을 했다.
제5장 로자 룩셈부르크와 트로츠키에 대한 입장 257
1) 로자 비판: 자생론은 경제주의, 경제결정론 189
로자가 쓴 팸플릿 대중파업(1906)(이탈리아어 1919) ../.. 로자의 초기 논문 「맑스주의의 정체와 진보」(1928년 프랑스어로 번역) .. 그람시가 이것들을 읽었다. (189)
그러나 그람시는 대중파업(1906)을 경제결정론의 하나로 보면서 비판한다. (190)
2)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과 한계 191
그람시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연속혁명’이라는 .. 공식은 ... ‘시민적 헤게모니’라는 정식 속으로 극복된다. 군사기술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정치기술에도 일어난다. 곧 기동전은 갈수록 더 진지전이 되며 국가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평화로울 때 전쟁에 대해 세부적이고도 기술적으로 준비하여야만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정치에도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옥중수고1, 286쪽) (191) [들뢰즈에서 국가가 전쟁기계라고 하는 것은 경계를 둔 대립(모순)이 분명하다. 그런데 정치에서 대립의 경계가 평시에 불분명하다. 그람시에서 정치는 전쟁(대립)을 대비한 경계구분의 기술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간다. 들뢰즈에서 부분의 강도와 밀도가 준비일 것이다.(49WLC)]
그람시는 러시아에서 적합한 혁명 전술이 기동전(war of maneuver)이라면 서구에서는 진지전(war of position)이 적합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1)
“1848-49년 공식화된 ‘자코방적’ 슬러건(연속혁명)의 복잡한 운명은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이 슬로건은 피르부스 스론슈타인(트로츠키) 그룹이 다시 취하여 체계화하고 발전시키고 사변적으로 만들었는데, 1905년과 그 이후에 생동감이 없고 비효과적임이 증명되었다. ...”(옥중수고2, 111-112쪽) (192)
연속혁명론은 긍정적 입장에서 자코방적 슬로건일 수 있는데 이러한 슬로건은 현실적이면서 살아있는 역사에 부합하는 형태로 적용한 것은 트로츠키 그룹이 아니라 볼셰비키 그룹이라는 것이다. (193)
트로츠키는 1906년 결과와 전망에서 연속혁명론을 주장했는데, 1903년 나온 연속혁명론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의 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불가결하며, 또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세계 혁명, 적어도 유럽 제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의 생각은 러시아만으로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과 대립했는데, 그람시가 보기에 레닌도 일국사회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으며, 레닌에 비교적 충실했던 그람시는 트로츠기의 연속혁명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193)
“운동의 연속적 성격에 대한 브론슈타인의 이론이 기동전 이론의 반영이 아닌가 – 다시 말하여 궁극적으로는 국민적 생활구조가 아직 미숙하고 느슨하여 ‘참호 또는 요새’가 될 능력이 없는 나라의 일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조건을 반영한 것 –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경우 겉으로는 ‘서구적’이었던 브론슈타인(트로츠키)은 사실상 세계시민적일 뿐, - 곧 피상적으로 민족적이고, 또 피상적으로만 서구적 유럽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일리치(레닌)는 심오하게 민족적, 유럽적이었다.”(옥중수고1, 278-279쪽) (193-194) [이 흥미로운 표현에서 트로츠키는 상층적으로 세계 시민적이며 표면에서 서구적이고 유럽적이라 하며, 레닌은 심층적으로 민족적이고 유럽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유럽적이라는 것이 민족국가들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서구적이란 피상적 코스모폴리탄이란 말인가? /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의 영향인데 비하여, 서유럽은 로만카톨릭이다. 그러면 중간에 위치한 앙글로 색슨(영국과 독일)은 루터파와 성공회 영향이란 말인가? (49WLB)]
제6장 조합주의를 넘어서는 헤게모니 개념 260
헤게모니 개념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강제(force)와 동의(content), 지배와 지도라는 말은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핵심어인데, 일반적으로 헤게모니는 동의에 의한 지배 또는 지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 [루소의 일반의지와 자유의지 사이에서 자유의지의 동의에 의한 강제가 있다. 동의에 의해 강제력을 갖는다. / 현재 국회는 동의에 의한 강제를 행사하려 하는데, 국가 제도를 등에 업은 김기춘부류(박근혜는 좀비니깐 빼놓고)가 강제를 행사하려 한다. 여기에서 특검의 활동이 경계를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특검은 검사부류의 일부에서 나와서 제도에 맞출 경우에 인민의 동의에 의한 국회의 지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49WLC)
“이제는 고전적인 것이 된 의회제도라는 지형 위에서 ‘정상적인’ 헤게모니 행사는 강제와 동의의 결합을 특징으로 한다. 이 양자는 상호 간의 균형을 취하여 강제가 동의 측면을 과도하게 앞지르는 일이 없게 한다.”
그람시는 맑스주의자이자 혁명가이다. 그에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헤게모니 개념을 설명할 때 이를 조합주의와 대립시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게 조합주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머무는 것이다. (197)
“한 사회집단은 통치권을 획득하기 전에 이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또 발휘해야 한다. (...) 그러다가 그 집단이 권력을 행사하게 될 때, 그 집단은 지배력(dominant)으로 된다. 그러나 그 집단은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할지라도 계속애서 ‘지도’해야 한다.”(옥중수고2, 78쪽) (198)
“헤게모니가, 헤게모니 안에 포섭되어야 할 집단들의 이해관계와 경향을 고려하여 어떤 타협적인 균형을 형성하는 것, 다시 말해 지도적인 집단이 경제적 조합주의적 측면에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옥중수고1, 180쪽) (198) [포섭되어야 할 집단 = 지도적 집단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측면에서 희생을 감수 해야 한다. / 논자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피지배집단이 지도 집단이 되려면 조합주의를 넘어서야 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 이는 일차대전에 자국 노동자들이 환경이 좋아질 것이라고 해서 ‘프롤레타리아’는 조국이 없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을 무시했다. // 내가 말한다면, 자본가는 조국이 없다. 동일자가 어느 곳에서도 동일하다. 인도주의자도 조국이 없다. 이질자로서 인민은 관대하고 자애롭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이기심의 극한에서 구경꾼이며, 후자는 행위 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감동)하는 인간 본성의 이타심을 발휘하는 자이다. / 동일자는 차이 위에 정립하고, 이질자는 차이와 더불어 산다. 전자는 사고에서 각 동일자들(이데아)가 동시에 성립한다고 하고, 후자는 사유에서 공간상 둘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존립으로 연대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일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은 구경꾼의 부당한 이익을 폭로하고 그들의 사죄를 받기 위해, 인민의 의지에 의한 단죄와 회수가 우리 역사에도 한번은 있어야 한다. (49WLC)]
제1차 대전이 발발하고 제2인터내셔널이 깨진 이유 중 하나는 자국 노동자들의 이익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198)
제7장 주체형성과 실천의 문제 199
역사의 무대에 철의 시간표는 없다. 그람시는 맑스의 사상적 권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자본이 경제주의적 편향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람시는 반(反)맑스주의자가 아니다. 멘셰비키나 제2인터네셔널의 맑스주의를 거부하면서 맑스주의가 새롭게 태어나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람시는 맑스를 그리스도에, 레닌을 바울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그리스도가 세계관이라면 바울은 세계관의 조직가, 행동가, 확장가이다(옥중수고2, 239쪽). 그람시는 의식의 상대적 자율성이나 의식이 토대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레닌을 실천가로서 높이 평가했다. (199)
그람시는 토대와 상부구조는 하나라고 하는 역사적 블록개념을 쓰는데, 여기에는 상부구조가 토대의 단순한 부수연상이 아니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중층 결절(over-determination; surdétermination)을 말하는 ‘구조주의자’[후기구조주의자] 알뛰세르는 경제결정론을 거부했던 그람시를 종종 높이 평가하곤 했다. (200) [맑스를 정치경제학자로 보느냐 경제학자로 보느냐고 하면, 학문적으로 경제학자이다. 그럼에도 정치에 필수요건으로써 경제를 또는 (문화와 학문이라기보다)경제의 생산양식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정치학자이다. (49WLC)]
그람시의 실천철학은 [역사의 관점에서] 절대적 역사주의, 절대적 인간주의이기도 한다. .. 한편 실천철학은 어떤 형태의 초월에 대해서도 조리있게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배제일 뿐만 아니라 내재주의(immanentism)이기도 하다. (200) [논자의 평가인데, 우리가 보기에, 내재주의는 또 다른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의 두종류가 있다. 상층과 심층이다. 그리고 표면에 두 시뮬라크르가 있다. (49WLC)]
그람시는 ‘(지적) 엘리트의 필요에 관해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람시는 엘리트주의자 인가? 대단히 조심스러운 문제다. 왜냐하면 엘리트에 관한 파레토, 모스카, 미헬스 등의 이론은 파시즘의 사상적 원류가 되거나 파시즘에 협조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람시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며, 오늘날의 다원론자(pluralist)와 다르다. (202)
문화론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도 언급할 만하다. 당시에는 라디오나 영화가 급속히 청중을 늘려가고 있었는데, 그람시는 구적 또는 시각적 문화 형태보다는 문어적 형태를 선호했다. (203)
모든 이의 민주주의, 모든 사람을 위한 정치라는 것은 없다. 그람시는 모은 사람이 지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이지 현실이 아니다. 그의 지식인론, 당론은 실천하는 주체에 형성과 관련된 이론이기도 하다. 바디우(Alain Badiou, 1937-)가 말하는 결단하는 주체, 후(後)사건적 주체는 인간 일반이 아니다. 누구나 후사건적 주체가 될 수 있지만 누구나 후사건적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람시가 말하는 주체는 의지를 갖고 결단하는 주체이도 하다. (204)
* 참고문헌 205
* 더 읽어볼 책 205 (49WLI)
**** * * * 인명 ** ***
바디우(Alain Badiou, 1937-) 프랑스 철학자. 알뛰세의 영향하에 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 1889-1970) 이탈리아 공산당 창건자. 그람시와 대립관계이다.
조반니 파리나(Giovanni Farina, 1892–1979) 이탈리아 정치가
주세페 피오리(Giuseppe Fiori, 1923–2003) 이탈리아 정치가. Vita di Antonio Gramsci, 1966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지도자와 사상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이며 지도자.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서 투옥되었다. 그는 문화 및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비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젠나로 그람시 안토니오의 형 / 카를로스 그람시(Carlos Gramsci, ) 안토니오의 동생.
퀸틴 호어(Quintin Hoare, s.d.) 영국 좌파 지식인, 잡지 New Left Review 편집장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 “The Great Gramsci” New York Review of Books, No5, April 4. 1974.
제임스 졸(James Bysse Joll, 1918–1994) 영국 역사가, 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Europe Since 1870: : an international history, 1983)
카메네프(Lev Borisovich Kamenev, 1883-1936) 러시아의 정치가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원으로 혁명운동에 가담하였고 볼셰비키 최초의 정치국 국원,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등 당과 정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후에 반(反)스탈린파로서 숙청.
레닌(Lénine Ленин, Vladimir Ilitch Oulianov, 1870-1924)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 혁명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자,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로 인정받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흔히 알려진 니콜라이 레닌이라는 이름은 혁명가로서 그가 사용하던 가명이다.
마르토프(Yulii Osipovich Martov, 1873-1923) 러시아 혁명가, 멘세비키 지도자인 마르토프 는 노동계급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체카의 권력 남용 및 레닌과 트로츠키의 '권력 집착'을 비난했다.
맑스(Karl Marx, 1818–1883)
미헬스(Robert Michels, 1876-1936) 이탈리아 사회학자. 독일계 이탈리아 로마 태생.
모스카(Gaetano Mosca, 1858-1941 (à 83 ans) 대학교수, 철학자, 정치과학 전공, 기자 및 정부 고위직을 지냈다. ,
무솔리니(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1883-1945) 파시즘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정치인
제프리 노웰 스미스(Geoffrey Nowell-Smith, s.d.) 영화 철학 강의..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 이탈리아 사회학자 경제학자. ,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 프랑스의 문학가, 사상가. 로마 유학 Jean-Christophe, 1904-12) .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또는 혁명가이며, 레닌주의 비판자이다.
유제니 슈히트(Eugenia Schucht, s.d.) 처음 만나 여성,
줄리 슈히트(Giulia Schucht) 그람시 부인, 소련에 머물고 있었고, 신경쇠약 환자였다.
타티아나(Tatiana Schucht) 슈히트 쥴리의 언니 로마대학에서 자연과학 공부하고 로마에 머물렀다.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 1898-1983)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네오리카도 학파(Neo-Ricardian School)의 이론을 처음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네오케인즈학파(Neo-Keyensian School)의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소련 공산당 서기장(1922-1953)과 국가평의회 주석(1941-1953).
톨리아티(Palmiro Michele Nicola Togliatti, alias Ercole Ercoli e Mario Correnti, 1893–1964) 이탈리아 정치가, 반파시스트,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를 지냈다.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 소비에트 연방의 전 해군 군사인민위원(1918 - 1925),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노동운동가, 볼셰비키 혁명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지노비예프(Grigory Yevseyevich Zinoviyev, 1883-1936), 유태계,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가이다. 레닌 사후 소련공산당을 이끌었으나, 스탈린에게 숙청되다.
#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년보
1891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이탈리아 출생, 비교적 안락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Francesco Gramsci, 1860-1937)는 등기소 소장이었다. 어머니 페피나(Giuseppina Marcias, 1861-1932).
형 젠나로 그람시, 동생 카를로스 그람시
부인 줄리 슈히트 처형 타티아나 슈히트(그람시의 옥바라지를 했다)
친구 피에로 스라파
1898(일곱) 아버지가 공금횡령, 수뢰, 공문서 위조 등 혐의로 구속되었다. ..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의 아버지가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되지 않으면서 일종의 정치 보복성 감사를 받았다. 이때부터 가난하였다.
1912년 그람시 튜린대학 2학년. 주세페 피오리가 쓴 전기에는 그람시가 사회당과 접촉한 것은 1913년이라 한다.
1919년 3월 제3인터네셔널이 창설되었을 때 이탈리아 사회당(PSI)은 대표를 보내지 못했지만 즉각 가입을 선언했다. / 1919 제3인터내셔널: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1919-1943)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를 코민테른(Comintern)이라고도 한다.
1920년 4월 튜린 파업이 실패한 후 9월에 다시 여러 지역에서 소요가 발생하긴 했다.
1922(서른하나)년 6월 코민테른 집행위원 자격으로 모스크바에 간적이 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근교 병원에서 몇 달간 휴양을 했다. 그곳에서 유제니 슈히트라는 환자를 만났다. 그의 동생이 줄리 슈히트이다.
1922년 10월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다.
1922년 11월 2일에 열린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이탈리아에 내세운 전술은 공산당과 사회당의 연합이었다. 그람시는 이에 동의 했지만 보르디가는 이 전술을 추종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르디가는 코민테른에서 퇴출되고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질적 지도가 된다.
1924년 6-7월 코민테른 5차 대회; 민주주의적 자유를 회복한 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간다는 식이다.
1924년 사회당 의원인 마테오티가 국회에서 파시스트 정부를 공격하는 연설을 한 뒤 유인되어 암살당했다.
1926(서른다섯)년 1월 프랑스 리용에서 열린 이탈리아 공산당(PCI) 전국대회에 참석해서 연설했다. .. 사실상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가 된다.
- 그람씨는 <리용 테제>에서 5만의 당원 모두에게 ‘하방’을 지시합니다. “오늘 이후 모든 당원들은 아래로 내려간다. 공장으로, 학교로, 농촌과 도시의 협동체로, 인민의 전선으로”라고 선언합니다.
1926년 11월 8일 무솔리니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종의 구데타를 일으켰다.
1926(서른다섯) 11월 28일 로마에서 체포되었다.
1928년 7월 7일부터 9월 1일까지 코민테른 제6차 대회. 이 대회에서는 ‘우익적 국면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1928(마오: 서른다섯)년 마오쩌동과 주더는 토지의 균등한 분배와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9(서른여섯)년 1월에 적군의 공격을 받아 징강산을 벗어난 푸젠성(福建省, 복건성)으로 후퇴하면서, 홍군의 유랑생활(長征, 장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생활은 1935년 연안(延安)에 정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32년 12월 30일 어머니 사망, 그 소식을 그람시에게 알리지 않았다.
1933(마흔둘) 12월부터 나폴리 근처 포르미아 병원으로 옮겨졌다. 주세페 피오리는 포르미아 병원에서 생활을 ‘보석 아닌 보석 상태’로 기록하고 있다.
1934(마흔셋) 10월 29일 형식적으로 “보석”으로 되어 있으나 이동할 자유는 없었다.
1935(마흔넷) 8월 로마의 퀴시사나(Quisisana)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때부터 옥중소고 집필도 중단되었다.
1937 4월 21일 그의 형기가 만료되었다.
1937(마흔여섯) 4월 27일 사망했다. 사인은 뇌출혈로 되어 있다.
1937 그람시 사망 2주일 후, 그의 아버지 77세로 사망.
(49WLI)
첫댓글 위기는 바로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이다.
이러한 공백기에 대단히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 -『옥중수고』중에서